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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미타불 광명으로 밝히는 연등(http://cafe.daum.net/buddha01) 이라는 카페에 '마음 닦는 법'이라는 좋은 글이 있어서 감히 모셔왔습니다.
금강경 독송회에서 나온 소책자인데 참으로 좋을 말씀이라서 권해드리고 싶습니다.
여러불자분들께 도움이 될 것 같아서 가져왔으니 길더라도 시간을 내셔서 꼭 읽어보셨으면 합니다.
만약 읽어보시고 마음에 드시면 더 찾아서 수행해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스마트폰으로도 다운받아서 틈틈히 볼 수 있게 pdf파일로 첨부했습니다.
나무아미타불 _()_
마음닦는 법
목차
'마음 닦는 법'이란?
마음 살림살이
육 바라밀
마음 닦는 법
무재칠시
복에 대하여
몸에 대하여
인간관계에 대하여
사회생활에 대하여
왜 마음을 닦아야 하는가
어떻게 마음을 닦을 것인가
삶의 목표
복 짓는 마음
'마음 닦는 법'이란?
동국대 총장을 역임하셨던 고 백성욱 박사님 밑에서 함께 수도하던 제자 김재웅 법사가 이끄는 금강경 독송회에서 나온 소책자입니다.
우리 불자들이 읽고 마음 갈무리하는데 많은 도움이 될 것으로 여겨져 여기에 올립니다.
백성욱 박사님
마음 살림살이
1. 남의 허물은 내 허물처럼 덮어주고, 내 허물은 남의 허물처럼 파 뒤집는 마음을 연습하라.
2. 남의 허물이 보이면 그게 곧 내 허물인 줄 알라.
3. 상대를 부처님으로 보는 마음을 연습하라.
4. 누가 뭐라든 "예" 하는 긍정적인 마음을 연습하라.
5. 누구를 만나든 베푸는 마음을 연습하라.
6. 올라오는 마음을 미륵존여래불[미륵불] 전에 바치는 마음을 연습하라.
육 바라밀
1. 보시(布施) : 남을 대할 때는 주는 마음으로 대하라. 그리고 보수 없는 일을 연습하라.
‘이것이 탐심(貪心)을 제거하는 보시바라밀이니라.’
2. 지계(持戒) : 미안에 머물지 말라. 후회하는 일을 적게 하라.
‘이것이 진심(瞋心)을 제거하는 지계바라밀이니라.’
3. 인욕(忍辱) : 모든 사람을 부처님으로 보라. 부처님의 인욕을 배우고 깨쳐볼 일이니,
‘이것이 치심(痴心)을 제거하는 인욕바라밀이니라.’
4. 정진(精進) : 이 세 가지는 사람으로 세상을 대하는 법이니, 옳거든 부지런히 행하라.
‘이것이 정진바라밀이니라.’
5. 선정(禪定) : 이러한 과정으로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마음이 안정되나니,
‘이것이 선정바라밀이니라.’
6. 반야(般若) : 이것이 익숙해지면 마음이 편해지고, 지혜가 나고, 일에 대해 의심이 없나니,
‘이것이 반야바라밀이니라.’
마음 닦는 법
미륵존여래불을 마음으로 읽어서 귀로 듣도록 하면서
당신의 생각은 무엇이든지 부처님께 바치는 마음을 연습하십시요.
자신이 가지면 병이 되고, 참으면 폭발됩니다.
이것이 닦는 사람의 항복기심(降伏其心)이라,
아침저녁으로 금강경을 읽으시되 직접 부처님 앞에서 마음 닦는 법을 강의 듣는 마음으로 배워 알고,
실행하고, 습관이 되도록 하십시요.
그리고 육체는 규칙적으로 일하시고, 정신은 절대로 가만 두십시요.
이와 같이 100일을 되풀이하여 대략 10회 가량이면 자기의 숙명통이 나고, 타인의 숙명도 알 수 있나니,
이것은 아상(我相)이 없어진 연고입니다.
이것이 초심불교의 행상(行相)이라고 할까요?
주의하실 일은,
공부하겠다고 하면 탐심, 공부가 왜 안 되느냐고 하면 진심, 공부가 잘 된다고 하면 치심이니,
이 세 가지 아니하는 것이 수도일진대, 꾸준히 하되 안 하지만 말면 됨이라.
고인(故人)은 사가이면면 불가이근근(斯可以綿綿 不可以勤勤)이라 했지요.
무재칠시
재물이 아닌 마음으로 하는 7가지 보시
1. 화안시 : 항상 얼굴에 화색을 띠는 보시
2. 언사시 : 말에 친절을 담는 보시
3. 심 시 : 따뜻한 마음으로 남을 대하는 보시
4. 안 시 : 눈에 호의를 담는 보시
웃는 눈빛으로 상대를 보는 보시
5. 지 시 : 물으면 친절하게 이것저것 잘 가르쳐 주는 보시
6. 상좌시 : 앉은 자리를 남에게 양보하는 보시
7. 방사시 : 가족이나 남에게 잠자리를 깨끗하게 제공해 주는 보시
(* 찰 시 : 묻지 않고 상대방의 마음을 헤아려 필요한 것을 제공해 주는 보시)
복에 대하여
복(福)에 대하여
◆ ◆ ◆
모든 사람이 잘 살기를 원하나 잘 살 원인을 지어야 한다.
부단히 복 짓기를 원 세우고, 실행이 이어지면 자기의 복 그릇이 커진다.
또 물질을 소중하게 여기는 마음이 바로 복이 된다.
돈을 헤프게 쓰면 돈의 신이 나간다.
음식도, 전기도 무엇이든 중하게 여겨 절약하는 마음에 복이 온다.
복은 누구에게 달라 하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지어야 하고, 지은 만큼 받을 뿐이다.
◆
사업을 시작하기 전에는 우선 자기의 복력을 깨쳐 보아야 한다.
돈이란 복력에 의해 벌어지는 것이지 의욕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일에 대한 탐심[욕심 내는 마음], 즉 무슨 일이든 하겠다는 마음을 내서는 안 된다.
나의 체력 · 능력 · 시간으로 할 수 있는 것인지 생각해 보고,
불가능하다면 시간과 여유를 두어서 하여야 한다.
무조건 밀어 붙인다고 일이 되는 것이 아니다.
일을 할 때에 마음이 조급하면 마음의 탐심 때문에 반드시 실패한다.
그 때는 그 마음을 [부처님께] 바치고 금강경을 읽거나 마음을 쉬게 하여
원을 세운 다음 다시 시작하여야 한다.
일은 마음이 성취하는 것이지, 육신이 간다고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마음이 급해서는 되는 일이 없으니, 그 마음을 쉬게 하여
탐심을 깨쳐야만 일이 쉽게 이루어진다.
◆
장사하는 이가 장사가 안 될 때, 손님이 없다고 하는 그 짜증난 마음을 안고 있으면
그 한 마음이 일으킨 파장이 가게 안팎을 짜증스런 분위기로 가득 채워서
손님이 오고 싶다가도 그 파장을 느끼면 예민한 것이 사람의 마음이라 오지 않게 되며,
온다 해도 얼른 나가게 된다.
짜증스런 마음이나 궁리를 바치는 것이 손님을 부르는 실행이다.
또 장사가 안 된다는 생각은 금물이다.
그런 말은 입밖에 뱉지도 말고, 누가 물을 때도 잘 된다고 하는 것이 좋다.
그리고 실제로 잘 된다고 하는 것은 자기 마음 연습이 일을 성취하기 때문이다.
◆
이 우주의 삼라만상이 펼쳐지는 것은 그대 마음 닦은대로의 표현이다.
그대가 집착할 때 우주는 그대로 컴컴해지고,
그대가 집착에서 벗어날 때 우주는 그대로 밝다.
이 우주는 모든 것을 갖추고 있다.
사람들이 구하는 것은 다 충족되어 있다.
그런데 구하지만 안 되는 이유는, 스스로의 마음 속에 "안 된다' 하는 진심(瞋心)이 있기 때문이다.
마음에 "안 된다"는 진심이 없으면 일은 다 되어진다.
◆
도통도 사전의 준비가 있어야 이루어지듯,
세상 모든 일이 준비성 있는 원과 행동으로 이루어지는 것이기에,
아무리 어려운 일이라도 그에 상응하는 철저한 준비를 해 둔다면
그 일에 임해 여유가 있고, 성공시킬 수 있을 것이다.
◆
배우자를 구하거나 친구를 사귈 때, 또는 사원을 고용할 때도 복이든 지혜든 같은 정도끼리 모인다.
말 그대로 유유상종이다.
부모를 만나는 것도, 장사가 잘 되고 못 되는 것도 복 지은 정도에 달려 있다.
복력에는 한 치의 오차도 없다.
다 자기의 복 지은 정도 만큼 받고, 또 만나는 것인데, 누구를 원망하고 탓할 것인가?
그러니 오늘과 내일을 위해서 '부처님 전에 복 많이 짓기를 발원'하고 부지런히 원 세울 일이다.
원을 세우면 복을 지어야 하겠다는 자각이 생기고, 또 복을 지을 수 있는 여건이 생긴다.
◆
하고 싶거나 안 되는 일이 있을 때는 원을 세운다.
자기의 복에 넘치는 것은 이루어지지 않지만
자꾸 복을 지어서 그 일이 이루어질 만큼 복이 차면 원은 꼭 이루어진다.
부처님 법이 참으로 불가사의한 것이, 아무리 자기의 마음에 없는 말이라 해도
부처님 앞에서 크고 밝은 원을 세우면 그것이 결국에는 현실로 되는 것이다.
◆
자기 복은 남 주질 못하고, 남의 복은 자신이 갖지를 못한다.
수양산 그늘이 강동 팔십 리라는 말이 있듯이, 가족 중에 한 사람이라도 복 지은 이가 있다면
그 복력의 혜택을 여러 사람이 입는다.
그러나 복을 남에게 줄 수는 없다. 짓지 않은 복은 있을 수 없다. 복은 즐 지어야 한다.
또 재앙이 닥치면 복 그릇에 구멍이 뚫리므로 아침저녁 금강경 잘 읽고,
방심치 않는 마음으로 잘 바쳐야 담긴 복이 유지가 된다.
◆
봉급을 받을 때마다 봉급의 3배를 그 회사에 벌어주는 마음으로 일했나 하고 되돌아 볼 수 있는 이는 현명한 사람이다.
모두 원인 지은 대로 결과를 받기 때문이다.
일을 꼭 그렇게 한다기 보다, 마음을 그렇게 한다면 모든 일에 세심한 신경을 베풀고 철저를 기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한 태도는 주위의 분위기에도 영향을 주어 본인과 함께 여러 사람들을 복 짓게 할 것이다.
그렇게 지은 복은 남이 받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받는다.
그러니 복 지었다고 생색 낼 필요도 없는 것이다.
◆
예전에 어떤 도인은 목말라 애타게 물을 구해 마시게 되면,
남은 물은 "목 마른 사람 먹어라" 하고 버리라고 하셨다.
그런 사람이면 다시는 목마른 보를 받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달게 물을 마시고 남은 물을 여지 없이 확 쏟아 버리는 마음은
다시 목마른 보를 받게 된다고 하셨다.
◆
필요치 않은 물건은 나누어주고, 보시는 갚을 수 없는 사람에게 하여야 한다.
갚을 수 있는 사람에게 보시를 하게 되면 보수나 공덕을 바라는 마음이 생긴다.
자신의 탐심을 닦기 위해 준다는 마음을 내되,
자신에 대해서는 철저히 하여야 한다.
무엇이든지 남에게 준다는 마음을 연습하여야
자신이 좋은 것을 받을 수 있는 원인을 현재에도 미래에도 심어가는 것이다.
◆
이웃과 더불어 밝고 후복해지려고 애쓰면 자기의 마음 그릇도 그만큼 크고 넓어진다.
그런 마음이 복 짓는 마음이고, 주인 마음이다.
◆
사람은 평생 먹어야 쌀 40가마니 밖에 먹지 못한다고 한다.
부자도, 가난한 이도 하루 세 끼 먹고 사는 것이니, 끝없는 탐심을 좇기보다
적정선에서 만족하고, 자신의 마음 닦고 복 지을 수 있는 이가 총명한 사람이다.
아무리 재산이 많다 해도 하루에 진실로 필요한 것은 간단한 의식주에 불과하고,
모두가 잠깐 동안 쓰다가 자연에 모두 맡겨두고 떠날 뿐이다.
◆
혹시 누군가에게 돈을 빌려주더라도 받겠다는 생각을 하지 말고 준다는 생각으로 빌려 주고,
그 뒤는 생각하지 말라.
물건을 줄 때에도 그 사람을 위해 주지 말고 부처님의 마음을 기쁘게 해 드리기 위해 주며,
아까워 하는 그 마음[탐심]을 닦기 위해 주어야 한다.
빈 마음이라도 부지런히 베푸는 마음을 연습하면 마음이 넓어지고,
물질에 대한 애착이 없어져 탐심도 닦이게 된다.
◆
부처님을 위해, 부처님의 마음을 기쁘게 해 드리기 위해 직장 생활을 하고 장사를 한다는 생각으로 일을 하게 되면 육신의 고통이 쉬게 된다.
◆
복은 마음에 짓는다.
부처님 전에 공양을 올릴 때는 올렸다는 그 마음에 복이 지어지는 것이다.
부처님 법을 옹호하는 일, 남에게 금강경을 읽도록 포교하고 인도하는 일,
부처님 도량을 만들고 가꾸는 일, 이런 것들이 모두 복 짓는 일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부처님 전에 복 짓겠다는 간절한 마음이 서고,
공경심과 환희심이 나는 순간 큰 복이 지어진다.
그리고 "나"라는 생각을 내지 않고, 부처님 기쁘게 해 드리기 위해 복 짓는 사람이 있다면
그이는 자기가 복 지었다는 그 한 생각마저도 부처님 전에 공양 올리리라.
◆
마음 닦는 이는 자신이 지은 복을 탐하지 않는다.
지은 복은 끈에 묶인 장난감처럼 당기면 언제든지 끌려온다. 시간에 관계 없이.....
복을 자신이 받을 마음을 내면 줄어들고, 부처님께 드리면 더 큰 복을 짓게 되어
마음에 부처님을 가득 증하게 된다.
이 때 마음은 밝아지고, 아상은 녹아 내린다.
* 증(證)한다는 것은 어떤 생각이나 느낌을 마음에 새겨 두는 것을 말한다.
마치 사진기가 모습을 찍어대듯이 마음에 어떤 인상을 그려 놓는 것이다.
그 증해진 것은 언젠가는 현실이 되어 풀려 나온다.
◆
살림하는 사람들의 마음에는 한 달에 얼마라는 액수로 살아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자리를 잡는다.
많은 사람들이 없다는 마음으로 살아가니 얼마나 마음이 절박한가?
증하고 닦지 않으면 궁하게 되고, 다음 생에도 궁한 생활을 하게 된다.
설혹 당장에 물건은 없더라도 "있는 마음"이면 마음에 넉넉한 여유가 있어
그 마음따라 물질이 풍족해진다.
사소한 생각들이 하나하나 쌓여서 내 안정의 바탕을 이루어간다.
궁한 마음은 절대 바치고, 넉넉한 마음을 연습할 일이다.
◆
중생의 마음은 먹는 데 있다.
어떤 사람이든 식사 대접을 받으면 마음이 누그러져 버린다.
대접하는 이의 푸근한 마음과 음식, 이 두 가지를 함께 대접받는 것이다.
그 때 주인의 마음에는 복이 지어지는 것이다.
그런데 도둑 천 명 밥 먹이는 공덕보다 착한 사람 한 사람,
착한 사람 천 명보다 마음 닦는 이 한 사람 밥 먹이는 공덕이 크다는 말이 있다.
또 도인에게는 무조건 빚을 지워놓으라는 말이 있다.
어느 생이든, 어느 지옥에 있든 제일 먼저 제도받게 된다고 한다.
그러나 정성어린 물건과 공경심으로 올리는 물건이어야 흔쾌히 받으시지,
그렇지 않은 물건은 잘 드시지도 않는다.
◆
법신불은 어디에나 계시니, 물건 올리는 곳이 법당이요,
공경심 내는 그 장소가 화장장엄세계이다.
물건이 모자라거나 더 가지고 싶은 마음이 생기면,
모두 부처님 전에 바치고 무엇이라도 부처님 전에 드리고 사용한다면
필요한 것은 언제든 생기는 무량대복이 지어진다.
보살이 부처님 전에 공양 올릴 마음을 내면 공양구가 손바닥에서 나온다고 한다.
수많은 생을 부처님 전에 공양 올린 공덕으로 마음만 내면 현실로 나타나는 것이다.
◆
무량대복이란, 평소에는 없다가도 그때그때 필요한 것은 무엇이든지 생기는 것을 말한다.
좋은 물건을 가지고 있으면 그것을 관리하느라 도둑 맞을까 걱정이지만,
필요할 때 필요한 만큼 생기는 무량대복은 뒷걱정이 없다.
마음에 "없다"는 생각이 없으면 얼굴이 온통 복스럽다.
무량대복은 없다는 생각을 닦고, 궁기를 해탈했으며,
부처님 전에 큰 복을 지은 사람이 아무리 받아도 바닥이 나지 않는 복을 말한다.
부처님에 대한 공경심, 시봉심, 광명의 세계에 대한 환희심,
부처님을 기쁘게 해 드리기 위해 몸과 마음을 드리고,
남의 성리(性理)를 밝혀 주려는 마음 등을 연습할 때 무량대복은 지어진다.
몸에 대하여
몸에 대하여
◆ ◆ ◆
사람들은 몸이 아프면 그것을 몸의 문제라고만 생각한다.
현재의 어떤 용심이나 과거생 업보업장 때문이라고는 거의 생각하지 못한다.
좋은 의사 만나고 좋은 약을 먹는 것은 임시방편이다.
그 원인을 철저히 바쳐야 완치가 되는 것이다.
몸이 아프면 마음까지 아파지는데,
아프다는 생각 때문에 고통이 더 심해지기도 한다.
비록 몸은 아프더라도 마음만은 잘 바쳐서 건강해야 할 것이다.
◆
사람이 화를 내고 짜증을 낼 때마다 마음에서 독심이 일어난다.
그 독심은 온 몸과 내장으로 퍼져, 심하면 얼굴과 손이 붓기도 한다.
마음의 악심이 가라앉지 않으면 지옥 중의 상지옥이고, 손에 닿는 것마다 망가진다.
◆
마음으로 일으킨 독은 탐심 쪽으로 뻗치면 위암 · 위궤양 · 위염 등의 소화기 계통으로 병이 나고,
진심 쪽으로 뻗치면 폐 · 기관지 계통에 이상이 온다.
머리에 부스럼이나 몸의 종기 등도 마음에서 일으킨 독심 · 악심이 뻗쳐 생겨난다.
몸살도 마음의 독이 원인이 되어 피로와 겹쳐 일어난다.
◆
진심[성 내는 마음]을 내면 재앙이 따라온다.
신체적으로도 백혈구가 오만 개가 파괴되고, 혈압이 상승하며,
눈이 침침해져 시력이 나빠지게 된다.
진심은 절대 바쳐야 한다.
◆
자기 육신 속에 혼이 같이 깃들여 있는 사람이라야 심신이 건강한 사람이다.
대개는 사람들의 마음이 바깥의 대상을 많이 향하다 보니
빈 육신만 끌어안고 사는 경우가 허다하다.
좋고 싫은 감정에 따라 마음이 분주하게 들락날락 오고 간다.
누군가를 보고 싶다거나 싫다거나 하는 그 마음에 대고 '미록존여래불' 하고 바쳐 보라.
그러면 좀 담담하게 느껴진다.
◆
육신에 대한 애착이 심하면 몸이 무겁고 천근만근의 무게로 느껴져
몸을 질질 끌고 다니는 경우도 있다.
육신의 착은 안락한데 찰싹 붙어, 편하고 쉬운 것만 좋아한다.
덥다는 마음도 정진을 해 보라.
그러면 몸은 좀 덥더라도 마음까지 덥지는 않다.
이게 한 생각으로 더 덥고 덜 더운 것이다.
무엇보다 이 몸뚱이를 거느릴 수 있어야 한다.
육신의 착을 닦아갈수록 몸이 가볍게 느껴지는데, 그건 그만큼 마음이 건강해진 것이다.
◆
힘이 들면 쉬어주는 것이 당연한데,
자신이 그 일에 무능하다거나 지쳤다거나 하는 생각을 부둥켜안은 채 쉴 필요는 없지 않은가?
부처님께 먼저 그 마음을 드리고, 가벼운 마음으로 쉬는 것이 좋을 것이다.
어떤 일을 하든지 일이 바쁘고 몸뚱이가 바쁜 것이지, 마음까지 그래서는 곤란하다.
바쁜 마음에 바치는 정진이 이어지면 행동은 민첩한 가운데 마음은 그냥 한가하다.
◆
지나치게 억누르거나 참으면 마음이나 신체에 부작용을 초래할 수 있다.
올라오는 마음을 정성껏 바치고, 그 마음과 육신을 다스릴 수 있는 사람이 능력자일 것이다.
◆
관상은 골상에서 나오고, 골상은 심상에서 나온다고 한다.
얼굴이 달라지려면 마음 씀씀이가 달라져야 한다.
27세가 되면 신진대사로 뇌세포까지 교체되어
태어날 때 가지고 온 육신과는 전혀 상관없는 몸을 이루어 부모로부터 완전 독립을 한다.
자신의 용심(用心)이 자신의 얼굴을 만들어 가는 것이다.
◆
과거생에 살생을 많이 한 분들은 병치레가 잦고 몸이 허약하다.
강도를 만나거나 교통사고 등 여러 가지 재앙도 우연같아 보이지만 결코 우연이 아니므로
자신을 위해, 자신이 시켜서, 또는 자신이 직접 하는 일은 피해야 한다.
부처님 말씀에, 이 지상에 존재하는 모든 이들이
나의 부모가 아니 되었던 분들은 한 분도 없다고 하셨다.
끝없이 인연 맺으며 계속 윤회하니, 전생과 미래의 부모형제들에게
늘 자비를 베푸는 사람이 밝은 사람이다.
◆
이 세상의 모든 일이 음탐심에서 시작된다고 보아도 틀리지는 않는다.
그러나 음탐심이 일어난다고 하여 그 생각을 기피하거나 혐오해서는 안 된다.
또 눌러 참으려 해서는 더욱 안 된다.
그 생각을 부처님께 바쳐 음탐심의 정체를 깨쳐야 하는 것이다.
그 한 생각 잘못 다루어 나쁜 결과를 초래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
지혜가 생기는 필요조건은 반드시 몸으로 부처님을 향해 복을 지어야 한다.
복이란 몸뚱이에 대해 부끄러움이 없는 것이며,
복 지은 결과는 세상을 대할 때 부드럽게 느껴지는 것이다.
이를테면 재앙이 사라진 상태이다.
무슨 생각이든 부처님께 바치고, 무슨 일이든 부처님 즐겁게 해 드리기 위한 마음으로 일한다면
몸으로는 복 짓는 것이고, 마음이 부드러워져 평화를 얻게 되고, 지혜를 밝힐 수 있다.
◆
몸뚱이 착이 많을 때는 올라오는 감정의 지배를 더 많이 받는다.
몸뚱이 착에서 벗어난 이라야 참 자유인이다.
그러하기에 내 마음 닦은 만큼, 또 부처님께 마음을 비운 만큼 나는 자유롭다.
◆
수행자는 묵묵히 부처님을 향해 복을 짓되, 슬기롭게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면서
"난 뭐란 말인가?" 하는 생각이 들 때는 깜짝 놀라 그 생각을 부처님께 바쳐야 한다.
세속에 살며, 자기에게 닥친 일이나 주어진 일을 피하려 하지 않고
그 일로 인연하여 올라오는 생각과 분별은 무엇이든 부처님께 바치고,
부처님 시봉하는 마음으로 행한다면 세속의 일이지만 부처님의 일이 된다.
지혜는 몸뚱이 착을 닦아 저절로 나오는 것이지,
닦는 장소가 따로 있거나 이러저러한 형식이 있어 나오는 것은 아니다.
◆
세상을 다 이해하면서도 얽매이지 않는 것.
이것이 세간의 불법이며, 탐심을 깨치는 방법이다.
탐심을 깨침으로써 경제활동의 원리를 이해할 수 있으며,
진심을 닦음으로써 올바른 법과 도덕에 도달할 수 있다.
세상의 어떠한 직종에 있더라도 우선 자신의 몸뚱이 착을 닦는데 목적을 두어라.
그러면 지혜가 밝아져 자신이 세상의 주인공이 될 것이다.
◆
부처님께 무엇을 얻겠다는 마음보다도 뭐든지 드려 보라.
밥도 먹기 전에 먼저 드리고, 배고픈 마음도, 답답한 마음도, 괴로운 마음도 다 드려 보라.
누군가에게 주는 마음을 연습하면 받는 사람보다도 자기 마음이 더 기쁘고 든든한 법이다.
하물며 부처님께 드리는 것임에랴!
◆
우리는 이 육신을 위하고 자신의 소원 성취를 위해서 공부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러나 마음 닦는 자리는 바로 '나'라는 아상을 없애는 자리이다.
스스로에게 한 번 이렇게 물어보라.
나는 과연 부처님을 위해서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부처님께 무엇을 드릴 수 있는가?
그런 마음이라도 낼 수 있는가?
이 한 생을 사는 동안 탐심과 진심과 치심은 얼마나 닦았는가?
부처님 전에 지은 복은 또 얼마나 되는가?
죽을 때 누구 앞에서라도 떳떳할 수 있는 그런 삶을 지금 살고 있는가?
죽을 때 가지고 가는 것은 마음 닦은 것과 복 지은 것 뿐이라는 준엄한 법문이 계시다.
◆
나란 놈의 실상은 몸뚱이 착이다.
몸뚱이 착은 일정치 않아 항상 무엇인가 하겠다고 설친다.
그러다 그것이 뜻대로 되지 않으면 성내고 한탄하기 일쑤이고,
되는 듯하면 좋아서 어쩔 줄 모른다.
이처럼 몸뚱이 착은 어디든 잘 달라붙지만,
부처님께 바치는 마음에는 업보가 없기 때문에 달라붙질 못한다.
◆
이 몸뚱이 있는 한 부모는 절대이다.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것은 몸뚱이 착의 연장이라 별 공덕이 안 되지만
자식이 부모를 공경하는 것은 몸뚱이 착을 거스르는 것이어서 공덕이 크다.
◆
무슨 일을 해야 할 때 꼭 해야 한다는 생각을 안지 말고, 바치고서 해 보라.
마음의 부담이 훨씬 덜하다.
또 누군가를 대할 때도 반가운 마음이나 싫은 마음을 바치면서 대해 보면
상대로 인해 올라오는 감정에 별로 끌려 다니지 않는다.
잠을 잘 때도 잠을 잔다는 생각을 부처님께 바치면서 잠이 들면
그 정진이 밤새 이어진다.
이것은 잠에 대한 애착을 닦는데도 큰 도움이 된다.
인간관계에 대하여
사람들은 남편을, 부인을 시비하면서 상대의 마음을 닦아주지 못해 안달이다.
그러나 사실은 내 마음 들여다보고 그 속의 원인만 바치면 일은 다 되는 것이다.
왜 자꾸 마음 바깥을 기웃거리며 남의 허물을 탓하려 드는가?
남의 마음은 내가 닦아주지를 못한다.
오직 내 마음 내가 닦을 뿐이다.
◆
상대가 미울 때 대상을 보지 말고 내 마음속에 올라오는 그 마음을 닦아야 한다.
그 미운 마음이 없어질 때까지
"저 사람이 신심 발심해서 부처님 전에 복 많이 짓기를 발원" 하고 원을 세운다면
복 지으라는 그 마음이 내 마음이기에 그 사람보다 내가 먼저 복을 짓게 되고,
복 지으면 아량이 넓어 부드러워지고, 마음이 그리 뽀족하거나 가파르지 않다.
◆
상대를 진실로 '부처님..' 하고 대하면 그간 내 마음이 편안해지고 경건해지며,
우리 마음에 '부처님..' 하는 밝은 자국이 남는다.
결국 우리 자신이 밝아지는 것이다.
만나는 사람을 부처님으로 보는 이가 있다면 그이가 바로 부처님이실 것이다.
◆
누군가를 미워하는 것은 바로 내 마음 속에 잠재된 남을 미워하는 마음이
가까이 있는 사람을 대상으로 작용하는 것이다.
◆
자기 잘난 마음에는 지혜가 없어져 남의 자존심을 짓밟아 원한을 사게 된다.
한 번 원한을 사면 인과의 사슬에 묶여 여러 생 원한을 주고 받게 되므로
자신이 부족한 줄 알고 공부를 하다 보면 지혜가 생겨 자신의 부족한 점을 깨치게 된다.
◆
상대가 무엇을 요구할 때, '예, 아니오'를 분명히 밝히는 것이 좋다고 흔히들 말한다.
물론 반대로 그렇게 처리해야 할 일도 있지만
입이 그렇게 가벼우면 손해를 보는 경우도 있고, 남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경우도 많다.
부정적인 마음이 많은 사람은 무엇이든 부정하고 본다.
그러나 마음을 보내는 이는 그 일을 상대가 해 주고 안해 주고를 떠나
보내는 마음을 받아 주기만 하면 흡족해진다.
약한 마음이기에 거부당하면 마음 속에 독심이 일어나므로 일단 '예', 하고 받아주고
'한 번 생각해 봅시다' 하면 상대도 좋아할 것이다.
가능성이 있으면 되는 것이고, 불가능한 일인 경우 현재의 처지를 설명하고
상대에게 자기 입장의 해답을 구한다면 서로 마음 상하지 않고 일이 되어질 것이다.
◆
'나'란 것이 없으면 세상은 편하고 넓은데,
내 아버지 · 내 사람 · 내 재산 · 내 자식 등 나라는 것이 붙으면 좁고 불편해진다.
이렇게 '나'라는 것을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 중생이고,
'나'라는 관념이 뭉친 것이 '아상'이다.
마음 닦는 이는 나와 남의 육신을 공평하게 보고
나에게 필요하더라도 남이 더 필요로 할 때는 줄 수 있어야 한다.
◆
남이 내게 무엇인가 주고 싶도록 내 마음을 비우고,
남이 내게 절하고 싶도록 '나'라는 아상을 닦아야 한다.
◆
마음에 싫고 좋음이 남아 있다면 아직 재앙이 남아 있다는 증거이다.
◆
남을 흉보는 것이 재미있으면 자기 마음에 진심[성내는 마음]이 있는 줄 알라.
◆
공경할 대상이 있는 사람은 진정 행복한 사람이다.
공경을 받는 그이가 행복한 것이 아니고, 공경심을 내는 그 순간 바로 내가 행복한 것이다.
◆
보기 싫은 사람은 억지로라도 부처님으로 보는 마음을 연습하라.
그러면 내 마음이 넓어지고, 상대의 마음도 펴지게 된다.
주위의 사람을 부단히 부처님으로 보게 되면 공경심이 생기고, 마음에 안정이 얻어지고,
자비심이 생기게 된다.
가족이나 친척을 부처님으로 보는 마음을 쉼 없이 연습하고,
마음을 들여다 보고 바치는 연습을 부지런히 하여야 한다.
◆
업보 인연을 해탈하지 않으면 그것은 매일 이어진다.
그러나 아무리 숙명적인 업보라도 평소에 부단히 바치면 미리 피해갈 수도 있고,
설혹 부딪치더라도 크게 다치지는 않는다.
업보도 바치면 결국은 해탈이다.
◆
업보를 갚을 때가 되면 갑자기 고기를 씹고 싶은 마음이 강렬하게 일어난다.
전생의 원수를 갚고 싶다는 말일 수도 있다.
그런 살생업보들이 부부나 형제, 친구, 직장동료로 만나면 사이가 안 좋은 것은 당연한 이치이다.
그러니 살아 있는 짐승을 잡아먹지 말 것이며,
특히 '이 닭, 이 고기 잡아 주시오.' 하고 지적하여 결정적인 업보를 짓지 말아야 한다.
영생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
업보는 단순히 안 보고 신경 안 쓴다고 해결되지는 않는다.
업보에 대한 인식이 바쳐지지 않는 한 그것은 우리의 잠재의식 속에 언제까지고 남아 있다.
단멸상은 하지 마라. 끊으려 하면 더욱 강해진다.
부처님께 업보업장 바치는 것도 억지로 없애려 하면 도리어 숨어 버리지만
공경심으로 드리면 바로 해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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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반을 잘 모시고 공부하는 이를 잘 보살피는 마음은 바로 부처님을 잘 모시는 마음과 하나이다.
그 마음 바탕이 잘 다져진 이는 부처님 모시는 공경심이 그득하다.
남의 마음이 밝아지도록 뒷바라지 하겠다는 마음이 있으면 먼저 자기 마음이 밝아지는 것이다.
◆
나를 밝게 해 주시는 분은 모두가 나의 부처님이시다.
사람마다 밝고 귀한 점이 있으니 그것을 배워 실천하려 한다면
바로 부처님 뵙고 그 가르침을 실천하는 것과 같을 것이다.
부처님은 내 주위에 얼마든지 계신다.
집안의 부처님들, 직장의 부처님들, 거리의 부처님들, 버스 속의 부처님들......
◆
노인을 모시는 이는 늘 용돈을 넉넉히 드려
돈 없다는 생각이 마음에 새겨지지 않도록 하는 것이 밝은 일이다.
또 병이 있으면 꼭 낫도록 해 드려야 한다.
병이 낫지 않았다는 생각으로 몸을 바꾸면 다음 생에도 그 병으로 고생하게 된다.
◆
사람들은 각각 자신이 살아야겠다는 생각 때문에 모두가 차고 냉담하다.
부모 형제보다 내가 먼저이고, 이웃이나 국가보다 내 이해관계가 먼저라는
철두철미한 아상을 연습하며 살아왔기 때문에 그것도 나무랄 수 없는 중생의 본성이다.
부처님도 금강경에서 말씀히셨듯이 원래 세상이 그렇고, 사는 것이 그렇지 않을까?
그러나 마음이 사람에게도, 일에도 빠지지 말고 올라오는 바 마음을 닦아야 할 것이다.
◆
내 마음을 다스리지 못한 입장에서 남을 너무 가까이 사귀면
좋아한다는 미명 아래 바라는 마음을 연습하게 되고, 결과를 요구하게 된다.
너무 가까우면 등잔 밑이 어둡듯 장점은 보이지 않고,
너무 멀면 장 · 단점이 함께 보이질 않는다.
닦는 이는 상대가 오직 부처님으로 보여야 한다.
◆
내 자식이라는 집착을 떠나 자식을 대하면 지혜가 생겨 자식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가 잘 보이고,
여러 가지로 이끌어 주어도 반발하지 않으나
내 자식이라는 껴안는 마음으로 자식을 들볶으면 자식이 반발하고 말을 잘 듣지 않는다.
애착의 마음이 전해지면 상대의 마음은 무겁고 괴로우므로
그 애착을 닦아야 진정으로 자식을 위할 수 있다.
◆
어떤 사람을 대할 때 마음이 예사롭지 않다면
필시 그 사람과 전생에 엮어 놓은 원인이 있을 것이니 그 마음을 닦아 해탈하여야 한다.
그립다거나 밉다거나 하는 생각이 나면 그 생각을 얼른 부처님께 바쳐라.
숨겨진 감정의 찌꺼기라도 찾아서 바쳐야 한다.
사회생활에 대하여
사회생활에 대하여
◆ ◆ ◆
하루 12시간만 살아라. 24시간 살기에는 벅차다.
하물며 긴 시간을 살아가려는 사람에 있어서랴!
미안에 머멀지 말아라. 후회하는 일을 적게 하라.
미안하다는 마음을 안고 있으면 과보가 생긴다.
만약에 마음에 미안한 일을 하거든 그 즉시 바쳐야 한다.
◆
중생이 가진 재산은 오직 탐심과 진심과 치심[잘난 줄 아는 마음] 뿐이라는 법문이 계시다.
탐심을 닦는 좋은 방법은 늘 베푸는 마음을 연습하는 것이다.
물질이 부족하면 다만 마음으로라도 대가를 바라지 않고베푸는 마음을 연습하다 보면
탐심도 적어지고 제 마음 그릇도 커진다.
◆
진심은 큰 재앙이다. 그 진심을 바치는 것은 곧 우리 마음속의 재앙을 바치는 일이다.
진심은 모든 쌓아놓은 공덕을 한 순간에 태워버리는 무서운 불이니,
아무리 작은 것이라 해도 방심은 곤란하다.
◆
자기 잘난 줄 아는 치심은 어둡고 캄캄한 마음으로, 밝은 지혜를 가로막는다.
그러므로 누구에게나 '부처님' 하는 마음으로 대하고,
항상 남의 장점을 배우는 마음을 내고,
남의 허물은 용서하고, 내 허물은 절대 용서하지 않아야 할 것이다.
내 마음속의 탐 · 진 · 치, 이 재산을 모두 다 바친 이가 바로 부처님이시다.
◆
궁리 끝에 진심(진심) 나고, 진심 끝에 재앙 온다.
어떤 사람으로 인하여 마음속에서 마음속에서 싫고 미운 마음이 올라오면
그 때 상대를 시비하지 않고 자기 마음 속에 있는 남을 미워하는 마음부터 닦으려는 사람은
지혜로운 사람일 것이다.
마음이 미운 사람에게 나가 있고, 돈 버는 데 나가 있고, 애욕을 채우는 데 나가 있으면
내 마음 들여다 볼 겨를이 없다.
◆
무엇 하나 원대로 아닌 것이 없다.
부처님 전에 세운 원은 언젠가는 꼭 그대로 이루어지므로 항상 밝고 크게 세워야 한다.
◆
한 생각이 외로운 이는 늘 고독하고, 한 생각이 가난한 이는 늘 없다는 마음으로 평생을 살아가며,
한 생각이 거지 마음이면 평생을 거지로 살며,
한 생각이 잘난 이는 늘 잘난 줄 알고 자기보다 많이 아는 이에게
또 세상에 대해 배우는 마음이 없으니 낭패보기 쉽다.
인간의 모든 선입주견은 모두가 옳지 않은 줄 알고 그것을 바치는 데서 지혜는 자란다.
◆
사람들은 남이 자기를 도와준다는 생각보다는
자기가 남을 위해 희생한다는 생각으로 세상을 살아간다.
사람은 태어날 때 자기 복을 가지고 오기 때문에
어떤 집에 태어나든 대개 부모 복이 아닌 자신의 복으로 살아간다.
오히려 자식 복에 살아가는 부모도 많을 것이다.
모든 사람들이 나를 도와준다고 생각해 보자.
그리고 그렇게 도와주는 세상에 대해 감사한 마음을 연습해 보자.
◆
옷을 입는 것을 보면 그 사람의 개성과 닦은 정도를 알 수 있다.
색상을 고르는 것도 자기 눈에 안경이라 닦은 정도 만큼밖에 눈에 보이지 않는다.
더 좋은 것을 권해도 눈에 보이지를 않는다.
마음이 난하면 옷색도 어지럽고, 마음이 단정하면 옷 매무새도 단정하다.
옷을 차려 입는 것은 마음의 정돈이고, 옷 매무새는 마음의 매무새이기도 하다.
◆
지혜로운 사람이라면 천하를 버틸 힘을 갖고 있다 해도 손에 닿는 일만 한다.
자기 힘이 열이라면 일곱 정도만 쓰고 셋은 여축해 둘 줄 알아야 한다.
◆
탐심을 깨치는 것은 물의 성질을 아는 것과 같다.
물에 빠져 벗어나려고 허우적거리면 더욱 가라앉게 되고,
아예 물 속에 들어갈 양이면 오히려 뜨게 된다.
이 이치를 잘 적용하면 세상에서 곤란에 빠졌을 때 도움이 될 것이다.
◆
이 우주는 모두 원인이 있어 이루어진 그물과도 같은 인과로 서로 엮어져 있다.
스스로 우주를 용납하지 않을 때 우주 또한 그 사람을 용납하지 않는 법이다.
◆
세간의 일을 따라다니며 살지 말고 줏대를 세워 자기자신을 중심으로 살아라.
긔대는 저 웅덩이를 헤엄쳐 건너본 적이 있는가?
어떻게 하면 깊은 물에 빠지지 않고 건널 수 있을까?
마음을 웅덩이 바닥에 두지 말고 건너갈 저쪽 기?에 두고 거기만 바라보고 헤엄쳐라.
바닥은 절대로 보지 말라.
◆
탐심이란 과욕하는 마음으로, 그 악착같은 마음은 짐승의 마음이다.
물질을 자기 것으로 하려는 간탐심, 남녀관계 등에서 사람을 자기 것으로 하려는 음탐심이 있다.
탐심은 건강치 못한 마음이며, 박복의 근원이다.
그러므로 자신에게 필요한 정도를 깨치고
바라는 바 없이 늘 베푸는 마음을 연습하고 부처님께 집중적으로 바쳐야 한다.
◆
불타버린 곳에 재만 남듯 뜨거운 진심이 지나가면 파괴만 남는다.
진심은 재앙과 박복을 가져오며, 마음속엔 독심을, 육신에는 뜨거운 과보를 선사한다.
진심은 불길과 같이 피를 말리고 지방을 태운다.
그러나 진심을 바치면 공덕이 온다.
◆
세상에 대해 배우는 마음이 없으면 지혜가 자리지 못하고 우주의 지혜와 격리되어
안팎 없이 캄캄한 생활이다.
치심을 연습하면 남들이 모두 싫어하고 재앙과 박복과 무지,
마음 속에는 컴컴함, 육신에는 고통을 선사한다.
◆
모든 이를 부처님으로 보라.
그러면 장래의 모든 부처님의 행(行)을 발견하며 배울 수 있을 것이다..
◆
봉변은 전생에 그런 인식을 가지고 있으면 이생에도 당하는 경우가 있으며,
그런 업장이 있기 때문에 당하는 일일 수도 있다.
그러므로 변명한 들 믿어주는 사람이 없다면
올라오는 마음 바치고 담담히 받아들이는 것이 지혜로운 일이다.
왜 마음을 닦아야 하는가
왜 마음을 닦아야 하는가
◆ ◆ ◆
우리는 이대로 영원히 사는 듯이 생각하며 하루를 보낸다.
죽음은 먼 미래의 일, 남의 일로만 여길 뿐이다.
그러나 티벳의 속담과 같이 내일이 먼저 올지 다음 생이 먼저 올지 그걸 누가 알겠는가?
◆
자기를 위해 사는 사람은 몸뚱이 애착이 한층 더 심해진다.
부처님을 위해, 성현을 위해 사는 마음을 낼 때 그것이 녹아내린다.
몸뚱이 착과 '나'라는 것을 떠나는 이는 사람다운 사람이고 또 보살일 것이다.
마음 공부는 사람답게 살기 위해 꼭 해야 하는 일이다.
선택 사항이 아니다.
잘 닦여진 길로 가면 세상이 고통스럽지 않고 편히 갈 수 있는 것을
모두 그 길 마다하고 길도 없는 가시밭길로 들어가 길이 없다고 아우성들이다.
◆
남의 재앙을 마음에 새겨두면 그것이 자기 재앙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마음에 새기고 바치지 못하면 이생 혹은 다음 생에 그것이 내 현실이 될 수가 있는 것이다.
재앙에는 이생에 지은 것도 있고, 전생에 지은 것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과거에 어두운 원인을 많이 지었다 할지라도
그것을 부처님 전에 자꾸 바치면 재앙의 보따리는 점점 가벼워진다.
◆
나의 마음 속에 새겨진 인식들은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나의 현재와 미래를 결정한다.
마음 공부란 내 안의 어두운 인식들을 닦는 것으로,
이것을 부처님 전에 바쳐 원래의 청정한 마음으로 밝히는 작업이다.
네 마음 들여다 보고 네 마음 닦아라.
이것은 부처님의 참 절실한 가르침이다.
◆
포교란 것이 꼭 불교를 믿으라 권하는 것만 아니라
열심히 정진해서 그 정진의 밝은 기운으로 주위를 바르고 편안하게 하는 것,
이것은 소리도 없는 커다란 포교인 것이다.
◆
비록 외면상으로는 불자가 아니라고 하더라도 자기의 마음이 두루 건강하고 씩씩하다면
그는 이미 불법을 밝게 실천하고 있는 사람이며, 참 불자이다.
마음이 건강하고 떳떳해지자고 불법을 하는 것이니까.
◆
공부는 마음이 건강해지기 위해 한다.
자신이 서고 나서 남을 마음으로 밀어주면 든든하나
약한 입장에서 밀어주면 대가를 바라고 밀어준다는 데 마음이 빠져나가게 되니
자신은 더욱 약해지게 된다.
건강한 자신이 있고서 가족이 있고, 국가가 있는 것이다.
◆
한 사람이 악심을 내면 그 파장이 주위에 전해져 많은 사람이 함께 흥분하게 되고
한 사람이 낸 환희심이 주위를 밝게 이끌기도 한다.
본래 마음은 나와 남이 없고 그대로 하나로 통한다.
그래서 경전에서는 한 마음이 청정하면 많은 마음이 청정하고,
많은 마음이 청정하면 8만 4천 다라니 문이 청정하다고 하셨다.
◆
재산이 많거나 지위가 높다 하여도 닦지 않으면 중생의 탈을 벗지 못한다.
마하살의 경지에 이르면 남의 마음을 쉬게 해 준다.
마음의 파장이 주위를 안정시키게 되니 그것 또한 부처님께 공덕을 짓는 일이다.
◆
우리가 감사해야 할 것은 도처에 있다.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이 자연의 은혜가 얼마나 감사한가?
물과 빛과 맑은 공기와 탄탄한 대지...
세상 사람들은 대부분 그 고마움을 모른 채 살고 있다.
부모에 대한 고마움, 좋은 음식을 먹게 해 준 분, 이 옷을 입게 해 준 분들에 대한 고마움도 모른다.
부처님에 대한 고마움은 물론이고, 오직 있는 것은 자기 욕심, 아상일 뿐인 경우가 많다.
깜깜한 아상으로 엎치락뒤치락하고 하루하루 업을 지으며 살아가는 것이
중생의 실체가 아닌가?
그래서 중생은 슬픈 존재인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부단히 경 읽고, 바치고, 고마운 마음을 자꾸 연습해야 할 일이다.
◆
돈 주고 구입했다고 자기 물건이겠는가?
소급해 들어가면 밥 한 그릇에는 인류 전체의 은혜가 깃들여 있는 것이다.
마땅히 인류와 자연의 등불이신 부처님께 공양 올리고
또 이 물건 주시는 모든 이들의 은혜에 고마워하며,
감사히 먹고 부처님 잘 모시겠다는 원을 세우고 대해야 한다.
음식 뿐만 아니라 모든 물건도 감사한 마음으로 공양 올리고 받아야 법답게 사는 것이다.
◆
닦지 않은 마음은 그 자체가 독이다.
그러니 어찌 마음을 닦지 않을 수 있는가?
올라오는 이 업장 하나 바치면 나와 남이 함께 시원하다.
◆
저 잘난 마음을 많이 연습하면 지혜가 어두워지고, 지혜가 없으니 재앙을 당하기도 쉽다.
사실 치심은 거지에게도, 못난 사람에게도 있다.
내가 아버지만 잘 만났어도...하는 마음도 알고 보면 치심이다.
마음 닦는 길에서도 자기의 지혜를 넘어서는 것은
자기보다 지혜가 높은 사람의 가르침을 받아야 한다.
치심은 다른 업장보다 눈에 잘 안 보이므로 닦기가 어렵다.
그래서 자기 업장이 땅두께보다 두터운 줄 알아야 공부가 된다고 하는 것이다.
◆
이 세상이 누구에 의햐 주재된다고 생각지 말라.
이 우주는 무슨 뜻이 있어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삼천 대천세계란 것도 결국 중생의 업력으로 이루어진 것 뿐이다.
◆
명예 · 재물 · 여자 · 자식 등의 모든 것이 영원한 자기 것이 아닐진대
자기 것으로 소유하려는 마음에서 일체의 고통과 번뇌가 생긴다.
그러므로 중생적인 것은 모두 부처님께 바치고,
무상치 않고 영원히 자기 것일 수 있는 부처님의 지혜와 진리를 얻어야 한다.
몸과 마음을 부처님께 바친 그 텅 빈 자리가 부처의 자리이다.
◆
과거로 향하는 마음은 죽은 마음 연습이다.
또 어떤 이들은 온통 미래의 꿈속에 빠져 살기도 한다.
그런 마음은 허하기 짝이 없다.
진실한 삶이란 현재현재에 진실하고,
순간순간에 올라오는 분별을 바치는 사람이다.
그렇게 현재에 진실하면 과거와 미래도 저절로 진실해지고 밝아질 것이다.
◆
진실한 마음이란 내 안에 부처님의 마음이 머무는 순간이다.
부처님을 모신 마음에는 말과 행동이 공경스럽고 진중하며 정신은 깨어있다.
◆
누군가를 만나기 전에 그 사람을 만나 어떤 이야기를 하고 어디를 가고 하는 궁리를 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실제 만나보면 상황이 전혀 달라 만나기 전 생각이 쓸데 없었다는 것을 알게 될 때가 있다.
차라리 그 궁리가 일어날 때마다 궁리를 따라가는 대신 자꾸 바쳐 분별이 없어졌더라면
가서 있을 일이 알아지기도 할 터이고 마음이 밝아져 적절한 대답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또 마음의 힘이 맑고 크게 되어 상대를 편안히 해 줄 수도 있을 것이다.
◆
현재현재에 진실된 마음, 그것이 공경심의 실천이다.
◆
닦는 이들도 '나'라는 것에 집착하면서부터 다시 타락의 길로 빠져든다.
'나'라는 것을 실체인 양 집착하여 온갖 공덕을 잃어버리고 마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 가장 큰 도둑은 바로 업장이란 놈이다.
그것을 늘 주시하고 그것에 속지 않는 자만이 자기의 가장 귀중한 보물을 지킬 수 있으리라.
◆
누구나 자기의 눈은 자기가 못 보는 법이다.
자기의 정도를 자기가 모른다는 말이다.
사람들은 자기 생각을 꽉 움켜쥐고 그것만으로 세상을 보려고 한다.
내 생각은 모두 옳지 않다. 옳다고 하더라도 그건 내 정도에서 옳을 뿐이다.
내 정도의 지혜를 바쳐 마음이 백지로 남겨질 때 더 밝고 큰 지혜가 드러난다.
◆
부지런히 밝은 곳에 복 지을 일이다.
몸으로든 마음으로든 밝은 곳에 공덕을 지어 놓으면
발심해 한 마음 닦으려 할 때 주위의 여건들이 원만하다.
◆
죽음의 순간에 부처님 전에 공경심을 내고 부처님을 향해서 정진을 하면
밝은 정신을 갖춘 사람으로 태어난다.
편안할 때 바치는 연습을 자꾸 하다 보면 급한 순간에도 정진을 하게 된다.
닦는 이들은 최후의 순간에도 미륵존 여래불 한 번 바치기 위해서 평생을 닦는다.
◆
이 육신은 때가 되면 죽어 없어지지만 이 육신이 담고 있는 마음은 죽지 않는다.
그 마음이 원인 지은 대로 거기에 맞는 새 몸 받아서 다시 새로운 사람을 시작한다.
그런데 닦지 않으면 거반 축생 몸이다.
닦지 않은 미(迷)한 마음에는 모두가 사람같이 보이기 때문이다.
또 방심하지 않고 잘 바쳐서 마음이 밝게 닦였다면 같은 사람이라도 더 밝은 곳에 몸 받을 것이다.
◆
천국과 극락이 먼 곳에 있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 모시고 부처님 모신 경건한 그 마음, 갈등과 번뇌의 바람이 쉬어
한적하고 고요한 그 마음이 천국이고 극락일 것이다.
◆
공부를 하면 과거를 소급해서 닦아들어간다.
오늘 공부하면 어제의 그 마음이 해탈되고, 이튿날 공부하면 3일 전, 4일 전 마음이 닦여지고,
이렇게 해서 20세까지 소급해 내려가면 아귀보는 완전무결하게 해탈이 될 것이다.
마음을 닦는다는 것은 심층심리에 잠재된 병적인 요인 뿐만 아니라
그 동안 쌓아둔 모든 습관적 인간적 분별을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간에
한 티끌도 용납하지 않고 바치는 것이다.
◆
복도 죄도 마음으로 짓고, 무엇을 증하는 것도 마음으로 한다.
이 한 마음은 화가와 같아 무엇이든 그리고, 또 그린대로 되어진다.
증하지 않고 그 때 그 때 부처님 전에 바치면 그 마음은 어디에도 물들지 않을 것이다.
◆
악조건은 공부하기에 가장 좋은 조건이다.
정진하면 성내는 마음의 뿌리가 닦여 속이 시원해지고,
나아가 부처님의 광명의 세계가 느껴지며 혜안이 열린다.
성내는 마음의 뿌리를 항복받고 난 뒤에는 지혜의 세계가 열리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 마음이 밝고 상쾌하게 그윽한 공경심으로 이어진다.
◆
마음의 빗장을 열면 그 틈새로 유혹과 재앙의 불씨들이 밀려 들어온다.
바늘 구멍만 한 틈이 생겨도 황소만 한 업장이 밀어 닥치며,
이러한 순간의 방심은 영원한 후회를 가져온다.
단속을 잘 할 일이다.
◆
공부를 하는 사람의 부류에는 세 가지가 있다.
첫 번째는 양의 수레를 타고 가는 사람으로, 몸뚱이의 고통이 싫어 공부하는 부류로,
가족들이 건강하고 돈 많이 벌고 행복하게 해 달라고 부처님께 조른다.
두 번째는 사슴을 타고 가는 사람으로, 이 우주는 모두가 원인 결과로 이루어졌으니
밝은 원인을 부지런히 지어 밝은 결과를 얻으려는 부류이다.
세 번째는 흰 소를 타고 가는 사람으로, 이 우주 현상을 그대로 마음에 받아 밝히는 부류이다.
이 사람들의 깨침은 우주 전반에 그대로 통하니, 대승이고 최상승이다.
중생계의 어려운 문제를 자신의 문제와 같이 보고 해결해,
많은 중생들을 이익케 하는 불보살들의 길이다.
모두가 흰 소를 타고 가는 대승의 길을 가야 할 것이다.
◆
지혜와 조화, 도통도 모두가 마음 안에 있으니 마음 밖에서 구하지 말라.
우주는 원래 조용한데, 중생들은 자기의 분별을 뒤집어쓰고 지글지글 마음을 끓인다.
건강한 마음이란 좋은 일에도 나쁜 일에도 편안하고 지혜로울 수 있는 마음,
태산처럼 흔들리지 않는 가운데 무분별의 지혜가 깊어져
우주의 만상이 거울처럼 비쳐 오는 마음이다.
◆
늘 남에게 가르치는 연습을 하다 보면 배우는 마음이 적어지고 제 자랑을 하게 된다.
이렇게 되면 점점 밖을 향해 야단은 잘 치지만 제 모양은 바로 보기 어려워진다.
마음 닦아 밝아지고자 한다면 이러한 점을 경계해야 한다.
어떻게 마음을 닦을 것인가
어떻게 마음을 닦을 것인가
◆ ◆ ◆
귀챦은 손님이 오더라도 무조건 먹이고 차비라도 주는 연습을 하라.
그대 마음은 꿈에라도 줄 생각이 없는 마음이기 때문에
이것은 그 마음을 닦는데 꼭 필요한 연습이다.
◆
무엇을 하든지 원을 세울 것이며, 선입견이나 의욕으로 하지 말라.
◆
남이 잘난 척 하는 말을 듣기 싫어하는 것은 바로 그대에게 잘난 척 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
저 잘난 마음을 닦으면 남이 아무리 잘난 척 해도 마음이 동요되지 않을 것이다.
◆
고맙습니다 하는 마음을 일부러라도 내는 연습을 하라.
마음이란 꿈에도 고맙다고 하는 법이 없기 때문이다.
상대방과 대화할 때는 "안 된다"는 말은 가급적 삼가하고,
"예" 또는 "생각해 보겠습니다." 라고 하여라.
안 된다는 말을 해서 피차 마음에 안 되는 것을 그리지 말아라.
◆
몹시 고통스러운 일을 당할 때
"모든 사람들이 이러한 고통을 해탈하여 부처님께 환희심 내어 복 많이 짓길 발원"해 보라.
◆
새벽 3시부터 5시까지는 기운이 맑고 밝은데, 이때가 문수보살께서 법문하시는 시간이다.
이 시간에 공부를 하면 우주의 생기를 듬뿍 받는다.
저녁 늦게 활동하는 사람 치고 재앙이 없는 사람은 드물다고 한다.
우주의 기운에 순응하여 밝은 기운일 때 활동하고 어두운 기운일 때 잠자면
몸과 마음이 건강해지는 것이다.
그리고 잠들기 직전까지 정진을 놓지 않아야 밤새 공부가 지속되어 깨는 순간까지 공부가 된다.
방심하다 잠들면 자는 시간 내내 방심하니 일어나도 정신이 개운치 않다.
낮잠도 밝은 낮에 어두움은 연습하는 것이니 가능한 한 자지 않는 것이 좋다.
◆
아침저녁으로 금강경 읽고,
평상시에는 떠오르는 생각과 부딪치는 사물에다 대고 '미륵존여래불' 하는 것은
마음속에 넣어둔 모든 것을 꺼내 부처님께 드리는 것이니 불공으로서는 이만한 것이 없다.
좋은 것이든 싫은 것이든 자신이 가진 모든 마음을 부처님께 바칠 수 있다면
자신은 항상 씩씩하고 밝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다른 말로 부처님 마음으로 자신의 마음을 바꾸어나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
부처님께서 우리에게 받고 싶어 하시는 것은 값진 물건이 아니라
바로 이 지옥같은 마음, 이 박복한 마음이다.
부처님께서는 우리 삶을 불행하게 만드는 어둡고 컴컴한 번뇌를 공양받고 싶어 하신다.
그 분의 가장 큰 원은 모든 중생들이 마음 닦아서 밝게 성불하는 것이다.
◆
금강경을 읽으면 재앙이 없어진다.
보통 아침에 읽는 금강경은 낮 동안의 재앙을 소멸하고,
잠자리에 들기 전에 읽으면 자는 동안의 재양이 소멸된다.
사람의 몸 속에는 컴컴한 벌레들이 살고 있어 끊임없이 사람을 괴롭히고 있으나
금강경을 읽고 바치는 공부를 하게 되면
그 벌레들이 살 수가 없어 신진대사를 통해 죽은 세포와 함께 밖으로 빠져나가 버리고
밝고 건강한 세포로 바뀐다.
왜냐 하면 금강경은 밝고 건강한 자리라서 컴컴한 것을 용납하지 않기 때문이다.
의학적으로 사람은 1,000일에 살 세포가 한 번 바뀌고,
3,000일에 뼈 세포가, 9,000일에 뇌 세포가 바뀐다.
그 동안 금강경을 읽게 되면 컴컴한 벌레들이 빠져나가고 건강한 세포로만 대체가 되니
점점 밝아지고, 재앙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
금강경을 읽을 때 집중이 잘 되지 않고 자꾸 여러 가지 생각이 떠오르곤 하는 것을
걱정할 필요는 없다.
그것은 평소 자신이 마음속에 그려 넣었던 것들이
금강경의 밝은 기운에 비추어져 나오는 것이다.
그것들이 그대로 자신의 마음 속에 잠자고 있다면 다 괴로움의 원인이 되는 것인데
밝은 기운 앞에 쏟아져 나오니 자신이 편안해지는 것이다.
◆
금강경을 너무 기를 쓰고 읽으려 하는 것도 탐심이고, 왜 안 되나 하는 것은 진심이니
본래 성인에게는 다섯 번, 일곱 번 하는 분별도 없다.
힘에 겨운 일 정해놓고 못한다고 하는 것보다는 그때그때 자꾸 공부하는 것이 낫다.
공부란 일정 기간 몰아서 한꺼번에 하는 것이 아니라
이생에 못하면 다음생에도 세세생생 계속 하는 것이다.
금강경이 잘 안 읽어질 때는 자기가 읽겠다고 애쓰지 말고
"모든 중생들이 금강경 잘 읽어서 부처님 잘 모시길 발원"한다면
어느 틈에 자기 입에서 금강경 읽는 소리가 날 것이다.
◆
금강경의 말씀을 의심 없이 믿어서 그 말씀을 알려 하고
또 안 것을 공경심으로 받들어 실행할 때 마음속 태산같은 업장은 녹아내린다.
또한 모든 원인이 자기 마음속에 있는 줄 알고 그것을 부처님께 낱낱이 바치는 것은
금강경읠 직접 실천하는 행이다.
아침저녁 경 읽고 일하면서 올라오는 마음을 낱낱이 불공 올리고
또 순간순간 원 세우는 그 행이 바로 수도요, 그 자리가 부처님 법당이리라.
◆
계율 지키는 것은 중요하다.
그러나 마음까지 거기에 묶여서는 곤란하다.
마음이 늘 밝은 곳을 향하면 저절로 행동으로 계율이 지켜진다.
◆
금강경은 꼭 읽을 사람에게 전해야 한다.
경을 전해 받은 사람이 천대하여 밟거나 타 넘는다면 그 과보로 남에게 짓밟히게 된다.
그러면 그 보복을 경을 준 사람에게 히려 한다 하니 어찌 조심스럽지 않으랴!
인과경에서도 경을 바닥에 내던진 과보로 곱추가 된다는 귀절이 있다.
또 부처님 법문에, 금강경을 모시고 잘 읽으면 부처님께서 이를 다 보시고,
주위의 밝은 기운이 금강경이 계신 장소를 옹호하고 받는다고 하셨다.
◆ ◆
부처님 계신 곳에도 머물지 말고, 부처님 아니 계신 곳에서는 얼른 도망가라는 말씀이 있다.
생각생각 바치는 것이 가히 큰 장부의 일이다.
◆
바친다는 것은 참거나 마음을 달리 먹거나 하는 매개를 거치지 않고
정면으로 그 마음에다가 대고 조건 없이 염불 정진하는 것을 말한다.
매일 매일의 현실속에서 발생되는 상황을 통해 그때그때 올라오는 마음을 항복받아
옳지 않은 습성이 배어 죄를 짓는 자신의 내면적인 문제점을 고쳐나가는 것을 말한다.
심층심리 속에 잠재된 병적인 요인 뿐만 아니라 그 동안 쌓아온 모든 습관적, 인간적 분별을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간에 한 티끌도 용납치 않고 바치는 것이다.
◆
바치는 공부는 시기를 놓치지 않고 해야 한다.
특히 크게 충격적인 분별이 일어나 버린 뒤에 바치려면 무척 힘이 든다.
방심치 않고 마음 속을 들여다 보면 분별이 일어나려 하는 순간 바쳐야 쉽게 바쳐지지
분별의 나무가 뿌리를 내리고 가지를 치면 바치기가 무척 어렵다.
공부는 바로 호흡지간에 방심치 않는 데 있다.
순간순간 놓치지 않고 바칠 일이다.
◆
사람들은 '오늘은 이래도 내일, 모레는 좀 낫겠지.' 하는 희망 속에 산다.
그러나 이 마음 닦고 복 짓지 않으면 조금도 나아지지 않는다.
부처님 좋아하는 이는 많은데, 마음 닦는 이는 드물다.
한 시간씩 두 시간씩 경 읽고 바치는 고행을 반가워 하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세상에는 공짜가 없다.
발전하려면 정진이라는 대가를 치러야 한다.
그리고 향상이 되려면 실천해야 한다.
공부는 신명을 다 바치는 마음으로 해야 한다.
공부하는 이들에게는 분명히 부처님의 가피가 계신다.
그러나 부처님을 모시는 일이 힘이 들어 짜증이 나게 되면 부처님께서도 불편하실 것이다.
공부든 일이든 무엇이든 자신의 분수에 알맞게 할 줄 아는 지혜가 있어야 한다.
◆
'미륵존여래불' 염송할 때는 장궤 자세가 좋다.
흔히 한 시간 단위로 하는데, 우리의 분별이 대략 한 시간 주기로 회전하기 때문이다.
분별이 올라오는 주기는 작게는 한 시간에서 삼일, 칠일, 사십구일, 백일, 삼년, 구년, 이십칠년,
길게는 아승지 겁까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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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가 무슨 생각이든지 떠오르는 생각에 대고 "미륵존여래불" 하며 부처님께 바치고
아침저녁 열심히 금강경을 읽는다면
어디서 왔는지 모르게 상쾌한 느낌과 든든하고 새로운 힘이 솟을 것이다.
이것이 부처님의 가피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
옛날 도인들은 탐심은 끊고 진심은 참으라고 했는데
그 당시에는 산 속에 고요히 앉아 가능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대와 같이 복잡한 시대의 마음 닦는 방법은 탐심은 깨치고 진심은 바쳐야 한다.
탐심을 깨치라 함은 육체를 영위함에 필요한 것들을 전혀 끊을 수는 없으니
자신에게 알맞은 양을 깨달아 그 이상을 취하지 말고,
진심을 참게 되면 용수철을 누르는 것과 같아
더 큰 힘으로 폭발하거나 위나 가슴 등에 질병이 생기니
올라오는 진심을 각자의 믿는 분을 향해 바쳐야 한다.
치심은 곧 자기 잘난 마음으로, 자기 스스로가 잘 알 수 없으므로 평소에 자꾸 닦을 수밖에 없다.
◆
마음속의 분별은 끝이 없으므로 계속하여 바치고,
아무런 생각이 나지 않으면 나지 않는다는 그 생각에다 바쳐야 한다.
바칠 때는 눈을 감지 말고 바쳐야 한다.
눈을 감고 정진을 하면 앞이 캄캄하여 모른다, 안 보인다는 생각을 증하게 되므로
눈을 감더라도 반쯤은 뜨고 하여야 한다.
잠을 잘 때도 불을 끄게 되면 캄캄하므로 모른다는 것을 증하게 되어 그만큼 공부가 늦어지게 된다.
밤이든 낮이든 대낮처럼 밝아야 마음의 성리(性理)가 밝아지게 된다.
재앙은 모른다, 캄캄하다는 생각에서 발생한다.
◆
누군가와 얘기할 때나 들을 때에도 부지런히 바쳐라.
상대가 화가 나서 얘기할 때에도 바치면서 듣게 되면 상대가 쉬게 되고
바치면서 얘기를 하게 되면 감정이 조절되고 더 밝은 지혜가 떠오른다.
호흡을 들이마시고 내쉬는 그 순간에도 바친다는 마음으로 부지런히 바쳐야 한다.
◆
음식을 먹을 때에는 반드시 먼저 부처님께 정성 들여 공양을 올리고 발원하여야 한다.
해탈 성불을 위해서는 우리 자신의 모든 것, 몸도 마음도, 기쁨 · 슬픔 · 고통 · 근심 · 오욕 · 팔고모두 바쳐야 한다.
그러면 평안이 오고 법열이 생긴다.
이것은 항상 부처님과 함께 하는 것으로,
부처님과 잠시라도 떨어지게 되면 일시에 번뇌와 망상이 생기게 된다.
◆
올라오는 분별은 모두가 내 마음일 뿐이므로 얼른 부처님께 바쳐야 한다.
부처님께 바친다는 그 마음도 그 여운마저도 모두 바쳐야 한다.
절대 부처님 공경하는 마음으로 공부하여야 한다.
'부처님' 소리만 들어도 합장하고 무조건 절하는 마음이어야 한다.
부처님은 대상으로 그러지 말고,
그저 '부처님' 하는 마음을 향하여 부처님을 친견하는 용심으로 공부하여야 한다.
◆
절하는 것이나 불공을 드리는 것이나,
절이나 물건을 통해 자기 마음 바치는 연습을 하는 것이다.
그러나 부처님의 등상에는 마음이 없어야 하는데,
절을 하며 마음을 빼어 마음 없는 등상불에 붙여 놓는다.
그러나 등상은 도깨비가 되고, 자신은 마음을 빼어 부처님 등상에 보냈으니 허깨비가 된다.
그래서 도깨비와 허깨비가 종알종알 해 봐야 재앙밖에 일어날 일이 없다.
그러므로 아무런 상상도 하지 말고 그저 '부처님' 하는 그 마음에 대고 절해야 하는 것이다.
◆
금강경의 중요한 대목을 보통
'응무소주 이생기심(應無所住 以生其心)'[ - 머무는 바 없이 마음을 내라]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그것은 이미 다 이룬 경지나 다름 없다.
닦아가는 입장에서 보면,
내 마음 속에 팔만사천의 업장이 꽉 차 있는데 어떻게 응무소주 이생기심을 바랄 수 있는가?
올라오는 감정이나 생각에 끌리지 않고 생각 하나하나를 바쳐서 항복받다 보면
응무소주 이생기심은 그냥 되어진다.
◆
애착이 닦이지 않은 상태에서 부처님을 향하다 보면
자칫 부처님에 대한 착심(着心)을 연습한다.
마음속에 어떤 형상으로 새겨진 부처님은 다 자기 정도에서 나온 생각일 뿐이다.
부처님께 착심을 붙이지 않으면서 부처님을 잘 향할 수 있는 방법은
부처님이라는 그 한 생각까지도 바치는 것이다.
오로지 '부처님' 하는 그 마음에 대고 절하고 바칠 일이다.
◆
금강경을 읽고 마음 닦는 사람들은 누가 스승을 비방하면 어떻게 해야 할까?
자기 마음 들여다 보고 거기에 대고 '미륵존여래불' 하며 흥분되는 마음을 바쳐야 할 것이다.
우주의 삼라만상은 다 제 마음의 그림자일 뿐이다.
그러므로 항상 제 마음 들여다 보고 뭇엇이든 제 마음에서 찾고,
마음 밖에서 구하지 말 것이다.
삶의 목표
삶의 목표
◆ ◆ ◆
시봉이란 부처님을 받들어 모심을 말한다.
수도는 시봉하는 마음이 바탕이 되어 있을 때 비로소 밝고 완벽해진다.
◆
우리가 세울 수 있는 가장 밝고 큰 원은 부처님 시봉하겠다는 서원이다.
부딪치는 일마다 이 사람이 신심 발심해서 부처님 시봉 잘 하길 발원,
이 일이 밝게 해결되어 부처님 기쁘게 해 드리길 발원,
올라오는 이 생각 · 저 생각에는 밝은 지혜가 나서 부처님 잘 모시길 발원하고,
심지어 하늘을 보고도, 나무를 보고도 신심 발심하여 부처님 시봉을 밝은 날과 같이
복 많이 짓기를 발원하면 '나'라는 아상이 해탈되고, 부처님 시봉하는 큰 흐름을 타게 되니
저절로 불사(佛事)이다.
◆
부처님을 시봉하기 위해 사람들을 만나고 도운다면
부처님의 밝음을 증하게 되어, 사람들의 어두운 그늘을 증하지 않는다.
또 내가 도와주었다는 애착을 남기게 되면 대가를 바라는 마음이 생겨 상대에게 얽매이고,
심지어는 준 것을 받기 위해 그 집에 태어나는 경우도 있다.
또 내가 너를 도와준다는 아상의 독한 기운이 상대를 자극하게 되어
도움을 받는 사람 마음에 거부감과 수치심을 일으키기도 한다.
그러나 부처님 기쁘게 해 드리기 위한 시봉의 마음에는 아상이 없기에
상대에게 파장도 일으키지 않는다.
◆
하나님과 부처님을 자기 생각 정도로 그려 우상으로 만드는 경우가 많다.
그것은 다 자기 정도의 생각에 불과하다.
한 마음의 대승(大乘)은 부처님, 부처님을 밝게 시봉하겠습니다 하는 마음이다.
마음 닦는 이들 모두가 자기의 생사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나
생사는 생사에 맡기고 우선 부처님만 잘 공경해야 한다.
자기가 생사 문제를 해결해 보겠다고 하는 것도 아상의 연습이다.
◆
내가 중생을 어루만지고 제도하겠다고 한다면 그것은 큰 아상이다.
이는 내 마음이 부처님을 향하지 않고 중생을 향하게 되니
자칫 그 업장만 증하여 자신이 그렇게 되기 쉽다.
진실로 보살행을 행하려면
우선은 부처님의 마음을 기쁘게 해 드려야겠다는 마음 바탕이 있어야 한다.
자기가 한다는 생각을 부처님께 바치고, 또 지은 공덕도 다 바치면서
겸허하게 부처님 시봉하는 자리에 서는 사람이 참다운 보살이 아닐까?
우리 모두는 바치고 시봉할 따름이요, 중생 제도는 오직 부처님의 일이다.
◆
내가 공부하고, 내가 밝아져야 하고, 내가 업장을 닦는다는 생각으로 공부하면
나의 아상과 주위 사람들의 아상이 서로 부딪쳐서 괴로울 것이다.
그러나 부처님 위해 법시간 지키고 이 마음 바칠 수 있다면 매사는 한결 부드러울 것이다.
세상은 원래 조용한 것인데 자기의 분별 때문에 소란스럽고 괴로운 것이다.
◆
아랫 사람을 아랫사람이라 생각지 않고, 그들에게서 배울 마음을 내고,
먼저 공부를 했다고도 생각지 않고 부처님 앞에서는 누구나 평등하다 생각하면
얼굴이 붉어질 정도로 창피한 일은 없다.
부처님을 모시는 마음에는 '나'라는 고통도 없고, 시봉에는 '나'라는 것이 용납되지 않기에
순간순간만큼은 모두가 극락이고 밝은 일 뿐이다.
'나'라는 것은 몸뚱이이면서 고통이기 때문이다.
◆
무슨 일을 하든 부처님 시봉을 위해 하면 된다.
밥 먹을 때, 누구를 만날 때, 마음이 흐트러지는 그때그때마다
"부처님 시봉 위해", "부처님 즐겁게 해 드리기 위해" 한다고 연습하는 것이다.
부처님만이 업보가 없는 당처이다.
부처님을 향해야 응무소주가 되지, 그냥 무심히 하면 알지 못하는 사이에 자기 업보를 향한다.
◆
금강경에는 누차에 걸쳐 수지독송하거나 다른 사람을 위해 이야기해 주면
공덕이 헤아릴 수 없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이와 같은 밝은 부처님의 말씀을 남에게 전해 주는 경우에도
자기가 그렇게 했다는 생각은 바쳐야 한다.
왜냐 하면 그 생각은 허망한 것이기 때문이다.
◆
무슨 일을 하든 부처님 시봉하기 위해 한다면 상에 머물지 않고 보시하는 방법이다.
그것은 기독교 인들이, "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의 것이라" 한 것처럼
마음이 자유스럽고 제한이 없어 우주와 내가 하나가 되며 그 공덕은 헤아릴 수가 없는 것이다.
◆
모두들 내 육신 시봉하고 내 가족 시봉하느라 바쁜 마음들을 부처님 전에 바치고,
한 번쯤은 죽음 앞에 선 자신의 적나라한 인생을 살펴볼 일이다.
과연 나는 어떻게 살고 있는가?
무엇을 위하여 이렇게 아둥바둥거리며 살고 있는가?
무엇을 위해 살다 가는 인생인가? 하고 ...
◆
부처님 시봉하기를 원 세운다면 내 몸과 마음이 부처님 시봉으로 꽉 찰 것이요,
부처님께 복 지을 원을 세운다면 무량대복을 짓는 내가 받을 것이다.
그래서 밝은 이는 이렇게 원을 세우신다.
"모든 중생들이 무시겁으로 지은 업보업장 해탈탈겁하고 모든 재앙은 소멸하고
소원은 성취해서 세세생생 부처님 시봉을 밝은 날과 같이 복 많이 짓기를 발원"
◆
나를 위해, 내 생각대로 사는 것은 지혜를 가로막는 일이다.
내 마음 속에 올라오는 생각은 버려도 아까울 것 없으니 부처님께 정성껏 바쳐라.
바치는 마음 연습하여 남을 위해 살고 부처님 잘 모시는 삶을 산다면
그 마음이 우주에 가득차서 부처님이 되지 않겠는가?
◆
'나'라고 하는 놈은 무엇이든 붙잡아야지 그냥은 못 배긴다.
그 놈 때문에 우리가 고통과 윤회의 중생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지 않은가?
모든 것을 부처님께 바치면 거기에는 아만과 아집이 없으므로
시기, 질투, 명예를 위한 다툼이나 이권을 위한 싸움도 없고,
오직 공경심, 환희심으로 밝은 상락아정(常樂我淨)의 불국토이다.
◆
내가 이 업장을 닦겠다 하지 말고 진실한 마음으로 그냥 '부처님!' 하고 바쳐 보라.
마치 어두운 방에 전등 스위치를 켜는 것과 같을 것이다.
◆
백 선생님 말씀에,
"마음 속에서 올라오는 네 마음을 부처님 전에 바쳐라.
바치는 것은 자기 마음 속에서 일어난 공경심이지, 거기 누가 요구한 것도 아니니라.
공경심으로 상응되지 않으면 있다, 없다가 된다.
자꾸 바쳐서 공경심으로 상응되어 자연히 알아지고 실천되어야 한다.
부처님 전에 공경심을 내면 증거가 없으니 상이 없다.
공경심이 날 때 법계에 가득한 법문을 듣는다."
◆
마음 닦는 집안에서는 보통 '분별망상을 놓아라, 끊어라, 버려라, 쉬어라'고 가르치지만
백 선생님께서는,
'내가 아무 힘도 없이 무슨 방법으로 마음 깊숙이 숨어 있다가 올라오는
거센 업보와 번뇌를 놓고 끊을 수 있겠는가?
내가 끊겠다면 오히려 아상 연습이니 번뇌와 업보를 부처님 전에 공경심으로 바쳐야 한다."
고 말씀하셨다.
◆
백 선생님 말씀에,
"번뇌를 공양 올리면 공양 올린 공덕을 짓고,
부처님에 대한 공경심이 연습되면 주고 받는 업보의 그늘이 해탈되어 밝음을 이룰 수 있으니
지금 바로 이 순간 내 마음을 부처님 전에 공경심으로 드려라."
◆
마음 속을 늘 들여다 보는 연습은 공부의 근본이다.
남과 대상을 보지 말고 내 마음 속을 잘 들여다 보면
마음이 빠져 나와 거리의 사람들을 따라가 버리지 않는다.
마음이 늘 자신의 바치는 공경심과 함께 있을 때가 방심치 않는 경우일 것이다.
내면의 세계에서 게으름, 악심, 애욕 등 근본 업장들이 언제 튀어 올라올지 모르니
살얼음 위를 걷는 사람처럼 방심은 금물이다.
방심은 마음 들여다 보는 일을 게을리 한다는 말이다.
◆
금강경은 석가 여래 당신의 마음 살림살이를 있는 그대로 털어놓으신 말씀이다.
이는 몸과 마음이 가짓껏 건강하셨던 석가여래께서
하루 해로 비유하자면 밝음의 경지가 정오의 태양처럼 눈부시게 빛나셨을 때 하신 법문이기에
광명 그 자체라고 하셨다.
그래서 부처님의 마음 덩어리고, 광명 덩어리인 금강경을 수지 독송하면
3천 년 전 석가여래의 밝음을 향하고 그 밝음에 통하게 되어
자기 마음의 그늘진 업장은 해탈되고, 재앙은 소멸되고, 성리(性理)는 밝아질 수 있다고 하셨다.
◆
자신의 굽어진 마음을 바르게, 얕은 마음을 깊게, 좁은 생각을 넓게, 모난 생각을 원만하게,
어두운 생각을 밝게 바꾸어 나가려면 자신의 부족을 깨치는 지혜가 앞서야 할 것이다.
인간적인 모든 선입주견은 옳지 않은 줄 알고 그것을 바치는 데서 지혜는 크게 자란다.
◆
부처님 모시는 마음이면 '나'라는 고통이 없다.
시봉에는 '나'라는 것이 용납되지 않기 때문에 그 순간 만큼은 모두가 극락이고 밝은 일 뿐이다.
'나'라는 것은 몸뚱이이면서 고통이기 때문이다.
◆
아상이 그득한 마음에 아무리 무분별이라고 해 보아야 한갓 말에 불과하고 업장에 불과할 것이다.
그러나 절대공경에는 '나'라는 것이 없으므로 하는 일마다 저절로 무분별이 된다.
◆
공경받는 대상인 '부처님' 따로, 공경하는 주체인 '나' 따로 그렇게 보아서는 안 된다.
절대공경의 자리에는 '나'라는 것이 없으므로 따로 갈라질 것이 없다.
그러므로 부처님을 대상으로 그리지 말고 그저 '부처님~' 하는 그 마음을 향해 절하고,
'부처님~' 하는 그 마음을 향하여 부처님 친견하는 용심으로 공부하라고
(백성욱)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
사슴은 숲 속에서 먹이를 찾아 여기저기 다닌다.
그와 같이 지혜로운 사람들은 홀로 있는 자유를 찾아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어리석은 벗들은 좋아하지 않는 홀로 있는 자유를 찾아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총명하고 예의바르고 어진 동반자로 벗을 삼는다면 어떠한 난관도 극복하리니
기쁜 마음으로 생각을 가다듬고 그와 함께 가라.
그러나 그러한 동반자로 벗을 사귈 수 없다면 마치 정복한 나라를 버리고 가는 왕과 같이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와 같이,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과 같이,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 숫타니 파타 중에서 -
밝음을 하나하나 이루어가는 이들은
내면적인 충실을 위해서 무엇보다도 밖의 일에 흔들리지 않아야 한다.
마음 밖의 모든 일들을 쉬면 내면 세계의 깊숙한 곳에 있는 닦을거리들은 더욱 또렷하게 보인다.
그렇게 공부가 익어서 아상이 없어진 이는 허공처럼 조용하다.
◆
모든 사람은 부처님이다.
사람들은 보통 부처님을 어떤 낯선 곳, 높은 곳에서만 찾으려고 한다.
그러나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이 집과 동네, 또 시장에서도 부처님을 만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만나는 모든 사람을 부처님으로 보는 이가 바로 부처님이실 것이다.
◆
마음의 향내는 과향(果香)보다 진하다.
생선을 묶었던 새끼줄에서는 비린내가 나고, 향을 쌌던 종이에서는 향내가 난다.
탐 · 진 · 치 삼독심이 비린내라면 밝은 마음 · 아름다운 마음은 향내일 것이다.
과연 내게서는 어떤 냄새가 날까?
한 번 생각해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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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에 씌워진 검은 안경을 벗는 정진이 필요하다.
검은 안경을 낀 사람들은 해가 쨍쨍한 대낮에도 세상이 어둡다고 한다.
자기 마음을 가리고 있는 업장을 부처님 전에 바칠 때
세상이 밝고 환한 것을 비로소 알게 될 것이다.
◆
총명한 이들은 늘 입만 열면 이상형을 이야기한다.
총명한 이들은 더 좋아질 세계 · 밝음의 세계 · 이 마음 닦는 부처님의 세계를 이야기하고,
평범한 사람들은 사건을 이야기하고,
질이 낮은 사람들은 남의 잘못을 이야기 한다.
복 짓는 마음
복 짓는 마음
◆ ◆ ◆
복 많이 지은 이는 경제 한파 속에서도 마음이 든든한데,
복 지은 것이 없는 이는 경제 한파가 몰아칠수록 가슴이 후르르 떨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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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 짓는 이가 있는 가정은 후복하고, 복 짓는 이가 많은 국가는 번창한다.
업 잘 닦는 이가 있는 가정은 화목하고, 업 잘 닦는 이가 많은 국가는 부흥한다.
가정과 국가를 밝게 가꾸는 것이 닦는 이의 사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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닦지 않은 지혜 있을 수 없고, 짓지 않은 복 있을 수 없다.
정신에 미안치 않는 것이 지혜이며, 육신에 미안치 않는 것이 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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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소녀 가장들이 한 동네에서 태어난 인연은 지중하다.
그들은 남이 아니라 전생에 내 자식이었거나 후생에 내 자식이 될 인연들이다.
더 좋은 옷과 음식과 자동차를 취하느라고 우리는 늘 바쁘고 돈이 모자란다.
조금만 여유를 내서 그들을 돌본다면 그 때 느끼는 정신적인 풍요는
어떤 오욕락으로도 맛볼 수 없는 것이다.
◆
남을 돕겠다는 마음이 복이 된다.
부처님께도 바라는 마음을 내기 보다는 감사한 마음, 받들어 모시는 마음을 내야 한다.
우리와 같은 시기에 살면서 암 선고받은 이도 있고, 실직해서 어려운 이도 있고,
사업을 하다가 재산을 잃어서 고통에 빠져 있는 이도 있는데, 우리는 얼마나 행복한가?
이 고마움은 모르고,
"부처님, 직장 한 단계 더 오르게 해 주십시오, 돈을 더 많이 벌게 해 주십시오,
우리 아이 좋은 학교에 가게 해 주십시오..."
맨날 바라는 마음만 낸다면 일이 잘 안 된다.
왜냐 하면 빈 마음이라도 부처님 받들어 모시는 마음을 내야
부처님을 모시는 불보살님들이 기특해서 그 사람을 도와주기 때문이다.
감사한 마음을 연습할수록 복이 된다.
◆
인과는 에누리가 없다.
복을 지으면 복을 받고, 업을 지으면 업을 받는다.
그러나 업을 지었더라도 복을 지으면 업이 녹아내린다.
50대 후반에서 60대 초반의 대구에 사는 기독교 여신도 세 분이
아이들을 다 키워놓고 남편에게 허락을 받아 30일 가운데 20일을 봉사활동을 했다.
한 사람이 한달에 15 내지 20 가정씩을 맡아 다니면서 혼자 사는 노인들을 위해
빨래 · 청소도 해 주고, 기름 없는 집에 기름도 넣어주고, 밑반찬도 해 주고, 김치도 해 주면서
7년 정도를 바쁘게 살았다.
얼마나 향기로운 삶인가?
그런데 어떤 밝은 이가 보니 그이들이 과거생에 지은 업이
남을 정성껏 보살핀 공덕으로 싹 닦여졌다고 한다.
◆
금강경을 읽기만 한다고 다 잘 살고 재앙이 없는 것은 아니다.
절대 죄를 짓지 않으며, 과거 생에 지은 업장은 절대 닦으려고 노력하고,
어떤 형태로든 복을 지으려고 애를 써야 살림이 늘어가고 재앙이 없어지는 것이다.
닦고 복짓지 않는 것은 인생을 낭비하는 것이며, 그 미래는 내리막이다.
◆
저녁에 잠자리에 들기 전에 생각해 보라.
남에게 가슴 아픈 말을 하지는 않았는지,
어떤 형태로든지 남에게 손해 끼치는 일을 하지는 않았는지,
만일 하루에 두 가지 나쁜 일을 했으면
그것을 만회하기 위해서 세 가지 좋은 일을 하고 자야 할 것이다.
그래서 그 날 하루는 그 날 하루의 결과로 끝내야 한다.
오늘 나쁜 일 두 가지를 했는데 내일 좋은 일 세 가지를 하겠다고 한다면
진리답지 않은 삶이다.
오늘은 오늘로 매듭을 지어야 한다.
하루하루를 매듭지어가며 사는 사람은 내생이 정말 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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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진이 나쁜 날이라는 말들을 한다.
일진이 나쁜 날이란, 전생이나 두 생 전, 삼생 전, 십생 전, 백생 전에 살생을 했거나
남의 물건을 훔쳤거나 음란을 저질렀던 날이다.
이렇게 업을 지은 날은 이 생의 그날에도 재앙이 와서 일이 터지고 깨지고 사고가 나지만
다음 생 그날에도, 십생 후 그날에도, 백생 후 그날에도 재앙을 당하게 된다.
그런데 과거생 그날에만 죄를 지었겠는가?
그러니 업을 지은 게 많은 사람은 늘 당하고 깨지고 일이 틀어지는 것이다.
이 재앙의 굴레를 벗어나는 길은 마음 닦고 복 짓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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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가가 되어 천 년 동안 복을 지어도 사람이 하루 동안 짓는 복보다 못하다.
영가가 되면 업장 닦는 것도, 복 짓는 것도 못 한다.
그러니 사람 몸 받아 왔을 때 마음 닦고 복 지어야 한다.
짐승들이 사람 손에 죽으면 사람을 증해서 사람 몸 받는 경우도 있지만
그것도 복 지은 게 있어야 사람 몸을 받지, 그렇지 않으면 축생 몸으로 돌아간다.
이보다 더 복을 못 지었을 경우에는 떠돌이 영가가 된다.
복은 이렇게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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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의 가피가 있는 곳, 밝은 기운이 있는 도량은
계행을 지키고, 열심히 닦고, 부처님 전에 복 짓는 사람이 있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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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도 복이 우선이듯이, 마음 닦늰 세계에서도 복이 중요하다.
도통도, 밝은 세계에 가는 것도 공덕이 있어야 한다.
그래서 천상 세계에는 좋은 일 열 가지 한 사람이 가는 곳과
열한 가지 한 사람이 가는 곳이 각각 다르다고 한다.
복 지은 결과는 한 치의 에누리도 없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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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분이 가을에 밭을 지나다가 조가 누렇게 잘 익은 것을 보고
한 움큼 ?으니 조알이 우르르 떨어졌는데 다음 생에 소가 되어 갚았다고 한다.
공짜로 받으면 다음 생에 7배로 갚아야 한다.
밥 한 그릇을 이유 없이 얻어 먹으면 다음 생에 7그릇을 사 주어야 하고,
주먹으로 한 대 치면 다음 생에 7대를 얻어맞아야 한다.
그런데 공적 재산이나 부천ㅁ 재산을 횡령하면 어떻게 되겠는가?
몇 백 생을 갚아야 한다.
더구나 횡령한 것을 자식에게 주고 가면 자식의 장래도 안 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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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지 않을 것을 바랄 것이 아니라
아플 때는 아플 때 일어나는 마음을 부처님 전에 바치고,
건강할 때는 건강할 때 일어나는 마음을 바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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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와 가장 가까운 중생은 가족이 아니라 자기 육신이다.
육신이 자기가 아니고, 정신이 자기이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수천억만 생 육신이 자기인 줄 알고
오욕락을 추구하며 육신의 노예가 되어 살아왔다.
부처님을 향할 때 정신을 위해 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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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께 공경심을 내면 밝은 마음을 낸 공덕으로 내장이 다 건강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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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대를 부처님으로 보라.
부인은 남편을 부처님으로 보고, 남편은 부인을 부처님으로 보며,
또한 직장 동료를 부처님으로 보고, 이웃 사람을 부처님으로 보라.
그 순간에 내 마음에 그득한 성취감과 부처님 광명의 마음이 얼마나 우리를 편안하게 하며,
과거생 찌든 업장을 녹이는가?
상대를 부처님으로 보는 순간에 느끼는 환희와 공경심,
그것은 어떤 경제적인 부나 인생의 쾌락과도 바꿀 수 없는 것이다.
이 기쁨을 내며 속으로 만끽하면서 빙그레 미소짓고 사는 사람은 부처님의 경지에 가까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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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이 고운 것이 아니라
가는 마음이 고와야 오는 마음이 곱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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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음이 밝은 마음을 일으키면 밝은 마음을 일으킨 공덕으로
내 마음을 담고 있는 육신이 편안하고 좋은 파장을 받고,
악심을 내면 상대가 내 육신에 대해서 악심으로 대접해 준다.
내가 잘난 마음을 내면 세상사람들이 모두 나를 향해서 멸시하는 마음을 낸다.
우쭐대는 파장이 가니까 그쪽에서도 우쭐대는 파장으로 나를 대하는 것이다.
그러니 하심하라!
그리고 공경심을 내라.
◆
일이 꼬이고 안 되는 사람들은 자기 마음에 일이 꼬이고 안 되는 것이 있기 때문에
하는 일마다 꼬이고, 남들도 꼬이는 쪽으로 나를 대접해준다.
내 마음이 긍정적으로 밝고, 공경심으로 일을 성실하게 풀어가려는 마음을 내면
파장 따라 일은 되고, 그 파장 따라 남들도 나를 성실하게 대해 준다.
내가 남을 속일 마음을 내면 이 파장 따라 상대도 나를 속이려고 한다.
그러니 악심을 내지 마라.
악심으로 일처리를 하면 상대보다 내가 먼저 망한다.
◆
따뜻한 곳은 부처님밖에 없다.
중생은 이해관계 때문에 다 차다.
결혼을 할 때는 외로워서 짝을 찾는데, 짝을 찾아도 외로운 마음은 그대로이다.
이 외로움은 자기가 닦지 않으면 해결할 수 없다.
이 생만 그런 게 아니라 다음 생, 그 다음 생도 그렇다.
밖에서는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서 직장 끝나면 술 먹고 왁자지껄 정신 없게 하지만
술이 깨서 제 정신 돌아오면 외로움은 그대로 남는다.
그 순간에는 바쁘니까 외로움이 안 드러나는데,
사람들 가고 나면 외로움은 그대로 남는다.
닦아야만 해결될 것이다.
그러니 영생토록 나와 부처님의 대화의 채널이 아주 크게 연결되도록 하는 방법을
빨리 개발해야 한다.
◆
자식에게 집착하는 마음이 자식의 일을 그르친다.
옛날에 어떤 분의 딸이 독일에 간호사로 가기로 되어 있었는데, 차질이 생겼다.
그 어머니는 빚을 내서 딸이 독일 가는 수속을 밟아 놓았기 때문에
몇 달간 대책 없이 이자가 불어나니 마음이 조급해질 수밖에 없었다.
이 일에 대해 백 선생님께 여쭤보니, 어머니가 딸이 독일에 못 가도록 막는다고 하신다.
깜짝 놀라 무슨 말씀인가 여쭈니,
그 어머니가 딸을 빨리 독일에 보내야 한다는 조바심을 낼 때마다
딸의 주위에 그 마음이 감싸서 딸의 일을 그르친다고 하신다.
마음의 작용은 이렇다.
꼭 가라는 마음, 왜 빨리 안 가나 하는 조바심이 딸에게 가니
딸의 일이 휘청거린다.
사람들은 자기 자식이 잘 되게 하려는 집착이
자기 자식의 앞길을 막는 역할을 한다는 것을 모른다.
그러니 그런 생각이 들면 깜짝 놀라서 바치고 그 마음을 쉬어라.
그리고 그 일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원 세울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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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당에 가더라도 부처님 마음을 기쁘게 해 드리기 위해서 간다고 생각하라.
모두 자기 좋으려고 법당에 가는데,
만일 부처님 마음을 기쁘게 해 드리기 위해서 갈 수만 있다면 이것은 엄청난 것이다.
천생을 살아도 중생의 태를 못 벗는데,
빈 마음이라도 부처님 마음 기쁘게 해 드리겠다는 생각을 하면,
그게 사람의 마음 속에 있을 수 없는 생각을 있게 해서
선근이 자라서 업장을 다스리게 하는 것이다.
◆
심성을 바꾸자.
불편하고 답답한 자기 마음을 바꿀 수 있는 자가 능력자다.
사람들은 자기 마음을 바꾸지 못하니까 지옥고를 겪으면서 살아가고,
열등감을 안고 살아가고, 조금만 잘 하면 우월감을 안고 살아간다.
열등감도, 우월감도 잘못된 생각인데, 사람은 생을 거듭하면서 더욱 연습하며 살아서
이게 업장이 된다.
원래 청정한 마음 자리는 우월감도 없고, 열등감도 없는데,
현실을 살다 보니 현실에서 느끼는 어떤 생각이 교류되고, 쇼크를 받고,
자기의 어두운 판단으로 '나는 잘났다, 나는 못났다', 이 두 가지로 해서 업을 지어서
그 업을 안고 남하고 시비가 벌어지고, 결국은 업연 속에 휘말려 사는 게
중생들이 생사를 유전하는 현실이다.
그걸 벗어나기 위해서는 '나'를 용납하지 말라.
내가 강한 사람은 마음 닦기 힘들고, 영원히 업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한다.
마음을 안 닦아 정신이 썩어 버리면 정상적인 삶을 살지 못한다.
월급 타고 막고 산다고 정상적인 삶은 아니다.
정신이 건강한 사람만이 밝은 삶을 산다.
◆
그 사회의 병리 현상이 모두 정신이 썩은 데서 나온다.
심성이 타락한 데서 공장 매연이 나오고, 성 추문과 환경 오염도 나온다.
그런데 그 오염된 환경의 후손이 누구인가?
바로 다음 생의 여러분이다.
인과란 한 호리의 오차도 없다.
많이 버린 이가 많이 받는다.
그러니 미래에 그렇게 될 원인을 미리 닦고, 그런 썩은 정신을 치유하기 위해서
빈 마음이라도 부처님 기쁘게 해 드리겠다는 마음을 내라.
더 밝은 광명의 세계에 한 걸음 더 내딛기 위해서,
내 마음을 광명의 세계로 내딛지 못하게 하는 이 업과 속박의 업장을 벗어나기 위해서
빈 마음일망정 법당에 가는 것도 부처님 마음을 기쁘게 해 드리기 위해서 간다는 생각을 하라.
◆
자기가 없어야 부처님과 바로 통한다.
내가 없으면 바로 광명이고, 지혜이고, 밝음이다.
◆
공부라는 것은 부처님 광명을 향해서 영혼을 밝히는 것!
◆
사람들이 무슨 마음을 연습하고 대충 사는가 하면
잘난 마음, 과시하고 싶은 마음, 남을 원망하는 마음, 남을 흉보는 마음, 남을 어리게 보는 마음,
악심, 허무한 마음, 답답한 마음, 향락을 추구하는 마음, 자포자기하는 마음...
대충 이런 마음들을 연습하며 산다.
이것이 밝은 마음 연습이 아닌 것조차도 모른다.
◆
마음은 영특해서 밝은 마음 연습으로 복과 지혜가 그득해지면
부처님의 경지까지 오를 수 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 마음을 잘못 써서 불행을 초래한다.
◆
부처님께서 육신 속에 영지 보물이 있다고 하셨는데, 그게 바로 '마음'이다.
마음은 육신 속의 보배라 할 만큼
마음 쓰는 작용 따라 행복이 오기도 하고, 불행이 오기도 한다.
그러니 여러 생 부정적인 마음 연습한 것은 바치고,
긍정적인 마음 나지 않던 것을 매일 빈 마음이라도 연습해서
내 인생을 긍정적으로 바꿀 일이다.
◆
밝고 건강하고 공경스럽고 긍정적이며 남을 보살피는 마음...
이런 귀한 마음을 일으키면 이 파장이 퍼져서 멀리 성층권 어디에 부딪쳐 이 심파가 돌아온다.
돌아와서 내 몸에, 가정에 닿는 것을 복과 행운이라 한다.
또 어두운 마음을 일으킬 때마다 이 파장이 퍼져서 우주 성층권 어디에 부딪쳤다가
내게 다시 돌아오는 것을 재앙이라고 한다.
◆
한 마음이 내 인생만 좌우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의 가정의 미래도 좌우한다.
그런 사람들이 모여 사는 국가의 미래도 좌우한다.
유럽의 경우는 그 국가에 모여 사는 사람들의 마음이
국법을 준수하고, 정직한 마음을 연습하며, 근검절약하기 때문에
이것이 큰 공덕의 근거가 되어서 국운이 좋다.
국민들의 마음이 뭉쳐서 국가의 진퇴가 결정되는 것이다.
사람들의 마음이 바뀌면 개인의 운명, 가정과 국가의 기운, 지구 · 우주가 다 바뀐다.
마음이 모든 것의 중심이다.
◆
인생이 무대라면 기왕이면 지혜로운 이의 역할을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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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사람의 마음은 텅 비고 고요한데, 탐진치를 연습해서 깨끗한 마음이 물들게 되었다.
물든 마음을 부처님 광명에 바쳐라.
부처님 광명에 바쳐지지 않는 업장은 없다.
사람들이 탐진치가 나를 망치는 웬수라는 것을 모르기 때문에 더 연습하는 것이지,
일단 그것을 알게 되기만 하면 닦기가 훨씬 쉽다.
그러니 거듭거듭 하심하고, 거듭거듭 상대를 부처님으로 보는 노력을 하라.
◆
자기 모습과 표정을 자기 마음이 만드는 것이라면,
잘못된 자기 마음을 바치고, 공경심을 연습해서 밝게 바꿀 수 있는 의지가 필요하다.
바칠 줄 모르는 보통 사람들은 그대로 살지만
마음 닦는 사람들은 부처님을 위해서 산다는 마음가짐으로
얼굴 표정과 행동과 말을 바꾸어 가기 때문에 귀하다.
상대를 부처님으로 보라.
부처님 경전에, 모든 이들이 다 성불하게 될 것이라고 했으니 모두가 다 장래 부처님이시지만,
마음 닦는 이들은 상대를 장래 부처님이 아니라 현재 부처님으로 보아서
자기 마음 밝혀가는 것을 해야겠다.
부처님 앞에서 어떻게 굳은 표정을 지을 수 있으며,
부처님 앞에서 어찌 겸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
기분 나쁜 생각을 속으로 끙끙 앓지도 말고, 꾹 덮어 버리고 다른 일을 하지도 말고,
기분 나쁜 생각에다가 공경심으로 '미륵존여래불'만 해라.
◆
금강경에, '여래실지실견시제중생(如來實知實見是諸衆生)'이라는 말이 있다.
여래는 이 지구상의 60억 인구 뿐만 아니라 많은 동물들, 식물들을 다 보시고 아신다고 하였다.
또 '시제중생의 약간종심을 여래실지하시나니',
즉 모든 사람들이 그때그때 마음 일으키고 궁리하는 것도 다 아신다고 하였다.
우리가 부처님 광명과 같이 있는 것이다.
직장에 있든, 거리에 차를 몰고 가든, 집에 있든 부처님은 다 아시고, 다 보신다.
1분간 석가여래 부처님이 계신 앞에서 여러분들의 응어리진 마음, 걱정, 답답한 마음,
원망스런 마음, 갈등 등을 공경심을 내어 다 바치는 마음을 연습해 보라.
◆
이 우주법계에는 부처님의 밝은 광명이 꽉 차 있다.
그런데 사람들이 업장 때문에 그것을 느끼지 못한다.
상대를 부처님으로 보는 순간에는 '나'라는 업장, 아상이 쉬니까
우주의 광명을 그냥 느끼게 되어 부처님 기운과 하나가 된다.
◆
내가 내 공부를 한다, 내 업장을 닦는다 하는 것이 얼마나 좋은 생각인가?
이 세상에 그런 사람도 희귀하다.
그런데 내가 내 공부를 한다, 내 업장을 닦는다 그러면 공부 되기가 어렵다.
왜냐 하면 내가 좋아지기 위해서 내 공부를 하고, 내 업장을 닦아서
어떤 밝은 경지로 가고자 하는 생각은 좋은 생각이지만
내가 좋아지겠다, 내가 밝은 경지로 가겠다 하는 그 속에 포함된 생각이 아상 연습이다.
아상 · 인상 · 중생상 · 수자상을 닦으면 곧 부처님이라는 말씀이 금강경에 나오는데,
나를 근본적으로 없애는 첩경이 무엇인가 하면,
부처님 마음을 기쁘게 해 드리기 위해서 살고,
공부가 되어지려는 목적도 부처님 마음을 기쁘게 해 드리기 위해서 공부하려고 노력하고,
공부되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보통 나만 도통하겠다, 내가 한 소식 하겠다 하는데, 그러면 한 소식이 될 수가 없다.
'나'를 빼야 한 소식이 된다.
나를 빼는 방법이 부처님 마음을 기쁘게 해 드리기 위해서 한 소식을 한다 하면
한 소식이 된다.
구경목적이 부처님께 귀의하기 때문에 그것은 밝은 자리에서 비치는 광명 때문이다.
그런데 부처님도 안 계시고 내가 도통하겠다 하면 천년만년 해도 절막강산이다.
공부하는 사람들이 대충 내가 공부해서 주위를 깜짝 놀라게 해야 되겠다는 생각인데,
그러면 공부가 안 된다.
공부란 업장 닦는 과정을 말하는 것이지,
공부의 결과가 이루어지고 도가 높아지는 것에 마음을 두면 아주 위험하다.
공부하는 사람들이 보통 이런 생각을 옳다고 하지만
밝은 자리에서 보면 옳지 않다.
(이런 자세로 공부하면) 몇 생을 닦아도 안 된다.
내가 없는 경지, '나'라는 아상을 죽이는 그 자리가 공부다.
◆
부처님을 친견하도록 공부하라.
부처님께서 기뻐하실 생각과 행위를 하라.
◆
호흡지간에 공부가 있어야 한다.
숨 들이쉬고 내쉬는 2~3초간에 상대를 부처님으로 보는 게 되어야 한다.
◆
공경심을 개념으로 생각하려고 하지 말고,
상대를 부처님이라고 결정짓고 보면 공경심이 나면서 자기 마음에 변화가 생긴다.
◆
내가 강하면 강할수록 고통스럽고, 부딪치는 게 많다.
내가 없고 부처님만 모신다면 그냥 밝고 즐거울 뿐이다.
부처님 모신 공덕으로 마음이 편안하고,
나를 모시는 공덕으로 세상살이가 고달프다.
편안한 마음이니, 하는 행동과 하는 말도 편안하다.
'나'라는 아상이 없다.
◆
불법은 나를 비우는 공부다.
나를 비우자니까 주위 사람을 부처님으로 모시자는 것이고,
마음에 부처님을 모시는 사람이면 하는 일이 다 잘 될 수밖에 없다.
"부처님~" 하는 그윽한 광명을 마음에 공경심으로 모시니,
그 사람이 하는 생각과 말이 전부 다 밝다.
그리고 재앙이 없다. 부딪치는 게 없다.
'나'라는 걸 가득 안고 말하면 다 부딪친다.
'나'라는 아상의 파장이 상대의 아상에 자극을 주어서 불꽃이 튀긴다.
그러니 아상을 닦아라.
마음속에 부처님을 모시고 살면 24시간이 참 즐겁다.
◆
업장하고 맞대결 하지 마라.
업장은 수억 천만생 연습해서 크고도 단단하고, 그대는 아직 법이 안 섰는데,
업장에 맞서겠다고 하면 그대가 깨진다.
그것은 계란 가지고 바위를 깨는 격이다.
공경심을 내면 업장이 그냥 녹아내린다.
그러니 앞에 석가모니불이 계신다고 생각하고 공경심을 내서 바쳐라.
억지로라도 공경심으로 바쳐라.
공경심은 밝음으로 확 뛰어들어가는 경지이다.
바치기 전에 업장이 막 올라올 때도
바로 앞에 부처님이 계신다고 생각하고 공경심을 그득히 내서 바치다 보면
얼마 안 가서 그 마음이 없다!
첫댓글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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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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