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년전 MBC 에서 방영됐던 '이제는 말할수 있다.'라는 프로에서 '10.26'과 '박정희 핵개발'
관련설을 다룬적이 있다.
여기서 미하원 '프레이저 보고서'를 인용했는데 한국은 70년대 국방 과학연구소와 무기개발위원회를 만들고 핵무기 개발을 만장일치로 결정했다는 증언이 나왔다.
이 보고서에서 '압록강까지 가는 미사일에 핵을 탑재한다는 박정희의 의지가 피력되었다.'
그후 당시 무기 개발위원회의 일원이었던 '유재홍' 전 국방장관이 증언함으로써 박정희 정권의 '핵개발 계획과 의지'는 기정 사실임이 밝혀졌다.
그런 '사실'도 침묵하고 부정하는 사람들이 아직도 있지만...
문제는'어디까지 진행이 되었었나 ?'와 '10.26 연관성(미국의 박정희 제거설)'일 것이다.
74년부터 진행된 이일로 미국의 감사와 압력은 지금의 '김정일 정권'에 대한것과 흡사했다.
다른점이 있다면 공식(북한)과 비공식(한국)의 차이점이었다.
미국과 한국의 첩보전 와중에 박정희 정권은 핵심 기술을 프랑스에서 도입했다.
분명한 '펙트'는 그 가난했던 나라가 세계에서 6번째로 미사일 개발에 성공했고 핵개발
막바지에 10.26이 터졌다는 것이다.
비웃던 미국은 상상도 못했던 일이다.
그럼 그후는 어떻게 되었을까 ?
요즘 '제5공화국'을 재밌게 보고 있는데 역시 '이덕화'씨 연기는 칭찬받을 만하다.
드라마의 그시점에서 미국은 발빠르게 상황 판단을 하고 차후 전두환 정권과 미국 국익에
'부합한 협상'을 준비한다.
12.12 쿠테타 이후 '장거리 미사일 개발 계획'과 '핵개발 계획'은 역사에서 깜쪽같이
사라지게 됩니다. (흔적도 없이 완전히 사라졌다.)
그후 모든 극비 문서는 폐기되고 관련자들은 해외로 가거나 철저한 '침묵'을 하게 됩니다.
쿠테타에 성공한 전두환 정권은 대미관계를 의식하지 않을수 없었고 정권을 인정받기 위해선
미국의 요구를 들어줄수 밖에 없었겠죠.
서로의 이해관계속에 역사속에서 사라진 모든 관련 문서들...
그러나 다 사라지고 언제까지 '침묵'만 할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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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은 흘러 25년이 지난 지금...
이 야기들의 '개연성 한계'는 저도 인정합니다. (개인적 의견임을 전제)
가끔 그 계획에 참여했던 사람들에 의해 조금씩 이야기는 나오지만 아직은 미국의 눈치땜에 서인지 몇몇 글들과 증언을 통해 우리가 결과론적 개연성을 가지는 정도라고 밖에 말할수
없습니다.
그러나 언젠가 어딘가 묻혀있을 그당시 자료들은 자주적 정부에 의해 세상에 나타날 것이며 진실은 밝혀질거라는 개인적 확신이 있습니다.
그것은 '박정희'의 죽음과도 연관이 있으므로...
(반론도 많으나 전 미국의 '암묵적 방관'내지는 '부분 개입'이 있었다 믿는다.)
미국과 박정희의 살어름판 같았던 관계...
대부분의 사람들은 당시 '핵개발 시도가 있었다' 수준으로만 알고 있으나 실상은 긴박함과 C.I.A 와 K.C.I.A(중앙정보부)의 첩보전,한미의 불화,개연치 않은 박정희의 암살과 너무나
재빠르게 이루어진 뒷마무리...
의문속에 사리진 역사의 진실...
왜 그렇게 된것일까요 ?
미국의 입김에 좌우되는 현실을 타파하려 자주국방의 일환으로써 핵개발은 실제로 있었고
그 과정에서 세계에서 6번째로 미사일을 생산하는 나라가 된것입니다.
30년전에 현재의 미사일 사거리의 미사일을 만들 능력이 있었단 말이죠.
이후 정권에서 핵개발과 더블어 미사일 개발을 현상태만 유지 시키는 미국에 아부하는 정책
으로 더 이상의 미사일 사거리 성장이 중단된 것입니다.
(최근에 사거리 조정 이야기가 나왔지만 아직은 별 실효성이 없어 보인다.)
핵개발이 독재에 이용하기 위한 수단이든 아니든 파키스탄의 예처럼 개발이 되었더라면 남북
관계와 한일,한미관계가 지금과 같지는 않았을 겁니다.
역사적 '사실'에 대한 궁금증을 떠나서...
한반도 비핵과 원칙에 평화주의 차원에서는 찬성이지만 강성해지는 중국과 잦은 도발을 하는
일본 그리고 '핵우산'이라는걸 미끼로 경제적,국익적 희생을 요구하는 미국의 작금의 현실을 본다면 힘의 균형 차원에서 일부 필요성은 느낍니다.
그러나 핵에 관련한 저의 주장은 '전 세계적 핵폐기 논의'가 필요한 시점이라는 것이죠.
그것이 핵미사일을 제일 많이 보유한 미국이 테러집단의 1,2개의 핵을 두려워하는 아이러니를 사라지게 하는 방법일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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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긴박했던 70대를 이야기하면...
당시 핵개발과 더블어 독자적 군현대화 작업과 인권문제로 미국과의 관계가 최악의 상황까지 가게 되었습니다.
주한대사까지 본국으로 소환한걸루 알고있습니다.
또 10.26이 일어난 시점과 당시 C.I.A 관계자들의 언행과 행동이 석연치 않습니다.
미국은 극비문서를 주기적으로 공개하는것이 관례가 되어 있습니다.
그럼에도 이승만 시대의 문건과 전두환 시대의 문건은 지금 일부 공개되고 있지만 박정희에 대한 C.I.A 문건은 아직 금기시 되고 있습니다.
얼마전 '이승만을 제거하라'라는 '에버플렌'이라는 문건은 공식적으로 공개되었습니다.
미국의 지지를 업고 대통령이 된 이승만도 제거의 대상이었습니다.
내용은 '이승만의 감금', '유엔 군정실시' 등의 충격적인 내용을 담고 1953년 '에버레리플랜'으로 나타났습니다.
이승만의 휴전반대와 반공포로 석방으로 실행 직전까지 갔던 이 계획은 비록 실행되지는
못했지만 미국의 이해에 반하는 이승만의 행동이 나올때마다 표면으로 드러났었습니다.
일국의 대통령을 자국의 국익에 맞지않다하여 교체할 계획을 한 미국이 이승만보다 갈등이 더했던 박정희를 제거할려 했다는설은 낭설은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하는군요.
당시 미국은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것입니다.
그리고 박정희에 관련된 비공식(출처에 대한 의문) C.I.A 보고서를 보았습니다.
(비공식 문서임을 전제하죠.)
물론 미국정부에서는 부정하지만 이른바 박정희 다음 정권의 구상이라는 제목의 보고서는
직접적은 아니지만 간접적으로 민족주의적 반미성향의 박정희를 간접적인 공작으로 퇴진시킬려는 목적의 문건이었습니다.
그것이 실행된건지 김재규가 개인적으로 한 행위인지에 대한 진실은 언젠간 공개적으로 밝혀지리라 믿습니다.
이문건에 대한 신빙성이 절대적인것이 아니라는점 때문에 제가 자신있게 단언하지는 말하진 못하지만 여러 증언과 상황이 스스로 에게는 확신을 갖게 하는군요.
개연성으로 시작된 의문과 상황이 김재규의 우발적 단독범행이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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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의 저의 글은 '개연성'에 머물지만...
언젠가 그들중 누군가 그때의 핵개발을 위한 박정희의 집념과 그걸 저지 하려는 미국 C.I.A 의 보이지 않던 갈등을 공식적으로 공개하리라 믿습니다.
더 나아가....
미,중,러등 이미 핵을 보유한 나라들의 '핵 폐기' 노력이 멈춘 시점에서 '한반도 비핵화'란 평화주의적 발상 강요는 앞뒤가 맞지 않는다 할까요 ?
'북핵문제'를 바라보는 관점이 전 좀 다릅니다.
이번일을 통해 한반도에 국한된 문제 의식이 아니라 범 세계적 '핵 폐기 논의'에 관심을
가지는 계기가 됬으면 합니다.
김재규 (金載圭.사형.당시 중앙정보부장) 의 박정희 살해 동기에 대해서조차 여전히 의견이 분분하다. 당시 군 검찰관으로 이 사건을 수사한 A (변호사) 씨는 김재규의 성격과 취향을 들어 순간적인 충동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았다.
그의 증언. "김재규는 일본 사무라이 소설을 많이 읽어서인지 수사중 사무라이의 '앗사리한 자세' 와 '삶을 초개같이 버리는 생사관' 에 대해 자주 언급했습니다. 욱 하는 성질에 당시 심각한 간경화로 매우 신경질적이었죠. 아버지의 묘소가 제왕이 날 자리라는 얘기도 있었고요. 수사과정에서 풍수지리에 대한 얘기를 많이 합디다."
이 설명은 金의 당시 심리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시해 현장의 목격자였던 김계원 (金桂元.74) 당시 대통령비서실장은 당시 차지철 (車智澈.작고) 경호실장의 지나친 월권행위와 오만불손한 태도를 그 동기로 꼽았다.
운명의 그날 밤 궁정동 만찬장에서도 화제가 정치문제로 옮겨지자 김재규는 궁지에 몰렸다. 김계원의 증언.
. "朴대통령이 당시 국회에서 제명된 김영삼 (金泳三.70) 신민당총재를 구속 기소하지 않은데 대한 불만등을 터뜨리며 중정을 나무랐어요. 그런데도 김재규는 계속 온건한 정국 운영을 건의합디다. 그러자 옆에 있던 차지철이 '신민당이고 뭐고 까불면 전차로 싹 쓸어버리겠습니다' 라며 金을 공격했어요. 바로 그때 일이 벌어진 겁니다."
김재규 10.26前 CIA 만나
결국 차지철에 대한 김재규의 누적된 불만이 한순간 폭발해 옆에 있던 朴대통령까지 살해하게 됐다는 얘기다. 10.26직후 계엄사 합동수사본부 수사제1국장으로 김재규를 직접 조사한 백동림 (白東林.61.한국국민의식연구소 소장) 씨 역시 두가지 이유를 들어 10.26은 단순 살인사건이라고 주장했다.
"김재규는 처음 만찬장에 들어갈 때 평소와는 달리 권총을 갖고 들어가지 않았어요. 또 시해 직후 용산 육군본부로 차를 몰고 갔지요. 만약 치밀한 각본에 의해 결행된 사건이었다면 당연히 남산 중정으로 갔을 겁니다." 그렇다면 왜 차지철에 대한 불만이 朴대통령으로까지 비화됐을까. 박정희와 김재규의 관계를 살펴보면 이런 의문은 더욱 커질 수밖에 없다.
박정희는 1917년생, 김재규는 1926년생이지만 육사 2기 동기생이었다. 고향도 같은 경북 선산군이었고, 술자리에서 부르는 '18번' 도 '으악새 슬피우니' 였다. 박정희는 김재규를 매우 아꼈다.
...
두 사람의 성격을 잘 아는 김종필 (金鍾泌.71) 자민련 총재는
"김재규는 제 방귀소리에 놀라는 사람처럼 차지철을 죽이는 총소리에 놀라 엉겁결에 朴대통령을 살해했을 것" 이라고 추정했다.
그러나 일부에서는 김재규의 살해 행위가 계획적으로 저지른 것이라고 주장한다. 김재규도 군 수사와 법정신문에서 "유신 이후 네차례 朴대통령을 암살하려 했다" 고 밝혔다. 80년 2월21일 강신옥 (姜信玉.61) 변호사에게 한 구술유언에서도 "자유의 물이 흐르는 강을 가로막고 있는 제방을 내가 제거했다" 고 주장했다.
그러나 군검찰관이었던 A씨는 "재판이 진행되면서 점점 그런 논리를 갖추어 가더라" 고 전하면서 "죽음을 앞두고 이름이나마 역사에 남기고 싶었을 것" 이라고 일축했다.
김재규의 주장과 행적 사이의 납득할 수 없는 괴리를 미국 개입설로 설명하는 사람도 있다. 당시 미국 개입설이 나름대로 설득력있게 퍼진 것은 10.26 며칠 전 김재규가 로버트 브루스터 미 중앙정보국 (CIA) 한국지부장을 만난 사실이 확인됐기 때문이다. A씨는 이 부분에 관심을 갖고 金을 신문했다고 한다.
그의 증언.
"수사를 서둘렀기 때문에 충분히 파헤칠 시간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金은 '시국 얘기를 한 것은 사실이나 朴대통령의 살해와 관련된 얘기를 나눈 적은 없다' 고 말했어요. "
美,大韓통제력 상실우려
미국 개입설은 당시 극도로 불편했던 한.미관계 때문에 더욱 소문이 꼬리를 물었다. 76년 10월 박동선 (朴東宣) 사건을 시작으로 연이어 터진 미국의 청와대 도청 (盜聽) 사건, 특히 77년 1월 '인권외교' 를 표방하고 출범한 지미 카터 행정부의 인권개선 공방과 주한미군 철수 논란등이 이어졌다.
10.26 발생 20여일전 김영삼 신민당총재 국회제명사건에 대한 항의표시로 미국정부가 윌리엄 글라이스틴 대사를 소환하면서 양국관계는 최악의 상태로 치달았다. 미국 개입설이 나돌자 글라이스틴은 "헛소리며 쓰레기같은 이야기" 라고 단호히 부인했다.
그런데 70년대 중반 합동참모부에 근무했던 한 예비역 고위장성 Z씨는 주목을 끌만한 증언을 했다.
"아마 78년 이후일 겁니다. 미군 고위관계자가 나에게 '박정희 이후를 생각해 본 적이 있느냐' 며 '당신은 생각이 없는가' 라고 넌지시 묻더군요. "
70년대 국방과학연구소에서 핵폭탄 설계연구 책임자였던 과학자 X씨도 비슷한 증언을 했다.
"76년 여름 CIA관계자가 '박정희를 사라지게 하면 어떻게 될까' 라고 묻더군요. 그래서 '내가 무슨 소리냐' 고 반박했더니 '박정희가 사라지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물었던 것' 이라고 얼른 말을 바꾸더군요. "
이러한 증언들 역시 미국 개입설의 직접적인 증거는 못된다.
하지만 한국에 있던 미 CIA요원과 주한미군, 미대사관 관계자등을 통해 이런 유의 얘기를 들은 사람들은 의외로 많다. 박정희의 죽음이 미국과 직접적인 관련은 없다 하더라도 당시 사회지도층 인사들에게 "미국은 박정희의 제거 내지는 하야 (下野) 를 강력히 희망하고 있다" 는 메시지를 던져주기에는 충분했던 셈이다.
그런 맥락에서 김재규가 1심 최후진술에서 박정희를 살해한 이유중 하나로 한.미관계의 회복을 언급했다는 대목은 흥미롭다. 그의 진술. "혁명 (그는 10.26을 혁명이라고 불렀다) 을 일으킨 목적은 혈맹인 미국과의 관계가 건국이래 가장 나쁜 상태에서 이 관계를 완전히 회복해…. "
그렇다면 미국은 박정희의 어떤 부분이 가장 마음에 안들었을까. 예비역 장성 Z씨는 "70년대 중반 이후 한.미연례안보협의회의 가장 큰 쟁점은 한국의 핵무기 개발 문제였어요. 카터행정부가 들어선 이후 한.미 갈등이 첨예화했는데, 표면적인 이유는 인권문제였지만 내면에는 핵문제가 깔려 있었습니다" 라고 증언했다.
그 무렵 청와대 수석비서관을 지낸 Y씨는 "79년 6월 카터의 방한 당시 들어온 CIA요원 2백50명중 상당수가 귀국하지 않고 10.26까지 남아 있었다는 얘기를 들었다" 고 말했다.
한국의 지도자는 국제사회에서 독자행보를 시작하는 순간 미국과 마찰을 일으키게 마련이다. 이승만 (李承晩) 과 박정희.김영삼정권이 그 예다. 전두환 (全斗煥).노태우 (盧泰愚) 정권이 미국과 부드러운 관계를 유지한 것도 미국의 입장에 순응했기 때문이다. 미국의 동북아전략의
핵심에는 일본이 놓여 있으며 한국은 그 보호장치에 불과하다.
한국이 핵무기를 보유하는 순간 미국의 대한 (對韓) 통제력은 사라지며, 일본도 미국의 핵우산에서 벗어나 핵무기를 보유하려 할 것이다.
미국이 한국의 핵무기 보유를 결사 저지해야 하는 이유다.
취재과정에서 만난 당시 핵개발 관여 과학자들은 한결같이 핵문제에
대해서는 입을 열지 않으려 했다.
"기사가 나가면 나도 어떻게 당할지 모르지만 당신들도 다친다" 는등
대미(對美) 공포증을 토로했다. 물론 기우일 수도 있다.
핵개발 과정에서 미국의 엄청난 시달림을 받으면서 생긴 피해의식의 발로일지도 모른다. 이들은 대부분 박정희의 죽음을 미국과 연결시키는 공통점도 갖고 있었다. 박정희의 핵개발은 미국의 신경을 극도로 자극하는 폭발성 뇌관이었다.
그럼에도 박정희는 운명할 때까지 핵개발의 집념을 불태우고 있었다. 당대의 비밀을 무덤까지 가져가겠다던 당시 핵심관계자들은 "있었던 사실을 없던 것으로 묻어 버리는 것은 역사와 국민앞에 죄를 짓는 것" 이라는 취재팀의 오랜 설득에 마침내 18년만에 입을 열었다.
29.핵개발2
소설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가 아닌 실화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가 있었다. 작가 김진명 (金辰明.39) 씨가 국제적인 핵물리학자 이휘소 (李輝昭.77년 작고) 박사가 의문의 죽음을 당한 것을 소재로 쓴 이 소설은 93년 8월 출간, 1년도 안돼 3백만부가 팔렸으며 영화로까지 제작돼 박정희 (朴正熙) 시대의 원폭 (原爆) 개발에 대한 비상한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박정희시대의 핵개발을 지휘.감독한 청와대 경제 제2수석실의 김광모 (金光模.64.테크노서비스 사장) 비서관은 이휘소 박사 관련설을 전면 부인했다. 핵개발에 참여했던 과학자들 역시 "이휘소 박사의 전공은 핵개발과 직접 관련이 없는 순수이론물리학" 이라며 "그를 핵개발과 연관시키는 것은 난센스" 라고 일축했다.
그러나 이 소설과 유사한 사건들이 당시 핵개발팀 주변에서 실제로 발생했다는 사실은 흥미롭다. 핵개발팀은 어떻게든 미국이라는 감시자를 피해 핵개발 사실을 숨겨야 했고, 미국은 핵개발의 단서를 잡아내려고 정보망의 촉수 (觸手) 를 곤두세웠다. 74년 11월9일 한국의 핵과학자 3명이 극비리에 프랑스 파리 교외의 오를리 국제공항에 도착했다.
하늘은 푸르렀다. 이들은 공항에서 택시를 타고 개선문 옆 쿠버보아가 (街)에 잡아놓은 숙소로 향했다. 이들은 택시 안에서 깜짝 놀라야 했다. 택시기사가 "한국에서 온 핵과학자냐" 고 물었기 때문이다. 순간 이들은 바짝 긴장했다. 심상치않은 느낌이 들어 숙소에 도착할 때까지 일절 핵관련 얘기를 주고받지 않았다.
'한국원자력연구소 30년사' 에는 "74년 11월9일부터 12월10일까지 주재양 (朱載陽.64.재미.전 원자력연구소 제1부소장) 외 2명, 핵연료 가공및 재처리사업 추진차 프랑스 방문" 이라고만 기록돼 있다. 프랑스를 방문한 그들의 구체적 목표는 물론 나머지 2명의 이름조차 언급이 없다.
취재 결과 주재양씨 외에 원자력연구소 화공개발실장.한국핵연료개발공단 건설본부장을 지낸 윤석호 (尹錫昊.68.전 충남대 교수) 박사와 원자력연구소 핵연료연구실장.한국핵연료개발공단 핵연료 연구부장으로 일한 박원구 (朴元玖.65.인하대 금속공학과 교수) 박사가 바로 그들이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23년만에 비밀 털어놔
尹박사는 "23년만에 처음 공개한다" 며 그동안 가슴에 묻어 뒀던 비밀을 털어놓았다. 尹박사 일행이 핵연료 성형가공 시험시설 도입에 관한 가계약을 서커사와 체결한 직후부터 이들 주변에서는 심상치않은 사건들이 발생하기 시작한다.
尹박사의 증언.
"다음날 아침 재처리기술과 시설 도입에 관한 가계약을 체결하기 위해 상고방 회사에 갔더니 직원이 '어젯밤 서커사에 화재가 발생했다' 며 '절대 밤에 나돌아다니지 말라' 고 주의를 줍디다. 당시 우리는 이 말을 크게 유념하지 않았더랬어요. "
이때부터 상고방사는 이들에게 안내인겸 경호원을 붙였다. 그러나 가계약을 체결한 날 저녁 尹박사 일행의 기술협상 창구였던 상고방사의 궤세라는 인물이 차안에서 의문의 변사체로 발견됐다. 사인은 심장마비. 그의 부인은 남편의 갑작스런 죽음에 대해 며칠 동안 회사측에 납득할만한 해명을 요구하며 거칠게 항의했다.
尹박사는 "일련의 사건들이 서커사및 상고방사와 가계약을 체결한 날 발생했기 때문에 우연이라고 보기엔 너무나 이상했다" 며 "귀국 비행기에 올라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고 회고했다. 더이상 파리에 있을 분위기가 아니라는 판단아래 떠날 채비를 하는데 출발을 재촉하는 사건이 또 터졌다. 숙소 옆 건물의 항공회사 대형유리가 대낮에 굉음을 내며 폭발한 것이다.
일대에 수많은 경찰이 배치됐다. 물론 尹박사 일행이 느낀 불안감은 미국에 대한 피해의식 의 발로일 수 있다. 파리는 테러사건이 자주 발생하는 곳이기도 하다. 그러나 尹박사 일행이 이들 사건을 '미국이 보내는 경고' 로 받아들일 정도로 핵개발을 둘러싼 미국의 방해는 집요했고 완강했다.
미국은 74년 5월 인도가 지하핵실험을 실시하자 세계 각국의 미 대사관과 정보 채널을 총동원해 각국의 핵개발 여부를 예의 주시하기 시작했다. 미국은 또 원자력 수출국들과 함께 '런던클럽' 을 결성, 핵기술 후진국에 대해 핵물질과 장비의 수출은 물론 재처리.농축.중수 (重水) 제조등 소위 민감한 기술의 국제간 이전을 엄격히 제한하는 핵확산 금지 조치를 강화해 나갔다.
이와 함께 당시 핵개발을 본격 추진하던 브라질.아르헨티나.파키스탄등과 이들 국가에 핵기술을 제공하려던 프랑스.서독등에 압력을 넣어 핵기술 이전을 포기하도록 강요했다.
그러나 프랑스는 미국의 감시에도 불구하고 계약을 성사시키기 위해 갖은 정성을 쏟았다.
尹박사는 "프랑스는 우리와의 협력사업을 최우선 국책사업으로 선정했을 정도였다" 며 "우리가 기대했던 것 이상으로 관련시설들을 샅샅이 보여주었다" 고 말했다.
佛선 경제적 이익에 관심
이들이 둘러본 시설은 2차 세계대전 당시 핵개발 연구기지인 마쿨을 비롯해 라하구의 재처리공장, 로망에 있는 핵연료 가공공장, 파리 근교의 원자력연구소등이었다.
심지어 프랑스 상고방사는 일본에 건설한 도카이무라 (東海村) 와 오아라이 (大洗) 센터의 재처리공장, 그리고 린교도게 (人形峠) 의 우라늄 농축시설등을 귀국 후에 시찰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
상고방사 직원들은 尹박사 일행에게 "당신들이 프랑스에 오기 쉽도록 73년 10월 서울~파리간 직항로를 개설한 것" 이라며 은근히 자신들의 공로를 내세우기까지 했다. 당시 주불 (駐佛) 경제담당 공사였던 이희일 (李熺逸.66.전 농수산부 장관) 씨는 "프랑스는 당시 미국이 주도하는 핵확산금지조약 (NPT) 을 지키기보다 재처리 기술과 시설을 판매해 얻는 경제적 이익에 관심을 가졌다" 고 설명했다.
75년 4월 원자력연구소와 상고방사간에 본계약을 체결할 때에도 미국의 눈길을 피하기 위해 '007작전' 을 펴야 했다. 상고방사에서는 포앙세 사장이 직접 방한, 윤용구 (尹容九.69.동원공전 학장) 원자력연구소장과 서명식을 가질 예정이었다.
尹씨의 계속되는 증언.
"일단 서명 당사자들이 원자력연구소장실에 모였어요. 그런데 소장실에 정체 불명의 불청객들이 계속 드나들었어요. 아무래도 꺼림칙했어요. 그래서 각자 뿔뿔이 흩어져 그 당시 시청 옆에 있는 원자력병원 회의실에서 2시간 뒤에 다시 만났지요. 미국이 눈치챌지 모른다는 불안한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었어요. '재처리연구시설 공급및 기술용역시설 도입 계약 체결' 은 이렇게 이루어진 겁니다. "
청와대에서 핵개발을 지휘.감독한 것으로 알려진 오원철 (吳源哲.69.기아경제연구소 고문) 경제 제2수석의 가방 도난사건도 수수께끼다. 72년 5월 吳수석은 정부.군 관계자들과 함께 유럽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다 이스라엘로 갔다.
함께 동행한 김광모 비서관의 증언.
"이스라엘 중개업자인 아이젠버그의 주선으로 주요 군수공장을 둘러보고 숙소로 정한 텔아비브 한 호텔에 돌아와보니 吳수석의 가방이 감쪽같이 없어진 거예요. 아이젠버그가 호텔측에 항의해 후하게 배상을 받긴 했어요. 사실 吳수석 가방에는 여행용품 따위만 들어 있었고 스틱스.엑조세 미사일 관계서류들을 비롯해 진짜 중요한 방위산업 관계서류는 내 가방 속에 있었거든요. 吳수석도 미국의 소행이 아닌가 의심합디다."
“美서 눈치챌지도”불안
이스라엘.오스트리아 국적을 가진 아이젠버그는 오스트리아 출신의 프란체스카 여사 (李承晩대통령 부인) 를 통해 6.25 직후부터 한국 정부와 인연을 맺었으며 박정희 시절엔 김성곤 (金成坤).장기영 (張基榮).김형욱 (金炯旭) 씨등 실세에 선을 대어 월성 원전3호기 도입등 굵직한 프로젝트를 따냈다.
이후락 (李厚洛) 정보부장을 이스라엘에 초청, 첨단무기 도입에도 개입한 인물이다. 핵개발에서 가장 핵심적인 것은 재처리를 통해 핵폭탄의 원료인 플루토늄을 확보하는 일. 이 작업의 실무 책임자였던 원자력연구소 연구실장 김철 (金哲.59.아주대 대학원장) 박사 만큼 업무차 프랑스를 자주 드나들었던 사람은 없었다.
그의 증언.
"핵관련 기기 (器機) 를 구입하러 프랑스에 갈 때에는 직접 가지 않고 독일에서 기차를 타고 갔어요. 우리가 프랑스에 자주 드나드는 것을 미국이 알기 때문에 프랑스 컴퓨터 코드를 사용하면 도입하려는 시설이나 규모를 미국이 알아차릴 것같아 독일 컴퓨터 코드를 사갖고 갔던 겁니다."
金박사는 프랑스에서 본국에 편지나 자료를 보낼 때도 반드시 우리 대사관의 외교 행낭을 이용했다고 한다. 핵개발은 미국과의 숨막히는 숨바꼭질이었다. 박정희는 왜 목숨을 건 도박을 감행해야 했을까.
30.미국의 일방적인 철수에 '핵보유' 결심
박정희 (朴正熙) 대통령이 핵개발을 시작한 동기는 예기치 않은 미국의 주한미군 철군 통보였다. 북한에 비해 군사력에서 절대 열세였던 시절이었기에 국민들은 위기감에 사로잡혔고 박정희는 심한 배신감에 몸을 떨었다.
핵개발은 미국의 보호막에 안주해 있던 한국의 지도자에게 홀로서기의 필요성을 절감케 했다. 69년 7월 리처드 닉슨 미대통령이 괌독트린을 발표하면서 "아시아의 안보는 아시아인의 손으로" 라는 선언을 했을 때만 해도 박정희는 반신반의했다.
당시 한국은 베트남전에 미군 다음으로 많은 5만명의 병력을 파견, 피를 흘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착각이었다. 1년 뒤인 70년 7월초 윌리엄 로저스 미국무장관은 사이공에서 개최된 베트남 참전국 회의에서 최규하 (崔圭夏.79) 당시 외무장관에게 '주한미군 2만명 철수' 를 통고했다.
다음달에는 스피로 애그뉴 부통령이 방한, 朴대통령에게 직접 통보했고 대만으로 가는 기내에서 "5년 이내에 주한미군을 완전히 철수할 것" 이라는 폭탄선언을 했다. 김정렴 (金正濂.73) 대통령비서실장이 이 소식을 보고하자 朴대통령은 굳은 자세로 말했다.
"임자, 일희일비해서는 안돼. 국방을 언제까지나 미군에 의존할 수는 없어. 이제는 스스로 나라를 지켜야 돼. "
미국의 일방적인 주한미군 철수 결정에 대해 박정희는 몹시 분노했다. 그는 문득 미국 태도에 괘씸한 생각이 들 때면 측근들에게 여과없이 감정을 표출하곤 했다.
청와대 대변인을 지낸 임방현 (林芳鉉.67) 씨의 증언.
"朴대통령은 미국이 자꾸 주한미군 철수 문제를 거론하자 '미국놈들, 걸핏하면 철군한다고 협박한다' 며 아주 불쾌해 했어요. 대통령이 말끝마다 '미국놈들' 이라고 말하니까 주한 미대사가 이것을 알아들을 정도였어요. "
그러나 미국은 박정희의 감정이나 한국민의 불안감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예정대로 71년 3월 주한 미7사단은 철수했다. 박정희가 핵개발을 결심한 것은 바로 이 무렵이다. 국방과학연구소 (ADD)에서 핵폭탄 설계 연구책임자로 일한 A씨는 71년 4월 임명장을 받는 자리에서 박정희의 결심을 들었다.
"우리도 이제 초 (超) 무기를 만들어야겠어요. 이건 숨어서 해야 합니다. "
“숨어서 하라”지시
초무기는 화생방 무기를 뜻하는 것이지만, A씨는 "朴대통령이 '숨어서 하라' 고 일러준 것은 두말할 것도 없이 핵무기였다" 고 증언했다.
핵개발은 71년 11월 청와대에 경제2수석실이 생겨나면서 활기를 띠기 시작한다. 경제2수석실은 방위산업을 전담하기 위해 만들어진 부서였지만 이후 중화학공업 육성.행정수도 건설 추진등 박정희시대의 굵직굵직한 주요 사업을 전담한 일종의 '태스크 포스팀 (기동타격대)' 역할을 했다.
오원철 (吳源哲.69.기아경제연구소 고문) 씨가 책임자였고, 김광모 (金光模.64.테크노서비스 사장) 비서관이 핵심 참모였다. 金씨의 증언.
"吳수석에게 들은 얘기입니다. 朴대통령이 경제2수석실이 만들어진지 얼마 안돼 吳수석을 부르더니 '주한미군 철수로 한국의 안보가 대단히 불안해. 미국한테 밤낮 눌려서 안되겠어. 언제는 도와준다고 했다가 이제 와서는 철군해버리니 언제까지 미국한테 괄시만 받아야 하는지…. 이제는 좀 미국의 안보 우산에서 벗어났으면 좋겠어. 약소국가로서 큰소리칠 수 있는 게 뭐 없겠소. 인도와 파키스탄 같은 나라도 큰소리를 뻥뻥 치고 있는데 말이야. 우리도 핵개발을 할 수 있는거요' 하고 묻더랍니다. "
朴대통령의 의중을 알아차린 이들은 즉시 최형섭 (崔亨燮.77.포항산업과학연구원 고문) 과학기술처장관에게 핵개발 가능성을 물어봤고, 구체적 사항은 崔장관의 양해를 얻어 윤용구 (尹容九.69.동원공전 학장) 원자력연구소장에게 조사시켰다.
그러나 당시 우리 과학자들은 핵개발의 기초지식도 제대로 갖고 있지 못했다고 한다. 계속되는 金씨의 증언.
"처음에 尹소장 얘기가 핵탄두용 플루토늄을 얻기 위해서는 중수로에서 나오는 '사용후 핵연료' 를 재처리해야지 경수로에서 나오는 '사용후 핵연료' 는 순도가 낮기 때문에 안된다고 합디다. 우리는 그런줄 알았어요. 얼마 후에는 경수로에서 나오는 연료를 재처리해도 플루토늄 추출이 가능하다고 그래요. 그래서 내가 '왜 왔다 갔다 하느냐' 고 싫은 소리를 했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까 국제원자력기구 (IAEA) 의 감시 때문에 경수로든 중수로든 '사용후 핵연료' 를 재처리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어요. "
실제로 상업용 원전에서 타고 나온 핵연료를 재처리해 얻은 플루토늄은 핵폭탄 제조 원료로는 적합하지 않다. 원자력연구소 연구실장으로 재처리사업의 실무책임자였던 김철 (金哲.59.아주대 대학원장) 박사는 "경수로는 한번 핵연료를 집어넣으면 3년간 타기 때문에 순도가 낮아져 재처리해도 핵폭탄용 원료로 부적합하다. 중수로의 경우 1년 정도 탄 핵연료를 꺼내 재처리하면 가능한데 IAEA의 감시가 심해 '사용후 핵연료' 를 확보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 고 말했다.
괴산 우라늄광 조사
金씨는 "70년대 후반 연구용 원자로 (NRX) 를 도입하려 한 것은 바로 그 때문이었다" 고 배경을 설명했다. 인도는 캐나다로부터 사들인 연구용 원자로를 이용해 '사용후 핵연료' 를 확보, 이를 재처리해 74년 5월 지하핵실험에 성공했던 것이다.
경제2수석실은 연구용 원자로의 원료인 천연우라늄을 확보하기 위해 자원연구소로 하여금 충북괴산에 있는 우라늄광의 경제성을 조사케하는 한편 우라늄 광석을 캐 70~80%의 우라늄 함량을 지닌 우라늄정광 (옐로 케이크) 을 만들어 朴대통령에게 보여준 적도 있다.
이 무렵 朴대통령이 사용하는 용어에 주목할 만한 변화가 있었다. 미7사단 철군후에 '자력방위' 의 준말인 '자위 (自衛)' 라는 단어를 많이 썼는데 72년 중반부터는 '자위' 대신 '자주국방' 이라는 용어만을 사용했다.
오원철씨의 설명.
" '자위' 라는 용어는 북한의 공격에 대한 방위개념이에요. 그러나 '자주국방' 은 대미 (對美) 관계까지 포함한 국방의 자주성을 말합니다. 국방의 자주화는 한국의 자주화로 발전해 나가게 되죠. 단순한 용어상의 문제를 넘어선 매우 중요한 변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
朴대통령은 72년 7월20일 국방대학원 졸업식 치사에서 자주국방의 의미를 직접 설명했다.
"우리나라는 우리 국민이 지킬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하고자 하는 일을 의연한 자세로 강력히 추진할 때, 그리고 미국이 도와주지 않더라도 우리는 끝내 해낼 수 있다는 능력을 보여줄 때 비로소 미국은 협조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자주국방입니다. "
여기서 '하고자 하는 일을 의연한 자세로 강력히 추진한다' 는 구절이 의미심장하다. 이 말 속에는 방위산업 육성과 더 나아가 핵개발에 대한 박정희의 강한 의지가 담겨 있다. 국가안보문제를 미국에 구걸하지 않겠다는 얘기다. 핵개발 계획은 73년 겨울에 접어들면서 보다 구체화했다. 핵무기 개발 극비계획서가 보고됐다.
핵폭탄 설계 연구책임자였던 A씨의 증언.
"20장 분량의 차트 형식으로 만들어진 계획서에는 핵무기의 기본개념에서부터 소요예산 (약 15억~20억달러).개발완료 예상기간 (6~10년) 등이 적혀 있었습니다. 朴대통령은 보고에 만족, 기분좋게 차트 위에 사인을 해주셨어요. "
A씨에 따르면 81년 수출목표 1백억달러 (실제로는 77년 달성) 의 15~20%를 핵개발비에 투자한다 해도 국민경제에 큰 부담이 안될 것으로 판단했다고 한다. A씨가 계획한 핵폭탄은 2차세계대전말 일본 나가사키 (長崎)에 투하된 것과 같은 20㏏짜리 플루토늄탄으로, 투하방식은 공중투하식이었다.
2백만명 살상 규모
"초기에 계획한 핵폭탄의 파괴력은 서울 광화문 네거리 상공 5백80m 위치에서 터뜨릴 경우 교문리 일대까지 잿더미로 만들고, 최소한 2백만명의 인명을 살상하는 정도의 규모였어요. 내가 75년초 국방과학연구소를 물러날 때 이미 핵폭탄 설계는 거의 끝마친 것이나 다름없었어요. "
이후 핵폭탄 제조와 기폭 (起爆) 기술은 우리 연구진이 프랑스 발둑에 있는 핵폭탄제조연구소등에서 계속 연구했다. 그러나 핵무기 개발 계획은 78년 9월 사정거리 1백80㎞의 '백곰' 미사일 시험발사에 성공함으로써 공중투하식이 아니라 미사일에 핵탄두를 장착하는 형태로 바뀌었다.
이스라엘의 벤구리온, 인도의 네루, 프랑스의 드골과 같이 핵개발로 민족의 영웅이 되려는 박정희의 꿈은 무르익어갔다. 꿈을 실현시킬 두뇌가 절실히 필요했다. 박정희는 국내외에 흩어져 있는 핵과학자들을 수소문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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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스크롤의 압박떄문에 다 읽지는 못했습니다만 박정희 또한 '국방'보다는 자신의 정권유지를 위해 핵개발을 추진한게 아닐까 싶네요...만일 이가 사실이라면 핵계발로 북한에게 압박을 주고 정세를 바꿔버려던 남한이 똑같은 이유로 북한에게 압박을 받고 있다는것은 아이러니군요 ...
첫댓글 좋은 게시물이네요. 스크랩 해갈게요~^^
우와 1026사태와 미국과 핵문제 까지 잘 읽었습니다.
좋은 게시물이네요. 스크랩 해갈게요~^^
음.... 스크롤의 압박떄문에 다 읽지는 못했습니다만 박정희 또한 '국방'보다는 자신의 정권유지를 위해 핵개발을 추진한게 아닐까 싶네요...만일 이가 사실이라면 핵계발로 북한에게 압박을 주고 정세를 바꿔버려던 남한이 똑같은 이유로 북한에게 압박을 받고 있다는것은 아이러니군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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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본 게시글에 꼬리말 인사를 남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