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기 힘든 곳 떠올리며… 여행 넘어 향수를 읊다
영화 ‘인 디 에어(Up in the air)’에선 주인공 빙엄이 장거리 출장으로 거쳐 가는 도시명들이 나열된다.
CJ ENM 제공
한시에는 구절마다 지명을 넣어 읊는 독특한 시 쓰기 방식이 있다. 남조(南朝) 송나라 사장(謝莊)의 작품으로부터 비롯한 것이라 하는데(‘自潯陽至都集道里名爲詩자심양지도집도리명위시’), 우리 한시 중엔 고려 말 권근(權近·1352∼1409)의 다음 시가 가장 이른 시기의 작품인 듯하다.
✺[漢詩를 映畵로 읊다]〈136〉지명의 수사학
雨暗沙門島(우암사문도)
비가 오니 사문도가 어둡고,
*沙門島(사문도) : 중국 지명.
風高碣石山(풍고갈석산)
바람은 북쪽 갈석산에 높구나.
*碣石山(갈석산) : 중국 遼寧省(요녕성) 渤海(발해) 연안의 산.
燕鴻今已至(연홍금이지)
제비와 기러기같이 길 어긋남이 되었는데,
*燕鴻(연홍) : 제비와 기러기. 제비는 가을에 남으로 가고 기러기는 가을에 북에서 오므로 서로 만날 수 없기에, ‘서로 만나지 못함’을 뜻하는 말임. 燕鴻之歎(연홍지탄).
遼鶴幾時還(요학기시환)
정영위처럼 요동의 학이 되어 언제 돌아가려나.
*遼鶴(요학) : 요동학(遼東鶴). 道士 丁令威(도사 정영위)가 학으로 화한 뒤 천년만에 고향 요동땅에 찾아온 고사에서 온 말임.
水接蓬瀛闊(수접봉영활)
물은 신선 사는 봉래와 영주에 접하여 넓고,
*蓬瀛(봉영) : 三神山(삼신산)의 蓬萊山(봉래산)과 瀛洲山(영주산). 중국 먼 동쪽 바다에 삼신산이 있다 했음.
雲橫海岱閑(운횡해대한)
구름은 너른 산동(山東) 땅에 비껴 한가롭구나.
*海岱(해대) : 바다에서 태산까지의 지역. 중국 순 임금 때 12주의 하나인 靑州(청주)로 지금의 산동성 지역.
扶蘇何處在(부소하처재)
부소산은 어느 곳에 있는가,
*扶蘇(부소) : 충남 부여의 북쪽 산. 백제의 옛 궁전터 등 고적이 많음. 부소산.
夢繞紫霞間(몽요자하간)
꿈은 고려의 서울 송도 사이를 둘러 있네.
*紫霞(자하) : ① 자줏빛 노을. ② 신선이 사는 곳. 자하동. ③ 고려의 서울 송도 송악산 아래의 동네 이름. 자하동.
―기지명시 삼수 제2수(紀地名詩 三首 第2首)
지명을 따라 쓴 기행시 세 수 둘째 수
권근(權近·1352∼1409·고려 말)
시인이 1389년 왕명으로 당시 명나라의 서울이었던 금릉(金陵)을 다녀오며 남긴 연작시 중 한 수다. “머물러 있는 동안 지나온 곳들을 헤아린다(淹滯之中엄체지중, 數其經歷也수기경력야)”라는 부제처럼, 시인은 육로와 해로를 경유한 이역만리의 체험을 읊었다. 다만 실제 이동 경로를 순서대로 기록한 것은 아니다. 현실의 지명과 상상 속 공간을 교묘하게 엇섞으며 사행 경험과 감회를 담아냈다. 실제 지명인 사문도(沙門島), 갈석산(碣石山), 연(燕), 요(遼)와 전설 속 신선의 공간인 봉래(蓬萊)와 영주(瀛洲)가 나열된 뒤 부소산(扶蘇山)과 자하동(紫霞洞)이란 우리 지명을 제시하여 자신의 향수(鄕愁)를 드러냈다.
제이슨 라이트먼(Jason Reitman) 감독의 ‘인 디 에어(Up In The Air·2009년)’에서도 미국 세인트루이스, 캔자스시티, 라스베이거스, 마이애미, 디트로이트 등 주인공 라이언 빙엄이 거쳐간 수많은 도시명이 나열된다. 인간관계를 불필요한 배낭 속 짐이라고 생각하는 해고 전문가 빙엄은 1년에 322일을 비행기로 이동하며 1000만 마일리지 도달을 목표로 삼을 뿐이다. 1000만 마일리지를 달성한 비행기 안에서 기장은 축하하며 집이 어디냐고 묻지만 빙엄은 여기라고 답한다.
시와 영화 모두 낭만적인 여로를 다룬 건 아니다. 국제 정세의 변동 속 외교적 난제나 경제 위기로 인한 기업 구조조정이란 엄혹한 현실과 연결돼 있다. 하지만 시인이 활용한 지명의 수사학은 단순히 미지의 광대한 외부 세계를 보여주는 데 그치지 않았다. 어디든 갈 수 있지만 진정 어디로 가야 하는지 모르는 현대인의 딜레마를 다룬 영화와 달리, 한시는 가기 어려운 먼 곳의 지명들을 호명하면서 자신이 본래 있던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움베르토 에코는 서구 문학작품에서 공간의 광활함과 미지의 세계를 표현하기 위해 지명을 끝없이 나열하는 방식을 실용적 목록과 시적 목록으로 나눠 구분한 바 있다(‘궁극의 리스트’). 이동 장소의 실용적 목록인 영화와 달리, 시의 지명들은 호명돼 공간의 파노라마를 이루는 순간 현실과 상상을 넘나들며 ‘시적 목록’으로 확장된다. 낯설고 먼 것들이 가깝고 익숙한 것들을 소환하는 효과를 가져온다. 그래서 한시의 지명들은 여행 기록을 넘어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수사학이 된다.
권근(權近)의 기지명시(紀地名詩)는 모두 세 수인데 중국 동부 지방을 여행하며 지은 기행시(紀行詩)이다. 첫 수는 桑乾水(상건수)를 건너고 남경과 齊(제)와 魯(노) 땅, 셋째 수는 발해와 嗚呼島(오호도)를 지났다. 그리고, 각 수 마지막 연[7, 8행]에서는 우리나라를 읊은 것이 특징이다. 지금 귀로에 오르려고 바닷가에서 배를 기다리는 모습이 아닌가 싶으니, 앞은 삼신산이 있는 넓은 바다요 뒤는 산동 지방인데 구름 속에 잠겨 있다고 그렸다. 시인 權近(권근)은 1389년과 1396년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 글은 그 사행길에서 느끼고 지나온 지명을 회상하여 쓴 글로 보인다. 세 편 모두 끝에는 고려를 향한 사랑을 표현했다.
✺[漢詩를 映畵로 읊다] 〈136〉 지명의 수사학
北渡桑乾水(북도상건수)
북쪽으로 가 상건수도 건너고
*桑乾水(상건수) : 山西省(산서성) 북부에서 河北(하북)의 北京(북경)과 涿縣(탁현) 사이를 흐르는 강. 濕水(습수). 蘆溝河(노구하). 渾河(혼하). 小黃河(소황하). 등으로 불리는 名勝志(명승지)임.
南浮揚子江(남부양자강)
남쪽의 양자강에서 떠다녔다네.
金陵朝萬國(금릉조만국)
금릉은 만국의 조하를 받으며
鍾阜鎭中邦(종부진중방)
종부 금릉산 중방을 진압하네.
*鍾阜(종부) : 江蘇省(강소성) 南京市(남경시)에 있는 金陵山(금릉산). 일명 鍾山(종산)이로고도 함.
齊魯宗親盛(제로종친성)
제와 노의 종친들 융성도 하여
幽幷醜虜降[유병추로강)
유주 병주 추한 오랑캐 항복했네.
*幽幷(유병) : 幽州(유주, 漢 시대 河北에 두었던 주)와 幷州[병주, 漢 시대에 河北 山西에 두었던 주).
三韓非化外(삼한비화외)
삼한도 교화의 밖이 아니기에
松嶽氣鴻庬(송악기홍방)
송악의 기세 광대하고 두텁네.
*松嶽(송악) : 개성의 옛 이름. 陽村先生文集卷之六(양촌선생문집6권) 奉使錄(봉사록).
―기지명시 삼수 제1수(紀地名詩 三首 第1首)
지명을 따라 쓴 기행시 세 수 첫째 수
권근(權近·1352∼1409·고려 말)
✺[漢詩를 映畵로 읊다] 〈136〉 지명의 수사학
黃縣秋風晩(황현추풍만)
황현에 늦가을 바람일고
*黃縣(황현) : 중국 산동성 용구시(龍口市). 秦나라 도사 서복의 고향.
*秋風(추풍) : 가을 바람. 晚(늦을 만): 늙다, 쇠하다(衰--)
青州落日沈(청주락일침)
청주에 지는 해가 잠기는구나.
*靑州(청주) : 중국 태산과 황하사이의 땅. 지금의 산동성 일대.
*落日(낙일) : 석양. 지는 해. 沉(잠길 침): 가라앉다, 가라앉히다.
浿江歸路阻(패강귀로조)
패강에는 돌아가는 길 막히고
*浿江(패강) : 대동강으로 일기가 쉬우나, 靑州에서 발해만으로 흐르는 강으로 추정한다.
*歸路(귀로) : 돌아오는 길. 阻(험할 조): 막히다, 가로막다.
渤海客愁深(발해객수심)
발해에는 나그네 시름이 깊어진다.
*渤海(발해) : 渤海灣 보하이만(Bohai〔渤海〕灣). 중국(中國)의 요동반도(遼東半島)와 산둥반도(Shandong〔山東〕半島)에 둘러싸인, 황해(黃海)의 한 만(灣).
*客愁(객수) : 객지(客地)에서 느끼는 쓸쓸함이나 시름. 深(깊을 심): 짙다.
方丈疑無有(방장의무유)
방장산은 있는지 없지 의심스럽고
*方丈(방장) : 方丈山(방장산). 蓬萊山(봉래산). 瀛洲山(영주산)과 신선이 산다는 전설 속의 삼신산 중의 하나,
*疑(의심하르 의) : 믿지 아니하다.
*無有(무유) : 없다.
嗚呼弔古今(오호조고금)
오호도에서 고금을 조상하노라.
*嗚呼(오호) : 嗚呼島(오호도) 중국 발해만에 있는 섬. 半洋山(반양산). 전국시대 제나라의 장수 田橫(전횡)이 그곳에서 죽어 후인들이 그를 슬퍼하여 嗚呼島(오호도)라 칭함.
*弔(조상할 조) : 마음을 아파하다. 불쌍히 여기다.
*古今(고금) : 예전과 지금(只今)을 아울러 이르는 말.
隅夷東表地(우이동표지)
우이 동표의 땅에서
*隅(모퉁이 우) : 구석. 夷(오랑캐 이): 동방(東方)의 종족(種族).
*隅夷(우이) : 동쪽 변방의 사람. 즉, 고려,
*東表(동표) : 동쪽 변두리의 나라라는 뜻으로, 우리 나라를 이르는 말.
*地(땅 지) : 곳, 장소(場所).
渺渺望鷄林(묘묘망계림)
아득히 계림을 바라보노라.
*渺渺(묘묘) : 일망무제하다. 그지없이 넓고 아득하다.
*望(바랄 망) : 그리워하다.
*鷄林(계림) : ‘신라(新羅)’의 다른 이름. 숲속에서 이상(異常)한 닭 울음소리가 들리기에 가 보니, 나뭇가지에 금빛(金-)의 궤(櫃)가 걸려 있고 그 아래에서 흰 닭이 울었는데 그 궤(櫃) 속에 신라(新羅) 김씨 왕조(王朝)의 시조(始祖)가 되는 김알지(金閼智)가 있었다는 설화(說話)에서 유래. 여기에서는 우리나라.
―기지명시 삼수 제3수(紀地名詩 三首 第3首)
지명을 따라 쓴 기행시 세 수 셋째 수
권근(權近·1352∼1409·고려 말)
✵權近(권근,1352-1409) : 본관 安東(안동). 자는 可遠(가원), 思叔(사숙). 호는 陽村(양촌). 시호 文忠(문충). 초명 晉(진). 고려말 조선초의 문신. 고려의 정승 溥(부)의 증손, 父 僖(희). 고려 공민왕 18년 18세로 문과 丙科(병과)에 급제하여 春秋檢閱(춘추검열)이 되고 공민왕 23년(1374) 직강(直講), 응교(應敎), 左司議大夫(좌사의대부)를 거쳐 簽書密直司事(첨서밀직사사)가 되었으며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왔다. 공양왕이 즉위하자 창왕의 外祖 李琳(외조 이임)의 일파로 몰려 극형을 받게 되었으나 이성계의 구원으로 모면, 이색 등과 함께 淸州獄(청주옥)에 갇혔다가 수해로 용서받아 益州(익주)에 있으면서 ‘入學圖說(입학도설)’을 저술했다.
조선이 개국되자 태조 2년(1393)에 왕명으로 鄭摠(정총)과 함께 定陵(정릉)의 비문을 짓고 中樞院使(중추원사)가 되었다. 태조 5년(1396) 撰表(찬표)를 잘못 쓴 정도전을 대신하여 자진해 명에 들어가 해명을 잘하여 명 황제의 극진한 예우를 받고 돌아왔다. 태종이 즉위하자 佐命功臣(좌명공신)의 호를 받고 吉昌君(길창군)에 피봉 되었으며, 이후 찬성사, 大提學(대제학)에 이르렀고 늘 文翰(문한)의 관직에 있었다. 정몽주의 문하에서 수학하여 성리학에 조예가 깊었고 문장에 능하여 조정의 모든 글을 찬술했으니, 春亭 卞季良(춘정 변계량)과 함께 국가의 공식적인 글인 館閣文字(관각문자)를 전담한 대표적 인물이었다. 문집으로 ‘陽村集(양촌집 10冊)’과 ‘五經淺見錄(오경천견록)’ ‘四書五經口訣(사서오경구결)’ ‘입학도설’ 등의 저서가 있다.
[참고문헌 및 자료출처 :〈漢詩를 映畵로 읊다(임준철,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 동아일보 2026년 07월 30일(목)〉, Daum∙Naver 지식백과(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 이영일 ∙ 고앵자 yil2078@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