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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짝 피어나는 때/
어떤 꽃은 4 월에 피고,
어떤 꽃은 9 월에 피어난다.
잎이 피고 꽃이 피는 철쭉도 있고,꽃이
먼저 피고 잎이 피는
진달래도 있다.
심지어 비슷해 보이는
철쭉과 진달래조차그것이
피고 지는 순서가 다른 것이다.
남들보다 늦다고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아직 때가 아닌 것뿐입니다.
내가 어떤 꽃인지를 알면
피어나는 때를 알게 되고,
그 때에 맞춰 피어나기
위한 노력을 하다 보면
어느덧 활짝 핀 나를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올 것 알고 있다.
행 불행의 교차점,
극한 상황 속에서
더 이상은 내려갈 길
없어 절경 보는 세월을
보내고 있다.
뒤돌아보는 다람쥐도 거기 있다.
절대 고독이란 없는 가봐!
그동안 오르고 내리는 길을 지나왔다.
/늙지 않는 사명 1/
깊은 산에서도 탐스럽게
피는 꽃이 있잖는가?
해질녘에도 곱게 피어
나는 노을빛이 있잖는가?
늙음이 허허로운
마음뿐일까
은퇴핑계는 착각이야!
겨우, 혼자 아니라는
것 비로소 알았어!
‘오순절바람’이 그리움으로
조용히 일어나고 있다.
혼자서 하는 마음 앓이,
한 방울의 시(詩)가 마렵다.
강같이 흐르게 한 줄기
시원하게 발사하고 싶다.
여울물을 뒤지며 굽이굽이
돌고 돌아 쉼 없이 흘러
작은 돌틈 사이마다 다 챙겨
가며 걸음 재촉 없이도
모두 보게 절경까지 만들어
주며 은빛 만들어가고요!
미소 짓게 한 폭의 마음그림
그려주고 있잖아요!
이제 이곳까지 온 나도
누군가를 만나기 위해
자! 봐요! 곧장
하늘의 뭉게구름
처럼 집을 떠나요!
/늙지 않는 사명 2 /
씨앗을 뿌리는 걸음걸음!
오늘도 옥토를 찾아 나선다.
범벅이가 된 세상!
발길이 닿는 곳마다
겨울바람이네요!
소맷자락에 파고 드는
찬바람을 허리춤에
찔러 넣고는,때가
오기를 바라고서
빠짐없이 골목을
밟고 다닌다.
덜컹거리는 가슴으로
먹구름 저 너머의 기억을
향해 어딘가에 희미하게
보이는 곳으로 오늘도
발걸음 옮긴다. 가고가도
말없는 세월만,겨울눈
처럼 소복이 쌓이고 있다.
두 손 모아 움켜쥔 사명
때문에 생겨진
내 삶이 수십년!
아직은 ‘엘리야 때처럼
7,000명’1이나 숨어
살아있으려니 가끔
나를 추억의 끈으로
달고 있으려니,
생각해 보았다.
사명은 뭉게구름이
아니야! 지워지지
않는 긴 한숨이야!
그래도 오늘까지 살아
있음에 감사하고 행복
하다고 생각해!
/늙지 않는 사명 3 /
오래 지났어도,
지방 사투리가 새어나,
이빨에서 묻어나온다.
70여년을 고향 떠나
살았어도, 잊지 않을
사람이 되고 싶어서다.
특별한 큰 존재가 되고
싶어서 여기저기에
기대고 싶어진다.
걸작품 감이 없어 쉼표
못 찍고 오늘도 숨
가쁘게 보내고 있다.
파릇파릇한 생기 되찾아
너그럽게 마음 비우
고 살아가련다.
회귀성 고기가 물 따라
흘러가나,되돌아본다.
/이기는 사람과 지는 사람 /
이기는 사람은 실수했을 때
´내가 잘못했다´고 말하고
지는 사람은 실수했을 때
´너 때문에 이렇게
되었다´고 말한다.
이기는 사람은 아랫사람
뿐만 아니라어린아이
에게도 사과합니다.
지는 사람은 지헤있는 사람에게도
고개 숙이지 않습니다.
이기는 사람은 열심히 일하지만
시간의 여유가 있습니다.
지는 사람은 게으르지만
늘 ´바쁘다 바쁘다´며 허둥댑니다.
이기는 사람은 열심히 일하고,
열심히 놀고 열심히 쉽니다.
지는 사람은 허겁지겁 일하고
빈둥빈둥 놀고 흐지부지 쉽니다.
이기는 사람은 저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지는 사람은 이기는 것도
은근히 염려합니다.
이기는 사람은 과정을 위해 살고,
지는 사람은 결과를 위해 삽니다.
/이런 친구 있으면
성공한 인생/
인생에 중요한 몇 가지
가 있지만 그중에서
도 꼭 빠지지 않는
건 바로 친구.이런 친구
가 한 명이라도 있다면
성공한 삶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1.먼저 다가와주는 친구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게
그리 쉽지만은 않은 일이다.
마음을 열어야 하고,
용기를 내 인사를 건네야
하고.그런데 고민하는 나
에게 상대방이 먼저
다가와준다면?
무엇이든 시작이 어렵다
고들 하는데,그 시작에
용기를 내 준 친구를
향해 반갑게 인사해줄
수 있지 않을까.
2.무조건 내 편
들어주는 친구
살면서 무조건적으로
내 편을 들어주는 사람
을 만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그런데 내 편을
들어주는 친구가 있다면?
그것만큼 든든한 일
이 또 있을까.
3.자존감 높여주는 친구
자존감이 낮아져 한참
우울해 있을 때,어느
순간 내 곁에 다가와
위로해주는 친구가 있으
면 얼마나 좋을까.
특히 위로와 함께 내
자존감도 쑥쑥 키워주
는 친구가 있다면.
4.솔직한 친구
친구 사이에 중요한
것들 중 하나는 바로
정직함이다.서로에게
속이는 것이 없어야
진정한 우정을 쌓을
수 있지 않을까.
5.스스럼없이
장난 치는 친구.
가까울수록 더 소중하게
대해야 하는 법이지만,
스스럼없이 장난도 칠 줄
알아야 진짜 친구라
고 할 수 있지 않을까.
6.함께 나이 드는 친구
이런저런 친구가 있지만
그래도 인생에 이런 친구
있으면 성공한 삶이라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친구는 단연 함께 늙어
가는 친구가 아닐까,
어려서나,젊어서나,
늙어서나 함께 웃고
떠들며혹은 함께슬퍼하며
인생을 공유할 수 있는 친구,
/표정-사람마다의 얼굴 값/
삶이 표정관리에 있기에 처음
부터 표정력 갖고 태어난다.
그런데 표출률이 아니라,
사람마다 표출성이
한결 문제다.
어린이가 매달리는
것 흠이 아니다.
나뭇잎이 그러하잖아!
표정에서 됨됨이 들어난다.
맨발이 모두 흠이 아니다.
어릴 적에는 모두 맨발이다.
엄마가 입 맞추던 발이다.
발가락 하나가 꼼지락해도
그 표정력 귀엽게 평가된다.
얼굴값이나 하라는 얼굴값
계산의 용어가 있기도 하다.
의도적으로 하는 표정은
그 사람의 인격의 게시판이다.
자연스러울 때가 있고,
꾸몄을 땐 쉽게 달라질
수 있다. 전자는 진실이
그 근거이고, 후자는
가식이 섞인 탓이다.
표정에는 사람마다 다듬은
만큼의 인격이 표현이 된다.
표출 관리가 아니라,
사람마다의 습관화된
표현력이다.상대를 의식
했을 때와 그렇지 안했을
때 곧장 들어난다.
이러는 건 누구나
들여다 볼 수 있는
기준이기도 하다.
그래서 표정에서
그의 삶을 거의 다
읽을 수 있게 된다.
/세상에 겪은 일, 겪을 일/
믿음이 돌아오고,
마음으로 파고든다.
이제, 쌓여만 가는
추억을 정리한다.
늦지만, 모처럼 기억
을 더듬어 보련다.
사람이 멀쩡한 대도,
기억이 아물거린다.
추억을 정리하려니,
슬그머니 꽁무니 감춘다.
상대가 없어도, 무언도
하나의 표현이란다.
아무리 추워도, 겨울도
하나의 계절이라며,
아무도 모르는 외로움도,
존재의 형태란다.
지금 자신의 얼굴 보려
면, 거울이 있어야죠.
벌건 대낮에, 예로
카드의 경고도 힘이다.
오늘도 밑줄 긋는 문장,
힘써 남기고프다.
/나를 상징하는딱 한 단어는?/
개나리는 희망,
과꽃은 추억,
국화는 명복,
금낭화는 수줍음,
금잔화는 겸손,
나팔꽃은 허무한사랑,
상사화는 순결,
도라지꽃은 성실,
동백꽃은 신중,
라일락은 첫사랑,
루드베키아는 영원한 행복,
맨드라미는 열정,
모란은 부귀, 목련은 우아,
무궁화는 일편단심,
물망초는 나를 잊지마세요,
백일홍은 꿈, 백합은 순결,
사르비아는 정열,
상사화는 이별,
수련은 신비,
아카시아는 우정,
안개꽃은 약속,
옥잠화는 추억,
장미는 사랑,
접시꽃은 풍요,
채송화는 순진,
코스모스는 순정,
포인세티아는 축복,
프리지아는 순결,
해바라기는 마음을
다해 사랑합니다.
꽃마다 그 꽃이 상징하는
꽃말이 있답니다.
그래서 꽃말에 맞게
장례식장엔 국화,
어머니날엔 카네이션,
성탄절엔 포인세티아,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장미,
부활절엔 백합꽃을 사용합니다.
꽃말을 생각하며 쪼그려 앉아
채송화를 들려다 보았습니다.
과연 채송화는 그 모습이
참 순진하네요.
어쩜 그렇게 꽃에
딱 어울리게
꽃말을 잘 만들었네요.
그런데, 그럼 나는?
나를 상징하는 말은
과연 무엇일까?
찬찬히 생각해 봅니다.
나를 상징하는
단어를 만들어야겠습니다.
/지성(至誠)이면
하늘까지 움직여 /
전해오는 고구려
민화(民話)가 있다.
수자리(軍服務)를 마치고 온
남편이 마음에 상함을 크게 받아
사람 대하기를 싫어하고
방에만 콕 박혀 지냈다.
그렇게 방에만 콕 박혀 있는
사람들을 요즘 말로는
‘방콕파’라 일겉는다.
남편이 방콕파가 되어
두문불출하고 지내니
아내가 애가 타서 당대의
현인(賢人)을 찾아갔다.
사정을 들은 현인이 이르기를
“살아 있는 호랑이의 수염
한 가닥이 있으면 남편의 병을
고칠 수 있다”고 일러 주었다.
그날로 그 아내는 ‘살아 있는
호랑이의 수염’을 어떻게
구할 수 있을까를 골똘히
생각하다가는 한 궁리를 내었다.
호랑이가 다니는 길목에
호랑이가 즐겨 먹는 음식을
차려 놓고는 멀찌감치 기다렸다.
아니나 다를까 기다리던
호랑이가 나타나 먹이를 먹었다.
그녀는 다음 날도 그 다음 날도
계속 그러기를 거듭하면서
날마다 조끔씩 호랑이
쪽으로 다가갔다.
그러기를 반년을 거듭하니
호랑이와 친하게 되어
호랑이 곁에 설수
있게까지 이르렀다.
그러기를 다시 반년을
계속한즉 이제는 호랑이 곁에
앉아 호랑이 목을 어루만질
수 있게까지 되었다.
그제야 호랑이의 콧수염
한 올을 뽑을 수 있게 되었다.
일년이란 세월을 보내어
소원을 성취케 된 그녀는
호랑이 수염을 들고는
현인을 다시 찾았다.
호랑이 수염을 구할 수 있게
된 내력을 다 듣고 난 현인이
이르기를 “살아 있는 호랑이의
턱수염을 구하는 그런 정성을
병든 남편에게 쏟으면 남편을
구할 수 있을 것이다”하였다.
이 말에 깨우침을 받은 그녀는
그날로부터 온 정성을 다하여
남편을 대하였다.
세월이 흐른 뒤에
아내의 지극한 정성에
남편의 마음이 열려
병에서 놓임 받게 되고
부부는 행복하게 살았다.
이 이야기는 바로 “지성(至誠)
이면 감천(感天)이다”
는 말을 일러 주는 이야기이다.
무슨 일에든 지극한 정성을
다하면 하늘까지 움직일
수 있다는 말이다.
요즘 시대는 요령 좋고
재치 있는 사람들은 많으나
맡은 일에 지성을 다하는
사람들이 적은 시대이다.
이런 시대일수록 지성을
다하는 사람이 오히려
돋보이기 마련이다.
/묵상시리즈-사랑/
1.하나님의 사랑은
그리스도를 통해 발견됩니다.
2.사랑은 개인의 내면에
잠재되어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밖으로
표출되어야 하는 덕성입니다.
3.사랑은 고도의 신앙의
경지에서 획득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의 사랑을 경험한
사람들에게 부어지는 은사입니다.
4.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과
사람을 향한 사랑은 분리되지 않습니다.
5.기독교 신앙은 하나되는
사랑의 연합을 필요로 합니다.
6.타락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겸비한 마음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을 입는 것입니다.
7.사랑의 하나님을 만나려면
진실해져야 합니다.
8.사랑의 하나님을 만나려면
신앙생활의 기반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반석이어야 합니다.
9.십자가 사랑에 대한 진정한
경험이 없는 사람은
참회할 수 없습니다.
10.사랑은 예수
그리스도 자신입니다.
11.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입은 자의 합당한 의무는
이 세상에 하나님을 드러
내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12.세상 사람들과 구별되는
그리스도인들의
능력은 사랑입니다.
13.사랑은 사랑
그 자체로 확인되는 것이지,
다른 것으로
증명되는 것이 아닙니다.
14.사랑의 말이 있다
해도, 그것이 사랑을
대치할 수는 없습니다.
15.하나님께서 은사를
주셨어도 그것이 사랑의
인격과 함께 역사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16.그 어떤 은사보다도
사랑이 중요한 것은,
신앙이 기계적 복종이 아니라
인격적 반응이기 때문입니다.
17.사랑 없이 섬기고 있다면,
당신은 차가운 도구일 뿐입니다.
18.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아도 사랑이 없으면
우리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19.산을 옮길만한 믿음이
있어도 사랑이 없으면
우리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20.아낌없는 구제가 있어도
사랑이 없으면 우리에게
아무 유익이 없습니다
21.자기를 내어주는
헌신이 있어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22.사랑받은 사람만이
사랑할 수 있습니다.
23.그리스도인의 존재
이유는 사랑입니다.
24.사라의 첫 번째
속성은 오래참음 입니다.
25.인간으로 하여금 사랑하며
살지 못하게 하는 가장
중요한 요인은 외부가
아니라 내부에 있습니다.
26.오래 참음의 모본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27.우리는 우리의 인생을
통해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을 확인합니다.
28.하나님의 오래 참으시는
사랑을 우리는 이해할 수도,
설명할 수도 없습니다.
그저 감격할 뿐입니다.
29.이 세상은 우리에게
오래 참는 사랑을 요구합니다.
30.사랑의 두 번째
속성은 온유함입니다.
31.온유는 쉽게 얻을 수는 없지만,
쉽게 잃을 수 있는 덕입니다.
32.온유는 태만과 나태에서
오는 평강이 아닙니다.
33.온유는 자기를 억누르며
죽어지내는 것이 아닙니다.
34.하나님과의 평강이
온유함의 비결입니다.
35.진정한 온유함은 늘
거룩한 단호함과 공존합니다.
36.온유한 그리스도인들이
필요합니다.
37.사랑의 세 번째 속성은
투기하지 않는 것입니다.
38.사랑을 나우어야 할 상대를
경쟁상대로 인식할 때
투기가 시작됩니다.
39.지체를 경쟁 관계로
인식하는 것은 하나님을
향한 그의 사랑이
상대적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40.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받
은 사랑은 비교 자체가
불가능한 절대적인 사랑입니다.
41.41.하나님의 사랑은 우리를
열등감에서 벗어나게 합니다.
42.사랑의 네 번째 속성은
자랑하지 않는 것입니다.
43.사랑거리가 바뀌면
자랑거리도 바뀝니다.
44.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섬김의 동기가 아닐 때,
자기 의가 쌓입니다.
45.하나님의 참사랑을
아는 사람은 육적인
것을 과시하지도,
부러워하지도 않습니다.
46.사랑의 다섯 번째 속성은
교만하지 않는 것입니다.
47.겸손의 출발은 나를
사랑해주시는 하나님입니다.
48.예수님을 통해 표현된
하나님의 사랑은 철저한
낮아짐의 사랑입니다.
49.예수님을 통해 표현된
하나님의 사랑에는
천국의 고귀한 향취 대신.
이 세상의 슬픔이 묻어있습니다.
50.교만함이 깃든 영성은
아무리 찬란하게 빛난다
할지라도 모두 잘못된 것입니다.
51.하나님의 사랑에 연애감정으로
반응하는 것이 우리 신앙의
모든 비극의 시작입니다.
52.사랑은 자기를 주목하지 않고
사랑의 대상을 주목하게 합니다.
53.하나님의 사랑이 밀려올 때,
우리의 모든 상처는
거짓말처럼 사라집니다.
54.사랑의 여섯 번째 속성은
무례히 행치 않는 것입니다.
55.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이
누구인지를 한시도 잊지 않으셨습니다.
56.하나님에 대한 바른 인식 없이는
하나님을 향한 바른 사랑도 없습니다.
57.사랑의 일곱 번째 속성은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는 것입니다.
58.예수님을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은 자신을 잊게 만드는 사랑입니다.
59.우리 인생의 대부분의 고통은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인생을
주장하지 않기 때문에 생겨납니다.
60.사랑의 여덟 번째 속성은
성내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61.예수님을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만이 우리의 본성적인
분노를 잠재울 수 있습니다.
62.포악한 본성으로 말미암은
분노는 신앙생활에
막대한 피해를 입힙니다.
63.사랑의 아홉 번째 속성은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64.참사랑을 모르는 사람은
상처를 간직하지만,
참사랑을 아는 사람은
사랑을 간직합니다.
65.우리가 악한 생각에
사로잡히는 것은 세상이
유혹하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의 내면이 거룩한 사랑에
사로잡혀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66.사랑의 열 번째 속성은
불의를 기뻐하지 않는 것입니다.
67.불의에 대한 우리의 태도가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을 말해줍니다.
68.사랑의 열 한번째 속성은
진리와 함께 기뻐하는 것입니다.
69.진리에 대한 추구가 사라지면
목양의 관계도, 성도 사이의
영적인 연합도 사라지고 맙니다.
70.우리들이 하나님 앞에서
일구어 가야 할 사랑은
진리의 빛이 있는 사랑입니다.
71.사랑의 열두 번째 속성은
모든 것을 참는 것입니다.
72.사랑은 기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참음으로 이루어집니다.
73.사랑하는 대상에 대한
거룩한 집착이 모든 것을
참을 수 있는 힘을 가져다 줍니다.
74.모든 것을 참는 사랑은
희생을 요구하기에,
이 사랑을 실천하려면 사랑의
비밀을 간직하고 있어야만 합니다.
75.모든 것을 참는 사랑이 어렵기에,
우리는 그 사랑의 실천을 통해
조금씩 온전해져 갑니다.
76.사랑의 열세 번째 속성은
모든 것을 믿는 것입니다.
77.사랑은 지식을 기초로 합니다.
78.모든 것을 믿으며 사랑하는
사람은 결코 상처를 받지 않습니다.
79.사랑의 열네 번째 속성은
모든 것을 바라는 것입니다.
80.사랑은 포기하지 않는 것이기에,
사랑이 있는 곳에는 절망도 없습니다.
81.인간에게는 하나님을
의지할 의무만 있을 뿐.
인생을 포기할 권리는 없습니다.
82.사랑의 열 다섯 번째 속성은
모든 것을 견디는 것입니다.
83.사랑은 달콤함이 아니라
쓰디쓴 아픔이지만,
우리는 사랑할 수
있어 행복합니다.
/낮은 자존감의 속박/
사탄의 가장 무서운 심리적
무기는 열등감과 부족하게
느끼는 것과 자신의
가치를 무시하는 감정들이다.
놀라운 영적 경험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지식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감정들이 많은
그리스도인들을 속박하고 있다.
그들은 자신이 위치적으로
하나님의 아들과 딸들이 되었다는
것을 이해함에도 불구하고,
무서운 열등감에 의해서
꽁꽁 묶여져 있고
깊은 무가치감의
쇠사슬에 얽매여 있다.
-데이빗 A. 씨맨즈의
‘상한 감정의 치유’ 중에서-
우리 자신을 망가뜨리는
나쁜 습관과 중독,
과도한 자기포장이나
우울감의 이면에는
‘낮은 자존감’ 이라는
문제가 숨어 있습니다.
본래 있는 그대로의 나,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귀한 생명인 내가 아닌
세상이 말하는 사랑받는
사람의 조건으로의 나로
자신을 바라보며 그 기준에
자신을 맞춰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누군가에게
사랑받기 위해 애쓰기 전,
사랑받지 못해 좌절감에
빠져들기 전,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우리의 가치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무한한
가능성에 선한 목적을
두고 삶을 가꾸어 가십시오.
/평화/
나는 사명을 무시하는
것이 우울, 분노, 좌절
그리고 인생에 대한 불만족을
초래할 수 있다고 배워왔다.
또 사명을 따른다 해도
우울과 분노와 좌절과
외로움의 시간 가운데
빠질 수 있다는 것도 배웠다.
그러나 그러한 감정들 아래엔
분명 심오한 평화와
만족감이 있을 것이다.
- 커스틴 스트랜드
그리스도에 복종하므로
박해와 역경을 겪을 수도 있고
하다못해 불편함을 감수해야
할 때가 많지만 우리는 우리가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확신합니다.
평화와 위로는 말할 것도 없고
우리는 성령님과 함께
살아가고 있습니다.
/독일 국민에게 고함/
프랑스 나폴레옹군에 패전하여
낙망에 빠진 독일인들에게
철학자 피히테가 혼을 기울여
호소하였다. 국민교육을
통하여 민족혼을 재건하자.
새로운 독일인을 기르자.
이에 감명을 받은 독일인들이
초등학교 아동들을 바로
가르치는 일에서부터 시작하였다.
그로부터 70년 후인 1871년에
독일과 프랑스 사이에
다시 전쟁이 일어났다.
이번엔 70년 전과는 달리
독일의 완승으로 끝났다.
전쟁을 승리로 이끈 전쟁영웅
몰트케(Helmuth Karl B.
von Moltke, 1800~1891)가
귀국하였을 때에
국민들이 대환영을 하였다.
이때 몰트케가 말하였다.
“독일의 승리는 나와
군인들의 공이 아닙니다.
초등학교 선생님들의 공입니다.
이 모든 영광을 그들에게 돌립니다”
국가의 장래는 아이들이
무엇을 보며 자라느냐?
무엇을 생각하고 있느냐? 어
떤 교육을 받고 있느냐?
에 달려 있다. 독일의 경우
이런 내용들이 수십 년 후
꽃이 피고 열매를 맺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피히테 이후
독일 초등학교에서
무엇을 교육하였기에 ‘
독일 혼’을 심었을까?
반공교육도 아니고 애국애족
하자는 교육이었을까?
그런 거대한 표어가 아니었다.
가장 상식적인 방식이었다.
/남편은 현모양처를 원한다/
가정의 경제적인 책임은
원칙적으로 아내가 아닌
남편에게 지워져 있습니다.
그런데 늘어만 가는 아이들의
교육비와 생계비 부담을
남편과 나누어지기 위해
많은 아내들이 일터로
나서고 있지요.
그렇지만 이 같은 현실이
많은 아내들의 마음속에서
그다지 달갑게 받
아들여지지 않습니다.
아내는 남편을 돕는 가정의
운영자로 부름 받았기 때문이지요.
이와는 달리 여성의 사회
참여를 강력히 주장하는
또 다른 목소리가 있습니다.
그래서 실제로 많은 아내들이
의욕적으로 사회에 진출합니다.
그러나 어떤 경우이든 아내들은
경쟁적인 사회생활이 안겨주는 고
통과 함께 가정에서는
아내의 전통적인 내조를
바라는 남편의 욕구 때문에
이중적인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같이 직장생활을 하고 있는
아내의 입장을 잘 알면서도
마음속으론 현모양처다운
아내의 역할을 기대하고 있는 것이
남편들의 마음이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이들은 퇴근하고 집에
들어가면 현관에서 밝고 사랑스러운
미소로 자신을 맞이하는
아내의 모습을 상상합니다.
그 상상은 맛있는 저녁
식사를 준비하고 있으니
조금만 쉬면서 기다리라는
아내의 달콤한
목소리로 이어지지요.
식사를 마친 후엔 아내와
단둘이 이야기를 나누다가
침실로 향하는 그런 꿈 말입니다.
그런데 이 같은 남편의 상상이
실제적인 요구로 나타날 때
부부 사이에는 또 한 번 격렬한
갈등과 고통의 파도가 일게 됩니다.
이 같은 수많은 고통의
터널을 지나고 나서야 드디어
그들은 남편을 가정경제의 책임자로,
그리고 아내를 가정운영의
책임자로 세워주신 하나님의
원리를 깨닫고 감사하게 됩니다.
그때가 바로 부부가
은혜 받은 때입니다.
/벤처신앙/
신앙은 벤처(venture)입니다.
이것을 이해하지 못하고는
절대 신앙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적신으로 왔다가
적신으로 돌아가는
존재입니다(욥 1:21)
그렇기에 더욱더
신앙은 벤처(venture)입니다.
내가 지금 가장 절망스럽고
괴롭더라도 낙심하면 안 됩니다.
그것이 바로 신앙의
시작이기 때문입니다.
에레미야 예언자는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지혜로운 자는 그 지혜를
자랑치 말라.용사는
그 용맹을 자랑치 말라
부자는 그 부함을 자랑치 말라.
자랑하는 자는 이것으로
자랑할찌니 곧 명철하여
나를 아는 것과 나 여호와는
인내와 공평과 정직을 땅에
행하는 자인줄 깨닫는 것이라.
나는 이 일을 기뻐하노라
여호와의 말이니라”(렘 9:23-24)
신앙이 벤처임을 알 때
매주 선명한 복음의 기준들이
보여지고 제시 될 것입니다.
신앙의 본질은 바로 벤처
(venture)이기 때문입니다
/비가 내리지 않는 하늘은 없다/
운명이란 그런 것이다.
강인한 사람과 나약한 사람을
구별하는 기준은 간단하다.
강인한 사람은 운명이 도전해
올 때 "난 절대 포기하지 않아!"
라고 외치며 맞선다.
이 한마디가 바로
그 사람의 성공의
기본이 되는 것이다.
포기하지 않는 것은 기본입니다.
강인한 사람의 것이라
할 수도 없는 것이지요.
진정으로 강인한 사람은
포기하지 않는 것을 넘어
더 큰 희망과 긍정의
마음을 가진 사람입니다.
비가 내리고 바람이 몰아쳐도
포기는커녕"더 좋은 일이
있을 거야!"라고 외치는
사람입니다. 비가 내리지
않는 하늘은 없습니다.
/조언-멘토의 3가지 의도/
" 만일 당신이 조언을
들을 필요가 있다면,
당신보다 그 문제에 대하여
적게 이해하고 있는 사람을 찾아라.
그래야 그의 조언이 소중할 수 있다."
오스카 와일드의 말처럼
조언이란 필요로 하는 사람보다
우리가 더 똑똑하다는 것을
보요주는 게 아니다.
조언은 '추측해본다' 는 뜻이다.
다른 사람이 아직 생각하지
못한 것을 추측하고,
그가 어디를 보는지
그리고 무엇을 망각했는
지를 알아맞히는 것이다.
관점에 대한 또한
잘 들어주기로 시작합니다.
/가까워진다는 것/
가까워진다는 것은 두 사람이
하나가 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상대가 나와 다른
사람임을 인정하고,
그의 감정과 생각과 생활방식
모두를 존중하는 과정이다.
친밀해진다는 것은 두 사람의
내면이 나누는 대화이다.
각자 다른 두 사람이
서로를 받아들이고
아끼고 보살피면서
이루는 깊은 소통인 것이다.
그러므로 가깝다는 이유로
자기 방식을 강요해서는 안 된다.
가깝다는 그리고 잘 아는
사이라는 이유만으로
상대방을 예의 없이 대하고,
나의 생각을 강요하신
적은 없으신지요?
아무리 격이 없는 사이라고
하더라도 인간 개개인은
하나의 인격체로써
자기 자신의 생각과
소신대로 살 권리가
있습니다.가까운 사이
일수록 서로에 대한
생각과 생활방식을
존중하는 마음이 더
중요한 이유입니다.
/친구의 종류/
친구에는 4 가지
분류가 있다고 합니다.
첫째 꽃과 같은 친구
꽃이 피어서 예쁠 때는
그 아름다움에 찬사를
아끼지 않습니다.
그러나 꽃이 지고 나면
돌아보는 이 하나 없듯
자기 좋을 때만
찾아오는 친구
둘째 저울과 같은 친구.
저울은 무게에 따라 이쪽으로
또는 저쪽으로 기웁니다.
그와 같이 나에게 이익이
있는가 없는가를 따져
이익이 큰 쪽으로만
움직이는 친구
셋째 산과 같은 친구.
산이란 온갖 새와
짐승의 안식처이며
멀리 보거나 가까이 가거나
늘 그 자리에서 반겨줍니다.
그처럼 생각만 해도
편안하고 마음 든든한 친구
넷째 땅과 같은 친구
땅은 뭇 생명의 싹을
틔워주고 곡식을 길러내며
누구에게도 조건없이
기쁜 마음으로 은혜를
베풀어 줍니다.
한결 같은 마음으로
지지해 주는 친구가
바로 땅과 같은 친구입니다.
여러분 어떤 친구가
되고 싶습니까?
/세 가지 변화/
어떤 신학자가 성경에서
하나님께 쓰임 받은
믿음의 인물들에 대해서
연구를 했습니다.
그런데 대부분 별 다를 게
없는 평범한 사람이거나
오히려 못난 사람들이었습니다.
다만 이들은 3가지가 변화됨으로
놀라운 믿음의 인물로 쓰임 받았습니다.
●첫째, 생각의 변화입니다.
‘할 수 없다’는
생각을 ‘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바꿨고,
절망 가운데서 희망을
바라보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둘째, 말의 변화입니다.
믿음이 약했던 모세도
하나님의 기적을 체험하고는
백성들을 흔들림 없이
이끄는 힘이 말에
의해 생겼습니다.
말에는 각인력, 견인력,
성취력이 있습니다.
셋째, 자아상의 변화입니다.
‘노력해도 어쩔 수 없는
나’에서 ‘하나님
께 쓰임 받는 나’로
자아상이 변화될 때 할 수
있다는 생각을 넘어
해내야 한다는 생각을 갖게 됩니다.
성공하는 사람이 되려면
생각을 바꿔야 하고,
말을 바꿔야 하고,
자아상을 바꿔야 합니다.
이 변화가 있어야
인생도 신앙도 진정으로
성공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마귀는 부정적인
생각과 거짓된 말,
왜곡된 자아상으로
우리를 넘어뜨립니다.
십자가 보혈의 능력으로
이러한 마귀의 궤계를 물리치고
천국 시민다운 생각과 말,
그리고 긍정적인 자아상을
그리십시오. 반드시
주님께서 좋은
것으로 채워주십니다.
주님! 하나님 자녀로서의
성경적 자아상을 갖게 하소서.
세 가지 변화가 일어나는
삶을 위해 기도합시다.
/기적을 만드는 재료들/
한 번뿐인 인생에서
나를 이용해 무언가 꼭
이루고 싶은 마음은
멀리 뻗어가
기적이 일어나도록 한다.
무언가 되고 싶고,
하고 싶고, 앞으로
나아가고 싶고,
위로 오르고 싶고,
삶에 더 많은 의미를
부여하고 싶은 욕망은
기적을 만드는 재료들이다.
- 노먼 빈센트 필의
‘믿는 만큼 이루어진다’중에서 -
문제는 그 욕망의 빛깔입니다.
오로지 자기만을 위한 것인가,
더불어 함께 하는 것인가.
혼자만의 행복을 위한 것인가,
함께 행복할 수 있는 것인가.
함께 행복할 수 있는 기적의
재료들은 참으로 많습니다.
좋은 사람 하나가 다시없는
기적의 재료이고 그와 함께
살아 숨 쉬는 이 순간이
최고의 기적 재료입니다.
'쿨'한 인생 그래,
상처 받지 않기 위해,
냉소적인 것.
소위 쿨한 것보다
더 좋은 일은 없다.
그러나 그렇게 사는 인생은
상처는 받지 않을지 모르지만,
다른 어떤 것도
받아들일 수가 없어.
더욱 황당한 것은 상처는
후회도 해보고 반항도
해보고 나면 그후에 무언가를
극복도 해볼 수 있지만
후회할 아무것도 남지
않았을 때의 공허는
후회조차 할 수 없어서
쿨(cool)하다 못해
서늘(chill)해져
버린다는 거지.
-공지영의 "네가 어떤
삶을 살든 나는 너를
응원할 것이다"중에서 -
눈앞의 작은 시련이 두려워
요리조리 피해다니며
보다 안정적인 것,
현실적인 것만 추구하며
'쿨'하게만 살기엔
우리의 인생이 너무
슬퍼지는 게 아닐까요?
"내"가 가야할 길이
무엇인가를 분명히 알고
세상의 온갖 통념에
강한 의문을 제기하며
끊임없이 창의적인
에너지를 불태우는
'젊음'만이 진정 살아서
팔딱이는 '젊음'이 아닐까요?
세상은 그런 '젊음'을 위해
항상 열려있고 변화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뿌리 깊은 나무/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흔들리지 않는다.
그래서 근심엽무
(根深葉茂)라고 했던가,
뿌리가 깊으면 가지가
많고 잎사귀가 무성합니다.
이 세상에 뿌리처럼
중요한 것이 없습니다.
뿌리 중에서도 남의 뿌리가
아니라 제 뿌리가 중요합니다.
자기의 근본 뿌리가 중요합니다.
나무만 뿌리가 있는 것이 아니어요.
사람도 뿌리가 있습니다.
나무의 뿌리는 땅 속에 있어서
물을 얻고 영양분을 섭취하여
모세관현상(毛細管現象)으로
위로 올려 보내 기둥과
가지와 잎이 자라도록 합니다.
사람의 뿌리는 뭘까요?
머리입니다.
나무는 땅 속에 뿌리를
박고 있지만 사람은
하늘에 뿌리를 들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머리에 붙어있는
7개의 구멍을 통해
물과 음식을 섭취하고
눈과 귀와 코를 통해
보고 듣고 느끼는 정서를
섭취하여 온 몸으로
내려 보내며 살아갑니다.
그러므로 보고 듣고
먹고 말하는 것을
아무렇게나 하면 안 됩니다.
그 하나하나가 나를
똑바로 자라게 하는
영양분이기 때문입니다.
/나무 뒤에 숨는 것과 안개 속에 숨는 것/
나무 뒤에 숨는 것과
안개 속에 숨는 것은 다르다.
나무 뒤에선 인기척과
함께 들키고 말지만
안개 속에서는 가까이 있으나
그 가까움은 안개에 가려지고
멀리있어도 그 거리는 안개에 채워진다.
산다는 것은 그러한 것,
때로 우리는 서로가까이
있음을 견디지 못하고
때로는 우리는 멀어져감을 두려워한다.
안개 속에 숨는 것은 다르다.
나무 뒤에선 누구나 고독하고
그 고독을 들킬까 굳이 염려 하지만
안개속에서는 삶에서
혼자인 것도 여럿인 것도 없다.
그러나 안개는 언제까지나
우리 곁에 머무를 수 없는 것,
시간이 가면 안개는 걷히고
우리는 나무들처럼 적당한
간격으로 서서 서로를 바라본다.
산다는 것은 결국 그러한 것,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게 시작도 끝도 알지 못하면서
안개 뒤에 나타났다가
다시 안개 속에 숨는 것
나무 뒤에 숨는 것과
안개 속에 숨는 것은 다르다.
ㅡ<안개속에 숨다> 류시화 ㅡ
<삶이 나에게 가르쳐준 것들>중에서
가끔은 우리삶이 안개
속에서 헤멜 때가 있지요"
힘들고 고통스러움을 안개에 비유하지만
안개는 시간이 지나고 나면
밝은 태양이 떠오른다는 것을
알려주기에 힘들고 고통스런 시간이
지나면 좋은 날이 있으리라는 생각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았으면 합니다.
/인생은 고통백화점(2편)-
주님은우리인생의 플러스(+)
제2차 세계대전 당시에 전쟁터에 나가
죽은 미국의 청년들의 수는
20여만 명 었다고 한다.
그러나 미국 본토에서 전쟁터에
자식들을 보내놓고 "죽으면 어떻게 하나?"
걱정하며 마음에 스트레스를 받아
심장마비로 죽은 사람의
숫자는 100만 명이 넘는다고 한다.
그렇다. 총에 맞아 죽는 것보다
걱정 때문에 죽는 사람이 더 많다는 말이다.
사람은 총에 맞으면 살수도 있다.
그러나 근심에 사로잡히게 되면
우리는 걷잡을 수 없이 나쁜 생각을
하게 되고, 결국은 죽음에 이르기도 한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총보다 무섭고
암보다 무서운 고난으로 인한
근심의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을까?
첫째로, 다른 환경과
다른 장소와 다른 일들을 찾으라.
근심은 또 다른 근심을 낳고
걱정은 또 다른 걱정을 낳게 된다.
근심이 몰려오면 그 자리에
있지 말고 그 자리를 떠나라.
우리의 문제는, 스트레스가
몰려오거나 걱정이 생기면,
그 자리에 퍼질러 앉아 근심과
스트레스를 분석하
고 연구하고 묵상하는데 있다.
근심에는 능력(?)이 있다.
근심은 우리를 묶는 힘이 있다.
근심은 또 다른 근심을 낳는다.
그러므로 그 자리를 일단 떠나야 한다.
요셉이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 앞에서
뿌리치고 떠낫듯이 말이다.
그 현장에서는 이길 수 없다.
제 3의 장소로 가서 하나님을
묵상하며 생각을 다듬어야 한다.
술을 앞에 놓고 술을 먹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것은 무모한 것이다.
비디오를 틀어놓고 비디오를 안 볼 수 있는가?
근심의 틈을 주지 말아야 한다.
근심이 싹튼 현장에 머물지 말아야 한다.
때로는 근심하는 자리에서
피하는 것이 지혜일 때가 있다.
성경은 시험 당할 때에 피할 길을 주신다고 하셨다.
우리는 근심꺼리가 찾아 올 때, 때로는 무시하고
때로는 생각의 채널을 바꾸고,
때로는 다른 일에 집중하는 것이 옳을 때가 있다.
근심 안 하려 할수록 더욱 근심하게 되고,
고민 안 하려 할수록 더욱 고민하게 되고
잊으려 할수록 더욱 간절히 생각나고,
음식을 절제하려 하면 할수록
더욱 음식 생각이 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우리의 연약한 본성 아닌가?
결심으로 안된다. 노력으로도 안된다.
떠나라! 피하라!
다른 일과, 다른 생각에 몰두하라!
때로는 시험과 근심꺼리를 무시하는
것이 훨씬 더 효과적일 수 있다.
둘째로, 근심과 문제가 생기면,
원초적인 근심과 걱정에 사로 잡히지 말고
고상하고 거룩한 근심꺼리를 찾아야 한다.
근심이 있음은, 살아있다는 증거의 표현이다.
살아 있는 자만 근심할 수 있다.
동물들은 근심이 없다.
우리가 근심하는 이유는
살아 있는 생명이기에 그런 것이다.
그렇다면 근심을 안 할 수 없다면
근심과 걱정의 내용들을 바꿔보자.
이를테면 구원에 이르는 근심이나
거룩해지는 근심이나 믿음을
얻기 위한 고상한 근심 말이다.
셋째로, 고난의 내용은 우리가 바꿀수 없지만
그 고난을 바라보는 생각의 방향이나
근심하는 우리의 태도는 바꿀 수 있다.
큰 배는 작은 키로 움직인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근심과 고난의 문제도
우리의 생각의 방향에 따라
생사가 달라지기도 한다.
"안된다면" "안되는것" 이다.
안된다는 키로 방향을 안되는 쪽으로 설정하면
우리의 배는 그리고 가는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잘될 것이다"하면 "잘되어 지는 것이다"
컵에 물이 반이 있다. 생각의 방향이
부정적적인 사람은 물이 반박에
안남았다고 불평하고 절망 할수 있다.
그러나 동일한 상황인데도 긍정적인 사람은
물이 아직도 반이나 남았다고
감사하며 소망을 품을수 있다.
"왜 나만 이러냐고" 생각할수 있지만
나보다 더한 사람이 어디선가
나를 부러워하고 있을수 있다.
우리는 고통의 백화점에서 우리의 생각대로
그리고 필요를 따라 물건을 쇼핑하고 구매할수 있다.
고통의 백화점에는 플러스와 마이너스라는
상품들이 진열되어 있다. 선택은 우리가 해야 한다.
타락한 우리의 본성은 마이너스(-)를
구매하려 할 것이다.
오래된 학습의 결과이다.
그러나 이제는 믿음과 긍정적인
생각으로 풀러스를 구매해야 한다.
언제나 우리 인생의 플러스(+)는 주님이시다.
지금의 우리의 처지와 형편이 절망적이고, 위기이고,
가능성이 희박할지라도 주님이 오셔서
플러스(+)가 되시면 우리의
삶은 홀연히 역전될 수 있다.
우리의 고단한 삶은, 주님의 역전이 아니면
기적이 아니면 안되는
처절한 하루,하루가 아닌가?
주님을 플러스로 생각하고,
믿고, 기대하고, 의지하라.
그분만이 우리의 일몰을 일출로
근심을 찬송으로, 걱정을 기도로,
저녁을 아침으로, 절망을 소망으로
역전시키실 수 있으시다.
그뿐인가, 마침표가 없으신 주님이 오셔야
우리의 지독하고 처절한 고난과 고통의
문제들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될 것이다.
쓰레기통에서도 꽃을 피우시는 분,
고목에서도 꽃을 피우시는 분,
사막에서도 물을 내시는 분,
광야에서도 고기를 먹게 하시는 분,
홍해속에서도 길을 내시는분,
끈하나 없이 지구를
공중에 떠있게 하시는 분,
한번도 해와 달이 바꾸어 뜨게
하는 실수를 하지 않으시는 분,
언제나 공평하신 ,분 언제나 선하신분,
그분으로 인하여 재대신
화관을 쓰게 될 당신은,
두고 보기에도 아까운,
이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하나님의 걸작중의 걸작이다.
/나는 도도새인가? /
17세기 말, 인도양의 한 섬에는,
도도라는 새가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 섬에는 그 새들이 살아가기에,
아주 좋은 여건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을 위협하는
천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사방에는 먹을 것이 널려 있었고,
삶의 안락함을 위협하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그야말로 천국이 따로 없었습니다.
그 새들은 그 땅에 둥지를 틀고,
땅에 널려 있는 풍성한 먹이들을
먹고 살았음으로 굳이 날개를 이용하여
창공을 날아오르는 수고를
하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기록에의하면, 나중에 문명의 혜택을 받아,
그 섬에 사람들이 들어가 목격된,
그 도도새의 모양은
실로 놀라운 것이었다고 합니다.
키는, 고니 정도로 큰 키에, 몸집은 굵고
몸무게는 약 25kg, 부리는 약 23cm나 되었으며
심각한 것은 날개가 아주 짧아져서,
하늘을 전혀 날지 못했다고 합니다.
많은 세월 동안 사용하지 않았던 날개는,
어느새 그 본래의 기능을 상실하여
거추장스러운 장식품에
불과한 것이 되고 만 것입니다.
그 새가, 사냥군들에게 표적이 되었다는 것은,
누구나 짐작할 수 있는 사실이 아니겠습니까?
도도새는 스스로 안락함에 빠져
본래의 정체성을 상실하게 되었고
그 결과로 사람들에게 잡혀
식용으로 먹히게 된 것입니다.
스스로 몰락의 길을 선택한 것입니다.
도도새에게 천적만 있었어도,
종은 울려야 종이고,새는 날아야 새이듯이
성도는 더 높은 차원의 삶을
향하여, 비상할 수 있어야 성도입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 중에서는,
날아오르지 못하는 이미
날개(기도와 말씀의 날개)가 퇴화 되었거나,
몸집이(육) 너무 비대해진
성도들을 만나기가 어렵지가 않습니다.
분명 외모로 봐서는 성도인데 도무지 날지도,
걷지도, 울지도, 웃지도, 못하는 그런 성도 말입니다.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없으며,
맹수의 흔적은 있으나,
맹수의 야성을 잃어버린 성도 말입니다.
승리와 간증은 이제 더 이상 오늘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제는 과거 속에 있었던 찬란한 영광의 흔적일 뿐입니다.
주님과의 달콤한 로맨스도, 신앙인의 정체성도,
영의 실재도 동화 같은 이야기입니다.
그 때의 이야기를 하며, 때때로 흥분도 하지만,
이미 날수 없는 날개로 축 쳐져
있음에 대한 항변일 뿐입니다.
간간히 예배의 에너지로 날아오르려
하지만, 마음뿐입니다.
은혜 받았던 감격을 아무리 설명하지만
열대지방의 건천처럼 한때는
차고 넘쳤을 흔적만이,
유적되어 기억 속에 희미할 뿐입니다.
너무 오래 날지 못함을, 이제 거두는 것입니다.
너무 오래 기도를 중단한 나태함을,
형벌로 거두는 것입니다.
너무 오래 감사하지 못한
어두운 마음을, 추수하는 것입니다.
너무 오래 안락함에 빠져
있음에 대한, 주님의 채찍입니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은,
좀 먹지 못해도, 좀 어려워도, 좀 힘들어도,
좀 불편해도 날아오르는 것(비상하는 삶)입니다.
이 땅에서도, 하늘을 사는 삶입니다.
발은 착고에 묶여있어도,
마음은 하늘에 앉은 삶입니다.
좀 피곤해도, 새벽을 깨우는 삶입니다.
좀 바빠도, 말씀을 묵상하는 삶입니다.
좀 궁핍해도, 나누는 삶입니다.
그러나 우리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는 더 편한 세상을 원했고,
더 안주하려 했고, 더 많이 소유하려 했고,
더 많이 누리려 했을 겁니다.
그러는 사이에 우리는, 나도, 남도, 모르게
피둥피둥하게 비대해진 것입니다.
굳이 이 편한 세상과 안락한 여건에서
굳이 기도하며 더 많은 은혜를 갈망해야
할, 필요성을 찾지 못하는 것입니다.
동기부여의 부재로 인하여,
정체성을 상실한 비극입니다.
그러는 사이에, 우리가 비대해지기만을,
뚫어지게 기다리는 존재가 있습니다.
도도새를 사냥하러 찾아온 사냥군들처럼,
우리를 삼키려 찾아오는
존재가 있습니다. 사단입니다.
그러나, 평소에 날기를
연습하며 훈련했던 새들은,
사냥군이 찾아와도 날아 오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평소에 눌러 앉아 먹기만 하고,
영적 게으름과 타성(매너리즘)으로 세월을
허비하며 보낸 새들은, 사냥군 앞에서
무장 해제된 군인처럼 무력한 것입니다.
그냥 대책 없이 잡아먹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살리기 위하여,
하늘의 삶을 갈망하게 하기 위하여,
이 땅에 안주하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천국의 환상을 사모하게 하기 위하여,
쉬지 않고 성숙시키기 위하여,
더 좋은 것(성령)을 주시기 위하여,
우리에게 감당키 어려운
천적들을 허락하십니다.
천적들은, 겉으로 보기에는 형벌 같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하나님의 실수 같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하나님의 불공평하심 같습니다.
왜냐하면 그 고난의 깊이가,
허리가 꺾어지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모든 천적 배후에는,
하나님의 의도된 섭리가 숨어 있습니다.
그분의 선한 목적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천적, 그것은 고난입니다.
그것은 가시입니다. 그것은 브닌나입니다.
그것이 숨쉬기 조차 버거운 통증입니다.
그러나, 천적은 천국을 사모케 합니다.
천적은 주님을 바라보게 합니다.
천적은 이 땅에 소망두지 않게 합니다.
천적은 e"편안세상"보다,
the"편안하늘"을 그리워하게 합니다.
천적은 우리를 부지런 하게 만듭니다.
천적은 우리를 요셉 되게 합니다.
천적은 기도실로 급하게 나아가게 합니다.
천적은 주님께로 나아가게 만듭니다.
그러므로, 어떤 천적이든,
천적은 유익한 것입니다.
천적이 없었던 도도새가
행복하다고 말할 사람은 없습니다.
천적이 있음으로 날아 오를 수
있는 튼튼한 날개를 소유한 새가,
오히려 진정으로 행복한 새가 아닐까요?
오늘 하루도 우리를 무지, 무지,
힘들게 하는 천적들을 두심은
주님의 또 다른 사랑의 표현임을
깨닫는 은혜가 필요합니다.
고난으로 인하여 잠을
이룰 수 없다면, 감사하십시오.
나를 괴롭게 하고
찌르는 사람으로 인하여,
눈물이 마를 날이 없다면,
오히려 감사하십시오.
너무 갑작스런 삼중고의 고난으로 인하여,
밥이 넘어 가지 않을 만큼 힘들다면,
오히려 감사하십시오.
너무 이해가 안 되는 의인들의 고난과,
악인들의 형통함으로 인하여,
화가 난다면 오히려 감사하십시오.
그 고난이라는 천적으로 인하여 당신은
언제라도 날아오를 수 있는,
튼튼한 날개를 소유했기 때문입니다.
독수리의 새끼들은 둥지의 가시로 인하여,
날개짓을 배운 다고 합니다.
만일에 둥지에 폭신한 솜털뿐이라면,
독수리의 새끼들은 그곳에서 "여기가 좋사오니" 하며,
어미가 주는 먹이만 받아먹다가는 평생
날지 못하는 "닭 같은 독수리"가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닭으로 부르신 것이 아니라,
독수리로 부르신 것입니다.
비바람과 폭풍우를 뚫고 올라가는 독수리 말입니다.
그러니, 너무 세상이 주는 편안함에 속지 마십시오.
너무 세상 음식에 지나친 관심 갖지 마십시오.
오히려 영의 양식에 배부르십시오.
너무 세상 화려함을 쫏지 마십시오.
그것은 수가성 여인이 갈망하던
먹어도 다시 목마른 세상물일 뿐입니다.
오히려 목마르지 않을 생수를 갈망하십시오.
이제 더 큰 천적을 만나기
전에 새벽을 깨우십시오.
e편한 세상에서 안주하려 마십시오.
가시들을 제거 하려 힘쓰지 마십시오.
고난들을 피하려 애쓰지 마십시오.
그냥 품으십시요. 그냥 받아들이십시오.
그냥 인정하십시오.
그냥 하루를 기다리시며,
인내로 나아가십시오.
사실 고난중에는 우리가 할일이 별로 없습니다.
우리가 겪고 있고 겪어야 할 고난들은,
우리를 망하게 함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살리시려 허락하신 천적입니다.
지금 우리의 천적들이 장차 천국에
들어가게 하는, 로얄 티켓이
될 줄 누가 알겠습니까?
천적..말, 그대로 하늘이
보내신 적(?)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하느니라"(행14;22)는
말씀은 오늘도, 내일도 유효하기 때문입니다.
/웰빙형 크리스천의 7 가지 실천법/
웰빙(Well-bing)은 무엇을 먹고 무엇을 입고 무엇을 쓰느냐에 관한 것만이 아니라 우리에게 주어진 삶을 어떻게 사느냐에 관한 인간의 반성을 담고 있는 ‘삶의 코드’이다. 따라서 육체적인 건강과 외모를 중시하는 웰빙 열풍은 이제 자제하고 ‘영혼의 웰빙’을 시작해야 할 때이다. 전인적인 건강이 이루어질 때 진정한 평화와 안식을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김학중 목사는 최근 출간한 ‘웰빙형 크리스천의 7가지 실천법')에서 “크리스천들의 진정한 웰빙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자유와 평화,정의와 사랑의 복을 받는 삶을 몸으로 보여주는 것”이라며 “웰빙형 크리스천은 하나님의 마음을 대변하는 존재가 돼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즉 하나님의 눈으로 사람과 환경을 보며 작은 예수처럼 살려는 결단을 가진 사람들이 웰빙형 크리스천이란 것. 열정과 희망을 갖고 하나님의 섭리와 주권을 인정하며 긍정적으로 살아가는 웰빙형 크리스천의 7가지 실천법을 제시한다.
△뜨거운 열정을 갖는다=삶의 매순간을 헛되이 보내지 않고 최선을 다하는 자세를 갖는다. 다른 사람의 재능과 소유를 비교하기보다 지금 가진 것에 대한 믿음과 열정으로 불가능에 도전하는 삶을 하나님은 기뻐하신다. 우리 삶에 우연은 없으며 하나님께서 모든 것의 주권자이시고 모든 것을 합력해 선을 이루시기 때문이다.
△잠자는 리더십을 깨운다=사랑과 긍휼,편안함과 부드러움,강함과 추진력을 가진 종합형 리더십이 웰빙형 리더십이다. 예수님이야말로 우리가 본받아야 할 웰빙형 리더십이다. 강한 자에게는 더 강하고,약한 자에게는 온유하고,부드러운 심성과 말로 다스리는 사람이 돼야 한다. 또 공의에 대해서 강하게 주장하고 불의에 대해서 분명하게 거부하는 예스와 노가 분명한 리더십을 세워야 한다.
△보물 같은 희망을 찾는다=어떤 일에 실패하거나 일이 풀리지 않을 때 기회와 능력이 없음만 탓해서는 안된다. 주어진 시간 속에 최선을 다했는지 반성해보고 그 시간 속에서 희망을 찾아야 한다. 모든 것을 긍정적으로 보고 하나님의 주권을 의지하는 것이다. 희망은 시간을 타고 온다. 지금 잠시 실패의 자리에 있어도 시간이 흐르면 잊혀지고 새로운 기회가 온다는 것을 기억하자. 하나님은 모든 것을 합력해 선을 이루시기 때문에 지금의 고난이 희망을 만드는 불씨가 된다.
△창조적인 꿈을 잉태한다=하나님과의 관계,사람과의 관계에서 자신의 존재 의미를 재발견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눈으로 모든 것을 바라보면 하나님께서 개인에게 주신 소명을 발견할 수 있다. 삶의 목적과 가치,나아가 사랑의 깊이와 용서의 비밀을 발견할 수 있다. 또 타인을 존중하고 나눔과 섬김,희생을 감수하는 삶속에 하나님께서 창조적인 꿈을 주신다.
△이웃과 하모니를 이룬다=상대방을 존중하고 사랑하며 상대방 입장에서 생각해 본다. 예수님께서는 항상 병든 자를 만나면 병든 자 입장에서 생각하셨으며 창기와 세리를 만나도 그들의 입장에서 생각하셨다. 남편을 여럿 바꾼 수가성 여인이나 간음한 여인을 보면서도 그들의 입장에서 대하셨다. 우리 삶속에서도 상대방 입장에서 해석하는 웰빙형 신앙 잣대가 있어야 한다.
△나만의 개성을 키운다=웰빙형 크리스천의 ‘신앙 개성 브랜드’는 무엇일까? 그것은 다른 사람이 안 하는 것을 찾아 봉사하는 삶이다. 귀찮고,하기 싫고 힘든 곳에 자기를 던져 봉사하는 신앙을 가지는 것이다. 모든 삶의 영역에서 다른 사람들과 차별화된 그 무엇을 찾으려는 노력은 웰빙형 크리스천의 또 다른 신앙고백이다.
△세상에 사랑을 실천한다=이웃에게 가장 아름다운 주파수를 보내자. 가장 아름다운 파동은 사랑이란 주파수이다. 사랑의 주파수는 마음이 맞지 않는 사람도,미워하고 싶은 사람도 너그럽게 이해하게 해주는 묘한 힘을 가지고 있다. 많은 부분이 다르고 어긋나도 하나로 조화를 이루게 해주는 신기한 마음의 파동인 사랑은 거저 얻을 수 없다. 끊임없는 자기 갱신을 위한 영혼의 기도와 실천을 통해 이룰 수 있다.
김학중 목사는 “웰빙은 스치고 지나가는 유행이 아니라 시대성을 이어가고 시대마다 독특한 개성을 가지고 사라지지 않는 트렌드로 자리잡을 것”이라고 말했다. 또 “웰빙은 우리가 참으로 사람답게 살기 위해 가져야 할 삶의 태도요 삶의 방식”이라고 강조했다.
보셀리노<아이를 잘 기르는 집 보셀리노 부부 이야기>
책은 학교에서 교장선생님으로부터 걸려온
심상치 않은 한통의 전화로부터 시작됩니다.
"오늘 쉬는 시간에 코디(저자의 아들)가
선생님 사물함에서 밝은 주황색 물감을 꺼내서
교실 2-1과 2-2,교사휴게실과 보조교사실
벽을 온통 주황색으로 칠해 놓았답니다."
입이 딱 벌어지고 혈압이 천장까지 치솟은 엄마!
"여보세요? 여보세요?
보셀리노 부인? 제 말 들리세요?"
퍼뜩 정신이 돌아오자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훌륭한 부모들은 이렇게 참담한 경우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아이에게 어떻게 대할까?"
그 끔찍한 일이 벌어진 날 이후 저자는
골치아픈 것을 견디느라 약을 복용할 것이 아니라,
남편과 함께 여러가지 자료들 속에서
가족들의 삶속에 변화를 가져다 줄
자녀양육에 대한 원리들을 찾아냈고
그것을 열 가지로 잘
정리하여 이 책을 펴냈습니다.
/아이를 잘 기르는 열 가지 원칙/
1.현재의 완벽함 보다는
나아졌다는데 초점을 두라.-
완벽한 부모도 완벽한 자녀도 있을수 없다.
사람은 처음부터 불완전한 존재이다.
자녀들을 다른 누구와 비교하지 말고 전보다
나아졌다는 사실을 기뻐하고 칭찬하고 격려하라.
2.부모가 먼저 습득해야
자녀들에게 나눠즐 수 있다 -
오늘 우리 자녀들이 본 것이
내일 그들이 무엇이 될지를 결정한다.
행동은 훈계보다 언제나 앞선다.
3.자녀를 절대로 포기하지 말라 중단하지 말라 -
차라리 포기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될 때 포기하지 말라.
중단하지 말라. 패배감에 빠지지 말라.
절대로! 예수님은 우리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셨다.
4.잘못을 정당화 하지 마라-
선의의 거짓말이 오점을 남길 때
거짓말은 정당화 될 수 없다.
언제나 자녀들이 뒤에서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며 정정당당하게 행동하라.
5.그들조차 스스로를 신뢰할 수 없을 때에도
끝까지 그들을 믿어주라 -
그러면 그들도 스스로를 믿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믿고 계신다.
자녀들도 당신이 믿어주길 원하고 있다.
6.완벽주의를 버리고 현실을 직시하는 부모가 되라
7.자녀 문제로 부부사이가 소원해질 때
자녀의 과외 활동보다는 결혼이,
부모의 역할보다는 부부애가 더욱 중요하다.
가족이란 부부 중심으로 설계된
것이지 자녀 중심이 아니다.
8.어떤 희생이 따르더라도 생명을 존중하라.
9.당신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을 기억하라.
그리고 그 목적이 이끄는 삶을 경험하라.
10.자녀들의 미래가 당신의 손에 있을 때
하나님의 말씀으로 자녀의 세속화를 막으라 -
자녀가 영생을 얻지 못한다면
부모가 세상을 모두 얻는다고
해도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부부관계지수 체크 (질문의 답이
'예'라면 번호에 동그라미를 치세요)
1.부부끼리만 극장에 가 본지가 언제인지 가물가물하다.
2.자녀들이 당신의 침대애서 잔다.
3.예배시간에 아이를 유아실로 보내지 않고
아기를 안고서 함께 예배를 드린다.
4.가게부에 장난감 사는데 지출된 돈의 액수가 장난이 아니다.
5.자녀들의 성공은 자녀들보다 나에게 더욱 중요하다.
6.당신의 컴퓨터에 아이들이 달라붙어 오락게임에 빠져있다.
7.학교에 다니는 자녀가 당신보다 늦게 잠자리에 든다.
8.당신의 자녀들을 여러 학원에 데리고 다니느라 바쁘다.
9.집안의 리모콘 사용권이 자녀에게 있다.
10.당신의 28세된 아들이 독립하려 하지 않는다.
점수_____ 위의 항목 중 하나라도 표시가
되어 있다면 당신의 부부사이엔 문제가 있다.
가정사역자 돌로레스 큐란이 수백이 넘는 가정을
연구한 결과 건강한 자녀를 만드는 가정은
다음과 같은 특징이 있는 가정이었다고
그의 저서 '건강한 가정의 특징'에 발표하였다.
/건강한 자녀를 만드는 열다섯 가지 특징/
1.서로를 인정하고 격려해 준다.
2.서로를 존경한다.
3.효과적인 의사표현과 경청하는 법을 가르친다.
4.서로에 대한 신뢰감을 키워간다.
5.놀이와 유머감각을 키워가게 한다.
6.공동의 책임이 있다는 것을 알게 한다.
7.옳고 그름에 대한 윤리적 기준을 갖게 한다.
8.가족만의 문화를 전통으로 계승해 간다.
9.가족들 사이의 대화를 장려한다.
10.각자의 사생활을 존중한다.
11.서로를 섬기도록 한다.
12.의사소통을 하기 위해 식탁에서
마주하는 시간을 최대한 많이 갖는다.
13.여가를 함께 즐긴다.
14.문제를 인정하고 도움을 찾는다.
15.하나님을 전적으로 믿는 신앙을
강조하고 생활 속에서 본을 보인다.
/상처없는 새는 없다/
상처를 입은 독수리들이
벼랑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날기 시험에서 낙방한 독수리,
짝으로 부터 버림을 당한 독수리,
힘센 독수리로부터 할큄당한 독수리 등
그들은 세상에서 자신들만큼
상처가 많은 독수리는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사는 것이 죽느니만
못하다는 데 의견을 일치했다.
이 때 망루에서 파수를 보던 독수리 중
영웅이 내려와서 이들 앞에 섰다.
" 왜 자살하려고 하느냐?"
" 괴로워서요. 차라리 죽어 버리는 게 낫겠어요."
영웅 독수리가 말했다. " 나는 어떤가?
상처 하나 없을 것 같지? 그러나 이 몸을 봐라."
영웅 독수리가 날개를 펴자
여기저기 빗금처진 상처가 나타났다.
" 이건 날기 시험 때 솔가지에 찢겨 생긴 것이고,
이건 나보다 힘센 독수리가 할퀸 자국이다.
그러나 이것은 겉에 드러난 상처에 불과하다.
마음의 빗금 자국은 헤아릴 수도 없다.
영웅 독수리가 조용히 말했다.
" 일어나 날자꾸나. 상처 없는 새들이란
이 세상에 나자마자 죽은 새들이다.
살아가는 우리 가운데
상처 없는 새가 어디 있으랴! "
- 행복한 동행中에서 -
거친 세상을 살아가는데 어느 누구도
상처가 없는 사람은 물론 없겠지만,
그 입은 상처를 자신이 어떻게 소화해
내느냐에 따라서 작은 사람, 아울러 큰 사람,
이렇게 두 부류로 나뉘어지는
것은 아닌가 싶습니다.
물론 누구나 다 영웅이 될 순 없겠지요.
그러나 그 영웅에 버금가는
크고 바른 생각을 하게 된다면
그 이상 좋을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 일어나 날자꾸나.
상처없는 새들이란 이 세상에서
나자마자 죽은 새들이다.
살아가는 우리 가운데
상처 없는 새가 어디 있으랴 ! "
영웅독수리가 했던 마지막 말,
깊은 울림이 느껴집니다.
/가장 착한 것은 물과 같다/
사람들이 '철든다'는 말을 하쟎습니까?
저는 혼자서 그 말이 어디서 나왔을까
생각해 보다가, 농부가 오랜 농사일을 하다보면,
씨를 뿌릴 철, 김을 맬 철, 웃거름을 줄 철,
거두고 저장할 여러 철을 따라 농사를 짓다보면,
그만 그 철이 아예 몸에 베어서
달력 같은 건 보지 않고도 농사를
훌륭히 지을 수 있을만하게 되는데
바로 그 상태를 가리켜 "철이 들었다"고
말한 데서 유래한 게 아닐까 생각해 봤습니다.
맞아. 바로 그런 뜻이야. 자네 생각이 맞았어.
그런데 요샌 말이지,
그놈의 철을 사람이 만들어버리니까.
그러니까 철이 무시無時라!
야채가 한겨울에도 나오쟎는가?
그런데, 그러다 보니까 인간이
아예 못할 게 없는 줄로 안단 말이야.
그러니까 갈수록 철부지가 될 수밖에요
/명품/
내가 그린 건 아주 미숙한 습작에 불과했는데
와 보니 평론가의 말대로 정말 좋은 그림이더라.
내 평범한 그림을 예술로 만든 건
오랜 세월과 사람들의 변함없는 사랑이었다.
명품으로 치는 골동품도
태어날 때부터 명품이었던 게 아니라,
세월의 풍상과 사람들의 애정이 꾸준히
덕께가 되어 않아야 비로소
명품이 되듯이 말이다.
(박완서의 소설 중에서)
무릇 명품이나 걸작은 의식적으로
또는 인위적으로 되는것은 아닌듯 합니다.
심혈을 기울이고 최선을 다해 일하다보
면 오랜 풍상을 겪어서 당대에 아니면 후세에
사람들이 다듬어 내는 것인 듯합니다.
/정정당당/
정정당당하게 겨뤄서 이겼다면
너무 자랑스러운 승리입니다.
정정당당하게 싸워 이겼다면
칭찬 받을만 합니다.
정정당당하게 겨뤄서 졌다면
아름다운 패배입니다.
정정당당하게 싸웠지만 졌다면
다음을 기약하게 됩니다.
정정당당한 게임은
지든 이기든 모두를 당당하게 합니다.
그러나 반대로 정정당당하지 못하게 겨뤄서
이겼다면 부끄러운 승리입니다.
정정당당하지 못하게 싸워
이기면 야유를 받게 됩니다.
정정당당하지 못하게 겨뤄서
졌다면 당연한 것입니다.
정정당당하지 못하게 싸워서
지면 마음에 증오심이 생깁니다.
정정당당하지 못한 게임은 지든
이기든 모두를 망하게 합니다.
/마음/
1. 오늘도 새로움은 없었다.
가야 하는 곳은 하나뿐이기에
매일매일 스치는 모든 것엔
신비함도 신선함도 없었다.
어두운 어제에서 깨어
새로운 햇살을 맞이하며
아침향기 솔솔 불어오는
푸르른 대지 위에다
무거운 마음을 올려놓았다.
파란 하늘을 향해
마음의 기지개를 펴보아도
조금씩, 아주 조금씩
좁아지는 시간의 굴레로부터
자유로이 비상할 수는 없었다.
.2 오늘도 그대와 난
엇갈린 방향을 바라보며
등을 맞대고 있었고, 세상도 그렇게
내가 바라보는 모습 그대로
내게 돌려주지 않고
차가운 눈빛으로 외면만 하였다.
그대의 눈망울에 젖어있는
뜨거운 눈물의 의미를
느낄 수만 있다면
밤하늘의 빛나는 작은 별의 눈빛이
그대 영혼을 환하게 밝힐 수만 있다면
새벽을 감싸며 피어나는 하얀 안개꽃
사이로 그대 내게 작은 미소 띄우며
걸어올 것만 같았는데
고독한 세상의 새벽 길에 조금씩 보이기
시작하는 그대의 어두운 그늘은
모든 생명의 눈을 멍들게 하였다.
3. 그대여, 어제도 오늘도 그리고
내일도 그대는 혼자가 아니다.
그대 곁에는 항상 나의 그림자가 있고
내 안에도 언제나 그대가 있지 않더냐
시작은 언제나 지금이고 끝도 영원히 지금이니
그대를 어둡게 가리고 있는 그 상념의 감옥에서
이제 깨어나 그대 영혼의 바다에서
신비의 불빛으로 빛나는 별을 바라보라.
기다려주지 않는 시간의 흐름을 따라
우리가 가고 있는 그곳, 영원의 세계로
아름다운 별의 사랑을 띄워 보내야 한다.
우리의 마음을 앗아가고 있는 것은
급변하는 세상의 냉정함도
사그라지는 청춘의 모습도 아니었다.
단지, 마음의 흐름을 가로막는
情의 경계선 갈등이었다.
4. 우리들의 메마른 뜨락에
별 하나의 씨앗을 뿌리고
맑게 흐르는 마음의 향기로
서로에게 익숙해진다면
우리의 마음정원에도 그대와 나의 꿈이
자라며 평화로운 하늘정원에 별꽃이 피어나리라.
새로움은 언제나 그대와 나의 마음 안에 있었고
빛을 향해 걸어가는 그곳에
우리들이 가야 할 길이 있었다.
그대와 나를 위해 기다려주지 않는 공간 사이에서
반짝이는 마음의 별은 언제나 사랑을 노래하고 있었다.
-김성돈-
우리의 마음을 앗아가고 있는 것은
급변하는 세상의 냉정함도
사그라지는 청춘의 모습도 아니었다.
단지, 마음의 흐름을 가로막는
情의 경계선 갈등이었다.
/좋은음악의 향기 /
좋은 음악을 들을 땐 너도 나도 말이 필요 없지,
한 잔의 차를 사이에 두고 강으로 흐르는
음악은 곧 기도가 되지 ,
사랑으로 듣고 사랑으로 이해하면 사랑의 문이 열리지,
낯선 사람들도 음악을 사이에 두고
이내친구가 되는 음악으로 가득찬 집,
여기서 우리는 음악의 향기 날리며
고운 마음으로 하나가 되지, -이해인
/감사를 회복했을 때/
스펜서 존슨이 쓴 “누가 내 치즈를 옮겼는가?” 라는 책에 나오는 주인공은 두 마리의 생쥐와 두 명의 꼬마 인간인데 이 넷은 행복의 치즈를 찾아 여행을 떠나갑니다. 저자는 이것을 인생 또는 우리가 펼쳐가는 신앙의 삶이라고 해석한 것입니다. 천신만고 끝에 치즈 창고를 발견하고 거기서 마냥 행복해 하고 좋아합니다. 쌓인 치즈를 즐기는 사이에 거기서 그들은 안주해 버렸고 그러는 사이에 치즈가 말라간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어버렸고 치즈가 상해 가는 것도 몰랐습니다. 치즈가 떨어지는 것은 생각조차 할 수가 없는 일이었습니다. 평생 행복의 치즈와 함께 살 줄 알았는데 치즈가 다 상하고 떨어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직장이 내 곁을 떠나갔습니다. 사랑이 상해가기 시작했습니다. 건강이 내 곁을 떠나갑니다. 돈이 배신을 합니다. 친구가 내게 원망을 하며 내 곁을 떠나갔습니다. 소위 실패의 자리에 빠지게 된 것이지요.
이때 어떤 태도를 취할 것인가를 이 두 생쥐와 두 꼬마인간을 통하여 우리에게 보여 줍니다. 두 마리의 생쥐는 떠나간 치즈에 연연하지 않고 다음 치즈를 향해 새로운 도전을 시작했습니다. 한 꼬마는 며칠 동안 고민하고 실의에 빠져 있는듯하다가 다시 치즈를 찾아 보기로 했습니다. 그 길은 쉬운 길은 아니었습니다. 넘어져야 했고 때로 피를 흘려야 했고 고독에 울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마침내 도전하고 또 도전하여 커다란 치즈 창고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런데 나머지 한 꼬마는 빈 창고에 웅크리고 앉아서 넋두리를 늘어놓았습니다. 행복의 치즈는 어디로 갔을까? 분석하기 시작합니다. 누가 내 치즈를 훔쳐갔을까? 두리번거리기 시작했습니다. 내가 뭘 잘못했나? 난 최선을 다했는데. 허탈감 좌절감에 빠져들기 시작했습니다. 이웃을 향하여 불평하고 세상을 원망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의 입술을 열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실패하고 인생을 끝내게 되는 것입니다.
새 치즈를 찾아 떠나서 마침내 치즈 창고를 발견했던 한 꼬마는 그가 가는 인생길에 발견했던 진리들을 다음 찾아오는 사람들을 향하여 몇 자를 적어 둡니다. "변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가 없습니다. 새로운 세계에 대한 두려움을 없앤다면 성공의 길은 반드시 당신 앞에 열려지게 될 것입니다. 치즈 냄새를 부지런히 맡다보면 치즈가 상해가고 있음을 빨리 느낄 수가 있을 것입니다. 새로운 치즈를 마음속에 그리며 영상을 그리며 살아가면 행복의 치즈를 향하여 도전할 수 있는 용기가 생겨나게 될 것입니다. 사라져 버린 치즈에 대한 미련을 빨리 떨쳐 버릴수록 새 치즈를 향해 새롭게 시작할 수 있습니다. 실패의 창고에 웅크리고 앉아있는 것은 무익합니다. 과 거의 사고방식은 우리를 새 치즈 곁으로 인도하지 못합니다. 환경과 함께 자신도 변해야 합니다. 세상과 함께 당신도 변해가야 승리할 수 있습니다. 그 변화를 차라리 즐기십시오. 그리고 도전하십시오."
이 책을 추천하는 그레서 크로니는 이 책을 그렇게 요약했습니다. "인생은 자유로이 여행할 수 있도록 시원하게 뚫린 대로가 아닙니다. 때로는 길을 잃고 헤매기도 하고 때로는 막다른 길에서 좌절하기도 하는 미로와도 같습니다. 그러나 믿음을 가지고 끊임없이 개척한다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새 길을 열어 주실 것입니다. 그 길을 걸어가노라면 원치 않았던 실패를 당하기도 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시 일어나 승리의 행진을 시작할 수 있습니다."
실패의 자리에서 다시 일어나기를 원하는 사람들을 향하여 이 책은 기록이 되어졌습니다. 실패의 자리에서 털고 일어나는 순간 하나님께서 당신의 손을 붙들어 주실 것입니다. 한 번의 실패를 영원한 실패인양 낙담하지 마십시오. 한 번의 실패가 인생 전체의 실패인 양, 인생자체의 실패인 양 포기하지 마십시오. 특별히 여러분을 구원하신 하나님의 구원은 절대로 실패하는 법이 없을 것입니다. 여러분을 향하여 만들어 놓으신 하나님의 아름다운 계획은 절대로 패배하지 아니할 것입니다.
로라 슐레징어 박사가 쓴 「인생을 망치는 7가지 변명」이라는 책에서 “늘 변명만 늘어놓는 사람, 생각은 있으나 결단하지 못하는 사람은 성공할 수 있는 자신의 인생을 망친다”고 했습니다. 슐레징어 여사는 그의 책 서론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당신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다 알고 있습니다. 당신은 당신의 고집대로 살아보고 싶어 하고, 당신이 원하는 것을 다 얻고 꿈꾸던 그 환상을 모조리 이루어 보고 싶어 합니다. 당신은 가능한 한 노력은 하지 않고 희생을 적게 하고 출세하고 성공하고 싶어 하고, 나쁜 짓 하고서도 벌 받지 않고 피해가고 싶어 하고, 당신에게 상처주고 피해를 입힌 사람에게 멋진 복수를 하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입장을 바꾸어 생각해 보십시오. 만약 당신의 원수가 그런 힘을 가지고 있다면 당신의 인생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생각만 하더라도 끔찍하지 않습니까?
인생은 요술이나 마술이 아닙니다. 인생을 살아가다 보면 행복의 순간, 기쁨의 순간이 있지만 고난과 실패의 자리에 빠질 때도 있습니다. 때로 이런저런 실패들이 우리의 인생살이를 난타해 오고 실패는 예고도 없이 찾아옵니다. 고난당하는 당사자는 이 고난을 통해 자신을 성찰하는 기회로 삼을 때에 큰 유익과 복을 누릴 수 있게 됩니다.
오늘 본문의 주인공 요나는 하나님의 명령과 자신의 사명 앞에 불순종하다가 큰 물고 기 뱃속에 들어갔습니다. 숨을 쉴 수 없고 위액에 자신의 살이 녹아내리는 고통 속에 몸부림치며 기도했습니다. "스올의 뱃속에서 내가 부르짖었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스올" 은 음부, 지옥을 의미합니다. 그 고통이 얼마나 처절했던지 이게 바로 지옥이구나 싶어서 몸부림하며 부르짖었다 그런 내용입니다.
고난과 실패의 자리에서 요나는 어떻게 다시 일어설 수 있었을까요? 실패란 환경의 문제라기보다 오히려 정신의 문제입니다. 아무리 성공자라 할지라도 그 정신, 마음이 실패의식에 사로잡혀 있으면 그는 이미 실패자입니다. 반면 아무리 큰 어려움에 부딪혔다 할지라도 그 정신이 승리의식으로 넘쳐있으면 그는 실패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허버트는 폭풍은 참나무의 뿌리를 한층 더 깊이 뻗어가도록 만들어 준다고 얘기했습니다. 토마스 칼라힐은 약한 자의 길에서 장애물인 것이 믿음 있는 사람, 강한자의 길에서는 오히려 디딤돌이 될 수 있다고 했습니다. 훌륭한 세일즈맨 엘머 레트맨은 진정한 판매는 거절당한 그때부터 새롭게 시작된다고 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어느 날 갑자기 실패가 내 앞에 찾아왔을 때 어떻게 해야 하며 이 실패를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는 것입니까? 실패에 직면하는 신앙적인 자세는 도대체 무엇입니까? 실패를 오히려 긍정적인 기회로 삼기 위해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 것입니까?
/실패의 자리에서 낙심하거나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
어떤 실패의 자리에 빠졌다 할지라도 포기하거나 낙심하지 말아야 됩니다. 양과 돼지가 함께 진흙탕 속에 빠져 들어갑니다. 진흙탕 속에 번듯이 드러누워 있는 놈은 돼지이고 진흙탕 속에서 빠져 나오려고 발버둥 치는 놈은 양입니다. 성경 어디에 보더라도 하나님의 자녀들을 향하여 "너는 돼지다"라고 말한 곳이 없습니다. "너는 나의 어린양이다"라고 말합니다. 실패의 진흙탕 속에 드러눕지 마십시오. 우리가 진정 하나님의 어린양이라고 하면 어떤 실패의 자리에 있다할지라도 용기와 소망을 가지고 다시 일어날 수 있습니다.
가룟 유다도 베드로도 예수님의 제자로 실패하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실패감을 극복하지 못했던 가룟 유다는 목매달아 자결했고 창자가 터져서 죽었습니다. 그러나 실패의 허울을 벗어던지고 회개하고 일어선 베드로는 예수님의 수제자로 초대교회 최고의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아프리카 밀림에 최고의 맹수는 사자입니다. 사자가 한번 나타나면 모든 짐승들이 꼬리를 내리고 숨습니다. 그러나 이 무서운 사자도 코끼리 곁에는 함부로 가지 못한다고 합니다. 그 긴 코를 휘저었다가 사자를 한번 내리치면 10m 20m 가서 내동댕이쳐진다고 하는 얘기입니다. 또 코끼리는 그 코로 1 톤짜리 통나무를 번쩍 들어 실어주기도 하고 옮겨가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거대한 힘을 가진 코끼리가 어린아이 손에 이끌려서 재주를 부리는 서커스단을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코끼리가 아주 어릴 때에 강한 쇠말뚝에 묶어 둡니다. 끊어지지 않는 철사로 꽁꽁 묶어두면 몸부림을 하다가 목에 피가 납니다. 그래도 쇠말뚝을 끊을 수가 없습니다. 말뚝이 빠지지 않습니다. 그렇게 1년 2년 지나는 사이에 코끼리는 실패감에 좌절감에 젖어들게 되는 것입니다. 저 말뚝은 절대로 뽑을 수 없다. 이 쇠사슬은 절대로 끊어지지 않는다. 이쯤 되어졌을 때에 쇠사슬 대신 노끈 하나를 묶어둡니다. 쇠말뚝이야 적당히 그냥 갖다 걸쳐만 놓습니다. 그러면 코끼리는 이미 실패의식 좌절감 속에 빠졌기 때문에 저 쇠말뚝은 절대로 뽑혀지지 않는다. 이 끈은 절대로 끊을 수 없다. 그래서 끌어 가는대로 조금만 자극이 되면 질질 끌려온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실패가 두려운 것이 아니고 이 실패를 극복할 수 없어 넘어지는 것이 아니고 "나는 다시는 일어날 수 없어" 패배감 좌절감이 무서운 것입니다. 이것을 떨쳐버리지 못하면 승리하는 삶을 살아갈 수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실패 자체는 실패일 수가 없습니다. 실패했다는 그 의식이 실패일 뿐입니다. 실패 가운데서도 낙심하지 아니하고 포기하지 아니하고 다시 일어설 수 있다는 용기를 가지고 능력의 주님을 바라보고 있다면 실패는 오히려 승리의 디딤돌이 될 수 있습니다.
기억하십시오. 언제나 하나의 문이 닫혀질 때에 하나님은 또 다른 문을 우리를 향하여 열고 기다려 주실 것입니다. 명심할 것은 언제나 문제는 정지표시가 아니라 방향 표시일 뿐입니다. 포기하라는 뜻이 아니라 다른 방향으로 새롭게 시작하고 도전하라는 명령입니다.
/뛰어봤자 벼룩이라도 벼룩은 뛰어야 한다/
벼룩을 유리병 안에 넣고 뚜껑을 씌워 놓으면, 뚜껑까지만 뛰어오릅니다. 그렇게 병뚜껑 까지만 뛰는 것에 익숙해지면 나중에는 뚜껑이 없어도 그만큼만 뛰어오릅니다. 벼룩 스스로 자기의 한계에 갇히고 마는 것입니다. 자기 몸의 몇 십 배를 뛰어 오르던 일은 아련한 추억일 뿐입니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은, 날마다 더 높이 뛰어 오르는 것입니다. 더 많이 기도하고, 더 많이 감사하고, 더 많이 충만하고, 더 높은 비전을 품고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를 부르신 목적입니다.
현재 우리가 당하고 있는 모든 저주와 같고 형벌과 같은 고난들, 걱정, 염려, 불안, 어둠은 이미 십자가에서 청산하신 것들입니다. 우리를 근심케 하시거나, 우리에게 허리가 꺾이는 것과 같은 고통을 주시는 것은 주님의 본심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심은 '눌리게 하심'이 아니라 '누리게 하심'입니다. 그러나 가만히 있으면, 저절로 누림을 경험하고 충만하게 살아지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다 이루어 놓으신 일들을 인정하고, 날마다 뛰어 올라야 합니다. 우리가 몰라서 그렇지 우리 안에는 엄청난 분, 예수 그리스도가 계십니다. 그리고 그분 안에는, 엄청난 능력이 있으십니다. 우리의 할일은 능력을 새로 받는 것이 아니라 이미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주어진 능력을 활용하는 것입니다.
아주 옛날에 아프리카 원주민들이 금을 가지고, 돌멩이를 다루듯이 차고 놀았는데 그 광경을 본 외국인들이 껌 값을 주고 금덩어리를 사갔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금의 가치를 모르면 금을 가지고도 거지로 살아갑니다, 우리 안에 계신 분은 금보다 귀한 분이십니다. 그분의 가치는 실로 계산이 안 되는 어마 어마한 분이십니다. 그분 안에는 불가능이 없으시며, 안 되는 일이 없으시며, 마침표가 없으시며 절망이 없으십니다. 우리가 만일 그 사실을 머리로는 알면서도 실제로는 활용하지 못한다면 마치 은행에 수천만 원을 쌓아 두고도 굶고 있는 사람과 같은 것이며 비행기를 타고도 비행기 안에서 제공되는 기내식을 돈이 없다고 거절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안에 무한한 잠재력을 주셨습니다. 우리는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대단한 신분을 소유한 특별한 사람입니다. 주님이 그 피의 값으로 우리를 사셨습니다. 우리는 그 신분을 망각해서도 안 되며 그 신분으로 모든 특권과 영광을 누려야할 필연적인 의무가 있습니다. 잘 살아야 하고, 생명을 얻되 풍성히 얻어야 합니다.
우리 안에 잠들어 있는 능력을 깨워야 합니다. 우리 안에 오래전부터 주무시고 계시는 주님을 깨워 드려야 합니다. 그분이 일하셔야 하고 그분이 통치하셔야 합니다. 무엇으로 깨울 수 있고 어떻게 하면 내 안에 피로 값 주고 은사로 주신 능력들을 활용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기도인데 그냥 기도가 아니라 깨어 있는 기도이며, 창공을 뚫고 올라가는 우렁찬 기도입니다. 오늘 우리의 문제는 그런 기도를 못한다는 것입니다. 과거에는 했었는데 지금은 추억으로만 남는다.
/기도는 우리 안에 있는 능력을 끓어 올리는 펌프/
기도는 펌프와 같은데 우리 안에 있는 능력을 끓어 올리는 펌프를 말합니다. 그러나 기도를 못하고 안 되니 어떻게 샘물을 끓어 올릴 수 있을까요? 기도를 못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기도의 패배의식 때문입니다. 기도를 했으나 거절당한 경험이 많으면, 우리는 벼룩처럼, 더 이상 기도하는 것을 포기합니다. 기도에 대한 거절감 내지는 기도의 패배주의가 장애가 되는 것입니다. 기도해야 한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요? 그러나 안 되기도 하지만, 안 하기도 합니다. 벼룩의 병뚜껑 때문입니다. 벼룩이 뚜껑을 치워도, 더 이상 뛰어 오르지 못하는 고정관념에 사로잡히듯 많은 성도들은, 영적인 열등감과 패배의식이 병뚜껑이 되어 더 이상 기대도, 기도도, 희망도 없이 무력하게 하루를 보냅니다. 그냥 습관적으로 기도하는 것 뿐입니다.
이제 우리의 할일은 뚜껑을 치고 올라가는 것입니다. 뚜껑이 있다는 것은 사단이 만들어낸 거짓말입니다. 기도의 응답은 없다는 패배의식, 기도해도 별수 없다는 고정관념, 아무리 해도 나는 안 된다는 열등감, 그 뚜껑을 뛰어 넘어야 합니다. 우리의 고정관념, 열등감, 패배의식이 우리를 무력하게 만들며 기도하지 못하게 만들며, 희망을 잃게 만들며 주저앉게 만들며 늘 실패와 무기력의 틀, 내지는 병 안에 갇혀 살게 만듭니다. 누가 뭐라고 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 그 안에 갇혀 사는 것입니다. 패배의식이나 고정관념, 열등감은 창살 없는 감옥과 같은 것입니다.
벼룩은 자기 몸보다 몇 배나 더 높이 뛰어 오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벼룩이 그 능력을 상실한 이유는 뚜껑이 있다고 믿고 생각하는 고정관념 때문입니다. 사실은 뚜껑이 없는데도 말입니다. 뛰어 봤자 벼룩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래도 뛰어야 합니다. 사단은 우리를 속입니다. 기도해봤자 벼룩이라고..아무리 해봤자 안된다고 우리는 그 사단의 속삭임에 속아서 몇 번 기도하다가 포기하고 몇 번 시도해 보다가 중단하는 것입니다.
뛰어 봤자 벼룩일지라도 그래도 뛰어야 하지 않습니까? 그것이 벼룩의 사명이 아닌가요? 어제까지는 뚜껑으로 인하여 주저앉았었지만, 오늘은 다시 뛰어 보지 않을래요? 우리는 능력 주시는 자안에서, 얼마든지 뛰어 오를 수 있는 하나님의 사람들입니다. 나는 할 수 없으나, 우리 안에 계신 주님의 힘으로 할 수 있습니다. 어제까지는 죽으려 했지만, 오늘은 살기 위하여 희망을 품고 뛰어 봅시다. 그 어떤 고정관념도 그 어떤 열등감도, 그 어떤 패배주의도 우리를 가두어 놓을 수 없습니다. 내가 대단해서가 아니라 내 안에 계신 주님이 대단해서입니다. 피지 못하는 꽃은 꽃이 아니듯, 울지 못하는 새는 새가 아니듯, 뛰지 못하는 벼룩은 벼룩이 아니듯, 기도하지 못하고 절망하는 성도는 성도가 아닐지도 모릅니다.
/인생(人生)의 세 가지 후회(後悔. ) /
사람은 죽을 때가 되면
지내온 일생을 회고하며
세 가지를 후회한다고 한다.
첫째는,
베풀지 못한 것에 대한 후회"라고한다.
가난하게 산 사람이든,부유하게 산 사람이든
죽을 때가 되면 "좀 더
주면서 살 수 있었는데"
이렇게 긁어모으고,
움켜쥐어 봐도 별 것 아니었는데
왜 좀 더 나누어주지 못했고
베풀며 살지 못했을까?
참 어리석게 살았구나.
이런 생각이 자꾸 나서
이것이 가장 큰 후회란다.
둘째는, 참지 못한 것에 대한 후회"라고 한다.
그때 내가 조금만 더 참았더라면 좋았을 걸,
왜 쓸데없는 말을 하고, 쓸데없이
행동 했던가? 하고 후회한다고 한다.
당시에는 내가 옳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했고
그럴 수밖에 없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지나고 보니 좀 더 참을 수 있었고,
좀 더 여유를 가지고 참았더라면
내 인생이 좀 달라졌을 텐데 참지 못해서
일을 그르친 것이 후회가 된다는 것이다.
셋째는, 좀 더 행복하게 살지 못한
것에 대한 후회"라고 한다.
왜 그렇게 빡빡하고 재미없게 살았던가?
왜 그렇게 짜증스럽고 힘겹고 어리석게 살았던가?
얼마든지 기쁘고 즐겁게 살 수 있었는데...하며
복되게 살지 못한 것에 대해서 후회하며
또한 이러한 나로 인하여 다른 사람들을
힘들게 한 삶을 살았던 것에
대해서 후회한다고 한다.
/주님, 당신은 나의 쉼표/
거친 호흡 다스려 쉼 깊게 하라
삶의 길 곳곳에 스며 있는 쉼표,
주님, 당신은 나의 쉼터,
지쳐 서러운 몸과 영혼 편히 누워라
막막한 세상에도 따스한 쉼터,
무거운 삶의 짐 내려놓고 느림의 여유
작음의 아름다움 단순함의 기쁨으로
쉬어가라 이르시는 주님,
당신은 나의 쉼표 나의 쉼터,
사막이 아름다운 이유는
오아시스 때문입니다.
삶의 모든 가능성과 축복이
나를 비껴 갈 때, 그때 나는
차마 아픈 소리도 못 냅니다.
돌을 힘겹게 밀고 옮겨 보지만,
내일 아침이면 그 돌은 다시
제 자리에 와 있고 차라리
그럴 때면, 굴러가는 돌 밑으로
숨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아침이 되었어도
눈을 뜨는 것이 두려운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을 아름답게 살아야 하고,
웃어야 하는 이유가 나에게는 있습니다.
공평하신 하나님이 내 우편에 계시고,
신실하신 하나님이
내 좌편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밀고 올라가야 하는
돌의 무게로 인하여,
하나님을 원망하고 불평도 하지만,
하나님은 그럴 때마다
무거운 돌의 무게를
가볍게 하심으로
내게 찾아오심이 아니라,
나의 믿음의 무게를 크게 하셔서
넉넉히 그 돌을 밀도록 하십니다.
저는 이것을 "감당할 수
없는 은혜" 라 부릅니다.
사막이 아름다운 이유는,
오아시스 때문이라는 생떽쥐베리의
<어린 왕자>의 한 대목이
생각나는 늦은 오후시간에,
여기저기서 투-두-둑 떨어지는
낙엽들의 불협화음은,
우리 인생여정을 재촉하는
심장박동 소리인 듯 합니다.
요즈음, 지구촌에서 들려오는 소리며,
우리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생각하면,
그저 마음이 답답하다 못해
호흡이 곤란할 정도입니다.
지금, -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지구촌은 거대한 사막과 같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 속에서 생명을
이어가는 사람들의 모습은 실로,
브레이크 고장 난 자동차와 같이,
방향도 목적도 없이
무섭게 질주하고 있는 듯합니다.
더우기 가슴을 저리게 하는 것은,
사랑 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들이
싸우려고 태어난 사람인양,
모두들 그렇게 냉소적이며
공격적일 수가 없습니다.
모두들 상처가 너무 깊고
많은 탓이려니 생각합니다.
그렇다고 삭막한 세상을 떠날 수도
버릴 수도 피할 수도 없을뿐더러,
이 지경까지 이르도록 보고만
있어야 하는, 내 자신에게
얼마나 실망하는지 모릅니다.
그래도 상처투성이로 메말라 있는
저 영혼들과 멍든 지구를,
주님의 마음으로 품어야겠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은
세상사람들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저들이 힘들 때 우리도 힘들고,
저들이 살아야 할 터전이
사막이라면 우리도 그와 같습니다.
사막은 참으로 지독스럽게 무섭고
고독하고 위험한 공간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막을
여행하는 사람들의 희망은,
어딘가에 오아시스가 있다는
사실을 믿는 믿음 때문입니다.
만일에 사막 어딘가에
오아시스가 없다고 한다면,
저들은 목마름 때문이 아니라,
절망 때문에 곧
삶을 접을 수도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들의 삶의 무게가
너무 중하고 힘들다 하지만,
그럼에도 우리의 삶이 아름답고
황홀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우리의 걸음 걸음 중간에
솟아오르는 은혜의 오아시스 때문입니다.
그것이 없다면, 우리의 상처,
실망, 한, 아픔들이 어떻게
아물고 회복이 되겠습니까?
은혜의 오아시스를 만나면,
주님의 위로와 격려와
만져주심이 있습니다.
이러므로 주님의 참된 은혜는,
사막을 없애주는 것이 아니라
사막에서의 고통을,
오아시스의 기쁨으로
잊어버리고 초월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 오아시스를 자주 만나는
이 가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기 위하여 우리는,
자주 그리고, 오래
하나님 앞에 머물러야 할 겁니다.
그리고, 절대로
포기하거나 낙망치 마십시오.
사막마져도 아름답고
축복된 장소로 만드는 길은,
오직 주님의 마르지
않는 은혜뿐입니다.
비온 후에는 숲이 더 울창하고
아름답기 마련입니다.
그리 아니할지라도,
/쉼의 영성을 위한 삶의 구조 변화/
바른 쉼은 몸과 영혼, 육체와 정신
이 모두 온전하게 쉬어질 때 찾아온다.
그러기에 일을 하지 않고 쉴 때에는
우리의 오감(五感)을 다 쉬어줘야 하다.
보고, 듣고, 말하고, 느끼고, 생각하고
하는 활동을 되도록 잠시 멈추고
숨을 고르면서 명상하는 시간을
갖는 것도 좋은 쉼의 방법이다.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영혼의 쉼,
내적인 평화와 안식이 없는 상태에서
이 육체의 쉼은 오래가지 못한다.
우리의 영, 정신이 평안해야
몸도 쉴 수 있다는 사실은
이미 의학계에서조차 인정되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모든 영적인 신앙생활은
모두 쉼 속에서 행해져야 하는 것이고,
또 그 생활들은 자연스럽게 우리의
영과 몸에 쉼을 가져와야 한다.
예배를 드리고, 기도를 드리고,
찬양을 하고, 명상하는 시간
그 때가 바로 진정 쉬는 시간이다.
마치 예배를 기도를 일로 한다면
그것에 신심이 일어나겠는가?
하나님 말씀 속에서, 찬양 속에서,
우리의 몸과 영혼은 모두 쉴 수 있다.
쉼의 시간, 쉼의 공간을 갖는 것은 중요하다.
하루 생활 짧더라도 자기만의 쉼의 공간에서
쉼의 시간을 누릴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하다.
아무리 열악한 환경일지라도
쉼의 시공간은 마련할 수 있다.
정말로 그것이 불가능하다면
지금 있는 자리에서
하루에 한번이라도 나는
지금 쉬고 있다고 생각하면서
자신의 호흡에 집중에서
심호흡을 한다면
그 순간에조차 큰 쉼을 얻게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일상의 삶에서
쉼을 얻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우리의 삶의 구조,
삶의 지향성이 바뀌지 않으면
일상 속에서 쉼 쉼 속에서
일상은 이뤄지기 어렵다.
이 맥락에서 앞에서 언급한 예수의 멍에를
지는 모습을 다시 상기하면 그 말씀은
결국 삶의 구조를 바꾸는 것을 의미하다.
내 짐을 내짐을 내려놓고 대신의 예수의 멍에,
예수의 짐을 메는 것은 예수가 보여준
사랑의 삶의 원칙과 가치지향으로
삶의 구조를 바꾸는 것을 의한다.
이런 삶의 구보의 변화
없이는 쉼의 삶을 살아 갈 수 없다.
그 예수의 멍에 즉 사랑의 멍에를
메면 힘들 것 만 같은 멍에가
오히려 편하게 느껴진다는 것이다.
운전할 때 안전띠 착용에
익숙치 않는 사람은
처음에 안전띠를 메는 것을
불편해 하다가도 습관이
되면 안전띠 작용하면
오히려 편안하고, 든든한 느낌이 듭니다.
예수의 멍에, 예수의 삶 구조에 부합되는 삶은
현대인의 삶과는 상반되기 때문에 오
히려 힘겹게 느껴질지 모르지만 예수는 약속한다.
그 삶이 쉽고, 편한 삶이고 쉴 수 있는 삶이라고,
오늘 그 삶을 종교적인 용어가 아닌
일상적인 삶의 양식으로 표현하고자 하다.
이미 여러 곳에서 언급한 내용이지만
쉼의 영성과 밀접하게 관련이 있기 때문에
다시 한번 언급하는 데 다름 아닌
3S로 표현하고 있는
Small, Slow, 그리고
Simple를 지향하는 삶이다.
즉 우리의 삶의 구조가
작은 것에서 가치를 찾고,
천천히 여유 있는 삶을 살고,
또 단순화한 삶
속에서만이 쉼이 있을 수 있다.
쉼의 관점에서 잠시 살펴보자.
‘작은 것이 아름답다는 말이 우리
사회에 화두가 된지 오래되었다.
이 말은 작은 것에서 가치를
발견할 수 있는 눈을
가져한다는 말이다.
이 문명은 큰 것에 가치를 둔 나머지
큰 것이 좋다는 이데올로기를 만들어냈고
또 그것을 지향하는 문명이 되어 버렸다.
집도, 차도, 심지어는 사람도
키가 큰 사람에 가치를 둔다.
이러한 이데올로기는 우리로 하여금
불필요한 과잉노동을 부축이고,
욕심을 일으켜서 쉼 없이 일하게 한다.
작은 것에 가치를 찾는
사람의 삶 속에 쉼이 있다.
작은 것을 지향하는 삶은
사회적으로 작은 자들,
소외된 자들을 돌아볼 줄 압니다.
그런 사람과의 사랑 나눔에서
우리는 진정한 쉼을 얻을 수 있다.
하루에 4시간 노동으로도
사람이 충분히 먹고 살수 있고,
또 그런 사회구조가 올바른
사회구조라고 강조한 스코트 니어링의
말을 곰곰이 생각해 보아야 한다.
천천히 사는 삶, 멀리
내다보고 조급해 하지 않으며
하나님의 뜻을 기다릴 줄
아는 사람만이 쉼을 얻을 수 있다.
모든 것을 급하게 마음먹고,
급히 행동하는 사람,
빨리 일을 마치고 나머지
시간에 쉬겠다는 사람은 사실을
일상 속에서 쉼을 누리지 못하는 사람이다.
모든 것을 빨리 빨리 하려는 태도는
그 일뿐 아니라 자신의 삶까지도
그르친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하다.
Fast food가 우리의 몸을 망치듯
빠른 문명이 인간성을 파괴하고 있는 것이다.
이 문명이 시간의 싸움을 통해
얻어질 수 있다고 믿었던 여유는
역설적이게도 더 멀리 도망가 버렸다.
우리가 바삐 살면 살수록 시간도
더 촉박해지고, 쉼도 사라진다.
천천히 사는 법을 배워야 하다.
삶의 구조를 단순하게 만들지 않는
한 온전한 쉼은 참 요원하다.
지금처럼 인간관계나 삶의 양태를
복잡하게 만들어 놓은 상태에서
쉼을 얻는 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그러면 몸은 쉬고 있어도 생각은 온통
복잡하게 얽혀 깊은 쉼에 들어가지 못하다.
우리의 모든 삶의 요소, 구조를
들여다보고 최대한 단순화 시켜야하다.
먹는 것, 입는 것부터 시작해서 사
람과의 관계 등등 단순화시키지 않고
오늘 같은 삶의 구조에서
자신의 몸과 영혼이 쉬기는 참 어렵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은
먼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그의 거룩한 영 속에서
온전한 관계를 이루며
계속 평화와 안식을 얻는 것이다.
그 안식과 쉼을 기반으로
그 사랑에 대한 표현으로
삶으로 사회에서 선교도 하고
교회에서 봉사도 하는 것이다.
이것이 뒤바뀌어서는 안 된다.
특히 성직자, 목회자들이
바쁘게 살아가는 것은
잘 못 되도 크게 잘못된 것이다.
왜냐하면 바쁘게 살아갈
수밖에 없는 사람을
치유하고 목회하는 사람이
먼저 바빠하고 쉼을 못 누린다면
다른 사람들은 어디서 안식하며
살아가는 삶을 볼 수 있을까?
다른 사람은 제쳐 두고라도
인간의 영혼을 어루만지는 목회자는
더욱 쉼 있는 삶을 살아야한다고 믿는다.
이제 주 5일 근무제가 현실화되면서
여가활용에 대한 갖가지 논의들이 진행되고 있다.
이 와중에 교회출석률 저하에 대해
우려하는 발상 자체가 오늘
한국교회의 신앙수준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교회의 가르침 속에서
쉼에 대한 이야기가 사라진지 오래이다.
하나님 안에서의 쉼, 예수 안에서
쉼이라는 것은 그저 추상적으로 들릴 뿐이며
그저 영적 평안이나 죽은 뒤 천국에서
맛보는 영원한 안식 정도로 치부된다.
오히려 교회에서조차 봉사나 선교라는 이름으로
예수 안에서 쉼대신 예수의
힘으로 일을 강요하기 일쑤이다.
안식일의 주인을 되찾아야 한다.
올바른 쉼의 문제는
영성의 문제요 구원의 문제이다.
우리 또한 온전한 쉼을 삶의 중심에 놓고
다시 자신의 삶을 교정할 필요가 여기에 있다.
그 삶은 개인의 평온만을 추구하는 것으로
그치거나 무책임한 삶이 아니라
진정한 창조를 위한 역동적인 삶이며,
내 몸과 영혼을 살리는 영성적 삶이다.
사람과 자연 이 온 우주 모두 쉼을 필요로 한다.
사람과 사람, 사람과 자연, 그리고 사람과
하나님의 관계가 쉼 속에서 유지될 때
평화로운 관계가 될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우리는 자연에게,
자연은 우리에게 상호 쉼을 베풀어 줄 때
하나님의 창조질서는 새롭게 회복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쉼에 대해 명상하며
쓴 시를 함께 나누고 글을 마치고자 한다.
/ 마음과 영혼의 쉼/
: 쉼의 영성과 낮아짐의 영성/
일상에서 벗어나 아무리 몸이 쉰다 해도
마음이 번잡하여 갖가지 상념이나 걱정,
불안 속에 헤메이면
육체의 휴식조차 그르치게 된다.
이미 몸이라는 실재는 마음과
영혼이 함께 연결되어 있기에
몸의 쉼은 마음과 영혼의 쉼이
병행될 때 제대로 이루어진다.
그래서 마음/영혼의 쉼이 몸의 쉼 보다
우선시 되어야 할 이유도 여기에 있다.
예수는 우리에게 마음에 쉼을
얻는 길을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지고 허덕이는
사람은 다 나에게로 와서 오너라.
내가 편히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명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의 영혼이 안식을 얻을 것이다.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마11:28-30)
예수는 우리를 참 쉼의 세계로 초대한다.
예수는 우리에게 쉼을 주시는 분이시다.
그 쉼을 얻기 위한 첫 길은
그 분에게로 나아가 짐을 내려놓는 것이다.
만약 우리가 예수로 말미암은
쉼을 체험하려 한다면
먼저 우리가 필요로 하는 참 쉼은
예수로 말미암는 다는 사실을 통감해야 한다.
참 쉼은 현실의 생활조건에
의해 좌우되는 쉼이 아니라
바로 예수로 말미암는다는 것을 체험해야 한다.
해방, 구원, 자유가 그렇듯이
우리가 바라는 쉼은 또한 예수로 말미암는다.
그래서 우리가 할 일은 그에게 나아가는 것이다.
우리의 수고스러운 것, 짐 되는 것
그것을 그대로 갖고 그 분께 나아가는 것이다.
나 스스로 내 키를 한자라도
자라게 할 수 없다는 사실을 고백하며
그 분 앞에 내 짐을 내려놓는 것이다.
짐을 내려놓는다는 것은 그 짐에 대한
애착과 걱정과 근심에서 해방되는 것이다.
주님께 내 짐을 그대로 내 보이는 것이다.
그 분의 은총 앞에서 겸손하게
마음을 비우는 행위이다.
공중의 나는 새와 들풀도 먹이시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으로 내 걱정과 근심,
앞날에 대한 불안들을
예수 앞에 내려놓는 것이다.
우리가 예수 안에서 쉴 수 없는 것은
그 짐을 들고 예수께
나아가지 않기 때문이다.
내 짐에 대한 한탄도 많이 하고,
해결해 주십사 기도는 많이 하지만
정작 그 모습은 아직도
그 짐을 등에 메고 있는 꼴이다.
고생하고 무거운 짐에 허덕이면서도
그 짐을 예수 앞에 내려 놓지 못한다.
사실 짐조차 자신의 고유한 것으로 여겨
속 끌어안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자신의 고통, 아픔, 상처를
누구도 어찌할 수 없는 자신의 것 인양
내 놓으려 하지 않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오히려 그것을 감추려 한다.
그래서 그 짐은 더 무거워진다.
먼저 내 짐이 무엇인지 분별하고
그 짐을 주 앞에 내려놓아야 하고
이것은 반복적으로 일어나야 한다.
공동체 안에서는 공동체 회원들에게
자신의 짐을 고백하고 함께 나누는 것도
짐을 내려놓은 실천 방법이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 앞에서,
예수 앞에서 혹은 공동체 앞에서
자신을 낮추는 낮아짐의
영성으로 말미암는다.
오늘 우리는 예수 앞으로 자신의 짐을
내려놓으면서 예수의 현존 앞에서,
그 현존을 보고 만지고, 느끼고
체험하는 삶이 사라지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더욱더 힘겨워진다.
예수께 나아가 짐을 내려놓는 것은
그의 현존을 인정하고 그 앞에
자신의 온갖 짐을 내려놓고
그분을 신뢰하는 것이다.
그 다음으로 우리가 예수의 쉼을
얻는 길은 예수를 배우는 것이다.
이 배움은 예수에 대한
지식을 알아가는 배움이 아니라
더 철저하게 마음을 밭을
아예 바뀌기 위해 예수의
마음을 배우는 것을 의미한다.
마음이란 눈에 보이는
객관적 실체가 아니기 때문에
마음을 배운다는 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마음과 마음이 만나지 않고는
마음이 마음을 알 수 도 없고 배울 수 없다.
그리고 그 마음과 내 마음을 만나고
연결할 수 있는 길은
그리스도 영의 도움으로만 가능하다.
그리스도의 영이 우리와 예수의
마음을 만나게 하지 않으면
결코 마음을 만날 수 도 없다면
아무리 예수의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다는 사실을 알지라도
그 마음을 배울 수 없는 것이다.
우리의 짐을 예수 앞에서 내려놓고
그의 마음을 배울라 치면
영적인 깊은 만남을 추구해야 할 것이다.
바울은 갈라디아에서
그 경지를 그리스도가 내 안에,
내가 그리스도 안에
계시다라는 신앙고백으로 표현했다.
우리 또한 마찬가지이다.
당신 마음이 곧 저의 마음이 되기 바랍니다.
내 마음이 그리스도 당신 마음이고,
‘당신 마음이 곧 저의 마음입니다’
라는 고백이 나 올 때 비로소
그 분의 마음을 우리가 배운 것이다.
예수는 자신 스스로의 마음 상태를
온유와 겸손으로 표현하셨다.
그러므로 내가 겸손해지고 온유해짐은
바로 그의 온유와 겸손의
마음과 내 마음이 합치된 상태이다.
그렇다면 쉼을 이야기하는 지금
온유와 겸손을 언급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당시 예수와 함께 했던
민초들의 상황을 상상해 보면
예수의 이 말씀은 매우
비현실적인 처방처럼 보여 진다.
각종 생활고나 육체의 고통,
종교적 억압 속에 있던 민중들이
쉴 수 있는 방도가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이라 함은 현실을 도외시한
종교적 가르침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나 좀 더 깊이 생각하면,
진정한 쉼은 바로 이 마음
상태에서 비롯됨을 알 수 있다.
현재 우리의 마음이 번잡하고 부산하여
쉼을 제대로 찾지 못하는 이유는
자기를 규정짓는 여러 가지 요소들에
얽매여 자신을 과대 포장하거나
과욕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남에 대한 배려나 나눔의 마음보다는
남과의 경쟁에서 이겨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자신을 쉬게 하지 못한다.
겸손의 미덕보다는 자기과시를
계속 업그레이드한다.
교만과 자신감을 착각하고 열등감과
우월감을 동시에 가지고 있어서
진정한 자신을 쉬게 못하게 한다.
온유와 겸손의 상태는 바로 자신의
참 모습을 바라보는 첫 걸음이다.
기독교의 입장에서 보면 겸손은
값없이 구원받은 자로서의
자신을 바라보는 존재의 겸손이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어떤 존재였고,
지금 어떤 사람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아야 한다.
예수 앞에서 우리는 자랑할
것이 없는 사람이 아닌가?
삶이 은혜이고 은총이 어떻게
겸손하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온유한 사람, 겸손한 사람은 그 얼굴과
몸짓에서 편안한 기운을 느낄 수 있다.
온유와 겸손은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쉼을 얻을 수 있는 길이다.
나를 낮추고, 나보다
남을 더 높게 여기고,
그를 섬기려는 마음,
그래서 쉼의 영성은
온유와 겸손의 영성이다.
앞에서 말한 낮아짐의 영성이다.
마지막으로 쉼을 얻는 길,
혹은 쉼을 얻는 상태는
예수의 멍에를 맨 상태이다.
역설적이게도 우리의 쉼은 옛 짐을
없애버림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짐, 즉 예수의
멍에를 멤으로서 이루어진다.
예수 자신의 멍에를 함께 멘 이들이야말로
쉼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은 우리 스스로
예수의 멍에 아닌 다른 멍에로
힘들어하고 있음을 반증하고 있다.
예수의 멍에는 사랑의 멍에이다.
사랑의 힘으로 져야하는 사랑의 멍에이다.
그 멍에는 또한 평화를 위해
애쓰게 되는 평화의 멍에이며,
참 자유의 멍에이다.
구원으로 말미암아 자랑스럽게
자발적으로 메는 멍에이다.
현실적으로 그 멍에는
결코 가볍지 않은 멍에이다.
그러나 그 멍에의 무게감은
그 멍에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달려 있다.
멍에의 무게는 이미 정해져 있다.
예수의 멍에는 이미 메는
것도 편하고 짐도 가벼운 멍에다.
문제는 우리의 어깨에 달려있다.
어쩔 때 그 멍에는 인간으로 도저히
할 수 없는 힘든 멍에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는 결코
무게를 느낄 수 없을 정도로 너무
자연스럽게 기쁜 마음으로 짊어진다.
수많은 성인들이 우리 눈에 보이는
큰 사랑의 일을 할 수 있었던 것도
우리가 보기와는 달리 그 멍에는
그들의 영혼에 오히려 자유요
평화요 사랑이 되었기 때문이다.
주님은 우리를 일시키기
위해 고용한 고용주가 아니다.
예수의 짐도 가벼운 짐이다.
그 짐이 가벼움으로 느껴지지 않는다면
우리 생활에 쉼이 없음이 틀림없다.
예수가 우리를 부른 이유는 그 안에서
쉬고, 참 자유를 얻게 하심이다.
/쉼의 영성과 몸의 영성/
쉼의 영성이 곧 창조의
영성이며 하나님의 은총이다.
또 안식일이야말로 쉼의
영성이 피어나야 될 중요한 날이다.
그런데 이 쉼의 영성은 몸의
영성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몸의 영성은 몸 그 자체가
몸 안에 하나님이 거하시며,
예수의 흔적이 남아있는
하나의 영성체이며
관계체라는 사실을 인정한다.
이러한 몸의 영성이
올바로 구현되기 위해서는
쉼의 영성은 절대적일 수밖에 없다.
쉼 없는 몸이 제대로 영성을
구체화할 수 없기 때문이다.
몸을 통한 새로운 창조를
위해 몸의 올바른 쉼이 요구된다.
쉼이라는 현상은 결코 추상적이지 않다.
쉼이 우리 전 존재에
새겨지고 드러나고 영향을 미친다.
우선 쉼은 몸에서 일어난다.
몸의 쉼이 필요하다.
현대인들은 자신의 일로 몸을 혹사한다.
그래서 쉼 없는 몸은 늘 피곤하다.
우리가 몸의 쉼에 관심하지 않는
사이에 몸은 과로하게 된다.
우리가 알다시피 수많은 인간 몸의 질병
또한 몸을 쉬어주지 않음에서 비롯된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몸을 쉬게
하는데 익숙해야 하고,
쉼의 시간에 인색해서는 안된다.
우선은 쉼을 과한 노동에서 벗어나
몸을 쉬게 하는 것이 필요하다.
틈틈이 쉬어야 한다. 하루, 혹은
한 주, 혹은 한달 사이에
쉬는 시간과 날을 아예
계획하고 무조건 쉬어야 한다.
그리고 쉴 때는 제대로 쉬어야 한다.
사실 무작정 일을 하지 않는다고
해서 몸이 쉬어지는 것은 아니다.
일에서 벗어나 있지만 사실
잘못된 유희로 몸이 다른
것으로부터 혹사당하는 경우가 있다.
또한 TV 앞에 있는 사람들의
모습도 형태는 쉬는 것 같지만
몸은 쉬지 못하는 전형적인 모습이다.
물론 필요한 정보를 위해
TV는 유용하게 활용될 수 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TV에 중독 되어 있다.
집에 돌아오면 TV부터 켜야 마음이 편하고
TV를 보지 않으면서도 켜놓고 있어야
사람 사는 집 같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일터에서 돌아와 밥 먹고 소파에 앉아
줄기차게 TV 보면서
지금 자신이 쉰다고 착각한다.
물론 일에서 벗어났다는
의미에서 좀 쉬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순간 우리는 TV에서 쏟아져 나오는
현란한 영상과 불필요한 정보에
보이지 않는 몸은 사실
폭력을 당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TV를 보면서
쉰다는 것은 착각에 가깝다.
TV보는 시간만 줄여도 사람들은 지금보다
훨씬 여유롭게 생활할 수 있을 것이다.
TV를 보는 시간을 줄이고
대신 쉬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
또한 몸이 쉰다는 것은 몸 밖에서
오는 몸을 해롭게 하는 것으로
몸을 보호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 중의 우리의 먹을거리도
몸을 쉬게 하는 중요한 요소이다.
각종 유해식품이나 패스트 푸드에서
몸을 보호해야 몸이 쉴 수 있다.
또한 적당한 양의 음식섭취도 중요하다.
과식으로 인해 위의 부담이
큰 상태에서 쉼은 오지 않는다.
음식을 통해 몸으로 하여금
제 기능을 발휘할 수 있도록
몸의 기운을 새롭게 하고,
치진 피로를 풀어주는 것이 중요하다.
정신적인 스트레스를 의도적으로 거부하는
훈련도 몸의 쉼을 위해 절실하게 필요하다.
현대인에게 스트레스를 주는 일들이
너무도 많은 것도 사실이지만,
더 문제는 스트레스라는 용어를 남발하면서
스트레스를 더 키운다는 것이다.
내 사전(辭典)에 스트레스란 없다라고
믿을 정도로 오는 스트레스를
거부하지는 못할망정,
말로, 생각으로 스트레스를 키운다.
그래서 몸은 직접 피로 이상으로 더 피곤해 한다.
우리는 먼저 몸의 쉼이 꼭 시간에
비례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 필요가 있다.
그것은 숙면이 꼭 잠을 자는 시간의
양에 비례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5분 잠이라는 것이 있지요? 꿀잠이라고도 한다.
그것은 잠깐 잠을 잤는데도 깊이 잠을 자서
마치 몇 시간 잠을 사람처럼 개운함을
느낄 때 그런 말을 사용하다.
쉼이라는 것도 그럴 때가 있다.
직장에서 한번 많은 업무에, 생각에,
사람들과의 대화에서 잠시 떨어져서
십 분만이라도 심호흡을 하고
내가 지금 쉬고 있다라는 의식하며
침묵하는 생활습관을 가지는 것이 좋다.
일상생활 속에서 자기만의 쉴 수 있는
공간을 하나 쯤 마련하는 것도 지혜이다.
사람은 공간에 지배를 쉽게 받기 때문에
자신이 쉴 수 있는 공간을 갖고 있으면
그 공간에 그냥 들어서는
것만으로 쉼을 찾을 수 있다.
하루 생활 중에 짧으면 짧게,
길면 길게 몸의 쉼을 위한 시공간을
마련하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아름다운 삶/
씨앗이 흙을 밀고 올라와
싹을 틔우는 모습을
본 적이 있습니까?
두리번거리는 듯한 그 작고
연한 초록의 모습이 얼마나
대견하고 황홀한지 모릅니다.
아름다운 삶이란 바로 이런 삶입니다.
어둡고 딱딱한 땅을 뚫고 나와
세상을 향해 두팔을 벌리는 것과 같습니다.
호기심을 가득 안고 날마다 새롭게,
긍정적으로, 열심히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 모든 일은 사랑이 있어야 가능합니다.
삶에 대한 사랑,나에 대한 사랑,
그리고 이웃에 대한 사랑이
세상의 모든 싹을 틔우는 힘입니다.
삶에 대한 사랑,
나에 대한 사랑이 있습니까?
그 사랑이 아름다운 삶을 만듭니다.
--------------------
사랑은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사랑이 있는
곳에는 절망이 없습니다 .
희망이 없어”라는 말은
인간에 대한 정확한
판단에서 말미암은
것이라기보다는
사랑 없음이 기초가
되어 터져 나온 말입니다.
서정호 목사
(010-5617-7475)
온라인 자료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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