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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페타르 라덴코비치는 외국인임에도 독일 올해의 선수 2위까지 올랐는데 얼마나 뛰어난 선수였는가?
A. 라덴코비치는 매우 매우 뛰어난 골키퍼이자 골대를 비우고 전진하는 혁명적인 선수였다. 라덴코비치가 최고의 활약을 한 1965년 위너스컵 결승 웨스트햄전에서 확인할 수 있다. (주1)
Q. 독일 올해의 선수 투표를 보다보면 이해가 안 가는 연도들이 있다. 1970 젤러, 1975 마이어, 1979 포크츠, 1981 브라이트너 등등.
A. 1970년에 젤러가 뮐러를 이긴 건 꽤 놀라운 일이지만 많은 기자들은 1970 월드컵에서 젤러의 퍼포먼스를 뮐러의 그것보다 높게 평가했다. 젤러는 33세였음에도 많은 활동량을 보이며 어려운 미드필더 역할을 소화해냈으며, 많은 이들은 젤러의 '희생'이 뮐러를 빛나게 만들었다고 생각했다. (주2) 1975년은 베켄바우어에게 특별한 해가 아니었는데, 그는 여전히 월드클래스였지만 탁월하지는 않았다(특히 74/75시즌은 바이언에게 재앙이었으며, 마이어의 환상적인 활약 덕에 유러피언컵만 '구해냈다'). (주3) 1979년에 포크츠가 수상한 것은 1978년에 겪은 심각한 부상을 이겨내고 부활했기 때문이다. 그가 없을 때 글랏드바흐는 강등으로부터 살아남기 위해 분투하고 있었다. 포크츠는 부상에서 돌아와 스위퍼로 뛰어난 활약을 펼치며 동료들을 이끌었고, 그가 수비를 안정시킨 덕에 글랏드바흐는 강등으로부터 살아남았다. 브라이트너가 1981년에 루메니게를 이긴 건 쇼킹한 일은 아니다. 둘 다 월드클래스였으니까.
Q. 프랑스 잡지인 옹즈를 보면 1986년과 1987년 연달아 토마스 베어톨트가 최우수 라이트백으로 선정됐다. 옹즈의 투표는 기자가 아니라 독자들이 했음을 생각하면 꽤 놀랍다. 베어톨트가 유달리 인기가 많은 편이었는가?
A. 1986년이야 월드컵 덕분에 높이 평가받더라도 이상하지 않지만 1987년은 굉장히 놀랍다. 베어톨트는 절대 인기인이 아니었는데, 차갑고 오만하다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Q. 1990년대 초반 최고의 공격수로 누구를 꼽고 싶은가? 사퓌자, 예보아, 달린, 폴스터, 키르스텐, 쿤츠 정도가 생각난다.
A. 나에게는 사퓌자가 최고였고, 예보아가 작은 차이로 2위라고 생각한다.
Q. 카를로스 바빙턴을 아는가? 그가 월드컵이 끝나자마자 독일 2부리그로 이적했다니 매우 놀랍다. (주4)
A. 실제로 바빙턴의 이적은 놀라운 일이었다. 바텐샤이트는 사업가 클라우스 슈타일만이 인수했었고, 분데스리가로 승격하기 위해 바빙턴처럼 뛰어난 선수를 사려고 막대한 돈을 지불했다. 그러나 바텐샤이트는 승격에 실패했고, 1990년대 초반에 비로소 승격했다. 바빙턴은 바텐샤이트에서 뛰면서 엄청난 돈을 벌었을 것이다!
Q. 피사로를 에우베르보다 높게 평가한 건 놀랍다. 나는 피사로의 굉장한 팬이지만 대부분 에우베르를 90-00년대 분데스 최고의 공격수로 여기고, 특히 바이언 팬들이 그러하지 않나. 피사로의 뛰어난 누적 때문인가?
A. 나에게 피사로는 독일 축구계에서 가장 저평가된 공격수 중 하나다. 나는 정말로 에우베르보다 피사로를 높게 평가한다. 에우베르는 바이언의 전성기, 에펜베르크, 마테우스, 숄, 리사라수, 칸을 보유하고 챔피언스리그에서 우승하던 시기에 뛰었다. 반대로 피사로는 바이언의 침체기에 뛰었고, 이 때문에 에우베르가 더 많은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고 생각한다. (주5)
Q. 키르스텐은 통일 이후 50경기나 A매치를 소화했지만 딱히 국가대표에서 성취한 건 없는 거 같다. 이렇게 클럽과 국대가 따로 노는 선수는 참 평가하기가 어렵다. (주6)
A. 키르스텐은 항상 많이 뛰고 헌신적이며, 두려움을 모르고 헤딩의 명수인, 'gung-ho' 스트라이커였다. 90년대에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공격수 중 하나였다. 그러나 그는 클린스만, 푈러, 리들레, 비어호프를 넘어설 수 없었으며 이는 슈테판 쿤츠와 비슷한 운명이었다. 어쩌면 그는 너무 일차원적인 선수일지도 모른다. 비어호프 역시 마찬가지지만 세계 최고의 리그였던 세리에A에서 뛰면서 많은 골을 넣었기에 이득을 봤다.
Q. 올라프 톤을 어떻게 평가하는가? 플로에, 마가트, 한지 뮐러, 숄, 심지어 안디 묄러와도 비교할 수 있을까? 국가대표에서 보여준 게 없어서 어떻게 평가해야할지 모르겠다. 리베로로서는 어떠한가? 나는 슈틸리케와 슐츠, 아우겐탈러까지 독일의 리베로 탑5라고 생각하는데 이들보다 나은 선수일까?
A. 그렇다, 분명히 톤은 그들과 비교할 수 있다. 토마스 헤슬러처럼 매우 테크니컬한 선수였다. 그는 오직 유로1988만 제대로 소화했는데, 1986월드컵은 부상 때문에 이탈해야 했고, 1990월드컵은 89/90시즌의 부상 여파, 유로1992때는 부상으로 바이언의 주전에서 밀린 상태였다. 92/93시즌 바이언으로 복귀할 때 리베로로 뛰며 꽤 잘했는데 또다시 부상이 발목을 잡으면서 결국 마테우스가 바이언의 리베로가 됐다. 그가 90년대 중반 샬케로 복귀했을 때 비로소 부상의 악령에서 벗어났는데, 분데스리가 최고 레벨의 리베로로 활약했을 뿐만 아니라 독일 대표팀에 복귀할 정도였다. 베르티 포크츠는 마티아스 자머의 대체자로 톤을 고려했지만 믿지 못했고, 1998월드컵에서 매우 나쁜 모습을 보이자 결국 도중에 마테우스가 리베로를 맡았다. 개인적으로 나는 올라프 톤를 중앙수비수로 쓰는 걸 절대 이해할 수 없다. 토마스 헤슬러가 센터백으로 뛰는 걸 상상할 수 있을까? 말도 안 되는 소리다. 톤은 피지컬이 뛰어나지 않음에도 그의 다재다능함과 게임 리딩으로 역할을 꽤 잘 수행하긴 했지만, 그래도 나라면 톤과 같은 선수를 수비수로 쓰지는 않을 것이다. 절대로.
Q. 헤어베르트 바스가 젊었을 때 그렇게 대단했는가? 80년대 독일 최고의 유망주라고 할만큼?
A. 그땐 나도 어렸기 때문에 답하기 어려운데, 나한테는 짧은 다리에 골에 대한 본능이 게르트 뮐러를 연상시켰다. 그가 재능을 발휘한 1983년에 대단히 주목받았지만 그때 푈러 같은 선수도 있었기 때문에 바스가 그 시점에 최고의 유망주였다고는 말하지는 못하겠다. (주7) 그런고로 80년대 최고의 유망주였다고 말하지도 못하겠다.
Q. 위르겐 그라보스키는 리트바르스키와 비교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런데 왜 A매치는 44경기밖에 소화하지 못했는가? 스탠 리부다 때문인가?
A. 그라보스키는 대단한 선수이자 드리블러였다. 리트바르스키와 비교하자면 보다 중앙에서 많이 돌아다니는 선수였으며, 70년대 중반에 플레이메이커로 전향했다. (주8) 1974년까지 윙으로 뛸 때 그의 경쟁자는 헬트, 크레머스, 리부다, 뢰어, 하인케스였으며, 74월드컵이 끝나자 본인의 부족한 출장기회 때문에 대표팀에서 은퇴를 선언했다. 사실 은퇴하지 않았으면 대표팀의 플레이메이커로 계속 뛸 수 있었는데, 오베라트와 네처가 같이 대표팀을 떠났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대표팀 복귀를 원하지 않았다.
Q. 독일 대표팀의 최대 라이벌을 꼽는다면? 네덜란드, 프랑스, 잉글랜드가 생각난다.
A. 1974년 이래로는 네덜란드지만 예전보다는 완화됐다. 1988년부터 1992년 사이가 가장 치열했던 시기다. 프랑스는 축구에서는 숙적이었던 적이 없다. 잉글랜드는 네덜란드 다음이지만 네덜란드만큼 격화된 적은 없고, 독일보다는 잉글랜드가 라이벌 의식을 불태운다. 19세기부터 1960년대까지는 잉글랜드가 독일에게 축구를 가르치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1970년대부터 독일이 이 관계를 끝냈다. (주9)
Q. 당신은 아우겐탈러와 헤어게트를 슐츠보다 높게 평가하고, 네처와 오베라트를 대등하게 본다고 했었다. 그런데 슐츠와 오베라트는 키커로부터 WK를 훨씬 많이 받았다. 저 선수들이 저평가받은 거라고 생각하는가?
A. 키커는 과거에 IK 또는 WK는 국제대회에서 활약한 선수에게만 줬다. 오베라트는 독일 대표팀의 주전이었고 쾰른에서 유럽대회를 뛰기도 했다. 그러나 네처는 60년대에 그러지 못했다. (주10) 이런 상황은 1970년부터 네처가 대표팀에 자리를 잡고 BMG가 유러피언컵에서 경쟁하면서 달라졌다. 아우겐탈러와 헤어게트는 빌리 슐츠보다 훨씬 공격적인 성향의 선수다. 수비적인 면만 보면 슐츠가 분명히 이들보다 우월하다. 1960년대에 중앙수비수에게 공격적인 플레이는 요구되지 않았고, 오직 세트피스 상황에서만 공격에 임하면 됐다. 그래서 슐츠는 기대에 부응해 수비만 열심히 하는 수비수였다. 그러나 1970년대 들어 베켄바우어 때문에 이런 인식은 바뀌었다. (주11) 그래서 1980년대의 헤어게트와 아우겐탈러는 슐츠와 달리 훨씬 공격적인 리베로를 수행했다. 개인적으로 나는 시야가 넓고 뛰어난 패스를 뿌리는, 창조적이고 화려한 수비수를 슐츠 같은 고전적인 타입보다 선호한다.
Q. 2004년에 분데스리가 외국인 베스트11을 뽑으면서 모르텐 올센을 포함시키는 걸 봤다. 80년대 최고의 리베로이자 수비형미드필더 중 하나라는 건 알고 있지만 겨우 3시즌밖에 뛰지 않은 선수라 의외였다. 올센이 키건처럼 압도적인 모습을 보였는가?
A. 올센은 3년간 쾰른에서 뛰는 동안 분데스리가 최고의 수비수 중 한 명으로 여겨졌으며, 30대 후반이었음을 감안하면 대단한 일이었다. 그러나 키건처럼 압도적인 건 아니었다. 언제나 공격수들이 수비수들보다 압도적이니까.
Q. 70-80년대에 뛰던 용병들에 대해 설명을 해줄 수 있겠는가? (명단 생략)
A. 르 페브르는 MG에서 뛰는 동안 많은 인기를 누렸는데, 경기 후반에 결정적인 골을 많이 넣었기 때문이다. 그가 글랏드바흐로 이적한 건 유프 하인케스가 하노버에서 뛸 때였다. 그가 선호하는 포지션은 레프트윙이었고, 1970년에 하인케스가 복귀했음에도 르 페브르는 그의 자리를 지켰다. 하인케스는 중앙공격수로 뛰다가 르 페브르가 이적한 1972년부터 레프트윙으로 뛰었다. 매우 빠른 윙어로 공을 받고 전달하는데 능숙했다. 그는 중앙까지 내려왔다가 좌측으로 혼자 치고 달려가 오른발로 때려넣는 걸 좋아했다. 판 훌은 작지만 강인한 준족의 우측면의 드리블러로 쾰른에서는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다. 그는 분데스리가 최초의 100만 마르크 짜리 선수였고 사람들은 그에게 많은 것을 기대했기 때문이다. 크로스를 많이 날리기보다 스스로 마무리를 짓는 편이었는데 3년간 28득점이면 꽤 괜찮은 기록이다. 오콘스키는 86/87시즌 함부르크에서 굉장히 센세이셔널했다. 모두들 그에 대해서 얘기했었다. 오래 전 어렸을 때의 일이라 많은 걸 얘기할 수는 없지만 그는 헤드라인을 장식하는 선수였고, 굉장히 기술적으로 뛰어난 선수였던 걸로 기억한다. 이외의 선수들은 내가 썼던 것을 참고하라.
Q. 우베 란의 몰락은 믿을 수가 없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던 건가? 부상이라도 있었던 건가?
A. 독일 축구계를 통틀어 가장 급격한 몰락 중 하나다. 86/87시즌에 최고점을 찍었고, 80년대 말에 빠르게 쇠락했다. 83년부터 87년까지 그는 최고의 선수 중 하나였으며, 1987년에는 독일 올해의 선수로 선정되기도 했다. 많은 이들은 그의 앞에 위대한 커리어가 있으리라 생각했지만 너무나 빠르게 사그라들었다. 내 생각에 그가 글랏드바흐에서 만족하지 못했던 게 아닌가 싶은데, 87-88시즌에 PSV로 이적하고 싶었으나 무산됐고, 이때부터 하락세가 시작됐다. 당시 MG는 너무 많은 돈을 요구했었다. (주12)
Q. 독일인들은 유프 데어발과 그의 독일대표팀을 어떻게 평가하는가?
A. 그가 처음 대표팀의 지휘봉을 잡았을 때, 그의 편안한 스타일은 많은 팬을 모았다. 선수들은 그의 접근방법을 좋아했고, 성적도 매우 좋았다. 그러므로 우리는 1978년부터 1981년까지의 좋았던 시기와 1982년부터 1984년까지 나빴던 시기로 구분해야 한다. 1982년 월드컵에서 선수들과 데어발은 실망스러웠고, 계속되는 부진으로 데어발의 시기는 2차대전 이후 가장 부정적인 시기로 기억된다.
Q. 그렇다면 데어발호의 몰락은 무엇 때문일까? 플레이메이커의 부재와 함량 미달의 리베로? 루메니게의 불운한 부상? 데어발의 무능? 당신의 생각은 어떠한가?
A. 너무 어려운 문제다. 선수들의 면면은 화려했고, 그들은 잘 뛸 수 있다는 걸 증명했었다. 그렇기 때문에 딱 하나만 집어서 뭐가 문제라고 말할 수는 없다. 1980년의 독일 선수들 사이에선 좋은 기류가 흘렀는데 루메니게, 한지 뮐러, 슈스터, 클라우스 알로프스 등 젊은 선수들과 슈틸리케, 디츠, 칼츠, 흐루베쉬 등 노장들은 조화를 이루었다. 처음으로 나타난 나쁜 일은 문디알리토에서 브라질에게 1-4로 참패한 일이었다. 팬, 선수, 언론 모두 충격을 받았다. (주13) 결국 데어발은 DFB와는 못 해먹겠다면서 대표팀에서 은퇴했던 브라이트너를 6년만에 복귀시키기로 했다. 이건 대표팀의 분위기에 악영향이었고, 오직 루메니게만 그의 복귀를 반겼다. 브라이트너는 클럽에서 그랬던 것처럼 완전한 자유와 권한을 데어발에게 요구했다. 데어발이 이를 들어주자 여러 선수들이 불만을 품었으며, 대표적인 인물이 주장 디츠였다. (주14) 그들은 브라이트너 없이 유로에서 우승을 해냈고, 그가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여기에 이미 대표팀에는 슈스터라는 개성 강한 인물이 있었다. 1981년 이후로 대표팀의 케미스트리는 좋지 못했다. 게다가 과거 세대의 선수들과 달리 젊은 선수들은 대표팀을 위해 뛰는 것을 영광스러운 일이 아니라 단순히 직업적인 일로 생각했다. 그들은 스스로를 프로페셔널로 생각하고 감정 없이 비즈니스적으로 뛰었고, 그 결과가 1982년 오스트리아전이었다. (주15) 그들은 너무나도 쉽게 만행을 저질렀다.
주1. 하지만 이 결승에서 1860뮌헨은 0:2로 졌습니다.
주2. 젤러가 은퇴를 번복하고 대표팀에 복귀했을 때 뮐러와의 파트너십이 첨예한 논쟁거리였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제가 분매에 글을 올린 적이 있습니다.
주3.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켄바우어는 1975년에 발롱도르 2위였습니다.
주4. 바빙턴은 아르헨티나 국가대표로 1974월드컵 최고의 스타 중 하나였습니다.
주5. 피사로가 처음 바이언에서 뛴 건 01/02시즌부터 06/07시즌으로 이 무렵 바이언은 챔스4강 고지를 한 번도 못 밟고 번번히 망신을 당했습니다.
주6. 키르스텐은 동독 출신으로 동독 대표팀에서 49경기, 통독 대표팀에서 51경기로 센추리 클럽에 가입한 진기록의 소유자입니다.
주7. 푈러가 바스보다 3살 많긴 했습니다만 1983년에 브레멘을 골득실차 준우승으로 이끌었고, 득점왕과 독일 올해의 선수를 둘 다 챙겼습니다.
주8. 한편 리트바르스키도 프랑스 갔다가 돌아온 80년대 후반에 플레이메이커로 뛰었습니다.
주9. 보통 유로1972 8강(당시에는 예선) 1차전 잉글랜드 원정 3대1 승리를 상징적인 경기로 간주합니다.
주10. 당시에는 UEFA컵이 없고 페어스컵이 존재했는데, 꼭 리그 순위대로 참가팀을 정하지는 않았던 터라 MG는 유럽대회를 나갈 일이 딱히 없었습니다. 쾰른 역시 꼬박꼬박 나간 건 아니었지만 어쨌든 오베라트는 국대라도 꾸준히 출장했고, 네처는 국대와 유럽대회 둘 다 소화하지 못했었죠.
주11. 베켄바우어는 1970월드컵까지 대표팀에서 미드필더로 뛰엇습니다.
주12. PSV는 하필 이 시즌에 트레블을 달성합니다.
주13. 문디알리토 이전까지 서독은 의심의 여지 없는 유럽 최강이자 가장 강력한 월드컵 우승 후보였습니다.
주14. 결국 디츠는 대표팀에서 은퇴합니다.
주15. '히혼 평화협정', '히혼의 수치'로 알려진 경기로 2라운드 공동 진출을 위해 서독과 오스트리아가 서로 힘빼고 시간만 끌었다고 엄청나게 욕을 먹었습니다.
ㅊㅊ- raute 글
http://bundesmania.com/xe/fuss/1539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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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베어톨트..ㅎㅎ 당시에는 베르톨트라고 했죠.
지금은 진짜 아는 사람이 거의 없지만, 베르톨트는 독일 황금기의 주전 라이트백으로 월드컵 3회 연속 주전..
그리고 차붐과 동급이라고 말해온 사퓌자 예보아 얘기도 나왔군요.
쿤츠를 한국에서 알려면 유로96을 봤어야 하고...
폴스터는 뭐 90월드컵부터 오스트리아 에이스였으니까 역시 오스트리아 경기를 봤어야 알 수 있는 공격수..
아 그리고 마틴 달린...ㅎㅎ 스웨덴 황금기인 94월드컵 3위를 이끈 양반도 언급되었네요.
이때쯤 선수들은 다 국제대회에서 보이던 양반들.. 추억돋습니다..
뭐 raute님은 이 세대는 아니지만 분데스리가와 올드축구를 워낙 공부하는 분이니 이런 자료들을 가져오면
제가 저때 본 축구와 선수들에 대해서 이런저런 생각들을 하는 계기가 되서 참 좋습니다..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