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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년 전 용인에 '다빈치'가 있었다
이제 '용인르네상스'는 대중적인 도시 브랜드로 익숙해져 있지만 무려 200년 전 용인에 르네상스 시대 다빈치처럼
리얼리즘 화풍을 주도하던 '나비화가'가 있었다는 사실은 그리 주목받지 못했다.
당시 사람들을 놀라게 했던 이 화가는 암계우다.
한국의 미술관이나 박물관에선 이 화가의 작품을 소장하고 있다는 것을 큰 자랑으로 여긴다.
평양 조선미술박물관에도 그의 업나비가 걸려있을 정도다.
남계우는 당시에도 아예 '남나비(남접), 남호접'로 불렸던 스타 화가였다.
이 화가의 5대조 할아버지는 숙종 때의 명신 남구만이다.
남구만은 '동창이 밝았느냐'란 시조로 유명하지만, 실은 울릉도와 독도가 우리 땅이라는 확인을 일본에 가서 받아온 안정복을 지켜준, 뛰어난 정치가다.
이 봄날 용인소식은 '남나비' 이야기로 시작한다.
200젼 용인 남나비 르네상스
조선 실학이 리얼리즘으로 날다
'조선의 다빈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남계우 작품 '군집화훼도(꽃과 나비 긍림'는 두 쪽으로 되어 있다.
양쪽에 나비가 각각 열 마리씩 그려져 있는데, 오른쪽 폭에는 네발나비, 굴뚝나비, 황오색나비, 부전나비가 모여 있고
아래쪽엔 제비나비와 노랑나비, 대만흰나비가 노닌다.
그 곁 백모란이 있는 곳엔 남방공작나비가 떴고, 장미 쪽에는 노랑나비와 함께 호랑나비도 날아들었다.
왼쪽 폭에는 꽁지깃이 제비를 닮은 제비나비부터 시작해 아래로 꼬리명주나비, 배추흰나비, 물결나비, 정체가 밝혀지지 않은 나비, 호랑나비, 갈구리신선나비, 봄처녀 나비가 보인다.
그중 양쪽에 있는 검은색의 큰 나비인 제비나비를 보자.
오른쪽의 암컷은 몸통에 황록색 광택이 있고, 뒷날개 끝에는 주홍색 반달무늬와 날개 뒷면의 황록색 털비늘,
아래쪽의 노란 띠가 보인다.
나비의 날개짓을 포착해 꺾이면서 휘어지는 움직임까지 느껴지도록 그려냈다.
왼쪽의 수컷은 날개 비늘이 푸른색과 청색을 띤다.
2018년 한 언론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나비의 날갯짓 순간을 포착해 꺾이듯 휘어진 움직임까지 그려낸 표현력, 과학자 못지않은 관찰력으로 따지면
남계우는 '조선의 레오나드로 다빈치'라 해도 관언이 아니다'
조선의 다빈치로 불린 남계우(1811~1890)는 누구인가.
용인에서 태어난 그는 의령 남씨 명문가 출신으로, 소론의 영수 남구만의 5대손이다.
당시 권력의 핵심에 들지 못했던 소론 가문인 그는 훈련원 도정(정3품 당상관, 병사의 시험관/교육관)을 지냈다.
55세에 감역(9품)에 제수되고, 71세에 가정대부(종2품)가 내려졌지만 실제로 뱌슬에 나가지 않았고,
평생 초야에 묻혀 그림에만 몰두했다.
생물학자 석주명, '남계우 나비'를 생태 연구에 활용
한국 근대 최고의 생물학자로 꼽히는 석주명(1908~1950)은 남계우의 나비 그림을 근거로 이 땅의 나비 생태연구서인
'조선산접류총목록'(1940년 영국왕립협회는 그의 관련 저술 '조선산접류분초도'를 뉴욕에서 인쇄했다)을 썼다.
그는 남계우의 나비 그림이 마루야마(1733~1795)의 '곤충도보(일본의 국보)'보다 훨씬 윗길이라고 평가했다.
그런가 하면 위당 정인보는 임연 이양연의 시문과 다산 정약용의 총서로 이어진 남인과 소론의 박학(실학)을 잇는 가치 높은 작품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장자 호접지몽을 품은 화가
남계우는 왜 나비를 그토록 열심히 그렸을까.
그의 호는 일호다.
호는 중국 안휘성에 있는 강의 이름이고, 이 강가에는 호상락이라는 말이 생겨난 장자와 혜자의 고사가 전해진다.
장자가 물속의 고기를 보고 즐겁겠다고 하니, 혜자는 '물고기가 아닌데 어찌 그것이 즐거운 것을 아느냐'고 물었다.
장자는 '그대가 내가 아닐진대 내 마음은 어떻게 아는가'라고 되물었다.
일호는 또 하나의 호강을 자처하니, 나비의 마을을 아는 내 마음을 그대들이 또한 알겠느냐고 묻는 셈이다.
그는 장자를 마음에 깊이 품고, 나비를 그리고 있었다.
남계우의 부채 그림 화접도(간송미술관)에 ;홀연히 장자의 꿈에 들어가니;라는 제발 구절이 있는 것도,
그 심중에 들어 있던 호접지몽을 드러낸 것이리라.'
조선의 실학이 나비 그림에서 꽃 피우다
남계우 이전에도 호접도는 많았지만, 남계우 나비와 같은 호접도는 없었다.
그는 리얼리스트였다.
조선 말기 사의(관념적인 뜻을 표현함)와 문기(그림에도 적용되는 문자의 기운)를 중시하는
추사 김정희풍의 문인화 유행 속에서, 극시실적인 화풍을 이끌었다.
실학이 나비 그림 속에서뜻밖의 꽃을 피운 것이다.
그는 나비를 채집하고 분석하고 연구하는 과학자에 가까웠다.
그림은 그 실중적인 연구의 결과물이라고도 할 수 있다.
유럽에서 청나라를 거쳐 유입하기 시작한 과학적 세계관은 18세기 조선에서 실학이라는 새로운 학풍과 관심사를 이끌어냈다.
19세기 화가 남계우는 실중주의에 기반을 둔 실학의 과학적 새계관을 나비라는 생물의 투철한 표현을 통해
대담하고도 완벽하게 화폭에 끌어들인 르네상스적인 지식인이었다.
아직도 추사파 문인화가 주류이던 시대, 그는 돌연변이처럼 나타났다.
실증적인 분석을 토대로 전문적인 식견을 갖추고 나비를 채집하듯 그려 낳었다.
나비를 책갈피에 끼워 놓았다가 그리기도 하고, 창에다 붙이고 그 위에 종이를 얹어 윤곽을 그린 후 채색을 했다.
노랑을 표현하기 위해 금가루를 쓰고, 흰색을 표현하기 위해 긴주가루를 썼다.
나비의 문양과 동작을 하나하나 비디오 판독한 것처럼 정밀하게 그려 나갔다.
당대의 식자들은 피상적인 잔재주라 폄하했지만 그의 아비는 문학의 의미심장안 반란이었다.
조선의 화단에 실감각파가 등장한 것이다.
조선의 실학은, 남나비를 만나면서 예술로 심화하는 지점을 얻었다.
시대를 앞서간 안목이 얻어낸, 당당한 화격이었다.
나비가 꾸는 꿈을 인간이 어찌 알겠는가
'그의 나비는 신묘에 들었다'
'착색이 농염해서 사실(리얼리즘)의 묘를 득했다'
남계우의 나비 그림과 관련해, 옛 서화 관련 책들이 감탄하는 말들이다.
그가 그려 놓은 병풍 속의 꽃을 보고 나비가 날아왔다는 이야기도 있고, 그의 그림들이 생물도감 자료에 참고 자료로 쓰였다는
말도 전한다.
이런 말들은, 남호집의 극사실주의 화법에 대한 당실의 경탄에서 나온 것들일 것이다.
그런데 남계우의 나비들은 실물을 방불케 하는 정밀함을 갖추고 있긴 하지만,
화폭에서 튀어나올 듯 생기를 뿜어내는 '증강현실'을 만들어 내지는 않는다.
즉, 그것은 정교하게 그림 속에 박혀 있는 나비 정물에 가깝다.
이 점을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채집된 리얼리즘.
이것이 남나비를 규명하는 한 열쇠가 될지도 모른다.
직품 속을 자세히 보면 나비들은, 입체적이기보다는 오히려 평면적이다.
실물 크기로 저오학하고 자세하며 아름답지만 박제처럼 고요하다.
단순한 리얼리즘의 추구라면 나비에 생동감을 불어넣으려 했을 것이지만, 오히려 그림의 아느 위치에 정확하게 방금 죽은 나비를 붙여 놓은 것처럼 보인다.
왜 그런 느낌을 만들어 냈을까.
이 화가는 단순히 나비를 복제할여 했던 것이 아니라, 인간이 꾸는 나비꿈을 생생하게 드러내고 싶었던 것 같다.
장자의 호접지몽은 그에게, 저 나비들이 꿈인지 생시인지 분간하기 어려울 만큼 뚜렸하다는 데에 있다.
철저히, 인간 삶 전체에 대한 풍자를 저 리얼리즘 속에 두리워 놓은 것이다.
자가 나비꿈을 꾸고 깨어나 이것이 꿈인가 저것이 꿈인가 중얼거렸지만, 남계우는 꺤 채로 나비꿈 속으로 들어가,
나비가 나를 브루는가 내가 나비를 쫓는가 중얼거리고 있었는지 모른다.
중국에 접지몽이 있다면, 이 땅엔 남접지몽이 있었다.
그가 뭍힌 용인 처인구 남사읍 창리 월곡마을(이곳엔 의령 남씨 후손들이 세거하고 있다)을 취재차 둘러보았다.
묘소를 찾기 어려웠는데, 흰나비 두 마리가 개울을 따라 급히 올라가는 풍경이에 마치 화인의 붓끝을 만난 듯 반가웠다.
'동창이 밝았느냐' 남구만
울릉도.독도 지킨 명신이었다
용인 '의령 남씨'의 큰 조상
남구만(1629~1711)은 나비 화가 남계우의 5대조 할아버지다.
충주 누암에서 태어나 결성(현재의 충남 홍송군)에 살았다.
벼슬길에 오르면서 서울에 머무르다 61세 때안 1690년 용인시 모현면 갈담리 521번지 현재 별묘(사당)가 있는 자리에 집을 사서 겨주했다.
이곳이 남구만의 생가인 셈이다.
그는 이 집에서 별세할 때까지 21년을 살았다.
묘소는 용인시 모현면 초부리에 있다.
의령 남씨들이 용인에 마을을 이루고 서거하게 된 것은, 남구만 이후부터다.
용인에는 굴하지 않는 '남구만 정신'이 배어 있다.
남구만은 조선 개국 공신으로 영의정을 지낸 남재의 10대 손이다.
300년이 지나면서 집안이 한미해졌기에, 남구만은 지위와 명성은 스스로의 힘으로 이뤘다고 할 수 있다.
17세기 뛰어난 성리학자이자 서예가였던 동춘당 송준길에게서 가르침을 받아 22세에 벼슬에 나가 영의정을 두 차례나 역임한
숙종 대의 우뚝한 정치가로 활약했다.
울릉도를 지킨 선구자
지금의 관점에서 가장 눈에 띄는 행보는, 울릉도의 영유권을 일본으로부터 지켜 낸 일이었다.
1694년(숙종20년), 대마도의 사신이 부산에 도착해 조선 백성들이 일본 영토인 죽도(울릉도)를 무단 침범하여
어업 활동을 한다며 금지해달라 요청한다.
당시 주선 정부에서는 엄중히 단속하겠다는 답변을 주었는데 죽도가 울릉도라는 사실조차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때 영중추부사였던 남구만이 나섰다.
'지붕유설(이수광의 저술)에 '일본이 의죽도를 점거했는데, 의죽도는 곧 울릉도이다'라는 대목이 있었습니다.
지금 왜인의 말은, 위험성이 너무나 큰 말인데도 우리 정부의 답변이 모호하였습니다.
마땅히 외교 문서를 회수하고, 저들이 조선을 무시하고 방자하게 구는 것을 책망해야 합니다.
신라 때 울릉도에 나라가 있었는데 토산물을 바쳤고 고려 태조 떄도 섬사람들이 물건을 진상했습니다.
우리 태종 임금 때 왜적이 하도 이 섬을 노략질하는 지라 안무사를 파견해 백성들을 육지로 들이고 그 땅을 텅 비워 뒀습니다.
지금 왜인들이 이 섬에 들도록 좌시할 수 없었습니다.
이 나라의 강토를 어찌 남에게 줄 수 있겠습니까'(숙종실록 20년 2월 23일)
남구만은 이렇게 말한 뒤 '저들이 말하는 죽도는 곧 우리 울릉도이다.
이 나라 사람이 우리나라 땅에 가는 것이 어찌 국경을 범한 것인가'라며, 일본의 주장을 비판하는 답서를 발송토록 했다.
이후 울릉도에서 가장 가까운 곳인 삼척의 수령이 정기적으로 울릉도를 시찰토록 주청했고,
뱃길이 험하다며 사찰을 꺼린 수령을 파직시키는 조치도 건의했다.
이듬해인 1695년에는 안용복 사건이 일어났다.
어부였던 안 씨는 울릉도에 출어했다가 일본 어선을 발견하고는 일본으로 건너가 울릉도와 독도가 우리 영토임을 역설하고 일본 호키주범주의 사과를 받고 돌아왔다.
당시 에도 막부로부터 울릉도가 조선 땅임을 확약 받는다.
일본에 울릉도 점유 사과를 받은 안정복을 변호
이 사건 이후 조선 조정에서는 감히 관직을 사칭한 안정복을 단죄해야 한다는 논의가 일어난다.
이때 영중 주부사였던 남구만은 '안정복 의 일은 쾌사(속 시원한 일)'라고 단언하며 이렇게 변호했다.
안정복을 죽임은 그저 쓰시마도주만 기쁘게 할 뿐입니다.
사람됨이 걸출하고 영리하니 보통사람이 아닌 듯합니다'라고 변호했다.
남구만은 조정의 중론을 모으면서 , 일본에서 제기하는 영유권 주장을 베격히고 울릉도와 독도가 조선 영토임을 뚜렷이 하는 일에 주력했다
그는 또 숙종에게 이 섬을 보다 적극적으로 또 실효성 있게 지배하는 방안을 제사하기도 했다.
최근까지 논란을 빚고 있는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에 대해, 300여 년 전에 일찌감치 쐐기를 박은 '이 땅의 명쾌한 영토 선언', 그 일을 주도한 선구적 정치가가 남구만이라는 점은 강조될 필요가 있다
시조 '동창곡'은 남구만이 '장희빈 사태'를 개탄하며 읊은 유행가
'동창이 밝았느냐'는, 남구만을 오늘까지 유명하게 만든 동창곡이라고 불려온 시조다.
민초의 노래를 한역하여 자신의 문집 '약천집'에 실어 조정의 어지러움을 개탄하는 심경을 드러냈다.
동창이 밝았느냐 노고자라 우지진다
소치는 아이는 상기 아니 일었느냐
재 너머 사래긴 밭을 언제 갈려 하나니
(동방명부 노고이명 반유아호위면재방 산외유전농무활 금유불기하시경)남구만은 이 시를 '변방곡'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변방곡은, '지역 서민들이 부르는 노래(방곡, 시조를 의미한다)'를 번역한 것이란 뜻이다
당시 유행하던 시조를 한역해 수록
시조의 특징은, 시절가조가 의미하는 것처럼 대중이 불러온 유행가에 가깝다.
그 원작자가 누구냐는 것은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았다.
식자들은 소리로만 떠도는 귀한 노래를 채록해 오래 간직하기 위해 한자 언어로 번역해 놓았다.
다만 시조를 호라용해 스스로의 마음과 상황을 기탁하는 일은 흔했다.
남구만의 '동창곡'도 유행가를 한시로 풀어놓은 것이다.
그는 숙종 대에 4번의 유배를 다녀왔다.
남구만의 유배 중 3차례는 장희빈과 관련된 것이었다.
1688년은 장희빈을 비판하다가 내쳐졌고, 1689년은 장희빈이 권력을 차지하면서 쫏겨났다.
또 1702년은 세자의 생모를 죽이는 일이 바람직하지 않다고 말했다가 다시 귀향을 갔다.
이 상호모순이 느껴지는 소신은 어떤 의미일까.
왕의 과격한 조치를 말려, 후환을 줄이고자 한 충정이었다고 볼 수 있다.
겅직하면서도 온건한 남구만의 충고는, 극한 대치의 정치 속에서 어떻게 해결책을 찾아야 하는지를에 대한 소신을 담고 있었다.
숙종실록은 그를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집에 있거나 조정에 나가거나 모두 굳게 절개를 지켜 변하지 않았고, 평생토록 남에게 주는 편지에 일찍이 구걸하는 글자를 쓰지 않았다고 스스로 말하고 있다'
그의 성품을 말하는 대목이다.
그의 약천이란 호는, 강원도 동해시 망상동에 사당의 이름으로 남아 있다.'
약천사는 남구만을 기리는 사당으로, 이곳에는 '동창곡' 시조가 석비로 새겨져 있다.
세 번쨰 유배를 왔을 때 머물렀던 곳이며 이곳에서 이 시조를 읊었다는 얘기가 전해지기도 한다.
약천 남구만은 격동의 장희빈 시대를 꼿꼿하면서도 참된 가치를 향한 중도를 지키며 헤쳐 나간,
용인의 상징같은 '지혜로운 행동가'였다. 용인소식 편집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