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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퇴한 김현수, “아쉬울 때 축구화 벗고 싶었다”① |
[ 2007-10-26 ] |
K리그를 대표했던 명수비수 김현수(34, 대구)가 지난 14일 서울과의 정규리그 마지막 경기를 끝으로 현역에서 은퇴했다. 1995년 입단한 이래 K리그에서 13년을 뛴 김현수는 부산과 성남, 인천, 전남, 대구 등 5개 구단을 거치며 총 383경기에 출장해 24골-5도움을 기록했다. 1997년에는 부산이 시즌 3관왕을 달성하는데 일조했으며, 2000년부터는 성남으로 이적해 2001년부터 2003년까지 리그 3연패를 달성하는데 일등공신 역할을 했다. 2000년부터 2003년까지는 K리그에서 선정한 베스트11 수비 부문에 4년 연속 뽑히는 영광을 누리기도 했다. 187cm-81kg의 듬직한 체구를 바탕으로 한 파워와 대인마크 능력, 그리고 K리그 최강의 4백 수비라인을 구축했던 성남 시절의 수비 리딩과 리더쉽까지, 김현수는 그야말로 1990년대 말과 2000년대 초에 걸쳐 K리그 최고의 수비수 중 하나였다. 다만 김현수는 K리그에서의 명성과는 달리 대표팀에서는 큰 활약을 펼치지 못했다. 96 아틀랜타 올림픽을 앞두고 올림픽대표팀에 합류하기도 했고, 이후 97년에는 프랑스 월드컵을 앞두고 국가대표팀에, 2001년에도 한일 월드컵을 앞두고 대표팀에 각각 승선했으나 번번이 고배를 마시면서 본선 대회에는 참가하지 못하는 불운을 맛봤다. 97년 1월 호주 4개국 대회 뉴질랜드전에서 A매치 데뷔한 이래 총 3경기 출장. 현역에서 은퇴하고 이제는 지도자의 길로 들어서는 김현수를 만나 그의 선수 시절을 되돌아 봤다. 95년 부산에 입단한 이래 지금까지의 행보들, 그리고 소속팀에서와는 달리 대표팀에서 중용받지 못했던 것에 대한 김현수 스스로의 생각 등 다양한 이야기를 담았다. - 공식 은퇴식을 갖고 현역 생활을 마감하게 됐다. 은퇴식을 하면서 여러 생각이 교차했을 것 같은데. ‘이것으로 끝이구나. 선수로서는 마지막이고, 모든 것이 끝이구나’라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 마지막 게임을 뛸 때도 그랬는데, 경기가 끝난 뒤 서포터들에게 가서 인사하고 돌아올 때 그런 생각이 더 많이 들었다. 이제 선수로서는 경기장에 올 일이 없다는 것에 대한, 묘한 감정이 들었다. 남들은 왜 울지 않았냐고 그러기도 했는데, 사실 울컥한 부분도 있었다. 은퇴식이 모두 끝나고 서포터들에게 인사하고 돌아올 때는 나도 모르게 울컥했는데, 그런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선수 생활을 잘 끝낸 것이니까... - 올 시즌에도 건재했고, 아직 현역으로 몇 년 더 활동할 만하다고 생각되는데, 은퇴를 결정한 것이 다소 아쉽기도 하다. 아쉬움이나 미련이 전혀 없었다고는 말하지 않겠다. 그렇지만 조금 아쉬울 때 떠나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야 모두 웃으면서 그만둘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것은 프로 입단할 때부터 갖고 있었던 생각이다. 지금이 그 타이밍이라고 생각했고, 미뤄서는 안 된다고 판단했다. - 은퇴를 최종 결정했을 때, 그리고 대구 월드컵경기장에서의 은퇴식 순간에 각각 어떤 생각이 떠올랐나? 결정에 대한 후회 같은 것도 순간적으로 떠오르기도 했을 것 같다. 며칠 만에 은퇴를 결정한 것이지만, 사실은 은퇴에 대해서는 나이가 있었기 때문에 몇 년 전부터 항상 준비하고 있었다. 내 나름대로 마음의 준비를 했었기 때문에 갑작스럽다는 생각은 없었다. 다만 한 시즌 정도는 충분히 더 뛸 수 있었기 때문에 은퇴 결정을 쉽게 내리지는 못했다. 그러나 결정한 후에 행동으로 들어갈 때는 결정을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고,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더군다나 서울과의 마지막 경기에서 팀이 이겼기 때문에 유종의 미를 거둔 것 같았고, 모두에게 고마운 마음으로 그만둘 수 있었다. - 은퇴 결정을 내렸다고 해도 주위의 만류가 많았을 것 같은데. 만류하는 분들이 많았다. 그런데 가족에게도 그렇고 내가 설득을 했다. 어차피 은퇴가 얼마 남지 않은 상황이고, 선수로서는 충분히 이뤘다는 것을 설명했다. 선수 생활 1년 더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제는 한 해라도 더 빨리 새로운 길을 준비하는 것이 옳은 선택이라고 설득했다. - 향후 계획은 어떻게 되는가? 11월 5일부터 KFA 3급 지도자 코스가 있어서 참가할 예정이다. 그 후에는 11월 말경이나 12월 초쯤에 유럽으로 지도자 연수를 떠날 계획이다. 현재 스케줄을 잡고 있는데, 유럽의 3-4개 나라 정도를 생각하고 있다. 처음에는 한 팀에서 계속 있으려고 했는데, 주위에서 조언하는 것이 여러 팀을 돌면서 다양한 경험을 쌓는 것이 낫다고 해서 변경했다. 일단 스페인과 포르투갈 클럽으로 갈 것 같고, 그 뒤로는 프랑스나 잉글랜드 클럽과도 접촉하고 있다. |
Part 1. 찬란했던 부산대우 시절 "부산대우 로얄즈가 내 동경의 대상이었고, 정말 가고 싶었다. 아주대에 있을 때도 나는 무조건 그 팀으로 갈 것이라는 생각만 갖고 운동했다. 다른 팀으로 간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었다." - 이제 본격적으로 옛날 이야기를 해보자. 1995년에 부산대우에 입단하며 프로 생활을 시작했다. 원래부터 부산대우에서 뛰고 싶었다고 들었다. 당시 드래프트 전체 1순위로 부산대우에 입단했다. 내가 아주대 출신인데, 당시 부산대우와 아주대가 연고를 맺고 있어서 3학년 때 지명됐었다. 4학년 졸업하고 95년에 부산대우 유니폼을 입었다. 그 때는 부산대우 로얄즈가 내 동경의 대상이었고, 정말 가고 싶었다. 아주대에 있을 때도 나는 무조건 그 팀으로 갈 것이라는 생각만 갖고 운동했다. 다른 팀으로 간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었다. - 당시 부산 멤버들은 정말 쟁쟁했다. 김주성-하석주-샤샤-아미르-정재권 등이 주축이었다. 입단했을 때 신인으로서 불안감도 있었을 것이고, 주눅도 들었을 것 같은데. 처음에는 그랬다. 워낙 좋은 선배들이 많았었기 때문에 입단해도 경기에 뛸 수 있을까라는 걱정도 많이 있었고...그런데 팀에서 기회를 많이 주셨고, 어떻게 하면 프로세계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지를 배웠다. 사실 초반에는 상당히 힘들었다. 형들에게 꾸중도 많이 듣고, 슬럼프도 겪으면서 적응하는 단계에서 너무 힘들었다. 그래서 고민도 많이 하고 힘들어하는데, 당시 김희태 감독님(현 포천축구센터장)께서 1:1 면담을 하자고 하시더니 여러 가지를 물으셨다. “요즘 플레이 스타일도 그렇고, 왜 그렇게 주눅이 들어 있느냐”고 물으셔서 내 나름대로의 고민을 말씀드렸었다. 그 때 감독님이 하신 말씀이 큰 자극이 되었고, 지금도 생각난다. 감독님께서는 “네가 프로에서 살아남으려면 이 단계를 넘어야 한다. 여기서 그렇게 주춤하고 넘어가지 못하면 살아남지 못한다. 이건 코칭스태프에서 도와줄 부분도 아니고, 네 스스로 헤쳐 나가야 한다. 이 고비를 넘겨야만 프로가 될 수 있다. 프로는 자신만의 힘을 키워야 하고, 그래야 남에게 지배를 받지 않는다”라고 하셨다. 이 말씀이 내가 프로에서 버틸 수 있었던 힘이었다. 그래서 후배들에게도 항상 이야기를 해준다. 사실 그 말씀을 처음 들었을 때는 그 뜻을 제대로 몰랐다. 어쨌든 감독님 조언대로 참으면서 견디면서 점점 플레이가 좋아졌고, 그러자 형들이 저에게 강하게 질책했던 부분들도 조금씩 줄어들기 시작했다. 형들이 나를 인정하기 시작했다는 증거였다. 나도 프로에서 적응하면서 감독님이 말씀하신 의미를 알 수 있었고, 형들이 초창기에 그렇게 대했던 것이 나를 위해서라는 것도 알 수 있었다. 처음에는 형들이 내가 싫어서 그렇게 대하는 것으로 오해하기도 했지만, 프로의 세계를 겪은 형들이 어떻게 해야 살아남는지 알기 때문에 나에게 그렇게 가르친 것이었다는 것을 알았다. 그 이후로는 경기할 때도 그렇고, 평소에 형들을 대할 때도 편했던 것 같다. - 당시에 조언을 많이 해줬던 선배는 누구인가? 많은 선배들이 있는데, 그 중에서도 (김)주성이 형을 꼽고 싶다. 내가 지금까지 꾸준하게 프로 선수 생활을 걸어올 수 있었던 것은 주성이 형의 영향이 컸다. 주성이 형은 상당히 엄한 편이었지만, 프로 선수로서의 마음가짐과 행동 자세 등을 모두 가르쳐주셨다. 후배들에게 흐트러진 모습은 절대 보이지 않는 선배였다. 아마 본인도 그것을 유지하기 위해 상당히 힘들었을 것이다. 나 역시 선배로서의 길을 걸어오다 보니까 주성이 형이 그 당시에 얼마나 힘들었을지 공감할 수 있었다. 또한 주성이 형은 숙소에서는 상당히 엄했지만, 밖에서는 여러 조언을 편하게 해주는 스타일이었다. 축구 외적으로도 많이 배웠다. 축구 뿐 아니라 모든 부분에서 노력을 하는 주성이 형의 모습이 인상적이었고, 나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 95년에 처음 입단한 뒤, 신인임에도 많은 경기에 출장했다. 당시 하석주(34회)에 이어 32회 출장으로 2번째로 많은 경기를 뛰었다. 어떤 부분이 코칭스태프에 어필했다고 생각하나? 부산대우에 입단했을 때 팀에서 상당히 많은 기대를 갖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3학년 때부터 드래프트로 지명을 했던 것이고...아마 그 영향이 있었을 것 같다. 1순위로 지명한 선수인 만큼 팀에서 어떻게든 키우려고 하는 그런 것 말이다. 또 지금 생각하면 당시에는 젊었고 패기도 있었다. 팀에서는 앞으로의 발전성, 가능성을 봤던 것 같다. - 갑자기 생뚱맞은 질문이지만, 동명이인인 전북의 김현수 역시 95년에 함께 입단했고, 여전히 선수 생활을 하고 있다. 전북 김현수와 얽힌 에피소드 같은 것은 없나?(웃음) 이번에 은퇴 기사가 나갈 때도 내가 아니라 전북의 현수가 은퇴하는 것으로 아는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웃음) 현수와는 아틀랜타 올림픽대표팀에서도 잠깐 같이 있었는데, 내가 키가 크니까 ‘큰 현수’, ‘작은 현수’로 나눠 불렀던 기억이 난다. 또 아틀랜타 올림픽 본선에는 내가 나가지 못하고 전북의 현수만 나갔는데, 착각해서 내가 나간 것으로 알고 있는 사람도 있다.(웃음) |
"부산대우에서 97년 3관왕할 때가 가장 행복했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팀에서, 그것도 한 해에 3개 대회를 모두 우승한 것이었으니까..내가 좋아하는 형들, 후배들, 동료들과 함께 뛰면서 우승한 것이라 너무 행복했다. 그 때는 우승할 수밖에 없는 분위기였다. 모두들 경기 나가기 전부터 당연히 이긴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고, 후배들은 선배를 따르고, 선배도 후배를 잘 챙겨주는 그런 끈끈함이 있었다." - 1997년에 3관왕을 차지한 것이 프로 초창기 부산 시절에서 가장 하이라이트라 할 수 있다. 당시 이야기를 해본다면. 나중에 성남에서 3연패를 했던 순간도 있지만, 부산대우에서 97년 3관왕할 때가 가장 행복했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팀에서, 그것도 한 해에 3개 대회를 모두 우승한 것이었으니까.. 프로에 들어와서 처음 우승해본 것이고, 그 해에 수비상도 여러 개 받았다. 내가 좋아하는 형들, 후배들, 동료들과 함께 뛰면서 우승한 것이라 너무 행복했다. 그 때는 우승할 수밖에 없는 분위기였다. 모두들 경기 나가기 전부터 당연히 이긴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고, 몸이 아프더라도 어떻게든 경기에 뛰고 싶어 아프다는 이야기를 하지 않았었다. 경기가 끝나면 형들과 맥주 한 잔하면서 이런 저런 이야기도 나누는 등 정말 분위기가 좋았다. 후배들은 선배를 따르고, 선배도 후배를 잘 챙겨주는 그런 끈끈함이 있었다. 지금 대우는 없어졌지만 그 인연은 아직도 이어지고 있고, 가끔 만나서 그 시절을 이야기하면서 서로 너무 아쉬워하곤 한다. 이제는 ‘부산대우’의 타이틀을 달고 뛸 수 없다는 것이 가슴 아프다. 지금은 없어진 팀이지만, 그 때 그런 좋은 팀에서 좋은 선수들과 함께 뛰면서 그런 성적을 낼 수 있었다는 것이 너무 행복하고 좋았다. - 그 해는 베테랑 김주성이 수비수로서 최고의 활약을 보여준 해이기도 하다. 수비라인에서 같이 호흡을 맞췄는데. 처음에는 수비하는 것이 무서웠다. 공이 오는 것도 두려워 도망 다닐 정도였다. 그런데 옆에서 주성이 형이 많이 도와주셨고, 나중에 프로에 적응하고 나서는 정말 호흡이 잘 맞았다. 당시에는 맨투맨 형식으로 수비를 했는데, 주성이 형이 뒤에서 전체적인 것을 다 컨트롤해주셨기 때문에 너무 편했다. 나는 내 위치에서 내 역할만 신경 쓰면 됐으니까... 서로에 대한 위치 및 역할 분배가 확실했고, 주성이 형 뿐 아니라 모든 선수들이 호흡이 너무 잘 맞았기 때문에 우승까지 할 수 있었다. - 그 무렵부터 안정환이 입단한 98년 이후로 넘어갈 무렵, 부산의 축구 열기는 엄청났다. 직접 겪은 입장에서 어떤가? 그 때는 정말 운동할 맛이 났다. 숙소 앞에도 학생들이 학교도 안가고 기다리고 그랬다. 물론 정환이 영향이 컸을 테지만..(웃음) 숙소 앞에서 어제 본 학생이 오늘도 보이고, 그 다음 날도 보이고 그랬다. “학교는 왜 안가냐?”라고 물어보면 개교기념일이라고 했다가 다음 날에는 소풍가는 날이라고 그러면서 숙소 앞을 떠나지 않았다.(웃음) 숙소 앞에는 거의 300~400명의 팬들이 몰리고 그랬던 기억이 난다. 정환이의 경우에는 숙소 밖으로 나가지도 못할 정도였다. 저녁 먹고 산책하러 나가면 항상 있으니까 가끔 떡볶이나 자장면 등을 사줬던 기억도 난다.(웃음) 경기할 때도 구덕운동장이 매진되고, 팀 버스가 들어가지 못할 정도였다. 나중에는 계속된 매진으로 관중수익이 많아지니까 ‘관중 보너스’라는 것도 받았다. 아마 이런 것은 그 때가 처음이었고, 아마 지금도 그런 보너스는 없을 것 같다. 어쨌든 TV나 이야기로 듣던 유럽이나 남미가 부럽지 않을 정도의 열기였다. 그런데 개인적으로 부산 팬들에게 정말 고마운 것은 지금도 나를 잊지 않고 반가워해준다는 점이다. 그 당시 고교생이었던 팬들에게서 아직도 연락이 오기도 한다. 또 경기 때문에, 다른 일로 부산에 가게 되면 나를 알아봐주고, 그 시절의 부산대우에 대해 이야기해주고 그런다. 아마 그 시절은 나에게 절대 잊을 수 없는 시절일 것이다. - 성남으로 이적하기 전, 그러니까 95년부터 99년까지 부산에 있으면서 가장 상대하기 까다로운 선수는 누구였나? 국내외 선수 모두 따져 봐도 라데가 제일 잘했던 것 같다. 라데는 모든 것을 갖춘 공격수였다. 파워도 있었고, 스피드도 있었고, 게임에 대한 강한 열정도 있었다. 라데를 수비하면서 ‘아, 저 선수는 정말 좋은 공격수구나’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라데 외에 샤샤도 좋은 공격수였는데, 기복이 조금 심했다. 샤샤가 수원으로 이적한 후에 마킹하기도 했는데, 잘 알고 있어서 그런지 막아낼 수 있었다. 그리고 라데와 샤샤의 가장 큰 차이점은 스스로 골을 만들어낼 수 있느냐였다. 라데는 동료의 도움이 여의치 않을 경우에는 자기 혼자서도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반면 샤샤는 개인의 힘으로 돌파해 골을 넣는 타입은 아니었다. 아무튼 라데는 당시 다른 선수들과는 개인능력 면에서 한 수 위였던 선수이다. - 나중에 질문하려 했지만, 흐름상 지금 하겠다. 그렇다면 2000년 이후에 상대했던 선수들 중에는 누가 가장 까다로웠나? 음..각 팀의 주전 공격수들이라면 다들 비슷한 수준이 아니었나 싶다. 기본실력들은 다 갖추고 있지 않나. 그런데 그 중에서도 전북의 마그노는 특별했다. 그 선수는 다른 건 모르겠지만, 골 넣는 것 하나는 정말 천부적인 선수였다. 움직임이 별로 크지 않고, 설렁설렁 뛰어다니다가도 기가 막히게 골을 넣는다. 골 넣는 타이밍이나 문전 앞에서의 집중력은 정말 대단하다. 왜 저 선수가 엄청난 연봉을 받고, 대접을 받는지 납득할 수 있었다. -> 2편에서 계속... 인터뷰=이상헌 |
첫댓글 아 ~~~ 형님.. 정녕 가시나이까 ? !!
멋있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