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공정·상식이 무너지면, 그 사회는 행위양식이 좌충우돌한다. 도덕율은 자유를 가능케하는 잣대가 된다. 도덕율이 강할수록 공동체는 쉽게 형성이 된다. 표준이 확실하게 서는 것이다. 공급망 생태계에서는 제품에서의 질적 통제가 가능하게 된다. 산업과 사상을 함께 잡는 일이다. 사상적으로 자율은 자유를 낳고, 자율은 상식을 잉태한다. 그 만큼 상식을 잣대로 행동하는 절제가 필요한 시점이다.
올여름 더운 날씨와 더불어 8·15를 뜨겁게 달구었던 것 중 하나가 건국절 논쟁이었다. 그 역사적 궤적을 논의하면, 3·1절 이후 생긴 상해임시정부를 대한민국의 법통으로 간주하는 것이다. 1948년 8·15일 이후를 논하면,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충실하고, 임시정부를 논하면 민중민주주의, 국가사회주의, 공산주의 등으로 정통성을 부여한다. 이승만 대통령이 이야기하는 ‘자유의 공기’는 전자에 속한다. 그러나 백범 김구 상해임시정부 주석은 후자에 속한다.
백범 김구는 상해임시정부를 건국절로 잡았다. 3·1절을 건국운동으로 간주한 것이다. ‘86 운동권 세력’과 같은 차원이다. 백범은 그 정통성을 바랐다. 그는 3·1절 이후 국민저항운동을 펼치도록 바랐다. 물론 이는 자유민주적 기본질서가 아니라, 폭력혁명으로 이뤄질 수 있다고 봤다. 그 민주주의는 민중민주주의임에 틀림이 없다.
“3·1 운동도 비록 혁명수단을 화평수단을 계명과 같이하여 일어났지만, 그것이 민중 속에서 전개될 때는 필경 피를 보게 되었고, 피를 흘린 까닭에 왜적도 두려워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광복운동은 오직 힘에서 해결될 것뿐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큰 힘을 어디서 구할까. 오직 합하는 데서만 구할 수 있습니다. 전 민족적 혁명역량을 총집중하는 진정한 통일운동에서만 구할 수 있습니다.”(김구, 1937, 03.07; 김구, 2004: 48)
자유민주의와 민중민주주의는 상식 잣대가 다르다. 지금 좌익, 즉 민중민주주의자들은 그들의 불리한 정보를 네이버, 다음에서 많은 부분 삭제하기 시작했다. 그들의 세계를 완벽하게 만들고자 한다. 그 세계는 사실을 사실대로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불리한 사실을 숨기고, 그들의 원하는 것도 취한다. 선전, 선동, 진지전 구축의 그들이 목표이다. 이재명 문제는 덥고, 부정선거는 모로쇄로 하고, 윤석열 대통령의 공천 개입·특별감찰관 임명 등에만 몰두한다. 자신들은 철저히 무오류이다. 북한 김정은 꼭 빼닮았다.
이념과 체제 문제가 걸리면 상실과 자율이란 잣대는 팽개친다. 그 뒤부터는 대화가 껄끄러워진다. 관훈통신 10월 제216호(13면) 전진석 한국외국어대명예교수·관훈클럽 초대 사무국장은 「고 남재희 전 관훈클럽 총무화의 추억담-언론인, 정치인, 논객 남재희 장관과의 인연」에서 “55년 전 인연 「빈야드 가제트 방문기」-남재희 선생은 관훈클럽 제21대(1974.7.29.~1975.10.29.) 총무였다. 나는 1978년 1월부터 관훈클럽 초대 사무 국장을 맡았으므로 총무 남재희 선생을 직접 모시고 일할 기회는 없었다. 하지만 그 전부터 개인적으로 알고 지내는 분이었다. 기자협회 편집실장 시절에 <기자협회보>와 함께 편집하던 계간 <저널리즘>(1969년 가을호)에 ‘빈야드 가제트 방문기’라는 글을 실었을 때에 처음 뵈었던 것으로 기억이 남아 있다. 그보다 먼저 <기자협회보>(1966년 12월)가 ̒ 기자들의 公傷(공상) 보상문제̓ 좌담회를 마련했을 때 남재희 조선일보 정치부장이 참석했고, 편집자였던 나는 좌담회를 기록했기 때문에 거슬러 올라가면 그때가 첫인연이였던 것이 확실하다. 그 무렵에는 필자가 직접 원고를 들고 와서 편집자에게 전달하거나 원고료를 받아가는 경우가 더러 있었다...그런 때였으니 편집실에 직접 찾아왔던 남 선생을 뵈었다. 선생이 1967년 하버드대학 니만펠로 연수 프로그램을 수료하고 온 직후였다. ‘빈야드 가제트 방문기’는 10년 후에 출간한 <모래 위에 쓰는 글/ 한 낙관적 정치평론가의 기록>(1978)에도 수록되어 있다. 니만펠로 연수 중에 방문했던 소규모 주간신문 <빈야드 가제트>는 123년(1846.5.14. 창간)의 역사를 지니고 있었지만 종업원은 통틀어 13명. 이 인원으로 취재 편집과 보급 업무까지를 전담하는 작은 규모였다. 하지만 그해 4월 <뉴욕 타임스> 부사장이자 유명한 칼럼니스트 제임스 레스턴 부부가 소유주가 되었으니 외형만으로 작은 시골 신문이라 하기는 버거운 매체였다. 역사로 따지면 1920년에 창간된 조선일보, 동아일보는 그해 겨우 49주년, 빈야드 가제트에는 절반도 못 따라가는 상황이었다. 선생은 이 작지만 큰 신문의 내력과 현황, 거기 실린 기사와 기고문 등을 입체적으로 소개했다. 부드럽고 섬세한 필치의 맛깔스러운 글을 기고했다고 생각했던 기억이 난다...남 선생이 진보(또는 혁신계) 인사들에 관해서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글을 썼던 것은 언론인이자 논객의 자세였다고 볼 수도 있겠다.관훈클럽 이르쿠츠크 여행에서 남재희 선생과 긴 이야기를 나눌 기회를 가진 때는 2002년 8월 15일부터 20일까지 관훈클럽 여행이었다.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이르쿠츠크-바이칼호를 순례하는 5박 6일 일정의 여행 기간이었다. 특히 1920년 1월 22일 이르쿠츠크에서 러시아 볼셰비키당의 한인 지부였던 ‘이르쿠츠크 공산당고려부’가 조직되었던 것으로 알려진 극장 앞의 기념촬영사진이 있다. “학자인 정 교수와는 여기서 사진을 찍어야지”라고 말했고, 바이칼호수 찬물에 함께 발을 담그면서도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광수의 <유정>을 화두로 삼지 않았을까. 그 몇 년 후 중국 여행 중 어느 날이다. 남 선생이 내게 불쑥 “장지연의 친일을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묻기에 나는 “장지연의 친일보다는 여운형의 친일이 더 큰 문제”라고 대답했더니 남 선생은 “그건 다른 문제”라면서 약간 언짢은 표정으로 말을 끊었다. 장지연의 친일 논쟁이 뜨거운 이슈였던 무렵이었다. 나는 일제 말기에 친일적인 글을 남긴 여운형에게는 좌파 정권이 친일 여부를 따지지 않고 오히려 훈장의 격을 높여주면서도 장지연의 훈장은 박탈하는 불공정을 비판하는 글을 쓴 적도 있던 터였다. 장지연과 여운형의 친일문제로 남 선생과 논전까지 벌이지는 않았지만 좀 어색한 분위기가 감돌았던 기억이 난다.””
MBC노동조합 (제3노조)[MBC노조 공감터]2024.10.31.), 「나무위키의 진실은 무엇입니까?」, 국내 역사 데이트를 거의 독점하는 곳이다. “이번 국정감사에서 드러난 나무위키 소유법인 우만레에스알엘의 실체에 대해 경악하지 않을 수 없다. 나무위키는 본사 주소지가 파라과이이고 실소유주와 운영진을 확인할 수 없고, 국내법 적용도 받지 않는다고 한다. 법적인 문제가 있으면 파라과이 법원에 제소하여야 하는데 이도 불가능한 것이 사실상 유령 법인이라는 정황들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일례로 나무위키는 파라과이 법인이지만 한국어로 한국인에 대해서만 서비스 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루 페이지뷰가 최대 4500만명이고, 딥페이크 성착취물 유포 논란을 빚은 아카라이브를 보유하고 있다. 수익성은 높아 광고 배너 수익이 1개에 2억원 연간 순이익만 100억원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좌편향매체들은 나무위키에 매우 친화적이다. ‘이용자들이 공동집필하는 온라인 백과사전’이라면서 표현의 자유 차원에서 옹호하고 있다. 그러나 가짜뉴스는 물론이고 타인의 개인정보를 무분별하게 게재하는 행위들이 빈발하고 있는데 이에 대해 제소는 물론 항변도 못하는 구조라 문제가 심각하다. 해외 유령법인이 소유하는 지배구조와 책임소재 부분이 투명해지지 않는 이상 나무위키의 무분별한 정보 유통은 규제를 받아야 마땅하다.”
AI 시대 검색으로 가면 난감해진다. 신경망처리장치(NPU)로 가면 통제에 문제가 생긴다. 업계에서는 리벨리온·사피온 파운드리 AI 반도체 설계를 위해 두 회사가 합병한다고 한다. 파운드리 반도체 유니콘이 탄생하는 것이다. 그 안을 들여다 보먼 삼성전자, SK하이닉스, KT 텔리콤 등이 엮여있다. 합병에서 진통이 예상된다. 전자 둘은 메모리 제조업이고, KT 텔리콤은 소프트 산업쪽이다.
또한 시장도 혼란스럽다. 한국경제신문 이상은 기자(10. 30), 〈"美·中 하나만 택하라"…무역분열땐 세계 GDP 7% 증발〉, “미국 대선이 5일 앞으로 다가온 가운데 차기 미국 정부에서 세계 경제가 한층 분열된 양상을 띨 것이라는 분석이 쏟아지고 있다. 미·중 갈등이 격화하고 ‘경제가 곧 안보’라는 인식이 확산하면서 기업들은 둘 중 한 시장만 고르라는 압박에 시달린다. 수출을 중심으로 성장해 온 한국 경제는 중간에서 어려운 선택을 요구받는 샌드위치 신세를 면치 못할 가능성이 크다...29일(현지시간) 워싱턴 정가에 따르면 민주당과 공화당은 대중국 노선으로 각각 ‘디리스킹(de-risking·중국의 위협 제거)’과 ‘디커플링(de-coupling·중국과의 결별)’을 제시했다. 양당이 중국과의 거리두기를 강조하면서 한국 기업에는 곤혹스러운 상황이 적잖이 벌어질 것으로 전망된다. 지난달 워싱턴DC에서 열린 경제안보 콘퍼런스에서 앨런 에스테베스 상무부 산업안보 차관이 “고대역폭메모리(HBM)를 제조하는 기업 세 곳 중 두 곳이 한국 기업”이라며 “이런 역량을 동맹을 위해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한 것이 대표적이다. 중국에 팔든지 미국에 팔든지 둘 중 하나만 하라고 압박한 것이다. 반도체, 양자컴퓨터, 인공지능(AI) 등 첨단기술의 대중 수출을 통제하고 투자까지 금지하겠다고 발표한 미국은 이런 조치에 동맹국도 참여하라고 요구할 계획이다.
그러나 시장의 반쪽을 잃어버리는 것은 한국에 적지 않은 부담이다. 미국은 작년 말부터 한국의 최대 수출국(상반기 수출 비중 19.2%) 자리를 차지하고 있지만, 2위 수출국인 중국의 비중(18.9%)도 여전히 높다. 반도체 제조 장비는 전체 수출 물량의 44%가 중국에 팔리고 있다.”
박정희 대통령은 좌우가 대립할 때, 퍽 논리적으로 접근했다. 컴퓨터 연산작용도 퍽 논리적이다. 컴퓨터가 량적인 연산작용이라면, 박 대통령은 질적으로 풀어갔다. 그 만큼 절제를 잘 할 줄 알았다. ‘우리의 鐵 로 우리 무기’라고 하는데 ‘우리’가 좌·우 그리고 국제적 표준이 될 수 있을 뿐아니라, 포철, 자동차, 석유화학뿐만 아니라, 정신문화까지 그걸 확산시켰다. 상식까지 포괄할 수 있었다. 그게 공급망 생태계를 성공시킨 그의 과업이었다.
자유민주당 고영주 대표는 광주, 전주 40곳 박정희 대통령 현수막을 내 걸었다. ‘박정희 대통령 ㅇ 서거 45주기를 추모합니다.- 내 일생 조국과 민족을 위하여’로 그는 좌우를 아우러는 일을 했다.
조선일보 박지민 기자(11.01), 〈국립묘지에 묻힌 ‘K방산의 아버지’〉, 〈‘우리 鐵로 우리 무기’..제철부터 조선가지 밑그림도 그려〉, 표준이라는 공정·상식, 보편성을 만들어 낸 것이다. 이는 산업생태계뿐만 아니라, 좌우를 떠나서 AI 시대를 살아는 현대인의 징표가 될 수 있다. “31일 오후 대전 유성구 국립대전현충원. 비어 있던 자리에 ‘과학기술유공자 김재관의 묘’라고 적힌 묘비가 세워졌다. 1960~1970년대 포항제철소 설립의 산파 역할을 한 고(故) 김재관(1933~2017년) 박사의 유해가 경기 화성에서 이날 이장됐다. 현충원은 국가를 위해 헌신한 공무원이나 경찰관, 소방관, 군인 등이 봉안되는 경우가 많다. 김 박사는 과학기술과 한국 산업의 발전을 이끈 공로를 인정받아 지난해 과학기술유공자로 선정된 후, 과학자로서 이날 현충원에 봉안된 것이다...그와 함께 연구를 했던 정낙삼 한국표준과학연구원 명예연구원은 “고인은 앞서 내다보는 혜안으로 국가와 사회 발전을 이끌었다”고 했다. 국가 수호에 대한 김 박사의 공헌은 전쟁터의 군인 못지않다. 그가 공장 자재 하나까지 챙기며 세운 포항제철소의 쇳물은 방산 국산화의 마중물이 됐다. 국방과학연구소(ADD) 초대 총괄부소장으로 재직하던 1972년엔 박격포, 로켓포, 대전차 지뢰 등 시제품을 제작했다. 상공부 중공업차관보, 표준연구원 초대 원장 등을 지내며 그가 기틀을 닦은 특수강, 중기계 공장, 대형 조선소는 대포·탱크·군함을 제작하는 방위산업의 전초 기지가 됐다...1972년 박정희 당시 대통령은 국방과학연구소(ADD)에 긴급 명령을 내렸다. 소총과 박격포, 로켓포, 수류탄, 지뢰 등을 개발하는 것이었다. 무기 국산화 프로젝트, 이른바 ‘번개 사업’이었다. 당시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에서 미군 철수를 추진한 ‘닉슨 독트린’으로 자주 국방에 대한 필요성이 절실할 때였다. 1차에 이어 본격적인 개발에 들어간 ‘2차 번개 사업’의 실무 총괄을 당시 ADD 부소장으로 재직하던 김재관 박사가 맡았다. 미사일 개발에 필요한 철강과 기계 분야에서 김 박사는 당시 국내에서 최고 전문가였다. 주어진 시간은 단 3개월이었다. 그해 4월 시험 발사에서 박격포와 로켓포는 모두 목표물을 명중했다. ‘K방산’의 효시로 꼽히는 ‘번개 사업’이 성공적으로 마무리된 것이다. 김 박사의 아내인 양혜숙 한국공연예술원 이사장은 “남편은 매일 밤을 새우다시피 연구에 매달렸다”며 “그때 ‘국가 발전을 위해서는 이 방향으로 가야 한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고 회고했다. 방산 분야에서 김재관 박사의 기여는 단순히 미사일·전차 개발에 그치지 않는다. 1964년 12월 박정희 대통령은 서독을 방문했다. 현지 유학생들을 초청한 조찬 모임에서 박 대통령은 “하고 싶은 얘기를 해달라”고 했다. 김 박사가 두툼한 보고서를 들고 나와 이렇게 말했다. “철강은 산업을 일으키기 위한 필수이고 기반입니다. 자금이 많이 들어 지금 당장은 할 수 없지만 언젠가는 반드시 해야 할 사업입니다.” 보고서 표지에는 영어로 ‘한국에서 철강 공업 육성을 위한 제안’이라고 적혀 있었다. 3년 후 박 대통령은 대한민국 제1호 해외 유치 과학자로 김 박사를 불러들였다. 김 박사는 국가 숙원 사업인 종합제철소 건설 계획 설계를 맡았고, 결국 연생산 103만t의 포항종합제철소를 세웠다. 포항제철소는 중공업뿐 아니라 국내 방산의 마중물이 됐다. 1978년 개발된 미사일 ‘백곰’, 1984년 개발 완료된 국산 전차 ‘K1′ 등이 모두 포항제철소의 쇳물로 만든 특수강으로 제작됐다. ‘K1′ 전차의 기술은 이후 ‘K2′와 K9 자주포 등을 발전했고, 백곰은 현무4 등 미사일 기술 발전의 토대가 됐다. 이날 김 박사 봉안식에 참석한 한 제자는 “1970~1980년대 무기 개발은 미국 등 외국의 엄격한 감시를 받아야 했다”며 “김 박사가 개발한 무기의 기초 기술과 포철의 특수강이 없었으면 무기 국산화는 엄두도 내기 힘들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김 박사는 KIST에서 초대 연구부장을 맡아 중공업 기반 산업화의 밑그림도 그렸다. 주물선(철 덩어리), 특수강, 중기계 공장, 대형 조선소 건설을 4대 핵심 분야로 키워야 한다고 했다. 모두 대포와 장갑차 등 군수 물자 제작에 필요한 군수 산업과 연결되는 분야로, 역시 오늘날 K방산의 토대를 만든 것이다. ◇기술의 표준을 정립하다...과학기술의 기반이 되는 ‘표준’ 역시 김 박사의 관심사였다. 1975년 한국표준연구소(현 한국표준과학연구원) 설립을 지휘하고 초대 및 2대 소장을 맡았다. 당시 한국에는 ‘한국 시간’이라는 개념이 없었다. 시간 표준을 확립하지 못해 일본 방송국의 시보를 받아 사용했다. 그는 국제원자시와 협정세계시를 나타내는 시계를 확보해 대한민국의 독자적인 시간 표준을 구현했다. 이호성 표준연구원 원장은 “방산을 비롯해 모든 첨단 산업의 근간이 되는 ‘표준’이라는 토대를 마련한 것”이라고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