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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3년은 연합국들이 전쟁을 종결하고 전후(戰後) 구상을 위하여 강대국간의 협조를 진행하던 시기였다. 이 무렵 미국, 영국, 소련은 국제적인 평화와 안전보장을 유지하기 위하여 국제조직이 필요하다고 인식하고, 모스크바에서 미·영·소 외상회의를 개최하고 공동선언을 채택하였다. 또한 당시는 국제연맹 대신 새로운 세계적인 국제조직 설립의 필요성이 제기되던 시기였다. 특히 미국의 루즈벨트(Franklin Roosevelt) 대통령은 국제조직 설립에 찬성하면서, 평화와 질서 유지를 위하여 강대국 간의 협조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였다.
이러한 가운데 1943년 11월부터 루즈벨트, 처칠(Winston Churchill), 스탈린(Joseph Stalin) 세 지도자는 이란의 테헤란에서 처음으로 연합국 정상회담을 개최하였다. 이 과정에서 루즈벨트와 처칠은 테헤란에 가기 전, 카이로에 들러 중화민국의 장제스(蔣介石) 총통과 회담하고, 대일전쟁에 대한 협력을 협의하고 우리의 자유와 독립 결정에 대한 ‘카이로 선언(Cairo Declaration)’을 11월 27일 발표하였다.
카이로 선언은 역사적인 선언으로 한반도의 미래와 깊은 관련성을 가졌다. 먼저, 일본은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일본이 탈취하였거나 점령한 태평양의 모든 섬들을 반환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즉, 중국으로부터 빼앗은 영토를 모두 반환할 것, 그리고 조선에 대해서는 일본의 지배로부터 해방되고, 적당한 시기와 절차를 거쳐 자유로운 독립국이 되어야한다는 것이 선언되었다. 당시 루즈벨트는 장제스와 중국 국민의 사기를 높여, 대일 전쟁을 보다 적극적으로 전개할 필요성을 느꼈다. 특히 그는 전후 아시아에서 중국이 안정 세력의 역할을 해주기를 기대하고, 중국과 미국이 우호관계를 구축하여 아시아에서 미국의 이익을 지키려고 노력하였다.
그리고 카이로 선언은 1895년 청일전쟁 이후 일본이 강제로 폭력과 탐욕에 의해 탈취한 지역에서 구축되어야 함을 명시하였다. 이에 따르면 일본이 대한제국으로부터 강제 편입한 독도는 반환의 대상이 되었다. 이러한 내용은 그 이후 포츠담 선언(Potsdam Declaration)의 제8조에 계승되었으며, 일본은 연합군의 원폭투하로 포츠담 선언을 무조건 수락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일본은 카이로 선언과 포츠담 선언을 법적으로 수용하게 되었다. 이러한 국제적인 선언에 따라 일본의 미래가 결정될 것으로 예상되었다. 마지막으로, 포츠담 선언 8조에서, 카이로 선언의 각항은 실행되어야 한다고 되어있다. 그리고 일본의 주권은 혼슈, 홋카이도, 규슈 및 시코쿠 그리고 연합국이 결정할 작은 섬 등에 국한될 것이라고 규정하였다. 그러면 독도는 포츠담선언이 규정한 연합국이 결정할 작은 섬들에 포함되는가?
포츠담 선언은 4개 연합국의 공동선언에 불과하며 법적구속력을 갖지는 못하는 선언이라는 주장도 있다. 일본은 카이로 선언을 통해 일본의 무조건 항복과 전쟁 뒤 일본점령지의 반환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으므로, 이러한 의미는 한국의 독립과 만주, 대만의 중국 귀속을 약속하는 것이었다. 즉 폭력과 강요에 의해 취득한 모든 영토를 돌려주어야 한다는 의미처럼, 일본은 포츠담 선언을 통해 카이로 선언을 전적으로 수용한다고 선언하였으므로 폭력과 강요에 의해 빼앗았던 독도를 일본은 당연히 포기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결국 독도는 1905년 2월 일본이 폭력과 탐욕에 의해 약탈한 섬이기 때문에 일본영토에서 제외되어야 하였으며, 한국의 영토로 반환되어야 할 대상이었다.
카이로⋅테헤란 회담과 신탁 통치안 원칙의 선언
카이로 선언 이전부터 미국의 정가와 언론에서는 심심찮게 한반도 국제 신탁 통치안이 흘러나왔다. 루즈벨트 대통령은 대서양 헌장 1)발표 이후 간헐적으로 전후 식민 지역에 대한 신탁 통치안을 내비쳤다. 루즈벨트는 1943년 3월 영국 외상 이든을 만난 자리에서 한국에 국제 신탁 통치를 실시할 것을 제기함으로써 이 문제를 최초로 공식적으로 거론하였다.
1942년에서 1943년 중반에 이르기까지 미국의 전후 기획 집단은 한국의 전후 처리에 관한 일반적 원칙과 세부적 문제점들에 관한 검토를 일단락 지었다. 미국 측은 상당 기간 지상 작업(紙上作業)과 정책 결정 집단의 토론을 통하여 다듬어진 한국의 전후 처리안을, 카이로 회담과 테헤란 회담에서 전후 해결의 일반적 원칙으로 제기하여 다른 참여국들의 동의를 얻어 내려고 하였다.
루즈벨트는 카이로 회담을 위한 준비 모임에서 ’신탁 통치안의 가능성을 크게 강조하고 이를 모든 종류의 상황에 폭 넓게 적용해야 한다. 안보 관점에서 세계의 많은 부분을 국제 신탁하에 두어야 한다.’라는 점과 ’여러 가지 상이한 신탁 통치안을 식민지역에 적용할 수 있을 것’이라는 점을 그의 참모들 앞에서 강조하였다. 미국은 적어도 초기 구상 단계에서는 신탁 통치안을 식민 종속 지역에 무차별적으로 적용시킬 것을 원칙으로 삼았음을 알 수 있다.
카이로 회담 이전에 루즈벨트는 관리들에게 중국은 현재나 미래에 미국의 아시아 정책에서 소외시킬 수 없는 너무나 소중한 요소이므로 어떻게 하든지 영국과 소련을 설복시켜 중국의 참여를 보장받으라고 지시하였다. 루즈벨트는 당시만 해도 2등 국가였던 중국을 강대국 회의에 참여시킴으로써 그의 중국 중시 정책을 내비쳤다. 그러나 4대국을 한자리에 모으려는 루즈벨트의 기도는 실패하였고, 결국 카이로 회담과 테헤란 회담이라는 2개의 3개국 회담으로 성사되었다.
1943년 11월 23일 카이로 회담에서 결정된 한국의 장래에 관한 결의, “한국 인민의 노예 상태에 유의하여 적당한 절차를 거쳐(in due course) 한국을 자주 독립시킬 것을 결의한다.”는 문안은 앞의 ’T318’의 결론에 나타난 취지를 사실상 그대로 관철시킨 것이다. 루즈벨트는 뒤이어 테헤란에서 스탈린과 회담할 때 카이로 회담의 한국에 관한 결정 사항에 대하여 물었고, 스탈린은 “한국은 마땅히 독립해야 한다.”는 소감을 피력하였다. 루즈벨트는 이후 태평양 전쟁 위원회(Pacific War Council)의 1944년 1월 12일 회의에서 스탈린이 한국에 대한 40년간의 신탁 통치 필요성에 동의하였다고 전했다. 2)카이로 선언의 한국 관련 조항에 명시된 ‘적당한 절차를 거쳐(in due course)’라는 구절은 미국이 제기한 한반도 신탁 통치안이 연합국들 사이에서 정치적으로 조율되어 나온 표현에 다름 아니었다.
〔사료 2-2-01〕 카이로 선언
카이로 선언
루즈벨트 대통령과 장개석 총통, 그리고 처칠 수상에 의해서 만들어졌으며, 1943년 12월 1일자 발표됨.
(3국은) 일본에 대항하는 미래의 군사 작전에 대해서, 몇몇 군사 임무에 합의하였다. 세 위대한 연합국은 그들의 잔인한 적들에 대하여 해상, 육지, 공중으로 끊임없는 압력을 가할 결의를 표명하였다. 이러한 압박을 이미 증가시키고 있다.
세 위대한 연합국은 일본의 침략을 제지하고 처벌하기 위하여 이 전쟁에서 싸우고 있다. 그들은 그들 자신을 위한 이익을 탐내지 않으며, 영토 확대를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의 목적은 일본이 1914년 1차 세계 대전 시작 이래 장악하거나 점령한 태평양의 섬들을 일본으로부터 떼어 내고, 일본이 중국인들로부터 훔쳐 온 영토들, 예를 들면 만주, 대만, 펑후 군도 등을 중국에 반환하는 것이다. 일본은 또한 폭력과 탐욕으로 얻은 다른 모든 영토로부터 축출될 것이다. 앞서 언급한 세 위대한 강대국들은 한국 인민의 노예 상태에 유의하여, 한국이 적절한 시기에 자유롭게 독립할 것을 결의한다.
〔사료 2-2-02〕 테헤란 회담에서 루즈벨트, 처칠, 스탈린이 논의한 ’한국의 미래‘ 요약 D-7
3. 한국의 미래 지위
1943년 11월 30일 세 강대국 오찬 회동에서, (처칠) 수상은 스탈린 원수에게 당시 제안된 카이로 선언을 읽어 보았느냐고 물었는데, 여기에는 한국이 ’적절한 시기’에’ 독립할 것이라는 조항이 들어가 있었다. 원수는 그가 (카이로 선언을) 읽어 보았고, “한국이 독립해야 하는 것은 옳다.”라고 대답하였다. 태평양 전쟁 위원회(pacific war council)의 1944년 1월 12일 회의에서, 루즈벨트 대통령은 “한국인들은 아직 독립된 정부를 운영하고 유지할 능력이 없으며, 그들은 40년의 후원하에 있어야 한다.”는 것에 스탈린이 동의했다고 보고하였다.
1) 1941년 8월 14일, 대서양 회담을 마친 루즈벨트 미국 대통령과 처칠 영국 수상이 밝힌 8개 항목의 전후 세계 구상을 말한다. 미국이 2차 대전에 참전하고, 1942년 1월 1일에 이 헌장이 연합국 공동 선언에 들어감으로써 이것은 연합국의 전쟁 목적을 나타내게 되었다. 헌장에는 ‘피침략국의 주권과 자치의 회복’이 포함되어 있었다.
2) 태평양 전쟁 위원회는 태평양 전쟁에 참여하는 연합국 간 협조를 위하여 1942년 3월 30일 구성되었고, 1944년 1월까지 활동하였다. 의장은 미국의 루즈벨트 대통령이었다. 미국은 이 위원회에서 자신들의 전쟁 노력을 설명하였고, 전쟁 관련 문제들에 관하여 각국의 입장을 들었다. 자문적 성격이 강하였으며, 결정권은 없었다.
카이로 회담
요약 : 제2차 세계대전 때 이집트의 카이로에서 개최된 회담. 1차는 1943년 11월 22일에서 26일까지, 2차는 1943년 12월 2일에서 7일까지 열렸다.제2차 세계대전이 추축국측에 불리하게 진행되면서, 연합군이 이탈리아에 상륙하여 드디어 1943년 9월 이탈리아가 항복하였다. 그리하여 세계 지도자들은 세계대전의 수행과 전후 처리 문제를 사전 협의하기 위해 두 차례의 회담을 하였다. 첫 회담은 1943년 11월 22일에서 26일까지 미국 루스벨트(FranklinD.Roosevelt) 대통령, 영국 처칠(WinstonChurchill) 수상, 중화민국 장제스[蔣介石] 총통의 세 연합국 수뇌가 이집트의 수도 카이로에서 세계전쟁에 대한 대응 문제로 모임을 가진 것이다.
당시 가장 중요한 핵심 사안으로는 대일전(對日戰)에 서로 협력할 것을 협의하였고, 일본이 패전했을 경우를 가정하고 일본의 영토 처리에 대하여 연합국의 기본방침을 결정하였다. 이러한 방침은 <카이로선언>으로서 발표되었다. 군사문제에 있어서는 처칠과 루스벨트는 노르망디 상륙작전에 대해서 숙의하였고, 장제스와 함께 1914년 이래 일본이 점령한 모든 영토를 탈환한다고 합의하였다. 루스벨트 대통령과 장제스 총통이 미국·영국·중화민국(현 타이완) 3개국 군에 의한 미얀마에서의 신작전을 펴자는 제안을 하였으나, 처칠 수상은 영국군 상륙용 선박을 앤다만 제도(Andaman Islands)에 파견하는 것에 반대하여 결정하지 못하였다. 또한 루스벨트 대통령은 북부 프랑스에 대한 반격을 절대적으로 우선하려 하였던 것에 반하여, 영국 처칠 수상은 이탈리아와 동부 지중해에도 병력의 4할을 투입하자고 제안하여, 서로 의견이 달라 이 역시 합의점을 찾지 못하였다. 결국 주로 일본에 대응하는 문제에 대해서 합의하였고, 특히 한국 독립문제가 처음 언급된 회담으로 특징된다.
카이로 회담 결과 발표한 <카이로 선언(Cairo Declaration)>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3국은 일본에 대한 장래의 군사행동을 협정하였다.
②3국은 야만적인 일본에 가차 없는 압력을 가할 것을 결의하였다.
③3국은 일본의 침략을 저지, 응징하나 모두 영토 확장의 의사는 없다.
④제1차 세계대전 후 일본이 탈취한 태평양 여러 섬을 박탈하고, 또한 만주·타이완·펑후제도 등을 중화민국에 반환하고, 일본이 약취한 모든 지역에서 일본세력을 축출한다.
⑤<특별조항> 한국의 미래에 대하여 언급하고 독립을 보장하는 국제적 합의를 하였다. “현재 한국민이 노예상태 아래 놓여 있음을 유의하여 앞으로 적절한 절차에 따라 한국의 자유와 독립을 줄 것이다.” (“……induecourse Korea shall become free and independent ……")
두 번째 회담은 1943년 12월 2 ~ 7일에 열렸다. 1차 회담 이후 테헤란에서 러시아 요시프 스탈린과 루스벨트, 처칠이 회담을 가졌다. 테헤란 회담을 마치고 귀로에 다시 카이로에서 루스벨트와 처칠은 터키의 I. 이노뉴 대통령을 초청하여 회담을 갖고, 터키를 연합국측에 가담시키려고 설득하였으나 실패하였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장군을 노르망디 상륙작전의 최고사령관으로 결정했음을 처칠에게 알렸다.
카이로 회담과 장제스 일대기
일본군은 후난 성 북부 창더를 점령함으로 중국군의 주요 곡창지대를 강탈하고 중국군 6전구와 9전구를 타격을 가하기로 방침을 정하고 11군에서 35개 대대를 차출, 6만 명의 병력을 꾸리고 항공전력을 동원하는 등 공세를 준비하여 11월 2일 공세를 감행했다. 그 동안 장제스는 카이로에서 열린 연합국 정상회담에 참석하여 연합국의 주요일원으로써의 위치를 과시하고 있었다.
루스벨트는 예전부터 장제스와 직접 만나고 싶어했는데 장제스는 만나는 것은 동의했지만 회담을 자꾸만 뒤로 미뤘다. 루스벨트는 알래스카에서 회담을 하려 했지만 장제스는 소련영토를 경유해서 가야 하는 알래스카를 거부했다. 만약 소련 영토를 경유하면 스탈린과 만나는 것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는데 장제스는 아예 빌미를 주지 않기로 한 것이다. 이에 루스벨트는 워싱턴 방문을 제안했으나 장제스는 그것도 거부했다. 루스벨트는 전 육군장관 패트릭 헐리를 충칭에 보내 장제스에게 카이로 회담에서 중국의 이익을 관철할 수 있을 것이며 미국이 이를 중재해줄 것이란 의사를 전달했고 장제스는 이에 큰 감동을 받고 루스벨트를 고귀한 기사도 정신의 소유자라고 칭송했다. 장제스는 카이로 회담에 참석하기 전에 만약 연합국에게 무리한 부탁을 하게 된다면 협상에 집중할 수 없게 되리라는 것을 스스로 알고 그러지 말자고 두차례나 스스로 다짐하였으나 얼마 안가서 그 다짐은 깨지고 만다.
장제스와 쑹메이링 부부는 루스벨트, 처칠과 만나 회담을 가졌는데 스탈린은 불참하였다. 그는 어차피 훨씬 중요한 테헤란에서 따로 만남을 가질 계획이었다. 이는 중국이 어디까지나 명목상 연합국 4대 강국일 뿐 실제로는 들러리에 지나지 않음을 보여주었다. 만약 중국이 중요한 일원이었다면 스탈린이 장제스를 만나는 것을 마다했을 리도, 테헤란 회담에서 장제스가 외면되었을 리도 없었다. 물론 장제스가 스탈린을 만나는 것도 사실 원치 않았다.
각설하고 메나 하우스 호텔에서 3국의 수장이 모였다. 장제스와 쑹메이링은 4일 간의 비행 끝에 20명의 대표단을 거느리고 11월 21일 새벽에 카이로에 제일 먼저 도착했다. 그날 오후에 처칠도 카이로에 도착했다. 처칠이 5시 30분에 장제스를 예방할 의사를 전달하자 장제스는 주인이 손님을 맞으러 가는 일은 없다면서 먼저 처칠을 만나러 갔다. 장제스와 처칠은 중국과 이집트의 역사에 대해 잠시 잡담을 나눈 다음에 스탈린을 만난 적 있는가, 소련의 대일 참전 가능성 여부 및 중국이 소련의 대일 개전을 찬성하는가 여부 등을 가지고 대화를 나누었다. 처칠은 장제스에게 전황이 호전되고 있는가를 물었고 장제스는 공중전에서의 우세를 언급했다. 장제스는 처칠에게 독일의 내란 가능성을 질문했고 처칠은 독일의 비밀경찰이 효율적이니 나치 정부가 존속하는 한 전쟁은 계속될 것이라 예측했다. 처칠은 장제스가 조용하고 신중하며 민완한 사람으로 그에게 깊은 인상을 받았다고 회고했으며 장제스는 처칠의 인상이 예상보다 훨씬 좋았다고 일기에 썼다. 첫 만남은 생각보다 괜찮았다.
다음날 처칠이 장제스를 찾아왔다. 당시 쑹메이링은 눈병을 앓고 있었는데 처칠은 자신의 개인 주치의를 보내 쑹메이링을 치료해줄 수 있다고 제안하기도 했다. 나중에 쑹메이링은 카이로에 온 김에 미국인 의료진의 도움으로 눈을 치료받았다. 하지만 처칠은 어디까지나 장제스와 쑹메이링을 회담의 들러리로 세운 다음에 그들을 피라미드 관광이나 시키고 영미 정상 간에서 중요한 일을 처리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장제스는 처칠이 ‘길고 복잡할 뿐 중요하지도 않다.’라고 평가한 중국문제를 회담의 주요 의제로 만드는 데에 성공했다.
11월 22일 루스벨트가 카이로에 도착했다. 그날 저녁 루스벨트와 만난 장제스는 루스벨트가 선견지명은 물론 초월적인 태도를 지닌 정치인같았다고 평가했으며 마치 오랜 친구를 만난 듯한 느낌이었다고 표현했다. 다음날인 11월 23일 내내 장제스는 회담에 몰입했다. 그날 저녁 미국대사 알렉산더 커크의 만찬에 초대받은 장제스 부부는 식후 내내 토론했고 처칠은 이 시간을 대화에 갇힌 시간이라고 했다. 장제스는 11시까지 루스벨트와 대화를 나누었다. 루스벨트는 장제스와의 만남에서 적잖이 실망한 듯 하다. 루스벨트는 오랜 세월 항일전쟁을 수행해온 장제스에 대해서 없잖아 환상을 품고 있었는 듯 한데 가까이에서 본 장제스에게는 카리스마라는 것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는 무미건조한 어투로 딱딱 말을 끊는 차가운 사람이었고 루스벨트는 그런 장제스의 태도에 실망하고 만다. 그리고 루스벨트는 쑹메이링을 요부, 기회주의자라고 여겨 별로 좋아하지 않았는데 영어를 하지 못하던 장제스가 오로지 쑹메이링을 통해 대화를 한 것도 루스벨트에겐 감점요인이었다. 장제스는 루스벨트에게 중국군의 사정에 대해서 너무도 솔직하게 모든 것을 알려주었는데 중국군의 열악한 상황을 들은 루스벨트는 중국군이 전혀 싸우고 있지 않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 시기 장제스는 워싱턴에 끊임없이 스틸웰 해임안을 요구하고 있었는데 결국 루스벨트는 스틸웰을 해임할 이유가 없다고 판단하게 되었으며 공산당과의 갈등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장제스가 불필요한 군사비를 지출하고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대한민국을 낳은 국제회의- 1943년 카이로 회담
美·英·中 닷새 기싸움 끝에 카이로서 '한국 독립' 첫 명시
카이로 회담 '주최국'을 자임한 영국은 처칠 총리를 포함해 100여명이 참가했다. 미국 측은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을 포함해 60여명이었다. 중국도 장제스 국방최고위원장 등 28명이 참가했다. 중국으로서는 미·영·소와 나란히 '세계 4대 강국'으로 국제 사회에 등장하는 무대였다.
식민 지배 계속 원했던 英, 中과 '독립' 조항 놓고 대립美 중재로 천신만고 끝에 "적절한 절차로 독립" 결의
이집트 카이로 시내에서 서남쪽으로 15㎞ 떨어진 기자(Giza) 피라미드 지구. 기원전 2500년 전후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는 3개의 대형 피라미드와 스핑크스가 있는 이 유서 깊은 지역에 1886년 건립된 고급 호텔이 있다. 메나 하우스 호텔. 고대 이집트 왕국을 창건한 파라오의 이름에서 따온 이 호텔에선 손을 뻗으면 닿을 듯 피라미드가 가깝게 보인다. 70여년전 한국의 독립안(案)이 국제 사회에서 처음으로 공식 논의된 곳이다.
연합국이 2차 대전의 승기를 잡은 1943년 11월, 미국과 영국, 중국 등 3개국 정상이 속속 메나 하우스 호텔에 들어섰다. 그달 22일부터 26일까지 군사 전략과 전후(戰後) 질서를 함께 논의했던 카이로 회담의 본부였기 때문이다. 지금도 이 호텔은 윈스턴 처칠 영국 총리가 묵었던 방에 '처칠 스위트(Churchill Suite)'라는 문패를 붙여놓고 있다.
당시 회담 진행을 맡았던 영국은 호텔 인근 비행기지에 보병 1개 여단 이상의 병력과 대공포 500여대를 배치하고 경계에 나섰다. '주최국'을 자임한 영국은 처칠 총리를 포함해 100여명이 참가했다. 미국 측은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을 포함해 60여명이었다. 중국도 장제스 국방최고위원장 등 28명이 참가했다. 이들 3개국 참가자는 188명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처칠은 자신의 회고록에 "500명이 참가했다"고 호기롭게 적었다. 중국으로서는 미·영·소와 나란히 '세계 4대 강국'으로 국제 사회에 등장하는 무대였다.
"3000萬 동포 대표해 감사" 김구 당시 임시정부 주석
한국의 독립안이 카이로 회담에서 처음 논의된 시각은 1943년 11월 23일 오후 8시. 장제스가 루스벨트와의 만찬 석상에서 '한국 독립' 안건을 꺼냈다. 일본이 차지한 만주와 대만·팽호도의 중국 반환, 일본이 강점한 태평양 도서(島嶼) 지배권 박탈과 함께 주요 의제로 잡은 것이었다. 이날 회동은 밤 11시까지 3시간가량 계속됐다. 장제스는 24일자 일기에 "한국 독립 문제에 대해 나는 루씨(루스벨트)에게 나의 주장에 찬동하고 도와달라고 요구했다"고 적었다.
만찬에 동석한 루스벨트 대통령의 특별보좌관 해리 홉킨스가 다음 날인 24일 오후 카이로 회담의 선언 초안을 작성했다. 그는 대통령 빌라 일광욕실에서 별도의 원고나 메모 없이 수행원에게 초안 내용을 구술(口述)하며 타이핑하도록 했다. 홉킨스는 1931년 당시 뉴욕 주지사였던 루스벨트가 긴급구제국장으로 발탁했던 최측근이었다. '일본 몰락 이후 가능한 한 가장 이른 시기에 한국이 자유롭고 독립적인 국가가 될 것임을 결의한다'는 문구도 홉킨스 초안에서 처음 등장했다. '가능한 한 가장 이른 시기에'라는 구절은 루스벨트와 처칠의 수정을 거쳐 '적절한 절차를 거쳐(in due course)'로 확정됐다.
미·영·중 3개국은 전후 질서 수립을 둘러싸고 시종 팽팽한 신경전을 벌였다. 특히 영국과 중국은 '한국 독립' 승인을 놓고 정면 대립하는 양상을 보였다. 인도·버마 등에 대한 식민 지배 유지를 바라던 영국은 한국 독립 조항을 명시하는 걸 반기지 않았다. 캐도건 영국 외무차관은 25일 "한국이 자유롭고 독립적인 국가가 될 것"이라는 구절을 "일본 통치에서 이탈시킬 것"이라고 수정하려고 했다. 사실상 '독립'이라는 표현을 빼려는 시도가 중국 반대로 무산되자, 영국은 한국 관련 조항 전체를 삭제하려는 의도를 드러냈다. 하지만 미국이 중재에 나서고 다음 날 처칠이 "적절한 시기에 한국이 자유롭고 독립적으로 될 것을 결의한다"는 수정안을 내놓으면서 양국 갈등은 잦아들었다.
중국과 미국도 상대방에 대해 불신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았다. 23일 만찬에서 장제스가 만주·대만의 중국 반환과 한국 독립 등의 주장을 쏟아내자, 미국은 중국의 영토 확장 의도를 의심하기에 이르렀다. 루스벨트는 다음 날 영국과의 합동 참모회의 석상에서 "중국이 만주와 한국의 재점령을 포함하는 광범위한 열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고 말했다. 한반도의 지정학적 위치에 주목한 미국은 중국이나 소련이 일방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는 상황을 막기 위해 '다자간(多者間) 합의에 의한 국제 공동 관리'를 한반도 정책으로 구상하고 있었다
3개국의 이해관계가 엇갈리는 상황에서 한국 독립안은 천신만고(千辛萬苦) 끝에 카이로 선언에 포함됐다. 김구 임시정부 주석은 카이로 선언 발표 직후인 1일 "나는 3000만 동포를 대표하여 3영수에게 사의를 표하는 동시에 일본이 무조건 투항할 때까지 동맹국의 승리와 조국의 독립을 위해 최후까지 공동 분투할 것"이라는 담화를 발표했다.
하지만 '일본으로부터의 독립'으로 곧바로 '자주 독립국가 건설'을 보장하지는 않겠다는 국제 사회의 냉혹한 계산이 '적절한 절차를 거쳐'라는 짧은 문구에 함축되어 있었다. 이 비극적 불씨는 1945년 12월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한반도 신탁통치안을 발표하면서 반탁(反託)과 찬탁의 거센 불길로 번졌다. 카이로 회담은 한국 독립을 명시한 최초의 국제회의라는 역사적 의의와 함께, 복잡한 국제 정세로 신생(新生) 대한민국의 운명이 순탄하지 않을 것임을 예고했다.
소련 빠진 카이로 회담… 스탈린의 신변 걱정 탓?
미·영·중(美英中) 정상이 참가한 카이로 회담(1943년 11월 22~26일)과 미·영·소(美英蘇)의 테헤란 회담(11월 28일~12월 1일)은 미·영 양국 정상의 이동 시간을 감안하면 사실상 연달아 열렸던 '쌍둥이 회의'다. 왜 두 회의는 한 군데서 열리지 않고, 불편하게 두 장소에서 나뉘어 열린 것일까.
우선 소련은 1941년 4월 일본과 맺은 중립 조약 때문에 대일(對日) 전선에서 다른 연합국과 보조를 맞추기 힘들었다는 분석이 있다. 소련은 일본 패망 이후 전후 처리 구상을 주로 논의했던 카이로 회담에 참가하지 않는 대신, 테헤란 회담을 통해 유럽 전선에 대한 공동보조를 밝히는 방식을 택했다는 것이다. 스탈린은 28일 테헤란 회담에서 "독일이 최종적으로 격파되면 시베리아에 필요한 지원군을 보낼 수 있고, 우리는 공동 전선에서 일본을 칠 수 있을 것"이라며 대일 참전을 약속했다.
美·英과 테헤란서 2차 회담"전후 동북아 주도권 둘러싼 中과의 경쟁 때문" 분석도
신변 안전에 민감한 스탈린이 카이로보다 소련에 인접한 이란의 테헤란을 골랐다는 해석도 설득력있다. 미 국무부 외교 문서에 따르면, 1943년 9월 루스벨트와 처칠은 스탈린에게 이집트를 회담 장소로 고려해달라고 부탁했지만 스탈린은 끝내 테헤란을 고집했다.
만주를 비롯한 동북아 지역의 전후 주도권을 놓고 중·소(中蘇) 양국이 경쟁 관계에 들어갔기 때문이라는 시각도 있다. 루스벨트는 카이로 회담을 한 달 앞둔 1943년 10월 장제스와 사전 협의하려고 미국 대통령 특사 패트릭 헐리 준장을 중국 충칭(重慶)에 파견했다. 당시 소련의 회담 의사를 묻는 헐리의 말에 장제스는 "시기 미숙"이라고 답했다. 중·소의 '불편한 관계'는 1945년 종전(終戰) 이후 국공(國共) 내전이 다시 불거지면서 현실이 되고 만다. 결국 루스벨트는 4국 정상회담 개최 계획을 수정해, 미·영·중 3국 회담과 미·영·소 3국 회담으로 양분했다. 두 회담 일정은 11월 8일 미국의 최종 통보로 확정됐다.
첫댓글 카이로 선언의 역사적 의미를 되새기게 하는
글을 주셔서 잘 감상하였습니다. 감사합니다.
즐감
우물안 개구리라 우리네 뒷 모습야,
해방후 이삼년을 천만갈래 쪼개냈네.
우리가 앉든 서든 무엇에 기인 하나?
정신을 안차리며는 어찌되나 생각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