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 박두진 해야 솟아라. 해야 솟아라. 말갛게 씻은 얼굴 고운 해야 솟아라. 산 넘어 산 넘어서 어둠을 살라 먹고, 산 넘어서 밤새도록 어둠을 살라 먹고, 이글이글 앳된 얼굴 고운 해야 솟아라. 달밤이 싫여, 달밤이 싫여, 눈물 같은 골짜기에 달밤이 싫여, 아무도 없는 뜰에 달밤이 나는 싫여……, 해야, 고운 해야. 늬가 오면 늬가사 오면, 나는 나는 청산이 좋아라. 훨훨훨 깃을 치는 청산이 좋아라. 청산이 있으면 홀로래도 좋아라,사슴을 따라, 사슴을 따라, 양지로 양지로 사슴을 따라 사슴을 만나면 사슴과 놀고, 칡범을 따라 칡범을 따라 칡범을 만나면 칡범과 놀고,…… 해야, 고운 해야. 해야 솟아라. 꿈이 아니래도 너를 만나면, 꽃도 새도 짐승도 한자리 앉아, 워어이 워어이 모두 불러 한자리 앉아 앳되고 고운 날을 누려 보리라.<해, 청만사, 1949> <해야>는 연대 국문과 교수이신 시인 박두진님의 시 <해>를 개사한 것이다. 곡을 만드는(작곡)데는 어느 정도 자신이 있었으나 가사를 쓰기엔 미흡하다고 느껴 고민했었는데 마침 박교수님의 시 <해>를 보고 그 시에 곡을 붙인 것이다. 박두진 선생님의 <해>는 일제의 억압속에서도 맥맥히 이어지는 민족혼과 광복의 희망을 노래한 것으로 알고 있다. <해야>때문에 사실 우린 박교수님께 불려가 혼나기도 했다. 대학가요제에 나가 <해야>를 부를때 TV자막에'박두진 시/ 조하문 개사/ 조하문 작곡'으로 쓰여진 것을 박교수님의 제자가 보고 문제를 삼은 것이다. 철저한 민족주의자이신 선생님은 댁에 TV조차 갖고있지 않으셨다. 제자가 TV를 보고"어떻게 선생님의 시를 서양의 록음악에 꿰어 맞출 수가 있느냐"고 격분했다고 한다. 대학가요제가 끝나고 1주일인가 지났는데 갑자기 박교수님의 호출이 떨어졌다. 국문과로 오라는 것이었다. 방에 들어서자 박교수님은 우릴 점잖게 타이르셨다. "예전에 어느 가수가 찾아와서 시를 써 달라고 한 걸 거절한 적도 있다.저작권이 뭔지도 모르고 교수얼굴에 먹칠을 해서 되겠느냐. 다시는 그 노래를 부르지 말라"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두손을 싹싹 빌면서 다시는 그 노래를 안 부르겠다고 말씀드렸다. 박교수님은 "다시 그 노래를 부르면 가만 두지 않겠다"고 엄포(?)를 놓으셨지만 아직까지 아무 연락이 없으신걸 보면 포기하신 것 같다. 아마 우리가 프로가수가 아닌 순수한 아마추어이니까 그냥 용서하기로 결정하신 것으로 생각된다. 박교수님께서 소송을 걸었으면 <해야>디스크는 판매금지가 됐을 거다. 우리 이전에 양희은씨와 송창식씨가 박두진 선생님의 시를 노래했다가 판매금지 당했던 사례가 있었다. --한국닷컴 스타 스토리 : 조하문 --
해
박두진
해야 솟아라. 해야 솟아라. 말갛게 씻은 얼굴 고운 해야 솟아라. 산 넘어 산 넘어서 어둠을 살라 먹고, 산 넘어서 밤새도록 어둠을 살라 먹고, 이글이글 앳된 얼굴 고운 해야 솟아라.
달밤이 싫여, 달밤이 싫여, 눈물 같은 골짜기에 달밤이 싫여, 아무도 없는 뜰에 달밤이 나는 싫여……,
해야, 고운 해야. 늬가 오면 늬가사 오면, 나는 나는 청산이 좋아라. 훨훨훨 깃을 치는 청산이 좋아라. 청산이 있으면 홀로래도 좋아라,사슴을 따라, 사슴을 따라, 양지로 양지로 사슴을 따라 사슴을 만나면 사슴과 놀고,
칡범을 따라 칡범을 따라 칡범을 만나면 칡범과 놀고,……
해야, 고운 해야. 해야 솟아라. 꿈이 아니래도 너를 만나면, 꽃도 새도 짐승도 한자리 앉아, 워어이 워어이 모두 불러 한자리 앉아 앳되고 고운 날을 누려 보리라.<해, 청만사, 1949>
<해야>는 연대 국문과 교수이신 시인 박두진님의 시 <해>를 개사한 것이다. 곡을 만드는(작곡)데는 어느 정도 자신이 있었으나 가사를 쓰기엔 미흡하다고 느껴 고민했었는데 마침 박교수님의 시 <해>를 보고 그 시에 곡을 붙인 것이다. 박두진 선생님의 <해>는 일제의 억압속에서도 맥맥히 이어지는 민족혼과 광복의 희망을 노래한 것으로 알고 있다. <해야>때문에 사실 우린 박교수님께 불려가 혼나기도 했다. 대학가요제에 나가 <해야>를 부를때 TV자막에'박두진 시/ 조하문 개사/ 조하문 작곡'으로 쓰여진 것을 박교수님의 제자가 보고 문제를 삼은 것이다. 철저한 민족주의자이신 선생님은 댁에 TV조차 갖고있지 않으셨다. 제자가 TV를 보고"어떻게 선생님의 시를 서양의 록음악에 꿰어 맞출 수가 있느냐"고 격분했다고 한다. 대학가요제가 끝나고 1주일인가 지났는데 갑자기 박교수님의 호출이 떨어졌다. 국문과로 오라는 것이었다. 방에 들어서자 박교수님은 우릴 점잖게 타이르셨다. "예전에 어느 가수가 찾아와서 시를 써 달라고 한 걸 거절한 적도 있다.저작권이 뭔지도 모르고 교수얼굴에 먹칠을 해서 되겠느냐. 다시는 그 노래를 부르지 말라"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두손을 싹싹 빌면서 다시는 그 노래를 안 부르겠다고 말씀드렸다. 박교수님은 "다시 그 노래를 부르면 가만 두지 않겠다"고 엄포(?)를 놓으셨지만 아직까지 아무 연락이 없으신걸 보면 포기하신 것 같다. 아마 우리가 프로가수가 아닌 순수한 아마추어이니까 그냥 용서하기로 결정하신 것으로 생각된다. 박교수님께서 소송을 걸었으면 <해야>디스크는 판매금지가 됐을 거다. 우리 이전에 양희은씨와 송창식씨가 박두진 선생님의 시를 노래했다가 판매금지 당했던 사례가 있었다. --한국닷컴 스타 스토리 : 조하문 --
첫댓글 조하문의 추억어린 모습 즐감하구 갑니다..고운밤 되세요..*^^*
첫댓글 조하문의 추억어린 모습 즐감하구 갑니다..고운밤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