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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논객(sionvoic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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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대통령은 그 시대의 역할을 하신 분입니다. 민주주의 경험이 전혀 없는 나라, 총독부 지배 외에는 수십년간 공산주의 사상에 찌든 나라, 아무도 민주주의라는 말을 들어보지조차 못한 나라에서 민주주의 국가를 건설하려면 길이 험난한 것입니다. 그리고 만약 이승만 박사의 외교가 아니었더라면 미국에서 한국에 무상원조를 근 이십 년간 해 주었을리가 없습니다. 스스로 외화벌이 능력이 1달러도 안되던 나라에서
2005-02-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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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논객(sionvoic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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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의 생존이 가능했을까요?
2005-02-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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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위(muwee20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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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정이 1945년 8~1947년 말까지 소비한 주둔비 141억엔은 조선은행권을 남발하여 대부라는 이름으로 조달되었고 이는 모두 남한민중이 부담해야 했습니다. 또한 미군정청의 적자누적 총액은 1948년 9월 30일 현재 400억엔을 초과하였고, 이는 당시의 조선은행 통화발행고 642억엔의 약 62%에 이르는 것이었으며 이것도 모두 남한 민중에게 부담지워졌음은 물론이다.
2005-02-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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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위(muwee20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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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은 1945년 9월부터 1948년 말까지 '원조'라는 명목으로 미국의 잉여농산물도 무상으로 지급되지 않고 대금은 대충자금으로 적립되어 , 남한의 노동운동, 민족해방운동을 붕괴시키고 미국의 꼭두각시 정권 반공.군사체제를 확립하는데 사용되었다.
2005-02-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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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위(muwee20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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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제국주의자와 이승만 정권의 민중 탄압정책과 경제수탈정책에 의해 1949년 상반기, 남한의 기업 가동률은 일제 통치시기의 55%로 감소되었다. 그 결과 남한의 공업과 농업은 완전히 반신불수가 되었고, 실업,반실업자와 유랑농민이 도시와 농촌에 가득차 남한 민중의 생활은 눈 뜨고 못 볼 정도로 참혹했다고 한다.
2005-02-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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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위(muwee20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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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정청은 일제가 동양척식주식회사의 명의로 관리하던 남한 쌀 농지의 약 25%에 달하던 땅을 '신한공사'를 만들어 관리하였는데 이는 미군정청이 남한 최대의 지주였다는 말이다.1946년의 경우 미군정청이 '신한공사' 명의로 관리하던 땅에서 생산된 쌀이 남한 총 쌀생산량의 33%에 달했다고 한다.
2005-02-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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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위(muwee20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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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된 1945년과 1946년은 풍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미군정청은 쌀 수확량의 40~60%를 강제 공출하였는데 강제공출의 과정에 군정청 직원과 조선인 모리배(세관 브로커)가 결탁하여 부당이득을 취한 결과 시중의 쌀 가격은 공출가격의 10배나 되었다.그래서 풍년이라 쌀이 남아 도는데도 지주들은 쌀을 은닉했고 시중에는 쌀을 구하기가 힘들었다. 그래서 민중들은 점령군의 옥수수와 밀가루로 목숨을 연명하고 있었다.
2005-02-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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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위(muwee20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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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정기의 통화 발행고는 1945년 8월 조선해방 당시를 100으로 잡을때, 이승만 정권이 들어선 1948년 8월에는 306으로 팽창되었고, 물가지수도 100에서 1060으로 폭등하였고,일제가 제국주의 전쟁에 미쳐 날뛰던 1937년 조선노동자 임금과 1946년의 실질임금을 비교하면 1946년 임금이 1937년 임금의 3분의 1 수준으로 떨어졌다고 한다.
2005-02-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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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위(muwee20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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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정권은 가혹한 정치적 탄압과 경제위기 심화로 집권 초기부터 남한민중의 거센 저항에 직면하였다.그래서 이승만정권은 1948년 11월 20일 국회에서 '국가보안법'을 통과시키고, 12월 1일 이를 공표하였다. 이 법률은 혁신정당의 해산은 물론이고 일체의 반미,반정부 활동을 금지시켰고, 또한 남한의 좌익정당. 사회단체는 모두 불법화하여 미국의 신식민지배체제에 대항하는 모든 활동을 말살시키고자 하였다.
2005-02-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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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위(muwee20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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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보안법이 시행된 첫해인 1949년 1년동안 무려 11만 8천 6백 2십 1명이 이 악법에 의하여 검거, 투옥 되었다
2005-02-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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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논객(sionvoic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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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은 마샬플랜으로 유럽 전 지역에 지원한 원조보다 더 많은 원조를 한국 한 나라에 했습니다. <미제국주의자>라는 용어를 쓰는 님의 자료 출처는 어디입니까?
2005-02-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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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위(muwee20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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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논객/ 말꼬리 잡고 늘어지려고 하지 마시고, 이승만 정권의 실상이나 똑바로 알려고 노력하시오.
2005-02-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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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논객(sionvoic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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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위님, 일본은 정책적으로 조선인이 과학을 배우지 못하게 하고, 공장에서 숙련공이 되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그래서 해방 후에 공장이 가동되지 않는 혼동이 온 것입니다. 당시 기술이 없는 문제를 누가 해결할 수 있었을까요?
2005-02-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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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논객(sionvoic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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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산업기술은 박정희 대통령으로부터 왔습니다. 이것이 테크노크라트로서의 그의 역할이 중요했던 것입니다.
2005-02-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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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과현실(livein21c)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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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위님! 안녕하세요? 님의 글 잘 읽었습니다. 이 부분도 살펴보셔서 글 올려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바로 토지개혁에 관한 내용입니다. 북한은 사회주의 협동농장체제로 전환하기 위해 토지개혁을 하게 됩니다. 이승만도 토지개혁을 하게 되는데 그 목적의 이면성입니다. 당시 이승만 정권에 반대했던 민주당에 정치자금을 지원했던 지역은 전라도였는데 민주장의 자금줄을 차단하기 목적도 있었으리라고 봅니다. 다만 추측입니다
2005-02-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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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과현실(livein21c)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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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은 토지개혁을 북한의 실시에 뒤이어 따라서 하게 됐는데 이승만의 토지개혁으로 인해 그 혜택이 과연 농부들에게 돌아 갔는지 궁금합니다. 그럼 더욱 좋은 글 올려 주시기 바랍니다. 다시한번 새해 복 많이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2005-02-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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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논객(sionvoic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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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의 토지개혁으로 인해 5년 만에 농민들이 토지 소유자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북한과 다른 점입니다.
2005-02-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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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논객(sionvoic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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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는 본래 농민은 자기 토지가 없던 나라였습니다. 농민들이 자기 농토를 가지게 된 것은 이승만 대통령의 토지 개혁 때부터입니다. 토지 개혁이 오히려 인민들에게 착취가 되어버린 북한과 크게 대조적입니다. 여기에 이승만 대통령의 통치의 위대함이 있었던 것입니다. 남로당이 북한식으로 할 것을 요구하던 시절에 이승만 대통령은 가장 옳은 토지 개혁 정책을 실시하셨던 것입니다.
2005-02-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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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과현실(livein21c)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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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역사에서 보니 이미 기존, 예로 조선시대에도 사회주의식 무상몰수와 소농중심의 정전론과 균전론, 유상구입에 의한 한전론이 있었군요. 그리고 북한이 앞서 시행했던 무상몰수 무상분배를 내세운 남로당에 의해 국민들이 동요되자 이승만이 위협감을 상당하게 느끼고 있었군요. 당시만 하더라도 국민의 70%가 공산주의를 지지했던 상황이니까요. 즉, 북한에게 쫓겨서 하게 된 것이군요.
2005-02-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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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과현실(livein21c)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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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승만의 유상구매에 의해 토지거래량은 증가했지만 토지판매액이 형편없었고, 지급을 미루거나 제한하고, 분할보상함으로써 토지를 판매한 사람들은 산업자본화 할 수 없었군요. 토지개혁을 하면서 토지 소유자들을 산업화 투자자로 전환시키지 못했군요. 그리고 토지를 재분배하기는 했지만 농업생산성에는 전혀 기여하지 못해군요. 후에 산업자본을 지배하게된 독점기업들에 의해 역으로 다시 농민들이 몰락하게 되네요.
2005-02-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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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논객(sionvoic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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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은 일제시대 때 독립군자금을 후원하던 분들을 부르조아 계급이라며 도끼로 때려 죽이고 재산을 몰수하였습니다. 그때 살아남은 청년들이 월남하여 반공 청년단을 조직하였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은 친일파의 재산을 몰수하되 밥을 굶지 않을 정도의 토지는 남겨 주었습니다. 북한처럼 가족까지 굶겨죽여야 할 필요는 없으니까요. 그리고 그 토지를 농민들에게 분배하였습니다. 그러나 거저 준 것이 아니라, 오년 간
2005-02-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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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과현실(livein21c)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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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농민들이 순순하게 이승만이 내세운 유상매입 유상분배에 대해서 순순하게 따라 줬군요. 바로 농민들의 보수적 성품에 따른 소극성 때문에요. 바로 박정희 당시까지도 이어졌던 여촌야도의 정치적 성향을 보여주고 있네요. 그런데 문제는 이승만의 유상매입에 동참했던 지주들도 산업화 투자가로 변신하지 못하고, 유상분배 받은 농민들도 몰락했으니 이 문제의 근원은 어디서 다시 찾아야 하나요?
2005-02-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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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논객(sionvoic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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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출의 십 프로를 국가에 내게 하였습니다. 일제 시대 때 세금이 20%였으니깐 10%이면 가벼운 것이요, 오년 후에 명의가 농부 명의로 되었습니다. 북한에서는 형식적으로는 농민에게 분배되었기에 처음에는 농민들이 좋아했지만 당국에 내야 하는 세금이 30%가 넘었습니다. 따라서 뼈빠지게 일해도 먹고 살기 힘들었으며, 실소유권이 없으니 인간 닭장에서 강제 노동 착취만 당하는 결과가 되었습니다.
2005-02-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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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과현실(livein21c)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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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수의 토지 판매자금이 산업화자금으로 전환되지 못하고, 대다수의 유상분배 받은 농민들이 몰락하는 과정의 중심에 박정희가 있군요. 정책의 연속성 면에서 이승만의 토지개혁은 산업화 측면에서 본다면 역효과를 냈군요. 만약 이승만이 친일파 청산이라는 명확한 주제를 정하고 이런 일련의 과정에서 토지개혁이 이루어졌다면 유상분배된 토지가 비효율적으로 몰락하지 않았을 것 같군요.
2005-02-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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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논객(sionvoic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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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주들도 산업화 투자가로 변신하지 못하고>라고 하셨는데, 이승만 대통령에게는 산업화 정책이라는 것이 없었습니다. 산업화 정책은 박정희 시대부터 나온 것입니다.
2005-02-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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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논객(sionvoic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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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과현실님, 그게 아니구요. 만약 박정희 대통령이 없었다면 여전히 우리나라는 농업국입니다. 우리나라가 농업국을 벗어나는 것은 불가능하였습니다. 박정희가 없었다면 완전 불가능입니다.
2005-02-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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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과현실(livein21c)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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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의 10%공출과 북한의 30%공출의 차이는 다르다고 봅니다. 남한은 10%의 쌀공출이외에도 여타 세금으로 현금을 내야 했고 기타 부분에서도 자신의 자본을 지출해야 했으니까요. 북한은 30%의 쌀 공출을 내면 그걸로 모든 납세가 끝나면서 교육, 의료, 주택 등 거의 모든 부분에서 국가로부터 혜택을 받으니까 비슷하다고 봅니다. 다만 북한의 경우 생산성 동기유발이 되지 않았다고 봅니다.
2005-02-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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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과현실(livein21c)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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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정권에서는 산업화를 시도하기에는 무리라도 역시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승만에게 필요한 과제는 여하튼 남한체제의 안정이었으니까요. 산업화에 대한 준비는 4.19 이후에 이루어지기 때문이죠. 장면정권의 국토개발 계획이나, 장면정권의 계획서를 다시 시대에 맞춰 수정한 박정희, 어쩌면 경제발전단계에서 보면 누구나 그 위치에 섰어도 동일한 역할을 수행할 수 밖에 없다고 봅니다.
2005-02-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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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논객(sionvoic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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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하간 1963년에는 북한이 남한보다 약 세배로 큰 경제 규모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박정희와 김일성의 경제 전략 대결은 이 시점 이런 상황에서 출발하였습니다.
2005-02-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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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논객(sionvoic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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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면정권의 계획서는 결국 농업을 주산업으로 하는 경제 영구화에 불과했습니다. 산업화 계획이 아니었으며, 그 계획안 보고 미국이 가망없다 판단하고 무상원조마저 동결시켰으므로 예산상 결코 시행될 수 없는 계획이었습니다.
2005-02-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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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과현실(livein21c)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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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죠. 신기하게도 미군의 폭격에 의해 북한주민들이 더 많이 희생되었지만 북한의 기간산업시설은 멀쩡했지요. 당시 정권을 장악한 박정희의 입장에서는 경제 군사 외교력에서 북한에게 일방적으로 밀리고 있던 상황에서 체제불안을 심각하게 느꼈겠죠. 더구나 당시 북한은 미국의 정보함마저도 납치할 정도의 배짱이 있었으니까요. 박정희와 김일성의 차이점은 박정희는 경제에 국정을 정했고 김일성은 군사에 국정을 정한거죠.
2005-02-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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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과현실(livein21c)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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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박정희의 경제적 성과를 긍정하자는 것인데, 전략적인 측면에서의 경제적 성과는 인정해야 한다고 보죠. 다만 깨끗하지 못한 전술적 과실이 보이고, 성장을 몰아 부친것 만큼 분배가 따르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유신 이후 박정희가 선택한 권력행사의 모습은 분명히 잘 못 되었습니다. 민의를 거스른 것입니다. 진정한 지도자라면 자신과 배치되는 민의를 자신의 신념으로 끌어 당길 수 있는 역량이 있어서야 했습니다
2005-02-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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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논객(sionvoic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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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과현실님, 연대 확인을 해 보셨는지요. 조국 근대화 청사진은 박정희가 1963년 10월 5대 대통령 대선 때 제시하였던 것이구요. 그때는 아직 대통령에 취임하기 전이었습니다. 대통령 후보 출마는 그가 떠밀려서 한 것이였지 그의 야망이 아니었습니다. 아직 출발도 안한 3공화국 체제불안 때문이 아니라, 막 미국 무상원조가 중단된 나라를 구하기 위해서였습니다.
2005-02-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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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논객(sionvoic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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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와 김일성의 차이점은 박정희는 경제에 국정을 정했고 김일성은 군사에 국정을 정한거죠. >는 사실과 다릅니다. 1963년에 김일성이 남한에 경제 전쟁을 선포를 하였습니다. 남한을 비웃으며 북한처럼 나라가 경제적으로 부강하여야 한다고 했습니다. 아직 우리나라는 시멘트조차 생산해내지 못하였을 때 북한은 동구의 지원으로 탄탄한 공업국이 되어 있었으니까요. 그런데, 5.16 직후 박정희는 국방비
2005-02-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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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과현실(livein21c)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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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파 청산과 독재권력 청산에 있어서는 박정희를 부정하고 학창시절의 전체주의적인 획일성을 싫어하지만 경제적 성과에 있어서 전략성은 인정합니다. 이제 겨우 수출 100억달러를 달성하기 위해 혹은 달성을 기뻐하는 기존에 우리보다 잘 살았던 국가들을 보면 그러합니다. 그러나 모든 경제적 성과를 박정희 개인에게 돌리기보다는 산업재해 저임금 고강도 장시간 노동자들에게 겸손하게 성과를 돌려주는 것도 좋겠죠.
2005-02-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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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논객(sionvoic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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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산을 20%로 줄였습니다. 북한과 남한이 모두 30%의 국방비를 지출하고 있었는데, 박정희는 국방을 주한미군에 맡기고 그 절약한 10%를 자본으로 삼아 산업화 정책을 추진하였던 것입니다.
2005-02-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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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논객(sionvoic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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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30년 후인 1992년에 북한은 경제 규모가 남한의 7분의 1도 안되며 군사무기 역시 낙후한 국가로 전락해 있었습니다. 즉, 경제 전쟁에서 박정희가 이기었던 것입니다.
2005-02-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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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과현실(livein21c)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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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가 정치적 야망이 없었다면 군부내 신뢰가 두터운 장도영을 제거할 필요가 없었겠죠. 대통령 출마할 의사가 없는데도 비록 얼굴마담이기는 했지만 장도영을 그렇게 쉽게 순식간에 제거할 수는 없는 거죠. 이런 이유에서 박정희가 무상원조가 중단된 한국을 구하겠다고 마음 먹은 것과는 모순이 있군요. 떠밀려서 출마하는데 조국을 구하겠다는 마음이 이미 있었다는 것은 이상하군요. 부하들의 애국심이 그렇게 충실했을까요
2005-02-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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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논객(sionvoic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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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과현실님, 이것만은 분명합니다. 박정희 없었으면 우리나라는 여전히 농업국입니다. 게다가 기름 수입을 할 외화가 없는 나라이기에 자동차와 기차 등 통행 수단마저 없는 농업국, 여전히 연필 하나 생산해 내지 못하는 농업국, 필기 도구를 수입한 외화가 없어 교육이 황폐한 농업국이 지금의 한국의 모습이었을 것입니다.
2005-02-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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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과현실(livein21c)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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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치상으로 국방비 지출의 문제를 떠나서 박정희는 미국에 의해 냉대 당했습니다. 다만 미국의 필요성에 의해 미군이 한국에 주둔해 있었을 뿐이죠. 국방비를 줄여서 경제발전에 투자했을지라도 정작 중심적인 경제개발투자금은 성급하고 비굴한 한일수교 보상금이고, 또한 월남전과 독일노동자 파견을 통해 얻어진 자금입니다.
2005-02-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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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논객(sionvoic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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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과현실님, 대통령 출마는 장도영씨와는 별개의 문제입니다. 그에게 경제 발전을 위한 명확한 청사진이 있었기에 그리고 그 비전을 국민에게 제시하였기에 당선되었던 것입니다. 그는 국민의 선택을 받았던 것입니다.
2005-02-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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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과현실(livein21c)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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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경계해야 하는 것은 결과가 좋은면 과정도 좋다라고 인정해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결과를 위한 과정의 정당성 확보는 그릇된 것입니다. 역사를 더듬어 보는 것은 결과가 좋기에 과정마저 좋게 만들자는 것이 아닙니다. 결과를 역으로 짚어 나가면서 과정에 대한 공과를 정확하게 살핀 다음에 미래를 준비하기 위한 것입니다. 박정희의 경제적 성과가 좋다고 다시 박정희식으로 할수는 없는거 아닙니까?
2005-02-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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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논객(sionvoic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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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과현실님, "비굴한 한일수교" 운운하는 것은 무식한 소리입니다. 여태껏 한일 외교가 없기를 바라십니까? 그리고 경협이 실용주의입니다. 만약 경협이 아니라 보상이었다면 일본 기술을 이전해 오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우리나라는 미국이 연 3억불 원조해 주면 그대로 일본에 갖다 바치던 나라였습니다. 연필조차 생산 못하고 국산품이 없으니 뭐든지 일본에서 수입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미국 원조가
2005-02-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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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논객(sionvoic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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끊어지면 다시 나라 땅을 주고 수입해야 할 판입니다. 국산품을 생산할 능력이 없이 영구적으로 일본에서 수입만 하는 그것이 비굴한 것입니다. 정말 당당해지려면 우리도 산업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기술 이전을 해와야 하는데, "보상"이면 기술 이전은 불가능합니다. 포항제철에 일본이 기술 이전해 주었지만
2005-02-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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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과현실(livein21c)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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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의 선택에 관해서 보면 우리나라 국민들처럼 정치를 좋아하는 나라는 드물 것입니다. 일제의 침략기에도 그랬고 해방기에도 그랬고 건국후에도 그랬죠. 이런 의미에서 초기에 박정희가 어쩔 수 없는 지지로 초선대통령이 될 수 있었지만 그러나 국민들은 이승만의 종신집권에 대한 거부를 표하고 있는 상황에서 군사구데타를 일으킨 박정희를 재선으로 인정할 수 없었기에 박정희는 부득불 체육관 대통령제로 돌아서게 됩니다.
2005-02-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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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논객(sionvoic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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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에는 안해 줍니다. 우리나라 정치는 명분론과 실용주의의 대결인데, 구한말 유생들은 명분론 때문에 나라를 빼았겼습니다. 국력을 키우지 못하면 그것이 비굴해지는 것입니다. 우리나라는 라디오도 생산해 내지 못하던 나라인데 삼성전자도 박정희 대통령이 일본에서 기술 이전해 오시며 이병철씨에게 거의 강제적으로 시켰던 것입니다. 산업첩보 전쟁의 개념이 없는 사람들이 떠드는 말에 속지 마세요. 실용주의가
2005-02-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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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과현실(livein21c)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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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수교에 있어서 몇 면만 더 늦추어 충분하게 준비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한일수교가 무려 반세기 가까이 지배당한 치욕에 대한 사죄를 받지 못한채, 다시 말해 민족적 원한을 풀지 못한채 그저 경제를 위한다고 돈 몇 푼에 수교를 맺는게 정당하고 보지 않습니다.
2005-02-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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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논객(sionvoic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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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여된 명분론은 위험한 것입니다. 사회과학적 사고가 결여되면 국제사회에서 뒤쳐져집니다. 노무현의 문제는 명분론으로 나라를 끌고 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구한말 시대로 후퇴하는 것입니다.
2005-02-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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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과현실(livein21c)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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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가 진정으로 국가를 생각했다면 프랑스처럼 철저하게 스스로 반민족행위자에 대한 친일청산과 더불어 자신의 친일행적에 대한 진지한 국민사죄를 한 다음에 지지를 바탕으로 한일수교에 나서야 했지만 그렇지 못했습니다. 박정희라도 철저하게 친일을 청산했다면 21세기까지 와서도 과거사 정리에 대한 혼란을 겪지 않아도 되는 것이었습니다.
2005-02-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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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논객(sionvoic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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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과현실님, 그것은 님이 국제정치를 모르셔서 하는 말입니다. 본래 보상은 승전국이 받게 되어있어요. 우리나라는 승전국이 아니기에 본래 보상을 요구할 권리조차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미국과 서독이 우리나라를 돕기 위해 제일 먼저 일본으로부터 기술 이전을 받는 방법을 제안했던 것입니다. 미국이 일본에게 보상을 요구하지 않는 대신 한국과의 경제 협력 압력을 넣었습니다. 그래서 성사가 가능했습니다.
2005-02-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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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논객(sionvoic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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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에는 미국에서 기계가 들어와도 한국 엔지니어들이 사용법 해독을 못해 사용을 할 수 없었습니다. 기술은 제일 처음 일본에서 이전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한일 외교 정상화를 서독과 미국이 도와준 것입니다. 1970년대에는 박정희 대통령이 직접 기술을 이전해 오셨습니다. 울산정유같은 중화학공업은 미국도 기술이전을 다른 나라에 안해 주는 핵심 기술인데 박정희 대통령이 직접 챙겨오셨습니다.
2005-02-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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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과현실(livein21c)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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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적 성과는 얻었지만 아직도 국가는 반민족행위자들을 처벌하지 못하고 있고 일본은 아직도 망언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그럴까요? 철저하게 나찌에게 협력했던 언론사를 비롯해 민간인들까지 척결한 프랑스의 경우 우리보다 훨씬 잘 삽니다. 그리고 70년대 세계 5위 경제대국인 아르헨티나는 과거사가 없는데도 몰락했습니다. 박정희 당시와 구한말은 상황이 다릅니다. 실용주의도 민족문제가 해결된 다음에 해도 됩니다.
2005-02-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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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논객(sionvoic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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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이들이 박정희 대통령을 평가할 때 산업첩보전에 대해 말하지 않는데, 이점에 대해서는 박정희가 최고의 지도자라고 미국 학자들은 평가합니다. 핵심산업기술은 공학박사를 미국에 유학 보내도 가져오지 못합니다. 그런데 박정희 대통령에게는 가져오는 비법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이 합법적으로 무료로 이전해 오신 산업기술로 지금 우리 민족이 먹고 살고 있는 것입니다.
2005-02-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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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논객(sionvoic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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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과현실님, 일본의 망언과 중국의 오만은 그만큼 한미 동맹이 약화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외교적으로 볼 때 한미 동맹을 약화시키는 그것이 친일입니다. 무엇이 한미동맹인가요? 그 어느나라라도 한국을 공격하면 즉시 미국의 공격을 받게 됩니다. 그래서 한미 상호방위조약은 모든 나라들이 부러워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승만 대통령의 외교의 승리요 우리 민족에게 준 큰 선물인데, 미련한 노무현은 이것을 스스로
2005-02-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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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논객(sionvoic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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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어차 버리려 하고 있습니다. 바로 그것이 친일인 것입니다. 안에서 아무리 명분론을 큰 목소리로 외쳐도 국제사회는 약소국에 냉정합니다. 그래서 실용주의가 결여된 명분론은, 사회과학적 통찰이 결여된 정책은 위험하다는 것입니다.
2005-02-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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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과현실(livein21c)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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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구나 지금은 경제적 성과가 일정이상 올라 있는 상황이기에 더욱 더 과거사를 털고 가도 되는 안정된 상황입니다. 그리고 영어로 쓰인 해독법을 영어를 몰라서 사용법 해독하지 못한게 아닙니다. 이승만도 영어를 잘하던 판국에 처음에는 일본에서 기계를 들여와야 한다는 것은 말이 맞지 않군요. 미군정하에서는 어떻게 했을까요? 바로 기술이전을 영어권에서 안해줬기 때문이겠죠. 일본은 6.25전쟁 때 돈 번 경험이 있었죠.
2005-02-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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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과현실(livein21c)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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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업기술을 베껴오는 과정은 박정희 능력이 아닙니다. 예로 삼성에 가서 물어 보시죠. 박정희의 능력으로 기술을 가졌왔는지요. 일본의 망언과 중국의 망언이 한미군사적동맹이 약화됐기 때문이라고 보기 힘듭니다. 그만큼 중국이 성장했고, 일본은 이미 상당부분 미국의 채권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다만 일본의 경우에는 군사적 금제에서 벗어나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2005-02-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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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과현실(livein21c)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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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으로 생각해서 한국이 보다 강해져서 미국의 간섭적인 동맹이 아니라 동반자적인 동맹관계를 설정하는게 더 낫지 않을까요? 물론 노무현의 외교력에 대해서는 비판적 입장입니다. 박정희 만큼도 미국의 힘을 이용할 줄 모르니까요. 그렇지만 정권은 그저 5년입니다. 국민들 입장에서는 보다 강한 한국을 만들기 위해서는 친일청산에 있어 과거사에 대한 고백과 화합이 필요한 때입니다. 고마웠습니다. 생업을 위해 자야겠군요.
2005-02-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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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과현실(livein21c)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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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공유점을 찾지는 못했지만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2005-02-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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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논객(sionvoic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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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전자는 박정희가 이병철을 불러 언제까지 설탕장사만 할 것이냐고 다그치면서 세우라고 해서 세워진 것입니다. 기술 없고 자본 없어서 못한다고 하자 기술 이전해 주고, 차관 끌어주면서 시킨 것입니다. 그런데, 중화학공업처럼 박정희 대통령이 외교로 직접 이전해 오신 기술들이 있습니다. 좋은 토론이었습니다. 그럼 다음에 또 뵙겠습니다.
2005-02-13 |
첫댓글 이차세계 대전이 있던 불과 짧은 기간동안의 반역과 한세대가 나서 장성한 어른이 되는 36년간의 행위를 동일선상에 놓고 보자는 저들이 참으로 한심하고 불쌍하군요. 지금 그나마 우리가 살아 있을 때 이러한 잘못된 것들을 바로 잡지 못한다면 앞으로 오래동안 우리 후손들은 왜곡된 시각으로 바라보며 살게 되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