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제가 무엇이었는지 모르겠는데 ‘사랑아 나는 통곡한다’로 제목을 붙인 영화를 텔레비전 주말의 명화 시간에 본 적이 있다.
스승의 미망인 클라라 슈만에 대한 브람스의 사랑이야말로 이 영화 제목에 걸맞는 것이었다. 브람스는 그녀를 생애 내내 열렬히 사모했지만 한 순간도 절제의 벽을 넘어서지 않는 순수한 사랑을 했다. 평생을 독신으로 살고 그녀가 죽자 1년도 못 되어 따라 죽으면서….
베토벤이 그러했듯 브람스도 3류 연주자의 아들로 빈민가에서 태어나 아주 어릴 때는 아버지한테서 바이올린과 첼로를 배웠다. 아들의 재능이 범상치 않음을 간파한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여덟 살 때부터는 당대의 일급 연주자 코셀에게 가서 피아노를 배웠다. 그는 열다섯 살 때부터 작곡을 시작했고, 저녁에는 살롱에서 피아노 연주를 하며 일찍부터 가계를 책임져야만 했다.
브람스는 스물한 살 때 바이올리니스트 레메니와 함께 연주 여행을 떠나게 되는데, 레메니는 브람스를 키워 줄 요량으로 요아힘이라는 유명한 바이올리니스트를 만나게 한다. 그러나 요아힘은 브람스가 피아노보다 작곡에 더 재능이 있다는 걸 발견한다. 그래서 대작곡가 슈만을 찾아가 곡을 보여 드리라고 부추기며 소개까지 해, 브람스는 슈만의 집 문을 두드리게 된다.
첫 만남이 이루어졌을 때 브람스가 스물하나, 클라라 슈만이 서른다섯, 로베르트 슈만이 마흔넷이었다. 브람스가 자작곡을 피아노로 막 연주하자 슈만은 “잠시만!” 하고 소리친다. “아내가 이 곡을 들어야겠어.” 연주가 끝나자 슈만은 감동해 눈물을 글썽인다. 클라라도 재능 있고 핸섬한 브람스에게 대번에 호감을 갖게 되고, 브람스는 우아하고 아름답고 지적인 슈만 부인에게 완전히 매료된다. 그날 이후 슈만은 음악계의 유명인사와 저명한 악단에 브람스를 소개하며 선배 겸 스승 노릇을 성실히 한다.
슬픈 사랑의 역사는 다음해 2월 26일부터 시작된다. 브람스가 작곡가로서 유명세를 막 누리기 시작한 무렵, 로베르트 슈만은 정신병을 앓게 되는데 그날 라인강에 뛰어든 것이었다. 그 소식을 듣고 브람스는 만사 제쳐두고 정신병원으로 달려가 스승을 면회한 뒤 사모님을 대신해 아이들을 돌본다. 피아니스트였던 클라라는 계획된 연주 여행을 떠나지 않을 수 없었는데, 입원비와 아이 여섯의 양육비를 벌기 위해서였다. 더구나 뱃속에는 일곱번째 아이가 자라고 있었고….
클라라는 비통한 마음으로 피아노를 연주한다. 아버지가 결혼을 한사코 반대해 법정에까지 가서 이룬 사랑인데 남편은 정신병원에 갇혀 있는 것이다. 브람스는 그런 클라라에 대한 사모의 정에 연민의 정까지 가세하지만 내색할 수는 없는 노릇. 그는 클라라를 위해 위문편지를 보내기도 하고 연주중인 곳을 찾아가 바람을 쏘이게 하면서 정성을 다해 위로한다. 당신을 진심으로 존경하고 사랑하고 있다는 속마음을 숨긴 채.
하지만 입원 2년 뒤 슈만이 죽게 되자 브람스의 편지는 내용을 조금 달리한다. “사랑하는 클라라, 제가 당신을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지, 당신을 위해 애정 어린 행동을 얼마나 하고 싶어하는지 당신은 모를 겁니다”라는 편지를 마침내 쓴 것이다. 클라라가 브람스의 이런 마음을 내치지 않은 것은 남편의 곡과 함께 브람스의 곡도 계속 연주한 것이 증명한다. 브람스는 죽은 남편과 자신에 대한 클라라의 고뇌를 십분 느끼면서 인생에 대한 깊은 이해를 쌓아갔고, 곡 또한 나날이 충실해진다. 그러나 사랑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당대 음악사에 브람스의 시대를 만들어 가면서도 자신은 결혼 성사에 몇 번이나 실패한다. 클라라에 대한 사랑이 날이 갈수록 깊어져 사나흘에 한 번씩 편지를 보내고 간혹은 가서 만나는 것으로 달래고 있었으니 젊은 여성과의 로맨스가 성사될 리 없었다. 브람스에 대한 클라라의 마음은 자식들에게 남기는 유서 형식으로 쓴 일기 속에 담겨 있다.
“얘들아, 내가 사랑한 것은 그의 젊음이 아니었다. 내 애정에는 허영도 아부도 없어. 그의 맑은 정신, 놀라운 재주, 고귀한 영혼을 사랑했지. 나는 그의 자질을 오랜 세월을 두고 아꼈다. 얘들아, 내가 죽더라도 그의 우정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늘 소중히 하렴.”
40여 년 충실한 벗이고 연인이고 범접할 수 없는 사모님이었던 클라라는 1896년 뇌일혈로 쓰러져 숨을 거둔다. 부음을 듣고 큰 충격을 받은 브람스는 기차를 잘못 타 36시간 만에 장지에 도착해 남편의 묘지 곁에 막 묻히려는 클라라의 관을 보고 통곡한다. 삶의 의욕을 완전히 잃은 그도 11개월 뒤에 숨을 거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