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리전의 명장 김유신
(金庾信 595∼673 (진평왕 17∼문무왕 13))
우리나라 삼국시대를 주름잡았던 장수들중에 신라를 대표할만한 장수를 꼽으라면 아마도 김유신장군이 가장 많이 이야기 될 것이다. 하지만 김유신 장군에 대해서는 신화적인 그의 성장과정이나 계백장군과 벌인 황산벌 전투 외에 그리 잘 알려진 편이 못된다.
신라의 여러장군 중에 왕족이 아니면서도 유일하게 죽어서 왕으로 봉헌된 인물이었던 김유신, 과연 그는 역사에 있어서 어떠한 업적을 남겼으며 신라에는 어떠한 존재였기에 가야 유민 출신이었으면서 고 왕으로 추봉되었던 것일까?
김유신 장군은 김해 김씨로 가야국(伽倻國) 시조 김수로왕(金首露王)의 12대 손이라 전하며, 증조부는 금관국(金官國) 마지막 왕인 구형왕(仇衡王)이니 가야왕족임은 분명하다. 그리고 금관가야가 신라에 병합되었지만, 김유신의 할아버지인 무력이 백제군과 전투를 벌여 1만명을 전사시켜, 아버지대에 도둑을 임명받는등 지역세력으로서는 여전히 건제하였다.
<- 김유신 장군묘 둘레석에 부조된 12 지신상 중 호랑이상
무인의 묘답게 무기를 들고 있는 모습이다. 그러나 일반 왕묘에는 갑주를 입은 12지신상이 조각되는 반면, 비록 왕으로 추봉되었지만, 장군릉이기 때문에 평복차림으로 새겨졌다.
그는 15세 때 화랑이 되어 중박산 석굴에서 수련 중 도인을 만나 삼국통일의 대의를 품게 되었다는 설화는 너무도 유명하다.
그가 처음으로 출전한 전투는 진평왕 51년 629년에 있었던 고구려와 벌인 낭비성(娘臂城) 전투로 당시 나이는 34세였다. 당시 전세는 신라에게 매우 불리하여 군사들이 사기가 크게 떨어졌음은 물론이고 사망자도 대단히 많았다. 따라서 전세를 역전시키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사기진작이 가장 중요하였다. 그런데 사기진작을 위해서는 적장과 맞대결을 펼쳐 목을 베어 오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었다. 문제는 누가 앞장서 그 위험한 일을 하느냐는 것인데, 김유신은 투구조차 벗고 죽을각오로 적진을 돌파하여 고구려의 장수급 무장의 목을 베어 오는데 성공하였다.
이에 고구려 진영은 크게 흔들렸고, 사기가 오른 신라군은 일시에 공격하여, 무려 5000명을 전사시키고 1000명을 포로로 잡았다. 이렇게 고구려 군이 급작스럽게 무너지자 낭비성은 성을 지킬 생각도 안하고 모두 나와 항복하고 말았다. 순간의 판단이 최소한의 피해로 최대의 성과를 올린 셈이다. 이렇게 김유신 장군은 대를 위한 소의 희생정신을 늘 강조하였으며, 이것이 군중심리에 미치는 영향을 잘 알고 있었다. 검과 창 그리고 화살이 난무하는 고대전투현장에서, 수천수만 명이 단하나의 마음과 목적으로 움직이게 할 수 있는 힘은 매우 중요하다.
645년에 있었던 일화에는, 병사들의 마음을 헤아려 인화단결을 이끌어 내는 김유신의 능력이 잘 나타나 있다.
644년에는 집안의 배경은 물론 그동안 전쟁터에서 세운 크고 작은 공로로 인해 상장군(上將軍)에 올라 있었으며, 백제의 가혜성(加兮城) 등 7개 성을 공격하여 이기고 돌아오고 있었다. 그런데 백제가 신라의 매리포성(買利浦城)을 공격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그길로 군사를 돌려 백제군을 막아내고 2000명을 전사시켰다.
이렇게 두 번의 큰 승리를 거둔 김유신은 644년 9월에 출전하여 무려 8개월만인 다음해 645년 3월에야 집으로 돌아올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또 다시 백제가 군사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하였다. 비록 연전연승을 거두고 있었던 신라군이었지만, 수차례 전투에서 많이 지쳐 있었고 무엇보다도 8개월 동안이나 고향을 떠나 있었기 때문에 군사들이 사기도 많이 떨어져 있었다.
하지만 김유신장군은 불과 집에서 50걸음이 미치지 않은 곳에서 말을 멈추고 부하장수로 하여금 우물물만을 떠 올리게 하였다. 그리고 그 물을 마시며 "우리 집 물맛은 예나 지금이나 여전하다." 라는 유명한 말을 남기고 그 길로 전쟁터로 향하였다. 그야말로 생사고락을 함께 하겠다는 정신을 실천한 것으로, 부하들 역시 한결같은 마음으로 따랐다. 그리하여 백제는 신라군의 사기 충만함을 보고 공격을 보류할 수밖에 없었다. 이처럼 김유신 장군이 인화단결을 이끌어 냈던 가장 큰 힘은 먼저 실천함에 있었다.
그리고 그의 심리전이 가장 빛났던 것은 647년 선덕여왕 16년 비담(毗曇)과 염종(廉宗)이 일으킨 반란을 토벌 할 때 였다.
그 때 신라는 선덕여왕이 왕에 올랐다는 이유로, 왕권이 크게 위협받고 있었으며 이웃 백제와 고구려의 공격도 극에 달하고 있었다. 이 같은 분위기에서 비담과 염종역시 여왕을 폐하고자 반란을 일으켰지만,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그러나 선덕여왕에 이어 진덕여왕이 오르면서, 정치적 불안은 지속되었고 반란에 실패한 비담과 염종 등은 명활성을 점령하여 무려 1년간이나 신라군과 대치상태에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한밤중에 유성이 신라 궁궐이 있던 월성에 떨어지자, 여왕이 패할 징조라며 병사들은 크게 동요하였고, 진덕여왕역시 불안감에 떨어야 만 되었다. 하지만 김유신은 이는 단지 자연현상이라고 일축하며, 모든 것이 사람마음 먹기 나름이라는 내용의 간언을 올려 여왕의 마음을 안정시켰다. 그리고 연에 불씨를 붙여, 마치 유성이 다시 하늘로 올라가는 것 같이 보이게끔 하였다. 그리고 이튿날 사람들에게 거리에 말을 퍼뜨려 '어제밤에 떨어졌던 별이 위로 올라갔다.' 하여 반란군 진영을 동여시켰다.
그리고 백마를 잡아 별이 떨어진 곳에 제사를 지냄으로써 군사들의 마음을 하나로 묶는데 성공하였다. 이후 반란군들은 한순간의 공격으로 제압당하고 말았다. 이처럼 신라 왕조를 수호한 김유신이었지만, 대외적인 업적은 대부분 백제와의 전투에서 얻어진 것이며 전세가 불리할 때면 어김없이 대를 위한 소의 희생, 바둑으로 말하면 사석작전을 썼다.
비담과 염종이 반란을 일으키던 해도, 백제군의 공격이 매우 거세어서 김유신은 군사 1만 명으로도 힘겨운 싸움을 벌였지만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었다. 이 때 김유신은 비녕자라는 젊은 화랑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오늘의 사태가 매우 급박하다. 그대가 아니면 누가 능히 군중의 마음을 격려시키겠는가?" 라고 하였다. 신라 화랑에게 있어서 장렬한 죽음은 영광으로 받아 들여졌음으로 비녕자는 주저 없이 동료화랑들과 함께 적진에서 힘껏 싸우다가 전사하고 말았다. 결국 이러한 희생 작전은 성공하여 백제군 3천 명을 죽이고 승리하기에 이르렀다.
또 서기 660년(태종 무열왕 7)통일전쟁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자, 김유신 장군은 가장 먼저 백제 영토를 넘어섰다. 삼국통일에 있어서, 신라와 당이 연합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대부분의 실질적인 전투는 신라의 몫이었다. 대표적인 전투가 당나라가 아직 군사를 투입하기 전에 벌어진 악성전투였는데, 이 전투에서만 무려 2만명의 백제군을 사망시켰으며 9천명을 포로로 잡았다. 그리고 진례성으로 진격하여 역시 9000여 명을 전사시켰는데, 이러한 대승에는 압량주에서 거둔 승리가 발판이 되었다.
김유신은 대야성을 백제에게 빼앗긴 것을 만회하기 위해 압량주(押梁州 : 지금의 경상북도 경산)에서 비밀리에 군사를 양성하고 있었다. 그런데 백제는 신라 도읍 경주를 기습할 목적으로 수천여명의 별동대를 침입시키기에 이르렀다. 그러자 김유신은 압량주에서 훈련 중이던 군사를 거느리고 이들을 막게 되었다. 하지만 김유신은 전면전보다는 유인작전을 펼쳤다. 이를 위해 거짓으로 패하는 척 하며 백제군을 옥문곡이라는 계곡 속으로 끌어 들였다.
상대방의 심리를 역이용한 심리전이 대표적인 전술이긴 하였지만, 역시 상대방이 이기고 있다고 믿게끔 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희생은 불가피한 전술이었다. 그리고 김유신은 이러한 희생을 바탕으로 백제군 장수 8명의 목을 베고 1천 명을 참살시켜, 백제군의 기습을 막는데 성공하였다. 이후 계백장군과 황산벌에서 벌인 일전역시 관창이란 어린화랑의 희생을 발판삼아 승리를 거두었음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이처럼 심리전에 능한 김유신이었지만, 당나라가 평양성을 공격할 당시 그 군량미 수송을 담당하는 장수로 전락하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김유신은 고구려 백제와의 전쟁이 끝난 후에는, 백제·고구려의 옛 땅을 차지한 당나라의 소정방이 이에 맞서 총력을 발휘하여 당에 대항했다. 하지만 당시에 이미 70세가 넘은 고령이어서, 직접적인 전투지휘보다는 정신적 지주이자 국왕의 조언자로서의 역할을 하였다.
672년 석문(石門)벌판의 전투에서 신라군이 당나라에 참패했을 때 문무왕이 그에게 자문을 구한 사실이 기록에 나타난다. 그는 일찍부터 당나라의 대국주의 야욕을 간파하고 그에 대비하고 있었다. 660년에는 그가 백제군의 결사대를 격파하느라 당나라군과의 합류 지점에 늦게 도착하자, 당나라의 소정방(蘇定方)은 이를 빌미로 신라 장군의 참수(斬首)를 명하여 신라군의 통수권을 장악하려 하였다.
이 때 그는 "당의 장군이 황산벌의 싸움을 보지 못하고 늦게 왔다고 죄를 주려는 것인데, 죄 없이 욕을 받을 수는 없다. 반드시 먼저 당군과 싸움을 결정한 다음에 백제를 부수겠다." 고하여 소정방의 시도를 단호하게 배격하였다.
삼국통일 이후 벌어진 신라와의 전쟁에서 연패한 소정방은 신라는 상하가 굳게 결속되어 작지만 쉽게 정복할 수 없다고 본국에 보고하였다. 그 이면에는 언제나 솔선수범이 선행되었으며, 신라 민중의 마음을 헤아리고, 귀족자제들의 희생을 아낌없는 희생을 통해 평민신분이었던 군사들의 사기를 진작시켰던 김유신 장군의 전술 아닌 전술이 있었다.
연속되는 출정 중에 가족들이 기다리는 집 앞을 돌아보지도 않고 지나친 일이나, 혹독한 추위 속의 행군에 군사들이 지치자 어깨를 드러낸 채 앞장섰다는 일화는 그의 진면목을 보여주기에 충분하다. 또 그리고 아들인 원술이 당나라군과의 전투에서 패배하고 도망해 오자 왕에게 참수형에 처하라고 건의하였을 정도로 어느 누구도 예외의 대상은 될 수 없었다.
이렇게 백제를 병합하고 당나라의 한반도 침략 야욕을 꺽은 김유신은 서기 673년 79세의 나이로 천수를 누리고 사망하게 된다. 그리하여 그와 함께 전쟁터를 누비기도 하였던 문무대왕은 김유신장군의 공적을 치하하여 태대각간(太大角干)의 작위를 주었고, 죽은 뒤에는 흥무대왕(興武大王)으로 추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