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새천년 민주당 대통령 후보, 여론조사 방식으로 단일화
2002년 대통령 선거를 위한 새천년 민주당의 대통령 후보 경선은 미국의 예비선거제를 변형한 국민경선제를 통해 이루어졌다. 노무현은 이인제, 한화갑, 정동영, 김근태, 김중권, 유종근 등의 후보와 함께 경선에 참여하였다. 전국을 순회하면서 치루어진 국민경선에서 노무현 후보는 울산에 이어 광주경선에서 승리하면서 전국적으로 노무현 바람(노풍, 盧風)을 일으켰고 결국, 경선 초기의 "이인제 대세론"를 극복하고 경선에서 승리하였으며 4월 26일 대선 후보로 확정되었다.
그러나 후보 당선 후, 김영삼 전 대통령을 만난 자리에서 1992년 대통령 선거 때 받은 손목시계를 보여 주며, "아직까지도 소중히 간직하며 차고 다닌다"고 말한 "YS 손목시계 사건"을 통해 국민적 비난을 받고 급속히 지지율이 떨어졌다. 그리고 6·13 지방선거에서 민주당이 패배하자 "노무현 책임론"이 불거졌고 당내에서 후보교체론이 일어났다. 이후 2002년 축구 월드컵의 영향으로 국민통합21 소속 정몽준의 인기가 급상승하자 당내에서 후보단일화협의회(약칭, 후단협)을 중심으로 "후보단일화" 요구가 강하게 생겨났고, 11월 24일에 여론조사 방식을 통해 우여곡절 끝에 노무현으로 후보단일화가 이루어졌다.
2002년 12월 19일 대통령 선거에서 한나라당의 이회창 후보를 이기고 당선되었으며, 2003년 2월 25일 제16대 대한민국의 대통령으로 취임하였다. /워키백과
[1991년] 영국 그룹 퀸의 리드싱어 프레디 머큐리(Mercury, Freddie, 1946.9.5~1991) 사망
프레디 머큐리(Freddie Mercury, 1946.9.5~1991.11.24)는 영국의 대중 음악 가수이다. 퀸의 리드싱어로 잘 알려져 있다.
프레디는 탄자니아의 잔지바르(Zanzibar) 섬에서 태어났으며, 본명은 Farrokh Bulsara이다. 인도의 봄베이의 기숙사학교를 10년간 다녔으며, 그곳에서 프레디(Freddy)라는 별명을 얻었다. 17-18세 때 가족을 따라 런던으로 이주해 서 그곳에서 1969년 그래픽디자인 학위를 땄다.
1970년 이미 로저 테일러와 브라이언 메이가 만든 밴드에 합류하여, 그 이름을 퀸(Queen)으로 바꾸고 활동했다.
넓은 음역, 오페라적인 창법이 특징적이며, 팝 음악계에서도 가장 기교가 뛰어난 가수중 한 명으로 꼽힌다. 또한 퀸의 히트곡 Bohemian Rhapsody, Somebody to Love, We Are the Champions 등을 작곡하기도 했다.
퀸 활동 외에 그는 두 장의 솔로앨범을 냈다. Mr. Bad Guy (1985년) 와 Barcelona (1988년)이 그것이다.
1991년 11월 24일 런던에서 에이즈로 사망했다.
대표곡으로 〈Bohemian Rhapsody〉, 〈We Are The Champions〉, 〈Love of My Life〉, 〈Crazy Little Thing Called Love〉, 〈Somebody to Love〉 등이 있다. /위키백과
[1979년] YWCA 위장결혼 사건
← YWCA 가두시위에 참석했던 함석헌씨
계엄하인 1979년 11월 24일 민주인사들이 결혼식을 가장, 서울 명동 YWCA강당에 모여 `통일주체국민회의에 의한 잠정 대통령 선출저지 국민대회`를 개최하고 유신철폐와 계엄해제를 요구하며 가두시위를 결행했다.
12월 27일 계엄사는 민주주의와 민족통일을 위한 국민연합, 해직교수협의회, 민주청년협의회 회원 500여명이 명동 YWCA강당에 모여 최규하, 김종필의 유신정부 퇴진 및 건국민주내각 조직과 공화당, 유신정우회, 통일주체국민회의 해산을 요구한 뒤, 유신대통령을 다시 선출하는 것은 국민에 대한 반역이며 우리나라의 민주화에 대한 외부세력의 개입을 일절 거부한다는 성명을 발표하고 가두시위를 벌였다고 발표했다.
이 사건으로 함석헌, 박종태, 양순직, 김병걸 등 96명이 계엄포고령 위반으로 검거됐다./조선
[1966년] 아시아개발은행(ADB) 창립 총회
1966년 11월 24일 아시아 지역의 경제성장, 경제개발 촉진, 경제협력 증진을 위해 아시아개발은행(ADB: Asian Development Bank)이 설립됐다.
1963년 아시아극동경제위원회에서 ADB설립을 제안하고, 1965년 마닐라에서 설립협정에 동의해 이날 설립된 ADB는 1966년 12월부터 본격적인 활동에 들어갔다. 우리나라를 포함 57개국이 가입했고, 본부는 필리핀 마닐라에 있다.
주요구성은 최고정책기관인 총회, 업무운영을 관여하는 이사회, 총재, 총재의 지휘하에 업무부문으로 이루어졌다. ADB의 주요업무는 가입국에 대한 기술원조, 실태조사, 프로젝트에 대한 융자, 대출 등이다. 아시아개발기금의 재원은 자본금, 아시아개발은행채의 발행에 의한 차입금, 다목적 특별기금, 기술원조 특별기금. 아시아개발기금이 있다. /조선
[1963년] 케네디 대통령 암살범 오스왈드 피살
← 잭 루비(오른쪽)가 오스왈드(가운데)를 쏘는 순간. 사진은 1964년 퓰리처상 수상작으로 선정됐다.
케네디가 암살되고 이틀 후인 1963년 11월 24일, 살해 용의자 오스왈드가 경찰들이 버젓이 지켜보는 앞에서 피살됨으로써 케네디 암살사건은 영원한 미궁 속에 빠졌다.
오스왈드는 군형무소로 옮기기 위해 경찰서 지하실을 나오던 중이었다. 오스왈드는 ‘나는 희생양’이라고 주장하다 죽었지만 사건을 조사한 워런 조사위원회는 그의 단독범행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모든 게 의혹투성이였다.
정밀조사 결과 오스왈드에게는 발포 흔적이 없었고, 조잡한 구식총으로는 80m 떨어진 건물 6층에서 단 6초 만에 3발을 발사해 이동 중인 케네디를 명중시킨다는 것은 명사수라도 사실상 불가능했다. 더구나 체포 초기 12시간 동안의 조사기록이 없어 의혹을 부채질했다.
케네디의 복수를 위해 오스왈드를 살해했다고 큰소리친 나이트클럽 운영자 잭 루비는 댈러스에서는 자신의 목숨이 위험하다며 워싱턴에서의 조사를 원했지만 결국 사형선고를 받고 수감 중 1967년에 심한 기침과 구토 증세를 보이다 의문의 죽음을 맞았다.
[1956년] 한국-이탈리아 국교 수립
1956년 11월 24일 한국과 단독수교를 맺었으며 상호 상주공관이 설치되었다. 북한과는 유럽 국가 중 최초로 2000년 1월에 수교하였으며 이후 많은 유럽 국가들이 이를 따랐다. 주한국 이탈리아대사관에서 겸임한다.
한국과의 협정체결 현황은 1961년 3월 특허권·상표권 보호에 관한 각서교환, 1965년 3월 무역·문화협정, 1975년 사증 및 사증수수료 면제에 관한 각서 교환, 1982년 5월 경제협력협정에 합의하였다. 이어 1984년 2월 과학 및 기술협력협정, 1989년 1월 투자증진 및 상호보호 협정, 이중과세 및 탈세방지 협약, 2000년 3월 관광협력협정, 2005년 3월 한·이 사회보장협력협정에 합의하였다. /naver
[1950년] 네덜란드군, 한국참전
네덜란드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가 한국 군사원조를 결의하자 1950년 7월 16일 우선 인도네시아에서 활동 중이던 구축함 1척(Evertsen)을 파견하기로 결정하였다. 이 무렵 유엔사무총장이 지상군의 파병을 요청하자 네덜란드는 참전지원자와 언론의 강력한 요구에 따라 8월 28일 보병 1개 대대를 편성하여 늦어도 10월까지 파병하기로 결정하였다. 네덜란드는 9월 9일 지원자 중 646명을 선발하여 대대를 창설하였고, 대대장에 오우덴(Den Ouden) 중령이 임명되었다.
네덜란드 대대는 10월 26일 네덜란드를 출발하여 1개월만인 11월 23일 한-미 고위장성과 시민들의 열렬한 환영 속에 부산에 상륙함으로써(C중대는 1951년 5월 25일 파견) 6.25전쟁에 참전하게 되었다.
[1950년] 맥아더장군, 한국전에 종전 총공격을 명령
9월15일 유엔군은 인천상륙작전에 성공함으로써 북한군의 허를 찌르고 패주하는 북한군을 추격해 9월28일에 서울을 수복하고 10월1일에는 38선을 돌파했다. 유엔총회도 10월7일 38선 돌파와 한국통일을 결의하고 한국통일정부 수립 관리기구로서 「유엔한국통일부흥위원단(UNCURK)」을 발족시켰다. 유엔군은 「38선을 넘으면 중공군이 한국전에 참여할 것」이라는 중공측의 경고(10.3)에도 불구하고 계속 북진, 10월19일에 평양을 점령하고 11월16일에는 한만(韓滿)국경 근처까지 진격했다. 중공군은 10월12일부터 참전했으나 10월26일 처음으로 국군 2군단과 대규모로 접전했다. 중공군의 참전에도 불구하고 11월24일 맥아더사령관은 전쟁조기종결을 위해 유엔군의 총공격을 명령했으나 유엔군은 청천강 유역에서 중공군에게 대규모로 역습을 당해, 11월26일부터 패퇴를 거듭했다. 12월2일 평양, 12월8일 원산에서 철수한 유엔군은 12월30일에는 38선 이남으로, 그리고 다음해(51년) 1월4일에는 서울마저 포기할 수 밖에 없었다. 이제 전쟁은 미국과 중공의 대결로 또다시 확대되었다.
[1949년] 한국, 유엔식량농업기구(FAO)에 가입
1949년 11월 24일은 한국이 국제연합식량농업기구(Food and Agriculture Organization of the United Nations)에 가입한 날이다.
1943년 5월 미국의 프랭클린 D. 루스벨트(Franklin D. Roosevelt) 대통령의 제창에 의해 개최된 식량농업회의를 모체로 하여, 1945년 10월 캐나다 퀘벡에서 소집된 제1회 총회에서 34개국의 헌장서명으로 발족했다. 모든 사람의 영양기준 및 생활향상, 식량과 농산물의 생산 및 분배 능률증진, 개발도상국 농민의 생활상태 개선, 이를 통한 세계 경제발전에 기여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주요 활동은 세계농업발전 전망에 관한 연구와 각종 기술원조 계획을 이행하고, 식량농업·임산물·어업 등에 관한 통계연감 발행하며, 식량의 부족과 잉여에 관해 세계적 규모로서 조정한다. 이를 위해 국제연합과 더불어 식량이 풍부한 지역의 과잉식량을 모아서 기아와 빈곤에 시달리는 지역에 분배하는 WFP(World Food Program : 세계식량계획)을 수행하고 있다.
회원국은 180개국이며, 한국은 1949년에 가입했으며, 1953년에 [FAO와 대한민국 간의 기술원조에 관한 기본협정]을 체결했고, 동시에 [FAO 국제식물보호협정]에 가입했다. empas /Google
[1929년] 프랑스의 정치가, 언론인, 의사 클레망소(Clemenceau, Georges, 1841~1929) 사망
우예롱앙파레드 출생. 처음에는 의사가 되었으나, 1871년 파리코뮌이 성립되기 직전 파리 제18구(區) 몽마르트르의 구장으로 선출되어 그것을 기반으로 정계에 투신, 1871년 7월 급진공화당원으로 의회에 진출하였다. 1876년 18구 대표의원에 선출되었고, 그 후 1885년 3번째로 의회에 진출하였다. 1893년 파나마사건으로 한때 정계를 떠나 있었으나, 1894~1906년의 드레퓌스사건에서 드레퓌스의 옹호를 위해 힘쓴 결과, 개인의 명예회복과 함께 1903년 상원의원이 되었다.
1906년 3월 사리앙 내각의 내무장관, 이어서 총리 겸 내무장관이 되어 8시간 노동제 ·생활개선 ·민주제화 등을 공약하는 한편, 영국 ·러시아 양국과의 협조체제를 확립하였다. 그러나 1909년 총리직을 사임하고, 남아메리카 여러 나라를 편력하면서 정부에 대한 공격을 늦추지 않았다.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상원의 육군위원장으로 활약, 1917년 불리한 전세에서도 총리 겸 육군장관에 취임하여 반역자나 패배주의자들을 즉결재판에 넘겨 총살하는 등 강경책으로써 프랑스를 승리로 이끌었다.
전쟁 후에는 파리강화회의에 프랑스 전권대표로 참석하였고, 미국 대통령 W.윌슨의 민족자결주의에 대립하는 보복주의를 취하였으며, 베르사유조약을 강행하였다. 1920년 1월 대통령선거에 입후보하였으나 낙선하였다. 그 후 총리직을 사임, 정계에서 은퇴하여 문필생활을 하면서 만년에는 고독한 가운데 생애를 마쳤다. 저서로 《데모스테네스 Demosthenes》(1926) 《내 사색의 황혼에 Au soir de la pensee》(1927) 《승리의 명예와 비참 Grandeurs et miseres d’une victoire》(1930) 등이 있다. /naver
[1913년] 소설가 김동리(金東里) 출생
"무슨 일에서건 지고는 못 견디던 한국 문인 중의 가장 큰 욕심꾸러기, 어여쁜 것 앞에서는 매양 몸살을 앓던 탐미파 중의 탐미파, 신라 망한 뒤의 폐도(廢都)에 떠오른 기묘하게 아름다운 무지개여... " - 서정주, 묘비문 중에서
1913년 11월 24일 태어남 / 1995년 6월 17일 죽음
김동리는 인간에 대한 깊은 통찰을 바탕으로 삶의 근원적인 의미를 파헤치고 종교에 접목된 인간상을 탐구하는 작품을 쓴 소설가이다. 경주에서 태어나 대구 계성중학교에서 2년 공부했고, 서울에서 경신고등학교를 중퇴했다. 김달진·서정주 등 <시인부락〉 동인들과 사귀면서 시를 쓰기 시작하여 1933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백로>가 당선되었다. 소설 작품으로는 1935년 <조선중앙일보> 신춘문예에 소설 <화랑의 후예>가, 193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소설 <산화 山火>가 당선되었다. 8·15해방 후 민족주의 문학진영에 가담해 우익의 입장을 대표했고 좌익인 조선문학가동맹에 반대해 1946년 조선청년문학가협회를 결성하고 초대회장을 역임했다. 유진오와 ‘순수논쟁’(1939~40), 김동석과 '문학기능논쟁'(1948), 이어령과 '문학논쟁'(1957)을 벌여 화제를 모았다. 초기작품에는 한국인의 운명과 관련된 신비적·허무적 색채가 골격을 이루었고, 8·15해방 후에는 삶의 근원적 의미 탐구를 통한 인간성 옹호와 종교적 소재를 바탕으로 한 인간의 본질 추구에 주력했다. <사반의 십자가>·<황토기>·<무녀도>·<등신불> 등이 대표작이다./브리태니커
[1911년] 무용가 최승희 출생
← 서울 출생의 세계적인 무용가 최승희씨
최승희(崔承喜)의 생몰(生沒)이 정확히 알려진 것은 2003년 초 북한 TV가 애국열사릉에 있는 그의 묘비화면을 보도하면서였다. 묘비에는 ‘1911년 11월 24일생, 1969년 8월 8일 서거’라 쓰여 있었다.
최승희를 무용으로 이끈 것은 16세에 처음 접한 일본 근대무용의 선구자 이시이 바쿠의 서울공연이었다. 이시이를 따라 도일, 문하생으로 3년간 무용을 배우고 돌아온 최승희는 1930년 서울에서 제1회 신작발표회를 갖고 한국 현대무용의 태동을 알렸다. 다시 일본으로 건너간 최승희는 무용가로서의 최절정기를 그곳에서 맞아 부와 명예를 한꺼번에 거머쥐었다.
1938년부터 시작된 3년간의 해외공연은 가는 곳마다 대성황을 이뤄 그에게 ‘동양의 진주’라는 찬사가 쏟아졌다. 미국·유럽·남미 등 각국을 순회하며 마사 그레이엄과는 합동공연을 했고 찰리 채플린, 피카소, 장 콕토 등과 친교를 맺었다.
그러나 1941년 말부터 광복 때까지 계속된 일본군 위문공연은 그에게 낙인 같은 ‘친일’ 딱지를 붙여주었고 이후 그는 남북 양쪽에서 외면당하는 신세가 됐다. 친일 전력은 그를 월북으로 내몰았고, 북한 역시 그를 한때 인민배우로 이용하다 반혁명예술가로 몰았다./조선
[1902년] 소설가, 영문학자 주요섭(朱耀燮) 출생
1902. 11. 24 평양~1972. 11. 14 서울.
목사인 아버지 공삼(孔三)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평양에서 자랐다. 시인 주요한은 그의 형이다. 1915년 평양숭덕소학교를 졸업한 뒤, 1918년 숭실중학교 3학년 때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東京] 아오야마학원[靑山學院] 중학부 3학년에 편입했다. 3·1운동 후 귀국하여 지하신문을 발행하다가 출판법 위반으로 10개월 동안 옥살이를 했다. 1920년 중국으로 건너가 쑤저우[蘇州]에 있는 안세이 중학[安晟中學]을 거쳐 1921년 상하이[上海]에 있는 후장대학[滬江大學] 부속중학을 졸업하고, 1927년 후장대학 교육학과를 졸업했다. 이듬해 미국으로 건너가 스탠퍼드대학교 대학원에서 교육심리학을 전공했다. 1929년 귀국 후 1931년 동아일보사에 입사해 〈신동아〉 주간으로 있었다. 1934년 베이징[北京]에 있는 푸렌대학[輔仁大學] 교수를 지냈으나 1943년 일본의 대륙침략에 협조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추방령을 받아 귀국했다. 8·15해방 이후 10여 년 동안 상호출판사 주간과 〈코리아 타임스〉 주필 등을 맡아보았다. 1953년부터 경희대학교 교수로 있으면서 1954년 국제 펜 클럽 한국본부 사무국장, 1960~61년 코리언리퍼블릭 이사장, 1968년 한국문학번역협회 회장 등을 역임했다.
1921년 〈매일신보〉에 소설 〈깨어진 항아리〉를 발표한 뒤, 소설 40여 편과 시 10여 편을 발표했다. 문학세계는 작품의 성격에 따라 제4기로 나눌 수 있다. 제1기는 주로 하층민의 생활과 반항의식을 인도주의적 입장에서 나타낸 시기로, 〈추운 밤〉(개벽, 1921. 4)·〈인력거꾼〉(개벽, 1925. 4)·〈살인〉(개벽, 1925. 6)·〈개밥〉(동광, 1927. 1) 등이 이에 속한다. 제2기는 인간의 내면세계와 애정세계를 섬세하게 그린 시기로, 대표작 〈사랑손님과 어머니〉·〈아네모네의 마담〉(조광, 1936. 1)·〈왜 왔던고?〉(여성, 1937. 11) 등이 이에 속한다. 이중 〈사랑손님과 어머니〉는 6세의 옥희를 통해 과부가 된 어머니와 아버지 친구 사이의 미묘한 애정을 그린 작품으로 서정성이 뛰어나다. 제3기는 8·15해방 직후의 무질서와 혼란을 비판하고 사회의식이 각성되는 과정을 그린 시기로, 〈입을 열어 말하라〉(신문학, 1946. 11)·〈대학교수와 모리배(謀利輩)〉(서울신문, 1948.9)·〈혼혈 混血〉(대조, 1949. 7)·〈망국노군상 亡國奴群像〉(자유문학, 1958. 6~1960. 5) 등이 이에 해당된다. 제4기는 1960년 이후 삶과 죽음의 문제를 다룬 시기로, 〈세 죽음〉(현대문학, 1965. 10)·〈죽고 싶어하는 여인〉(현대문학, 1968. 7)·〈마음의 상채기〉(월간문학, 1972. 4) 등이 이에 속한다. 소설집으로 〈미완성〉(1962)·〈북소리 두둥둥〉(1984) 등이 있다./브리태니커
[1879년] 한말의 의병장 전기홍(全基泓) 출생
1879. 11. 24 전북 임실~1910. 7. 18.
본관은 천안(天安). 자는 수용(垂鏞), 호는 해산(海山). 이한룡(李漢龍)의 문하에서 수학했다. 호남 각지를 두루 여행하면서 김영엽(金永燁)·기우만(奇宇萬)·기삼연(奇參衍)·오성술(吳聖述) 등과 교유했다. 1907년 9월 기삼연·김용구(金容球) 등이 조직한 호남창의회맹소의 종사(從事)로 발탁되었다. 호남창의군이 1908년 2월 공음전투에서 패전한 이후 사실상 활동이 중지되자, 임실 등지에서 활약하고 있던 이석용(李錫庸)의 창의동맹단에 합류함으로써 본격적인 의병항전의 대열에 참가하게 되었다. 창의동맹단은 진안과 임실을 중심으로 전주·장수·무주·남원·순창·구례·곡성 등 호남의 동부지역 9개군에서 활동하며, 경찰서·헌병파출소·수비대 등의 건물을 습격하기도 하고, 일본군 토벌대와도 여러 차례 교전했다. 창의동맹단이 1908년 3월 남원 사천전투, 4월 대운치전투에서 연패하자, 연합전선을 구축할 계획으로 장성에서 활동중이던 김태원(金泰元)과 합류하려 했으나, 김태원이 전사하자 나주의병장 오성술을 만나 재기의 방책을 논의한 끝에 김태원 부대의 선봉장이었던 조경환(曺敬煥)을 찾아가 잔여 의병들을 수습한 뒤 항전을 재개했다. 오성술 등의 추대로 의병대장에 올라, 의병진을 대동창의단이라 하고 전열을 가다듬었다. 총 500여 명에 달하던 대동창의단의 의병은 평소 소부대 단위로 나누어져 활동을 하다가 필요시에는 합동작전을 수행했다. 이같은 유격전술에서는 지리적 여건이 매우 중요하므로 그의 의병부대는 주로 영광 불갑산과 함평 석문내산 일대에 주둔하며 작전을 전개했다. 불갑산전투, 장성 동화전투, 담양 한치전투, 함평 월야전투 등에서 많은 전과를 올렸으며, 일진회 회원을 비롯한 순사·헌병보조원 등 친일 매국노들을 회유 또는 단죄했다. 1908년 겨울 김영엽·오성술 등의 의병장과 수차례에 걸쳐 호남의병연합체 결성을 상의한 끝에 호남동의단을 조직하고 대장에 추대되었다. 그러나 1909년 4월 영광 오동과 덕흥전투에서 일본군 수비대와 헌병대에 연패를 당한 뒤 의병의 사기가 급격히 떨어지고 전투력을 상실했다. 더욱이 5월 농번기로 인해 주변 농민들의 참여가 부진해져 더이상의 의병활동이 불가능하게 되었다. 이에 만주로 이동할 것을 제안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부대의 지휘권을 박영근(朴永根)에게 넘겨주고 장수로 들어갔다. 장수 반암에 은둔하고 있다가 그해 10월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이듬해 대구고등법원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순국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브리태니커
[1864년] 프랑스의 화가 툴루즈 로트레크(Toulouse-Lautrec, Henri de, 1864~1901) 출생
← 춤추는 잔아브릴. 캉캉, Henri de Toulouse-Lautrec가 판지에 그린 유화 〈Jane Avril Dancing〉(1982), 파리에 있는 Louvre 소장
알비 출생. 처음에는 아버지의 친구인 화가 R.프랭스토에게 배웠고 1882년부터는 파리에서 코르몽(본명 F.A.Piwstre)의 지도를 받으면서 개성 있는 소묘화가(素描畵家)로서 독자적인 자질을 키워나갔다. 이 무렵 고흐, 고갱 등과 알게 되었고 드가의 예술에 끌리기도 하였다. 파리의 환락가 몽마르트르에 아틀리에를 차리고 그후 13년 동안 술집·매음굴·뮤직홀 등의 정경을 소재로 삼아 정력적으로 작품제작을 하였다. 처음에 풍자적인 화풍으로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고, 유화와 더불어 석판화도 차차 높은 평가를 받았다.
1889년부터는 앙데팡당전(展)에 출품하였고 최초의 개인전은 1893년에 파리에서 열었다. 그의 소묘는 날카롭고 박력 있는 표현으로 근대 소묘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그런 소묘의 힘에 바탕을 둔 유화는 어두우면서도 신선하고 아름다운 색조와 독자적인 작풍으로, 인생에 대한 그의 통찰과 깊은 우수를 공감하게 한다.
30대 이후 알코올중독으로 정신착란을 일으켜 1899년에는 3개월 동안 병원에 입원하였다. 입원 중에는 물론 퇴원 후에도 여러 곳을 돌아다니며 그림 그리기를 계속하였으나, 끝내 말로메의 별장에서 요양을 하던 중 37세로 생애를 마쳤다. 그의 어머니는 아틀리에에 남겨진 아들의 작품을 전부 챙겨 고향인 알비시(市)에 기증하였고, 1922년 알비시에 로트레크미술관이 개관되었다. /naver
[1861년] 브라질의 시인 크루스 에 소사(Cruz e Sousa, João da, 1861~1898) 출생
브라질 상징주의 운동의 주요인물이다. 노예에서 해방된 자유민의 아들로 태어나 청년기에 연극단원이자 노예폐지 운동의 일원으로 브라질을 두루 여행했다. 초기에 쓴 시는 1877년에 발간되었으나 시인으로서의 경력은 리우데자네이루의 문학계와 관련을 맺었던 1890년 직후 활기를 띠게 되었다. 가장 널리 알려진 그의 3권의 시모음집인 〈방패들 Broqueis〉(1823)·〈시산문집 Missal〉(1893)·〈Farois〉(1900, 사후 출판) 등이 1890년대에 출판되었다. 그는 폐결핵으로 죽었다. 동시대인들이 '검은 백조'라고 불렀던 크루스 에 소사는 비교적 짧은 생애 동안이었지만 상징주의 운동의 주요시인이자 지도자였다. 그의 시는 프랑스 상징주의의 표현원리를 당시의 사회적 관심과 개인적 고통에서 이끌어낸 주제와 접목시켰다. 그는 널리 존경을 받았고 라틴 아메리카에서 모더니즘 운동에 참여했던 시인들뿐만 아니라 브라질의 젊은 시인들과도 우열을 다투었다./브리태니커
[1859년] 찰스 다윈, '종의 기원[On the Origin of Species by Means of Natural Selection]'출판
1859년 11월 런던의 존 머리사(John Murray社) 간행. 다윈은 1858년 7월 1일 린네 학회에서 A.R.월리스와 함께 진화론의 논문을 발표하고 나서, 요약 형식으로 이 책을 간행하였다. 전문 14장으로 구성되고, 변이(變異)의 법칙 ·생존경쟁 ·본능 ·잡종(雜種) ·화석(化石) ·지리적 분포 ·분류학 및 발생학 등의 여러 면에서 자연선택설을 전개하고 있다.
W.페리의 자연신학(自然神學)의 토대였던 적응의 현상에 자연적 설명을 부여하려는 것이 이 책을 간행하게 된 목표 중의 하나였다. 간행 직후부터 종교계의 심한 공격을 받았으나, 약 10년 동안 생물학상 확고부동한 지위를 획득하고, 신앙에 대하여 사상 최대의 타격을 가한 저서로 알려져 있다. 1872년에 간행된 제6판이 최종판인데, 이때 과학적으로 제기된 여러 이론(異論)에 답한 새로운 한 장(章)이 제7장으로 추가되었다. /naver
[1826년] 이탈리아의 동화작가 콜로디(Collodi, Carlo, 1826~1890) 출생
← Original art by Enrico Mazzanti
이탈리아의 통일 ·독립 전쟁에 참전하였고 그 후 정치잡지를 창간하여 애국사상과 독립운동을 고취하기도 하였다. 관리가 된 적도 있었으나, 이탈리아의 장래를 짊어질 아동들을 훌륭하게 길러야 한다는 사명감으로 아동문학의 집필에 전념하였다. 대표작은 《피노키오의 모험 Le Aventure di Pinocchio》(1883)인데, 목제인형(木製人形) 피노키오를 주인공으로 한 이 동화는 지금도 전세계에서 널리 읽히는 명작이다. 그가 그려내는 공상의 세계는 확고한 사실주의를 바탕으로 구성된 것이었다. /naver
꼬마 인형 피노키오를 만들어낸 작가로 널리 알려져 있다. 피노키오의 모험은 지금도 전세계 어린이들에게 즐거움을 준다. 청년시절 신학교에 들어갔으나 오스트리아와의 투쟁 과정에서 리소르지멘토를 지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언론에 종사하게 되면서 이탈리아의 국가적 통일의 대의명분이 그의 성직 생활의 막을 내리게 했다. 1848년 정치풍자 신문 〈람피오네 Il Lampione〉를 발간하기 시작했고, 1861년 이탈리아 왕국이 창건되자 활동을 중단하고 어린이들을 위한 글을 쓰기 시작했다. 1876년에 〈잔네티노 Giannettino〉, 1878년에 〈미누촐로 Minuzzolo〉가 각각 출간되었다. 1880년 〈피노키오 Pinocchio〉 제1장이 〈아동신문 Giornale dei bambini〉에 연재되어 성공을 거두었다. 콜로디의 모든 작품은 사실주의적 관점에서 어린이들을 묘사하며 장난스런 행동을 아이들로 하여금 쉽게 따라 하게 만든다./브리태니커
[1642년] 탐험가 타스만(Tasman, Abel Janszoon), 태즈메이니아 발견
← 아벨 타스만
1642년 11월 24일 네덜란드의 탐험가 아벨 J. 타스만이 오스트레일리아 대륙의 남동쪽을 항해하던 중 알려져 있지 않은 섬을 발견했다. 섬의 이름은 1856년 이후 그의 이름을 따서 태즈메이니아로 명명되었다. 1632년(또는 1633)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에 들어가 1634년 모하호의 선장이 된 그는 인도네시아에 있는 세람 섬으로 첫 항해를 했고 1639년 ‘금과 은의 섬들’을 찾아 일본 동쪽 바다로 원정을 했다. 1642년 8월 14일 바타비아(지금의 자카르타)를 떠나 모리셔스에 도착했다. 남동쪽으로 더 항해해 그가 간 가장 남쪽 지점에 다다른 뒤 북쪽으로 방향을 돌려 11월 24일 육지를 발견했다. 그는 그곳을 ‘반디멘스랜드’라고 이름붙였는데, 네덜란드의 식민장관 안톤 반 디멘의 이름을 본뜬 것으로서 그는 타스만에게 탐험 항해를 시킨 사람이었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에서 근무하던 때의 첫번째 항해(1642~43)에서 인도양, 오스트레일라시아, 태평양 남부를 탐험하고 2번째 항해(1644)에서는 오스트레일리아의 남태평양 쪽 근해를 돌았다. 그는 뉴질랜드, 통가, 피지 제도 등도 발견했다./브리태니커
[1632년] 철학자 스피노자(Benedict de Spinoza) 출생
1632. 11. 24 암스테르담~1677. 2. 21 헤이그.
1632년 11월 24일 네덜란드의 암스테르담에서 합리론으로 유명한 철학자 스피노자가 태어났다. 유대교도였던 포르투갈인 부모는 종교의 자유를 찾아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으로 이주했고 1638년경 스피노자는 유대인 소년학교에 다닌 것으로 여겨진다. 독창적인 성서 해석이 문제를 일으켜 1656년 7월 유대교는 스피노자를 파문했고 암스테르담 시 당국도 잠시 그를 추방했다. 1670년 이후에는 헤이그에 거주하면서 렌즈 연마(硏磨)를 업(業)으로 삼고, 대학으로부터의 초빙 등을 거부하여 고독과 빈곤 속에서 일생을 보냈다.
그동안 데카르트적 철학논문을 발표, 1670년 「신학정치론」을 익명으로 출판했으나, 무신론자로 공격을 받아 그의 주저 「윤리학」은 처음에는 출판이 금지되기까지 했다. 그의 학설은 방법론에 있어서는 기하학적인 입장을 취하고, 세계관에 있어서는 범신론적일원론(汎神論的一元論)을 취하여 무신론자라 하기 보다는 신(神)에 심취한 사람이었다.
스피노자 철학은 유대 철학과 데카르트 철학에 큰 영향을 받았으며, 독창적인 견해들은 대부분 데카르트 철학의 난점에 대한 해결책으로 귀결된다. 불후의 저작 〈기하학적 방식으로 다룬 윤리학 Ethica in Ordine Geometrico Demonstrata〉(1662~75, 출판 1677)에서 스피노자는 시대를 훨씬 앞질러 성서 문헌 해석에 역사적 방법을 적용하는 것을 옹호했다. 스피노자는 정치문제에도 관심을 기울여 〈정치론 Tractatus Politicus〉을 쓰기 시작했지만 완성하지 못한 채 1677년 2월 21일 세상을 떠났다. 독일의 레싱과 괴테, 영국의 콜리지는 스피노자를 사상적으로 매우 높이 평가했으며, 19세기에 이르러 절대적 관념론자, 마르크스주의자, 경험론자 등 많은 전문 철학자들이 스피노자를 연구했다./브리태니커
그밖에
2008 김민석 민주 최고위원 구속
2002 소설가 겸 음식비평가 홍성유씨 별세
1999 류찬우 풍산회장 별세
1997 윤보선 전 대통령 부인 공덕귀여사 별세
1992 중국 여객기 보잉 737기, 이륙 30분만에 추락
1984 한국표준연구소(대덕), 표준주파수와 표준시간 알리는 표준주파수국 개국
1983 이스라엘-PLO 포로교환
1983 호요방, 북한 아웅산테러 간접비난
1982 일본, 왜곡교과서 시정키로 결정
1981 한국 근.현대문학을 정립한 문학평론가 조연현 사망
1981 미국 보잉사, 크루즈미사일 첫 생산
1978 전세계 라디오 주파수 변경
1976 염동균 WBC 슈퍼밴텀급 세계챔피언 획득
1975 유엔, 고문금지선언 채택
1969 미-소, 핵확산방지조약 비준
1965 정부와 여당 제2차 5개년 계획 요강 마련
1961 유엔총회 아프리카 비핵지대안 가결
1960 사회대중당 결성. 위원장 김달호
1944 미공군 B29 70여대, 일본의 동경 첫 공습
1934 조선일보, 조선박물전람회 개최
1919 델리에서 全인도 칼리프옹호대회
1912 제2인터내셔날 바젤대회 개최
1894 중국혁명가 손문, 미국 하와이에서 흥중회 창립
1739 프랑스, 혁명력을 공포. 1806년 폐지
1713 영국 소설가 로렌스 스턴 출생
1617 이항복, 광해군의 폐모론을 반대하는 상소문 올림
1560 임꺽정 일당 체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