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진강 편지」
- 우계 雨季
장마도 예전에 알던 그런 장마가 아니다.
극한호우,
쏟아지는 비가 무섭다.
잠시 소강 상태인 새벽
통제가 풀린 노고단에 올랐다.
기대했던 운해는 못보고
천왕봉과 반야봉 사이로 오르는 붉은해를 보았다.
극한호우에 노고단 꽃들도 쓰러지고 꽃잎이 녹아내렸다.
지리터리풀 꽃빛은 비에 씻겨내렸고
원추리는 꽃 피우기를 주저하는 것 같다.
다시 시작된 장마에 노고단길이
다시 잠겼다는 소식을 듣는 아침
문득 30년 전,
장마철 풍경 하나를 떠올렸다.
서른 다섯 나이에 아이가 다섯이었다.
발전소에 다니던 나는 야간수당을 받기위해 교대근무를 자원했고
아내는 자전거를 타고 우유배달일을 시작했다.
30년 전, 장마철의 아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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雨 季 2
우유배달 갔다 와
벗다 벗다 혼자서는 못 벗고
술 덜 깬 나를 불러 벗겨 달라며
발이 물에 퉁퉁 불어 그렇다는 말 감추고
애먼 장화 작은 탓만 하는
아내 마음
- 김인호 시집 <땅끝에서 온 편지>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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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아이, 세쌍둥이 그리고 막내까지 다섯 아이들. 막내가 13개월이 되자 아내는 이 아이들을 키우기 위해서는 무슨 일이든지 해야겠다고 궁리를 내던 참이었는데, 우연히 가까운 곳에서 우유보급소를 운영하고 있는 초등학교 친구와 25년 만에 만나게 되었다.
다섯 아이 이야기를 듣고는 궁금해진 그 친구, 집에 놀러 왔다가는 아내에게 자기 우유보급소에서 배달을 해보라고 제안을 해왔다. 친구로서는 어떻게든지 돕고 싶은 마음이었겠지만 나는 오랜만에 만난 친구에게 그런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는 자괴감에 썩 유쾌한 기분이 아니었다.
친구가 돌아가고 아내는 당신이 조금만 도와주면 어떻게든 해보겠다고 나를 설득하기 시작했다. 발전소에서 교대근무를 하던 때라 야간근무 때만 빼면 승용차로 도울 수 있겠다 싶어 못 이기는 척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다음날, 아내는 자전거를 한 대 장만하여 연습을 시작했다. 고등학교 때 자전거를 배웠다지만 오랫동안 타보지 않은 까닭에 중심을 잡지 못하고 비틀거리다가 넘어진다. 그 모습이 안쓰러워 나는 못 본 척 담배만 피웠다.
아내는 새벽 네 시면 일어나 보급소에서 집 앞까지 실어 온 우유박스를 싣고 새벽거리로 나섰다. 내가 오전 근무조거나 오후 근무조일 때는 포니승용차에 우유박스를 싣고 내가 운전을 하고 아내는 낮에 미리 확인해 둔 배달할 번지를 찾아 골목을, 계단을 뛰어다녔다. 잠든 아이들이 깨어 울까봐 마음은 바쁜데 일이 익숙하지 않아 몇 번씩 주소와 주문량을 확인해야 하기 때문에 걸음은 더디기만 했다.
아내의 자전거가 오토바이로 바뀌고, 배달할 집 번지들도 익숙해지면서 아내 혼자서 일을 하기 시작하는 날이 많아졌다. 오후 근무를 끝내고 밤늦게 돌아와 잠든 나를 깨우기 미안하다며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혼자 어둔 새벽거리로 나서는 것이었다. 처음 인수받을 때는 세 박스이던 배달량이 차츰 늘어 다섯 박스, 일곱 박스로 자꾸만 늘어갔다.
부부동반 저녁식사를 하자는 친구의 초대를 몇 번이나 미루다가 만난 저녁식사 자리에서 친구는 아내를 보며 참 지독하다는 말을 몇 번씩 한다. 대부분 사람들이 처음 시작할 때는 이까짓 것 못하겠냐고 시작하지만 두 달을 못 채우고 그만 두는 경우가 허다한데 다섯 아이 키우면서도 매달 주문량을 늘려 가는 우수 배달사원에게 주는 금반지를 독식할 정도의 또순이라 내심 놀랐다는 것이었다.
아내는 배달량이 늘어갈수록 일에 익숙해지고 나는 점점 게으름을 피우게 되었다. 술이라도 한잔 마신 날은 아내가 새벽에 나서는 기척을 느끼면서도 모른 척 돌아눕는 일도 있었고 몸살기운이 있다고 선수를 치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여름 날, 문 두드리는 소리에 깨어나 문을 열어보니 아뿔싸! 쏟아지는 빗속을 뚫고 혼자서 일을 마치고 돌아 온 아내가 후줄근 젖은 채 서 있는 것이 아닌가. 목을 타고 넘어오는 미안하다는 말 못하고 ‘깨워서 같이 나가야지 혼자 갔다’고 되려 화를 냈더니 아내는 나를 보며 빙그레 웃으며 장화나 벗겨 달라며 발을 내민다. 빗물에 푹 젖은 발이 퉁퉁 불어 벗겨지지 않는 것이 아니라 장화가 작아서 잘 벗겨지지 않는다고 장화 탓을 하면서….
- 격월간 <삶이 보는 창> '나의 시, 나의 삶 이야기' 발표
「섬진강 편지」
- 우계, 섬진강
임실 운암강물 순창 적성강물 남원 순자강물 곡성 대황강물이
구례 지리산 서시천물을 만나 섬진강물로 하나되어 어깨동무 하고
바닷물을 만나러 하동 지나 광양 망덕포구 갑니다
골골 휘휘돌다 신명난 붉덩물 앞서거니 뒷서거니 달려가는
강마을 마을은 시방
한무리 젊은이들이 고샅을 휘젓고 가는 것 처럼
솔찬히 요란스럽습니다
-섬진강/ 김인호
첫댓글 증말 비 많이 오네....
현재 24일 월요일 오후 2시 반.. 약 20분 전부터 또 호우가 퍼붓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