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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개혁 사상가 조광조(趙光祖)를 개혁 도중에 처형함으로써 조선이 내리막길에서 반전할 수 있는 기회를 스스로 박찬, 멍청하기 짝이 없는, 덜 떨어진 임금이었다.
(그래서 시호에 어정쩡한 '중(中)'자가 들어간 것일까?)
(크흐~인물이 아까비..)
반정 당일 반정군은 진성대군을 왕으로 추대하기 위해 집으로 몰려와 사저(私邸)를 에워쌌다.
멍청이 진성대군(晉城大君)은 이를 연산군이 자신을 죽이려고 군사를 보낸 줄 알고 자살하려 했다.
그러자 부인 신씨가 말리면서 "군사들의 말 머리가 이곳을 향해 있으면 우리를 죽이려는 것이지만 말머리가 집 밖으로 향해 있으면 대군을 호위하려는 뜻이니 잘 살펴보고 난 후에 죽으세요."라고 했다.
하인을 내보내 자세히 살피게 하니 말머리가 모두 집 밖으로 향해 있기에 진성대군은 자살하지 않았고, 왕으로 추대되었다고 야사가 전한다
(이룬~마누라 덕에 산 모지리..)
이 스토리에서 보다시피 진성 대군(晉城大君)은 좀 모자라고 부인은 야물딱졌는데, 아쉽게도 진성대군이 왕이 된 후 반정세력의 강요로 중종과 금슬이 좋았던 신씨는 궁에서 내쫓긴다.
반정때 처형 당했던 신수근(愼守勤)의 딸이라는 이유였다.
이 스토리를 배경으로 한 '치마 바위 전설'이 전한다.
중종이 궁에서 부인을 그리워 해 먼 하늘을 바라본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은 신씨가 인왕산에 자신이 입었던 치마를 내걸었다는 말씀~
(인왕산의 치마바위)
(7일의 왕비 신씨 부인)
반정(反正)이 마무리된 후 공신 117명이 책봉되었는데, 이 중 공도 없이 낀 자들이 많았다.
반정 3대장(박원종, 성희안, 유순정)의 권세가 얼마나 대단했고, 이에 비해 나이 어린 중종(中宗)의 권위가 얼마나 초라했는지 그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중종은 이들 삼대장이 조회에 참석한 후 물러갈 때면 꼭 자리에 일어났다가 그들이 문을 나선 후에야 비로소 자리에 앉았다.
왕조 국가에서 전례가 없던 일이었다.
(이룬~삐리리 같으니라구🎷..)
반정(反正) 삼대장은 권세와 부귀를 누렸으나 명은 길지 못하여 중종 8년까지 모조리 병사하고 말았다.
이때 중종(中宗)의 나이는 겨우 25세였으며, 이들이 장악했던 권력에 공백이 생기자 권력 투쟁이 일어난 것은 당연했다.
🌹 조광조(趙光祖)의 등장
조광조(趙光祖)는 김종직의 제자인 김굉필의 제자로 김종직 문인의 계열이다.
김굉필(金宏弼)은 벼슬에 뜻이 없어 늦게 출사했다가, 무오사화 때 유배되었고 갑자사화 때 50세의 나이로 사사(賜死)되었다.
김굉필은 유배지에서 한 소년에게 성리학을 가르침으로써 역사에 이름을 남기게 되었다.
(조광조)
그 소년은 김굉필의 평안도 희천 유배 시절에 근처의 찰방으로 부임한 아버지를 따라왔던 17세의 조광조(趙光祖)였다.
후에 조광조는 성균관에 들어 갔는데, 성균관 학생 중 가장 첫번 째로 뽑힐 만큼 학행이 뛰어났다.
중종이 조광조(趙光祖)에게 벼슬길에 나오도록 미관말직을 제수하려 하자, 그가 너무 뛰어나다는 이유로 학문에 정진하도록 하라고 서용에 반대하는 신료들이 있을 정도였다.
조선 역사상 그런 대접을 받은 인물은 조광조뿐이었다.
문과 전시에 합격한 조광조는 사간원 정언으로 임명되었다.
간쟁을 주로 하는 대간이 된 것이다.
중종의 왕비인 장경왕후 윤씨가 세자 인종을 낳다가 죽자, 박상과 김정이 폐출된 왕비 신씨의 복위를 청원하는 상소를 올렸다.
이 문제는 예민한 문제가 되어 조정에 공론을 불러 일으켰다.
대간들은 그들의 의도가 간사 하다며 죄를 주기를 청했고, 정승들은 이를 반대했다.
중종(中宗)이 대간들의 편을 들어서 박상과 김정은 의금부에 체포되었고, 이때 조광조(趙光祖)가 등장한다.
(뭬야? 권력 땜시 조강지처를 버린겨? 이런 하수같으니..)
대간이었던 조광조(趙光祖)는 같은 대간이라도 죄를 지었으면 벌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여 언로를 막았다.
그런 대간들과는 같이 일을 못하겠다며 대간들을 모조리 파직하라고 중종에게 주청을 했다.
(어쩌구리~쎈대?)
삼정승이 조광조(趙光祖)의 편을 들고 나서자 중종은 어쩔 수 없이 대간 전부를 교체했다.
비록 신씨는 복원되지 못했으나 이로써 조광조(趙光祖)는 일거에 조정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중종 8년에 반정 삼대장이 모조리 사망 하자, 그간 허수아비로 지내던 중종은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새로운 정치세력을 찾게 되었고, 조광조(趙光祖)로 대표되는 사림 세력이 그 대안으로 부상했다.
그러나 조광조의 정치목적은 왕권강화가 아니라 성리학에 입각한 도덕정치의 실현에 있었다.
이러한 두 사람의 동상이몽(同床異夢)이후에 중종이 조광조(趙光祖)를 버리고 사림파들을 대거 숙청하는 기묘사화(己卯士禍)를 불러오게 된다.
🎓 다음은 '주초위왕'과 황진이가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