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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상륙작전" 역사 현장을 가다.
소 병철의 포토엣세이
무더운 여름의 장마는 습도를 높여 불쾌 지수까지 높인다. 잔득 흐린날! 찔금찔금 내리는 비! 이런날은 몸도 무겁고 마음도 우울해져 기분이 묘해진다. 장마철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그럴땐 차라리 시원스럽게 쏟아지는 비가 반갑다.
지난 주에는 장마전선이 북상하여 서울중부 지방에도 집중 호우가 시원하게 내려서 한동안 매연과 먼지로 오염된 대지를 깨끗하게 청소해 주었다. 기분도 한결 뽀송뽀송해 졌다. 장마전선이 물러나면 뜨겁게 내리 쬐는 햇살의 폭염에 지치기 쉬운 7월이다. 오늘은 폭염이 다소 주춤하다.
7월의 단비가 대지를 눈부신 초록의 세상으로 만들어 간다. 그 녹색은 아무리 보아도 싫증이 나지 않아서 좋다. 신록이 머무는 7월의 싱그러운 풍경은 창조주의 축복이다.
신록은 편안한 안식의 향기가 피어나는듯 하여 마음의 평안을 갖게 하므로 자연이 인간에게 주는 여름철의 특별한 보약이라 생각하면 어떨가 한다. 한여름이 아무리 더워도 신록의 산과 계곡, 시원한 바다가 있어서 그래도 견딜만한 계절인것 같다.
신록의 계절에 길가에 핀 7월의 꽃들이 길가는 나를 반기며..! 말을 걸어오는 듯하다. 사랑하는 그대여! 이 아름다운 계절에 기쁨의 꽃 한송이 받으 시고 상큼한 오늘 하루를 행복하게 지내시라고..! 그리고 무더위에 지치지 않도록 건강관리에 유의하시 라고..! 말이다.
7월의 장마가 물러난 자리엔 늘 무더위가 몰려온다. 폭염..! 덥다 더워..! 하긴 더우니까 여름이지..! 참을 수 없으면 즐기라 했던가..! 쨍쨍 내려쬐는 햇볕에 푹푹찌는 더위를 피하기 위해 바다를 즐기는 피서객들로 분빈다.
삼복더위가 이어지는 7월에는 눈부신 태양이 장열하는 시원한 바닷가가 제격이다. 바다를 바라보면 왠지 마음이 편해지곤하니 말이다. 오늘 7월의 무더위가 참을 수 없어, 모처럼 바다 구경도 하고, 한동안 쌓인 스레스도 날려보내고, 없는 여유를도 만들어 볼 요량으로 산과 바다가 어우러져 있는 아름다운 "무의도 섬"으로 떠난다.
"무의도 섬"으로 가는 페리船 선상에서 갈매기 때가 따라와 무의도 방문을 환영한다며! 침묵의 날개짓으로 말을 걸어온다. 오랫만에 바다에 왔으니 수평선을 바라보며 굽어있는 마음을 곧게 펴고 살라고 말이다. 그리고 나처럼 가볍게 나르며 늘 기쁘게 살라고 한다.
복에 겨운 투정은 그만하고, 욕심으로 꽉찬 마음일랑 훌훌 털어버리고, 푸른 바다물에 깨끗하게 씻고 가라한다. 새상이 어지러워져 세파에 오염된 마음은 파도에 싣어 멀리 보내라 한다.
싱그러움이 가득한 시원한 "무의도 섬" 산과 푸른 바닷가 해안 트레킹 코스에서 그 멋진 바다 풍경을 만끽하며, 갈매기와 대화도 하고..! 오랫만에 바닷물 속에 들어가 잠시 발도 담궈보며 어린 아이처럼 물장구도 처본다.
약간의 심리적 즐거움도 같이 누리며 한가롭게 걸어본다. 바다의 맑은 공기를 마시며 늘어지게 기지개도 펴본다. 나를 비우면 행복하고, 나를 낮추면 모든 것이 아름답게 보인다는데! 그 행복은 결코 먼 남의 이야기가 아니다. 내 마음속에 늘 가까이 있으니 말이다.
인천 앞바다에 위치한 무의도 섬..! 오늘 우리 일행이 무의도의 단순한 바다산행 길에 나섰지만, 다른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고 싶은 것은 여기가 대한민국의 국운이 風前燈火 앞에 아슬아슬하게 서있던 중요한 시기에 回生의 길로 들어서는 契機가된 중요한 軍事作戰이 펼쳐졌던 중심 현장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오늘 그 역사적인 사건의 현장에 와있는 것이다.
이곳 일대의 바다와 섬들이 인천 상륙작전을 지원하기 위한 배후 병참기지 역활등 전장의 중심지역에 있던 "섬"이다. 지금은 아무일이 없었던 것처럼 평화스럽기만 하지만 이곳의 소무의도 광명항 주변에 정박했던 수 많은 전함들을 떠올리며 인천 상륙작전의 역사적 의미를 잠시 생각해 본다.
역사의 記錄은 깊으면 좁아지고, 넓으면 앝아지기 마련 이다. 그런데 이 분야의 문외한이 역사와 인물을 평가 한다는 것은 조심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가끔은 전문 연구자보다 섣부름을 무릅쓰고라도 문외한의 생각이 흥미를 유발하기에 충분할 수도 있겠다. 이점에 대해서는 아무래도 독자에게 諒解부터 구하고 시작한다.
필자의 짧은 한국전쟁사의 식견입니다만, 과거 국방부 합동참모부 작전국 근무 시절, 戰史연구위원회에 참여, 韓國戰史의 발간을 기획하고 통제한 실무 경력이 있다. 특히 상륙작전과 맥아더 장군에 대한 당시의 작전 상황을 여러 자료를 접하며 남다른 흥미를 느끼며 고급 장교로서 가춰야할 참 많은 덕목을 스스로 배웠던 거억이 생생하다.
軍교육기관의 교재로, 각급 지휘관및 참모의 정신 교육 교재로 활용하기 위해서 古代의 戰史로부터 6.25전쟁사 까지의 한국의 戰爭史를 총정리하고, 군사적 관점에서 국내외 주요 관계문헌을 참고하여 戰況을 객관적으로 분석하고 戰訓을 도출 하여 한국 전쟁사를 총 정리한 950페이지 규모의 단행본 책을 출간했다.
그 한국전쟁사를 바탕으로하여 당시의 상황을 유추해 본다. 역사의 단순한 사실의 나열에서 추리와 추측을 가미한 이야기를 잠시 공유하며 흥미를 느껴 보는것도 괜찮을 것 같아서 말이다.
인천 앞바다 이 지역 일대 바다와 섬에서 수행된 당시의 숨 가쁘게 감행되었던 상륙작전의 흔적은 지금 찿아볼 수 없지만, 당시의 상륙작전 상황를 잠시 유추(類推)해 보고, 역사적 의미를 재조명하여 참전 용사들의 호국정신을 기리는 계기가 되길 기대한다.
말도 안되는 이야기 같기도 하지만,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를 기해 북괴가 휴전선 전지역에서 기습 남침을 감행한지 불과 3일만에 한국의 심장 수도 서울은 초토화 되고, 북괴군 의 파상 공격에 아군은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허무하게 서울이 북괴군의 수중으로 들어갔다.
북괴군의 기동 장비의 한강 이남의 진출를 막겠다는 이유로 한강대교가 아군에 의해 폭파되고, 후퇴를 거듭하는 戰線에는 피난민 대열까지 가세해 아수라장이었다.
한국전쟁이 시작된지 이틀후 UN은 북한의 불법 남침 공격의 격퇴를 위해 필요한 모든 지원을 한국에 제공 하기로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결의안이 채택된다.
2015년 공개된 일급 비밀문서에는 미국 트루먼 대통령이 일본 도쿄에 본부를 둔 극동사령부 최고 사령관 더글러스 맥아더 (Douglas Macarthur. 1880-1964)장군에게 한국 전쟁에서 전면적 무력 사용을 승인하는 내용이 공개되었다.
이와 함께 미국 본토 군 수뇌부와 극동사령부고위 지휘관간에 주고받은 문건들도 공개됐는데 극동사령부 지휘관들 눈에 비친 대한민국 군인은 북한군의 파상 공격에 적절한 저항능력도 싸우려는 의지조차 보여주지 못하여 북한군에게 저항할 수 없는 상태로 비췄졌다. 대민국의 완전 붕괴까지도 생각할 정도로 심각한 상황이었다.
부끄러운 파죽지세의 전황은 7월 하순에는 낙동강 전선까지 밀려나 풍전등화 앞에 내몰린 대한민국의 초라한 모습이었다. 7월14일 대한민국의 통수권자인 이승만 대통령은 미 극동사령부 사령관이며 UN군 사령관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에게 대한민국 국군의 작전지휘 권한을 이양한다.
9월 15일 새벽 02:00시! 전쟁의 판도를 뒤바꾼 대작전이 시작 된다. 작전명 크로마이트 작전(Operation Chromite)이다. 인천 상륙 작전이 팔미도 등대의 불빛을 신호로 월미도 지역 일대에 엄청난 규모의 폭격이 시작된다.
유엔군 총사령관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의 지휘 아래 감행된 인천 상륙작전이다. 인천상륙작전은 2차 세계대전 당시 지상 최대의 작전 이라는 노르망디 상륙작전과 비교될 만큼 엄청난 화력과 물량이 투입 된 상륙작전이었다. 우리가 지금 바로 그 역사의 현장에 와 있는 셈이다.
"더글러스 맥아더"그는 늘 검은 선그라스에 담배 파이푸를 입에 물고 전투현장을 직접 방문 부대를 지휘하는 카리스마가 넘치는, 지금으로 말하면 high fashion style 복장이 어울리는 멋쟁이 장군 이었다. 물론 그에게도 여러 장단점이 있었지만 미 극동사령부 최고 사령관과 유엔군 총사령관을 지낸 것을 보면 뛰어난 출중한 능력을 지닌 군인이었음을 알 수 있다.
당시의 유엔군총사령관 맥아더 원수의 나이는 70세 이었다. 뛰어난 판단력과 통찰력, 카리스마가 넘치는 지도력등 52년간의 군생활 경험을 바탕으로한 文武를 겸비한 참 지휘관으로서 면모를 다 갖고 계신분 같다.
자신의 이상을 갖고 정확한 군인의 눈으로 그가 참전한 작전을 승리로 이끌어낸 맥아더 장군이다. 어쩌면 맥아더의 인천상륙작전이 아니었다면 지금 대한 민국은 없었는지도 모르겠다. 결과론이지만 사실 이분은 하늘이 보내주 대한민국의 恩人아라 말한다면 필자의 생각이 지나친 비약일까?
그는 水陸兩面 작전을 감행하여 적의 背後를 强打하므로써 일거에 戰勢를 역전시킬 수 있는 결정적인 作戰를 구상한다. 敵(북괴군)의 虛點를 강타하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맥아더는 조수 감만의 차이가 큰 인천항이 지닌 천연적 장애요인을 들어 미 합동참모부의 강력한 반대에 부딫쳐 수많은 우여곡절을 겪어야만했다. 그로 인해 작전을 할 수 있는 날이 제한될 수 밖게 없기 때문이었다. 아침. 저녁 두차례 각각 3시간 정도의 만조 시간내에 작전을 완료해야 했다. 사실 이런 악조건으로 대규모 상륙작전의 위험 부담은 커질 수 밖에 없었다.
만조 시간을 고려한 상륙작전이 가능한 날은 9월15일. 10월11일. 11월3일이고 이 날짜를 포함한 전후 2-3일로 국한될 수 밖에 없었다. 미 합동참모부는 상륙지점으로 군산을 종용하였다. 맥아더 장군은 반대론자들에게 끝내 그의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맥아더는 불리한 바로 그 이유가 적의 허점될 수 있다고, 작전의 핵심이 될것 이라고 역설하고 설득 하였다.
맥아더의 예상대로 이지역에서의 적의 방어태세는 실재로 허술하기 짝이없었다. 이지역 방어에 투입된 적의 규모는 모두 2천명 규모의 부대로 추산 판단했다. 결과는 상륙작전은 손쉽게 교두보를 확보했다. 9월16일 미 해병사단이 전진 교두보를 확보하고 본격적인 진격작전 의 토대를 마련할 때까지 아군의 총 손실은 미미하였다.
한편 미 합동참모부는 맥아더의 작전계획을 최종 검토후, 결국 8월28일 맥아더의 작전계획을 동의한다는 동의서가 맥아더 원수에게 전달된다. 그리하여 9월4일에는 일명 "크로마이트"의 작전계획이 완성 되었다, 9월6일에 "D day"을 9월15일로 확정한 맥아더는 이를 미 합동참모부에 보고한다. 미 합동참모부로 부터 9월9일에 최종 승인을 받았다.
9.20일 현재 전선 상황은 낙동강 방어전선에서 연합군은 전쟁 진행 상황도에서 본바와 같이 고전을 하고 있었다. 최후의 방어선이 된 낙동강 방어선에서 미 제 8군 사령관 워커 장군은 북괴군을 낙동강 전선에만 집중하도록 일정 시기까지 치열한 공방전을 계속하며 견제하여, 상륙작전을 위한 준비 기간을 확보하는 계획이었을 것이다.
맥아더 장군은 당시의 전황이 적의 후방에 깊숙히 상륙하여 북괴군의 길어진 병참선을 차단하고 낙동강 전선의 적에 대해 양면으로 狹攻(협공)을 가할 최적의 기회라 판단했다. 인천으로 상륙을 위한 작전계획을 수립하고 9월 초까지 인천 상륙전선에 투입할 필요한 장비와 병력을 미국 본토로 부터 출발시켜 일사분란하게 착착 준비를 하고 있었다.
맥아더 원수는 한반도의 특수성을 감안하고, 주요 교통망이 주로 서부에 집중되어 있어 철도와 도로가 수도 서울을 중심 으로 남북으로 연결되어 있는 점을 착안하고, 인천에서 불과 38Km 거리에 있는 수도 서울의 탈환이 가져다줄 한국민들의 심리적 효과를 重視하였다. 물론 한국군과 UN군의 떨어진 軍의 사기를 올리는 특단의 조치라 생각했을 것이다.
1950년 9월15일 드디여 결전의 날이 다가왔다. 맥아더가 예상한 대로 인천의 적 방어태세는 엉성하기 짝이 없었다. 약 2,000명 정도의 적을 쉽게 제압하고, 인천을 탈환 하는데 성공한다. 3일 동안 서울을 포위 공격한 끝에 9월28일 에는 서울을 완전히 탈환하는데 성공하였다.
한편 낙동강 전선에서는 적에게 아군의 인천상륙작전의 소식이 알려지면서 적의 사기가 걷잡을 수 없이 떨어지면서 도주병이 속출하고, 드디어 9월 23일에는 전전선이 무너지기 시작하였다.
인천으로 상륙하여 서울을 탈환함으로써 북괴군의 퇴로를 일거에 차단하고, 이와 병행하여 미 8군이 낙동강 방어전선 에서 총반격을 개시, 북으로 진격의 계기를 조성해 주었다. 무엇보다 더 중요한것은 인천상륙작전에 이은 서울 수도 탈환 의 성공은 심리적으로 국군과 유엔군의 떨어진 사기를 크게 올릴 수 있었고, 북한군의 사기를 떨어뜨리는 결과를 가져왔다 는 것이다. 인천항의 확보와 서울에 이르는 병참선의 확보는 향후 북으로의 진격을 위한 장비와 물자 수송에 결정적인 핵심 기반이 되었다.
인천상륙작전은 맥아더 원수의 걸작중의 걸작 작전이었다. 맥아더는 담대한 착상과 결단력 그리고 필승의 신념으로 부하들에게 확신을 주었다. 상륙작전 개시후 보름만에 국군과 유엔군은 38도선 이남의 국토를 모두 되찿아 회복했다. 북괴군은 약 10만 명의 병력을 잃어고 북으로 도주한 병력은 3만 명에 불과하였다.
인천 상륙작전에 투입된 부대 규모는 미 7함대를 주축으로한 유엔군 261척의 함정과, 미 제10군단 예하 한국군 제17연대와 1해병연대 4개 대대를 포함한 미 제7사단과 미 제1해병 사단등 총 병력 7만여 명으로 구성된 규모이었다. 이때 미 7사단은 부족한 병력을 보충하기 위하여 한국의 청년 8,000명을 선발하여 일본에서 사격술등 기초 군사 훈련을 시껴 작전에 투입한다. 이들이 일명 미군 부대에 배속되는 "CATUSA" (카투사) 병사의 근무 시초이었다.
작전은 1단계로 2시간 만에 월미도 점령에 성공한 연합군은 뒤이어 2단계 작전으로 인천항과 김포 비행장, 수원을 장악 하고 , 3단계 작전으로 9월20일 한강을 건너는데 성공한다. 9월 28일 수도 서울을 탈환하고 중앙청에 태극기를 게양한다.
2차 세계대전 이후의 최대 규모의 인천 상륙작전이 전개 되었던 숨가빴던 그 역사의 현장에 우리가 오늘 와있다. 인천상육작전의 성공은 당시 불리했던 6.25전쟁의 전세를 뒤바꾼 군사작전이다. 인천 상륙작전은 풍전등화 앞에 놓인 절체절명의 대한민국을 구출해 낸 역사적인 위대한 군사작전이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전쟁역사의 결과는 늘 참혹한 것이었다. 6.25 전쟁 결과의 인명과 경제적 피해도 예외가 아니었다. 통계에 의하면 남한측의 인명 피해중 사망자는 군인 13만여명 민간인 37만여명, 부상자와 실종자를 포함하여 160만명이었다. 북한측은 사망자는 군인 52만명, 민간인 40만여명, 부상.실종자을 포함하여 350만명이었다. UN군은 사망 3만여명, 부상자 11만여명, 실종자 6천여명이다. 중공군은 사망 11만명, 부상자 22만명, 실종자 3만명이다.
국가의 튼튼한 안보는 경제 발전의 결과물로 나타난다. 튼튼한 안보의 기반과 안보에 대한 일치된 국민의식이 관건이다. 한국의 안보가 아직 거친 파도가 일고 있는 大洋의 파도를 혜쳐가는 "작은 배"의 모습 같다면, 그 표현이 너무 과장된 비약일까?
우리는 격랑을 지혜롭게 혜쳐가는 항해의 조타술을 배워야 한다. 우리의 적은 누구인가? 또한 진정 우리를 도와주는 외부의 세력은 누구인가을 정확히 알아야한다. 그리고 그들을 어떻게 활용해야 할지를 알아야 한다. 그것이 정치다. 그것이 지도자의 덕목이다.
최근 중국과 러시아가 한국 내 "사드(THAAD) 고고도 미사일 방어체계" 배치를 강력하게 반대하면서, 정작 자신들은 이른 "중러판 사드 개발"을 착수했다한다. 사드 배치는 북한의 핵 미사일 위협에 대응하는 조치로 국군 통수권자인 대통령이 국가 안위와 국민의 안전을 위해서 내린 自衛權의 결단! The right of self-defense 이다. 21세기 전쟁은 "창과 방패의"의 전쟁이 될것이다. 북한의 핵 미사일에 단호한, 그리고확실한 대쳐가 필요한 사안이다.
사드 배치 문제을 가지고 정치권이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면서 "갑론을박" 하는 모습이 참으로 안타깝기 짝이없다. 북한의 미사일 위협이 현실화 되고 있는 상황에서 나라를 지키는 것보다 더 중요한 가치는 없기때문이다. 오늘 인천상륙작전의 역사의 현장을 돌아보면서 1950년 6.25전쟁의 처참한 역사를 뒤돌아 보는 의미가 크다할 것이다.
지나간 역사의 가정은 무의미 하다하지만 참 아쉬움이 많다. 지금 66년전의 6.25전쟁사 일부분의 역사를 뒤돌아 보면서 느끼는 솔직한 심정이기도 하지만, 작금의 한국정치 현실을 접하며 400여년전 16세기 조선의 朋黨政治의 산물인 "임진왜란과 이어진 병자호란"의 뼈까지 절이는 아픈 역사가 생각나서 씁씁하기 짝이없다.
파벌을 이루어 정권을 다투는 형상이 어쩌면 그 시절을 꼭..! 그렇게 닮은것 일까? 그 "못된 옛사람들의 DNA"을 말이다.
당시에 "이이"는 南倭北胡"의 침입을 대비한 십만양병설"을 주장했으나 무시되었다. 정계의 혼란! 격화된 黨爭등으로 나라의 재정은 허약해지고, 사회는 점점 해이해지고, 나라를 방위하는 대책을 세우지 못했다. 결국은 치욕의 역사를 만들고 말았다.
정치인이 어떠한 이유이던 국론을 분열시키는 것은 이적 행위이다. 이것을 즐기며 박수를 보내는 최대 수혜자는 북한의 김정은 정권밖에 없을테니 말이다. 적어도 "국가 안보"에 걸림돌이 되는 정치는 배제되어야 한다. 국가안보에는 與野가 따로 있을 수 없다. 그것이 선진국의 정치이다. 그것이 애국하는 정치이기 때문이다.
금년 9월15일은 인천상륙 작전의 "66주년"이 되는 해이다. 맥아더의 지휘력이 없었다면 과연 이 작전이 성공했을까..? 오늘 그 역사의 현장을 찿아 이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유엔군과 국군의 호국 영령들의 숭고한 애국정신을 생각하며, 경건한 마음을 담아 거수 경례로 예를 드린다.
맥아더가 집무실 벽에 걸어놓고 즐겨 낭송했던 시가 있었는데. 이 글을 즐겨 기억하면서 그는 젊음을 유지했다고 한다. 전략전술에 탁월한 예지력과 카리스마가 넘치는 용기와 지휘 능력을 겸비한 장군으로써 이처럼 감성적 활력이 넘치는 멋진 모습의 "참 軍人"이기에 필자는 개인적으로 맥아더를 존경한다.
청춘 사무엘 얼만 청춘은 인생의 어떤 시가가 아니라 마음의 상태이다. 그것은 장미빛 불. 붉은 입술 그리고 유언한 관절에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의지와 상상력의 우수성과 감성적 활력의 문제이다. 청춘이란? 인생의 깊은 샘의 신선함이다.
청춘은 소망의 소심함을 넘는 용기와 타고난 우월감, 안이를 넘는 모험심을 의미한다. 청춘은 때때로 이십세의 청년보다 육십세의 노인에게 존재한다. 단지 연령의 숫자로 늙었다고 말할 수 없다.
우리는 황폐해진 우리의 이상에 의해 늙게 되는 것이다. 세월은 피부를 주름지게 하지만 열정을 버리는 것은 영혼을 주름지게 한다. 고뇌. 공포. 자기불신은 마음을 굴복시키고 흙속으로 영혼을 되돌아 가게 한다.
육십이든 열 여섯이든 모든 인간의 마음속에는 경이로운 것에 대한 매혹. 무언가에 대한 끊임없는 욕망, 삶 속의 환희가 존재한다면 희망. 희열. 용기와 힘의 메세지를 갖는 한 그대의 젊음은 오래 지속되리라.
안테나가 내려지고 그대의 영혼이 냉소의 눈과 비관의 얼음으로 덮이면 이십세라도 늙은 것이다. 그러나 그대가 안테나를 올리고, 낙관주의 물결을 잡는다면 그대가 팔십세 일지라도 청춘으로 살 수 있으리라.
혹씨 당신의 마음속에 아름다운 장미꽃을 키우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시간을 내어 물을 주고, 잡초도 뽑아주고, 다듬어 주고 그리고 매일 매일 잊지말고 바라봐 주어야 합니다. 그래야 그 꽃이 내 삶 한가운데에 들어와 단 하나뿐인 나의 장미꽃 한 송이가 됩니다. 그것이 나를 사랑하는 일입니다.
人生이 머..! 별것이던가요! 내 마음이 있는 곳에 내 인생이 있고, 내 행복이 있답니다. 내가 유쾌하면 내 인생엔 웃음꽃이 피어날테니 말이지요. 내가 변하지 않고는 아무것도 변한는게 없습니다. 내 인생은 내가 만듭니다. 오늘 당신이 즐겁고 그리고 희망을 함께 나누는 날이면 참 좋겠습니다.
회원 여러분..! 상당히 덥군요! 더운 날씨 탓에 몸도 마음도 지치기 쉽습니다. 늘 건강 조심하시고, 긍정적인 마음 늘 유지하시고 즐겁게 지내시기 바랍니다. 늘 좋은 일들로 가득하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소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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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이 좋은 기회를 또 놓쳤으니 참으로 언짢기 이를데 없습니다. 배낭에 매실주와 북어안주까지 쑤셔넣고 기다렸는데
애통하게도 첫째사돈(예공군중령 국방부근무)이 건강이 악화되어 타계하는 바람에 주저앉아야 했습니다. 사돈이지만 같은 나이라 더더욱 안타깝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생존해계시던 망자의 모친께서 바로 담날 또 사망하시는 바람에사위와 딸이 말이 아닙니다. 살다보니 이런일도 있군요. 주변옛지기들의 부음이 자주들리는 요즘입니다. 창조주의 섭리 적용이야 어쩔 도리가 없겠지만 우리 224기 동기생들께서는 각별히 건강에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이번 인천 상륙작전 현장을 돌아본 월산회 동기들에게 힘찬 박수를 보냅니다.
정재성 고문님, 어떻게 위로를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가뵙지 못하여 죄송 합니다.
푸른 파도와 갈매기떼 반겨 맞아주는 무의도 해변에서의 이벤트에 인천상륙작전의 격전지를 조망하며 간직하고픈 추억을 듬북 만들어 일행을 한층 젊게 만들어준 박봉수 회장님과 운전하느라 술도 한잔 못하고 노고가 많았던 홍현균 고문님 그리고 촬영하느라 동분서주하여 이렇게 멋진 작품으로 편집하여 띄워준 소병철 작가님께 감사를 전합니다. "월산회 화이팅!"
앗~차.
이렇게 좋은 기회를 또 놓쳐버렸네요.
인천상륙작전 현지 답사 한것같은 글과 그림. 공부 잘했습니다.
항상 이렇게 좋은글과 그림 감사합니다.
더 크게 아름다운 여행이 지속적으로 이루어 지기를 월산회 바라며 함께 동참한 회원님들 수고 했습니다.
머지않아 함께 항상 동참 할것으로 기대하여 봅니다.
월산회 회장님 더 아름다운 금수강산 탐방을 하도록 바라며.
좋은 글과 그림 작성해서 올리는 작가 소병철 동기생 감사합니다.
더 큰 금수강산 탐방이 이루어 지기를 월산회 기대 하겠습니다.
항상 더 큰 월산회 "화이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