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롬 4:1-8
▣ 믿음으로 의롭게 됨-로마서 4장-
어떻게 하든 이 장을 완전히 습득하라 ! 본 장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을 통하여 어떻게 불경건한 사람들을 의롭다고 하시는가(의를 선언함)를 설명한다.
“구원“은 넓은 의미로 사용되는 용어로,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모든 일들을 포함한다. “칭의“는 법적인 용어로, 그리스도의 의를 입고 하나님 앞에 온전히 서게 되는 것을 말한다. 본 장에서 바울은 칭의에 대한 세 가지 위대한 사실들을 입증하기 위하여 아브라함의 예를 들고 있다.
1. 칭의는 행위로써가 아니라 믿음으로 말미암는다(4:1-8)
모든 유대인은 “조상 아브라함“을 존경하였으며 창세기 15장 6절을 통하여 아브라함이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하심을 받았음을 알고 있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영접을 받은 것은 너무도 분명하여, 그들은 하늘을 “아브라함의 품“이라고 말했다. 이것을 아는 바울은 아브라함을 지적하며 묻는다! 우리 육신의 조상 아브라함은 어떻게 의롭다하심을 받았는가?“
행위로써였는가? 아니다. 만일 그렇다면 아브라함은 그가 성취한 일로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했을 것이지만, 구약에는 그러한 기록은 없다. 구약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창 15:1-6)라고 말한다. 의의 선물은 행위를 통하여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계시된 말씀을 믿음으로써 왔다.
바울은 그의 논급에서 “여기다(reckon), 전가하다(impute), 간주하다(co-unt)“라는 단어들을 사용한다(3-6, 8-11, 22-24절). 이러한 단어들은 모두 “어떤 사람의 구좌에 넣는다“는 같은 뜻을 가지고 있다. 칭의란 나에게로 의가 전가되어(내 구좌에 넣음), 하나님 앞에서 올바른 위치를 얻는 것을 뜻한다. 성화란 의를 나누어 받아(내 생활의 일부가 됨) 사람들 앞에서 올바른 위치를 얻고, 내가 그리스도인인 것을 그들이 인정하는 것을 뜻한다. 이것은 야고보서 2장 14-26절에서 언급하듯이 둘 다 구원의 일부이다. 만일 나의 생활이 하나님께 대해 신실함(faithfulness)을 나타내지 않는다면 하나님을 믿는다(fa-ith in God)고 말하는 것이 무슨 유익이 되겠는가?
구원이란 행위로 인하여 얻는 상급이거나, 아니면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이거나 둘 중의 하나이다. 둘 다일 수는 없다. 5절은 하나님께서 불경건한 사람들을(의로운 사람들이 아님) 의롭다고 하시는데, 이것은 행위가 아니라 믿음을 통해서라고 말한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이 종교적인 사람들을 그들의 행위에 근거하여 의롭다고 하시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러나, 바울은 “조상 아브라함“이 단순히 믿음으로 구원을 받은 것임을 입증하였다.
다음으로 바울은 다윗을 언급하며 시편 32편 1-2절을 인용하여, 이스라엘의 위대한 왕이 행위와는 별도로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워진다는 사실을 가르쳤음을 입증하였다. 하나님은 죄를 우리에게로 돌리지 않으신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리스도께로 위임되었기 때문이다(고후 5:21). 오히려 하나님은 순전히 은혜의 기초에 입각하여 우리에게로 그리스도의 의를 전가하신다. 우리는 얼마나 놀라운 구원을 가진 것인가 !"
롬 4:9-17
2. 칭의는 율법이 아니라 믿음으로 말미암는다(4:9-17)
이제 중요한 질문이 제기된다. 만일 구원이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라면 율법은 대체 무엇인가?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세우신 언약은 어떻게 되는가? 바울은 아브라함의 믿음과 구원이 그가 할례를 받기 14년 전에 생긴 일임을 지적함으로써 이 질문에 답한다 ! 할례는 언약의 징표였으며 유대인 자녀가 율법 체제의 일부가 되게 하는 의식이었다. 그러나, 유대인의 “조상“으로서 아브라함은 그가 구원을 받았을 때에 할례받지 않은 “이방인“이었다 !
할례는 세례(침례)와 같이 단순히 내적인 변화에 대한 외적인 표시일 뿐이다. 육체의 의식이 영적인 변화를 산출할 수는 없다. 그러나, 바울 시대의 유대인들은 오늘날의 많은 “종교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외적인 표식인 의식을 믿었으며, 그들에게 요구되는 구원받게 하는 믿음을 모르고 있었다. 아브라함은 사실상 모든 믿는 자들의 “조상“이며 “믿음의 집“에 속한 모든 사람의 “아버지“이다(갈 3:7/갈 3:29). 바울이 2장 27-29절에서 지적하였듯이 모든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이스라엘인 것은 아니다.
13-17절에서 바울은 1-8절에서 믿음과 행위를 대조시킨 것처럼 율법과 은혜를 대조시킨다. 여기서 핵심이 되는 단어는 약속이다(13, 14, 16절).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세상의 상속자“가 되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은(여기서 “세상“이란 약속된 씨인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통치를 받는 영광된 왕국을 가리킴) 율법이나 할례에 연관된 것이 아니라 순전한 은혜로 말미암은 것이다! 15장을 다시 읽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개입하셔서 그의 영광스러운 약속을 주셨을 때는 “그 자신은 끝났을 때“였음에 유의하자.
아브라함이 해야 할 모든 것은 믿는 일 뿐이었다 ! 율법은 누구를 구원하기 위하여 주어진 것은 결코 아니다. 율법은 진노를 가져오며 죄를 드러낼 뿐이다. 율법이 은혜를 완전히 무효화함과 마찬가지로, 행위는 믿음을 무효화시킨다. 두가지가 나란히 존재할 수는 없다. 아브라함은 율법이 아직 주어지지 않았을 때어떻게 구원을 받을 수 있었겠는가?
바울은 16절에서, 칭의는 은혜로 말미암아 믿음을 통하여 오는 것이며, 따라서 모든 사람들 곧 유대인과 이방인들은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결론을 지었다 ! 그러므로 아브라함은 유대인들의 육신적인 조상일 뿐아니라, 믿음의 발자취를 따르는 모든 사람의 아버지이다(은혜와 율법에 대해서는 갈 3장 참조)."
롬 4:18-25
3. 칭의는 인간의 노력으로가 아니라 부활의 능력으로 말미암는다(4:18-25)
첫 부분에서는 믿음과 행위를 대조시켰고(1-8절), 둘째 부분에서는 율법과 은혜를 대조시켰는데(9-17절), 이제 세번째로, 생명과 죽음을 대조시킨다(18-25절). 17절에서 바울은 하나님을 “죽은 자를 살리시는“ 분으로 밝히고 있음에 유의하자. 실제로 아브라함과 사라는 죽은 사람들로서, 그들의 몸은 아이를 낳을 연령에서 많이 지나 있었다(히 11:11-12). 어떻게 90세와 100세인 사람 둘이서 아들을 가질 것을 바랄 수 있겠는가 ! 그러나, 육체가 죽어 있을 때, 성령의 부활의 능력은 일할 수가 있는 것이다!
우리는 아브라함의 믿음에 놀라는 것이 당연하다. 그가 가진 것이라고는 자신이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될 것이라는 하나님의 약속뿐이었으나, 그가 이 약속을 믿었을 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축복을 받았다. 참으로 구원의 기적을 보여 주는 완전한 예증이라 하겠다 !
사람이 육신을 의존하고 있으며 하나님을 기쁘게 할 힘을 아직 충분히 가지고 있다고 느끼고 있는 한, 그는 의롭다 하심을 결코 얻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자신에 대해서 포기하고, 자기가 죽은 것을 인정하여 투쟁하기를 멈추면, 그때 하나님은 그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으켜 새 생명을 주시며 하나님 앞에 완전히 서게 하신다. “믿음에 견고한 것“(20절)이 인간을 구원하지만, “육신에 강한 것“은 구원하지 못한다. 아브라함을 의롭게 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단순한 믿음이었으며, 이것이 바로 오늘날 사람이 의롭게 되는 방법이다.
그러면, 아브라함은 특별한 사람이었는가? 24절은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하나님은 이 진술을 아브라함을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들을 위하여 그의 말씀에 기록하셨다. 우리는 그와 똑같은 방법으로 구원을 받는다. 곧, “우리가 믿는 것“이다 ! 믿는다는 말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로마서에서 알아보라(1:16/3:22/3:26/4:3/4:24/5:1/10:4/10:9-10 등).
죄인이 말씀 가운데 기록된 하나님의 약속을 믿을 때, 똑같은 부활의 능력이 그의 생애에 들어와 그리스도인이 되고, 믿음의 아브라함과 같이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 죄인은 자신이 죽은 사람임을 고백하고 그리스도께서 살아계심을 믿어야 한다.
마지막 구절(25절)은 칭의의 기초, 곧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설명한다. 바울은 5장에서 이에 대해 상세히 다루고 있다. 이 구절은 다음과 같이 읽어야 마땅할 것이다. “우리의 범죄함을 인하여 내어 준 바되었으며 우리를 의롭다고 하시기 위하여 다시 살아나셨다.“
그가 죽으셨다는 사실은 우리가 죄인들임을 입증한다. 또한, 하나님께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리스도를 일으키신 사실은 우리가 그의 피로써 의로워졌다는 사실을 입증한다. 이것은 칭의가 부활의 능력에 관한 문제이며 육신의 연약한 노력의 문제가 아님을 다시 한 번 증거한다.
본 장의 전체를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행위 믿음
보상 가(이) 아니라 ==> 선물 (으)로 하나님께 의롭다
율법 은혜 하심을 얻는다: 칭의
인간의 노력 부활의 능력"
롬 5:1-11
▣ 하나님과의 평화-로마서 5장-
본 장은 4장에 나오는 마지막 말, 곧 “의롭다하심“을 설명하는 것이다. 신약의 어떤 장이라도 본 장보다 더욱 상세하고 더욱 중요한 장은 없다. 우리가 믿음으로 의로워지는 것의 뜻을 이해하려면 필수적으로 바울의 논점을 파악해야 한다.
1. 칭의의 축복(5:1-11)
칭의란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다“는 것을 하나님께서 선포하시는 것임을 명심하자. 이것은 나에게 전가된 의, 내 구좌에 넣어진 의이다. 성화는 나누어받은 의, 곧 성령으로 말미암아 나의 삶을 통하여, 그리고 그 안에서 성취된 의이다. 칭의는 하나님 앞에 선 나의 지위이며, 성화는 내 앞에 전개된 지상에서의 나의 신분이다. 칭의는 결코 변화되지 않으나, 성화는 변한다. 칭의를 통하여 우리가 가지는 축복을 살펴보자.
1)평화를 갖는다(1절)-우리가 원수였을 때가 있었으나(10절) 이제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평화를 누린다. 하나님과 평화를 누린다는 뜻은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죄의 문제가 해결된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아버지시며, 심판자가 아니시다.
2)하나님을 대면한다(2상반절)-이것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의 새로운 지위로 말미암은 것이다. 구원을 받기 전에 우리는 “아담 안에“ 있었으며 정죄를 받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 앞에서 완전한 지위를 가지고 있으며, 하나님의 존전에 출입할 수가 있다(히 10:19-25).
3)소망을 갖는다(2하반절)-직역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누릴 소망을 자랑한다“는 뜻이 된다. 에베소서 2장 11-12절을 읽고 구원을 받지 않은 사람은 “소망이 없음“을 살펴보자. 우리는 선한 행위로 구원을 가져온다고 자랑할 수는 없으나(엡 2:8-9),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놀라운 구원을 자랑할 수는 있다. 이것은 “복된 소망“이다(롬 3:23/롬 5:2 비교).
4)일상적인 신념을 갖는다(3-4절)-“우리는 환난 중에서도 즐거워한다“(자랑한다, 영광으로 여긴다). 참된 그리스도인은 장래에 대한 소망을 가지고 있으며, 또한 생활 가운데 부딪히는 현재의 시련들 가운데서도 신념을 가진다. 우리는 시련이 끝났음을 영광으로 여기거나, 시련의 주변에서 영광스러워 하지 않고 시련 가운데서 영광을 누린다(마 13:21/살전 1:4-6/약 1:3 이하 참조).
이것은 다음과 같은 공식으로 간단하게 표현할 수 있다.
-시련+그리스도=인내
-인내+그리스도=성품(경험)
-경험+그리스도=소망
5)하나님의 사랑을 갖는다(5-11절)-내주하시는 성령은 우리를 통하여 우리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발산하신다. 하나님은 우리같이 “무력하고“, “경건하지 못하며“, “죄인들이고“, “원수들“인 사람들을 위하여 죽으심으로써 십자가에서 그의 사랑을 나타내셨다. 바울이 말하는 점은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가 원수였을 때에 이 모든 일을 행하셨다면, 이제 그의 자녀들인 우리를 위하여는 얼마나 더한 일을 하실까“ 하는 것이다.
우리는 그의 죽으심으로 구원을 받는다(9절). 그러나, 우리는 또한 “그의 부활의 능력“이 우리의 삶에서 작용할 때(빌 3:10) 그의 생명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는다(10절). 우리는 “화목함“을 얻었으며(11절-속죄) 이제는 우리의 생활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한다."
롬 5:12-21
2. 칭의의 기초(5:12-21)
이 부분은 복합적인 부분이다. 여러 번 읽고 현대 번역본을 사용하도록 하자. 바울은 여기서 어떻게 모든 사람이 죄인이며, 한 사람(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어떻게 거룩하지 못한 죄인이 하나님 앞에서 의로운 지위를 얻을 수 있는가를 설명하고 있다.
1)첫 아담과 마지막 아담-제일 먼저 “한 사람“이란 말이 여러 번 반복되는 것에 유의하자(12, 15, 16, 17, 18, 19절-11회). 14, 17, 21절에서는 “왕노릇하다“는 단어가 사용된 것에 주목하자. 핵심이 되는 사상은 하나님께서 인류 전체를 보실 때 아담과 그리스도의 두 사람으로 보신다는 것이다. 모든 인간은 “아담 안에“ 있어 잃어버림을 받았거나 아니면 “그리스도 안에“ 있어 구원을 받았다. 중간 지점이란 없다.
14절에서는 아담을 그리스도의 모형(표상)으로 언급하는데, 그는 “첫아담“이요 그리스도는 “마지막 아담“이다(고전 15:45). 두 아담을 다 음과 같이 대조시킬 수 있다.
첫아담 마지막 아담-그리스도
흙으로 만들어짐(고전 15:47) 하늘에서 오신 주님(고전 15:47)
옛창조의 왕(창 1:26-28) 새 창조의 주님(고후 5:17)
완전한 동산에서 시험을 받아 실패함 광야에서 시험을 받고 승리함
죄와 죽음과 정죄를 가져옴 의와 생명과 칭의를 가져옴
죽음이 통치함(5:14/5:17) 믿는 자, 은혜가 통치함(17, 21절)
많은(모든) 사람들이 죄인이 됨(19절) 믿는 자는 의인이 됨(19절)
우리는 육신의 출생을 통하여 우리는 영적인 출생을 통하여
“아담 안에 있음“ “그리스도 안에“ 있음
구약은 아담의 세대들에 관한 책이며(창 5:1-2) “저주“(말 4:6)라는 말로 끝을 맺는 반면에, 신약은 예수 그리스도의 세대들에 대한 책이며(마 1:1) “더이상 저주가 없다“는 말로 끝난다(계 22:3). 아담이 잃어버린 창세기의 낙원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하여 회복되었다.
바울이 여기서 교훈하는 것은 아담 안에 있는 인류의 단일성이다(행 17:26 참조). 그가 12절에서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다“고 말할 때, 이것은 우리 모두가 아담이 죄를 범했을 때 아담 안에서 죄를 지었음을 의미한다. 우리는 그와 동일시되고 있으며, 그의 죄는 우리의 죄이고 그의 죽음은 우리의 죽음이다. 바울은 12-14절에 주어져 있는 논점을 다음과 같이 진행시켜간다.
우리 모두는 사람이 하나님의 율법에 불순종하면 죽는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는 율법이 없었는데도 사람들이 죽었다. 아담이 하나님의 법에 불순종하여 죽었음은 알려진 바이나,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의 사람들은 그와 같은 법에 불순종한 일이 없었다. 그렇다면 죽음에는 또다른 이유가 있는 것이 분명한데, 그 원인이 바로 아담의 죄이다. 우리는 “아담 안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그의 죄와 저주를 물려 받았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은혜로 “마지막 아담“을 주셨는데, 이는 그의 삶과 죽음을 통하여 아담이 죄 가운데서 행한 모든 것을 풀어 놓으신 새로운 “머리“이시다.
2)구원과 죄-바울은 이제 구원과 죄 사이의 대조점들을 몇 가지로 제시한다.
-범죄 대(vs.) 값없는 선물(15-16절)-아담의 범죄는 정죄와 죽음을 가져왔다. 반면에, 하나님께서 거저 주시는 은혜의 선물은 의와 생명을 가져왔다.
-죽음 대 생명(17절)-아담의 죄로 인하여 죽음이 왕노릇하였으나, 이제는 우리가 그리스도를 통하여 생명 안에서 다스리며(미래의 일이 아님), 풍성한 삶을 누린다 !-정죄 대 칭의(18절)-아담의 죄는 인류를 저주 가운데로 밀어 넣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죽음은 하나님과 바른 지위를 가지도록 하였다. 아담은 하나님으로부터 숨었는데,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자유로이 대면한다.
-불순종 대 순종(19절)-아담은 하나님께 불순종하였으며 우리를 죄인되게 하였다. 반면에, 그리스도는 하나님께 순종하셨으며, 그를 믿는 믿음을 통하여 우리는 의롭게 된다.
-율법 대 은혜(20절)-하나님은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율법을 주신 것은 아니다. 이는 인간의 죄를 나타내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차고 넘치는 은혜는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해 율법의 요구에 응하셨다. 그리하여 율법이 제공할 수 없는 것, 즉 죄로부터의 구원을 공급하셨다.
지금까지의 전체적인 논급이 20절에 요약되어 있다. 새로운 창조에서는(고후 5:17 -“그리스도 안에“ 있는 존재를 의미함) 더이상 죄가 다스리지 못하며 은혜가 왕노릇한다. 죽음이 다스리지 못하며 생명이 다스린다. 그리고 우리는 생명 안에서 다스린다 ! “주님은 우리를 하나님께 대하여 왕들과 제사장들이 되게 하셨다(계 1:5-6).
3)문제의 제기-이제 중요한 질문은 “나는 아담 안에 있는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가“하는 것이다. 만일 내가 “아담 안에“ 있다면 죄와 죽음이 나의 삶을 다스리며 나는 정죄 아래 있다 반면, 내가 “그리스도안에“ 있다면 은혜가 통치하며, 나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통치한다. 죄는 더이상 나를 노예로 삼지 못한다(6장의 주제).
5장 6-11절에서 바울은 대속(그리스도께서 나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셨다)을 가르친다. 그러나, 5장 21절에서는 좀더 수준을 높여 일체성(나는 그리스도 안에 있으며 죄와 죽음에서 자유롭게 되었다)을 가르친다. 할렐루야, 참 구주가 아니신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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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가적 해설-로마서 6-8장-
오늘날 교회는 신자들의 생활에 있어서 실천적인 거룩함을 강조해야 할 절실한 필요를 느낀다. 만일 진실로 거듭났다면 모든 그리스도인은 로마서 5장에서 살고 있다. 그러나, 6장과 8장으로 진행해 나가는 사람들은 극소수이다 ! 우리가 성화에 관한 이 부분의 의미를 이해해야 하는 것은 필수적인 일이며, 이해할 뿐만 아니라 그러한 삶을 살아야 한다.
▣ 정의:“성별“이라는 것은 단순히 “따로 떼어 놓는다“는 말이다. 성별은 반드시 사물의 본성을 따지지는 않으며 다만 하나님과 연관된 그 위치만을 말한다. 성막과 그 가구들은 성별되었는데,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도록 따로 떼어 놓았다. 나무, 옷, 금속, 다른 재료들 그 자체가 “거룩한“ 것은 아니다. 다만 하나님께 따로 떼어 놓여진 것이다.
요한복음 17장 19절에서 예수님은 '내가 나를 거룩하게 한다“고 말씀하신다. 거룩하신 하나님의 아들이 본래보다 “더욱 거룩하게“ 될 필요가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 그가 말씀하시는 뜻은 하나님을 섬기기 위하여 스스로를 따로 떼어 놓는다는 뜻이다. 그는 구원을 통하여 신자들을 하나님의 영광 속에 따로 떼어 놓으실 수 있다.
성경에 나오는 성화는 삼중적이다.
-위치상의 의미- 그리스도인은 세상으로부터 옮겨져 그리스도와 함께 앉아 있다(요 17:16)
-실천적인 의미- 죄를 날마다 극복하여 이기며, 거룩함과 그리스도를 닮음에 있어 점차적으로 장성한다.
-완성- “우리는 하나님이 어떠하신지를 있는 그대로 알 것이기 때문에 그 분과 같이 될 것이다!“
▣ 범위:우리가 만일 로마서 6장의 멧세지를 로마서 7장의 멧세지와 분리시켜 생각하지 않으면 바울의 멧세지를 혼동하게 되어 큰 축복을 잃게 될 것이다. 다음의 표는 로마서 6장의 멧세지와 로마서 7장의 멧세지의 차이를 설명한다.
로마서 7장은 로마서 6장에서보다 더욱 깊은 문제를 제시한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그의 육적인 본성이 그를 끌어내려 노예로 삼고자 한다는 로마서 6장의 문제를 깨닫고 있다. 하지만 로마서 7장의 경험, 곧 “우리는 선하지 않다“는 겸손한 깨우침으로 들어가는 그리스도인은 많지 않다.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율법 아래 산다. 이들은 규율과 규칙의 연속 가운데에서 살며 육신적인 힘을 사용하여 종교적으로 순종하면서, 이러한 생활을 “헌신된 그리스도인의 삶“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이와는 거리가 먼 것이다 ! 성령께서 안으로부터 우리의 삶을 인도하실 때, 우리는 사랑하는 마음으로 순종하며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게 된다.
로마서 6장 로마서 7장
우리가 은혜를 풍성하게 하기 위해서 우리의 본성이 이처럼 죄악된
계속해서 범죄할 것인가? 것일 때 어떻게 죄아닌 다른 일을
행할 수 있겠는가?
죄의 몸에 속박당함 율법과 규율과 규칙에 속박당한
우리가 죄에 대해 죽음 우리가 율법에 대해 죽음
종과 주인에 대한 예증 한 아내와 두 남편에 대한 예화
문제의 제기:내가 죄악된 본성을 문제의 제기:나의 죄악된 본성에
가지고 있을 때 어떻게 악을 행치 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선을 행할
않을 수 있는가의 문제 수 있는가의 문제
문제의 해결: 문제의 해결:
-죄에 대해 죽었다고 앎 - 율법에 대해 죽었다고 앎
-믿음으로 자신을 죽었다고 여김 -육신으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음을 시인함
-하나님께 양도함 -성령께 양도함
육은 “종교적으로 되는 것“을 즐거워하며 율법과 규례에 순종하려고 노력한다. 육에 관하여 가장 속기 쉬운 것은 육이 실재에 있어서는 하나님의 원수인데도 불구하고, 대단히 거룩하고 대단히 영적으로 나타나 보일 수 있다는 점이다. 로마서 6장은 악을 생성하는 육을 다루며, 7장은 율법을 통하여 “선“을 생성하는 육을 다룬다.
▣ 육체:이 말은 몸이라는 뜻이 아니라, 그보다는 하나님의 영향과 능력으로부터 떠나 있는 인간의 본성을 말한다. 여기서 육을 나타내는 다른 용어들이 사용되고 있는데, 옛 사람, 죄의 몸, 자아(self /“나“) 등이다. 정련된 사람들(그리스도인들조차)이 우리 안에 아무 선한 것이 없다고 인정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성경이 육에 대하여 말하는 것은 모두 부정적이다. 신자가 스스로 육신을 조절할 수 없으며, 육을 변화시킬 수 없고, 육을 정결케 할 수 없으며, 스스로 육을 정복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게 될 때까지는 결코 로마서 8장의 생명과 자유에 들어가치 못할 것이다. “탁월한 바리새인“인 바울도(빌 3장 참조) 로마서 7장에서, 그의 육은 하나님의 법에 순종하지 않는다고 인정해야만 했다. 아마도 바울은 외적으로 나타나는 죄는 범하지 않았을 것이지만 내적인 마음가짐을 품었을 것은 분명하다. 하나님의 율법은 거룩하고 선하지만, 거룩한 법이라 할지라도 죄악된 육을 조절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이러한 진리는 잘 교육을 받은 신자들에게조차도 하나의 충격으로 밀어 닥친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하나님을 위하여 “선한 일을 하려고 노력하는“ 육의 에너지로써 살게 되는 것이 아니다. 이 땅의 어떤 신자이든 육으로는 아무리 경건하더라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 !
우리는 육체가 아무 유익을 줄 수 없음을 인정하고 성령께 항복(또는 헌신)해야만 한다. 그래야만 하나님이 우리의 생에 대해 “정죄함이 없다“고 말씀하시는 음성을 들을 수 있다. 율법, 결의, 규율의 속박 아래 산다는 것은 얼마나 비극인가 ! 우리는 성령을 통하여 영광된 자유로 부름을 받은 것이다 !
▣ 십자가에 대한 두 가지 면: 로마서 5장은 개요 부분에서 “구원“이란 제목을 붙이기는 했지만 이 토론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로마서 5장과 6, 7장 사이의 대조점들을 살펴보자.
로마서 5장 로마서 6, 7장
대속-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 연합-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음
하여 죽으심
그리스도께서는 나의 죄를 대신 그리스도는 죄에 대하여 죽으시고
하여 죽으셨으며 죄의 형벌을 죄의 능력을 파괴하심
치루심
칭의-하나님은 그의 관점에서 성화-하나님께서 나를 사람들 앞에
나를 의롭다고 선언하심 의롭게 하심
의가 전가-내게로 돌려짐 의의 분여-의가 성령을 말미암아
내 생활의 일부가 됨
믿음으로 아담에게서 나와 믿음으로 육신과 율법의 영역에서
“그리스도 안에“ 들어감 나와 성령의 영역으로 들어감
다른 말로 하면,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죄로부터 구원을 받는 일보다 더욱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십자가는 내가 “생명 안에서 다스리며“ 승리와 평화와 능력을 가질 수 있게 한다.
▣ 우리의 책임: 그리스도인의 삶은 수동적인 것이 아니다. 우리는 다만 “죽어 있고“ 하나님께서 모든 일을 하시는 것이 아니다. “알라, 여기라, 양도하라(드리라)“ 이것은 6장에 나오는 핵심 단어들이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의 영적인 지위와 특권을 알아야 하며, 이것은 곧 하나님의 말씀으로 더불어 시간을 보낸다는 뜻이다. 우리는 성경에서 하나님이 우리에 대해 말씀하신 것을 우리의 삶에서 “진실하다고 간주하여야“ 한다. 이것은 성령으로 난 믿음을 뜻한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모든 일을 성령께 양도해야 한다. 일 주일에 한 번이나 또는 매일의 시작에서만 아니라 하루종일 드려야 한다. 이것은 “성령과 더불어 행하는 것“을 뜻한다.
옛 성품은 악을 행하는 데 강하나, 영적인 일을 할 때 “육은 약하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의 양식으로 새로운 성품을 먹여야 한다. 그리고, 옛 성품은 죽은 것으로 여겨야만 한다. 죽은 사람에게 먹여야 할 이유가 있겠는가? 그러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세상과 육신의 찌꺼기로 옛 성품을 먹이고 있다. 그러는 동안 새로운 성품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만나와, 기도 중에 가지는 하나님과의 교제에 굶주려 있다. 하나님은 이미 자신의 역할을 감당하셨다. 우리의 책임은 명백하다. 알고, 여기고, 드리라!"
행 6:1-10
▣ 부활을 통한 구원-로마서 6장-
우리는 이제 성화에 대해 다루는 로마서의 세번째 부분(6-8장)으로 이동한다. 이 세 장은 함께 속해 있어서 독립적으로 연구될 수는 없다. 따라서, 이 세 장을 주의깊게 모두 읽는 것이 현명할 것이다. 6장은 죄에 대하여 죽은 신자를 다루며 7장은 율법에 대하여 죽은 신자, 8장은 성령이 주시는 승리 가운데 살아 있는 신자를 다루는 것에 유의하자.
이 세 장들은 모두 5장 17절의 “생명 가운데 왕노릇한다“는 짧은 구절을 설명하는 것이다. 6장은 어떻게 죄가 더이상 우리를 다스리지 못하는가를 설명하며(6:12), 7장은 어떻게 율법이 더이상 우리를 다스리지 못하는가를 설명한다(7:1). 그리고 8장은 내주하시는 성령이 어떻게 우리에게 생명과 자유를 주시는지를 설명한다(8:2-4).
사람이 구원을 받은 후에는 두 가지 문제에 부딪힌다. 즉, 어떻게 하면 옛 성품(육, 죄의 몸)을 이기고 승리를 거둘 수 있는가 하는 문제와,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 수 있을까 하는 것이다. 6장은 첫번째 질문에 답하고 있다. 옛 성품은 죽었으며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다는 것을 깨달음으로써, 옛 성품을 이기고 승리한다 !
그러나 두번째 질문은 좀 복잡하다. 내가 행하는 모든 일들은 “선한 일들조차도“ 옛 성품으로 말미암아 부패되었는데 어떻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가? 죄란 단순히 외적인 것만이 아니라 내적 마음 가짐과 성향이다. 7, 8장은 그리스도인이 율법에 대해 죽고 성령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율법의 의를 성취하셨음을 보여 줌으로써 이 문제에 대답한다(8:4). 육을 이기는 비결은 세 핵심 단어에서 찾아볼 수 있다.
1. 알라(6:1-10)
바울이 본 장에서 “알라“는 단어를 얼마나 자주 사용하는지 눈여겨보자(3, 6, 9, 16절). 사단은 우리가 마땅히 알아야 할 영적인 진리에 이르러 우리를 어두움 가운데 두고 싶어한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들의 특권을 누리지 못하고 사는 것은 이 때문이다. 질문자는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은혜를 더욱 알려면 죄 가운데 살아야 한다 !“고 말한다. 바울은 그럴 수 없다고 밝히고 있는데, 그것은 참된 그리스도인은 죄에 대하여 죽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연합시키는 놀라운 진리이다. 그리스도는 나를 위하여 돌아가셨을 뿐아니라,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 ! 성령께서 내게 주님의 몸에 연합하는 세례(침례)를 베푸셨을 때 나는 십자가에서 그의 죽으심에 동참하였다. 3-4절은 물세례(침례)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우리를 주님의 몸의 지체가 되도록 “그리스도에게로“ 밀어 넣으시는 작용을 가리킨다. 그리스도가 죽으셨을 때 내가 함께 죽었으며, 그가 부활하셨을 때 나는 그와 함께 생명의 새로움 가운데 부활하였다. 이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내가 갖는 새로운 지위이다.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돌아가셨을 뿐아니라 죄에 대하여 죽으셨다(6:10). 다시 말하면, 주님은 죄의 능력을 깨뜨리셨고 옛 성품을 “퇴치시키셨다“(파괴하셨다/ 6:6). 옛 성품이 아직도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그 주된 능력이 파괴당한 것이다.
죄와 옛 성품은 마음이 굳은 주인들이다. 구원받지 않은 사람은 죄의 노예이다(엡 2장). 그러나 그리스도인을 다스리던 죄의 지배권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깨어졌는데도 여전히 죄를 섬기는 그리스도인들이 많다 ! 로마서 5장에 이르러 그리스도가 그들의 죄를 위하여 죽으셨다는 것을 발견하고 그리스도를 그들의 마음에 영접하지만, 로마서 6장으로 옮겨가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영광스러운 자유를 발견하지 못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너무도 많다.
6장 1-10절을 다시 읽고 신자는 죄에 대하여 죽었음과(2절), 옛 성품은 십자가에 못박혔음을(6절), 그리고 신자는 죄에서 자유롭게 되었음을(7절) 스스로 알아보라 ! 옛 성품은 더이상 그리스도인에게 왕노릇할 수 없다 !"
행 6:11
2. 간주하라- 여기라(6:11)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의 새로운 지위를 아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우리는 믿음으로 우리의 삶에 있어서 그것을 참된 것으로 여겨야 한다. 여긴다는 말은 “하나님이 성경을 통하여 나에게 말씀하시는 것은 지금 나의 생활에서 참되다.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못박혔다“라고 말하는 단순한 믿음의 단계이다.
여기는 것은 행동으로 나타난 믿음이며, 환경이나 감정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의존하는 행위이다. 하나님은 우리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말씀하시는 않는다. 그보다는 우리가 십자가에 못박혔다는 것을 믿고 옛 성품이 죽음에 넘겨졌음을 믿으라고 하신다. 십자가형은 스스로에게 가할 수 있는 죽음이 아니다. 반드시 다른 사람에 의해서 십자가에 달리게 된다. 여긴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언급되어 있는 것을 믿고 그대로 행동하는 믿음의 단순한 단계이다."
행 6:12-23
3. 양도하라- 드리라(6:12-23)
만일 신자가 진실로 자신을 죄에 대해 죽은 것으로 간주한다면 그는 믿음을 입증할 것이다. 이것은 옛 성품, 육을 이기고 승리하는 과정에서의 세번째 단계이다.
12절에서 단호하게 “...하지 못하게 하라 !“고 말한 것에 유의하자. 이것은 우리 자신의 의지로 말미암는 행위이며, 주님께 순종하는 한 단계이다. 이 놀라운 교리를 아는 것으로, 또는 그렇다고 여기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하다. 우리의 몸의 지체들을 그리스도께 드리는 마지막 단계를 취해야만 한다.
16-23절에서 그는 종과 주인의 예를 들고 있다. 두 주인을 섬길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우리가 구원받기 전에는 우리 자신을 죄에게 양도함으로 우리는 죄의 종이었으며 죄의 삯인 죽음을 받았다(23절).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영접함으로써 죄로부터 자유로와지게 되었다. 즉,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의 새로운 지위는 새로운 본성과 더불어 새로운 주인을 맞게 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제 죄의 종이 아니라 의의 종이다! 몸의 지체들을 그리스도께 “도구“ 또는 “병기“로 드렸을 때, 그는 우리의 생활을 조절하시며 우리는 거룩함의 열매를 맺게 된다(22절).
고의적으로 자신을 죄에 복종시키는 그리스도인은 죄를 범하고 있는 것이며, 추수 때에 슬픔을 거두게 될 것이다. 우리가 죄에 대하여 죽었는데 죄가 우리의 주인이 되어야 할 이유는 무엇인가?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미 패배한 주인에게 순종해야 할 이유가 있는가?
너무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고의적으로 자신을 죄에게 굴복시키기 때문에 죄에 순종하고 있다. 그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승격된 자신의 지위보다 아래에 살고 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통하여 “생명 안에서 다스리며“ 왕과 같이 살 수있는데도 노예처럼 살고 있는 것이다.
4. 세 단계에 대한 재고찰
이 세 단계를 순서대로 유지하는 것은 중요하다. 그리스도인은 먼저 자신을 죄에 대하여 죽고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 있다고 여기지 않고는 하나님께 자신을 굴복하며, 육신을 극복하고 승리할 수 없다. 하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의 위치를 알지 못하고서는 자신을 죽은 사람으로 간주할 수는 없다. 사단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가지는 우리의 특권에 어울리게 살게 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사단은 하나님의 아들에 대해 가지는 승리의 관계에 관하여 신자들이 혼동을 일으키게 하려고 노력한다.
그리스도가 나를 위하여 죽으셨음을 아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죽었다는 것을 알아야만 한다. 또한, 나에게 새로운 내적인 성품이 있다는 것을 아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옛 본성은 십자가에서 죽었다는 것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
알고, 간주하고, 양도하는(드리는) 이 세 단계는 육신을 극복하고 매일 승리하도록 인도해 간다. 이 세 단계는 그리스도가 높임을 받은 보좌로 우리를 인도해 간다. 그 곳에서 우리는 주님과 더불어 “생명 안에서 왕노릇한다.“ 거기서 우리는 죄의 노예가 아니라 의의 종이다.
이 세 단계가 일상 생활의 마음가짐을 대표하는 것임을 명심하라. 이 단계들은 어떤 특별한 유혹이 올 때 사용하는 “비상 대책“이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더불어 함께 하는 시간을 갖는 신자는 그가 그리스도 안에서 가지는 위치를 알게 될 것이며, 기도 시간을 갖는 신자는 자신이 죄에 대해 죽었다고 간주할 믿음을 가지게 될 것이다. 그리고, 내주하시는 성령께 자신을 드림으로 승리를 얻게 될 것이다. 결심이나 훈련, 단식, 결의, 개혁, 율법주의, 또는 다른 육신의 방법들로는 신자의 생활에 거하는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승리는 십자가에 못박힘을 통하여 온다(갈 2:20).
워치만 니의 저서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생활“(Watchman Nee, The Normal Christian Life)에서 로마서 6, 7, 8장에 대한 탁월한 자료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은 이 장들에 대한 매우 훌륭한 주석이며 오늘날도 유용하므로, 강력하게 추천하는 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