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운여정> 졸업 65주년 여정
‘역사의목격자’ -고목나무를 만나다(2)-
표민웅 편저 編著
4. 경희궁
인왕산의 정기를 타고, 창창한 수풀속의 경희궁터에서 우리는 6년간 진리를 탐구하였다. 우리를 오늘날까지 지탱해 준 자부심이다. 서운瑞雲이 감도는 곳에서 공부를 했으니 우리는 축복받은 인간이 아닌가?
65주년 행사 일정에 의하면 10월 22일 오후에 경희궁이 있던 모교를 찾는다고 했다.
2014년 9월 25일 55주년 행사를 마치고 LA로 돌아가는 비행기 속에서 쓴 주영세 목사의 글이 생각난다.
「...우리들의 잊을 수 없는 <마음의 고향>이자, <보금자리>인 옛 교정 경희궁터를 방문하였을 때, 아직도 그 궁터에서 떠나지 못하고, 방황하고 있을 우리의 어린 정령精靈들이 어느 구석에서 불현듯 튀어 나올 것 같은 착각 속에서, 보이는 궁은 보이지 않고, 그 옛날, 본관과 특별 교실, 그리고 강당과 체육관, 음악실과 이발관, 도서실, 드넓은 아랫 운동장과 눈싸움을 하였던 윗 운동장, 점심 먹던 방공호 위와 낮 잠자던 뒷동산과 수풀들과 함께, 이미 이 세상을 떠난 친구들의 모습이 아련거려 눈시울을 붉게 하였다...」
조선 후기의 이궁離宮인 경희궁은 1617년(광해군 9)부터 짓기 시작하여 1623년(광해군 15)에 완성되었다. 완공이 된 1623년과 1624년에 인조반정과 이괄의 난이 일어나 창덕궁과 창경궁이 연이어 전소되자 창덕궁이 중건될 때까지 경희궁은 임시 정궁의 역할을 수행하게 되었다. 경희궁이 들어서기 전 이곳에는 인조의 아버지인 정원군의 집이 있었는데, 이곳에 왕기가 서려있다는 이야기가 있어 그 터를 몰수하고 왕궁을 지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광해군은 인조를 견제하기 위해 몰수하였는데 인조의 반정으로 광해군은 폐군廢君이 되는 신세가 되었다. 조선 후기에 많은 왕들이 경희궁을 이궁으로 애용했다. 특히 이곳에서 태어난 숙종은 왕세자 경종에게 정사를 맡기고 이곳에서 여생을 보냈다. 인조 이후 철종에 이르기까지 10대에 걸쳐 임금들이 이곳 경희궁을 이궁으로 사용하였고, 특히 사도세자가 죽은 창경궁을 피해 영조는 치세의 절반을 이곳에서 보냈으며, 정조 즉위식도 이곳에서 거행되었다..
경희궁에는 정전인 숭정전을 비롯하여 편전인 자정전, 침전인 융복전, 회상전 등 100여 동의 크고 작은 건물이 있었다.
사진#5. 1970년대 서울고 전경
그러나 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경희궁에 있던 건물의 상당수를 옮겨갔으며, 특히 일제가 대한제국을 강점하면서 경희궁은 본격적인 수난을 맞이하였다.
1910년 일본인을 위한 학교인 경성중학교가 들어서면서 숭정전 등 경희궁에 남아있던 중요한 전각들이 대부분 헐려 나갔고, 그 면적도 절반 정도로 축소되었습니다.
이로 인하여 경희궁은 궁궐의 모습을 잃어버렸다.
1946년부터 1980년까지 인왕의 정기를 받으며 왕기가 서린 이 궁터에서 우리와 선 후배들이 열심히 공부하였다.(사진#5)
현재 서울역사박물관이 들어서 있는 운동장에는 해방후 1945년부터 1946년까지 미육군 항공부대가 주둔하였으며 숭정문이 있던 학교 본관과 운동장은 1953년까지 한국전쟁 기간에 영국군이 병영으로 사용하였다.
* 경희궁의 복원
1978년 서울고등학교는 서초동으로 이전 계획이 수립됨에 따라 서울시는 학교 부지를 현대건설에 매각하였고 현대 그룹은 이곳에 사옥을 조성하려 했었다. 그러나 1980년에 경희궁지는 사적 271호로 지정되어 공원 녹지 확보 차원에서 이를 서울시가 재매입했다.
서울시는 1987년부터 경희궁지에 대한 발굴을 거쳐 숭정전 등 정전正殿지역을 복원하여 2002년부터 시민들에게 공개하기 시작하였다.
서울시는 최근 경희궁 일대가 서울광장 10배 규모의 역사문화공간으로 재탄생하는 종합적인 구성안을 마련하였다. 궁의 정문인 흥화문과 승정문 사이의 공간부터 정비하고 2026년까지 순차적으로 궁 전체 모습을 바꾼다고 한다. 올해부터 경희궁 내부에 역사정원 착공, 한양 도성과 정동 사거리에 돈의문 복원, 돈의문 박물관마을 녹지화를 조성하는 사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하였다. 경희궁지와 주변 국립기상박물관, 서울시민대학, 서울시 교육청과 돈의문 박물관마을등 4곳 일대를 역사문화공원으로 탈바꿈하면 서울시의 새로운 랜드마크로 탄생하게 된다.
*경희궁의 노거수老巨樹
사진#6, 경희궁 노거수
흥화문에서 올라가다 보면 왼쪽 비탈 위에 유독 시선을 끄는 커다란 고목이 서 있다. 밑동 가운데가 휑하니 뚤려 괴상한 몸체를 지닌 느티나무 고목이다.(사진#6)
높이 19m, 둘레 3.8m로 수령이 약 380년에 이르니 우리가 처음 보았을 때는 300여 년이 된 노거수다. 이 나무는 ‘종로구 아름다운 나무’로 지정되어 있다. 일생을 경희궁과 함께 하며 대원군의 경희궁 해체, 일제의 만행으로 부서지고 훼손되는 순간들, 1945년대와 6,25시절 외인부대들을 모두 하릴없이 지켜보았을 산증인이리라. 아마도 그 아픔으로 구멍이 뻥 뚫렸을 것이라고 짐작해 본다. 고목 나무 바로 옆에는 음악실이 있었다. 항상 벤드반의 아름다운 연주와 합창반의 노래를 들으며 이 노거수는 풍상을 견뎠으리라.
5. 덕수궁
경희궁을 나와 정동길을 거쳐 덕수궁을 따라 이어지는 만추의 길은 아름다운 산책로다. 돌담길을 걷다 보면 양 옆으로 붉게 물든 나무들이 가을의 색깔을 더해, 한 폭의 그림 같은 풍경을 자아낸다. 특히 돌담과 단풍이 어우러진 모습은 서울 속에서 고즈넉한 분위기를 느낄 수 있는 곳이다,
덕수궁德壽宮은 서울 중구 정동貞洞에 있는 조선과 대한제국의 궁궐이다. 대한민국의 사적124호로 지정되어 있다. 본래 이름은 경운궁慶運宮으로, 아관파천 이후 환궁하여 법궁으로 사용되다가 순종 즉위 후 궁의 이름을 현재의 덕수궁으로 변경하였다. 현재의 영역 외에 선원전, 홍원, 중명전 영역도 덕수궁의 영역으로 모두 이어져 있었으나,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축소되었다.
조선 초기 세조가 남편을 잃고 궁궐을 떠나는 맏며느리 수빈 한씨(인수대비)를 가엽게 여겨 개인 사저로 마련해주었고, 이후 한씨의 차남 자산군(성종)이 보위에 오르게 되어 궁궐에 들어가자 장남인 월산대군이 물려받았다. 임진왜란 이후 선조가 월산대군의 집을 임시로 왕의 거처로 쓰면서 궁이 되었다. 1608년 선조가 죽은 뒤 광해군이 이곳에서 즉위하였는데, 그해 완성된 창덕궁으로 떠나면서 경운궁이라는 궁호를 붙여주었다, 1623년에는 인조가 이곳에서 즉위하였다.
1897년(고종 34)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에서 이 궁으로 거처를 옮기면서 비로소 궁궐다운 장대한 전각들을 갖추게 되었다. 1906년엔 대안문大安門을 수리하여 대한문大漢門으로 개칭하였다. 1907년(순종 1)엔 순종이 즉위 후 궁호가 경운궁慶運宮에서 덕수궁으로 개명되었다.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궁역이 대규모로 축소되고 전각들이 대부분 훼철되어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덕수궁은 가을철에 더욱 아름답다. 궁궐 내부의 나무들이 단풍으로 물들어 전통 건축물과 단풍이 어우러진 고즈넉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특히 덕수궁의 주요 건축물인 정관헌과 석조전 주변은 단풍이 아름답게 물들어 많은 사람들이 찾는 곳으로 가을의 아름다움을 감상하며 쉬어가기에 좋다.
*덕수궁 살구나무
가을 단풍이 아름답지만 덕수궁 석어당昔御堂 앞마당에는 봄을 대표하는 살구꽃이 유명하다.(사진#7)석어당은 궁에서 보기드문 2층 목조건물이다. 성종의 형 월산대군이 살던 집인데 선조가 임란후 한양으로 돌아 온 뒤 궁이 다 소실되어 이 건물을 임시 궁궐로 삼아 여기서 15년이나 살던 집이다. 고풍스러운 2층 전각 앞에 당당한 고목의 모습이지만 따듯한 봄날 살구꽃은 단아해서 좋다. 수령이 100여년 된 살구나무 꽃은 한 폭의 동양화를 연상케 한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살구꽃을 보려고 이곳을 찾는다.(표운飄雲)
표운여정(2) 표 민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