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우크라이나 러시아 전쟁이 일 년을 넘어섰다. 가끔씩 유튜브 영상을 찾아 상황을 알아볼 때 전쟁의 슬픔을 느낀다.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기에 이 전쟁도 끝날 것이다. 다들 정의가 승리하고 인간애가 승리했다고 말하겠지만 악과 죽음과 비인간적인 폭력도 승리할 것이다.
우연히 전쟁을 다룬 통계를 보고 놀랐다. 『역사의 교훈』에서 보니 인류의 3,421년이나 되는 역사 기간에서 전쟁이 없었던 시기는 겨우 268년이다. 이걸 퍼센트로 바꾸니 7.8퍼센트에 불과하다. 1945년부터 1990년대까지의 45년(2,340주) 중 전쟁이 없던 시기는 단 3주였다.
전쟁 문학은 꽤 역사가 깊다. 호머의 『일리아드』나 『오디세이』도 고전으로 읽지만, 내용을 따라가면 전쟁 문학이다. 우리가 하는 스포츠도 사실은 이와 비슷하다. 올림픽 종목인 근대5종(펜싱, 수영, 승마, 사격, 크로스컨트리)은 전쟁 중 군의 명령을 전달하는 과정을 보여 준다.
전쟁을 다룬 소설이 있다. 베트남 전쟁을 다룬 소설도 우리나라에서 여럿 출간되었다. 팀 오브라이언의 『그들이 가지고 다닌 것들』, 반레의 『그대 아직 살아 있다면』, 안정효의 『하얀 전쟁』, 바오 닌의 『전쟁의 슬픔』, 비엣 타인 응우옌의 『동조자』(2016년 퓰리처상 수상작)가 있다.
지금 우크라이나에서 벌어지는 전쟁도 끝이 나면 그 아픔이 소설로도 출간될 것이다. 전쟁은 많은 이에게 깊은 상처를 남긴다. 이들은 전쟁이 아니었다면 평안한 인생을 살았을 텐데 전쟁은 그들의 삶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전쟁이 끝난 지 30년이 지났어도 악몽을 꾼다.
역사책으로 읽는 전쟁과 소설로 읽는 전쟁이 비슷할 것 같아도 엄청 다르다. 역사로 읽으면 대개는 통계가 많이 나온다. 전쟁이 주는 역사적 의미를 말하기 때문에 정치적인 주장도 많이 담긴다. 하지만 소설은 전혀 다른 걸 보여준다. 내가 경험한 전쟁의 슬픔을 보여 준다.
같은 이야기도 경험한 사람이 말할 때는 완전 다르다. 그가 느낀 감정이 단어에 배어서 전달되기 때문이다. 그걸 레마르크의 『서부 전선 이상 없다』나 알렉시예비치의 『아연 소년들』,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를 읽으며 느낀다. 가슴이 아프다 못해 터질 것 같다.
알렉시예비치는 소설가가 아니라 언론인이다. 하지만 2015년 노벨 문학상은 그에게 주어졌다. 그의 책은 르포지만 꼭 소설을 읽는 것 같다. 그가 왜 이것을 썼을까 살펴보니 작가는 기억을 남기고 싶어 했다. 평범한 인생이 겪은 전쟁의 고통이 어떤가를 전해 주고 싶었던 것이다.
나는 이런 전쟁 문학을 읽고 났을 때 SF 소설 『기억 전달자』 속 이야기가 생각났다. 그 세계에선 전쟁과 아픔과 고통을 연상시키는 모든 게 사라진다. 그리고 단 한 사람만 그것을 기억할 역할이 맡겨진다. 그 사람이 기억 전달자이다.
지금은 고통스러운 기억일 테지만 우크라이나 러시아 전쟁도 언젠가 끝이 날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는 그 전쟁을 기억하는 마지막 사람도 세상을 떠날 것이다. 그 후에 우리는 남겨진 기억을 통해 잊혀간 누군가를 기억할지도 모른다. 그날을 위해 작가는 기억을 남긴다.
『서부 전선 이상 없다』에 보면 명문장이 여럿 나온다. 그중에 자주 회자되는 문장이 있다. 한 병사가 ‘도대체 왜 전쟁이란 게 있는 거지’, 하고 물었다. 그 말을 들은 다른 병사가 이렇게 답을 한다. ‘전쟁으로 분명 득을 보는 사람이 있는 거지.’
소설을 읽으면 시체 썩는 냄새, 총알에 맞아 두개골이 날아가는 모습, 포격을 받는 모습, 신병이 중상을 입고 기껏해야 2〜3일을 버티는 모습, 지뢰를 밟은 시체들을 묘사한 대목이 나온다. 다들 겨우 열아홉 스무 살 된 청년들이다. 불과 몇 달 전까지 수업을 받던 청년들이다.
웃고 떠들고 장난치던 청년들이 전선으로 끌려갔다. 최전선에서 그들은 순식간에 짐승처럼 변했다. 그것이 생명을 보전하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살고 싶어 한다. 이런 전쟁의 슬픔을 막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작가는 소설 내내 그걸 고민한다.
첫댓글 전쟁은 많은 이에게 너무나 큰 슬픔과 깊은 상처를 남기고...더이상 전쟁의 슬픔이 반복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랄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