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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채의 마술사 "샤갈"전 : 서울시립미술관
일시 : 2011년 2월 20일 (일)
장소 : 서울시립미술관
전시명 : 색채의 마술사 샤갈
전시 기간 : 2010년 12월 3일~2011년 3월 27일
문의 : 1577-8968 (샤갈전시본부)
"색채의 마술사 샤갈전"
이번 전시회는 색채의 거장이라고 하는 마르크 샤갈 작품을 총체적으로 조명할 수 있는
회고전 형식으로, 샤갈의 걸작 164점을 한자리에서 감상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이다.
이들 작품 전체의 보험평가액이 1조원 가까이 된다고 하니 과연 대단하다.
지난 주말에 들린 추억의 덕수궁 돌담길 옆 서울시립미술관 앞에는
관람객들이 입구부터 길게 줄을 서 있다.
지난해 12월3일에 개막한 샤갈전은 이미 35만명 이상이 다녀갔다고 하며,
아직도 남녀노소에게 인기있는 전시회이다.
전시는 오는 3월27일까지 열린다고 하니 날씨도 많이 풀린 요즘
주말에 가족들과 한번 들려서 샤갈의 그림속에 빠져볼 만하다..
마르크 샤갈 (Marc Chagall)에 대하여
Marc Chagall (1887~1985, 향년 98세)
러시아의 비테프스크 출생의 유대인 화가. 표현주의를 대표하는 에콜드파리 최고의 화가.
유대인 집안에서 태어나 1907년 페테르부르크에 가서 미술학교에 다닌 후,
1910년 파리로 나와 아틀리에 '라 뤼슈'에서 그림공부를 하며 큐비즘기법을 익혔다.
1911년 앙데팡당전에 첫 출품, 괴이하고 환상적이며 특이한 화풍으로 전위파화가와
시인들을 놀라게 하였다.
1911년 결혼을 위해 일시 귀국하였으나 마침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고,
잇달아 1917년 러시아혁명이 일어나자, 모국에 머물면서 미술단체의 요직을 맡았다.
1919년 모스크바의 국립유대극장의 벽화장식을 담당하기도 하였으나,
사회주의 리얼리즘과 맞지 않아 1922년 베를린, 1923년에는 파리로 돌아왔다.
이때부터는 유화 외에도 많은 판화를 제작하여 에콜 드 파리의 유력한 작가로 주목받게 되었다. 그리고 환상적인 작풍으로 초현실주의 미술에 큰 영향을 끼쳤다.
그러나 나치스의 유대인 박해가 점차 격화되자 1941년 도미,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미국에서 지냈다. 1947년 다시 파리로 돌아와, 1950년부터는 남프랑스의 방스에 영주의 터전을 잡았다.
초기 작풍은 큐비즘의 영향을 받았으나, 점차 슬라브의 환상감과 유대인 특유의 신비성을 융합시킨 독자적인 개성을 강하게 풍겼다. 소박한 동화의 세계나 고향의 생활, 하늘을 나는 연인들이란 주제를 즐겨 다루었고, 자유로운 공상과 풍부한 색채는 보는 사람의 마음을 맑고 깨끗하게 풀어주는 매력이 있다.
이번 전시회의 주요 작품
이번에 전시된 작품 일부를 소개한다.
아래 사진은 전시회 가기 전과 다녀온 후 인터넷을 통해서 찾아본 것이다.
여러 곳의 자료를 합친 것이고, 사진의 원전 자체를 알 수 없으므로 출처는 생략한다.
(그림 위를 누르면 확대)
Over the Town, Au-dessus de la ville (도시위에서)
1914-1918, Oil on canvas, 139x197 cm
(그림색감이 그리 산뜻하지 못한게 보이는데, 실제 가서보아도 생각보다 흐릿하다)
이번 샤갈전에서 메인을 맡은 샤갈의 유명한 작품으로,
비테프스크의 고향 마을을 배경으로 사랑에 빠진 연인들의 모습을 몽환적으로 담고 있다.
샤갈은 1915년 벨라와 결혼하고 이듬해 딸 이다가 태어나며 느꼈던 샤갈의 행복감을 반영하고 있다.
이 작품의 평가액은 각 500억원, 전시작 중 단일 작품으로는 가장 비싸다.
샤갈은 1914년 몇 달 예정으로 파리에서 러시아로 돌아갔다가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는 바람에 어쩔수 없이 그곳에 발이 묶이고 만다.
1915년 7월 25일, 샤갈은 6년 전에 만났던 벨라와 결혼한다.
그는 1917년 러시아 혁명에 열정적으로 참여한다.
유대인들은 이 나라에 불기 시작한, 러시아 제정의 차별 조처들로부터
그들을 풀어준 자유의 바람에 특히 민감했다.
러시아 혁명 이후 샤갈은 비테프스크로 돌아가 그곳 미술학교 교장에 임명된다.
1917년에서 1918년 사이 겨울에 그는 <산책>이라든가 <포도주잔을 든 두 사람의 초상화>처럼
신혼 시절 벨라와의 행복을 기념하는 대작들을 그린다.
샤갈은 <도시 위에서>를 두 장 그렸는데 거의 똑같다.
꼭 껴안은 두 사람이 하늘을 가로질러 간다.
무중력은 이 신혼부부의 행복감을 표현한다.
그림 아래쪽의 비테프스크는 또렷이 알아볼 수가 있다.
전경이 울타리로 둘러쳐져 있어서 멀리 보이는 경치가 움푹 들어간 것처럼 보이고
수평 구도도 강조된다.
더구나 연인들이 옆으로 날고 있어서 이 구도는 한층 더 두드러져 보인다.
샤갈은 집들과 지붕들의 기본적인 질량감을 강조한다.
그는 마치 조각을 하듯 서로 대비를 이루는 빛과 어둠을 벨라의 옷에 새겨넣었다.
트레타코프 갤러리에서 소장하고 있는 <도시 위에서>는
견고하게 구조화되고 색깔들도 더 금속성이어서
큐비즘의 가르침에 대한 기억을 더 많이 담고 있다.
The Walk, Promenade (산책)
1917. Oil on canvas. 170 x 164 cm (66 15/16 x 64 9/16 in.)
The State Hermitage Museum, St Petersburg
1917년에 러시아 혁명이 일어나, 러시아는 대혼란을 야기하게 된다.
1914년에 세계 제1차 대전이 발발했을때 샤갈은 베를린에서 개인전을 끝내고 조국으로 돌아갔다.
1917년 페트로 그라드의 미하이로스키 극장에 집결한 시인, 화가, 배우들이
미래의 문화성의 초석을 위하여 샤갈을 미술국장에 추대하였으나,
그는 정치적 위험을 피하여 비테부스크의 벨라 집으로 돌아와 사태를 관망했다.
이때 그린 작품 <술잔을 높이 쳐든 이중 초상>이나 <산책>은
이 시기의 사랑에의 찬가이다.
약탈과 파괴에 멍든 고향의 산하에서 첫딸을 얻은 아내를
넓은 우주 공간에 휘돌리는 이 작품은
매우 대범하게 처리 한 그의 동화적 표현이 매혹적이다.
그리고 빨강과 초록의 두 계통의 색채로써
그 농담의 변화를 주면서 맑고 커다란 화면을 이루고 있다.
<샤갈과 벨라의 사랑>
상트페테르부르크 미술학교에서 그림을 공부하고 있던 샤갈은
1909년 스물 두 살 여름에 고향 비테프스크를 방문 하게 된다.
샤갈은 여자 친구의 집에 놀러온 아홉 살 어린 벨라를 보고 첫눈에 사랑에 빠진다.
샤갈과 벨라는 러시아 유대인 구역에 같이 살고 있었지만
샤갈은 가난한 노동자의 아들이었고
벨라 로젠 펠트는 대규모 상회를 운영하는 부르주아 집안의 딸이었다.
뛰어난 미모의 소유자였던 그녀는 모스크바에서 역사와 철학을 공부하고 있었다.
서로 이질적인 존재였지만 두 사람은 열열히 사랑한다.
벨라의 집안에서는 좀더 좋은 집안의 사위를 맞이하고 싶어 결혼을 반대 했지만
결국 신분의 차이를 뛰어 넘어 두 사람은 결혼한다.
결혼 9개월 만에 태어난 딸 이다를 보고
벨라의 집안에서는 더 이상 두 사람의 신분을 문제 삼지 않았다.
I and the Village (나와 마을)
1911. oil on canvas
파리에 나온 샤갈이 처음엔 고갱의 원시적인 생명력에 감화를 받기도 하고,
고흐의 정적인 표현 특성에 영향 받기도 했으나,
곧 입체파적인 화면 분할기가 시작되어 이 작품을 그린 해부터 3년간 그런 작업 계속된다.
이 작품도 그의 마음 속에 깊이 꿈 비틀거리고 있은 추상의 이미지를
원과 삼각, 사각형의 기하학적 구성을 통해서 평면화시키고 있다.
그러나, 이 작품이 우리 마음을 사로잡는 점은 그러한 화면 분할의 수법과,
나와 마을의 거리를 이렇게 친밀화시켜 보여주는 심정에 의한 또 다른 질서의 힘이다.
그 힘은 소와 나를 같은 원 속에 접근시켜 과거와 현의 나를 일체화시키며,
나의 얼굴빛을 푸른색으로 한 것은 후의 <일곱 손가락의 자화상>과 같이
물리적 중심과 다른 중심을 가진 별세계에 상응하게 하기 위한
필연의 변용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The Blue House (파란 집)
1917, Oil on canvas, 66 x 97 cm
Musee des Beaux-Arts, Liege
샤갈의 러시아 시기때의 작품이다.
왜 샤갈이 '색채의 마술사'라는 말이 붙는지 알 수 있는 작품이다.
하나의 색을 쓸때도 같은 색을 수십가지 형태로 쓰는 작품을 보면서 '색의 마술'을 보여준다.
러시아에서 유대인으로 태어나 숙명적인 이데올로기를 안고 살 수 밖에 없었던 샤갈은
즐거움과 감동으로 그림을 그려 대중에게 다가가는 것이 바로 작가의 소명이라고 생각했다.
이는 그가 수없이 그려낸 "광대의 몸짓과 별반 다르지 않다"고 말한다.
Peasant Life (농부의 삶)
1925, Oil on canvas, 100.01x80.01cm
"나는 다른 어떤 사람들처럼도 되고 싶지 않다. 새로운 세계를 보고 싶다....
고향이여, 너는 에크스(세잔이 태난 고장)의 일을, 귀를 자른 화가의 일을, 큐빅(立體), 4각,
파리의 일을 들었느냐? 비테부스크여, 나는 너를 두고 간다."
자서전 '나의 생애'에 결별사를 놓고 파리에 다시 온 샤갈 이었으나,
프랑스의 자연미를 알게 됨에 따라 다시 살아나는 것은 고향의 산하였다.
이 작품은 1925년의 여름을 몽쇼베에서 지내면서 아름다운 그 풍광에 자신도 모르게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불러일으킨 것으로 보인다.
말에게 먹이를 주고 있는 농부와 말의 정다운 관계,
그리고 멀리 보이는 주막, 그 주막 앞에 있는 의자에 앉아 담소하는 사람들,
마차를 타고 가는 사람들, 춤을 추는 남녀 등,
꿈결 같은 그리움이 맑게 흐르는 기억의 샘물같이 그려져 있다.
Over Vitebsk (비테프스크 위에서)
1915-20. Oil on canvas, 67 x 92.7 cm
보따리를 메고 회색빛 도시 위를 날아가는 남자의 모습을 통해
방랑하는 유대인의 아픔을 표현한하고 있다.
김춘수 시인의 유명한 시 '샤갈의 마을에 내리 는 눈'의 모티프가 된 그림이다.
콧대높기로 소문난 뉴욕현대미술관(MoMA)이 최초로 한국 에 대여하는 작품이기도 하다.
Le Juif errant (방랑하는 유대인)
1923 - 1925, Oil on canvas, 57 x 72 cm
Museum of Modern Art, Geneva, Switzerland
러시아 혁명이후 수많은 유대인들은 다른 곳으로의 이주를 강요당하고.
일부 유대인인 여러나라를 방랑하는 신세가 되어 여기저기를 떠돌아 다녀야 했다.
또 국내외 몇몇 인터넷 자료를 보면
예수와 관련하여 최후의 심판이 있는 날까지 방랑을 계속해야 할 운명을 짊어진
전설상의 유대인과 연결하는 해설도 보인다.
그 유래로는 예수가 십자가를 짊어지고 형장인 골고다 언덕으로 끌려갈 때,
피로에 지친 끝에 어느 집 처마 밑에 쉬려고 하였으나,
그 집 주인이 한 모금의 물은 커녕 심한 욕설과 돌을 던지면서 예수를 쫓아버렸고,
예수는 “내가 이 세상에 다시 나타날 때까지 그대는 이 세상을 방랑하리라”라는
한 마디를 남기고 떠났다고 한다.
그 후 이 아스페르스라는 유대인은 눈에 보이지 않는 누군가의 힘에 쫓겨
쉴사이 없이 유령처럼 세상을 방랑해야 했고, 죽는 일조차 허락되지 않았다.
그러나, 신약을 믿지 않는 유대인인 샤갈이 이 전설과 연관하여
위 그림을 그렸는지는 모를 일이다.
Acrobat (곡예사)
1914, Oil on canvas, 42.5 x 33.0 cm
Albright-Knox Gallery, Buffalo, New York
피카소와 더불어 입체파 화가들은 서커스에 대한 많은 작품을 남겼다.
샤갈도 서커스에 흥미를 갖기 시작하여 후일 마술적인 세계, 고도의 포에지의 형(形)으로서
서커스에 자신이 끌렸다고 술회하고 있다.
그러나, 동시에 "나의 회화도, 언어도 결코 서커스의 정확함에는 미치지 못한다."
라고도 말하고 있듯이, 역시 이 작품이 가지고 있는 매력의 정체는 정확함에 있다.
발레리가 말한 '댄스와 같은 정확함'은,
후일 원숙기에 전쟁, 혁명, 성서적 광경 등을 그린 작품들이 공통적으로 가진
묵시록 적인 혼돈과 거리가 멀다.
아크로바트의 정확도를 나타내기 위하여 화면에 대담하게 인물을 배치하고,
큐비즘 분석의 정도(精度)와 결합된 호사하고 장식적인 화면을 만들고 있다.
Portrait of Vava (바바의 초상)
1953-56, Oil on canvas, 93 x 73 cm
Private Collection, Paris
샤갈의 두 번째 부인인 바바를 위한 작품이다.
샤갈은 여자복이 많다. 바바 또한 헌신적으로 샤갈의 미술활동을 지원해주어
샤갈의 예술활동에 큰 힘이 되었다.
샤갈은 벨라가 죽자 한동안 붓을 잡지 못했다. 그리고 그의 그림스타일이 바뀌게 된다.
샤갈과 벨라의 딸 이다를 통해 바바를 만나 삶의 안정을 느끼고 결혼을 하였다.
그의 작품을 보면 두 여인이 많이 나온다.
사랑이 샤갈 그림의 원천임을 알 수 있다.
샤갈의 삶은 사랑이었고, 작품을 통해 사랑을 느꼈고,
사랑은 색채의 마술로 그만의 독창적인 영역을 만들었다.
<벨라의 죽음과 두 번째 부인 바바>
1943년 샤갈의 첫부인 벨라는 전쟁이 끝나고 파리로 돌아가지전 전염병으로 죽는다.
아내를 잃고 절망에 빠진 샤갈은 한동안 붓을 들지 못하지만
그는 새로운 창작력을 과시하며 판화작업에 몰두한다.
그의 상처는 그림으로 치료할 수 있었다.
1952년 봄 벨라가 죽은 지 8년 만에 샤갈은 유대계 러시아인
발렌티나 브로드스키와 운명적으로 만난다.
부유한 사탕수수업자의 딸인 발렌티나 브로드스키(Vava)는 영국인과 결혼을 하지만
제2차 세계대전 때 이혼을 한다.
그녀는 샤갈과 친분이 두터웠던 오빠의 집에 머물고 있었다.
발렌티나 브로드스키의 타고난 품성과 교양에 매료된 샤갈은
65세인 1952년 재혼을 한다.
샤갈의 새로운 사랑은 사람들의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25세 연하에 미모를 겸비한 바바와 결혼식장을 나오면서 샤갈은
“이제야 제2의 청 춘이 열렸다.”라고 외쳤다.
바바는 노년의 샤갈이 작업을 편안하게 할 수 있게끔 물 심양면으로 힘썼다.
샤갈은 바바 덕분에 말년의 대작 <성서> 연작을 불편 없이 제작하게 된다.
El Gallo, The Cockerel(수탉)
1929
샤갈의 그림이 꿈의 정경을 다루는 경우가 많았고 초현실주의 특징을 보이기도 했다.
거대한 토끼들이나 사랑에 빠진 닭들,
혹은 공중을 날고 있는 연인들이 등장하는 그림에서는 꿈의 특징이라 할 수 있는
응축과 전이가 일어나고 있다.
[꿈] [수탉]과 같은 작품들이 그런작품이다.
Le cirque bleu (푸른 빛의 서커스)
1950, Oil on canvas, 232.5x175.8cm
Centre Georges Pompidou, Paris
샤갈의 색채는 자연에 있는 색을 그대로 캔버스에 옮기는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무의식적인 환상의 세계에서 본 듯한 색채를 사용했는데
이는 그의 어린 시절 영향도 컸다.
러시아식 교회의 의례에서 쓰이던 빨강, 노랑, 보라색을 응용해
작품의 색채를 더욱 풍부하게 했다.
<푸른 빛의 서커스>에서도 푸른 캔버스가 전체적인 분위기를 장악하는 가운데
중심의 여성 곡예사의 붉은 의상과 아래 노란색 달빛 조명이 푸른색과 대비된다.
이러한 대비는 비물리적인 요소의 배치와 맞물려 환상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이는 색채와 공간이 함께 만들어내는 것으로 이러한 조형방식은 샤갈의 주요한 특징이다.
샤갈은 특히 1940년대부터 파란색을 자주 사용했는데
이후 스테인드글라스 작품에서도 많이 사용되었다.
샤갈은 파란색을 평화의 자유와 우애가 수반되어야만 가능한 색으로
신을 경배하는 종교적인 숭배의 색으로 생각했다고 한다.
Introduction au Theatre d'art Juif (유대인 예술극장 소개)
1920, Tempera, Gouache on canvas
284x787 cm
The State Tretyakov Gallery, Moscow
위의 그림은 샤갈의 대작 [유대인 예술극장 장식화]중 대표작인 [유대인 예술극장 소개]이며,
이외에 [결혼 피로연 테이블],[무대위의 사랑],[문학],[연극],[음악],[무용] 등 총7점이 전시된다.
이들 그링은 1920년 모스크바에 있던 유대인극장 내부장식화로 제작된 것이다.
금번 전시되는 [유대인 예술극장 소개],[결혼 피로연 테이블] 등은
아시아에서 처음 전시되는 작품으로 7점이 완전한 형태로 소개되며
8m가 넘는 대작인 [유대인 예술극장 장식화]인 7점 모두가 이렇게 한자리에 모이는 것은
드문 일이며 전시를 마치면 한 곳에 영구 전시되기 때문에 마지막 해외 나들이라 더욱 의미있다.
예술가는 대중에게 즐거움과 감동을 선사해야 한다.
[유대인 예술극장 장식화]을 보면 그가 즐겨 다루는 소재, 그리고 상징들의 총집합이라 할 수 있다.
그는 작품을 통해 자신의 작품스타일을 고수하고
작품을 통해 절대주의를 조롱하고 샤갈의 작품의 의미를 더욱 느끼게 하는 작품이다.
피카소의 "게르니카"와 구성이 비슷한 점이 있어서 가끔 비교되기도 한다.
Music, La Musique (음악)
1920, Tempera, Gouache on canvas
212,5 x 103,2 cm
바이올리니스트는 비테프스크의 유대인 공동체에서 대단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그는 모든 축제와 모든 의식에 나타나며,
이렇게 해서 자기 동포들의 운명에 리듬을 부여하는 것 같다.
1908년부터 이 인물은 샤갈의 작품에 자주 등장한다.
샤갈은 1920년 알렉세이 그라노프스키가 모스크바 유대예술극장을 장식해달라고 부탁하자
초록색 바이올리니스트의 주제를 사용한다.
비테프스크의 지붕 위에 올라앉은 이 겸허한 유대인은 음악의 우의가 된다.
선민의 음악적 영혼을 구현하는 것이다.
흐릿한 배경 위의 당나귀와 새, 유대인 등장인물들, 통나무집, 유대 예배당은
음악가를 눈에 띄지 않게 둘러싸고 있다.
장식판에 그려진 바이올리니스트는 파리에서 그려진 큐비즘과 구축주의의 흔적을
이 그림보다 더 많이 담고 있다.
형태는 기하학화되고 질량감은 단순화 되고 색체 사용은 제한되어
커다란 외투 속에 분해된 인물은 그 밀도와 물질성을 잃는다.
Dance, La Danse (무용)
1920, Tempera, Gouache on canvas
213 x 108 cm
모스크바 트레티아코프국립미술관 소장의 유대인 극장 연작시리즈 작품 중 하나
이번에 전시되지 않은 샤갈의 대표작 중에서
Birthday (생일),
1915. Oil on cardboard,
80.6 x 99.7 cm
뉴욕 현대미술관
샤갈의 대표작 중의 하나. 감미로운 빨간 바닥과 하얀 벽,
유연한 인물의 선이 행복한 샤걀의 심정을 잘 표현한 작품이다.
이 작품은 자신의 생일을 그린 것으로, 그가 사랑하는 여인 벨라 로젠펠트와 결혼하기 얼마 전
총각으로서의 마지막 생일날을 기념하여 그린 것이다.
꽃을 든 여인은 벨라 로젠펠트이고 남자는 샤갈 자신이다.
그는 자신을 한 곡예사로서 꽃다발을 가져온 약혼녀 벨라에게
하늘에서 날아온 듯 고개를 굽혀 입맞추도록 그렸다.
그러나 조금도 부자연스럽지 않는 멋진 희화적 표현으로 황홀한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였다.
샤갈은 뛰어난 미모에 교양과 학식을 갖춘 로젠펠트를 처음 보는 순간 사랑에 빠졌다.
당시는 제1차 세계대전 중이어서 러시아에서는 수많은 사람이 추위와 굶주림으로 죽어갔다.
샤갈은 유대인이어서 늘 감시의 대상으로 지목당하였다.
이처럼 암울한 시기에 그가 그림을 그릴 수 있었던 것은 벨라의 격려와 사랑 덕분이었다.
흰색 컬러의 검은 드레스, 검은 구두는 벨라의 순결하고 깨끗한 영혼을 나타내고
붉은 바닥은 열정적인 사랑을 화사하고 현란하게 치장하고 있다.
《연인들》 시리즈의 하나로 뉴욕 현대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 뉴욕에 갈 일이 있을 때 꼭 찾아볼 작품이다.
Self Portrait with Seven Fingers (손가락이 7개인 자화상)
1913, Oil on cardboard, 126 x 107㎝
Stedelijk Museum, Amsterdam
샤갈은 에펠탑으로 상징되는 파리 시내가 내다보이는 창문 앞에 자리잡은
화가의 모습으로 자신의 모습을 그린다.
이 화가는 머리카락을 멋있게 손질하고 단추구멍에 꽃을 꽂고
수를 놓은 넥타이를 맨 맵시 있는 신사 차림을 하고 있다.
그는 7개의 손가락으로 이젤 위에 놓인 그림을 마무리하고 있는데,
이 그림은 그가 자신의 최고의 걸작으로 꼽은
러시아에게, 당나귀에게, 그리고 타인들에게》이다.
한편 화가가 그림을 그리는 실내의 오른쪽 벽에는
샤갈이 회상하고 있는 러시아의 고향마을 비테프스크의 풍경이
구름에 둘러싸인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샤갈은 그림 속 화가의 머리 위에 히브리어로 '파리'와 '러시아'라고 쓰고는
이를 희미하게 처리해 놓았다.
이로써 화가의 내면과 외면, 그리고 현재와 과거를 한 화면 안에 결합시키고 있다.
성공과 풍족함을 상징하는 다양한 색깔의 물감을 짜 놓은 팔레트를 들고 있는
화가의 얼굴은 큐비즘 화가들이 즐겨 사용하는 기법대로 각진 형태로 그려져
7개의 손가락과 함께 조화를 이루고 있다.
암스테르담 시립미술관(Stedelijk Museum)에 소장되어 있는데
지난번 암스테르담 갔을때 국립박물관(Rijksmuseum Amsterdam)에는 들려봤는데
같은 시내에 있는 시립미술관에는 못 가보았구나.
다음 기회를 노려보자.
참고 : 추천 관람후기
http://blog.naver.com/arcadium?Redirect=Log&logNo=80119883527
http://blog.naver.com/wjdwjd9096?Redirect=Log&logNo=130101385321
첫댓글 색채의 마술이 맞네.
파블로 피카소와 함께 20세기 최고의 화가로 불려지는
마르크 샤갈(Marc Chagall)을 여기서 만나는 군요
한국에 살면 한번 가서 관람하고 싶습니다
무양께서 이번에도 편집하느라 애 많이 잡수었습니다
덕분에 앉아서 감사히 감상합니다
[사진]
34살의 젊었을 때의 샤갈 모습입니다
대단합니다...
설명을 듣고 보니 더 좋네. 샤갈 작품을 보면 소싯적에 갖고 놀던 알록 달록한 구슬 다마를 들여다 보는 것 같고 그래서 아련한 향수를 느낄 때가 많은데 내 혼자 느낌인지...
Classic 음악, Jazz,문화재,미술품을 넘나드는 戊洋의 다양한 식견덕에 여러모로 많이 배우고 있습니다.옆에 있으면 귀동냥이나 눈동냥을 더 할수 있는 기회가 더 많을텐데 아쉽네요.
戊洋의 친절한 설명 덕분에 예습후 서울 출장길에 짬을 내어 18일(금) 샤갈전시회를 관람했습니다.운 좋겠도 단체 관람객들을 위한 안내원의 설명을 곁들이면서 샤갈의 작품을 볼수 있어서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재미있는것은 미술 작품 곳곳에 샤갈 자신의 모습을 그려 넣어서 작가의 느낌,생각을 표현하기도 했고 때로는 자기와 생각이 다른 사람을 그려 넣어 풍자를 한것입니다.
보통 글을 쓰는 사람들에게 많이 볼수 있는데 예술하는 사람들에게도 해당 되는것을 보니 영혼의 자유로움을 추구하는 사람들의 특권이라고 여겨지는군요.
戊洋덕분에 여러모로 유익했습니다.
3/27(일)에 전시회 끝나니 그전에 많이들 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