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 그 녀는 이 세상에 우아한 꽃으로 다시 태어났겠지>
70년대 음악 다방에 낭만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
청년시절 나의 아픈 기억 하나.
"안녕하세요? 디스크 쟈키 이진입니다.
지금 밖에는 부슬부슬 비가 내립니다.
질척이는 포도 위를 당신은 왜 우산도 없이 혼자 걸으시나요
실연을 당하셨나요? 아님, 고독한 척 멋지게 보이고 싶어서.
오세요. 진한 커피 한 잔, 그리고 팝송이 가슴을 울리는 곳,
이 곳 세시봉으로_
오늘 3번 테이블에 예림 양이 신청하신 레인_ 호세페리치아노가 부릅니다"
언젠가 팝에 미쳐 집을 뛰쳐나가 조그만 음악 다방에서
디스크자키 생활을 한적이 있었지요.
머리는 어깨까지 덮은 장발에다가 칼라가 긴 하얀 와이셔츠를
양복위로 받쳐입은, 지금 생각하니 참 촌티가 절절 흘렀는데,
그래도 좋다고 팝송을 좋아하던 문학소녀들이 문전성시를 이루었었는데,
뮤직박스에서 잘 모이는 대각선 구석자리에 날이 조금은 더운
오래된 봄날인데도 분홍원피스의 노란 머플러를 목에 살짝 두르고
왼손엔 박인환 시인의 목마와 숙녀 시집을 들고 내 시간 타임,
오후7시에 정확히 그 자리에 앉아 늘 폴모리악단의 이사도라를 신청하고
정확히 한 시간 동안 내시간에만 머물다 자리를 떠났습니다.
당시에는 젊은이에 보편적인 일상문화라 그런 광경은 도심다방이 있는 골목,
어디에서고 볼 수 있는 흔한 풍경이라 무심코 지나쳤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폴모리아 LP판이 너무 지직 거려
다시 하나 사야 되겠다고 생각한 날, 그 날부터
그 소녀(소녀는 넘어선)는 음악다방에 나타나지 않았고
그 사실을 기억 한 건, 나의 얼굴이 유화로 그려진 엽서 한 장을 받은 후였습니다.
"디스크자키님 잘 그려졌나 모르겠네요. 당분간 못 뵈올 것 같네요.
몸이 많이 아프거든요. 이사도라 부탁해요. 안녕히_예림 올림."
나는 허겁지겁 엽서소인에 적인 주소를 들고 예림이라는 소녀를 찾아 갔습니다.
서울 특별시 종로구 종로3가 34번지 A_25호
바로 피카디리와 돈화문사이, 즉 옛날 스마트양잠점 건너편, 그 유명한 종삼이라는 곳.
내가 찾아 들었을 때는 얼굴에 핏기 없는 하얀 몰골의 그녀가
조그만 골방에서 기침을 콜록이며 나를 맞았습니다.
나는 그녀가 불쌍해서 일이 끝나는 데로 거기로 가 병 수발을 했고
그렇게 얼키고 설켜 동거가 시작 되었습니다.
그녀는 그림을 정말 잘 그렸는데,
그림을 배우고 싶어서 목포에서 올라 왔다가
어쩔 수 없이 홍등가의 여자(창녀)가 되었고
지금은 병이 들어 주인 집 포주가
빚을 안 받을 테니 가라고 하여도 어머니만 계신 고향에
갈 수가 없어 버티고 있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녀가 좋아하는 이사도라는
애인으로 사귀던 남자친구가 디스크 자키였는데
그 애인이 이사도라를 좋아해서 자기도 좋아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남자 친구는 군대를 간 뒤 소식이 끊겼고_
나는 정성을 다해 그녀 간호를 했습니다.
종삼에서는 어디 다른 곳으로 데리고 가라고
성화였으나 나 역시 마땅히 갈 곳이 없었습니다.
나는 그녀 약 값을 벌기 위해 매일 대 여섯 곳을 돌며 일을 했습니다.
후에 안 일이지만,
내가 일을 나간 후에 그녀는 자포자기해 술 담배를 더했고
심지어 LSD등 마약에 까지 손을 댔습니다.
종로 삼가로, 피맛골로 비가 몹시 내리던 어느 날 밤,
정말 미안하다며, 그녀는 내게 옷을 벗고 자기를 가져 줄 것을
간곡히 부탁했습니다. 그것이 내게 조금이나마 빚을 갚는 길이라고,
그렇게 나의 동정은 본의 아니게(지금도 그렇게 주장함)
홍등가 여자에게 받쳐졌고, 사는 동안 후회는 없었습니다.
그 일이 있은 사흘 후, 그녀는 고향에 가지 못하고 숨을 거두고 말았습니다.
벽제 화장터에 한 줌 재로_
언젠가 나의 깨 묵은 일기장을 뒤적이다가
누렇게 표지가 발한 시집 한 권을 발견했지요
" 목마와 숙녀"
책갈피 안에 누렇게 탈색된 은행잎과 작은 메모 쪽지가 있었는데_
메모지에는
"정말 고마웠어요. 마지막 부탁인데, 언니에게
금반지 3돈짜리를 맡겨 놓았는데,
그걸 우리 엄마에게 꼭 전해줘요."라고.
2004.5.21 풀잎편지(poolip.net)_ 백암
음악 : Rain (Jose Feliciano)
첫댓글 무슨 소설을 읽는 느낌이군요....자꾸만 까마득한 옛날로 꾸물 꾸물 기억이 올라가고 있습니다...잘은 모르겠지만 저도 아주 잠시 그시대의 끝자락에 머물렀던것 같습니다..제 친구들과 차한잔 시켜놓고 좋아하던 노래를 신청하곤 했던 기억이나거든요..그때 저도 박인환의 목마와 숙녀를 아주 외우고 다녔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