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간신히 팔짱을 끼고 달아나는 잠을 다시 붙잡으려 하고 있는데
잠시 뒤 이번엔 또 누가 와서 저를
툭툭 건드렸습니다. 짜증이 잔뜩 섞인 얼굴로 돌아다보니 점잖게 양복을 차려 입은
육중한 체격의 매니저였습니다. 무슨 일이냐고 채 물을 겨를도 없이 그 매니저는
아주 심각한 얼굴로 제게 말했습니다. “손님, 여기서 주무시면 안됩니다.
(Sir, you are not supposed to sleep here.)” 잠을 자다니?
미국 술집에서는 졸아도 안 되나? 그 매니저가 너무 정중하게 말하는 바람에 알겠다는
말과 함께 잠이 싹 달아났지만 그렇게 별스럽게 구는 모습을 이해하기 힘들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궁금증은 합석했던 미국 교포의 설명을 듣고 이내 풀렸습니다.
바텐더...손님들 너무 취하지 않게 돌봐주는 사람?
남들의 눈에는 제가 술에 취해 잠든 것으로 보였을 것이고, 미국에서는 남들 앞에서
도에 지나치게 술 취한 모습을 보이는 게 창피한 일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술은 더
이상 안 팔아줘도 좋으니 술이 과한 것 같으면 어서 집으로 돌아가라는 말이라는
설명이었습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바텐더(bartender)도 남을 돌보고 간호한다는
뜻의 “tend”라는 단어에서 유래된 말이라는 사실도 알게 됐습니다. 바텐더 하면
바에서 칵테일을 만들고 술을 따라주는 사람쯤으로 알고 있지만 원래 그 뜻은 “손님이
너무 취하지 않는지를 살펴주는 사람”이라는 말이었습니다.
아니, 미국 문화가 술에 이렇게 엄격해?” 갑자기 문화충격을 경험한 제가 스스로에게
던진 의문이었습니다. 취객들의 고성방가와 조는 모습 등 서울의 술집 모습에 익숙했던
저로서는 고개가 갸웃거려지는 문화충격 이라면
문화충격 이었습니다. 이후 저는 특파원 생활을 하면서 미국의 저변 문화가 술에
엄격하다는 사실을 여기저기서 발견하게 됐습니다.
Zero Alcohol Tolerance
우선 미국 법상 공공장소에서 술에 취한 모습을 하는 것 자체가 불법입니다. 미국
내 시나 주가 관리하는 공원에는 “알코올 용납도 0 (Zero Alcohol Tolerance)”
이라는 푯말이 붙어있습니다. 약한 술이나 소량의 술이라고 해도 음주 사실을 적발하면
눈감아주지 않겠다는 경고입니다. 집이라면 모를까, 상점에서건 거리에서건 단지
술에 취해있다는 사실만으로 경찰에 끌려가도 아무 말 못하는 곳이 미국입니다.
술 취한 채 길만 걸어가도 쇠고랑
실제로 제가 아는 후배 한 사람은 술 취한 채 편의점에 담배를 사러 갔다가 단지
술 냄새가 난다는 이유로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의 검문을 받은 일도 있습니다.
그 후배는 자신이 술은 조금 마셨지만 취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조리 있게 설명해서
별다른 조치 없이 집으로 갈 수 있었지만 엄격한 음주관련 문화와 투철한(?) 신고정신에
정신이 버쩍 들었다고 가슴을 쓸어 내렸습니다. 가끔씩 미국의 거리를 걷다 보면
사람들이 뭔가를 봉투에 싸서 들고 마시는 걸 보게 되는데 그것도 공공장소에서 술을
마시지 못하게 돼있는 법 때문에 나온 최소한의 자위책이라는 걸 알게 됐습니다.
술을 즐기는 것은 자유지만 취해서 남에게 피해를 주면 안된다는, 합리주의에 입각한
사회적 약속을 보는 것 같아 고개가 끄덕여졌습니다.
지난 2005년 10월, 초대형 허리케인 카트리나로 쑥대밭이 된 뉴올리언즈에서 60대
흑인이 백인 경찰 3명에게 집단 폭행을 당하는 모습이 주민의 비디오 카메라에 잡혀
방송된 적이 있었습니다. LA 폭동의 발단이 된 로드니 킹 사건이 재연되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가 있었는데 이 때 경찰관들이 이 흑인을 체포하려 했던 죄목도 바로 공공장소에서
취한 모습을 보였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전직 교사는 술을 끊은 지 33년이나 됐다는
항변을 했었는데, 그 뉴스를 접한 저로서는 길거리에서 취한 모습을 보였다는 이유만으로
경찰이 시민을 연행을 하려했다는 사실 자체가 큰 충격이었습니다.
음주운전 처벌 기준-혈중 알코올 농도 0.01%
워싱턴 시의 경우는 음주운전과 관련해 혈중 알코올 농도 0.01%를 음주로 규정하는
강력한 법을 갖고 있습니다. 단 한 방울이라도 술을 마셨으면 운전대에 앉으면 안
된다는 강력한 조처입니다. 지난 2005년 한 여자 변호사가 파티에서 포도주 한 잔을
마시고 운전을 하다 혈중 알코올 농도 0.03%로 음주단속에 걸리자 너무 하다며 시를
상대로 소송을 벌인 사건이 있었을 정도입니다.
미국, 1920-1933 전국적인 금주법 시행
그럼 미국 사람들은 왜 이렇게 음주에 관해 엄격할까요? 미국은 지난 1920년부터
13년 동안 금주법이 행해졌던 나라입니다. 종교의 자유를 찾아 신대륙을 찾아온 초기
정착민들의 청교도 정신에 기초를 둔 금주법안이 통과된 뒤 술의 제조와 수입, 수출,
유통과 판매가 일체 금지된, 주당들에게는 참을 수 없는 “암흑기”가 있었습니다.
당시에도 몰래 밀주를 마시는 일은 성행했을 테지만 “음주”라는 불법 행위를 자랑하고
다닐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지금까지도 공공장소에서 술을 마시거나 취한 모습을
보이면 경찰이 잡아가는 법은 아마 금주령이 내려졌던 1920-30년대의 전통이 그대로
내려온 것으로 생각됩니다. 술 취한 모습을 자랑스럽게 여기지 않는 문화도 그 뿌리는
금주법 적용에서 찾아 봐야 할 것 같습니다.
밤 12시 넘으면 성인도 술 못 사
여하튼 미국 문화의 저변에 면면히 흐르고 있는 술에 대한 절제를 발견한 건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술이나 담배에 관한 한 다른 주보다도 너그러운 편인 버지니아에서도
밤 12시만 넘으면 그 어느 상점에서도 맥주를 살 수가 없을 정도입니다. 맥주나 포도주를
제외한 일정 도수가 넘는 독한 술은 따로 전용상점을 정해서 판매를 엄격하게 관리하는
미국의 음주문화를 보면서 크리스마스 같은 날이면 서울의 종로 바닥 전체가 취객들로
가득 차는 우리의 현실을 돌이켜 생각하게 됩니다.
절제된 음주와 가족 중심의 레저문화
우리 나라 애주가들은 물을 것입니다. 술도 안 마시면 미국 사람들은 도대체 남는
시간에 뭘 하고 논단 말인가?
저는 이곳 워싱턴에서 특파원 생활을 하면서 딸과 아빠만 참석하는 YMCA의
월례 모임에 꼬박 3년을 참석했습니다. 이 모임에서는 아빠와 딸들이 매달 하루 날을
정해서 여름이면 야영도 가고, 겨울에는 눈썰매도 탑니다. 또 1년 중에 하루 날을 정해 큰
체육관을 빌려서 축구와 농구도 하고 수영도 하며 부녀의 정을 쌓습니다. 그리고
아빠와 딸들이 함께 체육관 강당에 하나 가득 모여 앉아 피자와 콜라를 놓고 영화도
보는데요. 한국에서는 바쁜 회사생활에 쫓겨 하루에 단 5분도 제대로 볼 수 없었던
딸과 함께 저는 이 모임을 통해 참으로 귀중한 추억들을 쌓을 수 있었습니다. 술 약속도 없는지
매달 세번째 수요일 저녁이면 딸의 손을 잡고 그 모임에 참석하는 술 취하지 않은
미국 아빠들의 모습을 보면서 저는 절제된 음주와 가족 중심의 레저문화가 미국사회의
건강성을 담보하는 한 기둥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습니다.
-KBS 민 경욱 뉴욕 특파원-
동경의 레이보우 브릿지와 복제 설치된 자유의 여신상
첫댓글 역시 미국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