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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빙점] 1 적(敵)
바람 한 점 없다. 동쪽 하늘 높이 햇빛에 반짝이며 떠 있는 뭉게구름은 한폭의 그림처럼 꼼짝도 하지 않는다. 지면에는 스트로브소나무 숲의 짤막한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다. 그림자는 마치 살아 있기라도 한 것처럼 숨을 쉬고 있는 듯이 보인다.
아사히가와(旭川) 시 교회 가구라(神樂) 읍의 이 소나무 숲 바로 옆에 일본식과 양식을 절충하여 지은 쓰지구치 병원장의 저택이 고즈넉이 서 있다. 인근에는 집이라곤 몇 채밖에 눈의 띄지 않는다.
멀리서 축제의 북소리가 울려왔다. 1946년 7월 21일, 가미가와(上川) 신사제(神社祭)가 한창인 어느 오후였다.
쓰지구치 집의 응접실에는 쓰지구치 게이조의 아내 나쓰에(夏枝)와 스지구치 병원의 안과 의사인 무라이 야스오(村井靖夫)가 아까부터 말없이 소파에 마주 앉아 있었다. 날씨는 가만히 앉아 있어도 땀이 흥건이 밸 만큼 무더웠다.
갑자기 무라이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성큼성큼 문 쪽으로 걸어가 손잡이를 잡았다. 손잡이가 찰칵 하고 소리를 냈다. 오랜 침묵 속에 빠져 있던 나쓰에에게는 그 소리가 무척이나 크게 울려왔다.
나쓰에는 문득 눈을 치켜 떴다. 그러자 긴 속눈섭이 그녀의 반짝이는 눈동자에 깊게 그늘을 던졌다. 그녀의 쪽 곧은 콧날엔 기품이 서려 있었고, 곤색 바탕의 욕의(浴衣)가 눈이 많이 오는 지방에 사는 여성다운 부르럽고 흰 얼굴에 잘 어울렸다.
‘아까부터 줄곧 침묵만 지키고 있어……
나쓰에는 이렇게 생각하면서 등을 돌리고 서 있는 무라이의 훤칠한 흰 양복 차림을 쳐다보면서 눈웃음을 쳤다. 얌전하고 착하게 생긴 그녀가 눈웃음을 치면 뜻밖에도 육감적으로 보였는데, 그것은 스물여섯 살이라는 그녀의 젊은 때문만은 아니었다.
아까부터 무라이가 무슨 말을 하고 싶어하는지 나쓰에는 진작에 알아차리고 있었다. 나쓰에는 그 말을 기다리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런 자기 자신을 의식하면서 그녀는 문득 출장 중인 남편 게이조의 약간 신경질적이기는 하지만 정다운 눈초리를 떠올렸다.
올 2월이었다. 나쓰에가 난로의 재를 치우다 석탄 가루가 눈에 들어가 무라이에게 치료를 받은 후로 그녀는 무라이의 마음에서 좀처럼 떠나지 않았다.
물론 무라이가 그때까지 원장 부인 나쓰에를 몰랐을 리는 없었다. 그러나 나쓰에에게는 정면으로 얼굴을 마주 대하기 어려운, 관심을 갖는 것조차도 삼가야 할 것 같은 범할 수 없는 아름다움이 있었다. 그런 나쓰에가 그의 환자가 되었던 것이다. 수술대 위에 누운 나쓰에의 각막에 박혀 있는 미세한 석탄 가루를 집어낸 다음 안대를 씌우고 나자, 무라이는 일찍이 경험하지 못한 이상한 느낌에 사로잡혔다.
“이겁니다. 범인은.”
무라이는 나쓰에게 핀셋 끝의 조그마한 석탄 가루를 보여 주었다.
“보이지 않는군요, 너무 작아서.”
나쓰에는 수술대 위에 한쪽 팔을 짚고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미소를 지어보였다.
“이렇게 하면 보이시겠지요?”
무라이는 흰 휴지에 핀셋을 문질러 석탄 가루를 보여 주었다. 그것을 들여다보는 두 사람의 뺨이 맞닿을 정도로 바싹 가까워진 것을 무라이는 의식하고 있었다.
“어머, 이렇게 작군요. 너무 아파서 얼마나 큰 먼지가 들어갔을까 하고 생각했어요.”
한쪽 눈에 안대를 한 나쓰에는 원근을 잘 분간할 수 없었다. 그녀는 그런채로 잠자코 석탄 가루를 지켜보고 있었다. 나쓰에가 의식하지 못하는 동안 두 사람이 뺨을 서로 가까이 대고 있는 시간이 꽤 길어졌다.
그 후로 나쓰에는 보름 동안 병원에 다녔다. 그녀의 눈이 많이 좋아져서 더 이상 치료할 필요가 없게 되었는데도 무라이는 잠자코 눈을 씻어 냈다.
“이젠 다 나았나요?”
어느 날 나쓰에가 이렇게 물었을 때, 무라이는 애원하는 듯한 눈빛을 보였다.
“암실에서 한 번 더 진찰해 봐야만…..”
목소리가 조금 까칠했다.
암실은 비좁은 공간이었다. 마주 보고 의자에 앉아 있는 두 사람의 무릎이 맞닿았다. 진찰은 하나마나였다. 그러나 그는 천천히 시간을 끌면서 진찰을 했다.
진찰이 끝나자 무라이는 나쓰에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 진지한 눈빛에 나쓰에는 찔끔했지만 그와 동시에 가슴속을 파고드는 이상한 쾌감을 느꼈다. 그러나 그녀는 표정을 바꾸지 않았다.
“고마워요.”
무라이는 일어서는 나쓰에의 손을 덥석 잡았다.
“가지 말아 주십시오.”
나쓰에는 어린애 같은 그의 말투가 귀엽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얌전히 눈을 내리뜨며 무라이의 손을 살짝 뿌리치고는 암실에서 나왔다.
그 후로 무라이는 때때로 쓰지구치의 집을 방문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집의 오린 도오루(徹)와 루리코에게는 그다지 말을 걸지 않았다.
“무라이 씨는 아이들을 좋아하지 않나 보죠?”
어느 날 나쓰에가 물었다. 마침 게이조가 볼 일이 있어 그 자리에 없을 때였다.
“아이들이 싫은 건 아니지만….”
무라이는 약간 익살스럽게 입술을 삐죽거렸다. 싸늘하고 냉혹한 표정이었다.
“하지만 부인의 아이들은 싫어요. 싫다기보다는 저주하고 싶은 존재라고나 할까요.”
“어머! 저주하다니요…..그런…..”
“부인은 아이 같은 건 낳지 말았어야 하는 건데…..”
무라이의 격렬한 사모의 정에 나쓰에는 감동을 받았다.
나쓰에는 지금 문 앞에 서 있는 무라이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한 달 전에 했던 그의 말을 상기했다.
멀리서 다시 축제의 북소리가 울려왔다.
무라이가 문의 손잡이를 잡은 채 돌아보았다. 그의 넓은 이마는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약간 얇은 입술이 무언가 말하고 싶은 듯이 가볍게 움직였다.
나쓰에는 잠자코 무라이의 말을 기다렸다. 그의 말을 기다린다는 것이 유부녀인 자신에게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그녀는 지금 이 순간만큼은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어째서 제게 결혼하라고 권하시는 겁니까?”
무라이의 내뱉는 듯한 격한 어조로 인해 오랜 침묵이 깨어지자, 나쓰에는 가벼운 현기증을 느끼고 옆에 놓인 그랜드 피아노에 몸을 기댔다.
“부인!”
무라이는 피아노에 기댄 나쓰에에게 다가왔다. 나쓰에는 재빨리 일어나 뒤로 물러섰다.
“부인, 당신은 정말 잔인한 사람이군요.”
무라이는 나쓰에 앞을 막아서려는 듯이 바싹 다가섰다.
“잔인하다고요?”
“그래요, 잔인해요. 당신은 아까 제게 혼담 얘기를 꺼냈는데, 나는 당신이 내 마음을 알아주리라고 생각했어요. 오래 전부터 제 심정을 잘 알고 있을 테지요. 그런데도 당신은……”
무라이는 테이블 위의 사진을 들여다보았다. 나쓰에가 권한 사진 속의 여성은 웃음소리가 들릴 정도로 천진스럽게 웃는 얼굴로 아카시아나무에 기대 서 있었다.
무라이는 시선을 나쓰에 쪽으로 돌렸다. 남자치고는 너무나 아름답고 검은 눈동자였다. 그 눈이 이따금 맥이 풀린 듯이 어두워지는 때가 있었다. 나쓰에는 그 어두운 눈동자에 매력을 느꼈다.
지금 무라이는 약간 사납고 어두운 눈길로 나쓰에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쓰에는 그런 그의 가슴에 쓰러질 것만 같은 자기 자신을 느끼고 눈을 감았다.
나쓰에는 무라이로부터 이렇듯 노골적인 사랑의 고백을 받을 날이 언젠가는 올 것이라고 예감하고 있었다.
오늘 결혼 말을 꺼낸 것도 무라이에게 결혼을 권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에 대한 관심이 어느 정도인지 확인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나쓰에는 희고 아름다운 손을 모아 기도라도 하는 듯이 가슴으로 가져갔다. 그 몸짓이 무척이나 요염해 보였다.
“나쓰에 씨.”
무라이는 흰 회벽을 등지고 서 있는 나쓰에 앞을 막아서며 그녀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의 손바닥은 온기가 얇은 옷을 통해 나쓰에의 몸에 전해져왔다.
“안 돼요. 화낼 거예요, 나…..”
무라이의 얼굴이 덮치듯이 나쓰에에게로 다가왔다.
“무라이 씨, 제가 쓰지구치의 아내라는 걸 잊어서는 안 돼요.”
나쓰에는 얼굴이 새파랗게 변해 있었다.
“나쓰에 씨, 그걸 잊을 수만 있다면야….저도 그것을 잊고 싶어요! 잊을 수 없기 때문에 지금까지 괴로워한 게 아닙니까?”
무라이의 거친 손이 나쓰에의 어깨를 격렬하게 흔들었다. 그때였다. 복도에서 발소리가 들리더니 문이 열렸다.
분홍색 옷에 흰 앞치마를 두른 루리코가 아장아장 걸어 들어왔다.
무라이는 당황하여 나쓰에에게서 두세 발짝 떨어졌다.
“엄마, 왜 그래?”
세 살난 루리코는 어른들의 태도가 수상쩍다고 느꼈던지 눈을 크게 뜨고 무라이를 노려보았다.
“엄마를 귀찮게 하면 아빠에게 이를 테야!”
루리코는 이렇게 말하고 조그마한 두 팔을 벌려 엄마를 감싸듯이 나쓰에의 곁으로 달려왔다.
무라이와 나쓰에는 무의식중에 서로 얼굴을 마주 보았다.
“그런 게 아니야, 루리코. 엄마는 말이야, 선생님하고 조용히 할 얘기가 있어서 그래. 우리 루리코는 착한 아이니까 밖에 나가 놀다 올 수 있지?”
나쓰에는 가느다란 허리를 굽혀서 루리코의 양손을 붙잡고 가볍게 흔들면서 말했다.
“싫어, 난 무라이 선생님이 싫어!”
루리코는 무라이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어린애다운 거침없는 눈길이었다. 무라이는 갑자기 얼굴을 붉히며 나쓰에를 바라보았다.
“루리코! 그렇게 말하면 못써. 무라이 선생님은 엄마와 중요한 이야기가 있다고 하지 않았니? 자, 넌 착한 애니까. 요시코네 집에 가서 놀다 오렴.”
나쓰에는 무라이보다 더욱 얼굴을 붉히고 루리코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만일 무라이의 사랑을 거부하고 싶으면 지금 이 자리에서 루리코를 끌어안아야 한다고 나쓰에는 생각했다. 그러나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선생님 실어! 엄마도 싫어! 아무도 나하고 놀아 주지 않아.”
루리코는 등을 홱 돌리더니 응접실 밖으로 뛰쳐나갔다. 에이프런의 나비 매듭이 등뒤에서 애처롭게 흔들렸다.
나쓰에는 순간 루리코를 불러들일까 생각했지만 무라이와 단둘이 있고 싶은 마음을 이겨낼 수가 없었다. 복도를 달려가는 귀여운 발소리가 부엌문 쪽으로 사라졌다. 어쩐지 그 발걸음 소리가 마음에 걸렸다.
“미안해요, 루리코가 실례되는 말을 해서…..”
루리코의 출현이 오히려 두 사람을 더욱 가까워지게 만들었다.
“아니, 아이들은 정직해요. 그리고 놀랄 만큼 민감하고요.”
무라이는 선 채로 담배에 불을 붙이면서 말했다.
“당신은 우리 애들을 싫어한다고 했잖아요?”
“싫어하는 것과는 좀 다르지요. 도오루와 루리코는 둘 다 어딘지 신경질적인 인상이라든지 부은 듯한 누꺼플이 원장님을 꼭 닮았거든요. 원장님과 나쓰에 씨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들이라는 그 사실이 견딜 수 없는 거지요. 보기만 해도 괴로울 때가 있어요.”
무라이는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끄고는 양손을 깊숙이 바지 주머니에 찔러 넣은 채 뜨거운 눈빛으로 나쓰에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두 사람의 시선이 서로 얽혔다.
나쓰에가 먼저 시선을 돌렸다. 그녀는 조용히 피아노 앞에 앉아 뚜껑을 열었다. 그러나 피아노를 치려는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두 손을 피아노 위에 가볍게 앉은 채 말했다.
“이제 그만 돌아가 주시지 않겠어요?”
그녀의 목소리는 가늘게 떨렸다. 그녀는 남편도 가정부 쓰기코도 그리고 루리코도 없는 이 집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야 말 것이라는 것 같은 예감을 느꼈다. 몸 속에서 그 무엇인가를 기대하고 있는 자기 자신이 두려웠다.
“나쓰에 씨.”
갑자기 무라이가 뒤에서 피아노 건반 위에 놓인 나쓰에의 흰 손을 거칠게 눌렀다. 피아노 소리가 크게 울려 퍼졌다.
소스라치게 놀라며 돌아보는 나쓰에의 뺨에 무라이의 입술이 닿았다.
“안 돼요.”
마음과는 반대되는 말이었다. 무라이는 잠자코 나스에의 어깨를 껴안았다.
“이러시면 안 돼요.”
나쓰에의 얼굴을 위로 치켜올리려던 무라이는 세 번이나 거절을 당하자 몸을 굽혀 그녀의 뺨에 키스하려고 했다. 그녀는 완강히 몸을 비틀며 그의 입술을 피했다. 그의 입술은 그녀의 뺨에 스치기만 했을 뿐이었다.
“알겠어요. 이렇게 나를 싫어했던가요?”
무라이는 나쓰에의 거절에 모욕을 당한 것만 같아서 문을 열고 현관으로 나갔다.
나쓰에는 얼떨결에 자리에서 일어섰다.
“싫은 게 아녜요.”
거절은 그녀의 교태 섞인 장난이었다. 나쓰에는 어느새 다음에 올 순서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스물여덟 살의 무라이는 그것을 미처 알지 못했다.
나쓰에는 무라이를 배웅하러 나가지 않았다. 못 가게 잡을 것만 같은 자기 자신이 두려워서였다.
그녀는 무라이의 입술이 닿은 뺨에 손을 살짝 대어 보았다. 그 부분이 보석처럼 소중하게 생각되었다. 가슴을 죄는 듯한 감미로운 느낌이었다. 결혼한 지 6년 만에 남편 이외의 남성에게 처음으로 뺨에 키스를 받은 것이 그녀를 이처럼 들뜨게 만들었다.
나쓰에는 다시 피아노 앞에 가서 앉았다. 흰 손가락이 건반 위를 내달렸다. 쇼팽의 즉흥환상곡이었다. 감정이 점점 격렬해져 왔다. 그녀는 긴 속눈섭이 드리워진 눈을 감은 채 취한 듯이 피아노를 쳤다.
바로 이 시간에 어린 루리코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나쓰에로서는 알턱이 없었다.
순간 피아노 줄이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끊겼다.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
“피아노 줄이 끊어질 때까지 치다니 대단한 열성이군.”
갑자기 등뒤에서 남편 게이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여느 때처럼 부드럽게 웃는 얼굴로 문앞에 서 있었다.
“어머! 오늘이 돌아오시는 날이었던가요?”
나쓰에는 당황했다. 게이조는 내일 돌아올 예정이었다. 뺨을 발그레하게 붉히며 일어나는 나쓰에의 모습은 요염해 보였다. 게이조에게는 그것이 남편의 갑작스러운 귀가를 반기는 아내의 모습 정도로 생각되었다.
“말없이 서 계시다니 싫어요!”
나쓰에는 게이조의 목에 그 희디힌 통통한 두 팔을 감고 그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었다.
그녀는 방금 전까지만 해도 무라이 야스오를 생각하며 상기되었던 얼굴을 남편에게 보이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게이조는 문득 나쓰에에게서 여느 때와는 다른 무언가를 느꼈다. 지금가지 나쓰에는 자진해서 게이조의 목을 껴안은 적이 없었던 것이다.
“더워.”
이렇게 말하면서도 게이조는 다정하게 나쓰에의 등에 팔을 감았다.
게이조는 학자풍으로 신경질적이긴 했으나 매정한 데가 없는 조용하고 다정한 남편이었다. 또한 더없이 믿음직스러운 사람이었다.
나쓰에는 남편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으니 마음이 차츰 가라앉았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무라이를 향해 야릇하게 물결치던 감정이 오히려 이상하게 생각되었다. 거깃말 같기도 했다.
‘역시 쓰지구치가 제일 좋아!’
그녀는 이렇게 생각했다.
나쓰에는 게이조를 사랑했다. 의사로서도 남편으로서도 그를 존경하고 있었다. 그에 대해서는 아무런 불만도 없었다.
‘그런데 어째서 무라이와 단둘이 있는 것이 그토록 좋았을까?’
나쓰에로서는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지금은 이렇게 남편이 제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다시 무라이를 만난다면 어떻게 될 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억제할 수 없는 그 무엇이 자기 핏속에 흐르고 있는 것을 나쓰에는 새삼 실감했다.
‘엄마를 귀찮게 하면 아빠에게 이를 테야!’
문득 아까 루리코가 한 말이 생각나 나쓰에는 가슴이 서늘해졌다.
“고단하시죠?”
루리코가 되도록 늦게 돌아오기를 바라면서 나쓰에는 남편을 쳐다보았다.
“응.”
게이조는 아이들의 머리를 쓰다듬듯이 정답게 나쓰에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파마를 하지 않은 풍성한 머리칼에서는 향긋한 냄새가 풍겨 나왔다. 그는 나쓰에의 머리에 턱을 댄 채 무심코 테이블 위를 내려다보았다.
순간 게이조의 눈이 날카롭게 번뜩였다. 거기에는 커피잔과 재떨이가 놓여 있었다. 그는 재떨이에 있는 꽁초를 눈으로 세어 보았다. 여덟 개까지 셀 수 있었다. 그는 차갑게 아내에게서 몸을 떼었다.
남편의 기색에 나쓰에는 가슴이 뜨끔했다.
“루리코는 어떻게 된 거요? 도오루와 쓰기코도 없잖소?”
게이조의 날카로운 시선은 여전히 테이블 위에 머물러 있었다. 게이조의 표정이 너무도 험악해 나쓰에는 무라이가 왔었다는 말을 차마 하지 못했다.
“도오루는 쓰기코와 영화 보러 갔어요. 루리코는 집 근처에서 놀고 있지 않았어요?”
“못 봤는데.”
어린 루리코까지 밖으로 내보내고 아무도 없는 응접실에서 아내는 대체 이 담배꽁초의 임자와 무엇을 했을까 하고 게이조는 눈을 번득이고 있었다.
게이조는 찾아온 사람이 누구였는지 나쓰에가 먼저 말해 주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는 한 손을 피아노에 갖다 댔다.
도미솔 도미솔 도미솔…..
손가락은 같은 건반을 되풀이해서 누르고 있었다.
어쩐지 갑갑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나쓰에는 남편의 표정이 더욱 침울해지는 것을 보고는 무라이가 찾아왔었다는 말을 더더욱 꺼낼 수 없었다.
도미솔 도미솔 도미솔……
게이조는 쾅 하고 커다란 소리가 나게 피아노의 뚜껑을 닫았다. 마침 나쓰에가 재떨이와 커피잔을 치우려던 참이었다.
그때 게이조와 나쓰에의 눈이 마주쳤다. 나쓰에가 먼저 시선을 피하고 응접실에서 나갔다. 게이조는 문을 나서는 나쓰에를 바라보면서 손님이 왔었다는 말을 한 마디도 입밖에 내지 않는 아내가 못마땅했다.
“손님이 왔었소?”
하고 게이조는 아무렇지 않은 듯이 가볍게 물어 볼 수가 없었다.
‘무라이였을까, 다카기였을까?’
자신도 없는 집에 들어오게 할 만한 남자 손님이란 그 두 사람밖에 없을 것 같았다.
다카기 유지로(高木雄二郞)는 산부인과 의사로, 삿포로 종합병원에서 일하고 있었다. 게이조와는 학창시절부터 친구였다. 다카기는 학창시절 나쓰에를 아내로 맞고 싶다며 그녀의 아버지에게 청혼을 한 적이 있었다. 나스에의 아버지인 스가와(津川) 교수는 ‘내과의 귀신’이라고 불리는 사람으로, 게이조와 다카기의 은사이기도 했다.
“나쓰에의 상대는 이미 생각해 놓았네.”
이렇게 거절당한 다카기는
“그게 누굽니까? 쓰지구치입니까? 그 친구라면 저도 단념하겠어요. 하지만 다른 녀석이라면 절대로 물러설 수 없습니다.”
하고 큰소리로 외쳤다는 말을 게이조는 나쓰에로부터도 들은 적이 있으며, 다카기 본인에게서도 들은 적이 있었다.
다카기는 눈이 부리부리하고 콧대가 우뚝한 사람으로, 성격도 매우 호탕하였다. 때때로 불쑥 병원으로 게이조를 찾아와서는,
“이제부터 자네의 아름다운 아내를 유혹하러 갈 텐데 괜찮겠나?”
하고 곧잘 농담을 하곤 했는데, 그는 아직도 독신이었다.
‘다카기가 찾아왔었다면야……’
다카기는 소탈한 성격이라 나쓰에의 일은 벌써 잊어버린 듯이 보이기도했다. 그는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자신의 전문도 아닌 유아원의 촉탁으로 있으면서,
“나는 결혼은 못했지만 자식 복은 터졌나봐.”
하며 즐거운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다카기는 오늘 삿포로에서 만나고 오는 길인데. 그렇다면 찾아온 손님은 역시 무라이였을까?’
게이조는 불안했다.
‘무라이가 왔었다고 솔직히 말할 수 없는 무슨 언짢은 일이라도 있을까?’
그는 우울한 표정으로 창 밖의 스트로브소나무 숲을 바라보았다.
‘참….다쓰코 씨가 찾아왔었는지도 모르겠군. 그녀도 담배를 피우지.’
부잣집 외동딸인 후지오 다쓰코(藤尾辰子)는 여학교 시절부터 나쓰에와 가까이 지내는 친구로, 일본 무용연구소를 운영하고 있다.
‘아니야, 다쓰코라면 응접실로 들어오지는 않았을 텐데.’
게이조는 혼자 뒤숭숭한 생각에 빠져 있었다.
이때 부엌문 쪽에서 가정부인 쓰기코와 어린 도오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도오루가 무어라고 말하면서 웃는 밝은 목소리가 들렸다.
‘영화관에서 돌아왔나 보군.’
게이조는 이렇게 생각하면서 응접실을 나와 거실로 갔다. 나쓰에와 쓰기코는 부엌에 있는 것 같았고, 도오루는 거실의 소파에 엎드려 있었다.
“아빠, 오셨어요? 아빠, 전 미국 병정이 될래요.”
“왜?”
게이조는 오늘 집에 찾아왔던 손님은 무라이임에 틀림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도오루의 옆에 걸터 앉았다.
“응, 영화에서 본 미국 병정은 정말 씩씩했어요. 기관총을 따따따 하고 쏘니까 적이 푹푹 쓰러지는 거예요.”
“흠, 전쟁 영화를 본 모양이구나.”
게이조는 언짢은 얼굴을 했다.
“적은 다 쓰러졌어요. 근데 아빠, 죽는다는 게 뭐죠? 죽으면 언제 또 움직이게 되나요?”
“죽으면 다시는 움직이지 못해.”
“아빠가 주사를 놓으면 움직일 수 있어요?”
“아니야, 아무리 주사를 많이 놓아도 움직일 수 없어. 다시는 밥도 먹지 못하고 이야기도 못해.”
“그렇다면 죽는 건 싫어요. 하지만 적은 죽어도 좋아요. 그런데 적이 뭐죠, 아빠?”
“적이란 건 말이야…..이거 대답하기 곤란한데…..”
게이조는 전쟁 중에 석 달 가량 중국 텐진에서 군의관으로 복무했다. 그러나 늑막염에 덜려 곧 돌아왔다. 그 짧은 기간 동안 일선 병원에 근무한 군의관 생활로는 전쟁을 경험할 수는 없었다. 주위의 풍경이나 여성들의 옷차림에서 이국의 정서를 느끼기는 했으나, 이 하늘 아래 어디선가 처참한 싸움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조차 게이조에게는 이상하게 생각되었다.
아사히가와에 돌아온 후 적의 함재기(艦載機)가 한두 차례 날아오고 나서야 종전을 맞이하게 되었다. 원래 학창 시절부터 반전(反戰) 사상을 갖고 있던 게이조로서는 어느 나라에 대해서도 적개심을 품고 있지 않았다. 그런 게이조였기에 도오루가 적이 뭐냐고 묻자 대답하기 곤란했다.
“글쎄, 적이란 가장 사이 좋게 지내야 할 사람을 말하는 거야.”
다섯 살 난 도오루로서는 알아듣기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게이조는 자기 말에 쓴웃음을 지었다.
“그럼 루리코가 적이에요?”
오누이는 언제나 사이 좋게 지내야 한다는 말을 들어온 도오루였다.
“아니야, 루리코는 도오루의 여동생이야. 적이란 밉살스러운 사람을 말하는 거야. 나쁜 짓을 하거나 남을 못살게 구는 사람 말이야.”
“아, 그럼 시로(四郞)겠군요. 시로가 적이죠?”
도우루는 이웃에 사는 아이의 이름을 들먹였다.
“거 참 설명하기 어렵구나. 시로는 친구지 적이 아니야.”
게이조는 웃어 보였다.
“아무튼 아주 사이가 나쁜 사람이야.”
“사이가 나쁜 사람과 왜 사이 좋게 지내야 해요?”
도오루는 귀여운 미간을 찌푸리면서 생각에 잠겼다.
“옛날에 말이야, 예수라는 훌륭한 분이 있었어. 그 사람이 적과 사이 좋게 지내라고 가르친 거야.”
게이조는 “네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을 상기했다. 학생 시절에 나쓰에의 아버지인 쓰가와 교수가 이렇게 말한 적이 있었다.
“자네들은 독일어가 어렵느니 진단이 어떠니 하고 말하지만, 나로서는 뭐니뭐니해도 그리스도의 ‘네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처럼 어려운 것은 이 세상에 없다고 생각하네. 웬만한 일은 노력하면 되는 거야. 하지만 자신의 원수를 사랑한다는 것은 절대 노력만으로는 안 돼, 노력만으로는……”
나쓰에의 아버지는 내과의 귀신이라고 불리는 학자로, 인격도 매우 원만한 사람이었는데 무척이나 서글픈 표정으로 한 그 말이 게이조에게는 매우 강한 인상을 주었다.
학생인 게이조가 보기에는 그 교수에게는 불가능한 일이란 하나도 없을 것처럼 여겨졌다. 강의 시간에 무슨 말 끝에 쓰가와 교수는 그렇게 말했으나,
‘저렇게 원만한 사람에게도 적이 생겨 괴로워하는 경우가 있나?’
하고 게이조는 이상하게 생각했었다.
“뭐가 뭔지 잘 모르겠어요.
적과 사이좋게 지내야 한다는 말을 들은 도오루는 납득이 가지 않는 얼굴로 일어서서 부엌으로 뛰어갔다. 배가 고팠던지,
“엄마, 뭐 먹을 거 없어?”
하고 응석을 부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게이조는 적이라는 말에 대해 깊이 생각하면서 문득 질투가 날 만큼 아름다운 무라이 야스오의 눈을 떠올렸다. 그러자 불현듯 살의에 가까운 감정이 그의 가슴을 스쳐갔다.
“적이란 가장 사이 좋게 지내야 할 사람을 말하는 거야.”
하고 방금 도오루에게 말한 자기 자신이 우스웠다. 무척 고지식한 편인 게이조는 무언가 될 대로 되라는 식의 허무에 빠진 무라이와는 어쩐지 서먹서먹한 사이였다. 그리고 어딘가 마음에 걸리는 존재였다.
‘만일 오늘 내가 없는 동안 무라이와 무슨 일이 있었다고 한다면….아내는 어째서 갑자기 나한테 매달린 것일까? 지금까지 그렇게 한 적이 한 번도 없었는데……그리고 언제나 조용히 피아노를 치던 아내가 어째서 오늘을 그처럼 줄이 끊어질 정도로 격렬하게 연주했을까? 무엇 때문에 손님이 찾아왔었다는 말을 입밖에 내지 않았을까? 분명히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이다. 만일 그 상대가 무라이였다면…..’
절대로 용서할 수 없다고 게이조는 생각했다. 자신의 생활을 위협하는 자에게 절대 너그러울 수는 없는 일이었다.
‘적이란 사랑할 만한 상대가 못된다. 싸워야 할 상대라고 도오루에게 말해 주었어야 했다.’
게이조는 이렇게 생각하면서 이층의 서재로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