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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신학공부를 하게 되면 떠오르는 질문이 많이 있다. 성경의 무오성과 영감설을 받아들이지 않는 목사, 신학자, 신학교가 상당히 많다는 것을 알고 놀랄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교회, 목사, 신학교를 우리가 어떻게 볼 것인지에 대한 심각한 질문도 생긴다. 이곳에서는 단지 이들을 분류하는 것으로만 그친다. 우리가 바울신학을 연구하면서 먼저 이 문제를 거론하는 이유는, 이들 신학자가 바울서신 중에 많은 것을 가짜서신(후기서신)으로 보기 때문이다. 이것은 18세기부터 내려오는 성경비판의 산물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의 무오성을 골자로 한 성경영감설을 중심으로 해서 신학자와 신학교를 분류하고자 한다. 본 분류는 필자가 오랫동안 이들의 글을 읽고 판단한 것에 기초한다. 그러므로 이 분류는 절대적인 것이 아니며, 약간의 오류가 있을 수 있다. 필자는 독일에서 성경비평학, 해석학을 연구했으므로 이 면에서는 상당히 예민한 편이다. 나는 한국 신학대학에서 성경비평을 가르치는 것을 보고 독일에 유학 왔다.
성경은 자기가 하나님 말씀이라고 주장하는 매우 특별한 책이다. 성경에 기록된 것은 한마디 예외 없이 하나님 말씀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 내용을 인간의 이성이나 감성, 체험을 근거로 비판하면 안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비평을 배척한다.
교회의 이러한 믿음은 17세기까지는 어느 정도 지켜졌으나 18세기부터 계몽주의 영향으로 지식인들의 도전을 받아 왔다. 이러한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결국 성경이 하나님 말씀과 인간의 생각이 섞여 있으므로 오류가 있다는 의견이 신학대학에서 자리를 잡기 시작하면서 성경비판이 시작했다. 그 이후 이 사조가 계속 발전되어 독일 신학대학에서는 이미 20세기 초중반부터 성경을 비판하지 않는 사람은 학자의 자격이 없는 것으로 간주되어 교수로 등용되는 길이 막혔다. 게르하르트 마이어 박사가 그 대표적인 예이다. 에타 린네만 교수는 유명한 신학교수였으나 성경비판이 오류라는 사실을 깨닫고 교수직을 사임했다. 독일에서는 일반적으로 성경비판을 반대하는 학자는 국가대학의 인정을 받지 못해, 국제적으로 거의 알려지지 않은 보수적 복음주의 신학교에서 가르쳤다. 그러므로 성경영감론자와 성경비평 신학자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전쟁이 있다.
독일에는 성경비평가가 대세를 이루지만, 전 세계적으로 볼 때는 성경영감설자들도 많이 있다. 성경비평학자들도 상당히 많으며, 이들은 신학대학에 혼재해서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신학 서적을 읽을 때에는 먼저 저자가 성경에 대해 어떤 입장을 가지고 있는지를 알아야 논지를 빨리 알아차릴 수 있으며, 필요에 따라 취사선택을 할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성경비평가가 된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이것을 잘 구분하기 어려우므로 필자가 대강의 가이드라인을 제시하고자 한다. 대체로 신학교에 따라 구분하는 것이 가장 쉽다. 그러나 신학교에는 다양한 성향의 교수들이 있으므로 조심해서 판단해야 한다. 보수를 표방하는 신학교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극단적인 보수 성향의 교수도 경계해야 한다. 이들은 보수가 아니라 수구이며, 보통 자기 스승에게 물려받은 신학이 신학의 전부라고 생각하고 다른 성향의 교수를 비판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학은 끊임없이 발전하고 있다. 문제는 학생들이 무엇이 긍정적 발전이고 무엇이 부정적 발전인지(신학의 타락)를 잘 구분하기 어렵다는 것인데, 이를 구분하기 위해 기본적 소양을 갖추어야 한다.
신학자의 성경에 대한 관점은 보통 크게 자유, 중도, 보수로 나눈다. 이 세 그룹 내에서도 다시 세 부류로 나뉜다. 좀 복잡하게 느껴지지만, 우리가 신학을 하려면 이것을 모두 알아야 한다.
자유주의는 계몽주의 영향을 받아 19세기부터 20세기 초중까지 독일 신학을 주도하던 신학조류였으므로(제믈러-바우어-쉬트라우스-리츨-하르낙), 지금 우리가 자유주의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은 맞지 않지만, 우리는 자유주의라는 말을, 성경(정경 66권)의 구속으로부터 자유한다는 의미로 우리 나름대로 정의해서 사용한다.
보수라는 말은 무조건 과거의 것을 지킨다는 수구의 의미가 아니라 성경이 하나님 말씀이라는 대전제를 꼭 붙들고 신학하는 입장을 말한다. 성경은 변함없는 진리의 하나님 말씀이며 시대 조류에 따라 의미가 변하지 않는다. 성경은 또한 우리가 스스로는 알 수 없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계시하며, 우리 죄인에게 구원의 길을 알려주고 생각과 행동에 대한 지침을 준다.
이러한 태도가 사도들 – 교부들 – 종교개혁자들로 이어지고 우리가 이 전통을 따르기 때문에 우리를 보수라고 칭한다. 그러나 보수라는 말은 무조건 과거의 것을 지킨다는 의미로 오해될 수 있기 때문에 좋은 표현은 아니지만, 다른 표현이 없으므로 어쩔 수 없이 사용한다. 보수는 올바른 것, 진리를 보존, 유지하자는 의미이므로 보존이 알맞지만 보존이라는 말을 어떤 사상적 흐름이나 세계관을 표현하기에는 적당치 않다.
우리는 보수라고 해서 새로운 것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무엇이든 항상 자세히 검토하여 옳은 것은 받아들이고 그른 것은 배척하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즉, 보수에도 발전이 있다는 의미이다. 실제로 신학은 타락을 거듭하면서도 많이 발전하기도 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기와 다르다는 이유로 그르지 않은 것까지도 배척하면 안 된다. 보수 내에서는 어느 정도 관용하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관용이 없는 자들을 근본주의자라고 한다. 우리는 단지 이단이나 성경을 비판하는 자에게만 관용을 베풀 수 없다.
내가 이렇게 분류할 수 있는 것은, 이 학자들의 책이나 논문을 읽거나 강의를 들었기 때문이다. 한국에는 자유신학자들이 생각보다 훨씬 많고 소위 보수주의 신학교에도 이들이 포진되어 있다. 이곳에서 내가 이들 이름을 밝히지 않는 것은, 이 사안이 너무 예민하므로, 내가 문제를 일으키게 하지 않기 위함이다. 인터넷에서 검색할 때에 자유주의적인 내용이 너무 많이 나와서 우리는 이것을 식별할 수 있는 눈을 가져야 하는데, 우선 대강의 분류 기준이라도 알아야 한다.
성종현은 그의 저서 “신학총론”에서 신학자를 다음과 같이 8 부류로 분류한다: 자유급진, 자유진보, 진보// 진보통합, 중도통합, 중도보수//, 보수, 보수경건. 그런데 그는 독일의 많은 보수적 신학자들을 언급하지 않고 이들을 근본주의로 낙인을 찍은 것은 그의 큰 과오이다. 그가 다른 곳에서 게르하르트 마이어를 근본주의자로 악평하는 것을 보아서 알 수 있다.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보수측, 즉 성경영감설을 신봉하는 독일신학자들을 그가 모두 근본주의로 치부하고 신학자 계열에서 누락시켰다. 이것은 성경영감설을 지지하는 복음주의 신학자들을 혐오하는 독일 신학계 분위기를 그대로 보여준다.
성종현은 “자유” 대신 “진보”라는 말을 사용하는데, 이것은 좋은 말이 아니다. 진보라는 말은 긍정적 의미이며 또한 좋은 어감을 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경영감을 부인하고 하나님을 모독하는 사람들에게 진보라는 말을 붙여서는 안 된다. 유럽에서는 학문적, 정치적 경향에 진보적이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는다. 여기에는 이미 도덕적 판단, 가치판단이 들어있으므로 자기와 다는 사람을 멸시한다는 의미가 들어있기 때문이다.
1. 자유진영: 한신, 감신 대부분.
자유주의는 급진적으로, 그리고 과격하게 성경비평학을 수용, 적용하는 곳이다. 성경비평학이란 대체로 성경을 합리주의적으로 읽는 태도이다. 즉, 성경에서 초자연적인 요소를 제거한다. 성경기자가 당시의 신화적인 세계관의 눈으로 고찰한 것을 마치 하나님이 하신 것으로 여겨서(착각해서) 그렇게 기록했다고 한다. 복음서도 전부 마태, 마가, 누가, 요한이 쓴 것이 아니라, 대체로 예루살렘이 멸망한 후 교인들이 이들의 이름으로 쓴 책들이다. 또한 이들은 예수님의 육체적 부활과 신성을 믿지 않는다.
이러한 학자 중에서도 3 부류로 나뉜다. 학자들이 너무 많으므로 대표적으로 몇 명만 나열한다.
급진: H. Braun, G. Lüdemann(예수님의 시체는 썩었다), 안병무, 변선환.
중도: R. Bultmann, C.H. Dodd
보수: G. Theissen, E. Käsemann
한신대는 “해방자 예수”를 쓴 민중신학자 안병무에 의해 극단적 자유주의가 꽃을 피운 것 같다. 당시에는 이들 그룹에서(유동식, 변선환…) 해방 신학뿐만 아니라 무당 신학, 여성 신학, 흑인 신학, 풍류 신학 등도 긍정적으로 논의되었다.
변선환은 “불타와 그리스도”라는 책을 쓴 종교다원주의자이다. 1967년부터 감신대에서 조직신학을 가르쳤다. 김홍도 등의 노력으로 그는 1992년에 홍정수 교수와 함께 출교당했다. 변선환은 교단재판에서 다음과 같은 최후 진술을 남겼다: 개종을 전제로 한 전도활동은 다른 종교를 정복의 대상으로 보는 종교적 제국주의적인 발상이다.
한국에 이러한 신학자, 목사들이 상당히 많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한다. 감신대에서도 보수적 신학자가 있다는 말은 들었는데, 내가 확인할 수 없다. 그러나 감리교단 내부에는 많은 보수적 목사들이 있을 것이다. 우리는 교수와 목사들 사이를 구별해야 한다. 목사들은 교수보다 대체적으로 좀 보수적이다.
2. 중도진영: 장신, 일부 감신, 일부 한신, 소수 고신, 소수 총신,
중도신학은 성경 해석 시에 성경비평학을 사용하는 태도이다. 자유주의 학자들과 같이, 이들도 마가복음 우선설을 받아들인다. 즉 마태와 누가복음은 저자가 마가복음과 Q문서를 대본으로 놓고, 자기가 수집한 자료를 참조하여 만들어낸 책이다. 저자도 마태와 누가도 아닌, 70-80년대에 저자 미상의 사람이 쓴 책이다. 중도신학자들의 특징은 이렇게 성경비판을 적용하여 성경을 읽으면서도 대체로 성경을 하나님 말씀으로 인정한다는 것이다. 나는 이것이 말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이들은 대부분 이적도 믿지 않으므로 성경의 많은 부분을 사실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많은 바울 서신을 가짜서신으로 간주한다.
문제는, 성경에서 어떤 말이 하나님 말씀이고 어떤 것이 아닌지를 내가 판단해야 한다면, 나는 성경 위에 있는 것이고, 하나님 말씀이 무엇인지, 더 나가서는 그분이 누구신지를 내가 결정하는 행위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자유진영만큼 급진적이 아니므로 중도라고 한다. 이들은 대체로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다. 대체로 삼위일체도 믿지만, 예수님을 인간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자유: Günther Bornkamm
중도: 성종현, 김세윤, G. Kümmel, J. Moltmann,
보수: P. Althaus, K. Barth, O. Cullmann, J. Jeremias, P. Stuhlmacher, M. Hengel, R. Schnackenburg, H. Marshall, 장흥길, 영국의 많은 복음주의 학자들,
귄터 보른캄(1905-1990)은 하이델베르크신학대학 교수로 재직할 때 “Jesus von Nazareth”(1956)으로 큰 명성을 얻었으며 그 책은 1995까지 15판이 발행되었다. 그는 그 책에서 부활 보도에 신화가 섞여있음을 인정하면서도 자기 스승 불트만과는 달리 케리그마의 부분적 역사성을 인정하여 자기는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것처럼 말한다. 그는 과학적 신학(성경비평)이 나오기 전까지는 신학자들에게 소설가적 면모가 있었다고 한다(dichtende Theologen: 윗 책 5쪽). 초대 교부들과 순교자, 어거스틴, 수많은 교부, 루터, 칼빈 등이 미신에 사로잡힌 소설가적인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는 말이 얼마나 큰 모독인가!
이종성 총장은 장신을 에큐메니칼로 이끌었고 장신대를 서서히 신정통주의로 인도한 사람이다. 장신의 복음적인 목사들이 그를 의심했지만, 그는 (필자의 기억으로) ”나는 성서적이고 복음적 신학을 추구한다”라는 말로 기묘하게 빠져나갔다. 그가 총장으로 재임할 때에 장신에 이미 성경비평학이 들어갔다.
김세윤은 자기가 성경비판신학자이라는 사실을 감추고 총신대 교수(1988-1994)로 들어가서 학교에 자유주의 바람을 불어 넣은 사람이다. 나도 그의 논문과 강의 녹취록을 읽었음에도 당시에는 그가 자유주의자라는 사실을 몰랐다. 다행히 그는 총신을 떠났다. 나중에 그는 스스로 coming out하면서, 성경비판을 하지 않는 신학자들을 매우 무시했다.
3. 보수진영: 합신, 고신, 총신, 개혁성경신학교
보수측은 성경비판을 거부한다. 이들은 성경이 쓰인 그대로 성령님의 영감을 받았으므로 오류가 없다고 믿는다. 이들도 세 부류로 나뉜다. 보수/자유는 특별한 경우에서 성경비평을 용인하거나 성경비평에 열려 있다. 그러나 적어도 대외적으로는 보수적 입장을 견지한다. 보수/중도와 보수/보수는 성경비평을 단호히 배격한다.
보수/중도는 필자가 견지하는 입장으로서 성경을 학문적으로도 연구하는 입장이다. 그러므로 성서비평가들의 합리주의적인 전제와 연구방법을 배척하지만, 이들의 연구 결과 중에서 합당한 것은 받아들인다. 대부분 미국의 유명한 보수신학교가 이 입장을 취한다(웨스트민스터, 칼빈, 리폼드…). 그러나 이들 중에서 은근히 보수/자유 입장을 취하는 교수도 많이 있다. 한국에서 보수/중도에 속한 학자로서는, 내가 알기로는 송영목(고신), 조병수(합신), 강대훈(총신), 그리고 조직신학자 이승구, 김병훈, 김재성 등이 있다. 이들의 글을 보면, 학문적이면서도 성경영감설을 확고히 붙든다. 사상적으로 성경비평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 이승구는 가장 건전한 교수 중의 하나이고 그의 글은 균형이 잡혀 있으므로 그의 글을 많이 접할수록 좋다. 그러나 그가 근래에 “세계복음주의연맹(WEA)”을 긍정적으로 보고 한국보수교회가 그곳에 가입해야 한다는 방향으로 평가한 것은 그의 최대의 실수인 것 같다. WEA는 에큐메니컬 방향으로 많이 나간 단체이며, 사무총장인 토마스 쉬르마허는 내가 개인적으로 아는 사람인데, 그는 원래 대단히 훌륭한 보수 개혁주의자였으나 프란치스코 교황과 매우 가까워지면서 에큐메니컬 쪽으로 선회한 사람이다. 죽을 때까지 실수를 하지 않는 한국인 학자는 매우 적은 것 같아 상당히 마음이 아프다. 어쨌든 이승구의 글은 약간의 예외가 있지만, 대부분 건전하다.
보수/보수는 일반적으로 성경비평 신학자들이 말하는 모든 것을 배척한다. 신학에서 중요한 용어도 배척한다: 하나님 나라, 이미와 아직, 인디카티브와 임페라티브, 성경신학, 언약신학 등.
그러나 공자님 말씀일지라도 성경말씀과 같은 것이 많이 있다(살인하지 마라, 부모를 공경하라…). 잠언 말씀은 당시 근동의 지혜서와 닮은 것이 많다. 그뿐 아니라 성경은 많은 이방 용어를 차용해서 사용한다. 우리는 불신자의 말일지라도 옳은 것을 배척할 필요는 없다.
성경에서 좀 더 구체적인 예를 들자면, 신약성경에 당시 그레코-로만 문명에서 사용되던 용어가 상당히 많이 성경에 유입되었다. 구약에도 그리스어 성경인 70인역에도 그리스 철학적, 법률적 용어가 사용되었다. 신약에는 특히 덕목과 같은 것은 대부분 그리스 사회에서 사용하는 개념이다. 중요한 것은, 성경에서는 세상의 단어를 사용할지라도, 그 의미를 새롭게 해서 다른 의미로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는 점이다. 구체적인 예를 들자면, 레이투르기아(고후 9:12; 빌 2:17)라는 말은 70인역이나 그레코-로만 문화에서 성전에서 섬기는 일을 표현하는 전문용어이지만, 바울서신에서는 예배와는 직접적인 관계 없이 신자의 섬김의 의미로 사용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에 나오는 언어의 의미를 규명할 때, 물론 일차적으로는 당시 문화에서 찾아야 하겠지만, 그것에 머물러서는 안 되고, 성경적 의미를 찾아야 한다. 즉, 예수님, 사도들이 그 말을 무슨 의미로 사용하셨는지 연구해야 한다. 이분들은 새로운 개념을 만드시지 않고 통용되는 개념을 사용하시면서도 때때로 독특한 의미를 부여했다.
우리가 신학을 연구할 때에도 마찬가지이다. 자유주의자들이 사용하는 신학적 용어에 대해서도 이와 같은 윈리가 적용된다. 이러한 용어들이 올바르게 사용 되었고 신학적 발전에 도움이 되면 그대로 사용하고, 아니면 다른 의미를 이입하여(세례하여) 사용한다.
한가지 예를 들면, “이미와 아직”이라는 용어는 보수신학의 거장(프린스턴 구파성경)인 신학자 게르할더스 보스의 "바울의 종말론"의 뼈대를 이루고, 그의 제자인 리처드 개핀이 이것을 이어받았다. 근래에는 싱클레어 퍼거슨이 그의 저서 “성령론”에서 구원의 서정의 각 단계를 “이미와 아직”으로 설명한다. 그리고 “구원의 복은 성령을 통해서, 배타적으로, 즉각적으로, 동시적으로, 종말론적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것이 된다”고 한다[1]. 그리고 그는 바로 앞에서 칼빈 저서에서 “이미와 아직”의 요소를 찾아낸다. 이것은 루터에게도 마찬가지이다. 국내 학자의 저서로는 무수히 많지만, 고신 교수 송영목의 신약신학(“바울의 종말론”; 325-336)을 예로 들 수 있다.
독일 자유주의 신학자들 중에서 대단히 뛰어난 사람들이 많이 있다. 그러나 그들이 우리와 신학을 하는 전제가 다르므로 같은 본문을 대할지라도 내용적으로 너무 자주 충돌이 된다. 그럼에도 순수한 학문적인 영역에서는 뛰어난 관찰들, 해박한 연구업적들이 많이 있으므로 우리는 이들의 서적을 연구하지 않을 수 없다. 예를 들면 신약 연구가는 Nestle-Aland의 그리스 원어성경, Kittel이나 Balz-Schneider의 원어주경사전을 참조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이들은 모두 자유주의 신학자들이다.
그런데 보수학자가 이에 매료되어 자유로 넘어간 사람이 많으므로 우리는 대단히 조심해야 한다. 한국 보수주의 학자 중에서도 자유주의 학자들의 잘못된 의견을 받아들이는 사람이 많다. 이것은 매우 위험하다. 이런 사람은 언젠가는 자유로 넘어간다. 그런데 문제는 간단하지 않다. 해석학이 계속 연구되면서 문학비평의 개념도 바뀌고 성경연구와 성경비평의 차이가 엷어지면서 보수주의학자들이 점차로 성경비평으로 넘어가기 때문이다. 마샬이 주도해서 만든 논문집 “신약해석학”(크리스챤다이제스트)를 읽어보면 이러한 현상이 잘 나타난다. 그러므로 보수진영에서 대학자들이 나와서 이 문제를 명확하게 해결하지 않으면, 보수대학이 성경비평대학으로 넘어가는 것은 시간문제이다. 그러므로 우리와 같이 보수중도에 속한 신학자 중에서 실제로는 성경비평에 동조하는 학자들도 많이 있다는 것을 감안해야 한다.
자유: A. Schlatter, A. McGrath.
중도: A. Bengel, G. Vos(1862-1949, 프린스턴), H. Ridderbos(1909-2007), W. Barclay, F.F. Bruce, D. Guthrie(1916-1992), G. Maier(1937-), 박윤선, 미국의 대부분의 복음주의 학자들, 독일의 대부분 복음주의 학자들, 합신, 개혁성경신학교(부천).
보수: 킹제임스 성경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학자들, 근본주의적 성향의 학자들. 이들은 성경비평학자의 말을 무조건 불신하고 거부한다. 이들의 책을 연구하지 않으므로 학문에 진척이 없다.
고신에서는 신대원에는 오래 전에 이**교수의 학위논문을 두고 논란이 있었다. 그는 성경비평의 전문용어인 사가(Saga)라는 말을 사용했다. 이 사건으로 그는 퇴임했지만, 나는 고신에는 자유, 중도, 보수 이 세 가지가 모두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합신 교수는 모두 중도라고 보아야 한다.
총신대 교수 중에는 이 세 가지가 모두 있(었)다.
말씀보존학회는 이단이다. 이들은 킹제임스 흠정역 외에 소수를 제외한 다른 성경번역은 인정하지도 않을 뿐더러 사단이 만든 책이라고 한다.
보스, 거스리, 리덜보스는 보수신학자임에도 영국, 네덜란드, 미국에서 교수로 활동하면서 큰 명성과 업적을 남겼다. 그곳에는 어느 정도 강세인 보수적 신학대학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게르하르트 마이어는 보수적 신학대학(국가대학)이 없는 독일에서 활동했으므로 어려움을 겪었지만, 어느 정도 보수신학자들을 결집하여 성경사전과 주석서를 발행하는 활동을 하고, 보수 신학 세미너리에서 가르침으로써 독일 보수교회에 선한 영향을 끼쳤다. 그러므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지는 못했다. 독일에는 보수적 복음주의 신학교와 교회가 아직 상당히 많다.
다음과 같이 특이한 독일 신학자들을 소개한다:
아돌프 슐라터(1852-1938)
슐라터는 벵엘과 더불어 보수신학계의 거성과 같다. 그의 쟁쟁한 후계자는 Otto Michel, Walter Künneth, Peter Beyerhaus 등이다. 그는 1893-1898 사이 베를린 대학에서 교수생활을 하면서 보수신학을 견지했음에도 하르낙과 같은 자유주의자들의 존경을 받았다. 1898년에 튀빙엔으로 옮겼다. 그의 10권으로 된 신학주석책은 매우 오랫동안 독일의 경건한 신자들에게 축복이 되었다. 부퍼탈 주석이 나오자 그의 주석은 서서히 사라졌고, 부퍼탈 주석은 게르하르트 마이어 신약 주석이 나오면서 신약 부분은 조금씩 대체되고 구약은 아직도 좋은 복음주의 주석으로 남아있다.
엄밀하게 본다면 그는 정통신학을 벗어난 면이 있으나(예를 들면 제2 이사야라는 말을 사용함), 성경비평가는 아니다.
디트리히 본회퍼(1906-1945)
그는 천재적인 신학자로서 히틀러 명령으로 39세에 독일 멸망 바로 전에 사형당했다. 그는 신학생 시절 성경비평을 반대했으므로 제적당할 뻔했으나 교수들이 그를 예외로 인정해주었다. 그의 저작은 몇 개 되지 않지만 오늘날까지도 연구대상이 된다. 내가 극심한 어려움 속에서 헤맬 때 그의 글을 나에게 큰 힘이 되었다. 그의 글은 생명력 있는 살아있는 글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생의 마지막 때에 감옥에서 창세기의 몇 구절이 신화적인 요소가 있지 않은지 의심했다. 나는 그것을 일탈이라고 생각한다. 그가 자유주의 신학자들과 가깝게 지내므로 잠시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그는 칼 바르트와도 깊은 친분을 유지했다. 그의 신학사상은 매우 깊이가 있고 영적이므로 우리가 배울 점이 많다.
역사적으로 보면 독일에는 성경에 충실하면서도 보수진영과 중도진영의 경계선에서 왔다갔다 한 훌륭한 신학자들이 많다.
칼 바르트(1886-1968)
바르트에 대해서 잠깐만 언급하면, 그는 성경을 하나님 말씀으로 간주하는 듯한 입장으로 당시 자유주의가 지배하던 독일 신학계에 엄청 큰 파장을 일으켰다. 그 이후에 독일 신학계가 어느 정도 보수로 돌아오는 데 공헌했다. 그러나 그는 „성경은 하나님 말씀이다“라고 하지 않고, 우리가 믿을 때에 성경이 „하나님 말씀이 된다“고 했다. 이것은 실존주의적인 사고이므로 우리 입장과는 다르다.
실제로 그는 성경비평에 열려있었고, 성경에 신화적 요소가 있음을 인정했다. 그는 끝까지 „지옥이 있는가“라는 질문에 답하지 않았다. 그의 신학체계로 결론을 내리자면 그는 만인구원론자이다.
그런데 그의 신학이 많은 보수신학자들에게 영향을 주어 이들이 바르트주의자가 되게 했다. 바르트주의자가 된다는 것은 성경비평에 들어가는 입문이다. 이로써 그는 보수신학계에 큰 타격을 입혔다. 이러한 이유로 코르네우스 반 틸은 그를 집요하게 공격했고, 보수신학자들은 일반적으로 그를 신랄하게 공격한다. 그를 신정통주의자라고 한다.
우리가 그의 신학을 매우 조심해야 하지만, 그의 책에서 배울 것이 많으므로 읽어보는 것도 좋다. 그의 글을 이해하기 쉽지 않다.
그가 성경을 직설적으로 비판하지는 않았지만, 그의 사고 경향과 영향력, 그리고 상당히 문제 되는 그의 도덕성을 고려해서 나는 그를 중도/보수로 분류했다.
결론:
결론적으로 말한다면, 우리는 성경 66권을 무오한 하나님 말씀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학자들을 매우 경계해야 한다. 그러나 학문을 위해서는 그들의 서적을 연구하지 않을 수 없다. 루터와 칼빈 이후에 성경연구가 대단한 발전을 해왔으며 이들이 많은 해악을 끼쳤지만, 공헌도 한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 특히 독일에는 과거에 자유와 보수의 경계에 있는 학자들이 많았는데 이들이 성경신학에 기여를 많이 했다. 이들의 서적은 국외에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실제로 성경에는 오늘날 우리가 이해하기 어려운 구절이 상당히 많다. 원래 성경은 주로 당시 수신자를 대상으로 쓰였으므로 세월이 지나면 이해가 어렵게 되는 것은 당연하다. 더욱이 타문화권의 사람에게는 더욱 이해가 어렵다. 성경해석학은 루터가 기초를 놓은 이후 학문적으로도 발전했을 뿐만 아니라, 고전어 연구가 진척되고 당시의 많은 유물과 문서가 발견됨으로써 성경 이해에 많은 진척을 가지고 왔다. 그러므로 성경신학은 오늘날 대단히 어려운 학문이 되고, 성경비평학이 유입되고 대부분 신학자들은 이에 동조하므로, 보수 신학을 견지하는 우리에게는 성경 연구가 더욱 어렵게 되었다.
이러한 환경에서 우리는 이 모든 신학서적과 자료들을 연구하면서 우리의 성경 이해를 넓혀나가야 한다. 그뿐 아니라 성경비판의 공격으로부터 성경을 변증 하려면, 상당히 깊은 지식이 필요하다. 우리가 읽는 리덜보스는 본서에서 이것을 탁월하게 하고 있다. 그는 많은 비평가들의 이론을 비판하면서 그들의 옳은 주장은 받아들인다. 필자는 성경을 가장 잘 변증 한 신학자는 게르하르트 마이어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보수학자는 공부를 많이 하지 않을 수 없다. 여기에 각별한 주의가 필요하다. 자칫하면 자기도 성경비판 쪽으로 빠질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입장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좋은 것은 취하고, 나쁜 것(오류)은 버리고, 다른 것은 관용한다. 악성 논쟁은 피한다. 많은 사람과 교제하고 많은 것을 연구함으로써 학문성을 견지한다.
그러나 이 길을 가는 것이 대단히 어렵다는 것을 앞에서 충분히 말했다. 어떨 때에는 신학연구가 전투와도 같다. 성경비평자들과 논쟁을 할 때도 있으므로 우리는 그들의 이론도 잘 알고 있어야 한다. 그들의 그럴듯한 이론을 받아들여 이들에게 물드는 일도 비일비재하다는 것도 앞에서 설명했다. 우리가 비판학자들의 용어를 사용한다고 해서 우리를 적으로 보고 달려드는 보수 학자/목사들도 있다. 보수/보수 중에서 온건한 사람과 과격한 사람들이 있는데, 온건한 사람은 그러한 전통 속에서 배우고 생활해서 그렇게 형성이 된 것이므로 대화를 통해서 서서히 변할 수 있고 아니면 상대를 존중하는 태도를 보이므로 형제 간의 대화가 가능하다. 그러나 과격한 사람은 자기가 배운 것을 절대시하므로 자기와 다른 사람을 적으로 간주하는 경우가 많다. 이들은 남들을 비판함으로써 자기의 존재 의미를 갖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이런 사람은 타인에게 쉽게 상처를 주며, 심지어 총을 겨누기까지 한다. 우리는 이런 사람과 즉시 교제를 끊어야 한다. 대화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신학/ 신앙적인 문제에서 우리가 상대를 비판해야 할 때가 있지만, 늘 정중하고 예의를 갖추어, 상대방의 감정을 상하지 않게 해야 한다.
„바른믿음“의 정 목사가 학계와 교계에서 문제를 일으킨, 그와 합신, 고신 교수들 간의 논쟁과 총신 내부에서 일어난 신학논쟁을 참조하기 바란다. 논쟁 자체는 그렇다고 할지라도 논쟁 방법이 문제가 된다. 이러한 비극이 교계에서 다시는 일어나지 않기를 바란다.
다시 한번 정리하면, 장로교 5개 교단 중에 한신은 매우 빗나간 자유주의 신학을 가르치고, 장신은 중도의 노선을 걷지만 성경비평을 옹호하고, 총신, 합신, 고신은 보수이다. 그러나 이들 중에서도 개별적으로 성경비평을 지지하는 교수들이 있다. 장로교를 제외한 다른 모든 교파는(감리교, 성결교, 침례교, 순복음, 심지어 가톨릭도) 신학교에서 성경비평을 가르친다. 그러므로 어떠한 신학서적이나 기고문을 대할 때에는 그가 위에서 구분한 9 영역 중에 어디에 속해있는지를 먼저 확인하는 것이 좋다. 그러나 어떤 교회가 성경비평을 하는 교단에 소속되었다고 할지라도, 그 교회 목사가 성경비평을 옹호한다는 것은 아니다. 좀 모순으로 들리겠지만, 교단신학과 개교회 목사의 성경관이 다른 경우가 많이 있다.
[1] “성령”. 싱클레어 퍼거슨, 116-117. IVP. 김재성 옮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