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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2.11. 주현절 여섯째 주일
예배 시편 / 시편 113편 1-9절
찬송 / 235장 · 달고 오묘한 그 말씀
성서 / 창세기 33장 1-11절, 누가복음 10장 38-42절
말씀 /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시므로
하나님이 저에게 은혜를 베푸시므로, 제가 가진 것도 이렇게 넉넉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제가 형님께 가지고 온 이 선물을 기꺼이 받아 주시기 바랍니다." 야곱이 간곡히 권하므로, 에서는 그 선물을 받았다.(창세기 33장 11절)
그러나 주께서는 마르다에게 대답하셨다. “마르다야, 마르다야, 너는 많은 일로 염려하며 들떠 있다. 그러나 필요한 일은 하나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택하였다. 그러니 그는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누가복음 10장 41-42절)
김윤식 목사
입춘이 지나니 햇살과 바람이 제법 따스해졌습니다. 나무의 끝에는 순한 가지들이 연둣빛으로 물들어갑니다. 우리는 봄이라고 하면, 먼저 아름다운 꽃과 푸른 새싹을 생각하지요. 그런데 싹과 꽃에 앞서 준비되어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언 땅이 녹아서 부드러워진 후에야, 깊이 내린 뿌리가 물을 빨아들여 머금은 후에야, 비로소 식물들은 싹을 틔울 수 있습니다. 옛말에 물은 반드시 구덩이를 채운 뒤에야 지나간다고 말한 것처럼, 겨우내 얼어붙었던 나무들은 저마다 뿌리로 녹아내린 물을 빨아들여 반드시 물을 채우고 머금은 뒤에야 싹을 틔웁니다. 만물이 소생하는 이 계절에 우리의 얼어붙었던 마음도 녹아지고, 불신과 절망과 미움으로 가득한 우리의 마음이 믿음과 소망과 사랑의 샘물이 솟아나고, 가득 채워질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이 계절에 껍질을 뚫고 돋아나는 새싹처럼 우리의 신앙과 생활도 껍질을 깨고 생기가득 새 마음으로 일어설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구약성서에서 창세기를 읽다 보면, 야곱이 창세기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상당히 큽니다. 창세기 25장에 이삭이 에서와 야곱의 출생 장면에서 야곱이 처음 등장하고, 창세기의 마지막 장인 50장에서 야곱이 숨을 거두는 장면이 나오는 걸 생각해 보면, 창세기의 절반 이상은 야곱의 이야기인 셈입니다. 여기서 문제는 야곱이라는 인물이 그리 모범적이지 못하고 오히려 ‘문제적인 인물’이라는데 있습니다. 문제가 많고, 문제가 큰 인물이라는 말입니다. 가장 큰 문제는 무엇이지요? 그는 태어날 때부터 형의 발꿈치를 쥐고 나왔기 때문에, 그 이름이 ‘쥐다’라는 뜻을 지니고 있었지요. 그런데 그 글자는 ‘속이다’라는 단어와 똑같은 글자로 되어 있지요. 그러니까 사람들이 야곱이라고 말할 때에는 ‘쥐다’라는 뜻을 떠올릴 수도 있겠지만, ‘속이다’라는 뜻을 떠올릴 수도 있었습니다. 야곱의 가장 큰 문제는 그의 이름처럼 그가 속이는 사람이었다는 겁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야곱은 배가 고픈 형에게 팥죽을 내밀며 장자권을 얻어냈지요. 그리고 아버지 이삭이 나이가 들어 생을 마무리 하고자 준비할 때, 장자에게 내릴 축복도 속여서 받아냈습니다. 야곱은 에서가 사냥을 나간 사이에 털이 많았던 형 에서로 변장해서, 눈이 먼 아버지에게 음식을 대접하고, 아버지가 빌어주는 복을 받은 것이지요(창 27:25-29). “너를 저주하는 사람은 저주를 받고, 축복을 하는 자는 축복을 받는다”는 기도와 함께 이삭이 소유하고 있던 곡식과 포도주와 종을 비롯한 재산을 받았고, 형 에서를 다스리는 권한까지 아버지에게 모두 받았습니다(창 27:37). 야곱이 아버지를 속이는 동안 위장술은 발각되지 않았고, 형 에서가 사냥에서 빨리 도착하지도 않았으니, 야곱의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행동들은 모두 간단하게 성공한 것만 같습니다.
이러한 야곱의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행동들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야곱처럼 거짓과 부끄러운 방법으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나의 복을 채우는 것이 과연 정당하고 신앙적인 방법일까요? 아니겠지요?
야곱의 이야기를 조금 더 자세히, 꼼꼼하게 들여다보면 성서가 야곱의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행동들을 정당화하려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간단하게, 야곱의 이야기에 등장하는 주변인물을 하나하나 살펴봅시다. 먼저, 야곱의 형 에서입니다. 창세기 27장의 속임수 이야기에 앞서 26장의 마지막 단락에는 에서가 헷 족속의 두 아내와 결혼 했다는 설명이 등장합니다. 에서가 헷 족속의 두 아내와 결혼한 사건은 아버지 이삭이 그의 아들에게 무관심했던 것을 의미할 수도 있고, 에서가 이방인과는 결혼하면 안 된다는 집안의 전통과 가르침을 거부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정확한 이유는 알기 어렵지만, 어쨌든 이 일은 아버지 이삭과 어머니 리브가에게 큰 근심거리가 되었습니다(창 26:35). 그다음 아버지 이삭도 문제가 있었습니다. 구약 성서에서 대부분 어떤 사람이 자신의 죽음이 가까운 것을 알게 되면, 자녀들을 모두 한 자리에 불러 기도하고, 축복합니다. 하지만 이삭은 처음부터 그가 아끼던 맏아들 에서만을 불러 복을 빌어주고, 그 재산을 모두 주려고 합니다. 집안의 전통과 가르침에서 엇나가는 에서이지만, 그럼에도 맏아들을 향한 지독한 편애를 놓지 못하는 아버지입니다. 이러한 편애의 반대편에 어머니 리브가가 서 있었습니다. 어머니 리브가는 아버지 이삭의 편애에 대항해서, 야곱을 편애합니다. 야곱에 대한 왜곡된 편애는 마침내 에서를 축복하는 이삭을 가로막는 계획으로 이어집니다. 리브가는 야곱에게 에서의 복을 빼앗으라고, 이삭을 속이도록 독려합니다.
엇나간 맏아들과, 맏아들을 편애하는 아버지, 그리고 작은 아들을 편애해서 맏아들과 아버지를 속이도록 독려하는 어머니, 이들의 갈등 사이에 오늘의 주인공 야곱이 있습니다. 야곱은 엇나간 형과 형을 편애하는 아버지를 속여서 용감하게 아버지가 빌어주는 복과 재산을 모두 얻어냈습니다. 야곱은 자기의 계략과 노력으로 장자의 권한도, 아버지의 복도, 재산도 모두 얻은 것이지요. 모든 것을 손쉽게 얻어내, 그렇게 자신을 채운 것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성서는 이러한 야곱의 대담함과 꾀를 칭찬하거나 본으로 내세우려도 하진 않습니다.
왜냐하면 야곱이 억지로 채운 복은 오히려 그에게 독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먼저, 야곱의 속임수는 에서의 멈출 수 없는 분노를 일으켰고, 야곱은 목숨을 건지기 위해서 도망해야 했지요. 이에 따라 리브가는 자신이 아끼는 작은 아들을 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야곱은 외삼촌 집에서 속임을 당하며, 종살이를 오랜 시간 해야만 했지요. 외삼촌은 박정하게 야곱을 착취하고, 그를 속였습니다.
훗날 야곱의 아들들도 야곱이 아버지 이삭을 속였던 것처럼, 아버지를 속이지요. 아들들의 속임수 때문에 야곱은 그가 가장 아끼고 사랑하던 요셉이 오랜 기간 죽은 것으로 오해하고 평생을 살아야만 했습니다. 그가 억지로 채운 복이 독이 되어서, 오히려 남은 인생을 고난 가운데 살아야만 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야곱의 이야기를 통해서 성서가 우리에게 전하는 가르침은 무엇일까요? 성서는 우리에게 야곱의 교묘하고 간교한 꾀가 아니라, 독이 된 그의 노력과 꾀가 아니라, 부족하고 연약한 인간 야곱을 선택하셔서, 함께하시고,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보게 합니다. 때에 따라, 그의 부족함을 채우시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성서는 우리에게 야곱의 인생을 통해서, 오늘 우리 가운데 함께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하나님의 역사를 믿고 바라보게 합니다.
저는 오늘 우리가 받아 읽은 야곱이 그의 형 에서를 만나는 장면이, 바로 커다란 야곱 이야기의 정점이라고 생각합니다. 불신과 거짓과 미움이 용서와 화해로 변화되는 아름다운 장면이지요. 야곱은 그동안 그가 평생에 걸쳐 모은 모든 재산을 형에게 드릴 선물로 앞세워 나아갑니다. 자신의 잘못에 대한 용서를 형에게 구하는 것이지요. 그리고 나서 야곱은 형 에서를 만났을 때, “하나님의 얼굴을 뵙는듯 합니다”라고 고백했지요. 에서와 야곱은 어린 시절부터 그토록 경쟁하고 다투며 갈등했지만, 이제 서로 용서하며 화해합니다. 에서는 두 팔을 벌려 동생을 끌어안고 함께 눈물을 흘립니다. 이처럼 서로 용서하고 부둥켜안은 모습은 우리에게 감동을 자아냅니다.
이제, 야곱은 형에게 자신이 선물로 준비한 모든 것을 과감하게 내어놓습니다. 형 에서는 그 선물들을 거절했지요. 그러자 야곱은 형에게 이렇게 답합니다. 창세기 33장 11절입니다. “하나님이 저에게 은혜를 베푸시므로, 제가 가진 것이 이렇게 넉넉하게 되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야곱의 지난한 인생도, 야곱이 지닌 모든 소유와 재산도, 야곱 자신의 대단한 꾀와 노력으로 한 것이 아니라는 고백이지요. 내가 지닌 이 모든 것도 내가, 우리가 이룬 것이 아니라는 고백입니다. 다만, 이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신 것이라는 고백입니다. 그렇습니다. 야곱의 이야기는 그 정점에서 우리의 인생이,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모든 것이 우리의 생각과 노력의 결과가 아니라 하나님이 허락하시고 주신 것이라는 것을 깨닫도록 강조하고 있습니다. 야곱이 그가 모은 모든 것을 형에게 돌려줄 수 있었던 것은 그가 그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신 것으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는 그 모든 것을 하나님의 은혜로 여기며, 용서와 화해를 위해서 형에게 돌려주었습니다. 흐르는 물이 구덩이를 채우지 않고서 지나는 법이 없듯이, 물을 채우지 않고서, 머금지 않고서는 나무가 싹을 틔울 수 없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은혜와 섭리로 야곱의 인생에서 부족한 부분을 때에 따라 채워주셨습니다. 야곱의 이야기가 우리에게 보여주는 믿음의 태도요, 신앙이란 내게 주어진 것이 내 노력과 공적이 아니라, 다만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 나와 우리의 인생을 때에 따라 채우시고, 인도하시고, 이끌어 주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는 고백입니다.
오늘 우리는 복음서의 말씀으로 누가복음서에 있는 마르다와 마리아의 이야기를 받아 읽었습니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이 이야기의 결론처럼 말씀이 봉사보다 중요하다고, 마리아가 예수님의 제자들과 같이 중요한 말씀에 더 집중해서 칭찬을 받았다는 결론 때문에, 우리는 이 이야기의 주인공을 예수님과 마리아로만 생각하곤 합니다. 그런데 오늘의 말씀을 꼼꼼히 읽어보면 마르다와 마리아가 번갈아 가며 언급되지만, 예수님을 집에 초대한 사람도 예수님과 대화를 나누는 사람도 모두 마르다입니다. 예수께서 집에 찾아 오셨을 때, 마르다는 분주하게 일을 하다가, 마리아에게 시선을 옮겼습니다. 일은 하지 않고, 예수님 발 곁에 앉아서 말씀을 듣고 있는 마리아가 얄미워 보인 것 같습니다. 마르다는 마리아에게 직접 말하지 않고, 예수님께 마리아에게 이야기를 좀 해달라고 일러바쳤지요. 이때 예수께서는 마르다에게 대답하셨습니다. 그 대답이 무엇이지요? 예수님의 대답은 마르다의 일러바치는 것을 나무란 것도 아니셨고, 마르다가 열심히 일한 것을 중단하도록 하시지도 않았습니다. 다만, 마르다에게 너무 많은 일로 염려하고 있다고, “필요한 것은 한 가지 일”이라는 말씀하십니다. 무슨 말씀일까요? 마르다는 열심히 일을 하고 있었으니, 예수님의 이 말씀은 마르다에게 하던 한 가지 일에 집중하라는 격려의 말씀일 수도 있고, 마르다도 마리아처럼 예수님의 말씀을 함께 듣자고 초청하신 말씀일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상상을 해보면, 예수님께서 이 말씀 후에 마리아가 말씀을 듣고 있는 일이 잘한 일이라고 칭찬하셨으니, 마르다도 함께 말씀을 듣는 일에 참여했을 수도 있고, 마르다는 자신이 하던 일을 더 열심히 집중해서 했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말씀과 봉사와 실천 어느 하나 중요하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말씀과 은혜가 있어야 분주하거나 공허하지 않은 섬김과 사랑이 있을 수 있고, 섬김과 사랑의 실천이 있어야 말씀과 은혜도 빛이 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예수께서 말씀을 듣는 마리아를 좋은 일을 택하였다며, 아무도 그것을 빼앗지 못할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말씀과 봉사와 실천의 우열을 가리는 말씀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말씀”과 “은혜”가 우리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반드시 있어야 한다는 걸 강조하는 가르침 아닐까 저는 생각합니다.
그렇습니다. 이 이야기의 중심에는 갈등과 미움이 아니라 지친 이들에게 위로와 힘을 채워 주시고, 불신이 있는 곳에 믿음과 사랑을 채워주시는 분, 희망을 채워주시는 분이 마리아와 마르다 가운데 계십니다. 이 이야기는 마리아와 마르다 곁에서 함께하시는 예수님을 바라보게 합니다. 예수께서 마르다와 같이 분주하고, 때로 열심히 일하는 우리에게 꼭 필요한 한 가지를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그 발아래에서 말씀을 듣는 마리아와 같이, 우리에게도 하나님의 뜻과 말씀을 가르쳐주시고, 고난의 길을 가심으로 생명의 길을 열어 주십니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변함없는 은혜를 우리에게 보여주시고, 한결같은 사랑을 우리에게 채워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한결같은 은혜, 우리의 생각과 계획은 앞서가는 은혜, 우리의 분주한 걱정과 일들과 계획보다 더 큰 은혜를 때에 따라 채워주십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한결같은 은혜로, 때에 따라 좋은 것으로 채워주시는 주님께, 나의 모든 것이 내 공적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신 은혜라고 고백하는 야곱의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 될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자신의 집으로 예수님을 모시고 정성껏 섬긴 마르다의 섬김과 예수님의 발아래에서 말씀을 들으며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던 마리아의 믿음과 사랑을 우리가 닮아갈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무엇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채워주시는 은혜에 대한 감사와 기쁨이 우리 가운데 가득 채워질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은혜를 잊지 않고 감사드리는 마음과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을 기뻐하실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은혜와 사랑을 가득 채워주셔서, 우리의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 싹을 틔우고 꽃을 피우며, 아름답고 향기 나는 열매를 맺을 수 있게 되길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