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 7. 4. 토요일
가뿐하다.
마음이 가볍다.
부담이 없다.
남파랑길을 걸으러 남해로 내려오면 대부분 17km 안팎의 긴 거리를 여섯 시간 넘게 걷는다.
어떤 날은 산을 다섯 시간 넘게 오르내리며 숨이 턱까지 차오르는 코스도 있다.
그러나 오늘은 다르다.
10km 남짓, 세 시간이면 충분한 평탄한 길이다.
삼천포 바다를 따라 천천히 걸으면 되는 코스.
그래서 오늘은 완주해야 한다는 생각보다 길을 즐기기로 했다.
하이면사무소에 도착하니 오전 11시가 채 되지 않았다.
어젯밤과 아침까지 세차게 내리던 비는 신기하게도 우리가 도착할 무렵 모두 그쳤다.
우산과 우비는 버스에 두고 대신 선크림을 바른다.
챙이 넓은 모자를 눌러쓰고 34코스 출발지에서 단체 사진을 남긴 뒤, 삼천포대교 사거리를 향해 발걸음을 옮긴다.
출발한 지 얼마 되지 않아 2주 전 옌타이 고량주 한잔과 간짜장을 맛있게 먹었던 중국집이 눈에 들어온다.
그때의 웃음이 잠시 떠오른다.
여행은 장소보다 기억을 다시 만나는 일인지도 모른다.
남일대 해수욕장으로 향하는 길은 평탄하다.
코끼리바위로 가는 갈림길도 있지만 오늘은 욕심내지 않는다.
남파랑길이 안내하는 길을 그대로 따른다.
해수욕장 앞 편의점에서 차가운 캔맥주 하나를 들고 바다를 바라본다.
여름을 즐기는 사람들의 웃음소리까지 더해지니 오늘은 걷기보다 휴가를 나온 기분이다.
숲길이 시작된다.
짙은 녹음이 하늘을 덮고, 왼쪽에서는 바다가 나무 사이로 조금씩 얼굴을 내민다. 오른쪽 산자락의 나무들은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 준다.
어젯밤 비를 머금은 숲은 아직 촉촉하다.
뜨겁지 않은 흙냄새와 젖은 나뭇잎의 향기가 천천히 걸음을 감싼다.
잠시 계단이 나타난다.
'아이고, 또 오르막이구나.'
그런데 몇 분 오르니 진널전망대가 모습을 드러낸다.
관리의 손길은 조금 아쉬웠지만 전망만큼은 훌륭하다.
나선형 계단에 올라서니 우리가 걸어온 길과 앞으로 걸어갈 삼천포대교 방향이 한눈에 들어온다.
길은 늘 앞만 바라보게 하지만, 전망대에서는 비로소 뒤를 돌아보게 된다.
내가 걸어온 길을 바라보는 일도, 앞으로 걸어갈 길을 바라보는 일만큼 소중하다는 것을 새삼 느낀다.
전망대를 내려와 삼천포 신항을 지난다.
항만 시설 너머로는 구름에 살짝 가려진 산들이 묵묵히 자리를 지키고 있다.
바닷가 민가 두 채를 보며 "참 전망 좋은 곳에 사신다."라며 웃는다.
다시 숲길이다.
왼쪽에는 바다가 있지만 숲이 가려 모습을 쉽게 내어주지 않는다.
대신 파도 소리가 길동무가 되어 준다.
잔잔한 바람이 불고, 솔잎 사이를 스치는 바닷내음이 코끝에 머문다.
조금 더 걸으니 파도 소리가 조금씩 커진다.
바다는 보이지 않아도 가까워지고 있다는 것을 소리로 먼저 알게 된다.
팔포항 먹거리 골목을 지나 간절한 그리움이 어려있는 '삼천포 아가씨' 동상을 만난다.
정자에 둘러앉아 각자 준비해 온 음식을 나누며 한참을 쉰다.
바닷바람이 얼마나 시원하던지, 시간마저 천천히 흐르는 듯했다.
노산 공원으로 들어선다.
문득 "잘 가다가 삼천포로 빠진다."라는 속담이 떠오른다.
그런데 막상 삼천포에 와 보니 이곳은 빠져도 좋은 곳이었다.
바다와 공원이 어우러진 풍경은 한없이 여유롭고, 걷는 사람의 마음까지 느긋하게 만들어 준다.
노산 공원에서 만난 박재삼 시인의 시는 발걸음을 잠시 멈추게 했다.
시인의 작품 속에는 삼천포에서 이른 신새벽에 기차를 타고 진주장터까지 가서 생선을 팔기 위해 늦은 밤까지 시장을 떠나지 못했던 어머니의 삶이 담겨 있다. 몇 푼이라도 더 벌어야 했던 절박함, 집에서 기다릴 아이들을 생각하면서도 생선을 다 팔기 전에는 돌아갈 수 없었던 어머니의 마음.
그 시를 읽으며 문득 내 어머니도 떠올랐다.
세월은 많이 흘렀지만 자식을 위한 부모의 마음은 예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문학관을 나서는 발걸음이 조금은 무거워진다.
하지만 그 마음마저 오늘의 남파랑길이 품어 준다.
삼천포 수산시장에 도착해 싱싱한 활어회와 해산물, 얼큰한 매운탕으로 하루를 마무리한다. 함께 웃고, 함께 걷고, 함께 식탁을 나누는 시간이 오늘의 풍경을 더욱 따뜻하게 만들어 준다.
앞으로는 걸어갈 수 있지만, 뒤로는 걸어갈 수 없는 길.
남파랑길도 우리의 인생도 어쩌면 닮아 있다.
오늘은 34코스를 걸었다.
하지만 지나고 나면 코스 번호는 잊혀도, 오늘 느꼈던 여유와 바닷바람, 함께 걸었던 사람들의 웃음은 오래도록 마음속에 남아 있을 것이다.
남파랑길을 걷다 보면 빨간 화살표를 따라가는 이 길이 나를 어디로 데려가는지보다 내가 과연 어디까지 걸어갈 수 있는지를 더 생각하게 된다.
길은 끝을 향해 이어지지만, 사람은 그 길을 걸으며 조금씩 성장한다.
사람에게 목표가 있다는 것은 살아가는 힘이 된다.
그리고 길은 오늘도 조용히 말해 준다.
천천히 걸어도 괜찮다.
멈추지만 않는다면, 결국 원하는 곳에 닿게 된다고.
바다는 늘 그 자리에 있었고, 나는 오늘도 그 곁을 걸었습니다.
– 푸른산 최윤범
첫댓글 푸른산 님 트레킹 후기 잘 읽었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35, 36 코스에서 건강한 모습으로 뵙겠습니다.
후기글 즐감 합니다
샘물님! 고맙습니다. 남해 바다는 늘 그 자리에 있었고, 우리는 오늘도 그 곁을 걸었습니다. ^ ^
잘 읽고갑니다
수고많으셨습니다
행복님! 참석 못하셔서 버스가 허전했어요.
35, 36 코스에서 뵙겠습니다.
34코스를 함께 걸으며 느꼈던 여유와 감동이 여행기 속에 그대로 담겨 있네요.
풍경보다 마음이 더 오래 남는 멋진 여행기 잘보았습니다
다음 길도 함께 걸으며 또 좋은 추억 만들어요
수고 많으셨습니다
미리내 사무총장님!
아름다운 남파랑길을
건강하고 즐겁게 함께 걸을 수 있어서
너무나 행복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