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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빌립보서 4장 5절 은혜와 진리를 받은 사람들의 특징 23-관용하는 삶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주시는 은혜와 진리는 그것을 받은 사람들로 하여금 관용의 사람이 되게 합니다. 그 이유는 자신이 하나님의 엄청난 관용을 받았다는 사실과 하나님이 자신에게 잘못한 사람들을 대할 때 관용으로 행하기를 원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성품을 여러분들이 갖기를 원하시며 그 성품으로 여러분들에게 잘못한 다른 사람들을 용서해주기를 원하십니다.
여러분들도 잘 아시듯이 일만달란트 빚진 사람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그는 임금에게 일만달란트를 빚졌는데 그것을 탕감받았습니다. 하지만 그가 탕감받은 그 날에 집으로 돌아가다가 일백데나리온 빚진 사람을 만나 멱살을 잡고 빚진 것 내놓으라고 외쳤습니다. 그 빚진 사람이 갚을 테니 조금만 기다려 달라고 했어도 막무가내였습니다. 이를 본 동료들이 임금에게 가서 사실대로 이야기 했습니다. 그 말을 들은 임금은 이 빚을 탕감해주었던 것을 모두 취소시키고 그를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그리고는 그 빚을 갚을 때까지는 절대로 나올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관용이 있었으면 좋았을 걸 관용이 없어서 용서받지 못한 것입니다.
우리 오늘 본문 말씀을 같이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빌립보서 4장 5절 말씀을 같이 읽겠습니다.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여기서 하나님은 여러분들을 향하여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들에게 알게 하라”고 하십니다. 여러분의 관용을 여러분의 가족이나 교회 만 알게 하라가 아닙니다. 여러분들과 친한 사람만이 알게 하라는 말씀도 아닙니다. 모든 사람이 알게 하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여러분들의 노력문제가 아니라 성품문제입니다.
여러분들의 성품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만들어지고 있습니다. 성령은 여러분 안에서 진리를 말씀하시고 인도하심으로 인해 여러분들의 성품을 아름답게 변화시킵니다. 은혜와 진리는 그리스도인들을 관용의 사람이 되게 합니다, 관용은 관대한 용서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관대하다는 것은 마음이 넓다는 말입니다. 이는 그 사람이 다른 사람들을 용서할 줄 아는 이해의 사람이라는 것을 말씀해줍니다. 또한 관대한 사람은 다른 사람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줄 아는 사람입니다. 솔로몬은 하나님 앞에서 기도할 때 자신에게 지혜와 더불어 넓은 마음을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물론 하나님은 그 마음에서 나는 기도를 들어주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교회에게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이 알게 하라”고 권고하고 있습니다. 이는 그리스도인들은 마땅히 관용의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실 다른 사람을 용서하는 용서가 그렇게 쉬운 것은 아닙니다. 죄인인 인간의 본성은 용서가 아니라 복수를 부르짖습니다. 당한 것은 반드시 당한 것만큼 되돌려 주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인간은 당한 만큼만 돌려주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복수는 육체적인 것을 넘어 마음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이 누군가에게 얻어맞았다고 합시다. 그러면 얻어맞은 육체만 아픈 것이 아니라 억울하고 분한 마음이 생깁니다. 다시말하면 육체만 상한 것이 아니라 마음도 같이 상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육체는 얻어맞은 것이 시간이 지나면 다시 회복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마음은 그렇지 않습니다. 복수를 해야 쾌감이 들며, 자기의 육체가 당한 것 위에 자기의 억울한 마음을 더해서 복수를 해야 시원함을 느낍니다. 인간 안에 있는 죄성은 그래서 인간을 더 폭력적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음 속에서 계속 자라갑니다.
우리 나라의 경우는 중국으로부터 굉장히 많은 침략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일본으로부터도 많은 침략을 받았습니다. 중국도 우리 나라를 침략한 것에 대하여 전혀 사과를 하지 않고 일본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우리 나라 사람들은 중국 사람보다 일본 사람들을 훨씬 미워합니다. 왜냐하면 가장 최근에 침략을 한 이유도 있겠지만 중국은 침략해서 우리나라로부터 공물과 사람을 요구한 것으로 끝냈지만 우리 나라의 치리는 우리 나라 왕에게 맡겼습니다. 하지만 일본은 우리 나라를 완전히 말살하고 일본화시키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 과정에서 나온 위안부 문제나 억지로 군함도의 탄광으로 끌고가 일을 시키다가 탄광이 무너지면서 물이 들어가 많은 사람들이 수장되어 죽은 일들도 있지만 그에 대하여 진정한 사과나 보상을 하고 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중국도 역시 진정한 사과를 한번도 한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중국에게 사과를 하라고 요구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보상을 요구하지도 않습니다. 그보다 더한 것은 민족 전쟁을 일으켰던 북한 역시 자기들이 전쟁을 일으킨 것에 대하여 조금의 사과도 없는 것은 물론 오히려 남한이 전쟁을 일으켰다고 억지 주장을 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북한을 일본만큼 미워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북한에 계속해서 원조하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어쩌면 피는 물보다 진하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이로 볼 때 사람들의 미움은 일관성을 가지고 있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어쩌면 미워하도록 부추기는 사람들에 의해 그 감정이 더 오래갈 수도 있습니다. 마음의 관대함을 심어주어야 할 나라의 정치가들이 오히려 국민들 안에 있는 분노의 감정을 쏟아내게 함으로 약간의 쾌감을 주고 있습니다. 하지만 크게 보면 그것은 국민성을 관대하지 못하게 하고 옹졸하게 만들 수도 있습니다. 정식으로 우리 나라와 국제 사회에 자신들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진정한 사과를 하지 않는 일본이라는 나라도 문제지만 그 과거에 사로 잡혀 앞으로 나갈 미래를 막게 만드는 위정자들도 역시 문제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이 나라에 살지만 그러나 소속은 하나님 나라에 속해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기본 정치 이념이 무엇입니까? 사랑입니다. 사랑은 관용의 사람으로 자기 백성들을 만들어 갑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인 여러분들은 관용해야 합니다.
관용은 그냥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아버지와 그의 아들이신 우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에게 주신 그 십자가의 사랑을 알 때 관용의 마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관용의 사람의 마음에는 넉넉함이 있습니다. 자기의 마음의 공간을 다른 사람들로 채울 수 있는 공간이 넓다는 것입니다. 왜 그것이 가능합니까? 무한히 넓은 마음을 가지신 예수님이 그 안에 들어오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자신은 이미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다고 고백하면서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께서 살고 계신다고 고백했던 것입니다.
이런 관용의 마음을 가진 사람들에게 용서가 나타나면 그 위에 사랑을 더하는 것까지 가능한 것입니다. 용서도 어려운데 그 위에 사랑을 더하라는 것은 인간적으로 보면 무리입니다. 하지만 성령이 임하셔서 변화된 마음이라면 이것이 가능합니다. 하나님의 성령은 여러분들의 마음 속에 사랑을 심어줌은 물론 그 사랑이 날마다 조금씩 자라가게 하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이 알게 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관용의 특성이 빛과 같기 때문에 이런 권고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빛은 발산하고 퍼져나가려고 하는 특징이 있습니다. 빛은 어둠을 몰아내고 자신으로 가득 채우며 충만하게 하는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죄악의 어두움 가운데 날마다 복수만을 꿈꾸면서 살아왔던 사람들이나 나라들이 화해를 이룰 수 있는 이유가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인간적으로 노력하면 가능할까요? 물론 그러면 행동은 그렇게 보일 수도 있지만 마음은 그렇지 않습니다.
마음으로 용서하는 것은 매우 어렵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일만달란트 빚진 자의 비유를 마치신 후에 이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마태복음 18장 35절입니다.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어디로부터 용서하라고 합니까? 마음으로부터입니다. 예수님은 여러분들이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마음으로부터 하지 않는 용서는 제대로 한 용서가 아닙니다. 누군가에 의해 강요된 용서는 진정한 용서가 될 수 없습니다.
한 집에 두 형제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심하게 다투었습니다. 그것을 본 부모님들이 두 형제에게 “미안해”하고 말하라고 합니다. 두 형제가 쭈뼛 거리면서 자기는 잘못이 없다는 듯이 용서해주기를 거부합니다. 그것을 본 부모가 큰 소리로 말합니다. “얼른 잘못했다고 하지 못해?” 그 말을 듣고 움찔한 형제들은 마음으로는 자기가 잘못이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입으로는 “미안해”하고 말합니다. 겉으로는 그렇게 풀어지는 것같이 보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진실로 용서를 주고 받은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가정이나 교회, 혹은 세상 어디서나 흔히 일어나는 일들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미안해!”하고 말합니다. 하지만 진심으로 미안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이것은 부부사이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진심으로 용서를 빌지도 않고, 또 진심으로 용서를 하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과거에 아내 앞에서 “다시는 안한다”고 한 일을 남자가 또다시 반복합니다. 그것은 진심으로 용서를 빌지 않았거나 아니면 남자의 의지가 그만큼 약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런 경우 아내는 “당신 지난 번에도 다시는 안한다고 했잖아”하고 몰아칩니다.
진심으로 용서를 빌었다 할지라도 사람은 약한지라 또다시 반복해서 잘못을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자신은 잘못을 저지르고 싶지 않은데도 말입니다, 물론 의지가 강한 사람들은 대부분 자기가 약속한 것은 철저하게 지키기 위해 같은 잘못을 범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관용은 상대의 마음부터 살피는 것이기에 마음으로 용서하고 그가 앞으로 같은 잘못을 하지 않도록 머리를 맞대고 지혜를 짜낼 수도 있습니다, 물론 함께 기도하면서 예수님의 도우심을 요청하는 것은 더욱 좋은 방법입니다.
여러분들이 잘 아시듯이 다윗은 관용의 사람이었습니다. 자신 앞에서 죽이고 싶을 정도의 잘못을 했는데도 그는 용서를 합니다. 다윗이 셋째 아들인 압살롬에 의해 도망을 쳤을 때의 일입니다. 그때 베냐민지파의 시므이가 다윗왕을 쫓아가면서 갖은 욕을 다하고 저주를 퍼붑니다. 정말 마음이 참담한 상태에서 도망을 치고 있는데 이는 마치 상처 위에 식초를 붓는 것같은 행동이었습니다. 보다못한 요압의 아우 아비새가 말합니다. “왕이시여 저 개만도 못한 자가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받은 왕을 저주하는데 제가 가서 단칼에 쳐죽이겠습니다. 명령만 내려주십시오” 그러자 다윗이 말합니다. “오늘날 이렇게 된 것이 다 하나님이 허락하셔서 이렇게 된 것이고 또 내 몸에서 난 자 조차 내게 반역을 꾀하고 나를 죽이려 하는데 하물며 베냐민 지파 사람이겠느냐?”하면서 죽이지 못하게 했습니다.
그런데 전쟁을 한 후에 다윗을 따르는 자들이 승리를 해서 예루살렘으로 다시 돌아가고 있을 때 시므이가 “이제는 죽었구나” 생각하고는 머리를 써서 베냐민지파 사람들 천명이나 데리고 와서 다윗왕에게 용서를 구했습니다. 자기 동료들을 끌어들여서 왕이 관용의 사람이라는 것을 보이게끔 해서 자기를 죽이지 못하게 한 것입니다. 다윗은 그의 간악함을 알면서도 그를 죽이지 않겠다고 약속을 했습니다.
다윗에게는 명령만 해도 그를 죽일 용사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다윗은 그를 죽이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관용을 모든 사람들에게 알게 하였습니다. 그 관용의 마음을 하나님에게서 배웠기 때문입니다.
은혜와 진리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아버지께 받은 성도들은 관용의 마음을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배웁니다. 에수님에게서 관용의 마음을 배웠던 스데반 집사님은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하셨던 기도와 비슷한 기도를 하게 됩니다. 먼저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그 고통 가운데 무슨 기도를 하셨는지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누가복음 23장 34절입니다.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그들이 그의 옷을 나눠 제비 뽑을새”
예수님은 인간이 당할 수 있는 형벌중 최고의 고통을 오래 느끼게 만든 그 십자가에 못박히신 채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은 사람들, 그리고 십자가 밑에서 아무런 양심의 가책조차 느끼지 못하면서 예수님의 옷을 가지고 제비뽑고 있는 사람들, 가슴에 사랑이 전혀 없이 율법의 분노로 가득 채워진 종교 지도자들, 이제까지 환호했다가 단 한 순간에 돌아서버린 수많은 군중들, 예수님의 죽음을 별스럽지 않게 집행하고 있는 유대인과 로마 군병들, 그리고 이 시대에 많은 죄를 지으면서도 뻔뻔스럽게 자기는 의인인체 하면서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을 향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구하고 있습니다.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이것이 예수님 자신이 관용의 신이며 또한 사람이라는 것을 모든 사람들에게 알게 하신 모습입니다.
이것을 성령받은 스데반 집사님도 역시 돌에 맞아 죽는 죽음 앞에서 간구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7장 60절입니다.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이르되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하나님이 그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신 결과는 영원한 불못에 던져지는 것입니다. 비록 지금은 그들이 진리를 알지 못해서 자신을 향해 돌을 던지고 있지만 진리를 알게 되면 회개할 것입니다. 스데반은 자신이 사랑하지만 진리를 알지 못하여 자신을 향해 분노하고 돌을 던지는 사람들을 위한 중보기도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것이 스데반이 가졌던 관용입니다. 그의 기도는 자기를 죽이는 형제들에게 대한 사랑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여러분들도 예수님과 스데반 집사님이 가지셨던 관용의 마음을 가지게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우리 한 번 따라서 해보시기 바랍니다.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그러면 성경은 왜 여러분들에게 이렇게 관용의 마음을 가지라고 하십니까? 그 이유는 주께서 가까우시기 때문입니다.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이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여러분들의 관용을 모든 시람에게 알게 할 이유는 주께서 가까우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주께서 여러분들의 마음을 감찰하신다는 것과 여러분들로 인해 여러분들의 관용을 경험한 사람들이 다시 오실 주님을 알게 되어 믿게 된다는 것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항상 주님께서는 여러분과 함께 계셔서 여러분들을 얼마나 사랑하시는 지를 보이고 싶어하시면서도 또한 여러분들을 통해 여러분이 예수님 자신으로 인해 이런 관용의 사람이 되었다는 것을 알리고 싶어하십니다. 왜 그런 마음을 품고 왜 그런 일을 하실까요? 그 이유는 여러분들의 관용을 통해 그들을 구원하고 싶어하시기 때문입니다.
관용의 사람은 예수님의 모습을 드러냅니다. 예수님이 관용하시는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관용은 아무도 흉내낼 수 없을 정도로 크고 엄청나신 분이십니다. 온 인류의 죄악을 보시면서도 2,000년이 넘게 참으신 것을 보면 알수 있습니다. 그것뿐만 아니라 여러분들의 수많은 죄와 허물을 보시면서도 참고 기다리시면서 회개에 이를 수 있도록 인도하시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을 보시면서 관용하시는 예수님이 얼마나 여러분들과 교회와 하나님 나라를 위해 섬세하게 일하시는 지를 여러분들이 예수님과 동행해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 인도하심의 발걸음은 한없이 구체적이고 미래 지향적이기도 합니다. 여러분들에 대한 사랑과 하나님 나라를 열어가시는 구원의 역사가 동시에 함께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의 관용적인 삶은 하나님 나라 안에서의 여러분들을 확인시켜 주며, 또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여러분들을 확인시켜 줍니다. 지금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여러분 관용의 삶을 살기 위해 언제나 예수님과 친밀한 사랑의 교제를 나누면서 사시기 바랍니다. 또한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여러분들에게 주시는 은혜와 진리를 더욱더 간절히 사모하심으로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의 성품에 참여하기를 갈망하십시오.
성령께서 여러분들의 삶을 놀라운 은혜와 진리 안에 있는 복된 세계로 인도해가실 것입니다. 거기에는 여러분들을 자기 자신의 몸과 같이 사랑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 분을 믿었던 수많은 성도들이 함께 있을 것입니다. 바로 여러분들이 재림하신 예수님과 함께 가야할 영원한 나라, 그리고 영원한 안식처가 거기에 있기 때문입니다. 기도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