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갑습니다. 오늘 여러분과 '진정한 교사의 권위는 어디서 오는가'에 대해 이야기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습니다. '교사의 장악력 회복하고, 수업 전문가로 거듭나기' 위한 방안을 주문했는데, 제가 생각하고 체험한 바를 중심으로 얘기하고자 합니다. 내가 처음 교단에 섰을 때 학생들에게 무시당하는 충격적인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 학교는 구로동에 있는 공민학교로 버스안내원과 공단에서 일하는 청소년 노동자들을 위한 학교로 정식 학교가 아니고 검정고시를 준비하는 야간학교였습니다. 피곤에 치쳐 있긴 하지만 가난 때문에 학교를 진학하지 못한 젊은이들이 때늦은 공부를 하는 곳이었기 때문에 나름대로 진지한 분위기가 있었습니다. 학생들 중에는 나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들도 몇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학생들이 시간이 부족해서 그렇지 열심히 공부하려는 의욕은 넘치고 있으리라 믿었습니다. 나는 고등학교 과정으로 국어, 문학, 한문 세 과목이나 가르쳤데 한문은 나에게도 어려웠습니다. 나는 학생들이 한문을 열심히 공부하도록 하기 위해 매 시간 전에 배운 것을 확인하는 시험을 보겠노라고 말했고, 그 다음 시간 시작하자마자 시험을 보려고 했습니다. 물론 학생들의 상황이나 학습 준비도를 점검하지 않은 상태에서 강제적인 것이었습니다. 학생들은 어이없는 눈길로 '웬 시험?' 하는 눈길로 나를 쳐다보았고, 나는 당황했습니다. 나는 전 시간의 공언이 실없는 말이 될까봐 강행하려고 했습니다. 그러자 학생들은 나를 향해 약간의 야유를 보냈습니다. 나는 화를 냈습니다. 공부하겠다고 온 사람들이 교사의 시험을 거부하는 것은 부당한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내가 화를 내자 그 들 중 약간 철이 든 학생들이 나머지를 설득하며 그냥 시험을 치르자고 했습니다. 그것은 귀찮은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적당히 나를 달래려는 것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아유, 그래요. 봐요. 봐" 라는 식이었습니다. 무시당했다고 생각한 나는 석고처럼 굳어져 꼼짝도 하지 못했습니다. 분노와 부끄러움 때문에 눈에 눈물이 맺히고, 나는 한 곳만 뚫어져라 응시하고 있었습니다. 과연 이런 상황을 어떻게 돌파해야 할지 모르는 나는 교사 초년생이었던 것입니다. 분위기가 이상하게 되자 학생들은 고개를 돌리거나 외면을 하고 있었고, 나는 드디어 이런 상황에서는 더 이상 수업을 할 수 없노라고 말하며 교실을 뛰어나왔습니다. 학교 건물 앞에 나와 울분을 삭이고 있을 때 학생 몇 명이 나와 다시 교실로 가자고 나를 설득했지만, 나는 가지 않았습니다. 한 시간 뒤에 교무실에 가니 교장선생님이 나에게 말했습니다. "당신은 교사로서 자격이 없습니다. 교사는 어떤 일이 있어도 수업 시간에 학생들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교실을 나와서는 안 됩니다. 그 자리에서 그 문제를 해결하고 수업을 이끌 수 있어야 교사의 권위를 지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뼈아픈 충고를 받고, 그 학교를 그만두었습니다. 그 뒤 정식 발령이 나서 남자 중학교에서 국어를 가르치게 되었는데 나는 어떤 일이 있어도 수업시간에 뛰쳐나오는 일은 없었습니다. 아이들에게 무시당하지 않는 권위 있는 교사가 되고자 노력했습니다. 무엇을 위한 교육인지에 대한 고민보다는 교사의 권위를 세우는 데 집중을 하다 보니 엄격하고 무서운 선생님이 되었습니다. 고압적인 명령과 함께 필요하다면 과감하게 회초리를 들었습니다. 거친 남자 중학생들이라 대부분의 여교사들이 아이들에게 휘둘리는 경향이 많았는데 나는 자신감 있게 아이들을 잘 다룬다는 평가와 함께 초임임에도 몇 년이나 연속으로 중3반의 담임이 되었습니다. 나는 열심히 성실히, 철저히 자신의 일을 수행함으로써 권위 있는 교사가 되고자 했습니다. 국어교사임에도 우리 반 아이들에게는 실력 향상을 위해 영어도 가르쳐주고, 시험기간이 되면 일일이 한 명 씩 데려다가 예비 시험을 보기도 했습니다. 시험기간이면 밤을 새워 아이들 집으로 전화를 해주고, 격려하기도 했습니다. 규칙을 어기거나, 질서를 지키지 않는 학생들에게는 단호한 벌도 주었습니다. 아이들은 교사로서의 나의 권위에 감히 도전하거나 이견을 제시하는 일은 없었습니다. 내 앞에서는 모두 움츠러들고 어려워했습니다. 예의바르게 행동하며 눈치를 보았습니다. 그러나 첫 발령 난지 4년 째 되었을 때 나는 한계에 부딪혔습니다. 그 동안에도 나는 몇몇 사건을 통해 내가 아이들로부터 고립된 섬과 같은 존재이며,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이 해는 최악의 해였습니다. 나의 성실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학생들에 대한 철저한 단속과 관리에도 불구하고 문제아가 급속히 늘고, 불량배 집단에 가입한 아이들이 늘어나고, 가출과 도벽 싸움 등이 빈번해졌습니다. 아이들이 상황에 깊이 개입하면서 나는 아이들의 세계에 대해서, 그리고 아이들의 성장배경과 성격에 대해서 아무 것도 모르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전통적인 방식의 훈계를 늘어놓으며 나는 아이들이 그것에 의해 통제되고 교육되고 있는 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막상 알고 보니 나는 아이들에게 아무런 존재도 아니었고, 어떤 영향도 미치고 있지 못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나는 교육에 대한 회의와 교사로서의 한계를 절실히 느끼고 교직을 떠나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아무런 영향도 주지 못하는 교육내용과 교육과정, 교과서 그리고 교사의 전근대적 태도의 문제와 함께 교장을 비롯한 관리자들의 비교육적이고 부패한 태도, 다수 교사들의 매너리즘과 무사안일에 대한 염증도 한 몫 했습니다. 학교 신문을 만들며 최소한의 양심도 지키지 않고 뒷거래를 하는 행정실과 교장의 모습, 권력에 아부하며 타협하는 교감, 정치적 민주화를 위해 싸우다 쫒기는 후배를 숨겨주었다고 해직된 동료교사의 모습. 또 그것을 감시하지 못했다고 발령난지 며칠 되지도 않은 교장을 직위해제 시키는 교육 당국..... 많은 문제들이 학교에 있었습니다. 어느 것 하나도 내 힘으로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자 학교는 나에게 지옥 같은 곳이며 고통의 아수라였습니다. 그 와중에 나는 학교를 옮겼고, 낯설기만한 새 학교의 배타적 분위기에 더욱 힘겨운 나는 가슴에 사표를 써가지고 다니며 오늘 내일 하며, 방황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 때 일어난 교육민주화 선언. 그리고 결성된 비공개 지역모임에서 교육의 변혁을 꿈꾸는 동지들을 만났습니다. 그들과 사회과학과 노동의 역사를 배우면서 각성한 교사가 되었습니다. 물론 그 후 15년 이상 교사로서 자기 정체성을 확립하고, 올바른 교육이 어떻게 가능한지를 공부하고 찾아가는 각고의 세월이었습니다. 권위 있는 교사, 수업을 잘 하는 전문성 있는 교사, 존경받는 교사가 되는 일은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닙니다. 부단히 노력했지만, 많은 시행착오와 현실적 한계에 부딪히는 일이 더 많았습니다. 그러나 역동적인 교육운동 속에서 진정한 교육내용에 대한 고민을 교과연구모임과 함께 찾아온 10여 년의 세월이 지나갈 무렵, 문득 행복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아직 많은 현실적 한계와 과제들이 있지만, 그러나 한 발 씩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생각은 새로운 희망을 줍니다.
많은 선생님들도 제가 겪었던 비슷한 갈등과 고민을 겪었거나 겪고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교사 생활을 시작했으며, 어떤 괴로움을 느끼고 계십니까? 여러분이 살아온 과정에 대해 얘기를 들려주십시오.
2. 교사의 책임과 역할을 다하는 존경받는 교사
이제 본격적인 문제에 대해서 얘기해봅시다. 오늘의 강연 요청 제목이 '진정한 교사의 권위 어디서 오는가'하는 것이고 보면, 결국 '권위있는 교사가 되고 싶다.'는 목표를 달성하고 싶어하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교사의 권위'가 무엇인지 먼저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권위(權威)란 말의 사전적 뜻은 '남을 지휘, 감독하거나 통솔하여 따르게 하는 힘'이란 뜻입니다. 또 '일정한 부분에서 사회적으로 인정받고 일정한 영향을 끼칠 수 있는 능력이나 위신, 또는 그런 사람'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권위'라는 말 속에는 크게 두 가지 의미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는 '무거운 책임과 역할'이며, 또 하나는 다른 사람의 존경을 받을 수 있는 능력'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교사의 권위'에 대해 좀 더 분석을 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교사의 권위는 대체로 인격적 권위(너그러움, 포용, 헌신, 자애로움)와 지적 권위(학문적 지식, 사회와 사물의 원리를 꿰뚫어 보는 힘)를 포함합니다. 그리고 이 두 가지의 권위는 교사가 다른 사람과 달리 앞서가는 사람(진보적인 사람, 선각자)으로서 '깨달음을 얻은 자로서의 개념과 지식과 기능(전문성)이 뛰어난 사람임을 드러냅니다. 예수나 석가모니를 인류의 스승으로 여기는 이유는 바로 가장 '이타적이며 헌신적인 모습'과 '시대를 비판하며 앞서가는 사람'으로서 지도력을 발휘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예수나 석가모니가 성자로서 대중들에게 알려지기 전 그들은 제자를 가르치는 교사였음을 기억한다면, 제자로부터 절대적인 존경을 받음으로서 그들의 사상과 철학이 완성되었음도 확인해야 합니다. 현장의 많은 교사들은 학생들로부터 '존경받는 일'을 불가능하거나, '매우 어려운 일'로 여깁니다. 그러한 생각이 나중에는 존경받는 일은 '불필요한 일'이거나 '의미없는 일'로 여기기까지 되었습니다. 냉소적인 시각조차 있습니다. 심지어는 그런 생각을 하는 것 자체를 '부끄러운 일'로 여기기도 합니다. 매우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실은 그러한 교사들의 자세로 인해 더 불행한 사람은 아이들입니다. 존경하지도 않는 스승에게 배우는 아이들에게 무엇을 배울 것이 있겠습니까? 자신의 주변에 '존경할 만한 인물'이 없음은 슬픈 일입니다. 그것은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를 배우지 못하고 있음을 말합니다. 곰곰이 따져 보면 교사들이 존경받기를 포기하는 마음이 드는 것은 그것이 싫어서가 아니라, 존경받는 사람으로 서는 것이 매우 어렵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물론 교사가 되기 위한 교육과정 즉 양성과 임용 과정에서 한 번도 학습해보지 않은 목표였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교사가 되기 위한 필수 불가결한 조건이라는 생각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또 설마 자신이 존경받는 교사가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 해도 어떤 과정과 절차가 필요한지에 대해서 찾는 일 자체도 알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다른 학생들과 조금도 다름없이 평범하게 대학을 졸업하고 교사가 되어 학교에 발령을 받았을 때 대부분의 초임교사들은 자신이 학교 안에서 어떻게 처신해야할 지 막막함을 느낍니다. 그러나 아무도 그것에 대해서 가르쳐 주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저 주어진 교과서와 수업시간표에 따라 교실에 들어가 기계적인 동작이 있을 뿐입니다. 처음 만난 아이들과 어떻게 관계를 맺어 나가야 할지도 당혹스러운 상태에서, 교과서에 나온 지식전달도 참으로 버거운 일입니다. 교무에서 시키는 사무적인 처리들을 하면서 점차 시간이 흐를수록 관료적이고 타성적인 일처리에 자신을 맡기고 그로써 더 이상 새로울 것이 없는 기존의 교사가 되어갑니다. 교사간의 갈등도 최대한 피하기 위해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며 어김없이 돌아오는 월급을 받는 안전함을 얻은 대신, 점차 시간이 흐를수록 진정한 교사로서의 모험과 도전의 역동성도 사라집니다. 아이들에 대한 특별한 기대와 존경, 사랑을 기대하는 마음보다는 자신의 관성적 업무를 방해하는 사람만 없다면 모든 것이 그럭저럭 지나갑니다. 학생으로부터 받는 존경은 '교사가 올바른 책임과 역할을 능력 있기 수행했을 때 오는 결과입니다.' 그렇다면, 존경받지 못하는 것은 바로 그 책임과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않았음을 의미합니다. 교사의 책임과 역할이란 무엇입니까? 학생들을 제대로 가르쳐 깨달음을 얻게 하고, 그가 올바른 삶을 살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교육의 본질적 목표이기 때문입니다. 학생들에게 깨달음을 주려면 먼저 교사가 깨달은 사람이어야 하고, 먼저 삶의 모델이 되어주어야만 가능할 것입니다.
3. 교육의 본질적 목표에 충실한 교사
그러면 교육의 본질적 목표에 대한 깨달음의 내용은 무엇이며, 그것은 어떻게 교육을 통해 도달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십 수년 전에 우리 교육이 크게 잘못되어왔다는 사실에 대한 대중적 각성을 한 일이 있습니다. 봉건주의적 교육을 떨치지 못한 가운데 식민지 교육이, 식민 교육의 그늘을 떨치지 못한 가운데 군사독재의 노예교육이 누적되어 옴으로써 사회의 모든 분야와 함께 교육이 크게 왜곡되어 왔음에 대한 각성이었습니다. 그 결과 민족적 정체성은 망각하고, 봉건주의, 사대주의, 권위주의, 냉전주의, 물질만능주의, 출세주의가 사회의 주류가 되자 사람들의 태도 또한 기회주의와 이기주의, 순응주의에 물들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반민족, 반민주, 반인간 교육이라고 규정지었으며, 죽어가는 사회와 아이들을 올바로 살리기 위해서는 교육의 본질적 목표에 충실하겠노라고 떨쳐 일어났습니다. 각성된 소수의 교사들은 많은 희생을 치르면서, 자신들의 목소리를 우리 사회의 주류로 만들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그 힘은 충분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천민자본주의의 문화, 교육에 대한 잠식은 더 거세지고, 전보다 더 학생 교사들을 고통스런 혼란에 빠뜨리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처음 했던 대중적 각성을 다시 한 번 확인하면서, 구체적이고 추상적인 깨달음을 어떻게 현실에서 구체화하고 실천할 것인가에 대한 모색이 필요한 시점입니다. 그것이 바로 앞에서 얘기한 교사의 권위를 찾기 위한 첫번째 과제인 '교사의 책임과 역할'입니다.
교사는 먼저 우리 아이들이 어떤 사람이 되어야하는지에 대한 상을 구체화적으로 가져야 합니다. 그것은 어떤 세상을 만들어야 하는 지와 같은 말입니다. 당연히 우리가 처한 현실을 정확히 직시하는 것이 바탕이 되어야겠지요. 모든 인류의 스승들이 그랬듯이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가르치는 것이 바로 교육의 핵심입니다. 현재의 교육이 만들어 내고 있는 사람은 현실에 순응하며 물질적 탐욕만을 쫒아 가는 기회주의적 사람입니다. 서로를 밟고 올라서는 경쟁이 되풀이되고 소수의 엘리트만이 특권을 누리는 사회를 정당화하는 한 교육의 진정한 의미는 사라집니다. 오늘 우리 교사들은 이러한 사회구조를 만들어 나가는데 앞장서고 있습니다. 우리 제자의 95%가 노동자로서 살아가야 함에도 그들이 어떻게 당당한 노동자로서 살아갈 수 있는지를 가르치기 보다는 한 명의 제자를 일류 대학에 보내는 것을 더 큰 보람으로 여기곤 합니다. 현실을 비판하고 개혁하는 일 보다는 보충수업을 조금이라도 더 받도록 감시하는 일에 더 많은 힘을 기울입니다. 우리가 추구하는 인간상은 단지 남에게 피해만 주지 않는(그러나 자신의 이익을 최대한 추구하는, 그것을 위해서면 무엇이라도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인간이 아니라, 남을 위해 베풀고 나눌 수 있는 최대한의 인간상이어야 합니다. 나아가서 더불어 살 줄 아는 건강하고 당당한 역사의 주인으로서의 노동자를, 비판적이고 실천적인 지식인이기를, 예지력을 가진 영적 선각자를 기대해야 합니다. 이러한 생각은 제자를 대하는 태도를 다르게 만듭니다. 아이들은 우리의 '미래의 동지'이며 '세상을 바꾸어 나갈 역사의 일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제자를 무시하고, 작은 잘못으로 함부로 예단하거나 무릎을 꿇리는 일은 없어질 것입니다. 예수가 왜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숭고만 목표가 숭고한 사람을 만둡니다.
* 교육을 통해 도달할 인간상 * 교육의 본질적 목표와 현실 교육 목표의 차이 * 교육 목표의 왜곡과 사회 모순의 관계
4. 교육의 최우선적 가치를 내용으로 선택하는 교사
교육의 본질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가르쳐야할 교육내용은 무엇입니까? 즉 교육에 있어 '최우선적 가치'에 대한 판단입니다. 가치관 교육을 폄하하는 기능주의 교육은 몰역사적, 몰가치적 교육관입니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기능주의야 말로 사실은 물질만능주의와 배금주의 그리고 지배와 억압 체제에 대한 순응주의 가치관을 위한 이념입니다. 교육에 있어서 의식을 지배해온 가장 잘못된 관행은 '절대적 지식관'으로서, 지식을 절대화함으로써 몰역사적 가치관을 부추기며 소수의 엘리트에게만 혜택을 주는 지식권력주의입니다. 지금의 교육방식이 절차적 지식보다 명제적 지식을 중시하고 강제주입의 폭력적 방식으로 교육을 시도하는 것은 모두 '지식권력주의'에서 나온 방식인 것입니다. 단편적인 지식을 기계적으로 나열한 교과서 체재나, 획일적인 주입식 지식암기 교육 등은 이러한 지식관에서 나온 교육방식입니다. 프레이리는 이러한 권위적인 교육시스템에 대해 고찰한 후, 이를 '은행예금식 교육' 이라고 말했습니다. 이 시스템에서 교사는 교육과정이 주체, 학습자는 객체로 파악되고, 교사의 역할은 학습자를 백지로 간주하고 가르칠 내용을 일방적으로 예탁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교사는 아주 박식한 사람이며, 학생은 무지한 존재가 됩니다. 이것은 바로 억압적인 사회에 나타나는 삶의 태도이며, 실천방법인 것입니다. 교육의 가장 기초적인 목표는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것입니다. '나는 누구인가?'로부터 출발하여 '나를 둘러싼 가정과 이웃과 지역사회와 세계' 에 대한 탐구로 이어져야 합니다. 이는 '삶을 어떻게 꾸릴 것인가','무엇을 입고 무엇을 먹고, 무엇을 하며 어디에 살아야 하는가'와 같은 것을 배우는 것이어야 하며, 크게는 역사적 진실과 사회의 전체가 요구하는 가치를 배우고 실천하는 내용이 바탕이 될 때만 가능한 일입니다.
믿을만한 많은 조사를 통해서, 또는 우리의 현장 체감으로도 아이들의 대다수가 학교에 다니는 의미를 상실하고 있으며, 현재의 교육체제에 무의식적인 분노와 권태를 느끼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바로 교육 내용의 무의미함에 대한 반발인 것입니다. 지금과 같은 상태의 교육이 지속되는 한 교사, 학생 모두가 국외자요, 소외자일뿐입니다. 예컨대 우리 교육의 공허함은 다음과 같은 것들입니다. 우리가 주어진 역사 교과서 내용을 그대로 가르치면, 놀랍게도 다 배우고 났음에도 역사의 진실을 전혀 모르는 사람을 만듭니다. 즉 우리 사회의 당면한 문제들이 어떤 역사적 원인에 기인하여 현상으로 나타난 것인지, 그리고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지에 대해 전혀 알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결국 오늘 신문에서 일어난 사건을 보면서 그 사건을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지 판단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지금 불행하게도 우리는 교사들은 하나의 독립된 교육기관으로서의 자존을 획득하고, 자신이 세운 목표에 맞는 교육내용을 선정할 수 있는 권리를 갖지 못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국가중심의 교육과정'이라는 이름아래 수업권과 평가권을 저당잡혀 왔기 때문입니다. 이 저당잡힌 권위에 대해 분노조차 별로 없습니다. 오히려 수업권과 평가권을 과연 가져야하는지, 가질 수 있는지에 대해 자신감을 갖지 못하는 교사가 대부분인 것이 현실입니다. 프랑스 교사들은 동학년 안에서도 교사마다 다른 교과서를 가지고 가르칩니다. 어떤 교사는 '프랑스 혁명사, 영국혁명사, 러시아, 중국 혁명사와 같이 혁명사로만 채워진 교과서'를 선택해서 가르치기도 합니다. 교사가 어떤 교과서를 선택하건 그것은 교사의 절대적 권한입니다. 평가권에 대한 자유는 더욱 당연합니다. 바로 이러한 차이가 교사의 권위와 직결되는 것임에도 말입니다.
최근 우리는 이러한 가치지향적 교육과정의 수립을 위해 최우선적 교육내용을 다음과 같은 것들을 선정했습니다. 평등교육과 인권교육, '평화교육과 통일교육' 과 '노동교육과 성평등교육', '생태교육과 건강교육', '문화예술교육'...... 이러한 큰 틀의 이념들은 모두 개인의 삶과 사회의 현상을 좌우하는 구체적이고 역사적 사건들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즉 이러한 이념들이 어떻게 구현되느냐에 따라 개인의 행복과 불행이 달려 있습니다. 즉 우리 사회의 가장 핵심적인 문제들이면서 동시에 우리가 행동으로 옮겨야 할 과제들이기도 합니다. 교사들이 해야 할 일은 평등교육과 인권교육이 어떻게 가능한지를 고민해야 합니다. 그러려면 우리 사회의 불평등과 우리 교육의 불평등이 왜 발생되고, 그 폐해가 현실 속에 어떻게 나타나는지 그리고 어떻게 극복될 수 있는지의 문제들을 아주 정교하고 세심하게 설계해야 합니다. 물론 더 작은 요목으로 나누고 수준에 맞는 내용을 찾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교육은 교사의 설명이나 이론적인 학습만으로 그쳐서는 안되며 학생 스스로 탐구하고, 토로하며, 해결을 위한 현실 참여 활동까지도 포함되어야 합니다. 또 교과활동 외 학급활동이나 특별활동, 동아리활동 등 모든 교육활동 속에서도 구현되어야 합니다. 현재 많은 교과연구자들이 교사 스스로 교과서를 만드는 작업들을 진행시키고 있습니다. 이것은 앞서 말한 가치를 구현하기 위한 노력 중의 하나입니다. 그러나 큰 틀의 목표와 급별 단계를 포함한 교육과정의 총론적 설계 미흡이나, 완전한 대체가 아닌 기존 교재의 보조적 역할로서 받아들이는 한계가 있습니다. 그러나 기존 교육과정의 재구성이나, 교과서의 재편 등은 얼마든지 교사들의 재량에 의해 가능합니다. 저는 중학교 2학년 국어수업을 '민족 정체성교육' 을 목표로 재편하여 우리 고유 문화인 '민요, 민화, 탈춤, 석탑, 정자, 옷과 음식'의 요목들로 구성하였습니다. 이것은 기존의 교과서에서 제재를 취하되 내용을 심화, 재구성하고 수업 방법은 다양한 매체와 토론, 탐구발표, 토론 등을 시도하여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었습니다. 우선 이러한 수업은 '언어능력의 신장'과 '민족문화 지식습득'이라는 목표 달성은 물론이고 궁극적인 '민족 문화의 가치 확인' 과 '민족적 자부심과 긍지'라는 최상의 목표도 달성할 수 있었습니다. 통일교육이나 생태교육, 노동교육, 성평등 교육 등 다른 가치 교육도 결국은 이러한 목표들을 달성할 수 있도록 짤 수 있습니다. 즉 지식과 기능은 물론이고, 가치교육으로 깨달음을 얻어낼 수 있습니다. 교육을 통한 이 '의식의 진보'는 '행동의 실현' 으로 나아감으로써 '개인적 삶의 변화'는 물론, 나아가서는 '사회변혁' 을 이끌어내는 힘이 되는 것입니다.
* '교사중심의 교육과정과 학생중심의 교육과정 * 교사의 수업권과 평가권의 확보가 갖는 의미 * 가치 중립적인 교육과정은 가능한가? * 단편적인 지식 중심의 교육과 깨달음의 교육 * 가치관교육과 기능주의 교육, 기능교육의 관계
6. 창조적 교육방법이 훌륭한 교사
아무리 훌륭한 주제와 교육 내용을 확보하고 있다고 해도 실제로 교실에서 그것을 구현하는 일은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교사의 전문성이란 바로 이 부분으로 교사의 고유의 역할이면서, 가장 전문적인 기술을 요하는 부분입니다. 아무리 훌륭한 교육내용을 준비했다 해도 만약 학생들이 그것을 받아들일 수 없다면, 메아리 없는 추상적인 구호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수업을 하는 데는 많은 까다로운 조건이 필요합니다. 교사의 준비도가 충분하다해도 교육환경이 충분치 않다면 실패할 확률이 높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의 열악한 현실은 교사들을 가장 고통스럽게 하고 있습니다. 원래 교육은 1:1 이어야 합니다. 현대의 집단적 교육시스템은 교육의 본질을 왜곡하고, 사제 관계를 왜곡시킬 수 밖에 없는 구조입니다. 교사 한 명에 수십, 수백 명의 학생을 장악한다는 것은 '폭력적인 방법' 이거나, '입시 경쟁' 같은 극단적인 목적이 전제돼지 않고는 유지될 수 없습니다. 종전의 6-70명의 과밀학급 시기보다 3-40명으로 축소된 요즘의 교실을 교사들이 더욱 장악하지 못하는 것은 바로 '폭력적 방법'과 '시험경쟁'이 전보다 느슨한 탓입니다. (요즘의 입시경쟁은 옛날의 입시경쟁과 개념이 많이 바뀌었습니다. 예전의 입시가 생존 경쟁적 성격이었다면, 지금은 단지 좀 더 출세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에 절박성이 그만큼 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현실을 탓하고 주저앉을 수는 없습니다. 교육환경과 조건을 만들기 위한 집단적 노력(교육당국과의 교섭이나 투쟁)을 하면서도 현실을 극복할 수 있는 방안들을 모색해야 합니다. 러시아의 '아름다운 학교운동'은 교사들이 월급도 받지 못하는 경제적 궁핍 속에서 꽃피웠음을 우리는 상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러시아의 체제붕괴와 경제위기로 교사의 월급조차 지불하지 못하게 되자 교사들은 먹고 살기 위해 학교를 떠날 것인지, 아니면 남아서 아이들을 지킬 것인지에 대한 결단을 요구했습니다. 많은 교사들이 국가체제의 붕괴 속에서 방치되는 아이들을 두고 학교를 떠날 수 없다고 판단했으며, 그 순간 교사와 학부모와 학생들은 누구에게도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의 학교를 만들 수 있는 힘을 발휘하게 됩니다. 학부모와 교사들이 의자를 손수 수리하고, 아이들과 교사가 돼지와 닭과 농작물을 길러서 이것을 내다 판 돈으로 학교를 운영하는 놀라운 일들이 일어난 것입니다. 즉 '아름다운 학교의 핵심은 물질적으로 풍요한 학교나, 체제가 완벽한 학교가 아니고, 교육 주체들의 살아있는 움직임'이었습니다. 이러한 예가 교육환경의 조건이 중요하지 않다거나 부차적이라고 말하는데 사용되어서는 안됩니다. 다만 교육이 어려움에 부딪혔을 때 가장 먼저 깨닫고 방향을 제시해야할 사람들이 바로 교사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구체적인 이러한 사례는 '교육이 교사의 질을 넘어서지 않는다'는 추상적인 말보다 더 우리의 가슴을 뛰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교육에 있어서 교사의 창조적 열정은 그 어떤 조건보다 중요합니다. 그것은 모든 길의 지름길이며 그 모든 훌륭한 방법들을 뛰어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 창조적 열정은 배우고, 공부하는 교사의 모습과 하나일 때만이 생명력과 지속성을 얻을 수 있습니다. ‘참된 스승은 참된 학생이다.(The true teacher is true student-마이다슈이치)’라는 말을 생각해보면 교사는 끝없는 지적 도전과 실천적 모험으로 충만해져 있어야 함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교사가 먼저 깨닫고 많이 알고 있으며 열정이 큰 만큼 절대로 자신이 주의해야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자신이 '절대적으로 옳다'고 생각하거나, '중요한 만큼 반드시 알아야 한다'는 무의식적 강요의 문제입니다. 올바른 것일수록 주입해서는 안됩니다. 학생이 그것을 알고 싶은 욕구를 갖게 하는 것, 스스로 깨달음과 성취감을 가지며 과정을 밟아가도록 안내하는 것, 교사의 도움이 없어도 그것을 좋아하고 더 깊이 찾아가도록 돕는 것' 이 바로 교사의 역할입니다. 교육이 목표나 내용이 중요할수록 과학적이고, 민주적인 방식이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학생이 수업에 소홀하다고 화를 내는 일은 참으로 잘못된 일입니다. 학생은 진실을 알고, 배워야 할 권리가 있음과 동시에 그것을 배우지 않을 권리 또한 있는 것입니다. 성인들에게는 진실을 알거나, 배우려고 하지 않는다고 비난하는 일은 없습니다. 그럼에도 학생들에게는 배우려고 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화를 내거나 비난하는 것은 일종의 인권에 대한 모독입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민족교육'이라는 목표 아래 특별실인 시청각실에서 한국의 민화를 슬라이드를 보며 설명한 후, 글쓰기를 하여 발표하는 두 시간 수업을 진행한 후 학생들은 감동적인 평가를 하는데 까지 이르렀습니다. 그런데 수업이 끝나갈 무렵 두 명의 학생이 이 수업에 참여하지 않고 놀러 간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아이들은 '결과처리' 하고, 담임교사에게 말해서 체벌을 가하라고 평결했고, 당사자들도 그렇게 처리하는데 이의가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러한 처리가 두 학생들을 위한 수업의 목표를 달성하는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하는 수없이 방과후에 두 학생에게 두 시간의 동일한 수업을 함으로써 문제가 해결되었습니다. 이러한 교사의 원칙적 태도는 힘의 논리를 사용하지 않으면서도 부수적으로 교육적 결과들을 얻을 수 있습니다. 수업에 들어가기전 교사는 우선 학생들의 상태가 어떠한지에 대해 세심한 관찰과 배려가 필요합니다. 그것은 아이들을 대상화하는 것과는 다른 차원의 애정과 관심입니다. 작게는 수업 시작 직전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와 같은 상황이나 정서상태도 될 수 있고, 크게는 그 아이가 어떻게 살아왔으며, 어떤 일을 겪었으며, 무엇을 좋아하며, 무엇을 싫어하는지, 성격은 어떠하며 지금 어떤 상황에 놓여 있는지, 어떤 고민과 아픔이 있는지..... 등입니다. 만약 이러한 것이 궁금하지 않고 알고 싶지 않다면, 교사로서 얻을 수 있는 것이 거의 없습니다. 물론 이러한 사실을 알고자 하면 많은 시간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적어도 일 년 또는 그 이상 동안 다양한 수업 활동을 통해서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간혹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그것을 알지 못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일 년 동안 한 번도 이름을 불러보거나, 질문을 던져 본 일도 없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것은 분명 아무런 관계도 아닙니다. 아이들에 대해서 많이 알기 위해서는 다양한 방법과 함께 충분한 시간을 투자해야 한다. 함께 하는 시간을 어떻게 만들 것인가는 방법적 고민으로 해결할 수 있다. 교과서나 내용부분의 진도를 나가는 것보다, 우선 서로를 충분히 알 수 있는 프로그램을 배치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를 들면 '자신의 생각을 특징을 다양하게 표현할 수 있는 소개하기' 나, '목표와 관련된 경험담 나누기', '배울 내용에 대한 준비 토론하기' 등 방법은 매우 많습니다. 어떤 방법을 선택하든 학생들은 충분히 수업의 전체 계획을 이해하고 있어야 합니다. 교사는 연간 계획과 월별 계획, 시간 계획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각 단원별 수업 전개에서 학생들의 다양한 참여 방법과 역할까지 예고되어야 합니다. 이 모든 계획을 처음부터 의논하여 준비할 수 있다면 '학생중심교육과정'에 접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처음부터 그렇게 하기 어렵다면 처음에는 교사가 제시하고, 그 다음 단계에서 학생들이 제시하는 방식도 좋습니다. 예를 들어 국어수업에 1학기 말하기, 읽기, 쓰기와 문학 수업의 제재와 진행 방법은 교사가 제시하고, 2학기에는 학생들이 준비하는 방식입니다. 역사나 사회, 음악 등 모든 교과에서도 이 방법이 유효합니다. 교사가 선택한 역사적 사건을 연극으로 만들어 보는 수업 과정을 교사가 제시했다면, 다음 수업의 제재와 방법은 학생들이 선택하는 것입니다. 물론 준비과정과 강의, 발표 등의 전 과정은 함께 준비해 나갈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교사가 전권을 갖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학생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함으로써 성취감과 깨달음을 높일 수 있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물론 여기에는 진도나 수업의 물량에 집착하지 않아야하며 원리를 터득하는 수업에 더 큰 관심을 기울여야 합니다. 물고기를 잡아주는 것이 아니라, 물고기를 스스로 잡는 과정을 터득하는 것 이어 한다는 말입니다. 제가 선택한 '직업에 관한 연구' 프로젝트수업의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이것은 다양한 직업을 선택하여 조사하여 발표하는 수업이었는데, 직업을 선택하는 문제에서 설문조사나 인터뷰의 내용을 만들고 발표한 내용을 다양한 방법(뉴스 보도, 분석 기사, 연극이나 영화, 공청회나 세미나 등)으로 전달해야하는 것입니다. 직업에 대한 조사에 들어가기 위해 5-7명의 작은 두레는 토론을 통해 어떤 직업을 선택할 것인지 판단하는 문제에서 직업의 어떤 부분을 물을 것인지(직업을 갖기 위한 경로나 과정, 하는 일의 내용, 근무 환경, 보수, 그 직업만의 애로점, 미래의 전망 등)에 대한 토론, 직접 조사하기 위한 활동방식 등을 다양하게 논의해야 합니다. 이런 수업은 진로교육과 노동교육의 문제와 가치 형성을 위해 선택되었지만, 양성평등이나 환경문제 등 다양한 내용의 수업에도 적용할 수 있습니다. 이런 수업은 다양한 작은 목표들을 달성시키는데 유효했습니다. 예를 들면 말하기 (조리있게 말하기, 자신있게 말하기)영역으로 선택했지만, 무수한 토론의 과정을 거치도록 되어 있고, 정보를 가공하기 위해 다양한 매체(글, 그림, 만화, 비디오, 연극, 슬라이드 등)를 창조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능력을 길러줄 수 있으며, 낯선 이들에게 정보를 얻기 위해 노력하는 동안 필수적으로 사회성과 활동력을 기르게 됩니다. 원래 이러한 프로젝트 수업들은 통합교과로서 더 훌륭한 교육효과를 거둘 수 있습니다. 몇몇 학교에서는 진보적인 교사들의 노력으로 통합교과적인 체험학습을 시도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교육의 목표는 낮게, 내용은 구체적으로, 방식은 다양하고 섬세하게' 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작은 봉우리를 등산(목표)하기 위해서는, 그 산의 특징과 생태, 지형지물과 경로 등(내용)을 충분히 알아야 하며, 올라가는 길은 동서 남북의 방향의 등산로와 암벽타기, 엘리베이터 사용에 이르기까지(방법) 다양할 것입니다. 예를 들면 시 한편을 감상하기 위해서 '노래와 춤, 연극과 이야기, 그림과 모양만들기....'등이 가능한 것처럼 말입니다. 또, 민중적 관점을 가르치기 위해서는 '4.19'나 '5.18' 한 사건만을 선택해도 '역사의 원리' 를 터득하는 데는 어려움이 없을 것입니다. 물론 이런 수업은 이제는 별로 새로울 것이 없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여전히 우리는 진도나가기나 수업량의 조절에 실패할지도 모른다는 초조감 탓에 기존의 방식 - '산 정상에 오르면 무엇이 있고, 그 산을 오르는데는 이러한 경로가 있다' 라고 설명된 지식을 암기하는 방식으로 '등산' 에 대해 가르치는 것 - 을 선호하고 있습니다. '절차적 지식을 가르치는 것, 삶의 진실을 터득하기 위한 활동, 더 가치있는 생각과 행동을 받아들이기' 위한 수업을 가능하게 하기 위해서 우리는 기존이 교육과정과 교과서들을 치워버릴 필요가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의식을 바꾼다면 아이들과의 의사소통은 훨씬 쉬워집니다. 교사가 일방적인 강연을 할 때보다 더 많은 시간의 여유를 갖고 아이들과 대화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물론 절대적 시간의 부족으로 충분하지 못한 경우가 있는데 이는 교육내용을 줄이고, 고정적인 수업 시간 관념을 포기한다면 불가능한 일은 아닙니다. 예를 들면 이른 아침이나, 방과후, 토요일과 일요일 그리고 밤 시간도 특별한 의미를 갖도록 만들 수 있습니다.
수업의 처음과 끝 수업의 동기 유발 학생중심 교육과정과 교사의 역할 공동체를 형성하는 두레 학습 - 경쟁교육으로부터의 탈피 적정한 학습량 정하기 - 양인가 질인가, 연 연간 설계도, 단원 설계 학급운영, 특활 연계지도 수업 부적응 학생에 대한 지도 문제상황을 극복하기 위한 방안(대화, 두레 상담, 집단토론, 개별지도) (수업을 빼먹은 아이, 수업에 참가하지 않는 아이, 공부가 하기싫은 아이, 준비물 안가져 오는 아이, 청소를 하지 않는 아이, 도벽이 있는 아이, 거짓말을 하는 아이, 지각하는 아이, 지나치게 적극적인 아이, )
7. 마무리 한 알의 도토리 안에는 우람한 떡갈나무가 될 수 있는 모든 조건이 다 들어있습니다. 햇볓과 바람과 물과 흙이 있으면 싹이 나고 자랍니다. 한 아이의 생명 안에 온전한 사람이 될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을 다 갖고 있습니다. 그것을 믿고 물을 주는 사람이 교사입니다. 교사는 과학자처럼 무수한 임상교육의 결과를 축적해야 합니다. 아이들에 대해 관찰하고 기록해야 합니다. 본질에 충실하되 실패의 원인을 분석하고, 새로운 방법을 찾기 위해 고뇌해야 합니다. 풍부한 지식과 전문성을 갖추되 그러나 강요하지 않는 교사가 되어야 합니다. 자신이 절대선이라고 믿거나 목적의식이 넘칠 때 관계는 불편해집니다. 가르치려고 하기 전에 먼저 아이들에게 배우려고 해야 합니다. 명령하기 전에 먼저 충분히 함께 노는 것이 필요 합니다. 더 많은 시간 함께 하고, 더 아이들이 처한 상황을 알려고 노력해야 하고, 더 많은 기회를 주는 교사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어떤 목표보다도 소중한 목표는 교사가 스스로 행복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학생으로부터 받는 존경은 교사가 올바른 책임과 구실을 제대로 수행했을 때 오는 결과입니다. 그렇다면, 존경받지 못하는 것은 바로 그 책임과 구실을 제대로 수행하지 않았음을 의미합니다. 교사의 책임과 구실이란 무엇입니까? 학생들을 제대로 가르쳐 깨달음을 얻게 하고, 그가 올바른 삶을 살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교육의 본질 목표이기 때문입니다. 학생들에게 깨달음을 주려면 먼저 교사가 깨달은 사람이어야 하고, 먼저 삶의 모델이 되어주어야만 가능할 것입니다.
우리가 추구하는 인간상은 단지 남에게 피해만 주지 않는(그러나 자신의 이익을 최대한 추구하는, 그것을 위해서면 무엇이라도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인간이 아니라, 남을 위해 베풀고 나눌 수 있는 최대한의 인간상이어야 합니다. 나아가 함께 살 줄 아는 건강하고 당당한 역사의 주인으로서 노동자를, 비판하고 실천하는 지식인이기를, 예지력을 가진 영적 선각자를 기대해야 합니다. 이런 생각은 제자를 대하는 태도를 다르게 만듭니다. 아이들은 우리의 '앞날의 동지'이며 '세상을 바꾸어 나갈 역사의 일꾼'이기 때문입니다. 제자를 무시하고, 작은 잘못으로 함부로 예단하거나 무릎을 꿇리는 일은 없어질 것입니다.
교육의 가장 기초 목표는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것입니다. '나는 누구인가?'로부터 출발하여 '나를 둘러싼 가정과 이웃과 지역사회와 세계' 에 대한 탐구로 이어져야 합니다. 이는 '삶을 어떻게 꾸릴 것인가','무엇을 입고 무엇을 먹고, 무엇을 하며 어디에 살아야 하는가'와 같은 것을 배우는 것이어야 하며, 크게는 역사의 진실과 사회 전체가 요구하는 가치를 배우고 실천하는 내용이 바탕이 될 때만 가능한 일입니다.
예컨대 우리 교육의 공허함은 다음과 같은 것들입니다. 우리가 주어진 역사 교과서 내용을 그대로 가르치면, 놀랍게도 다 배우고 났음에도 역사의 진실을 전혀 모르는 사람을 만듭니다. 즉 우리 사회의 당면한 문제들이 어떤 역사 원인에 기인하여 현상으로 나타난 것인지, 그리고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지에 대해 전혀 알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결국 오늘 신문에서 일어난 사건을 보면서 그 사건을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지 판단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프랑스 교사들은 동학년 안에서도 교사마다 다른 교과서를 가지고 가르칩니다. 어떤 교사는 '프랑스 혁명사, 영국혁명사, 러시아, 중국 혁명사와 같이 혁명사로만 채워진 교과서'를 선택해서 가르치기도 합니다. 교사가 어떤 교과서를 선택하건 그것은 교사의 절대적 권한입니다. 평가권에 대한 자유는 더욱 당연합니다. 바로 이러한 차이가 교사의 권위와 직결되는 것임에도 말입니다.
교사들이 해야 할 일은 평등교육과 인권교육이 어떻게 가능한지를 고민해야 합니다. 그러려면 우리 사회의 불평등과 우리 교육의 불평등이 왜 발생되고, 그 폐해가 현실 속에 어떻게 나타나는지 그리고 어떻게 극복될 수 있는지의 문제들을 아주 정교하고 세심하게 설계해야 합니다. 물론 더 작은 요목으로 나누고 수준에 맞는 내용을 찾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교육은 교사의 설명이나 이론 학습만으로 그쳐서는 안되며 학생 스스로 탐구하고, 토론하며, 해결을 위한 현실 참여 활동까지도 포함되어야 합니다. 또 교과활동 외 학급활동이나 특별활동, 동아리활동 등 모든 교육활동 속에서도 구현되어야 합니다.
교육과정의 재구성, 교과서의 재편은 얼마든지 교사의 재량에 의해 가능합니다. 저는 중학교 2학년 국어수업을 '민족 정체성교육'을 목표로 재편하여 우리 고유 문화인 '민요, 민화, 탈춤, 석탑, 정자, 옷과 음식'의 요목들로 구성하였습니다. 이것은 기존 교과서 제재를 취하되 내용을 심화, 재구성하고 수업 방법은 다양한 매체와 토론, 탐구발표, 토론을 시도하여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었습니다. 이러한 수업은 '언어능력 신장'과 '민족문화 지식습득'이라는 목표 달성은 물론 궁극 '민족 문화의 가치 확인' 과 '민족적 자부심과 긍지'라는 최상 목표도 달성할 수 있었습니다.
러시아의 '아름다운 학교운동'은 교사들이 월급도 받지 못하는 궁핍 속에서 꽃피웠음을 우리는 상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많은 교사들이 국가체제의 붕괴 속에서 방치되는 아이들을 두고 학교를 떠날 수 없다고 판단했으며, 그 순간 교사와 학부모와 학생들은 누구에게도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의 학교를 만들 수 있는 힘을 발휘하게 됩니다. 즉 '아름다운 학교의 핵심은 물질이 풍요한 학교나, 체제가 완벽한 학교가 아니고, 교육 주체들의 살아있는 움직임'이었습니다.
이러한 예가 교육환경의 조건이 중요하지 않다거나 부차적이라고 말하는데 사용되어서는 안됩니다. 다만 교육이 어려움에 부딪혔을 때 가장 먼저 깨닫고 방향을 제시해야할 사람들이 바로 교사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구체적인 이러한 사례는 '교육이 교사의 질을 넘어서지 않는다'는 추상스런 말보다 더 우리의 가슴을 뛰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교육에 있어서 교사의 창조스런 열정은 그 어떤 조건보다 중요합니다. 그것은 모든 길의 지름길이며 그 모든 훌륭한 방법들을 뛰어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 열정은 배우고, 공부하는 교사의 모습과 하나일 때만이 생명력과 지속성을 얻을 수 있습니다. ‘참된 스승은 참된 학생이다.(The true teacher is true student-마이다슈이치)’라는 말을 생각해보면 교사는 끝없는 지적으로 도전하고 실천하는 모험으로 충만해져 있어야 함을 알 수 있습니다.
교사가 먼저 깨닫고 많이 알고 있으며 열정이 큰 만큼 절대로 자신이 주의해야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자신이 '절대 옳다'고 생각하거나, '중요한 만큼 반드시 알아야 한다'는 무의식적 강요의 문제입니다. 올바른 것일수록 주입해서는 안됩니다. 학생이 그것을 알고 싶은 욕구를 갖게 하는 것, 스스로 깨달음과 성취감을 가지며 과정을 밟아가도록 안내하는 것, 교사의 도움이 없어도 그것을 좋아하고 더 깊이 찾아가도록 돕는 것' 이 바로 교사가 할 일입니다.
학생이 수업에 소홀하다고 화를 내는 일은 참으로 잘못된 일입니다. 학생은 진실을 알고, 배워야 할 권리가 있음과 동시에 그것을 배우지 않을 권리 또한 있는 것입니다. 성인들에게는 진실을 알거나, 배우려고 하지 않는다고 비난하는 일은 없습니다. 그럼에도 학생들에게는 배우려고 하지 않는다는 까닭으로 화를 내거나 비난하는 것은 일종의 인권에 대한 모독입니다.
수업에 들어가기전 교사는 우선 학생들의 상태가 어떠한지에 대해 세심한 관찰과 배려가 필요합니다. 그것은 아이들을 대상화하는 것과는 다른 차원의 애정과 관심입니다. 작게는 수업 시작 직전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와 같은 상황이나 정서상태도 될 수 있고, 크게는 그 아이가 어떻게 살아왔으며, 어떤 일을 겪었으며, 무엇을 좋아하며, 무엇을 싫어하는지, 성격은 어떠하며 지금 어떤 상황에 놓여 있는지, 어떤 고민과 아픔이 있는지..... 등입니다. 만약 이러한 것이 궁금하지 않고 알고 싶지 않다면, 교사로서 얻을 수 있는 것이 거의 없습니다
아이들에 대해서 많이 알기 위해서는 다양한 방법과 함께 충분한 시간을 투자해야 한다. 함께 하는 시간을 어떻게 만들 것인가는 방법적 고민으로 해결할 수 있다. 교과서나 내용부분의 진도를 나가는 것보다, 우선 서로를 충분히 알 수 있는 프로그램을 배치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를 들면 '자신의 생각을 특징을 다양하게 표현할 수 있는 소개하기' 나, '목표와 관련된 경험담 나누기', '배울 내용에 대한 준비 토론하기' 등 방법은 매우 많습니다.
어떤 방법을 선택하든 학생들은 충분히 수업의 전체 계획을 이해하고 있어야 합니다. 교사는 연간 계획과 월별 계획, 시간 계획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각 단원별 수업 전개에서 학생들의 다양한 참여 방법과 역할까지 예고되어야 합니다. 이 모든 계획을 처음부터 의논하여 준비할 수 있다면 '학생중심교육과정'에 접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우리는 진도나가기나 수업량의 조절에 실패할지도 모른다는 초조감 탓에 기존의 방식 - '산 정상에 오르면 무엇이 있고, 그 산을 오르는데는 이러한 경로가 있다' 라고 설명된 지식을 암기하는 방식으로 '등산' 에 대해 가르치는 것 - 을 선호하고 있습니다. '절차적 지식을 가르치는 것, 삶의 진실을 터득하기 위한 활동, 더 가치있는 생각과 행동을 받아들이기' 위한 수업을 가능하게 하기 위해서 우리는 기존이 교육과정과 교과서들을 치워버릴 필요가 있습니다.
한 아이의 생명 안에 온전한 사람이 될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을 다 갖고 있습니다. 그것을 믿고 물을 주는 사람이 교사입니다. 풍부한 지식과 전문성을 갖추되 그러나 강요하지 않는 교사가 되어야 합니다. 자신이 절대선이라고 믿거나 목적의식이 넘칠 때 관계는 불편해집니다. 가르치려고 하기 전에 먼저 아이들에게 배우려고 해야 합니다. 명령하기 전에 먼저 충분히 함께 노는 것이 필요 합니다. 더 많은 시간 함께 하고, 아이들이 처한 상황을 더 알려고 노력해야 하고, 더 많은 기회를 주는 교사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어떤 목표보다도 소중한 목표는 교사가 스스로 행복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첫댓글 권위 있는 교사, 수업을 잘 하는 전문성 있는 교사, 존경받는 교사가 되는 일
학생으로부터 받는 존경은 교사가 올바른 책임과 구실을 제대로 수행했을 때 오는 결과입니다. 그렇다면, 존경받지 못하는 것은 바로 그 책임과 구실을 제대로 수행하지 않았음을 의미합니다. 교사의 책임과 구실이란 무엇입니까? 학생들을 제대로 가르쳐 깨달음을 얻게 하고, 그가 올바른 삶을 살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교육의 본질 목표이기 때문입니다. 학생들에게 깨달음을 주려면 먼저 교사가 깨달은 사람이어야 하고, 먼저 삶의 모델이 되어주어야만 가능할 것입니다.
우리가 추구하는 인간상은 단지 남에게 피해만 주지 않는(그러나 자신의 이익을 최대한 추구하는, 그것을 위해서면 무엇이라도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인간이 아니라, 남을 위해 베풀고 나눌 수 있는 최대한의 인간상이어야 합니다. 나아가 함께 살 줄 아는 건강하고 당당한 역사의 주인으로서 노동자를, 비판하고 실천하는 지식인이기를, 예지력을 가진 영적 선각자를 기대해야 합니다. 이런 생각은 제자를 대하는 태도를 다르게 만듭니다. 아이들은 우리의 '앞날의 동지'이며 '세상을 바꾸어 나갈 역사의 일꾼'이기 때문입니다. 제자를 무시하고, 작은 잘못으로 함부로 예단하거나 무릎을 꿇리는 일은 없어질 것입니다.
어떻게 당당한 노동자로서 살아갈 수 있는지를 가르치기 보다는 한 명의 제자를 일류 대학에 보내는 것을 더 큰 보람으로 여기곤 합니다. 현실을 비판하고 개혁하는 일 보다는 보충수업을 조금이라도 더 받도록 감시하는 일에 더 많은 힘을 기울입니다.
교육의 가장 기초 목표는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것입니다. '나는 누구인가?'로부터 출발하여 '나를 둘러싼 가정과 이웃과 지역사회와 세계' 에 대한 탐구로 이어져야 합니다. 이는 '삶을 어떻게 꾸릴 것인가','무엇을 입고 무엇을 먹고, 무엇을 하며 어디에 살아야 하는가'와 같은 것을 배우는 것이어야 하며, 크게는 역사의 진실과 사회 전체가 요구하는 가치를 배우고 실천하는 내용이 바탕이 될 때만 가능한 일입니다.
예컨대 우리 교육의 공허함은 다음과 같은 것들입니다. 우리가 주어진 역사 교과서 내용을 그대로 가르치면, 놀랍게도 다 배우고 났음에도 역사의 진실을 전혀 모르는 사람을 만듭니다. 즉 우리 사회의 당면한 문제들이 어떤 역사 원인에 기인하여 현상으로 나타난 것인지, 그리고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지에 대해 전혀 알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결국 오늘 신문에서 일어난 사건을 보면서 그 사건을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지 판단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프랑스 교사들은 동학년 안에서도 교사마다 다른 교과서를 가지고 가르칩니다. 어떤 교사는 '프랑스 혁명사, 영국혁명사, 러시아, 중국 혁명사와 같이 혁명사로만 채워진 교과서'를 선택해서 가르치기도 합니다. 교사가 어떤 교과서를 선택하건 그것은 교사의 절대적 권한입니다. 평가권에 대한 자유는 더욱 당연합니다. 바로 이러한 차이가 교사의 권위와 직결되는 것임에도 말입니다.
최근 우리는 이러한 가치지향적 교육과정의 수립을 위해 교육내용을 다음과 같은 것들을 선정했습니다. 평등교육과 인권교육, '평화교육과 통일교육' 과 '노동교육과 성평등교육', '생태교육과 건강교육', '문화예술교육'......
교사들이 해야 할 일은 평등교육과 인권교육이 어떻게 가능한지를 고민해야 합니다. 그러려면 우리 사회의 불평등과 우리 교육의 불평등이 왜 발생되고, 그 폐해가 현실 속에 어떻게 나타나는지 그리고 어떻게 극복될 수 있는지의 문제들을 아주 정교하고 세심하게 설계해야 합니다. 물론 더 작은 요목으로 나누고 수준에 맞는 내용을 찾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교육은 교사의 설명이나 이론 학습만으로 그쳐서는 안되며 학생 스스로 탐구하고, 토론하며, 해결을 위한 현실 참여 활동까지도 포함되어야 합니다. 또 교과활동 외 학급활동이나 특별활동, 동아리활동 등 모든 교육활동 속에서도 구현되어야 합니다.
교육과정의 재구성, 교과서의 재편은 얼마든지 교사의 재량에 의해 가능합니다. 저는 중학교 2학년 국어수업을 '민족 정체성교육'을 목표로 재편하여 우리 고유 문화인 '민요, 민화, 탈춤, 석탑, 정자, 옷과 음식'의 요목들로 구성하였습니다. 이것은 기존 교과서 제재를 취하되 내용을 심화, 재구성하고 수업 방법은 다양한 매체와 토론, 탐구발표, 토론을 시도하여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었습니다. 이러한 수업은 '언어능력 신장'과 '민족문화 지식습득'이라는 목표 달성은 물론 궁극 '민족 문화의 가치 확인' 과 '민족적 자부심과 긍지'라는 최상 목표도 달성할 수 있었습니다.
즉 지식과 기능은 물론이고, 가치교육으로 깨달음을 얻어낼 수 있습니다. 교육을 통한 이 '의식의 진보'는 '행동의 실현' 으로 나아감으로써 '개인 삶의 변화'는 물론, 나아가서는 '사회변혁' 을 이끌어내는 힘이 되는 것입니다.
러시아의 '아름다운 학교운동'은 교사들이 월급도 받지 못하는 궁핍 속에서 꽃피웠음을 우리는 상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많은 교사들이 국가체제의 붕괴 속에서 방치되는 아이들을 두고 학교를 떠날 수 없다고 판단했으며, 그 순간 교사와 학부모와 학생들은 누구에게도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의 학교를 만들 수 있는 힘을 발휘하게 됩니다. 즉 '아름다운 학교의 핵심은 물질이 풍요한 학교나, 체제가 완벽한 학교가 아니고, 교육 주체들의 살아있는 움직임'이었습니다.
이러한 예가 교육환경의 조건이 중요하지 않다거나 부차적이라고 말하는데 사용되어서는 안됩니다. 다만 교육이 어려움에 부딪혔을 때 가장 먼저 깨닫고 방향을 제시해야할 사람들이 바로 교사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구체적인 이러한 사례는 '교육이 교사의 질을 넘어서지 않는다'는 추상스런 말보다 더 우리의 가슴을 뛰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교육에 있어서 교사의 창조스런 열정은 그 어떤 조건보다 중요합니다. 그것은 모든 길의 지름길이며 그 모든 훌륭한 방법들을 뛰어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 열정은 배우고, 공부하는 교사의 모습과 하나일 때만이 생명력과 지속성을 얻을 수 있습니다. ‘참된 스승은 참된 학생이다.(The true teacher is true student-마이다슈이치)’라는 말을 생각해보면 교사는 끝없는 지적으로 도전하고 실천하는 모험으로 충만해져 있어야 함을 알 수 있습니다.
교사가 먼저 깨닫고 많이 알고 있으며 열정이 큰 만큼 절대로 자신이 주의해야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자신이 '절대 옳다'고 생각하거나, '중요한 만큼 반드시 알아야 한다'는 무의식적 강요의 문제입니다. 올바른 것일수록 주입해서는 안됩니다. 학생이 그것을 알고 싶은 욕구를 갖게 하는 것, 스스로 깨달음과 성취감을 가지며 과정을 밟아가도록 안내하는 것, 교사의 도움이 없어도 그것을 좋아하고 더 깊이 찾아가도록 돕는 것' 이 바로 교사가 할 일입니다.
학생이 수업에 소홀하다고 화를 내는 일은 참으로 잘못된 일입니다. 학생은 진실을 알고, 배워야 할 권리가 있음과 동시에 그것을 배우지 않을 권리 또한 있는 것입니다. 성인들에게는 진실을 알거나, 배우려고 하지 않는다고 비난하는 일은 없습니다. 그럼에도 학생들에게는 배우려고 하지 않는다는 까닭으로 화를 내거나 비난하는 것은 일종의 인권에 대한 모독입니다.
수업에 들어가기전 교사는 우선 학생들의 상태가 어떠한지에 대해 세심한 관찰과 배려가 필요합니다. 그것은 아이들을 대상화하는 것과는 다른 차원의 애정과 관심입니다. 작게는 수업 시작 직전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와 같은 상황이나 정서상태도 될 수 있고, 크게는 그 아이가 어떻게 살아왔으며, 어떤 일을 겪었으며, 무엇을 좋아하며, 무엇을 싫어하는지, 성격은 어떠하며 지금 어떤 상황에 놓여 있는지, 어떤 고민과 아픔이 있는지..... 등입니다. 만약 이러한 것이 궁금하지 않고 알고 싶지 않다면, 교사로서 얻을 수 있는 것이 거의 없습니다
아이들에 대해서 많이 알기 위해서는 다양한 방법과 함께 충분한 시간을 투자해야 한다. 함께 하는 시간을 어떻게 만들 것인가는 방법적 고민으로 해결할 수 있다. 교과서나 내용부분의 진도를 나가는 것보다, 우선 서로를 충분히 알 수 있는 프로그램을 배치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를 들면 '자신의 생각을 특징을 다양하게 표현할 수 있는 소개하기' 나, '목표와 관련된 경험담 나누기', '배울 내용에 대한 준비 토론하기' 등 방법은 매우 많습니다.
어떤 방법을 선택하든 학생들은 충분히 수업의 전체 계획을 이해하고 있어야 합니다. 교사는 연간 계획과 월별 계획, 시간 계획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각 단원별 수업 전개에서 학생들의 다양한 참여 방법과 역할까지 예고되어야 합니다. 이 모든 계획을 처음부터 의논하여 준비할 수 있다면 '학생중심교육과정'에 접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교육의 목표는 낮게, 내용은 구체적으로, 방식은 다양하고 섬세하게' 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우리는 진도나가기나 수업량의 조절에 실패할지도 모른다는 초조감 탓에 기존의 방식 - '산 정상에 오르면 무엇이 있고, 그 산을 오르는데는 이러한 경로가 있다' 라고 설명된 지식을 암기하는 방식으로 '등산' 에 대해 가르치는 것 - 을 선호하고 있습니다. '절차적 지식을 가르치는 것, 삶의 진실을 터득하기 위한 활동, 더 가치있는 생각과 행동을 받아들이기' 위한 수업을 가능하게 하기 위해서 우리는 기존이 교육과정과 교과서들을 치워버릴 필요가 있습니다.
한 아이의 생명 안에 온전한 사람이 될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을 다 갖고 있습니다. 그것을 믿고 물을 주는 사람이 교사입니다. 풍부한 지식과 전문성을 갖추되 그러나 강요하지 않는 교사가 되어야 합니다. 자신이 절대선이라고 믿거나 목적의식이 넘칠 때 관계는 불편해집니다. 가르치려고 하기 전에 먼저 아이들에게 배우려고 해야 합니다. 명령하기 전에 먼저 충분히 함께 노는 것이 필요 합니다. 더 많은 시간 함께 하고, 아이들이 처한 상황을 더 알려고 노력해야 하고, 더 많은 기회를 주는 교사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어떤 목표보다도 소중한 목표는 교사가 스스로 행복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