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를 상징하는 색은 삭막하고 메마른 느낌을 주는 회색이다. 도시 하면 떠오르는 회색은 건축물의 주재료인 콘크리트가 가진 본연의 색깔이다. 미세먼지와 황사로 희뿌연 공기까지 몰려들면 회색 콘크리트가 가득한 도시는 하늘까지 잿빛으로 물들어 사람들을 더욱 숨 막히게 한다.
과거 우리나라 도시를 회색으로 물들이는데 가장 크게 일조한 것은 일련의 건물군을 이루고 있는 아파트들이었다. 성냥갑처럼 획일적이고 단순한 형태의 아파트들을 빼곡하게 배치한 후 회색 계열의 무채색을 칠해 놓으니 가히 콘크리트 숲이라 부를 만했다.
색채는 정서가 지배하는 영역
아파트가 눈에 띄게 달라지고 있다. 더는 무미건조한 풍경을 만드는 예전의 회색 아파트가 아니다. 마치 화장이라도 한 것처럼 요즘 아파트는 다양한 색을 화사하게 물들이고 있다.
아파트가 변화하기 시작한 것은 밀레니엄이 지나면서부터다. 건설사들이 독자적인 브랜드들을 내놓고 브랜드 아이덴티티(BI)를 갖추기 위해 자신만의 색깔을 가진 물감을 올려놓은 팔레트를 만들기 시작했다. 아파트 단지를 새로 만들 때 팔레트 위 물감 중에서 사용할 색을 골라 전체적으로 통일감을 주면서도 개성을 드러내는 방식이다.
최근에는 아파트의 외관을 꾸미는 화장 기술이 더욱 발전하면서, 건물에서 잘생긴 부분은 더욱 돋보이도록 강조하고 못생긴 부분은 잘 보이지 않도록 가려주는 고난도의 메이크업 수준에까지 다다르고 있다. 유명 건설사들은 아파트 외관을 차별화되게 꾸며 눈에 띄는 시인성과 조화로운 심미성을 확보하며 프리미엄 가치를 창출하고 있다.
아파트가 외관에 신경 써야 하는 이유는 높고 넓은 면적을 차지하고 있어 주변 사람들과 도시 경관에 미치는 영향이 상당하기 때문이다. 아파트는 가까이에 있는 사람들에게 압도적으로 시야를 차지하는 거대한 오브제 군으로 인식되며, 멀리 있는 불특정 다수의 사람에게도 조망되는 도시의 기본배경이 된다.
아파트의 개별 동의 높이나 주동 배치는 토지의 용적률과 건폐율을 바탕으로 전체 세대수와 공급면적 등을 고려해 적절하게 계획된다. 그런데 이렇게 형태가 정해진 아파트의 외형을 어떻게 치장할지는 조금은 다른 차원의 문제가 된다.
최근 아파트들은 과거와 달리 다양한 색을 사용하고 있다. 건설사들은 독자적인 색채 팔레트를 만들어 개별 단지의 디자인 콘셉트에 따라 색을 적절하게 골라 사용한다. ⓒ 사은주 외 『장 필립 랑클로의 건축공간에 나타난 색채 특성 연구』
기본적으로 사람은 자신이 습득하는 정보의 80% 이상을 시각을 통해 받아들인다. 대상을 바라볼 때는 물체에 닿아 반사된 빛이 시신경을 자극함으로써 인지되는데, 대상의 크기와 비례, 색채, 질감, 점, 선, 면 등 다양한 시각 요소들이 대뇌에서 해석된다. 시각 요소들 가운데 가장 먼저 인식되는 게 바로 색채인데, 색채는 형태나 질감보다 훨씬 직관적으로 인지된다.
미국의 심리학자 루이스 체스킨은 “디자인 및 형태에 대한 인간의 판단은 정신적·이성적이지만, 색채에 대한 반응은 정서적”이라면서 “형태는 인간의 이성에 소구하지만, 색채는 인간의 정서에 소구한다”라는 말을 남겼다. 색채는 이성이 아니라 정서가 지배하는 영역이라는 의미다.
사람이 특정한 색을 다른 색과 구별해 인식하는 것은 색의 3속성인 색상과 명도, 채도가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빨강, 노랑, 파랑과 같은 색상은 빛의 파장이 결정하고, 색의 밝고 어두움을 나타내는 명도는 빛의 강도가 결정하며, 색의 선명하고 탁한 정도인 채도는 빛의 순도가 결정한다.
색의 3속성에 따라 정해지는 고유의 색은 감성의 영역으로 개인마다 다르게 받아들여질 수 있다. 그런데도 각각의 색은 여러 사람이 공유하는 공통적이고 보편적인 감각이 잠재돼있는 것으로 보인다. 아파트를 비롯해 상품 디자인에서는 색에 대해 느끼는 사람들의 공통감각을 파악해 활용하기 위해 노력한다.
실제 건축에서는 아주 오랫동안 지역마다 고유의 색채를 활용한 것으로 보인다. 하늘과 토양, 식생, 물 등이 가진 색을 자연환경 색채라 하는데, 이는 오랜 기간에 걸쳐 기후와 지질에 의해 만들어지는 지역 고유의 색이다. 연구에 따르면 기후가 서로 다른 지역에서는 일광 조건이 달라져 건축물 외장 재료의 색상과 명도가 달라진다고 한다.
고층부와 저층부의 서로 다른 색채 전략
아파트의 색채 디자인은 주변의 자연적, 인공적 환경을 고려하여 건축 요소별로 재료와 색채가 조화를 이루어 입주민과 지역주민의 심리적 안정감을 주도록 계획한다. 원경, 중경, 근경의 시각적 인지 범위를 고려해 공공을 배려하는 적절한 색채 계획으로 아름답고 조화로운 도시경관 형성에 기여해야 한다.
아파트 저층부와 고층부는 완전히 다른 환경이기 때문에 색채 계획을 세울 때 서로 다른 전략을 사용한다. 아파트의 저층부는 가까운 거리에서 조망되는데, 지나다니는 사람들에게 색채는 물론 질감과 패턴까지도 세부적으로 보이는 영역이다. 따라서 아파트 저층부는 색깔뿐만 아니라 재료의 질감도 신경 써야 한다.
일반적으로 아파트의 저층부는 대지와의 조화 등을 고려하되 가로에 활기를 더할 수 있도록 활기찬 느낌의 배색을 활용하는 것이 좋다. 아울러 아파트의 외벽 콘크리트에 단순히 색깔을 입히는 수준을 넘어 재료의 질감을 살리기 위해 고급스러운 느낌을 주는 화강석 등 석재 판넬을 덧씌우는 경우가 많다.
아파트 저층부에 사용되는 화강석은 크게 회색과 빨강이 양분하고 있다. 회색 계열에서는 다크한 마천석과 밝은 거창석이 인기가 높고 빨강 계열에서는 포천석이 사용 빈도가 높다. 스톤코트와 같은 도장재를 사용해 더 경제적으로 화강석과 같은 느낌을 줄 수 있다.
아파트 고층부는 높이로 인하여 질감과 같은 촉각적인 요소는 전혀 없고 시각적으로만 인지되는 영역이다. 아파트의 거대한 크기로 주변을 가리는 차폐감을 완화하기 위해 가급적 주변 환경과 잘 조화되고 존재감이 도드라지지 않게 하는 색채 계획이 필요하다. 배경과 잘 구별되지 않게 하려면 배경 색채와 명도 차이를 되도록 적게 하고 대비 관계를 만들지 않는 것이 좋다.
아파트 외벽에 사용하는 색채는 크게 주조색과 보조색, 강조색으로 나눌 수 있다. 주조색은 가장 큰 면적을 차지하는 색으로 전체면적의 약 70%를 차지하며, 건물의 전체 기본적인 이미지를 형성하는 역할을 한다. 보조색은 주조색을 보조해 좁은 면적에 칠하는 색으로 전체면적의 20~30% 정도를 차지하며, 건축물에 변화를 주는 역할을 한다. 강조색은 점이나 선처럼 일부분에 사용하는 색으로 전체면적의 5~10% 정도를 차지하며, 변화와 강조를 나타내기 위해 사용한다.
일반적으로 아파트 동 단위마다 한 개의 주조색을 적용하고 포인트가 들어가는 부분에 보조색과 강조색을 사용한다. 배색 방법은 동일 색조나 유사 색조보다 반대 색조를 사용하는 ‘대조톤배색’이 많이 쓰인다. 색을 칠하는 패턴은 과거에는 수직으로 영역을 나누는 경우가 많았으나 최근에는 수평으로 나누는 경우가 늘고 있으며, 색채가 단계적으로 바뀌는 그라데이션 기법이 두드러지게 증가하고 있다.
2014년부터 2019년까지 신축 아파트 외장색채를 분석한 결과. 노랑(Y)-주황(YR) 계열 사용은 계속적으로 사용이 많고 최근에는 빨강(R)-주황(YR) 계열 사용이 증가다. ⓒ 황상윤 외, 『아파트 외장색채 근황 분석』
2014년부터 2019년까지 신축 아파트의 주조색과 보조색, 강조색 사용현황을 조사한 연구에 따르면, 노랑(Y)-주황(YR) 계열은 2018년까지 높은 점유 비율을 보이며 계속해서 많이 사용되고 있었고 2019년에는 빨강(R)-주황(YR) 계열 사용이 많이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명확하고 밝은 분위기를 전달하는 파랑(B)-청록(BG) 계열도 최근 사용이 점진적으로 늘어나는 추세다.(황상윤 외, 『아파트 외장색채 근황 분석』 참조)
초고층 커튼월과 커튼월룩의 등장
초고층으로 건설되는 주상복합 아파트는 일반 아파트보다 세련되고 화려한 외관 때문에 사람들의 이목을 사로잡는다. 주상복합 아파트의 화려한 외관은 커튼월(Curtain Wall) 공법으로 만들어진다. 커튼월은 건물의 하중을 중심부의 코어와 그 주변의 기둥으로 지탱하고, 외벽은 하중을 전혀 받지 않아 마치 커튼을 둘러친 것처럼 처리하는 공법이다.
커튼월 공법을 적용하면 외벽은 힘을 받지 않기 때문에 건물의 바깥쪽 전체를 유리로 마감할 수 있다. 외벽을 유리로 장식하면 내부에서는 탁 트인 조망을 확보할 수 있고 바깥쪽에서는 햇빛이 반사돼 번쩍이며 빛이 난다. 마치 동화 속에 등장하는 유리 궁전처럼 화려한 모습이다.
커튼월을 사용한 주상복합 아파트에서 외벽 전체를 유리로 뒤덮는 경우도 있지만, 층과 층 사이와 일부 외벽 테두리에는 유리와 잘 조화를 이루는 금속 외장재를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특히 가벼우면서 녹이 슬지 않고 다양한 색을 낼 수 있는 알루미늄 복합패널을 많이 사용한다.
고층 주상복합 아파트는 커튼월로 화려한 외관을 자랑한다. 최근 아파트에는 유리와 금속패널을 사용해 커튼월룩이 등장했다. ⓒ (왼쪽) 두산건설/ (오른쪽) GS건설
문제는 알루미늄 복합패널이 가연성 소재로 만들어졌을 때 화재에 상당히 취약할 수 있다는 점이다. 2017년 영국 고층아파트 그린펠타워 화재 참사와 2020년 울산 주상복합 아파트 화재에서는 화려한 외관을 만들기 위해 사용한 알루미늄 복합패널이 불이 크게 번져나가는 불쏘시개 역할을 하면서 피해를 키운 것으로 지적되고 있다. 따라서 금속패널은 불에 잘 타지 않는 난연소재로 만드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최근에는 아파트의 외부 디자인이 다양해지면서 주상복합이 아닌데도 커튼월처럼 보이는 일반 아파트들이 등장해 인기를 모으고 있다. 이 경우에는 실제 콘크리트 외벽이 존재하는데 그 위를 유리와 금속패널로 장식해 마치 커튼월처럼 보이도록 해 커트월룩(Curtain Wall Look)이라 부른다. 커튼월룩은 커튼월처럼 외관이 화려한 동시에, 기존 커튼월의 단점인 냉난방과 환기에서 오히려 더 유리하다는 장점이 있어 앞으로 아파트에 적용이 늘어날 것으로 예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