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위에 아크릴과 유화물감을 통해 완성해나간다. 종이로 인해 형성된 바탕의 질감, 요철효과는 그 위에 물감이 지나가고 붓질이 얹혀지는 순간
흡사 프로타쥬와 같은 기묘한 자국을 남긴다.
글 | 박영택(경기대교수, 미술평론)
[2009. 11. 8 - 11. 21 나무그늘 갤러리]
[나무그늘 gallery&book cafe] 서울시 영등포구 영등포동 4가 441-10 경방타임스퀘어 단지 1층 T.02-2638-2002
화면을 가로지르며 나무 혹은 화병이미지가 직립해있다. 글쎄, 그것이 구태여 나무나 줄기, 화병이어도 좋고 아니어도 큰 상관은 없어 보인다. 식물/자연을 올려놓기 위한 배려라고나 할까. 꽃과 풀을 온전히 담아 우리에게 마치 성찬처럼 갖다바치는 것이다. 나무의 몸통과 유사한 그 수직의 선/덩어리는 자연에 내재한 보이지 않는 힘, 기운 그러니까 수직의 기(氣)를 연상시켜주기도 하고 그 위에 부풀어오르며 매달릴 꽃과 풀잎을 지탱하기 위한 안전한 지지대의 형상화같다. 비교적 구체적인 나무의 모습을 보여주는 이해임의 그림은 한결같이 화면 정중앙에 위치한 수직선과 그 위로, 화면의 거의 절반을 가린 꽃/풀이 감싸고 있는 형국이다. 솜사탕 마냥 혹은 구름이나 축소된 자연공간을 정원처럼 감싸고 응축하고 있는 이 덩어리는 작가가 보고 느끼고 이해한 자연존재의 은유적 형태감이고 질감이다. 그것은 식물성의 세계에 대한 작가만의 감성적 독해이다. 자연계의 꽃이나 풀의 속성은 그것이 부풀어오른다는 데 있다.
모든 식물들은 외부의 것을 제 몸안으로 받아들여 그것으로 자존, 팽창한다. 산은 수없이 많은 나무와 풀들이 웅성거리듯 퍼져나가는 생명의 기운으로 가득하고 아늑하다. 온통 해를 향해 도열한 식물들이 쭉쭉 솟아오르고 팝콘처럼 터져나간다. 나무는 땅 밑에서부터 빨아올린 수액을 가지 끝 이파리에까지 전달하며 제 몸에 매달린 모든 것들을 발아시키고 확산시킨다. 대롱에 매달린 꽃은 뿌리에서 줄기까지의 그 모든 것들이 위로 솟아 결정적인 형상을 만들고 자지러진 것에 다름아니다. 작가는 그렇게 식물들을 보았다. 그 감흥을 가슴에 담고 이를 그림으로 만들어내려 한다. 그래서 구름같은 덩어리와 우둘투둘한 질감으로 묘사되어 화면밖으로 마구 나가려한다.
나는 작가의 집에 있는 그 모든 창마다 나무와 풀들이 가득 담겨 들어오고 있는 모습을, 경관을 보았다. 아파트 주변이 녹지가 저층에 위치한 작가의 집 창마다 밀려들어오고 있었다. 작가는 그 모습을 오랫동안 응시했을 것이다. 사실 자연계에서 받은 감흥과 이를 인간의 삶과 연결시켜 사유하는 것은 무척이나 오래된 동양적 사유와 예술의 전통이다. (以物比德) 작가는 꽃과 나무를 통해 아름다움을 떠올려보고 (자연이 잉태한 아름다움)그 자연에서 추억과 꿈, 이상적인 삶의 한 자락도 유추해본다. 나무와 꽃이 가득한 화면 바탕에 별과 달이 뜨고 (이는 자신의 가족이미지다) 유년기의 한 순간이 회상처럼 지나가고 (손에 손을 잡고 연결되어 있는 아이들 이미지) 그런가하면 밤과 낮, 기쁘고 슬픈 날이 스쳐지나간다. 자연풍경은 작가의 육체와 감성과 분리되지 않는다. 나무와 꽃, 풀을 바라보면서 온갖 것들을 들여다보고 죄다 떠올려 본다. 그래서 그 풀과 꽃 사이에, 주변에 떠도는 단상들이 개입한다. 결국 이 그림은 식물을 그린것이긴 하지만 그보다는 그 식물을 들여다보는 자신의 내면의 초상을 그려보이는 일이다.
작가는 한지를 잘라서 특정한 질감과 형태를 유도하는 상태로 캔버스 표면에 부착한 후 그 위에 아크릴과 유화물감을 통해 완성해 나간다. 종이로 인해 형성된 바탕의 질감, 요철효과는 그 위에 물감이 지나가고 붓질이 얹혀지는 순간 흡사 프로타쥬와 같은 기묘한 자국을 남긴다. 캔버스의 피부위에 성형된 주름, 화석처럼 얹혀진 이미지, 물감과 종이가 어우러져 빚어내는 물성이 이미지와 함께 결합된 상태는 이 작가만의 독자한 기법과 만나게 한다. 더구나 다분히 촉각적인 표면효과는 단조로울 수 있는 꽃과 풀의 묘사를 비교적 흥미롭게 엿보게 한다. 아울러 망막에 호소하기 보다는 촉각을 좀더 부추키는 감상으로 인해 자연계의 존재성을 좀더 구체적이며 실감나게 체감시키는 편이다. 어둡고 단호한 평면위에 나무와 꽃, 풀만이 등불처럼 환하게 피어 켜져있다. 다분히 낭만적인 정경을 상상케 한다. 나로서는 요철효과를 자아내는 한지와 물감이 만나 이룬 효과가 상당히 매력적이다. 그것이 꽃의 형상과 내부의 주름, 결들을 자연스레 그려주는 한편 잎사귀의 잎맥, 선들을 탁본처럼 떠내준다. 그것은 회화이면서 동시에 저부조이다. 그리기이자 만들기이며 자기 손으로, 육체로 자연물을 추체험하는 일이다. 재료구사의 방법론과 화면 구성에서 오는 완성도나 치밀함에서 아쉬운 부분도 있지만 그만의 독특한 기법을 통해 식물, 자연계에서 받은 인상과 감흥을 소박하고, 아름답게 부풀려내는 나름의 힘이 있음도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