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자의 시호 문선왕
시호(諡號란 왕이나 사대부들이 죽은 뒤에 그 공덕을 찬양하여 추증하는 호(號)이다. 호라고 하는 것은 옛날 사람들이 이름 대신 부른 것이다. 옛날 사람들은 윗사람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않았다. 그래서 호를 정해 편하게 그 사람의 이름을 부르게 하였다. 시호를 정한 것도 그 사람을 존경한다는 의미가 있다. 그래서 왕이나 사대부들이 죽은 뒤에 그들의 공덕을 찬양하여 호를 추증하였다. 시호의 기원은 중국에 있는데, 그 시기는 확실하지 않으나 일반적으로 주나라 주공(周公) 때부터 시법(諡法;시호를 의논하여 정하는 방법)이 이루어진 것으로 본다.
공자의 시호는 문선왕(文宣王)이다. 당 현종이 문선왕으로 추증하였다. 공자가 죽은 후 많은 시간이 흐른 후, 그것도 몇 번의 왕조가 바뀐 후 당나라 때 시호를 내린 이유는 공자가 죽은 후에 왕 이상으로 큰 영향력을 행사하여 존경을 받았기 때문이다.
공자는 일생을 바쳐 학문을 좋아하고 목숨을 걸고 실천을 중시했다. 망하려는 나라에는 들어가지 않고 어지러운 나라에는 살지 않았다. 공자는 유학을 창시하였다. 사람들은 혼돈스러운 삶 속에서 공자의 가르침을 인성의 기준으로 삼았고 스스로 자신의 마음과 행동을 다스리기 시작했다. 한나라 고조 황제는 노나라를 지나가다 태뢰(太牢: 천자에게 드리는 제사)로 제사지냈으며, 제후와 경상들이 오면 항상 먼저 공자 무덤에 참배하고 정사에 나아갔다. 마침내 공자의 가르침이 한(漢)나라의 국교(國敎)가 되자 그는 성인(聖人)으로 존경을 받았고, 당 현종 때는 문선왕(文宣王)으로 추증되었다. 왕이란 온 백성을 잘 보살피고 어질게 치리하는 자리다. 공자는 왕이 아니었음에도 역대 왕들보다 후세가 살기 좋도록 세운 공이 많았기 때문에 왕으로 추대된 것이다.
그래서 사마천은 『사기』 「공자세가」에서 “천하에 군왕에서 현인까지 많은 사람이 있었건만, 생시에 아무리 영화로웠던들 죽으면 다 끝이었다. 오직 공자만은 포의(布衣)로 죽었으나 대대로 전해오면서 학자들의 종주(宗主)로 숭앙되고 있다” 하였다.
[출처] 공자의 시호 문선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