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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7월 13일(월)
* 시작 기도
주님...
새벽 빗소리를 들으며 말씀 앞에 앉아 있으니 영혼과 귀를 즐겁게 하는 노랫소리가 따로 없습니다.
주의 보혈이 되어 밤새 오염된 영혼을 깨끗이 씻어 주시고 정결한 주의 신부로 세워주소서.
죄로 인한 내 영혼의 피폐함으로 견딜 수 없사오니 주의 말씀 안에서 나의 죄를 보게 하시고 그 죄를 바라보시는 주님의 아픔과 애통하심이 나의 애통이 되어 진실된 참회가 있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양 날 선 검보다 예리하여 우리의 모든 영혼과 골수 그리고 관절까지 찔러 쪼개며 심령의 생각과 뜻도 심판하실 수 있사오니 주의 말씀 앞에서 나 자신이 벌거벗은 자 되어 하나님 앞에서 부끄러운 자 되게 하소서.
그 부끄러움으로 가렸던 무화과 잎은 찢어발기고 오직 우리 주님의 보혈의 옷으로 입어 오늘 이 하루가 구원의 날, 영원에 잇댄 영생의 날이 되게 하소서.
주님을 사모합니다. 사랑합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성경본문 / 시 146:1-10
제목 : 인생을 의지하지 않고, 야곱의 하나님을 자기의 도움으로 삼는 자의 복.
1. 할렐루야 내 영혼아 여호와를 찬양하라.
2. 나의 생전에 여호와를 찬양하며 나의 평생에 내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3. 귀인들을 의지하지 말며 도울 힘이 없는 인생도 의지하지 말지니
4. 그의 호흡이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서 그 날에 그의 생각이 소멸하리로다.
5. 야곱의 하나님을 자기의 도움으로 삼으며 여호와 자기 하나님에게 자기의 소망을 두는 자는 복이 있도다.
6. 여호와는 천지와 바다와 그 중의 만물을 지으시며 영원히 진실함을 지키시며
7. 억눌린 사람들을 위해 정의로 심판하시며 주린 자들에게 먹을 것을 주시는 이시로다. 여호와께서는 갇힌 자들에게 자유를 주시는도다.
8. 여호와께서 맹인들의 눈을 여시며 여호와께서 비굴한 자들을 일으키시며 여호와께서 의인들은 사랑하시며
9. 여호와께서 나그네들을 보호하시며 고아와 과부를 붙드시고 악인들의 길은 굽게 하시는도다.
10. 시온아 여호와는 대대로 통치하시리로다. 할렐루야.
* 나의 묵상
시인은 자기 평생에 여호와 하나님을 찬양할 열정을 토로한다.
내 영혼아 여호와를 찬양하라. 나의 생전에 여호와를 찬양하며 나의 평생에 내 하나님을 찬양하리로다(1-2절).
그리고 유한한 인간을 의지하지 말 것에 대해서 경계를 잊지 않는다.
귀인(부와 권력이 있는 지도자)를 의지하지 말며, 눈에 보이는 대로 힘이 있어 보이는 사람을 의지하지 말 것이다.
왜냐하면 아무리 힘과 권력 그리고 부가 있는 자라도 그가 죽으면 흙으로 돌아가서 당일에 그의 모든 생각하는 것들이 소멸할 것이기 때문이다(3-4절).
따라서 사람을 의지하지 말고 여호와 하나님을 의지해야 하는 당위성에 대해서 피력한다(5-10절).
야곱의 하나님을 자기 도움으로 삼을 것이다.
그 하나님께 소망을 두는 자가 복이 있다.
하나님께서는 천지와 바다 그리고 모든 만물을 지으셨기 때문이다.
그 분은 그의 신실함을 영원히 지키시는 분이시다.
억울하게 박해를 받는 이들을 위하여 공의를 베푸신다.
주린 자에게는 먹을 것을 주시는 분이시다.
주께서는 갇힌 자를 풀어 자유를 주신다.
소경의 눈을 여시고 비천한 자를 일으키시며 의인들을 사랑하신다.
그리고 우리 주님은 나그네와 고아 그리고 과부를 붙드시고 악인들의 길은 굽게 하신다.
따라서 시온은 영원히 공평하고 신실하게 다스리시는 하나님을 찬양할 것이다. 할렐루야.
146편부터 150편까지는 할렐루야로 시작하여 할렐루야로 마무리 짓는 감사예배시이다.
이 감사예배시는 아침과 저녁에 드리는 상번제에 공식으로 낭송되어진 감사 찬송으로서의 역할을 한 것이다.
오늘 본문을 비롯한 150편까지의 감사예배시는 주로 하나님께서 구약 구속사의 도구로 삼으신 선민 이스라엘의 구원과 관련한 하나님의 영광과 위엄을 찬양하면서 보다 광범한 차원에서 선민 이스라엘을 중심으로 이 땅의 전(全)역사를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절대주권자요 창조자로서의 절대 권능과 위엄 그리고 영광과 죄인들에게 베푸시는 구원과 축복에 대하여 포괄적으로 찬양하고 있다.
시인은 시온이 하나님을 찬양할 것과 함께 자기 자신도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을 찬양할 것을 다짐하되 사람을 의지하지 말 것을 촉구한다.
왜냐하면 사람은 아무리 힘과 권력이 있고 돈과 명예가 있어 자기를 도와줄 수 있을 것처럼 보일지라도 그의 호흡이 끊어지면 곧 죽으면 그날부터 그의 모든 생각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오직 우리가 의지할 이는 우리의 영원한 도움이 되시는 여호와 하나님을 의지하며 그에게만 소망을 둘 것이다.
이스라엘의 열왕들의 면면이나 성경에 나오는 인물들을 보면 이 사실이 분명하다.
그들이 사람을 의지할 때는 여지없이 넘어지거나 전쟁에서 완패하였지만, 극한 위기 속에서도 하나님을 의지할 때는 하나님께서 기가 막히게 전세를 역전시켜 승리케 하신 일이 한두 번이 아니다.
북이스라엘의 초대왕 르호보암이 죽자 그의 아들 아비얌이 왕이 되었다.
그는 아버지 르호보암이 행했던 모든 죄를 행하고 하나님 앞에서 온전치 못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아비야가 죽자 그의 아들 ‘아사’가 왕이 되었다.
아사는 다윗과 같이 하나님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고 그가 다스리는 땅에서 남색하는 자들을 쫓아내고 모든 우상을 척결했으며 그의 어머니(또는 할머니) 마아가가 아세라 상을 만들어 음란하게 섬기자 태후로서의 위를 폐하고 그 아세라 상을 불살라버렸다.
그렇게 아사의 마음이 하나님 앞에서 온전하여 하나님을 잘 섬겼으나 어느 날 북이스라엘의 왕 ‘바아사’가 남유다를 침공하였다.
그러자 그는 갑자기 두려운 마음이 들었는지 그렇게 하나님을 잘 섬기던 그 마음은 사라지고 사람을 의지하게 되었다.
그는 왕궁과 성전의 곳간에 있는 모든 은금을 가져다가 다메섹의 아람 왕인 벤하닷에게 주며 자기를 도와줄 것을 요청하였다.
그 때 선견자 하나니가 유다왕 아사에게 와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충고를 한다.
(대하 15:7) 그 때에 선견자 하나니가 유다 왕 아사에게 나와서 그에게 이르되 왕이 아람 왕을 의지하고 왕의 하나님 여호와를 의지하지 아니하였으므로 아람 왕의 군대가 왕의 손에서 벗어났나이다. 구스 사람과 룹 사람의 군대가 크지 아니하며 말과 병거가 심히 많지 아니하더이까? 그러나 왕이 여호와를 의지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왕의 손에 넘기셨나이다.
선견자 하나니의 이런 충고가 있었으면 그것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고 그가 행했던 행동을 수정하는 것이 옳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오히려 분노하여 그에게 충고하는 선견자 하나니를 옥에 가두고 만다.
그리고 그의 노년에 발에 병이 들어 매우 위독했으나 그는 하나님께 구하지 않고 의원들에게 구하여 결국 죽고 말았다(대하 16장).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을 봐도 힘이 있다고 하는 사람의 인생이 얼마나 허무한가를 쉽게 알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인생을 가리켜 헛것 같고 티끌과 먼지와 같다고 하였다.
(시 144:4) 사람은 헛것 같고 그의 날은 지나가는 그림자 같으니이다.
(시 90:3,5-7) 주께서 사람을 티끌로 돌아가게 하시고 말씀하시기를 너희 인생들은 돌아가라 하셨사오니 주께서 그들을 홍수처럼 쓸어가시나이다. 그들은 잠깐 자는 것 같으며 아침에 돋는 풀 같으니이다. 풀은 아침에 꽃이 피어 자라다가 저녁에는 시들어 마르나이다. 우리는 주의 노에 소멸되며 주의 분내심에 놀라나이다.
(벧전 1:24) 그러므로 모든 육체(인생)은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인생은 이와 같이 헛것 같고 불면 날아가버리는 먼지와 티끌에 지나지 않으며 형체도 없는 그림자로서 빛이 오면 사라지는 존재에 지나지 않는다.
그가 아무리 힘이 있고 권력이 있다 할지라도 그 인생 역시 풀과 풀의 꽃과 같이 아침에 피었다가 저녁에 시들어 버리는 한 순간에 사라지는 꽃에 다름 아니다.
그런데 우리 사람들은 그런 약하디 약한 인생을 의지한다.
성경은 이렇게 말한다.
(사 2:22) 너희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 그의 호흡은 코에 있나니 수(壽)에 칠 가치가 어디 있느뇨?
풀과 같이 연약한 인생은 의지할 곳이 단 한 군데도 없다.
그의 호흡은 코에 있기 때문에 그 코로 숨을 들이마셨다가 내뱉지 못하면 그는 죽은 것이다.
그런 인생을 의지하려느냐, 하고 도전한다.
하지만 우리는 어떤가?
눈에 보이지 않는 법보다 주먹이 우선하는 것처럼,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보다 눈에 지금 보이며 나를 도와줄 수 있을 것 같은 사람을 더 의지하는 것이다.
블레셋의 왕과 수많은 군사들은 블레셋의 장수인 골리앗을 의지하였다.
그는 키가 무려 3m에 가까웠고 힘은 장수이며 웬만한 사람은 들지도 못할 큰 칼을 차고 완벽하게 무장을 한 자이다.
그 앞에 서기만 하면 자기 자신이 더 작아질 수밖에 없는 그런 위용을 자랑하는 자이다.
블레셋은 그런 골리앗을 앞에 세우고 이스라엘과 전쟁을 하려고 한다.
그런 골리앗 앞에선 이스라엘의 왕 사울은 마치 고양이 앞의 쥐와 같은 꼴이다.
어느 누구도 감히 골리앗을 상대로 하여 나서서 싸우고자 하는 사람이 없다.
사시나무 떨 듯이 그렇게 떨고만 있을 뿐이다.
그 때 어린 소년 다윗이 나타나 내가 나가서 싸우겠노라고 한다.
블레셋은 기골이 장대하고 힘이 있는 골리앗을 의지하여 싸우지만, 다윗은 자기 자신은 비록 힘이 없고 연약하지만 오직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을 의지하여 나아간다.
(삼상 17:45) 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 이르되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나아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
다윗이 믿는 여호와는 죽은 신이 아니라 살아 계신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어떤 자를 사랑하고 어떤 사람을 도와주시겠는가?
두 말해 무엇하랴?
당연히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켜 행하는 자 곧 복종하여 쉐마하는 자를 사랑하시고 그를 도와주실 것은 명약관화한 일이다.
아무리 키가 크고 기골이 장대하며 그를 상대할 사람이 없다 할지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 것도 아니다.
다윗이 물맷돌을 던져 그의 이마를 맞춘 것은 다윗의 능력이나 기술이 아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그의 믿음을 보시고 골리앗을 넘어뜨리신 것이다.
오직 야곱의 하나님을 자기의 도움을 삼으며 하나님께 자기의 소망을 두는 자는 복이 있음을 알게 하는 장면이다.
나는 사실 이런 믿음을 제대로 가져본 적이 없음을 고백한다.
나의 믿음이란 지식적이요 머리로만 가지고 있던 자였으니 삶에서 이런 경험을 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러나 믿음은 이런 경험을 하는 것이 아니다.
다윗이나 성경의 수많은 인물들이 하나님을 경험한 일들은 사실이고 실재이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가 아니다.
이는 사실상 하나님의 온전하신 뜻을 드러내기 위한 예표일 뿐, 그것을 궁극적 목적으로 삼지 않는다.
이런 구약의 예표들을 통해서 또는 초대교회 당시 겉으로 드러나는 수많은 치유와 표적은 그 자체로 목적이 아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것이요, 나아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통한 생명의 표상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아무리 인생을 의지하고 도움을 받아 귀한 것을 얻었다 할지라도 그것은 쇠락의 법칙에 따라 금세 없어지고 사라지고 썩어질 것에 불과한 것이다.
사람에게 있어 목숨보다 귀한 것이 있겠는가?
아무리 금은보화를 쌓아놓고 살며 부러울 것 없이 떵떵거리며 산다 한들 목숨을 잃어버리면 무슨 소용이 있는가?
부자와 나사로의 이야기가 이것을 잘 설명하고 있다.
부자는 한 평생 호화로이(럭셔리하게) 즐기며 살다가 죽었다.
나사로는 그 부잣집 대문 밖에서 떨어지는 음식 쓰레기로 한 평생을 살았다.
그도 역시 죽었다.
이 둘은 이 세상에서 전혀 상반된 인생을 살았다.
그러나 부자는 그의 목숨을 전부로 생각하며 럭셔리 하게 살되 예수님 없는 삶을 살았지만, 나사로는 가장 비참하고 가난하게 살되 그의 심령에는 육신의 목숨보다 귀한 아들의 생명이 있었다.
이 둘이 한 날 함께 죽었을 때 그들의 그 결과는 극과 극을 이루었다.
나사로는 아브라함의 품에 안겨 하나님 나라를 누렸지만, 부자는 이 세상에서는 그렇게 호화로이 연락하며 살았을지언정 죽음 후에는 지옥에 들어가 견디지 못할 고통 속에서 나날을 보내고 있다.
중요한 사실은 그 부자가 이 땅에서 개무시하던 나사로를 얼마나 부러워했는가이다.
물론 이는 죽음 이후의 하나님 나라 곧 미래적인 하나님 나라를 말하고 있다.
나의 영생관이란 바로 이런 것에 지나지 않았다.
그래서 나도 죽으면 나사로가 갔던 그 천국에 들어가야 하는데, 만약 내가 죽어서 그 천국에 가지 못하면 어떡하지, 하는 두려움과 염려 때문에 잠을 이루지 못한 적도 있었다.
그렇다고 나의 삶이 온전히 변화되어 정말 예수를 온전히 믿게 된 것도 아니다.
나 역시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가까이 하기보다 눈에 보이는 땅의 것을 더 가까이 하며 살았던 자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인생의 한계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연단되어야 한다.
여기서 연단이란 그리스도의 성품을 닮아가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성품을 닮는 것은 곧 내가 작은 예수가 되는 것이다.
그저 교회에 나간다고 하여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작은 예수로서 내 안에 아들의 생명을 품고 살아갈 때 예수의 삶이 내 안에서 자연스럽게 나오게 되고 그리스도의 향기를 풍겨내게 되는 것이다.
나는 오늘도 그런 그리스도인으로 살기 원한다.
내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로되 오늘 주어진 하루의 삶에서 영적 하루살이가 되어 온 몸은 멀쩡하지만 거룩한 불구자로 주님의 기쁨이 되어 살기를 원한다.
* 묵상 후 기도
주님...
나는 호흡이 끊어지면 그의 생각이 소멸하고 마는 수(壽)에 칠 가치가 전혀 없는 인생을 의지하며 살던 자였음을 고백하나이다.
죽어서 천국에 가기는 원하였으나 정작 이 땅에서는 천국을 누리지 못하고 그저 육신의 즐거움을 탐하며 세상의 재미(fun)에 빠져 살던 자였나이다.
나보다 힘 센 사람을 의지하고 그런 자에게 도움을 요청하면 반응이 빠르기에 나의 눈과 귀는 거기에 민감하게 반응하였나이다.
주님...
이제 주의 말씀 앞에서 나의 실상을 보게 되오니 나를 심판하시되 주의 징계로 쳐서 아담의 생명이 아니라 아들의 생명으로 살아 주님과 연합하게 하소서.
나의 믿음이 겉으로만 인정받는 것이 아니라 우리 주님께 인정받는 참 믿음이 되게 하시어 날마다 속사람이 강건하게 하옵소서.
우리 주님을 의지하되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존재로 임하신 주의 말씀 앞에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대하게 하시고 그 말씀이 살아계신 하나님이심을 온전히 믿음으로 주의 뜻을 날마다 이루어가는 주의 종이 되게 하소서.
언제 끝날지 모르는 코로나 사태로 인하여 많은 사람들이 힘들어하고 있습니다.
나 또한 몽골에 들어가야 하는데 코로나로 인하여 들어가지 못하고 있나이다.
하오나 이 코로나로 인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주님의 생각을 읽게 하시고 불평과 불만이 아니라 어떠한 상황과 환경 속에서도 주를 찬양하며 주의 주되심을 노래하는 주의 자녀들 되게 하소서.
교회의 존재 목적을 알아 눈에 보이는 것에 천착하지 않게 하시고 오직 아들의 생명을 전하는 참된 복음을 전하는 이 시대의 교회되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