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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시설장애인자립생활지원네트워크는 장애인생활시설에서 살던 장애인이 탈시설해 지역사회에서 자립하도록 지원하는 주거복지사업을 지난 2010년부터 3년 동안 진행했다. 그리고 지난해 12월 12일 이번 사업을 마무리하는 보고대회를 열고 이날 총 16명의 자립생활 과정을 생생히 담은 인터뷰집 '나 자립했다'를 발간했다. 이번 책에 실린 이들의 인터뷰를 연재한다. _ 편집자 주
20년을 산 시설, 내겐 의미없는 곳
국진 씨는 인터뷰 장소로 광화문역 ‘장애등급제·부양의무제 폐지’ 농성장을 택했다. 인터뷰 장소로 농성장이라니, 각종 집회에서 꾸준히 보였던 그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매주 금요일마다 농성장을 지킨다며 금요일 낮 1시에 광화문역 농성장에서 만나자고 했다.
인터뷰 약속이 있던 금요일, 그런데 어쩐 일인지 연락이 닿지 않았다. 어쨌든 약속했던 농성장에서 그를 기다렸다. 오늘은 볕도 좋으니 광화문역 근처 야외 카페에서 인터뷰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다행히 휠체어 접근도 가능한 곳이 있다.
약속했던 1시가 조금 넘은 시간, 마침내 그와 연락이 닿았다. 국진 씨 활동보조인이 국진 씨와 같이 사는 박현 씨 활동보조도 함께하고 있는데 박현 씨 전동휠체어 바퀴가 펑크나 집에서 움직일 수가 없다고 한다.
그렇다면 그의 집에서 인터뷰하자고 했다. 탈시설 후 자립생활해 사는 이의 집이 내심 궁금하기도 했다.
국진 씨는 자양시장 근처에 있는 빌라에서 지난해 1월부터 음성꽃동네에서 같이 나온 박현 씨와 함께 살고 있었다. 집은 휠체어 이용 장애인 두 명이 살기 적절하게 출입구에서부터 각 방, 화장실까지 문턱이 모두 없었다. 거실은 휠체어 두 대가 이동하기 편하게 공간을 비워두었고, 화장실 문은 여닫이문이 아닌 미닫이 블라인드 문으로 설치되어 있었다.
국진 씨와의 인터뷰는 다섯 시간가량 그의 집에서 이뤄졌다. 인터뷰를 마무리할 때쯤 그에게 넌지시 물었다.
“지금 지난 20년의 시간을 돌이켜 봤을 때, 그 시간이 어떻게 기억되세요?”
잠시 침묵. 그의 찡그린 미간에 힘이 들어갔다.
“내 인생의 반을 거기(시설)서 지냈지만 참 의미 없었다. 먹을 거 주면 먹고 안주면 안 먹고. 잘 때 되면 자고. 그런 게 참 의미 없었다.”
윤국진, 서른일곱 해의 세월 중 스무 해가량을 시설에서 살았다. 시설은 새벽 5시에 일어나 아침밥을 먹고 11시 반에 점심을, 4시 반에 저녁을 먹는 곳이었다. 똑같은 시간대에 똑같은 삶, “오늘이 어제 같고 내일이 오늘 같은” 곳이었다. 무엇보다 가장 싫은 것은 “먹기 싫은데 나중을 생각해 꾸역꾸역 먹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먹을 것이 없기에 먹기 싫어도 있을 때 먹어야 했다. 그게 끔찍이 싫었다고, 그는 말했다.
그에게 어렸을 적 이야기부터 청했다. 시설에 맡겨지기 전 가족과 함께 살았던 이야기, 시설에서의 생활, 자유로운 생활을 꿈꾸게 된 이유, 자립생활을 하기 위해 겪었던 숱한 갈등들, 그리고 마침내 ‘배고플 때 밥 먹을 수 있고 배부르면 안 먹을 수 있는’ 자립생활을 하게 된 지금-여기의 삶까지.
시설에서 나오기 위해 여동생과 겪었던 갈등에 관해 이야기할 때엔 여전히 마음이 힘들어 보였다. 그는 “아직도 용서가 안 된다”고 했다. 힘든 이야기를 할 때면 잠시 그때의 기억을 더듬듯, 마음을 고르고 언어를 고르듯 미간에 힘을 주었고 시선은 한 곳에 고정되었다. 그렇게 잠시의 침묵. 침묵 속에서 그의 복잡한 마음들이 수런거렸다.
경기도 성남에서 자란 국진 씨는 열다섯 살에 시설에 입소했다. 1990년 5월 12일의 일이었다. 그전까지는 엄마, 아빠, 남동생 두 명에 여동생 한 명과 함께 집에서 살았다. 그러나 집이 어려워지면서 부모님은 이혼했고 아버지는 보증을 잘못 서 감옥에 가게 됐다.
그 후, 국진 씨와 형제들은 어느 아주머니 손에 맡겨졌다. 국진 씨를 돌봐주던 아주머니는 “여기 있으면 동생들도 너도 힘들지 않냐. 좋은 시설이 있는데 거기 가서 사는 게 어떻겠냐”며 그를 설득했다. 국진 씨는 자기 때문에 동생들이 힘들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시설에 가자, 그는 정했다. 그러나 그는 시설이 그런 곳인 줄 몰랐다. 시설에 들어간 처음 며칠 동안은 매일 밤마다 울었다. 오늘이 어제 같고 내일이 오늘 같은 삶, 평생을 이렇게 살다가 죽는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팍 막혔다.
그러던 중 2003년, 국진 씨는 시설 내 수녀님의 소개로 한국뇌성마비장애인연합회(현재 한국뇌병변장애인인권협회, 아래 한뇌협)에 가입하게 된다. 이 활동은 국진 씨가 자립생활을 하게 된 디딤돌이 됐다.
“한뇌협에서 영상을 하나 봤는데 장애인들이 집회하면서 경찰하고 막 싸우더라구요. 어우, 놀랬죠. 그런데 나랑 별로 다르지도 않은 것 같은데 누구는 저렇게 싸우고 나는 지금 뭐하고 있는 거지? 그런 생각이 들더라구요. 나도 나가야 되겠다. 나도 저렇게 살아봐야겠다! 이렇게 사는 게 다가 아니구나. 다가 아니다…”
한뇌협 교육을 받으며 국진 씨는 나가야겠다고 결심했지만 그를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그럼에도 국진 씨는 나가고 싶었다. 피노키오장애인자립생활센터 체험홈을 신청했다. 그러나 무산됐다. 자립생활 교육을 받기 위해 1주일에 한 번씩 서울에 가야 했지만 도와주는 사람 없이 혼자 나갈 수 없었다. 그 후에도 광진장애인자립생활센터(아래 광진센터) 체험홈, 민들레장애인야학 체험홈 신청 등 자립생활에 대한 그의 시도는 계속됐다. 그러나 가족의 거센 반대 등으로 번번이 무너졌다.
가족과의 인연보다 소중하고 절실했던 탈시설
2009년 어느 날, 탈시설운동을 하는 장애와인권발바닥행동(아래 발바닥행동) 쪽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꽃동네로 차를 보내 줄 테니 한 번 더 나오라는 것이다. 그전에도 발바닥행동 도움으로 국진 씨는 몇 번 외출을 한 적이 있었다. 일찍이 탈시설하여 살고 있는 배덕민 씨 집에 놀러 갔을 때 당시 발바닥행동 김정하 활동가를 소개받은 인연이 계속 이어져 오고 있던 거였다.
“그때 현이(박현 씨)도 나름 자립생활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현이도 같이 나갔죠. 그런데 그때 김정하 씨가 ‘사회복지서비스 변경신청이란 게 있다, 대부분 모르고 있는 법인데 네가 한 번 끄집어내지 않겠냐’ 하더라구요. 혼자 하면 힘드니깐 같이 할 사람이 필요하다 길래 현이랑 같이 하게 됐죠.”
2009년 12월, 박현 씨와 그는 음성꽃동네가 있는 음성군청에 사회복지서비스 변경신청서를 냈다. 신청서에는 ‘시설이 아닌 지역사회에서 살고 싶으니 음성군청은 그에 맞게 사회복지서비스를 바꿔 달라’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국진 씨의 요구는 사회복지사업법에 따른 정당한 권리였다. 그러나 음성군청이 변경 신청을 거부하면서 소송으로 이어졌고, 국진 씨는 소송에서 패소했다. 이때를 떠올리며 그는 “장애인이 지역사회에서 나오기 어렵구나, 아직 이 사회는 거기까진 힘들구나 깨달았다”고 토로했다.
2010년 4월, 행정소송에 앞서 노들장애인야학에서 이에 대한 기자회견을 했다. 그리고 국진 씨는 그날 이 사실을 시설 측에 알렸고 시설은 발칵 뒤집어졌다. 이 사실은 이내 곧 국진 씨와 박현 씨 가족에게도 알려졌다. 그러나 가족들은 이들의 자립생활을 반기지 않았다. 박현 씨 어머니는 시설에 찾아와 이들의 소송을 말렸다.
“현이 엄마가 현이한테 그러는 거예요. ‘너 소송 포기 안 하면 가족인연 끊겠다.’ 그런데 현이는 엄마한테 맞아가면서도 포기 안 했어요.“
이 소식을 들은 국진 씨네 가족도 그가 시설에서 나오는 것을 만류했다. 국진 씨 핸드폰으로 여동생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여동생은 “계속 소송을 진행하면 연락 못 하게 핸드폰을 끊겠다”고 했다.
“동생들이 극구 반대하는 게, 난 괘씸한 거죠. 솔직히 제가 시설에 들어간 게 지들 힘들까 봐 였는데 시설에서 20년 동안 아무 말 안 하고 살았으면 됐지, 나오겠다는 데 찬성은 못할망정 왜 반대를 하냐! 거기서 용서가 안 됐던 거지, 그게 용서가 안 됐던 거지….”
국진 씨가 바랐던 것은 동생들의 반대가 아니라 동생들의 지지였다. 그래서 더욱 용서되지 않았다. “핸드폰을 끊겠다”는 여동생의 말이 국진 씨에게는 “연락을 끊겠다”는 말로 이해됐다. 그 말이 국진 씨는 너무 아팠다. 그리고 여전히 상처로 남아있다.
가족들이 시설로 종종 면회 올 때마다 국진 씨는 몇 년 전부터 수차례 ‘나가겠다’며 자립생활에 대한 의지를 보였었다. 그때마다 가족들은 그에게 물었다.
“나와서 어떻게 살 건데? 위험할 때마다 어떻게 대처할 건데?”
그 질문에 국진 씨는 차마 답할 수 없었다. 어떻게 답해야 할지 몰랐다. 하지만 지금은 답할 수 있다.
“지금은, 119 부르면 되지! 왜!”
그의 목에는 잔뜩 힘이 들어갔고 목소리는 당당했다.
“위험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몰랐던 거죠. 시설에선 그런 걸 못 겪어봤으니깐. 위험에 노출이 안 되어 있으니까. 아니, ……남들 보기엔 위험한 게 없다, 그 생각이 많죠. 그런데 산다는 게 매번 위험에 노출되어 있는 거 아니에요? 길 가다가 언제 차가 덮칠지도 모르고, 머리 위에서 뭐가 떨어질지도 모르고. 나만 위험한 거 아니잖아요. 남들도 다 위험한데 나한테만 왜, 위험에 어떻게 대처할 거냐 물으면, 내가 어떻게 답해요?”
나도 이제 집 있다! 집이 있다!
국진 씨는 소송이 진행되는 동안 박현 씨와 사회복지공동모금회 지원으로 진행되는 주거복지사업을 신청했다. 사업에 대한 정보는 배덕민 씨와 발바닥행동 활동가들의 도움이 컸다. 필요한 서류들을 준비해 3월에 신청하고, 5월에 지역사회 내 자립생활을 체험하는 4박 5일 체험프로그램에 참여했다. 평소 드라마와 영화를 좋아했던 국진 씨는 그때 처음 영화관에도 가봤다. 기간이 끝난 후엔 면접이 이뤄졌다.
“시설에 있으면 걱정 없는데 왜 나오려고 해요?”
그들은 국진 씨의 자립생활 의지에 대해 물었다.
“사람은 누구나 사람답게 살 권리가 있잖아요. 나도 그렇게 살아보고 싶어요. 공과금 내는 기쁨, 나도 느껴보고 싶어요.”
국진 씨는 답했다. 인간답게 살아보고 싶다고. 그리고 한 달쯤 지나 선정이 되었다는연락이 왔다. 드디어 시설을 나가 살 수 있게 됐다.
주거복지사업을 진행하는 활동가들이 국진 씨와 박현 씨가 살 집을 알아봐 주었다. 두 개의 집이 후보로 떠올랐다. 하나는 원룸이었고, 다른 하나는 지금 사는 집이었다.
“형, 나 방 따로 쓰고 싶어.”
박현 씨는 각자의 공간을 갖길 원했다. 국진 씨도 그에 흔쾌히 동의했다. 시설에 있을 때는 감히 꿈도 꿀 수 없었던 나만의 공간을 갖게 됐다. 나의 집, 그리고 그 안의 나만의 공간. 원룸이 아닌 지금 사는 집을 택한 이유다.
시설에서 나오기 3개월 전, 국진 씨는 자립생활에 꼭 필요한 활동보조도 신청했다. 활동보조를 신청하기 위해서는 장애등급 재심사가 필수적이었다. 시설마다 다르나 그가 있던 시설에서는 다행히도 병원까지 가는 이동비와 장애등급 심사를 위해 필요한 병원 검사비를 모두 지원해주었다. 그리고 시설에서 나오기 전, 5개월 동안 공부해 초등검정고시에도 합격했다. 그렇게 국진 씨는 박현 씨와 함께 자립생활을 위한 준비를 하나, 둘씩 해나가고 있었다.
“나온다고 말했을 땐 덤덤했는데 나가는 날짜 정해지고 나니 며칠은 겁나더라구요. 내가 나가서 잘 살 수 있을까. 못하면 꽃동네로 다시 들어와야 하는 거 아닐까. 돌아오면 속된 말로, 쪽 팔릴 텐데.”
2011년 1월 28일, 꽃동네 앞으로 두 대의 차가 왔다. 20년 동안 살았던 시설을 떠나는 국진 씨의 짐은 간소했다. 갈아입을 옷 몇 개와 이불 몇 개, 그리고 국진 씨가 아끼는 PMP가 그의 짐의 전부였다. 그 길로 지금 사는 집에 도착했다. 너무 좋았다. 정말, 너무 좋았다.
“야, 우리 집이다! 우리 집! 나도 이제 집 있다! 집이 있다! 여기서 2년 먹고 산다!!”
주소를 음성꽃동네에서 광진구 자양동 자신의 집으로 옮겼다. 주소를 옮기며 주민센터에 가서 기초생활보장수급권도 신청했다. 그해 4월엔 집들이도 했다. 발바닥행동, 광진센터, 그리고 소송을 도와줬던 사람들을 초대했다. 그렇게 국진 씨의 자립생활은 시작됐다.
자립생활과 동시에 수급비와 활동보조를 지원받을 수 없기에 첫 달엔 주거복지사업에서 지원되는 정착금으로 생활비 50만 원과 임시 활동보조를 지원받았다. 그 후, 복지부로부터 국진 씨의 활동보조 시간이 나오면서 광진센터를 통해 활동보조인을 중개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활동보조 시간을 조절하는 것과 활동보조인과의 관계맺기는 국진 씨에게 결코 쉽지 않았다. 그리고 턱없이 부족한 활동보조 시간은 국진 씨의 자립생활을 지원하기엔 역부족이었다.
국진 씨가 처음 받은 활동보조시간은 복지부에서 주는 100시간이었다. 한달 동안 하루에 3시간 정도를 사용할 수밖에 없었고, 한달 이후에 서울시에서 주는 80시간을 합쳐 총 180시간이었다. 180시간이면 한 달 30일을 기준으로 하루 6시간 정도 사용할 수 있다. 그런데 처음엔 이 시간을 조절하지 못했다.
“당시 활동보조인 말만 듣고 그 사람한테 180시간을 다 줬어요. 그런데 그 활동보조인이 일주일에 주말 이틀은 쉬어야 한다는 거예요. 다른 사람들도 다 그렇게 한다고 해서 그렇게 했죠. 그런데 그럼 나는 일주일에 이틀은 활동보조 없이 생활해야 하잖아요. 그게 엄청 힘들었죠.”
결국 국진 씨 활동보조가 없는 이틀 동안은 박현 씨 활동보조인이 국진 씨 활동보조까지 맡게 됐다. 반대로 박현 씨 활동보조가 없는 이틀은 국진 씨 활동보조인이 박현 씨 활동보조 역할까지 하게 됐다. 이 문제로 활동보조인들도 힘들어하며 활동보조를 그만두게 됐다. 박현 씨는 “형, 나 괜히 나왔나 봐, 시설에 다시 가면 어떨까”, 국진 씨에게 토로했다. 힘들어하는 박현 씨 모습을 지켜보는 국진 씨 마음도 애가 탔다. 그러나 국진 씨도 힘들었다. 활동보조인이 없는 시간 동안 배변을 참아야 하는 게 특히 그랬다. 자립생활 했으니 활동을 해야 하는데 집에 누워있는 시간이 많았다. 갑갑했다.
후에 서울시에서 추가로 20시간을 더 줬다. 총 200시간이 됐지만 여전히 부족했다.
그럼에도 부족한 공부를 더 하고자 2011년 7월부터는 노들야학에 나가게 됐다. 그러나 부족한 활동보조시간과 불안정한 활동보조인과의 관계로 꾸준히 나가지 못했다. 야학에 다니면 교육지원으로 활동보조를 10시간 더 준다고 해서 주민센터에 가서 신청했다. 그런데 그때, 광진구청장이 복지 관련 예산을 삭감한다는 소식이 들렸다. 광진센터는 구청장과의 면담자리를 마련했다. 그 자리에 국진 씨와 박현 씨도 함께했다. “활동보조 예산은 절대 삭감하면 안 된다”고 요구했다. 이때의 인연으로 국진 씨와 박현 씨는 운 좋게(?) 광진구로부터 10시간이 아닌 93시간 지원을 받게 됐다.
그로써 국진 씨는 현재 한 달 총 293시간 활동보조 시간을 받고 있다. 그리고 그해 9월부터 활동보조인이 바뀌면서 활동보조인과의 관계도 안정적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그때 만난 활동보조인이 현재 활동보조인이다. 어느덧 1년이 넘었다.
책임 따르는 자유, 나는 내가 지킬 거야
자립생활 2년 차, 활동보조 문제도 힘들었지만 그를 더욱 힘들게 한 것은 ‘돈’ 문제였다. 나와 살려니 모든 게 다 돈이었다. 국진 씨는 “돈 문제가 가장 힘들다”고 했다. 현재 국진 씨는 수급비와 장애인연금을 합쳐 총 58만 원을 받는다. 그 중 25만 원은 나중을 위해 저금한다. 집을 사기 위해 주택청약도 들었다. 나머지는 생활비로 쓴다. 주로 식비와 집 관리비로 나간다. 관리비는 한 달에 많이 나오면 7, 8만 원, 날이 추운 겨울엔 16만 원까지 나온다. 그래도 그는 “세금을 내니 나도 대한민국 시민이구나 싶다”며 빠듯한 살림에도 세금 내는 것을 진심으로 좋아했다. 이러한 그의 삶에 큰 위기가 닥친 것은 작년 5월이었다.
“뜬금없이 주민센터에서 전화 와서 수급비 15만 원이 깎인대요. 왜냐고 물으니 아버지 소득이 많이 잡혀서래요. 아버지한테 연락했어요. 내 수급비 깎인다는 얘기에 다행히 아버지가 일을 금방 그만뒀는데, 그런데 이거 나라가 잘못된 거 아니에요? 왜 멀쩡한 일자리를 그만두게 만드냐고. 아버지랑 나랑 같이 사는 것도 아니고 따로 살고 있는데. 그리고 아버지가 날 부양하는 것도 아니고.”
부양의무자 기준에 걸려 국진 씨는 작년 5월부터 8월까지 15만 원이 깎인 43만 원을 받았다. 아버지는 그 후 막노동 등의 일을 하며 산다고 했다. 국진 씨도 아버지의 안부를 정확히 알지는 못했다. 그럼에도 서로에게 부양의무가 있는 법적 가족이라는 이유로 서로의 삶을 위태롭게 했다.
탈시설 후, 국진 씨는 바쁜 날들을 보내다가 지금은 잠시 쉬는 시간을 보내고 있다.
“원래 월·화·금요일엔 야학 가는데 이번 학기엔 휴학 중이에요. 금요일 오후엔 광화문 농성장 가거나 이음센터에 가요. 이음센터(탈시설한 당사자들이 만든)활동가들이 탈시설한 장애인들을 대상으로 역량강화훈련을 하거든요. 일요일엔 교회 가고.”
그가 이렇게 다양한 활동을 할 수 있는 데에는 전동휠체어의 도움이 컸다.
“자립생활해서 처음엔 수동휠체어 탔는데 내 마음대로 못 움직이니 자립생활 하는 의미가 없는 거예요. 그런데 전동 타면 내가 가고 싶은 곳, 가고 싶은 방향으로 갈 수 있으니 그게 다르죠. 그런데 신청할 때 엄청 힘들었어요.”
국진 씨는 신청 후, 반년을 기다려 올해 3월에서야 전동휠체어를 받을 수 있었다. 그는 현재 자신의 신체에 맞게 휠체어를 개조해 턱으로 운전한다.
탈시설 후 바쁜 나날을 보내다가 잠시 쉬는 이유는 올해 말로 끝나는 주거복지사업 때문이다. 그는 아직 새로 이사 갈 곳을 찾지 못했다. 어렸을 때 학교에 가지 못해 배우지 못했던 영어, 수학, 국어 등을 배울 수 있는 야학을 잠시 휴학한 이유도 그 때문이다.
“불안해서 공부도 집중 안 될 것 같고. 주거가 불안하니 삶이 정말 불안해요. 그런데 길바닥에 나앉아도 시설엔 안 들어갈 거예요. 시설에서의 삶은 아무리 생각해도 정말, 그건 아니에요. 두 번 다시 들어가기 싫어.”
그는 단호하게 말했다. 국진 씨는 기본적인 욕구조차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시설에서의 삶을 거부했다. 배부르면 안 먹을 수 있고 배고프면 먹을 수 있는 자유, 그러나 이러한 기본적인 자유마저 박탈된 삶. 자립생활 이야기가 나올 때면 국진 씨는 자립생활의 좋은 점으로 “내가 먹고 싶을 때 먹을 수 있는” 일상에 관해 이야기했다. 그러한 순간이 시설에서는 없었노라고.
어쩌면 그가 집회에 적극 참여하는 이유도 그러한 이유와 맥이 닿아있는지도 모른다. 국진 씨는 집회를 “자신이 필요한 것에 대해 직접 요구할 수 있는” 공간이라고 말했다.
“시설에선 내가 먼저 달라고 요구할 수 있는 입장이 안 되잖아요. 누군가 내가 필요한 걸 해주길 바라고만 있어야 하는데 여기서는 내가 필요한 것을 요구할 수 있으니깐, 시설에서의 삶과 너무 다르죠. 의무감, 책임감이 있어요. 집회에 나가다는 건 ‘내가 필요한 게 있다’고 목소리를 내는, 그런 의미가 있는 것 같아요.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으니깐 괜히 힘도 나고.”
그의 이야기를 들으니 자립생활이라는 게 결코 만만치 않다는 생각이 든다. 그는 “자립생활이란 책임감”이라고 했다.
“책임을 져야 해요. 못해도 내 탓, 잘 돼도 내 탓. 그 결정은 내가 했으니깐.”
자유가 있기에 택할 수 있고 내가 결정했기에 결과 또한 오롯이 나의 몫임을 그는 알고 있었다.
긴 인터뷰가 끝날 무렵, 국진 씨는 박현 씨와 활동보조인과 함께 저녁을 시켜먹었다.
“가끔 시켜 먹는 것도 나쁘지 않죠. (웃음) 매 순간순간 내 선택권이 있다는 게, 그게 참 행복해요. 내가 선택해서 내 의지로 할 수 있다는 게. 이런 것들이 없다가 있으니깐, 새롭죠. 그런 순간들이 강하게 와요.”
저녁으로 시킨 뜨거운 우동이 식기를 기다리며 그가 배웅해준다. “안녕히 가세요.”, “네, 국진 씨, 저녁 맛있게 드세요, 다음에 또 만나요.” 인사를 남긴다. 그 인사말 아래에 국진 씨의 건강한 자립생활을 응원하는 마음을 진심으로 담아 전해본다.
인터뷰 후기 그의 긴 인터뷰가 고맙다. 인터뷰를 하며 내 마음 아래가 단단해져 왔다. “책임을 져야 해요. 못해도 내 탓, 잘 돼도 내 탓. 그 결정은 내가 했으니깐.” 이 말이 오래도록 남아있다. 하나의 진리처럼. 시설에 가기 전 열다섯 해의 삶, 시설에서 살았던 스무 해의 삶, 그리고 시설을 나온 오늘의 삶까지, 분절되었던 그의 생이 하나의 삶으로 엮어지는 순간 같았다. 그는 ‘자유’가 무엇인지 몸으로 알고 있었다. 집에서 시설로, 그 역시 그것이 사라져버린 후에야 선명히 그것을 알게 되었는지 모른다. 그리고 그것을 되찾은 지금, 분명히 알고 있었다. 어떠한 것을 택할 수 있는 자유, 그에 따른 선택, 그리고 그 선택의 결과로 오는 것들 또한 내 자유의 영역이라는 것을. 이 하나의 사실이 그의 삶의 궤적과 함께 엮어지며 새삼 뜨겁게 다가왔다. 삶의 매 순간 우리는 무엇이든 택할 수 있고 그렇기에 그다음으로 나아갈 수 있다. 그 의지로 그는 또 이다음의 삶을 단단히 살아가리라. 웅크리고 그의 이야기를 깊게 듣고자 했다. 온 존재를 기울여 듣고자 했고 그 이야기를 잘 담고 싶었다. 그러나 이곳에 차마 담아내지 못한 이야기들이 더 많아 그저 아쉽다. 국진 씨는 참, 매력적인 사람이다. 그가 그토록 바라는 어여쁜 연인이 조만간 생기길 응원해본다.
글 강혜민 장애인인터넷 신문 ‘비마이너’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