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술밖에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그동안 잘 참고 살아 오셨네요 이 정도면 많이 아팠을텐데...
어짜피 짐작은 했었고 그말을 듣게 될 것이라 예감은 하고 있었지만
그래서 엄마로부터 '니 아부지가 많이 아프다,기어다닌다..'란 말을 들었을 때 벌써
온 몸으로 감지하고 있었던 그것을 막상 의사의 입을 통해 듣는 순간 나도 모르게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자기공명 촬영한 사진을 말없이 한참 들여다보던 의사를 향해 어떤상태시냐고 물으며 침묵을 깬 내 물음에
담당의가 들려준 답이였다
부모님들께서 몇 마디 나누시고나서 일단 엄마랑 아부지 좀 나가 계시라고 말을 하고는
의사에게 말을 건네려는데 목소리가 떨리고 눈물부터 앞을 가려 말이 쉽지가 않았다
엄마와 웅이 녀석과 아부지..이야기를 했다
듣고 있던 의사역시 남감하고 안됐는지 말이 조심스러웠다
일단 가서 형제들과 의논하고 올테니 일주일분 진통완화제를 처방해 달라고 하고 진료실을 나와
생각하니 어짜피 그 방법이 최선의 방법이라면 선택의 여지가 없는데 미루면 뭐하겠나 싶어 입원일과
수술 날짜를 잡아 예약접수까지 마치고 어짜피 일주일분의 약은 필요할 성 싶어 처방 받아 돌아오늘 길이 참으로 착찹했다.
.........
"아부지가 뭔 고생을 했다고 허리가 아프당가? 당신 손으로 노력해서 단 한번도 식구들 먹여 살려본 적도 없는데
뭘 했다고 아부지가 허리가 아프냐고.."
하며 속상해 하던 동생의 말이 다시 귀를 때리고 있었다
니가 생각하는 그 생각 나도 언니도 마찬가지고 불쌍한 생각도 우리나 너나 다름없다는 것 다 안다..
미치도록 불쌍하다가도 화가 나기도 할테지만 어쩌겠냐..부몬데..
"알아~다 아는데, 당연하다고 생각하는데도 아부지가 밉네야.."
그래..그래도 아픈데 어쩌겠냐 이미 지나간 지난일 돌아갈 수도 없고 일흔 넘은 아부지한테
어찌 해달라고도 할 수 없는데..지금 네가 생각하는 그 생각 그대로 하고 살지 않으면 맘 편하지 못하는게 또한 우리잖냐..
정말 이젠 좀 그만했으면 싶은 원망도 들지만...그 많은 감정들과 생각들로 자식들 맘 복잡하고 심란하게 만드는 아부지가
미워도 어쩌겠냐...
기어다닐 정도시라면 수술밖에 방법 없을 것 같다..
요추나 경추 어디쯤 신경이 많이 눌리는걸꺼야 일단 검사해보고 결과 따라 나중일은 생각해보자..
낸들 왜 맘이 시리지 않겠는가
언니가 돼서 아래동생과 같이 상한 맘대로 내비칠 수 없어 울음을 삼키자니 가슴이 매워 자꾸 눈물이 올랐다
병원을 예약해 두고 며칠 후 올라오시겠단 부모님께 무조건 올라오시라하여 인하대병원을 찾았다
문진하고 엑스레이를 찍고
자기공명 촬영을 하고 어제 그 결과를 확인할 겸 내원을 했었다
담당의의 입에서 그 말이 떨어지는 순간 숨을 쉬는게 뻑뻑한 소릴 냈다
내 얼굴에 흐르던 눈물을 아버진 보았을까?
살면서 다른 사람 앞에서 눈물 쉬 비친 적 별로 없는 나인데도 나의 모질음이 방패막이가 되지 못한 채 막막하던 그
만감들...
작년 한 해동안만해도 5월에 엄마의 교통사고 때문에 그 후휴증으로 내내 자식들을 시골을 오르락거리며
힘들고 고달팠었다..그럼에도 어느 누구 불평 한 마디 없었다
장남다운 남동생의 의연함에 맘이 편안해지고 올케가 얼마나 고맙던지..
사고낸 오토바이 주인이 너무 착하고 불쌍하다고 아픈 몸으로 퇴원해버리고
당신 의료보험 카드로 진료받으러 다닌다는것 알고 (우리네들은 이미 엄마가 그렇게 하고 말 것이란것 알고 있었지만)
엄마한테 원망스러움이 들기도 했지만 그리해야 당신 맘이 편할 것이란 것 알기에 또한 모른 척
...결국 성치못한 허리 통증을 호소하셨고 가을들어서면서 어지럼증을 호소하시는 통에
모시고 올라와 근처 병원에서 MRI촬영을 했었다.
그저 사람좋은 단순한 생각에 자식들에게 얹어지는 짐의 무게는 잊으시는 부모님...
다행히 염려스런 일 없이 경한 것이란 말을 듣긴 했어도 믿을 수 없는 엄마의 몸 때문에 그것을 카피해서 인하대병원을
찾았었다
의료수가가 많이 올라 내원할때 느끼는 중압감이 컸지만 내색할 수 도 없었고 그것에 대한 생각을 품음마저
부모에 대한 온당치 않은 처사 같아서 하고 잊는다
태어나서 병원을 자주 드나들다보니 반 의사는 되어 있는 듯한 착각이 들 때도 있고
의사랑 실갱이 벌이는 일도 생기고..
사진을 찍었으면 그곳 병원에서 진료받고 그곳 의사한테 처방을 받으면 되지 대학병원을 찾았느냐며
노골적으로 궁시렁 거리는 모가지 뻣뻣한 그 의사의 처사에 은근히 뭉개버리고 싶은 울화가 치밀어 오르는데
불편한 엄마가 곁에 계셔서 함부로 말을 낼 수 없어 가만 있으니
이 양반이 우리같은 사람때문에 의료보험제도가 어떻구 쩌쩌구...순간 엄마의 주머니 속에서 울리는 핸드폰 소리를 핑계로
혈압오르신 엄마 밖으로 나가시고(물론 엄마도 아신다 그런곳에서 전화 벨 켜두는 것 예 아닌것도 알고 받는것이
실례임도 그럼에도 속상함을 그리 표현하심을 알기에..잡지 않았다)
이 때다 싶어 한바탕 내질렀다
의료보럼 제도니 뭐니 그렇게 고차원적으로 생각하기 전에 병원 드나드는게 재미있어 오는 이들도 없거니와
할 일이 없어서 이렇게 일이분도 채 못되는 시간 의사 얼굴 한 번 보려고 기십만원이 넘는 돈 들여 여길 찾는 줄 아느냐~
카피뜬거요? 솔직히 그곳 병원이 십만원 이상 더 싸서 거기서 찍었습니다 그게 적은돈이 아니거든요.
그리고 그곳에서 면담했던 닥터에게 인하대 병원 내방할 것이니 카피 좀 해도 되겠냐고 묻고 가져왔습니다
의사선생님의 실력을 못믿고 어쩌고를 떠나서 저희엄마 몸이 온전치 못해서 못미더워서 말입니다.
...중반부쯤에서 꼬랑지 슬쩍 내리고 비로소 내 얼굴 제대로 쳐다보며 어투가 달라지던 그의 얼굴이 떠오른다.
병원을 무시로 드나들면 연명하시는 부모님들 덕분에 자식인 내가 굳어지고 거칠어지고 ...
나 중학교 일 학년 무렵 아버지는 위궤양으로 고생하던 13년의 세월을 마감하며 위가 터져버렸었다
그리고 우리의 보잘것 없는 가산들은 그 수술비로 버려졌고
누추한 짐보따릴 챙겨들고 떠난 낯선곳에서 감옥같은 어둡고 비좁은 단칸방 생활을 하다가
겨우 꿰맞춰 둔 내장이 견딜만하니 아버진 알콜중독자가 되셨고
인생과 생활을 팽개쳐버린 아버지 대신 엄마는 밤낮없이 일에 치여 결핵과 늑막염으로 쓰러졌다
내 중 3년쯤이였을 것이다 그때가..
그리고 다음해 대도시 어디쯤 방직공장에가서 돈이나 벌길 바랬던 아버지와 악다구니를 쓰며 싸워서
나는 헌 교복에 헌 가방에 헌책들을 얻어 인문계 고등학교에 진학을 했었다.
공부할 틈을 주지 않았던 부모님들 덕분에
전기요금 나온다며 십 촉짜리 백열전구마저 맘대로 켤 수 없게 하던 아버지와, 온가족이 곤한 잠에 취한 후에서야 겨우
이미 방송이 끝난 흑백텔레비젼을 켜서 소릴 죽여놓고 베게를 무릎에 올려두고 노트를 들추곤했다
부모님으로부터 책 한 권 노트 한 권 받아본 기억이 없다
태어나 이날까지 아버지의 손으로부터 단 돈 십원 하나 받아본 기억도 없다
내가 기억하는 아버지는 늘 아팠고 술에 취해 있었고 나와 고래고래 소릴 지르며 싸웠던 것들이 거반이니..
그런 나와 아버지 사이에서 엄마가 얼마나 힘들었을지..알면서도 멈출 수가 없었다
어느날인가 교통사고라도 나주길 빌다가 그런 못된 생각을 품은 나를 또 견딜 수 없어 교회당을 찾아
한없이 눈물을 흘리다 지쳐 잠이 들었던 나의 이십여년의 세월들이 나를 얼마나 담금질한 것이였던가..
그래서 난 지난날을 잘 더듬어 가질 않는다
한 번 돌아선 것에 눈길 주는 법도 별로 없다
지나간 것에 미련두는 것을 잘 하지 못한다
고 1학년 진학하고 한 학기도 끝나지 않았을쯤..엄마가 쓰러져버리고 말았다
그쯤 광주의 대기에선 늘 매쾌한 최루가스냄새가 머물러 있었고 기독병원흉부외과에 병상을 찾이한 엄마는
그나마 단 한 번도 편하게 누워 잠도 자지 못할만큼의 심각한 상태로 베게를 서너개쯤 쌓아올려두고
고개를 수그린 채 가슴을 기대고서 쪽잠을 자고 깨기를 번복하고 있었고...
어린 다섯 동생들과 남겨진 난...아버지 자리와 엄마의 자리를 동시에 메워대야만 했었다
열 일곱 살 어린 여자애가 맞선 세상은 너무 힘겨운 것이였다
누구에게 손내밀곳도 없고
울며 하소연해 볼 사람도 없고
...의료보험 제도가 극히 극소수에게만 시범적으로 막 시행되기 시작했던 모양인지
다니던 교회 여전도사님이 사방팔방으로 어찌해볼양으로 어지간히 애닳고 돌아다니셨던 것을
한참 후에나 알았다
엄마의 병실에서도 간병보단 아버진 술에 취해 휘청거리던 때가 더 많아서
병동 간호사들이 어느날엔가 엄마에게 다른곳에 좀 숨어 계시라고 했던 모양이다
병실에 와서 엄마가 없는데도 찾는대신 그 침대에 누워 취기를 풍기는 아버지에게
"아저씨 술드시는게 속상해서 아줌마가 없어지셨다고 우리가 찾고 있는데 못찾았다고
아저씨 술 좀 그만 드시고 아줌마 좀 찾아보세요.."
"냅두쇼~ 아프면 오겠지라우.."
기독병원 바로 뒤에 위치한 수피아여고에 다니던 내 친구애 하나가 점심시간마다 엄마를 찾아와
손잡고 기도해주고 간병을 해줬었다..그 아인 목회자의 아내가 되었단 소문을 들었다
(사는일에 치여 그런 친구에게 안부 놓으며 살 여유도 없었다는게 얼마나 맘아픈 일인지..)
무던히도 지루하고 버겁던 그 해 엄마는 입원과 퇴원을 댓번이상 반복하며 집과 병원을 오르내리셨었다
학업을 계속하다간 동생들마저 제대로 공부를 할 수 없을 것 같아 내가 포기하고자 했을때
일단 하는데까지 해보자고 말씀해 주셨던 선생님들의 말씀이 얼마나 고마웠던지...
내 형편 아시니 지각 조퇴 밥먹듯 해도 눈감아 주셨고 은근슬쩍 참고서도 챙겨주셨고...힘내라며 어깨를 토닥거려 주시던
나의 은사님들...
"솔직히 말씀 드리겠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방법을 찾아봐도 아줌마께 현재로써는 가망이 없다는 말 밖에 할 수가 없어서
..그동안 몇 차례 퇴원 시켰던 것은 그동안 아줌마께서 돌아가시리라 생각했었기 때문입니다..
죄송합니다 수술도 할 수 없습니다...확률이 너무 희박합니다.."
그때 막내동생 나이가 세 살이였다..
아버지는 있어도 어린 동생들 건사하고 걱정하는 것은 내몫이였고 주말이면 엄마의 병실을 찾아 오가는게
힘들었기에 외지에서 돈벌이를 하고 있었던 언니를 내려오게 하였다
농사지을 때도 머슴보다 심하게 일을 하고 물지게를 져나르며 일벌레로 살아야했던 내 언니의 삶이라고
고달프지 않았을까..
이렇게 맘아프게 할 거면서 뭐하러 자식새끼들은 이렇게 많이 났는지 엄마 아부지가 미워죽겠다며 울던
언니의 그 아픈 모습을 잊을 수가 없다.
천사같은 언니의 입에서 나온 그 한탄이 얼마나 맘을 아리게 하는 것인지...
어쨌건 엄마는 수술을 성공적으로 마쳤고 거의 일년여의 병원생활을 마치고 그 해 크리스마스 이브날에
우리를 놀래켜주고 싶은 마음에 연락도 없이 퇴원을 했었다
교회에서 엄마 소식을 듣고 집으로 내달려간 나의 어린 동생들은 엄마의 앙상한 손을 붙들고 웃다가 울다가...
그동안 있었던 일들을 밤새워가며 한없이 풀어내고 또 쏟고..
도저히 어린 두 남동생을 잘 챙겨줄 수 없어서 막내는 고모댁으로
바로 위 연년생의 머슴아는 삼촌댁으로 보내뒀다가 보고 싶어 데리고 왔던날..
그 어린 두 녀석이 보자마자..부둥켜안도 "형아야~동생아~"하면서 울어대는 통에 독한 나마저 펑펑 눈물을 쏟아야 했다
'그래, 내 뻐가 부서져도 형제들 뿔뿔이 흩어지는 일은 없게 만들자..'
...어린 딸 자식도 그런 맘을 다지고 있는데 내 아버지..가망없단 의사말에 새장가 들 궁리를 하셨었다..
회복도 채 되지 않은 몸으로 엄마가 다시 식당일을 시작하셨을때도 아버진 여전히 밥알은 입에 대지도 않은 채
술독에 빠져 살았고
새벽부터 술에 취하면 하루 왼종일 자식들을 닥달해대는게 일과였다
추운 겨울날 밖에서 일을 하다 방구들에 온기를 느낄라치면 방안에 있다고 나무래시고
바깥을 맴돌면 또 그런다고 뭐라시고
밥을 먹을 때도 단 한 번도 편한 밥을 먹게 해주지 않았던 탓에 다들 주눅이 든듯 눈물 짜며 사는 날이 잦았고
성질 괄괄한 나만 바득바득...대들며 기들 쓰고 반항을 했었으니 집안이 늘 살얼음판이였다
남의 일엔 천리길도 마다않고 수고비 한 푼 안받고 일사천리 해결해주고 불평 한 마디 하는 법 없던 아버지는
가장으로 아버지로써는 빵점..아니 완전 마이너스..
어느날인가는 내 기를 꺽어버리고 말겠다는 작심을 하셨던지 언니와 함께 탁구장(위탁받아 봐주던)에 있던
내게 식칼을 들도 쫓아오셨었다
죽여버리겠다고...
차라리 누군가 나를 죽여주기라도 했음 싶어서 고달픈 인생살이 마감하고 싶었던 내게 두려운게 있을리 만무한것을..
언니의 그 놀란 얼굴...그때부터 아버지가 나를 어려워 하셨나?...
동생들의 학비를 대는 일과 가사를 돕는(생업전선이 맞겠다 아마도)일에 치여 살던 나의 청춘은 비린내마저
품어본 기억이 없다
하루에도 몇번씩 그 지옥같은 곳으로부터 탈출해버리고 싶었지만 내가 등돌리면 조금은 편해질
죽으면 썩을 육신덩어리와는 별개로 마음이 편치 못하리란 것과 그것이 더 힘든 것이 될 것을 알았기에
외면하지도 못하고..
우리 일곱 남매중 맨 아래 두 녀석만 빼고 아버지가 고등학교 진학을 시키지 않으려 한 바람에 늘
한바탕씩 회오리가 몰아치곤 했었다
공부밖에 살 길이 없다고 매달리는 악착같은 자식들에게 어찌 그리 모질고 무정할 수 있었을까?
언니를 가르치던 선생님들이 찾아와 아버지께 너무 아까운 아이라고 그러면 자기가 데리고 먹는것 자는것은 하게 해 줄테니
진학 시키자고..그렇게 찾아 다니는데도 끝끝내 외면을 하시던 아버지..그리고 어머니..
말 대답 한 마디 못하는 동생들을 대신해서 난 늘 악당이 됐었다
시집가고 장가들고 때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동전 단 한 닙 당신들 주머니에서 나오는 일 없었고 모은 것들에서도 떼주고 가고 싶어 안타까워하는 자식들에도
여덟자 장롱 따위는 사지 말아라
텔레비젼 같은것 왜 사야 하느냐 라디오만 사라 세탁기가 왜 필요하냐..(결국 언니랑 난 세탁기 같은것 없이 결혼을 했었다)
언니 결혼 앞두고 아버지랑 내가 세번쯤 뒤집어 졌었던가?
2001년부터 사년간에 걸쳐서 엄마가 협착증으로 1번~5번까지 척추를 세 번에 걸쳐 수술을 받으셨다
아버진 단 한 번도 간병이란걸 해 본 적이 없으시다
2차 수술 받으시고 경과가 상당히 좋았던 엄마는 시골에 내려가신 후 무거운 짐들을 들어올리며
함부로 몸을 써버리셨고 다시 찾아온 통증에 재입원 또 수술...이여야 했을 때도
그나마 고마운게 한 땐 나 혼자 져야했던 많은 짐들을 다 자란 형제들이 지들 몫을 스스로 알아서 챙겨주고
채워준다는 것...
그럼에도 이상한 일은 사람은 각자 타고난 몫이 다르고 받은 복이 다르긴 한 모양인지
몸 움직이고 육신을 써야 하는게 내 분량인지 그런것은 늘 내 담당일 수 밖에 없는 변함없는 현실...
단 한 해도 놀라지 않고 지나간 적이 없단 생각이 든다
걸핏함 쓰러져 입원한 아버지..(몇 번은 초상치를 준비하면 상복입고 하향..) 와 엄마..
수술이란 명분으로 요번에 아버지가 수술대에 오르면 벌써 큰 수술만으로도 여덟번째..
오래전 술을 끊은 아버지 그나마 고맙고 조금만 일찍 그러하셨었으면 싶은 불평도 일었지만
어쨌건 양친이 살아계심만으로도 감사하며 살아가는 우리 형제들...
이젠 좀 편안하게 살았으면 좋겠다
아니 조금만 쉴 틈을 주셨으면 좋겠다
까맣게 잊고 살았는데 너무 싫고 아파서 돌아보고 싶지 않은 지난 날들을 아버지 때문에 몇 날 동안 후비고 다녔다
잠을 잃은 채...
내 아버진 모르기나보다
이렇게 한으로 멍들어버린 자식의 마음이란 것을 짐작도 못하시나부다
그나마 우리네들 이리라도 사는게 다 당신 덕분이라신다
지난날 그렇게 살았기 때문에 지금 이렇게들 살아가는 거라신다..
언니나 나..불평 불만 터놓는 사람들이 아니라 고달파도 가슴 에이게 살아도 내색없으니
이 시린 세상을 얼마나 처절하게 살아가는지 짐작도 못하시는가부다...
나도 이젠 마흔줄을 넘어 내 감싸안고 가야할 새끼들과 내 노년을 생각하며 살아야 하는데
자식들이 당신네들 그리하는게 마땅하다 믿으신다
"나 수술하면 자네는 그냥 집에 있소"
그럼 누가 병구완 하고라?
"자식들이 하것제~까짓것 뭐 힘든거나 있는가?"
"어떤 놈이 할 놈이 있소? 다 남의 돈 받고 사는 애들, 새끼들 어린 애들 뿐인데 누가 허것소?
간병이 그렇게 쉬운 줄 아요?..."
이렇게 세상을 잘 모르신다 내 아부지는.
늘 누군가에 기대서 사시느라고,늘 받아 누리시느라고 당연한 줄 알고 모든게 쉬운 줄만 아신다.
엄마가 아프시면 자식들 있는데 데려다만 주면 되는 줄 알고 사시고
자식들은 당연히 그래야 하는 줄만 아신다
당신 마누라 아파서 쓰러져도 들쳐업고 병원으로 내달릴 궁리를 먼저 하지 못하시는...
당신이 아프면 엄마가 병원 따라가 약봉지까지 챙겨다 주는, 남들도 다 그렇게 사는 줄로만 아신다
내 육신을 써야 내 새끼들 먹고 입히고 고르치고 나를 세울 수 있는 언니와 나의 형편을
그만큼 생각하지 못하신다
당신이 줄 것도 없으시면서도 기도저축도 못해주신다..
일흔 넘도록 그리 사신 것을 이제서 무엇을 어찌할까만
마땅히 해야할 자식의 도리와 측은한 맘을 내치려는 원망을 퍼내느라 이렇게 자식들 고달프게 만드시는 내아부지..
그럼에도 오늘 난 다시 새벽 무릎을 꿇는다
내 아버지를 불쌍히 여겨달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