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이 '스피드 코리아'를 만들었나
"멀리 보자"… 삼성, 13년간 빙상에 121억 지원
밴쿠버 동계올림픽 초반 한국 남녀 스피드 스케이팅 선수들이 깜짝 '대박'을 터뜨린 뒤에는 삼성이란 '숨은 공신'이 있다. 삼성은 14년째 한국 빙상계를 소리없이 지원하고 있다.
박성인 밴쿠버 동계올림픽 한국선수단장은 대한빙상경기연맹 회장직을 1997년부터 맡으며 이번 '롱트랙' 종목에서 금밭을 일궈낸 총 책임자. 잘 알려지지 않은 그의 또다른 직함은 삼성전자 상근 고문(삼성스포츠단 총괄)이다.
삼성그룹 홍보실의 정혜림 차장은 지난 2월 17일 "1997년 당시 이건희 회장이 후원자가 거의 없는 비인기 종목이던 빙상을 도와주라고 지시한 걸 계기로 박성인 단장이 회장을 맡게 됐으며 지금까지 연맹에 약 100억여원을 지원했다"고 말했다.
빙상연맹의 김태완 과장은 2월 18일 기자와의 통화에서 "따져 보니 지난 14년째 삼성으로부터 총 121억원을 지원받았다"고 말했다. 그는 삼성이 매년 평균 7억~8억원가량을 연맹에 보내줬고 동계올림픽을 전후해서는 더 신경을 썼다고 말했다.
2004년 이후 연맹의 1년 예산은 적게는 22억원(2005년), 많게는 35억원(2009년)이다. 예산 중 국고지원금이 가장 많았고, 이외에 상당액을 차지하는 삼성의 지원금이 빙상연맹에는 큰 '군자금'이 됐다. 경기력 향상을 위한 해외 전지 훈련을 활발하게 할 수 있었고 일류 코치의 영입도 훨씬 손쉬웠다.
쇼트 트랙은 한국이 워낙 강세 종목이라 올림픽에서도 이름값을 떨치며 효자종목으로 군림했다. 하지만 스피드 스케이팅은 4년 전만 해도 역대 올림픽에서 은메달 1개(김윤만 1992년 1000m), 동메달 1개(이강석 2006년 500m)가 고작이었다.
삼성화재에서 빙상연맹에 파견된 이치상 사무국장은 밴쿠버 현지에서 기자들과 만나 "삼성의 지원이 아니었다면 이런 훌륭한 결과가 나오기는 어려웠을 것"이라며 "이 기운이 쇼트 트랙과 피겨 스케이팅에도 이어져 최고의 성적을 얻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같은 삼성의 지원을 바탕으로 빙상연맹은 2005년 스피드 스케이팅과 피겨 스케이팅에서도 금메달을 따자는 '밴쿠버 프로젝트'를 수립했다. 이후 지난 해까지 5년간 총 139억원의 예산을 투입했다.
2009년 경우엔 대표팀에만 1년 예산 35억원 중 60%인 21억원을 쏟아부었다. 연맹의 '밴쿠버 프로젝트'에는 스피드 스케이팅에서 남·녀 500m 금메달이 목표였다.
그런데 모태범(21)과 이상화(21·이상 한체대)가 남녀 500m에서 금메달을, 모태범이 1000m에서 은메달을 따고 이승훈(21·한체대)이 남자 5000m에서 아무도 예상 못한 은메달까지 따내 목표는 이미 100% 달성한 셈.
스피드 스케이팅 대표 선수들은 1년 내내 태릉과 해외를 오가며 훈련을 한다. 스피드 스케이팅 대표팀 김관규 감독은 밴쿠버 경기장에서 기자들을 만나 "선수단이 한번 해외에 나가면 20명 정도가 가는데 그 사람들 비행기값만 해도 얼마가 되겠나.
그런데도 연맹에서 돈 걱정 없이 쉬지 않고 계속 훈련할 수 있도록 해줬다"고 고마워 했다. 여름 전지훈련 등을 통해 체력과 기술을 개선시키고 겨울 시즌에는 각국을 돌며 세계 톱클래스 선수들과 경쟁을 하며 실력향상이 이뤄졌다.
김 감독은 "북한에도 좋은 선수들이 많지만 지원이 없다보니 실력이 늘지 않는다. 만약 우리도 많은 대회에 참가하지 않았다면 북한과 같은 수준이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그 결과 한국은 최근 몇 년 새 이규혁·이강석·이상화 등이 월드컵 시리즈나 세계스프린트선수권에서 연거푸 우승을 하며 '스피드 코리아'라는 경쟁력을 갖추게 됐고 밴쿠버에서 화려한 결실을 맺게 됐다.
밴쿠버 프로젝트 2005년 가동
삼성과 빙상연맹 측은 스피드 스케이팅의 밴쿠버 쾌거가 2018 평창 동계올림픽 유치에도 도움이 될 것으로 내심 기대하고 있다. 이번 '롱트랙' 종목에서 메달 획득으로 한국은 '쇼트트랙만 강국'이라는 주위의 눈총을 확실하게 불식시켰고 김연아가 추가로 피겨에서 메달만 따낸다면 분위기는 크게 달라질 것이란 전망이다.
실제로 현지에서는 많은 IOC 위원들이 한국의 맹활약에 깊은 인상을 갖게 됐다는 얘기도 들린다.
삼성은 또 1998년 나가노 대회부터 솔트레이크·토리노에 이어 밴쿠버까지 4회 연속 올림픽 공식 파트너로 참여하고 있다. 삼성전자는 이번 밴쿠버 올림픽에서 캐나다의 전설적인 아이스하키 영웅 웨인 그레츠키를 비롯한 캐나다 아이스하키 최고 스타들로 구성된 '팀 삼성(Team Samsung)'을 홍보대사로 선정해 이들을 통해 올림픽 기간 동안 다양한 올림픽 마케팅 활동도 펼치고 있다.
삼성은 빙상 외에도 레슬링·배드민턴·육상·승마 등 소위 비인기 종목을 꾸준히 지원해 온 것으로 유명하다. 여기엔 이건희 전 회장의 '비인기 스포츠종목 육성론'이 한몫했다.
이 전 회장은 1978년 제일모직 여자탁구단을 창단할 때 "중공(중국)을 꺾으려면 지금부터 자질 있는 어린 유망주들을 찾아 10년은 투자해야 한다"고 강조했다고 한다. 그래서 발굴한 선수가 양영자. 당시 제일모직 탁구단 총감독이던 박성인 단장이 양영자를 지도했다.
세계선수권과 아시안게임에서 종종 중국의 아성을 허물던 양영자는 현정화와 짝을 이뤄 마침내 1988년 서울올림픽에서 중국을 꺾고 여자복식 금메달을 차지하게 된다. 이 전 회장이 대한레슬링협회장을 맡은 15년 동안 한국 레슬링은 4차례의 올림픽에서 7개의 금메달을 목에 걸기도 했다.
기아차는 간접 광고 효과로 '재미'
삼성과는 별개로 올림픽 공식 후원사는 아니지만 스피드 스케이팅 대표선수들을 '남몰래' 후원한 기아자동차도 홍보 효과를 톡톡히 누리고 있다. 대표 선수 후원을 본사가 아닌 네덜란드 대리점(딜러) 차원에서 시작한 것도 특이하다.
네덜란드 대리점은 2004년 스피드 스케이팅이 유럽에선 인기 있는 겨울 스포츠 종목이란 점을 중시, 각국의 스타급 또는 유망 선수들을 개별적으로 후원했는데 거기에 우리나라 대표선수들을 포함시킨 것.
지금은 기아차 유럽법인과 네덜란드 판매법인이 공동으로 후원하고 있지만 이번에 메달을 딴 모태범·이상화·이승훈 선수가 모두 해당된다. 이들은 이번 올림픽에서는 기아 로고가 들어간 유니폼을 착용할 수 없지만, 과거 이들이 기아 유니폼을 입고 출전했던 세계선수권대회나 월드컵시리즈 장면이 방송에 자료화면으로 자주 노출되면서 뜻밖의 광고 효과를 보고 있다.
기아차 관계자는 "우리 국가대표 선수들이 메달을 따는 데 일부나마 도움을 준 것에 큰 보람을 느낀다"고 말했다. 또한 기아차는 대표팀 맏형 이규혁 선수가 기아 로고가 찍힌 유니폼을 입고 질주하는 모습을 담은 기업 PR광고를 올림픽 기간 중 내보내고 있는데 대표팀 선전으로 동반 상승 효과를 보고 있다고 즐거워하고 있다. ▣25일 주간조선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