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철 金鍾鐵 (1880 ~ 1917)】 "박화암 의병부대 참여, 강원도 일대에서 의병 활동"
1880년 3월 24일 경상북도 봉화(奉化)에서 태어났다. 의병 활동으로 붙잡힐 때는 경상북도 봉화군(奉化郡) 물야면(物野面) 가성리(佳城里)에 거주하고 있었다. 본명은 김종환(金鍾桓)·(金鍾煥)이며. 이명으로 김광옥(金光玉)·김종철(金鍾鐵)이 있다.
1907년 8월경 박화암(朴化巖) 의병부대에 투신하여 활동하다가, 인제 지방의 관포수(官砲手) 100여 명을 영입하여 의병부대를 재편성하였다. 활동 지역은 강원도 인제(麟蹄)·삼척(三陟)·강릉(江陵)·홍천(洪川) 일대였다. 1908년 2월경 일본군 양양수비대에게 붙잡혔다. 강릉으로 붙잡혀 가는 도중에 탈출하여 가족과 함께 정선(旌善)·삼척 등에서 숨어 살았다. 1909년 3월 봉화군 물야면 가성리로 이주하여 주막을 경영하면서 김종철이라 개명하였다.
1909년 9월부터 10월까지 전개된 일본군의 ‘남한대토벌작전’을 계기로 의병장이 되었다. 강원도에서 의병활동을 같이 한 동지들을 모아서 의병부대를 조직하였고, 강원도 원주(原州) 출신의 김종근(金鍾根)을 부장으로 삼았다. 그리고 강원도 각처에서 친일 관리와 밀정 등 부일배를 처단하였고, 투쟁역량 강화를 위해 군자금과 군수품을 모았다.
1910년 (음)3월 10일 김문도(金文道)와 김중삼(金仲三) 등 부하 의병들과 강원도 인제군 내면(內面) 소한리(小閑里)의 친일 면장 김시원(金時元)을 처단하려고 그의 집에 갔는데, 부재중이자 집을 불태웠다. (음)5월 30일 김국서(金國瑞) 외 의병 4명과 함께 무장하고 강원도 인제군 기린면(麒麟面) 서리(西里)에 거주하던 일진회 회원 엄윤문(嚴允文)을 처단하였다.
1913년 11월 15일 이종서(李鍾西) 등 의병 3명을 데리고 강원도 강릉군 연곡면(連谷面) 퇴곡리(退谷里) 유동(柳洞)에서 군자금 등을 모집하였다.
1915년 3월경 강원도 횡성(橫城)·인제·홍천·평창(平昌) 일원에서 활동하던 의병장 김종근(金鍾根)·용해준(龍海俊)·오중수(吳重守) 등과 함께하였고, 그 부대의 의병장이 되었다. 1915년 5월 8일에는 김종근·장명수(張命壽)·김원실(金元實)·정대성(鄭大成) 등과 함께 홍천군 두촌면(斗村面)에서 군자금을 마련하였다. 같은 해 6월 6일 강릉군 연곡면 장천리(長川里)에서 의병을 밀고한 박군팔(朴君八)을 총살하였다. 8월 11일에도 김용원(金熔源)을 비롯한 의병들을 이끌고 강릉군 연곡면 송천리(松川里) 이치령(泥峙嶺)에서 군자금을 갹출하였다. 이러한 활동 중에 붙잡혔다.
1916년 7월 31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살인방화, 강도상인 및 강도죄로 사형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여 항소하였으나 1916년 11월 29일 경성복심법원에서 기각되어 형이 확정되었다. 1917년 4월 19일 서대문감옥에서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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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철 사형 확정 보도(『매일신보』 1916. 9. 29) [판형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