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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광조)
그가 조정에서 활약한 기간은 겨우 4년이 채 안 되었으나, 그 사이에 그는 조선 역사에서 빼 놓을수 없는 인물이 되었다.
조선에서 조광조(趙光祖)처럼 불과 4년 만에 여러 관직을 두루 거쳐 대사헌까지 오른 인물은 일찍이 없었으며, 그때 그의 나이 겨우 38세였다.
(에궁~아까비..)
조광조(趙光祖)는 젊은 시절 무오사화와 갑자사화, 중종반정 등의 사건들을 보면서 조선의 기강을 다시 세워야 한다는 명제를 품게 되었다.
즉 세조의 왕위 찬탈이나 연산군의 폭정 등이 모두 공자의 가르침을 실천하지 않은 왕과 신료들의 잘못 때문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힘을 얻기 시작한 조광조(趙光祖)는 사림(士林)의 선두가 되어 기신재와 왕실재정의 관리를 맡았던 내수사(內需司)의 이자놀이를 혁파했다.
기신재(忌晨齋)란 고려 때부터 내려온 궁중의 불교행사로 죽은 사람의 명복을 빌기 위해 절에서 지내는 재(齋)였다.
조선이 비록 숭유억불 정책을 시행하고는 있었으나, 왕실과 민간에는 아직도 불교가 광범위하게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사림파는 기신재를 혁파해 왕실의 비용을 줄이고, 가난한 백성들을 상대로 고리대금업을 한 내수사(內需司)에 제한을 가하려 했다.
기신재를 혁파한 조광조는 다음으로 소격서를 철폐하려 했다.
소격서(昭格署)는 나라에 천재지변이 일어났을 때 옥황상제와 노자에게 제사를 지내는 도교의 관청이었다.
(노자에게 빌면 노잣돈을 챙겨주려나? ㅎ)
조선 초부터 왕실에서는 왕실의 일원이 병이라도 나면 소격서(昭格署)에서
쾌유를 비는 제사를 수시로 지내곤 했다.
중종(中宗)이 소격서 철폐를 거부하자 대간들은 일제히 사직했다.
(워~매 간뎅이가 부은겨..)
소격서 논쟁은 정승들이 대간들의 편을 들어 철폐에 찬성하자 중종은 소격서를 철폐하고 말았다.
(뭬여? 칼을 뽑았으면 두부라도 썰었어야지~헌칼인듯?)
(서울 삼청동에 있는 소격서 터)
🌹 현량과(賢良科) 실시
승승장구 사림파들이 성리학적 질서를 세워가는 동안 조광조(趙光祖)는 조정의 실세로 떠올랐다.
그러나 훈구 대신들이 조광조를 견제하기 시작하자 조광조는 일시에 자기의 세를 불리기 위해 '현량과' 제도를 추진 했다.
현량과(賢良科)는 과거제가 아니라 추천제로 관료를 선발하는 제도였다.
과거제로 세를 불리자니 너무나 많은 시간이 걸려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어 찾은 대안이 '현량과'였던 것이다.
당시 중종도 훈구파와 맞설 세력을 키울 생각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조광조
(趙光祖)의 의견이 받아 들여져 중종 14년 천거된 120명을 심사해 28명이 급제 했다.
과거제도는 고려 광종 때 쌍기의 건의에 의해 중국으로 부터 도입 되어 조광조의 시대까지 중앙의 관리를 선발하는 유구한 역사를 가진 중요한 제도였다.
그러므로 이 제도에 근본적인 개혁을 시도하려는 노력은 지금까지 단 한번도 없었다.
따라서 이 제도를 근본적으로 바꾸려는 시도는 국가 지배체제의 핵심을 개혁하려는 대단히 과감하고도 위험한 시도였다.
자연히 그에 대한 반발도 심해 조정 내에서는 대립과 갈등이 격화되었으며, 조광조(趙光祖)는 현량과가 실시되던 해에 실각하고 말았다.
조광조(趙光祖)가 실각한 후 현량과는 폐지되었으며, 현량과를 통해 합격한 자들은 자격을 도로 빼앗기고 말았다.
(이룬~애기한테 주는 사탕도 아니고..좋다 말았군..)
🌹 토지개혁과 위훈삭제(僞勳削除)
당시 조선에는 노비가 전 인구의 1/3 정도나 되었다.
잘 나가는 집안은 노비가 1만명이 넘는 경우까지 있었다.
가난한 백성들이 흉년이 들어 호구를 해결할 수 없으면 스스로 부잣집의 노비로 들어가거나, 병역이나 세금을 회피하기 위해 노비가 되는 경우가 흔했기 때문이었다.
(흐음..배고픈 소크라테스 보다 배부른 돼지가 낫다는군~)
조선초에 토지개혁을 실시해 백성들이 일시 땅을 소유했었으나, 공신들이 급증해 땅을 점유하자 땅이 없는 백성들이 늘어났고 빈익빈 부익부가 심각한 사회 현상이 되었다.
그래서 조광조가 생각해 낸 방안이 위훈삭제(僞勳削除)였다.
즉, 공신들을 다시 심사해 아무런 공도 없이 공신이 된 자의 자격을 박탈해 소유한 땅을 환수하여 토지개혁의 성과를 거둘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중종 14년 대사헌이 된 조광조와 대사간 이성동은 위훈삭제의 칼을 빼어 들었다.
지금까지 나라에서 그냥 퍼준 넓은 땅에, 많은 노비에, 손가락 하나 까딱 않고 편히 잘 먹고 잘살던 공신들에게서 편안함과 부(富)를 몽땅 환수 하는 작업이니 반발이 얼마나 심했을까?
대간들의 위훈삭제(僞勳削除) 상소에 중종이 망설이자 대간들은 총 사직으로
맞섰다.(단결하나는 끝내주는군)
중종과 대간들의 힘 겨루기는 정승들이 조정하여 결과는 사림의 승리로 끝났다.
117명의 공신중 76명의 녹훈이 삭제된 것이다.
녹훈이 삭제된 공신들은 토지와 노비를 몽땅 국가에 반납해야 했다.
비록 사림파가 커다란 승리를 거머쥐었으나 그들의 집단행동과 뜻을 관철하려는 과격한 방법에 겁먹은 머저리 중종(中宗)은 이미 조광조에게 등을 돌리기 시작해 그를 죽이기로 결심했다.
(요런것을 보고 토사구팽(兎死狗烹)이라 했던가?ㅉㅉ)
훈구 공신들은 중종(中宗)의 이러한 의도를 눈치채고 조광조를 모함하기 위해 별 수를 다 썼다.
공신들 중 녹훈을 빼앗긴 심정과 남곤은 홍경주와 모의해, 희빈홍씨를 시켜 매일같이 조광조를 씹게 했다.
(이를 이불 속 송사라 하지?)
남곤은 더 구체적인 모함을 하기 위해 꿀로 나뭇잎에 '주초위왕(走肖爲王)'이라 쓰고 벌레가 파 먹게 했다.
'주초(走肖)'란 조광조의 한문 성인 '조(趙)'자를 파자한 것이고 '조씨가 왕이 된다'라는 뜻이다.
남곤은 벌레가 파 먹은 나뭇잎을 물에 띄워 대궐 안으로 흘려 보냈다.
'주초위왕(走肖爲王)'의 나뭇잎을 보자 점점 불안해진 머저리 중종은 홍경주를 통해 남곤과 심정을 만나 밀지를 내려 조광조를 비롯한 그 일파를 모조리 잡아 들이게 했다.
조광조(趙光祖)가 하옥되었다는 소문이 퍼져나가자 성균관 유생 천여명이 대궐 앞에 상소를 올리고 통곡 했다.
그 중 일부를 잡아 가두었으나 서로 갇히려 하는 바람에 옥이 좁아 더 가둘 수 없어 결국 사흘만에 모두 석방하고 말았다.
🎓 다음은 조광조의 죽음이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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