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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사여행자료 스크랩 대구읍성 돌의 채석장 팔달동
이장희 추천 0 조회 595 15.06.15 15:52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1736년(영조 12) 경상도관찰사 겸 대구도호부사 민응수가 축성하고 그 후 1870(고종 7) 경상도관찰사 겸 대구도호부사 김세호가 크게 중수한 대구 음성도 (그림의 붉은 선) 4대문과 2대 소문 4개의 누각이 있었다.

 1980년에 망우당공원에 복원된 대구읍성의 남문 (영남제일관)

관찰사 민응수가 직접 확인한 채석장 터(대구시 북구 팔달동) 아직도 남아있다.

경상북도 관찰사 서리 대구 군수 친일파의 거두 박중양이 1906년 조정에 보낸 철거보고서, 그러나 그는 이등박문의 후원으로 철거가 불가하다는 답이 내려오기 전에 철거해 버렸다.

 

1910년 경 읍성이 헐린 돌을 초석으로 지은 선교사 스윗즈 주택

 

선교사 스윗즈 주택의 초석, 브라운색으로 팔달동 채석장의 돌 색깔과 같다.

 

대구읍성 돌의 채석장 팔달동

1601년(선조 34) 경상감영이 대구로 옮겨오면서 대구가 영남지방의 수읍(首邑)으로 자리를 잡았다. 하지만 그 때까지만 해도 대구의 읍성(邑城)은 흙으로 쌓은 토성(土城)으로 그나마 허물어져 성의 기능을 할 수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1735년(영조 11) 경상도 관찰사 겸 대구도호부사로 부임한 민응수(閔應洙, 1684~1750)는 큰 고을을 지키는 성다운 성이 없다고 탄식을 하며 축성의 방법을 강구하니 모두 말하기를 성을 쌓는데 필요한 많은 양의 돌을 구하기가 어렵다고 했다. 이 때 민(閔) 감사가 스스로 찾아 채석할 곳을 발견한 장소가 오늘날 북구 팔달동 산14-1번지 일대 돌산이었다.

곧 조정에 건의하여 이듬해 1월부터 채석하여 6개월여 공사 끝에 둘레 2,650m(2,124보), 높이는 동북쪽이 3.5m(17척), 서남쪽이 3.8m(18척)으로 쌓고, 4대문 즉 동문(진동문, 鎭東門--동성로 제일은행 대구지점), 서문(달서문, 達西門--구 조흥은행 서성로 지점), 남문(영남제일관, 약전골목 네거리), 북문 (공북문, 拱北門--북성로 벽산 대구지점)과 동서에 2개의 암문 즉 동소문(東小門, 중앙파출소 앞)과 서소문(西小門, 서문교회입구 골목 앞)완성하였다.

축성을 주도한 민(閔) 감사는 직접현장을 돌아보면서 열심히 하는 사람에게는 상을 주고 개으른 사람들에게는 벌을 주었으며 농사철에는 농민들을 집으로 돌아가게 해 실농(失農)하는 일이 없도록 하고 모두 급료를 넉넉하게 주는 등 공정하게 지도 했다고 한다. 그해 11월 선화당에서 낙성식을 거행하니 식장에 모인 사람이 320여명으로 모두 기뻐하며 춤을 추며 완공을 기뻐했다고 한다.

성벽 전체를 돌로 쌓았으니 상당한 양의 돌이 채석되고 숙련된 석공들에 의해 다듬어졌을 것이며 또한 금호강을 건너야 하기 때문에 운반에 수고로움이 컸을 것이다.

이러한 과정의 대강을 기록한 빗돌을 1737년(영조 13)에 세우니 영영축성비(嶺營築城碑, 대구시 유형문화재 제4호)로 1980년에 복원한 읍성의 남문 영남제일관 앞에 있다.

그 후 1870년(고종 7) 역시 경상관찰사 겸 댁 도호부사였던 김세호(金世鎬, 1806~1884)가 대대적으로 수리를 하면서 4개의 문루(門樓) 즉 동쪽(정해루, 定海褸), 서쪽(주승루, 籌勝樓), 남쪽(선은루, 宣恩樓), 북쪽(망경루, 望景樓)을 세워 성을 더 아름답게 꾸미고 그 전말은 기록하고 비를 세우니 이 역시 현재 수성구 만촌동 산 83-5번지에 있는 영령축성비 옆의 수성비(修城碑, 대구시 유형문화제 제5호)이다.

이 두 목민관이 대구시민을 보호하기 위해 쌓은 성은 170년 동안 그대로 유지되어 오다가 1906년(고종 43) 친일파 경상북도 관찰사 서리 대구 군수 박중양(朴重陽)이 앞장서서 헐고 길을 내니 오늘날 성벽의 위치에 따라 이름이 부쳐진 동성로, 서성로, 남성로, 북성로가 그것이다.

성벽을 헐면서 나오는 돌은 길을 내는데, 자갈마당 등 저습지를 메우거나 선교사들의 사택, 계성, 신명 등 학교를 짓는데 썼다. 19세기 후반 프랑스 지리학자이자 민속학자인 바라(Varat)가 대구를 다녀가서 쓴 기행문에 의하면 ‘규모는 작지만 북경성 같이 아름다웠다고 했다.’ 대구는 6.25 참화도 없었으니 그대로 보전되었다면 세계문화유산감이 충분하다.

현재 대구시는 물론 시의회에서도 대구의 정체성을 찾기 위해 대구읍성의 복원을 주장하고 있다. 막대한 자금은 물론 이해 당사의 반발 등 여러 가지 어려움이 예상되지만 빠른 시일 내 복원되었으면 한다. 북구 팔달동의 채석장(採石場)은 아직도 많은 돌을 묻어 놓고 있다. 어쩌면 다시 쓰일 그날을 기다리고 있는지 모른다.

대구읍성 철거에 앞장선 박중양은 대구 공적 제1호로 지탄 받아야할 마땅한 인물이다. 그러나 그는 철저히 이중적인 인격을 보여 사소한 일로 일경(日警)에게 잡힌 사람을 풀어주는 등 미담이 알려지면서 일부 시민들에게는 존경 받았다.

사가 서거정이 노래한 대구 십경 한 곳인 침산(砧山)을 일명 ‘박작대기산’이라고 하는 것은 그가 노년에 이르러 침산 서쪽에 99칸의 대궐 같은 집을 짓고 지팡이 즉 작대기를 들고 소요하던 데서 비롯되었다.

처음 축성을 주장한 민응수는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여흥(驪興)으로 호는 오헌(梧軒)이며 아버지는 이조판서 진주(鎭周)이며, 어머니는 정상징(鄭尙徵)의 딸이다.

1710년(숙종 36) 사마시에 합격, 1715년 주부·정랑에 올랐고, 신임사화 때 사직하였다. 1724년 영조가 즉위하자 다시 정랑이 되고, 이듬해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 예조정랑·정언 등을 거쳐, 1726년 헌납·사간이 되고, 이듬해 교리를 지냈다.

정미환국으로 파직되었다가, 1728년(영조 4) 이인좌(李麟佐)의 난 때 호서안무사(湖西安撫使) 김재로(金在魯)의 종사관으로 군기를 엄정히 하는 등 공을 세워 동래부사가 되었다. 그 뒤 충청도·전라도 관찰사를 거쳐 부제학·대사간·형조참판 등을 차례로 역임하였다. 1733년 사은 겸 동지부사(謝恩兼冬至副使)로 청나라를 다녀왔다. 이듬해 대사성·대사헌이 되고, 경상도관찰사를 거쳐, 1737년 병조판서로 있으면서 당론을 제기한다 하여 파직되었다. 이듬해 평안도관찰사·대사헌·경기도관찰사 등을 역임하였다.

1740년 이조판서, 1743년 예조판서·판의금부사를 지낸 다음 1746년 형조판서를 거쳐 우의정에 이르렀다. 뒤에 이광좌(李光佐)·조태억(趙泰億)의 관작 추탈을 상소하다 면직된 채 죽었다. 글씨로도 이름이 높았다. 시호는 문헌(文憲)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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