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농담 같은 진실(문은진)
창세기 19장 14절은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하기 직전, 롯이 예비 사위들에게 하나님의 심판을
전하는 장면을 기록하고 있다. 천사는 롯에게 성이 곧 멸망할 것이니 가족들을 데리고 속히
떠나라고 명령하였다. 이에 롯은 약혼한 사위들에게 찾아가 하나님의 심판을 전하며 함께
피신할 것을 권했지만, 그들은 그의 말을 농담으로 여기며 믿지 않았다. 결국 롯의 가족만
간신히 성을 빠져나왔고, 남아 있던 사람들은 모두 불심판으로 멸망하였다. 이 사건은
하나님의 경고를 가볍게 여기고 믿지 않는 사람들의 비극적인 결말을 보여 준다.
성경은 이러한 모습이 소돔 시대에만 있었던 일이 아니라 모든 시대에 반복되어 왔다고
말한다. 노아 시대에도 하나님께서는 홍수 심판을 경고하시며 방주를 준비하도록 하셨지만,
사람들은 노아의 말을 비웃고 끝내 믿지 않았다. 애굽의 바로도 모세를 통해 전해진 하나님의
경고를 무시하다가 나라 전체가 큰 재앙을 당하였다. 반면 요셉의 해석을 믿었던 바로는
다가올 흉년을 미리 준비하여 백성들의 생명을 지킬 수 있었다.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준비하는 사람은 생명을 얻지만, 말씀을 농담처럼 여기는 사람은 결국 심판을 피하지 못한다.
본문은 마지막 때에도 같은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경고한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보다
세상의 가치와 욕망을 더 신뢰하며 회개하기를 거부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전쟁과 기근,
질병과 같은 어려움을 통해 사람들을 하나님께 돌아오도록 부르신다. 실제로 극심한 고난을
겪은 많은 사람들이 절망 가운데 하나님을 찾고 복음을 받아들이는 역사가 일어난다.
그러므로 성도는 환난이 오기 전에 더욱 말씀과 기도로 준비하며, 하나님께서 맡기신 사명을
감당해야 한다.
또한 세상은 언제나 진리를 조롱해 왔다. 노자는 『도덕경』에서 지혜로운 사람은 진리를
들으면 실천하지만, 어리석은 사람은 그것을 비웃는다고 말하였다. 성경 역시 하나님의
말씀을 비웃는 것은 인간의 교만과 무지에서 비롯된다고 가르친다. 욥도 수많은 고난 끝에
하나님을 만나 자신의 무지함을 깨닫고 회개하였다. 참된 지혜는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하나님 앞에 겸손히 나아가는 데 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사람은 자신의 죄를 깨닫고,
잘못된 길에서 돌이켜 생명의 길을 걷게 된다. 성령께서는 말씀을 깨닫게 하시고 삶을
변화시키셔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도록 인도하신다.
따라서 오늘날 우리도 하나님의 말씀을 단순한 이야기나 농담처럼 여기지 말아야 한다. 언제
닥칠지 모르는 심판과 재난을 기억하며, 지금 이 순간 회개하고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또한 기도와 말씀으로 자신을 준비하여 복음을 전하는 사명을 감당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순종하는 자를 보호하시고 은혜를 베푸시며, 그들을 통해 세상에 생명의
복음을 전하기를 원하신다. 그러므로 성도는 끝까지 깨어 믿음을 지키며 하나님의 말씀을
삶으로 실천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여호와의 사자
창세기 22장 12절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독자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고 명령하신 사건
가운데, 결정적인 순간에 여호와의 사자가 나타나 아브라함을 멈추게 하는 장면을 기록하고
있다. 이 본문은 단순히 아브라함의 순종만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의 사자'가
누구인가를 깊이 생각하게 만든다. 성경 전체에서 여호와의 사자라는 표현은 여러 차례
등장하며, 신학적으로도 오랫동안 연구되어 온 중요한 주제이다.
히브리어에서 천사는 '말라크'이며, 왕은 '멜레크'라고 하는데 자음이 같을 만큼 밀접한 의미를
가진다. 일반적으로 천사는 하나님의 뜻을 전달하고 성도들을 보호하며 섬기는 존재로
이해된다. 그러나 성경을 자세히 살펴보면 모든 천사가 동일한 의미로 사용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말 성경은 영어 성경의 'Angel'을 어떤 경우에는 '천사'로, 어떤 경우에는 '사자'로
번역하였다. 사람의 모습으로 직접 나타나 대화하고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경우에는 '사자'로,
꿈이나 환상 가운데 나타나는 경우에는 '천사'로 번역하는 경향이 있다.
모리아 산에서 아브라함을 만난 존재 역시 '여호와의 사자'로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이 사자는
단순히 하나님의 심부름꾼처럼 말하지 않는다.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알았다"라고 말하며 마치 하나님 자신이 말씀하시는 것처럼 행동한다. 이와 같은 모습은
창세기 32장에서 야곱이 씨름했던 존재에게서도 동일하게 나타난다. 야곱은 그분과 밤새
씨름한 후 그곳 이름을 브니엘이라 하며 "내가 하나님을 대면하였다"고 고백한다. 이는
여호와의 사자가 단순한 천사가 아니라 하나님의 권위를 가진 특별한 존재임을 보여 준다.
신약에서도 이 주제는 이어진다. 스데반과 바울은 모세가 율법을 받을 때 천사가 함께했다고
설명하는데, 이러한 기록 때문에 일부 학자들은 구약의 여호와를 천사로 이해하기도 했다.
그러나 성경 전체를 종합해 보면, 여호와의 사자는 하나님과 구별되면서도 하나님의 권세와
말씀을 그대로 나타내는 존재로 묘사된다. 많은 보수적인 신학자들은 이를 성육신 이전에
나타나신 예수 그리스도, 곧 '선재하신 그리스도'로 이해한다. 예수님은 베들레헴에서 처음
존재하게 되신 분이 아니라 영원 전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며, 구약에서도 사람들에게
나타나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이루셨다는 것이다. 또한 멜기세덱에 대한 말씀 역시 하나님의
아들을 예표하는 존재로 설명되며, 이러한 이해를 더욱 뒷받침한다.
이 말씀은 오늘날 성도들에게도 중요한 교훈을 준다. 우리는 단순히 예수님에 대한 지식을
전하는 사람이 아니라, 살아 계신 예수님을 직접 만나고 경험한 증인이 되어야 한다. 사도들이
예수님의 증인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그분과 함께 생활하며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기 때문이다.
따라서 교회가 가장 먼저 회복해야 할 것은 사람의 귀를 즐겁게 하는 메시지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중심으로 한 복음이다. 예수님은 임마누엘, 곧 우리와 항상
함께하시는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성도는 어떤 환경에서도 주님의 동행을 믿고 불의와
거짓 앞에 굴복하지 않으며, 하나님의 말씀 위에 굳게 서서 믿음으로 승리하는 삶을 살아가야
한다. 이것이 여호와의 사자를 통해 우리에게 주시는 가장 큰 교훈이다.
거룩한 그루터기
이사야 6장은 하나님께서 이사야를 선지자로 부르시는 장면을 기록한 매우 중요한 말씀이다.
우시아 왕이 죽던 해, 이사야는 나라의 앞날을 염려하며 하나님께 기도하였고, 그때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보좌를 보는 환상을 경험하였다. 성전에는 여섯 날개를 가진 스랍들이 하나님을
둘러서서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라고 찬양하고 있었으며, 그
장엄한 모습을 본 이사야는 자신의 죄와 부정함을 깨닫고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라고
탄식하였다. 그러자 스랍이 제단의 숯불을 그의 입술에 대며 죄가 사함을 받았다고
선포하였고, 이사야는 하나님의 은혜로 새로운 사명을 받을 준비를 하게 되었다.
이어 하나님께서는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라고 말씀하셨고, 이사야는
즉시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라고 응답하였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맡기신
사명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나님은 이사야가 말씀을 전하여도 백성들이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이는 하나님의 말씀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백성들의 마음이 완고하여 스스로 진리를 거부하기 때문이었다. 사람들은
말씀을 듣기는 원하지만 자신의 삶이 변화되고 죄에서 돌이키는 것은 원하지 않는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은 귀로만 들을 뿐 마음에는 받아들이지 않는다.
이사야는 "왜 나를 보내십니까?" 또는 "어떻게 해야 백성이 변화됩니까?"라고 묻지 않고
"주여, 어느 때까지니이까"라고 질문하였다. 하나님은 이 땅이 황폐해지고 백성이 흩어질
때까지 이러한 일이 계속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심판 가운데서도 하나님은 소망을
남겨 두셨다. 밤나무와 상수리나무가 베임을 당하여도 그루터기가 남듯이, 하나님께서는
거룩한 씨를 남겨 새로운 역사를 이루실 것이라고 약속하셨다. 이는 심판 속에서도 하나님의
언약은 결코 사라지지 않음을 보여 준다.
오늘날 교회도 이와 같은 현실을 경험한다. 사람들은 듣기 좋은 설교와 축복의 메시지는
좋아하지만 죄를 회개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며 예수님을 따르라는 말씀은 외면하려 한다.
어려움이 없을 때는 신앙생활을 잘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고난과 시험이 찾아오면 쉽게
하나님을 떠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하나님의 종은 사람들의 마음을 얻기 위해 복음을
변질시키거나 진리를 타협해서는 안 된다. 말씀 그대로 선포하고, 심판과 회개, 십자가와
순종까지도 온전히 전해야 한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에게 맡기신 사명이다.
비록 많은 사람이 진리를 거부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남은 자를 보존하신다. 엘리야
시대에도 하나님은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않은 칠천 명을 남겨 두셨고, 마지막 시대에도 거룩한
그루터기와 같은 믿음의 사람들을 통해 하나님의 역사를 계속 이루신다. 그러므로 성도는
세상의 유혹에 흔들리지 말고 말씀을 사랑하며 기도에 힘쓰고, 하나님 앞에서 끝까지 신실한
남은 자로 살아가야 한다. 거룩한 그루터기처럼 보이지 않는 곳에서도 믿음을 지키는 사람이
결국 하나님 나라의 새로운 역사를 이루는 주인공이 될 것이다.
번제할 어린양은 어디에 있습니까?
창세기 22장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독자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고 명령하신 사건을
기록하고 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에 즉시 순종하여 사흘 길을 걸어 모리아산에
이르렀고, 종들을 산 아래에 머물게 한 뒤 이삭과 함께 산 정상으로 올라갔다. 나무를 짊어진
이삭은 번제를 준비하는 데 필요한 불과 나무는 있는데 가장 중요한 제물인 어린 양이 보이지
않자 아버지에게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나이까?"라고 물었다. 이에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실 것이다"라고 믿음으로 대답하였다. 이 질문은 단순히 당시의
상황을 묻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드려지는 참된 제물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하는 중요한
질문이다.
오늘날 우리의 예배도 이 질문 앞에서 다시 점검해야 한다. 예배에는 찬송과 기도, 설교와
헌금이 있지만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제물은 형식적인 예배가 아니라 자신을 온전히
드리는 헌신이다. 헌금의 액수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 자신의 삶과 마음을 드리는
자세이다. 로마서 12장 1절에서도 바울은 우리의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는 것이 영적 예배라고 가르친다. 따라서 참된 예배는 외적인 형식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자신을 드리는 삶으로 완성된다.
이삭의 질문은 결국 자신에게 향한 질문이기도 했다. 그는 어린 양을 찾고 있었지만 실제로
하나님께서 요구하신 제물은 바로 자신이었다. 처음에는 이를 깨닫지 못했지만, 아브라함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되었을 때 그는 도망하거나 거부하지 않고 순종의 길을 선택하였다.
히브리서 11장은 아브라함이 하나님께서 반드시 예비하신 어린 양이 있을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모리아산에 올랐음을 보여 준다. 결국 하나님은 숫양을 준비하셔서 이삭 대신 제물로
드리게 하셨지만, 이 사건은 하나님께 대한 절대적인 믿음과 순종이 무엇인지를 보여 주는
대표적인 사건이 되었다.
본문은 또한 입다의 딸의 이야기를 통해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는 헌신이 무엇인지 설명한다.
입다의 딸은 아버지의 서원을 듣고 자신의 생명을 아까워하지 않고 기꺼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였다. 이처럼 하나님께 자신을 드리는 사람은 생명보다 하나님의 뜻을 더 귀하게
여긴다. 스데반 역시 하나님께 자신을 드렸기에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담대하게 진리를
선포할 수 있었다. 하나님께 자신을 온전히 드리지 못하는 사람은 사람의 눈치를 보며 진리를
전하지 못하지만, 자신을 드린 사람은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담대하게 선포할 수
있다.
오늘날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느냐"라고 물으신다. 그 질문은 우리
각자를 향한 하나님의 부르심이다. 하나님은 형식적인 신앙보다 자신을 기쁨으로 드리는
사람을 찾으신다. 우리는 세상의 욕심과 안락함을 따라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생명을 감사함으로 드리며, 삶 전체를 하나님께 헌신하는 거룩한 산 제물이 되어야 한다.
그러한 삶이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참된 예배이며, 하나님 나라를 위해 가장 귀하게 쓰임
받는 주의 종의 삶이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