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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철학 3, 4, 5과
3과
1. 비트겐슈타인과 마찬가지로 아우구스티누스도 언어적 규약을 구성하는데 사람들 사이에 일종의 일치가 전제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즉 손가락으로 무언가를 가리키는 등의 규약이 성립되기 이전의 자연스러운 반응에서 일종의 일치가 필요하다. 지시적 정의 자체만 가지고는 어린아이에게 어떤 단어의 의미를 가르치지 못한다. 어린아이는 서로 다른 다양한 문장의 적절한 위치에서 사용되는 단어들을 거듭해서 들어야만 한다. 언어를 배우는 과정은 언어 이전의 단계에서 자신의 감각과 욕구를 표현하려는 어린아이의 노력으로부터 출발한다.
2. 우리가 언어를 사용하는 다양한 방법들을 생생하게 검토함으로써 논의가 시작된다.
우리는 오직 정보를 전달하기 위해서 뿐만 아니라 신에게 기도하는 일로부터 목욕하면서 노래 부르는 일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목적을 위해서 언어를 사용한다. 마음 안에 단어를 떠올릴 때처럼 우리는 소리를 내지 않고도 언어를 사용할 수 있다. 이런 경우 우리는 언어를 그것이 지시하는 대상에 대한 기억을 회상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한다.
3. 아우구스티누스는 지시적 정의의 실패로부터 단어의 의미는 그 어떤 교사도 가르칠 수 없으며 결국 천상에 근원을 둔, 우리 안에 있는 교사만이 가르칠 수 있는 무언가라고 결론 짓는다.
이런 결론은 모든 배움은 사실 일종의 상기라는 메논에 등장하는 플라톤의 주장을 언어의 배움이라는 특별한 경우와 관련해서 기독교적으로 변형한 것이다. 하지만 이런 결론에 도달하는 과정에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언어철학의 많은 중요한 주제들을 논의한다.
4. 아우구스티누스는 기호학의 기본이 되는 기호의 분류를 시도한다.
모든 단어는 기호지만 모든 기호가 단어는 아니다. 예를 들면 문자나 몸짓도 기호이다. 모든 이름은 단어지만 모든 단어가 이름은 아니다. ‘만일’, ‘의’와 같은 단어 외에도 명사를 대신 나타내는 대명사가 있고, 시제를 지니는 동사도 있다. 기호와 그것이 지시하는 바를 서로 구별하는 일은 중요하다. 어느 누구도 돌이라는 대상 자체와 돌을 의미하는 단어를 서로 혼동하지 않을 듯하지만, 어떤 단어는 단어 자체를 지시하기도 하기 때문에 이런 경우에는 기호와 그것이 의미하는바 사이에 혼동이 일어날 위험이 크다.
5. 포르피리오스의 ‘이사고게’가 지닌 중요한 특징은 속성에 관한 이론, 즉 술어가 주어와 가질 수 있는 여러 관계들에 관한 이론을 다룬다는 점이다.
그는 이 관계를 종개념, 유개념, 종차, 고유성 그리고 우연성의 다섯 가지로 분류한다. 이들은 모두 아리스토텔레스의 토피카에 등장하는 용어이며, 두 사람이 제시한 분류가 서로 밀접하게 관련되기는 하지만 포르피리오스의 속성 이론과 아리스토텔레스의 범주 이론은 서로 다르다.
6. 인간은 동물이라는 유개념에 속하는 종으로서 이성적이라는 종차를 통해서 구별된다고 할 수 있다.
인간과 동물이라는 술어가 소크라테스라는 한 개인에 대하여 사용될 때 이들은 실체의 범주를 서술한다. 즉 이들은 소크라테스라는 실재가 기본적으로 어떤 종류인지를 전체적으로 또는 부분적으로 알려준다. 이성적이라는 술어는 종차로서 실체와 우연성에 모두 관련하는 듯이 보인다. 즉 이성적임은 정의의 일부로서 실체의 범주에 속하는 듯하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그것은 분명히 일종의 성질인데 성질은 우연성에 속한다. 고유성은 특수한 종에 대한 정의는 아니라 할지라도 그 종의 특유한 속성이다. 중세에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농담을 이해하는 능력을 인간의 고유성으로 여겼다. 우연성은 어떤 개인의 존재를 편견 없이 보았을 때 그 개인에게 속할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는 술어이다.
7. 실체의 범주를 기본적인 것으로 여길 경우 이로부터 물체와 정신이라는 두 유개념을 이끌어 낼 수 있으며 이들 각각에 물질저과 비물질적이라는 종차를 더할 수 있다.
물체라는 유개념에서 다시 두 개의 유개념, 즉 생물과 무생물이라는 유개념이 도출되며 이들 각각에 ‘생명이 있는’ 과 ‘생명이 없는’이라는 종차가 더해진다. 이와 유사한 분리 과정을 거쳐 생물이라는 유개념은 식물과 동물의 유개념으로 나누어지며 동물의 유개념은 이성적이라는 종차와 더불어 결국 인간이라는 종개념을 산출하는데 여기에는 피터, 폴, 존 등의 개인이 모두 포함된다.
8. 보이티우스는 이런 문제들에 대하여 분명한 대답을 제시한다. 보편적인 것들은 정신의 외부에 현존한다.
이들은 비물질적이다. 이들은 우리가 이론적으로 생각할 경우가 아니면 개체로부터 분리되지 않는다. 종개념 또는 유개념은 우리가 각 개인으로부터 유사한 인가나성을 이끌어 내는 경우와 마찬가지로 각각의 특수한 개체로부터 추출된다. 이것이 아리스토텔레스의 견해라고 보이티우스는 말한다. 하지만 형식 논리학을 위해서 보편이 분리되어 현존한다는 플라톤의 주장을 배제할 필요는 없다.
9. 보이티우스는 어떤 귀결에서는 전제와 결론 사이에 필연적인 연결이 발견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는 이에 해당하는 예로 ‘불이 뜨겁기 때문에 천체는 둥글다’를 든다. 이는 현대 논리학자들이 실질적 함축이라고 부르는 바의 예로 보인다. 보이티우스는 이를 이차적인 우연적 귀결이라고 표현한다. 다른 한편으로 전제로부터 결론이 필연적으로 도출되는 귀결도 있다. 여기에는 현대 논리학자들이라면 형식적 함축이라고 부를 논리적 진리뿐만이 아니라 과학적 탐구를 통해서 진리임이 밝혀지는 가언적 언명, 예를 들면 만일 지구가 달을 가리면 월식이 일어난다. 등도 포함된다.
10. 동시에 명확한 특성은 시제를 지닌다는 점이 아니라 문장을 완성한다는 점이다.
아벨라르는 동사가 없이는 의미가 완성될 수 없다고 말한다. 명사 없이도 문장을 완성할 수 있지만 동사가 없으면 결코 문장을 완성할 수 없다. 그는 소크라테스는 술을 마신다. 처럼 어떤 문장에는 계사가 없다는 점을 알았지만 이런 문장은 항상 소크라테스는 술 마시는 사람이다. 와 같은 형태로 다시 쓸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11. 그들이 인간이라는 사실은 일종의 사물이 아니라 상태이며, 각 개인에게 인간이라는 명사를 적용할 수 있는 공통의 원인이라고 아벨라르는 말한다.
사물들 사이의 유사성 자체가 하나의 산물은 아니라고 주장하면서 우리가 마치 사물들 사이에 공통적인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주장하는 듯이 보이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실제로 말하려는 바는 어떤 것과 다른 것이 각각 인간이라는 점에서 서로 유사하다는 사실, 즉 그들 모두 인간이라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이를 통하여 우리는 오직 그들이 인간이라는 사실 그리고 바로 이 점에서 그들이 서로 다르지 않다는 사실만을 의미할 따름이다.
12. 단어는 보편적 개념을 표현함으로써 보편을 의미한다.
하지만 단어는 세계 안에 존재하는 개체를 의미하는 방식으로 보편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단어가 사물을 의미하는 방식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아벨라르는 단어가 의미하는 바와 단어가 나타내는 바를 서로 구별한다. 소년이라는 단어는 어떤 문장에서 등장할 경우에는 항상 동일한 의미를 지닌다. 즉 나이 어리고 남성인 사람을 의미한다. 하지만 한 소년이 길을 따라 뛰어간다. 에서처럼 문장의 주어 위치에 놓일 경우 이 단어는 구체적으로 어떤 소년을 나타낸다.
13. 아벨라르는 어떤 명제가 무언가를 현재의 사실이라고 언급함으로써 사건의 상태로 명시하는 바를 명제의 언명이라고 부른다.
명제의 언명은 참일 수도 아니면 거짓일 수도 있기 때문에 세계 안의 사실은 아니다. 만일 자신과 관련되는 사건의 상태를 세계 안에서 얻을 수 있다면 언명은 참이 되지만 그렇지 않으면 거짓이 된다. 사실이란 관련되는 사건의 상태를 얻을 수 있는 경우이다.
14. 아벨라르는 논리학을 타당한 논증 또는 추론과 부당한 논증 또는 추론을 판단하고 구별하는 기법이라고 정의한다.
그는 추론을 삼단논법으로만 한정하지 않으며 더욱 포괄적인 개념의 논리적 결론에 관심을 보인다. 그는 이런 결론을 지칭하면서 귀결이라는 라틴어 단어를 사용하지 않는다. 그는 다른 학자들과 마찬가지로 조건 명제를 지칭하면서 귀결이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가 함축으로 번역할 수 있는 관계를 지칭하면서는 수반이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두 개념이 이와 관련되는데 이 둘은 서로 동일하지 않다.
15. 추론은 함축의 필연성으로 구성된다.
즉 결론이 의미하는 바는 전제의 의미에 의해서 규정된다. 하지만 함축의 필연성은 전제와 결론에서 언급되는 것들이 반드시 현존해야 함을 요구하지는 않는다. 함축을 우리에게 전해 주는 것은 바로 명제의 언명인데, 언명은 우리의 머리 안에 있는 생각도 아니며 세계 안에 있는 사물도 아니다.
16. 명사에는 쓰거나 말한 단어들뿐만 아니라 단어에 대응하는 정신적 부분까지도 포함되는데 이 부분이 어떻게 확인되든 간에 항상 그렇다.
실제로 개념은 그것을 표현하는 단어에 의해서 확인되므로 명사에 대한 중세의 연구는 본질상 개별 단어의 의미에 관한 탐구였다. 이런 탐구가 진행되면서 논리학자들은 정교한 용어법을 발전시켰다. 의미에 해당하는 가장 일반적인 라틴어는 ‘시그니피카치오’ 인데, 무의미하지 않은 모든 단어가 의미를 지니는 것은 아니다. 단어는 그 자체로 이미를 지니는가 아니면 오직 의미를 지니는 다른 단어들과 결합할 경우에만 의미를 지니는가에 따라 두 종류로 나뉜다고 할 수 있다.
17. 지칭은 명사가 지닌 가장 중요한 의미론적 속성이지만 중세 논리학자들이 주목하였던 또 다른 요소들이 있다.
그 중 하나는 총칭이었는데, 이는 명사의 범위와 문장을 연결하는 문제였다. 예를 들어, ‘공룡들은 꼬리가 길다.’ 라는 문장을 생각해보자. 현재처럼 공룡이 존재하지 않는 상황에서 이 문장은 참인가? 우리가 어떤 문장이 현재 세계에 존재하는 내용들에 기초하여 참이 되거나 거짓이 된다는 견해를 택한다면 이 문장은 참일 수 없는 듯이 보인다. 그저 이 문장에 등장하는 술어의 시제를 과거로 바꾸어 ‘공룡은 꼬리가 길었다.’고 말하는 정도로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이 문장을 참으로 여기려면 우리는 과거, 현재, 미래에 걸쳐 세계 안에 존재하는 모든 내용을 기초로 하여 결정된 무언가를 진리로 받아들여야 한다.
18.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라 이런 구별은 서로 구별되는, 지성의 두 작용을 보여 준다고 말하였다.
지성의 작용 중 하나는 복합적이지 않은 내용을 파악하는 능력이며, 다른 하나는 어떤 명제를 결합하거나 분할하는 능력이다. 명제는 단어들의 결합으로 구성되는, 참 또는 거짓을 표현하는 무언가 이다.
19. 우리의 정신 안에서 저절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를 생각해보면 때로는 참이기도 하고, 때로는 거짓이기도 한 어떤 결합이 항상 이루어짐을 알게 된다.
왜냐하면 정신은 하나의 단순 개념을 다른 것과 결합하지 않고는 참이거나 거짓인 그 어떤 것도 만들어 낼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시 실재와의 관련성까지 고려해보면 정신의 작용은 때로는 결합으로 또 때로는 분할로 불리게 된다. 결합은 정신이 개념을 만들어 내는 사물들을 결합하거나 이들 사이의 동일성을 확인하기 위하여 한 개념 옆에 다른 개념을 두려 할 때 발생한다. 반면, 분할은 개념에 대응하는 실재들이 서로 다르며 서로 구별된다는 점을 보이기 위하여 한 개념 옆에 다른 개념을 두려할 때 발생한다.
20. 무언가를 단언하든 그렇지 않든 간에 명제는 참이거나 거짓이다.
바꾸어 말하면 명제는 사실상 실재와 대응하거나 대응하지 않는다. 명제에 대응하는 사고가 일종의 믿음이든 아니면 단지 가벼운 추측에 지나지 않든 간에 그런 사고에 대해서도 이와 같은 내용이 적용된다. 하지만 오직 무언가를 단언하는 발화 행위 또는 이에 대응하는 정신적 판단 행위만이 발화자 또는 사고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명제의 진리성을 따지도록 만드는 것이다.
21. 만일 어떤 문장이 참이라면 그 문장을 참으로 만드는 바는 사건의 상태이다.
아벨라르는 이를 언명이라고 불렀으며 다른 학자들은 진술이라고 불렀다. 하지만 학자들 대부분은 이것의 형이상학적 지위를 명확히 설명하기가 쉽지 않음을 깨달았다. 학자 중 한 사람은 진술은 실체도 아니고 속성도 아니므로 단지 그 자신의 집합에 속할 뿐이라고 따라서 아리스토텔레스의 범주에서 발견되지 않는다고 말하였다. 즉 진술은 명확한 실재가 아니며 오직 이성에 의해서만 파악될 수 있다.
22. 중세에는 이런 식의 번역은 별 관심을 끌지 못했다. 가장 일반적으로는 문장과 마찬가지로 진술도 시제와 관련되는 것으로 여겨졌다.
따라서 문장과 진술 모두 진리값이 변할 수 있다고 생각되었다. 자주 인용되는 예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소크라테스가 지금 앉아 있다.’ 라는 하나의 동일한 문장이 소크라테스가 실제로 앉아 있을 때는 참이지만 그가 일어서 버리면 거짓이 된다고 말하였다. 중세 논리학자들이 생각한바 중에 시간과 무관한 명제에 가장 근접한 내용은 시간과 관련되는 명제들을 ‘또는’으로 연결한 것이었다.
23. 다른 지적 활동, 즉 복합적이지 않은 개념을 형성하는 활동은 어떤가?
아퀴나스는 이에 대하여 서로 다른 곳에서 서로 다른 설명을 제시하는 듯하다. 때로 그는 이를 단어의 사용에 숙달하는 일과 동일시하는 듯이 보인다. 이 경우 누군가가 황금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안다면 그는 황금의 개념을 지니는 셈이 된다. 하지만 다른 곳에서 아퀴나스는 개념을 무언가의 실질 또는 본질에 대한 지식과 동일시한다. 이런 의미에서는 오직 황금의 원자번호와 원소주기율표에서의 위치 등을 황금의 속성과 연결하여 파악할 줄 아는 화학자만이 황금의 진정한 개념을 지닐 수 있다.
24. 아퀴나스는 사물들을 현재 그들이 보이는 모습으로 만드는 형상이 존재한다는 플라톤의 주장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예를 들면, 소크라테스를 인간으로 만드는 인간성이라는 형상이 존재한다. 하지만 그는 질료와 떨어져서 현존하는 그 어떤 형상의 존재도 부정한다. 즉 우리의 정신 외부에 인간의 본성 자체 또는 절대적인 것으로서의 인간 본성 따위는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 오직 피터와 폴 같은 각 개인이 지니는 인간 본성만이 존재할 뿐이다. 어떤 개인의 본성이 아닌 인간 본성은 존재하지 않으며, 특히 보편적 인간 같은 것은 하늘에도 땅에도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
25. 아퀴나스의 표현에 따르면 개인의 인간성은 일종의 형상이기 때문에 생각될 수 있는 반면, 질료 안에 존재하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생각될 수는 없다.
이를 현실적으로 생각될 수 있도록 만들기 위해서는 특별한 지적 능력, 즉 능동 지성이 작용해야만 한다. 현재로는 이름과 술어의 의미를 해명하는 수준에서 보편에 대한 아퀴나스의 반플라톤적인 설명이 함축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묻는 정도로 충분할 듯하다.
26. 아퀴나스는 보편의 한 종류인 종과 관련해서 이것이 낳는 결과를 상세히 설명한다.
개라는 종은 실재로서 현존하지 않으며, 설령 개들이 하나의 종에 속한다 할지라도 하나의 종에 속한다는 점이 개라는 사실의 일부를 차지하지 않는다. 만일 하나의 종에 속한다는 점이 개가 되기 위하여 필요한 바의 일부라면 애완견의 이름으로 흔히 쓰이는 피도 또한 하나의 종이 되어야 할 것이다.
27. 아퀴나스의 주장이 옳다면 그들은 하나의 종에 속한다고 말할 때, 사실상 우리는 개에 관한 무언가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개념에 관한 이차적인 진술을 하는 셈이다.
이런 진술을 통하여 첫째, 우리는 개라는 개념이 보편적이라고 말한다. 그 개념은 무수히 많은 개들에게 적용될 수 있다. 둘째, 우리는 개라는 개념이 다른 개념들을, 예를 들면 동물의 개념을 자신의 구성 요소로 삼는 복합 개념이라고 말한다. 유와 종은 술어를 통한 서술의 측면에서 정의되며, 술어는 긍정 또는 부정 명제를 형성함으로써 우리의 정신이 만들어 내는 것이다.
28. 스코투스는 만일 신에 관하여 말하는 일이 어떻게든 가능하다면 신과 피조물에 동일한 의미로 적용되는 몇몇 단어들이 있음에 틀림없다고 주장한다.
우리는 모든 신학적 논의에서 유비추리만을 사용할 수는 없다. 논의 중 일부는 일의적이어야 한다. 스코투스는 좋음과 같은 단어에 즉 아리스토텔레스가 제시한 범주의 경계를 넘어서서 모든 범주들에 적용되기 때문에 자신이 초월적이라고 불렀던 단어에 초점을 맞춘다. 아리스토텔레스도 직접 지적하였듯이 우리는 좋은 사람들과 좋은 성질뿐만 아니라 좋은 시간과 좋은 공간에 대해서도 말할 수 있다.
29. 앙리는 존재에 대한 우리의 무분별한 개념에는 서로 구별되는 두 개념이 숨어 있는데 하나는 신이라는 무한한 존재에 적용되며 다른 하나는 서로 다른 범주에 속하는 피조물에게 적용된다고 주장하였다.
반성을 통하여 신과 피조물에 모두 적용되는 유일하고 일의적인 개념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이 밝혀진다. 하지만 두 개념 사이에는 충분한 유사성이 성립하므로 우리는 유비추리를 통하여 신을 존재한다고 뿐만 아니라 선하고 현명하다는 등으로 묘사할 수 있다.
30. 스코투스는 일의성과 다의성 사이에 어떤 중간점이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을 거부한다.
우리가 어떤 부분으로도 나누어지지 않는 단순 개념을 다룬다면 부분적으로 같고 또 부분적으로 다른 단어의 의미 따위는 분명히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가 신에게 적용하는 용어가 다의적이라면 피조물의 속성들로부터는 신에 관한 어떤 결론도 이끌어 낼 수 없을 것이다. 유비추리를 통해서 얻어진 술어를 삼단논법의 증명사로 사용하려는 모든 시도는 다의성의 오류에 빠지고 말 것이다.
31. 스코투스는 신과 피조물에 유비추리를 통해서 적용되는 개념들이 있음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가 주장하는 바는 이들을 더욱 기본적이고 일의적인 개념 위에 서 있으며 이것이 없이는 성립할 수 없었을 것이라는 점이다. 지혜, 지성, 또는 의지 등의 형식적 개념을 예로 들어 생각해보면, 무엇보다도 이 개념은 그 자체로 단순하게 곧바로 떠오른다. 이런 개념은 형식상 어떤 불완전성이나 한계도 포함하지 않음으로 피조물에서 이들과 연결되는 불완전성은 제거된다. 우리는 이를 신의 속성으로 표현한다. 따라서 신에 관한 모든 탐구는 지성이 피조물로부터 얻은 것과 같은 일의적인 개념을 지닌다는 가정에 기초한다.
32. 존재가 유비 추리적인가 아니면 일의적인가는 그리 명확한 질문이 아닌데 그 까닭은 유비추리의 난점 때문이 아니라 중세에 통용된 존재라는 개념 자체가 거의 모든 경우에 불투명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신은 존재한다. 라는 문장에서 등장하는 존재에 관하여 말할 경우 존재가 유비추리적인가 아니면 일의적인가라는 질문은 등장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존재를 무언가의 속성으로 부여하는 일은 어떤 주어에 술어를 부여하는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소한 스코투스에서 ‘이다.’ 는 ‘또는’으로 연결되는 무수히 많은 술어와 동등한 자격을 지니는 듯이 보인다. 즉 말 또는 색, 또는 날, 또는 ~이다. 등으로 무한히 이어질 수 있다.
33. 양상주의 논리학자들에 따르면 의미란 인간의 규약에 따라 소리를 통하여 만들어졌는데 이들은 이런 규약을 의미의 부과라고 부른다.
의미의 기본 단위는 어법이다. 그런데 하나의 조어법이 서로 다른 많은 언어 형식을 포함하기도 한다. 예를 들면 라틴어 명사의 경우 형용사 또는 부사와 결합할 때 이런 조어법에 따르게 된다. 이들이 즐겨 든 예는 고통에 대한 조어법이었는데 여기에는 명사 고통이 서로 다른 격으로 변하는 경우, 고통을 느끼다. 라는 동사나 ‘고통스럽게’를 의미하는 부사로 파생하는 경우 등이 포함된다.
34. 어떤 표현의 의미는 근거와 방법의 결합에 의해서 결정된다.
이런 의미는 형식적 의미, 즉 그 표현이 언어로서 지니는 의미이다. 현대의 용어로 표현하면 이를 사전적 의미, 즉 사전의 규정하는 바로서의 의미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한 표현은 현실적으로 사용될 경우 의미에 의해서 규정되는 지시 대상도 지니게 된다.
35. 오컴의 주장에 따르면 모든 기호는 개체를 나타낸다.
기호가 나타낼 수 있는 보편 따위는 세계 안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보편이 개체들에 내재하는, 진정한 공통적 본성이라는 생각에 반대하기 위한 몇몇 형이상학적 논증을 펼친다. 만일 개체가 보편을 포함한다면 어떤 개체도 무로부터 창조될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개체 중 보편적 부분은 이미 존재하여야 하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으로 만일 신이 어떤 개체를 파괴한다면 신은 그 개체에 내재하는 공통적 본성까지도 완전히 없애 버려 그 개체와 같은 종에 속하는 다른 모든 개체들까지도 동시에 파괴해 버리고 말 것이다.
36. 보편은 단일한 것이며, 많은 것들을 나타내는 하나의 기호라는 점에서 오직 의미상으로만 보편적이다.
보편에는 두 종류가, 즉 자연적 보편과 규약적 보편이 있다. 자연적 보편은 우리 정신 안의 사고이다. 규약적 기호는 우리의 자발적인 결정에 따라 보편적이 된다. 즉 이런 사고를 표현하고 많은 것을 의미하기 위한 단어를 우리가 만들어 냄으로써 보편성이 등장한다. 우리가 말한 기호들이 합쳐져 말로 표현되는 명제를 형성하는 것과 마찬가지 방식으로 우리 정신 안의 기호들이 합쳐져 정신적 명제를 형성한다.
37. 오컴은 이런 정신적 개념들이 언어 체계를 형성한다고 여긴다.
영어나 라틴어 같은, 사람들이 말하고 규약으로 정한 언어 외에도 모든 사람은 공통적인 자연 언어를 공유한다. 바로 이런 보편 언어로부터 각 지역의 언어가 지니는 의미가 도출된다. 정신적 언어는 양상주의 논리학자들이 탐구한 문법적 특징 전부는 아니지만 그중 일부를 포함한다. 따라서 정신적 언어에 명사와 동사는 포함되지만 대명사나 전치사, 접속사 등은 포함되지 않는다. 명사는 격과 수를 지니며, 동사는 시제와 능동태, 수동태등을 지닌다.
38. 정신적 언어를 지지하기 위하여 필요한 요소는 오직 사고 자체뿐이다.
나의 영혼이 일시적으로 지니는 속성이며, 나의 심리적 과정을 이루는 하나의 대상이다. 정신적 문장 안에 정신적 명사가 등장할 때 그것은 문장에 대한 사고를 구성하는 기본 요소로 작용한다. 오컴은 이런 요소가 문장에 대한 사고의 연속적인 단계인지, 동시에 일어나는 일련의 사고인지 아니면 하나이 복합적인 사고인지에 대해서는 어떤 결정도 내리지 않은 듯 하다.
39. 개별 지칭에서는 명사가 자신이 의미하는 바를 나타낸다는 사실이 진정 참이 된다.
모든 인간은 동물이다. 에서 인간이라는 단어는 자신이 의미하는 바를 나타낸다. 왜냐하면 이 단어가 지시하는 바가 바로 인간들이기 때문이다. 즉 인간들에게 공통되는 무언가가 아니라 바로 인간들 자체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어떤 명사가 세계 안에 존재하는 것을 나타내지 않을 경우에도 개별 지칭이 성립할 수 있다. 개별지칭은 명사가 자신이 의미하는 바를 나타내는 경우를 말한다. 그것이 정신을 넘어선 실재이든 아니면 어떤 단어이든, 정신 안에 있는 개념이든, 우리가 손으로 쓴 무엇이든,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것이든 간에 상관없다.
40. 오컴에게 개별 지칭은 매우 중요한데 이는 주어뿐만 아니라 술어에도 적용될 수 있다.
술어도 자신이 그것에 대하여 참인 바 모두를 의미하고 지칭한다. 따라서 만일 베드로와 바울로, 요한 이렇게 세 사람만이 존재한다면 ‘모든 인간은 언젠가는 죽는다.’와 ‘모든 사도는 인간이다.’ 모두에서 인간이라는 단어는 베드로와 바울로, 요한을 지칭한다. 일반명사는 고유한 이름의 목록과 같은 의미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41. 오컴은 지칭의 개념을 진리를 정의하는 데도 사용한다.
‘소크라테스는 인간이다.’와 같은 명제는 주어 명사인 소크라테스와 술어 명사인 인간이 같은 것을 나타내며 오직 그런 경우에만 참이 된다. 이는 때로 두 명사 진리 이론에서 주어와 술어로 사용되는 두 명사가 같은 것의 이름일 경우 그 명제는 참이 됨을 의미한다.
42. 오컴의 이론은 최소한 명사를 고유명사로 여길 경우 이보다 다소 복잡한 모습을 띤다.
오컴에게 일반명사는 고유명사는 아니지만 고유명사의 목록과 동등하며, 그가 지칭을 확인하는 차원에서 제시한 진리 조건은 정언적 긍정 명제가 참이 되려면 하나의 동일한 고유명사가 주어의 목록과 술어의 목록에 모두 등장하여야 한다고 요구하기에 이른다.
43. 오컴은 단순 귀결과 현재에 관한 귀결을 구별하는 것으로 논의를 시작한다.
단순 귀결은 만일 후건이 참이 아니라면 전건 또한 결코 참일 수 없음을 주장한다. 이에 속한 예로 ‘어떤 동물도 뛰는 중이 아니다. 그러므로 어떤 인간도 뛰는 중이 아니다.’를 들 수 있다. 반면 현재에 관한 귀결은 만일 후건이 참이 아니라면 전건도 현재는 참일 수 없지만 다른 언젠가는 참일 수도 있다고 주장한다.
44. 타당성이 내부적인 귀결과 외부적인 귀결 사이의 구별이다.
어떤 귀결의 타당성이 전제와 결론에 포함된 그 어떤 명사의 의미에도 의존하지 않는다면 이런 귀결은 외부적으로 타당한 귀결이다. 이런 경우 귀결은 명사를 대신하는 기호를 사용한 도식적 형태로 쓸 수 있다. 어떤 귀결이 명사의 의미에 의존하여 타당성을 지닌다면 이런 귀결은 내부적으로 타당한 귀결이다.
45. 오컴은 형식적 귀결과 내용적 귀결을 구별한다.
그가 제시한 예를 보면 그는 외부적으로 타당한 귀결과 내부적으로 타당한 귀결 모두를 형식적 귀결로 여긴 듯하다. 반면, 내용적 귀결에서는 후건이 참이 아닐 경우 전건이 참일 수 없다는 사실이 전건의 내용과 후건의 내용 사이의 그 어떤 연결에도, 외부적이든 내부적이든 간에, 전혀 의존하지 않는다. 이런 귀결은 전건이 필연적인 거짓일 경우 또는 후건이 필연적인 참일 경우에 등장한다. 따라서 ‘만일 어떤 사람이 당나귀라면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 나 만일 어떤 사람이 뛰는 중이라면 신은 존재한다. 는 모두 타당한 내용적 귀결의 예이다.
46. 벌리는 전통적 지칭 이론을 옹호할 뿐만 아니라 더욱 확장하였다.
벌리는 페트루스 히스파누스나 셔우드의 윌리엄이 제시한 개별 지칭의 목록에 포함되지 않지만 충분히 제대로 형성된 문장 유형이 있음을 확인하였다. 이런 문장 중 하나는 모든 사람은 자기 자신을 사랑한다. 이다. 이전에 등장했던 분류에 따르면 이 문장이 소크라테스는 소크라테스를 사랑한다. 는 사실을 함축한다는 점이 제대로 드러나지 않는다. 벌리는 이 문장에서 자기 자신이라는 단어는 특별한 형태의 개별 지칭으로 모호한 지칭과 집합적 지칭 사이의 중간쯤에 말하면서 여기에 복잡하고 전문적인 새 이름을 붙였다.
47. 위클리프는 객관적 진리가 존재한다고 믿는 사람은 누구나 진정한 보편이 실재한다는 믿음을 이미 받아들인 셈이라고 주장한다.
하나의 개체가 다른 개체와 유사한 것으로 인식된다고 가정해 보면, 그 어떤 측면에서 유사하여야만 한다. 그런데 그것들이 어느 측면에서 유사하다는 점을 파악하는 것은 그것들을 파악하는 것과 같은 일이다. 그리고 이는 그것들이 공통되는 보편으로 여기는 것을 포함한다. 따라서 유사성에 관한 판단을 내릴 수 있는 사람은 누구나 자동적으로 보편이 무엇인지를 인식하게 된다.
48. 위클리프의 공격은 명백히 오컴보다 훨씬 더 극단적인 형태의 유명론을 향하고 있다.
오컴의 체계에서 이름은 우리가 발음한 소리나 종이 쓴 표시를 포함하지 않는다. 그가 말하는 이름은 정신적 언어에서의 명사이다. 하지만 위클리프의 공격은 오컴의 최대 약점을 제대로 파고든다. 즉 오컴은 자신이 상상한 정신적 언어의 명사와 실제 세계의 구체적 기호 사이의 관계에 대한 어떤 명확한 설명을 제시하는 데도 실패하였음을 지적한다. 인간이 내는 생생한 소리와 펜과 잉크로 쓴 표시에 대한 대화가 필요하다고 주장함으로써 위클리프는 잠재적인 무의미를 명백한 무의미로 드러내려는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적 방법을 예견하였다.
49. 예언들이 수없이 등장하는데 이들이 훗날 언젠가는 실현되어 참이 되리라고 말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고 주장하였다.
만일 예언자들의 예언이 이미 참이 아니라면 그들은 거짓말쟁이가 되고 만다. 이에 대하여 페트루스는 제 3진리값의 가능성을 부정하는 사람은 그 누구라도 결정론이라는 이단에 빠지고 만다고 대응하였다.
50. 미래에 관한 명제가 참이 되기 위해서는 그 명제가 말하는 내용이 사실이라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그 명제의 내용이 결코 사실이 아닐 수 없어야만 한다. 따라서 우리는 다음 둘 중 하나라고 말해야 한다. 즉 미래에 관한 신앙 조항에는 현재 실제로 참인 진리가 전혀 없거나 아니면 신앙 조항은 심지어 신의 능력을 가지고도 막을 수 없는 무언가를 언급한다고 말해야 한다.
4과
1. ‘아카데미아학파에 반대하여’에서 아우구스티누스는 다양한 종류의 지식을 얻을 수 있는 가능성을 옹호한다.
우리는 배중률, 즉 p이거나 p가 아니다. 와 같은 논리적 진리를 인식한다. 또한 우리는 직접적인 현상에 관한 진리도 인식한다. 어떤 회의주의자도 ‘나는 이것이 희게 보이며, 이 소리가 유쾌하게 들리며, 이 냄새가 쾌적하며, 이 맛은 달며, 이것은 차게 느껴진다.’ 고 말하는 사람을 반박할 수 없다. 이런 주장은 결코 잘못일 수 없다.
2. 아우구스티누스는 ‘삼위일체에 관하여’에서 논증을 진행하기 위하여 감각이 우리를 속일 수도 있다는 점에 동의한다.
예를 들면 우리의 눈이 노를 굽었다고 볼 수도 있고, 항법사의 눈에 경계표가 명백히 움직이는 듯이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내가 살아 있다.’고 말할 때 나는 결코 오류를 범할 수 없다. 이는 감각이 아니라 정신의 판단이다.
3. ‘신국론’에서 아우구스티누스는 ‘당신은 오류에 빠지지 않을 수 있는가?’ 라는 질문에 답하면서 ‘설령 내가 오류에 빠질지라도 나는 현존한다.’고 말한다.
현존하지 않는 것은 오류에 빠질 수도 없다. 따라서 설령 내가 오류에 빠질지라도 나는 현존한다. 우리들 각각은 우리 자신이 현존한다는 점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에 관한 다른 사실들도 인식한다. ‘나는 행복하기 원한다.’또한 내가 인식하는 바이며, ‘나는 오류에 빠지기를 원하지 않는다.’도 그렇다.
4. 우리는 자신이 감각을 통해서 지각한 바가 진리임을 의심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바로 이를 통해서 하늘과 땅 그리고 그 안의 존재들에 대하여 배운다. 우리는 또한 다른 사람들이 전하는 말로부터 방대한 정보를 얻는다. 예를 들면 대양이나 멀리 떨어진 나라, 역사상 등장한 영웅의 삶, 심지어 우리 자신이 어디서, 어떤 집안에서 태어났는지에 대한 정보를 얻는다. 평생에 걸쳐 아우구스티누스는 수학적 진리에 경의를 표하면서 이를 진리의 내부 규칙들로 분류한다. 어느 누구도 칠 더하기 삼이 십이 되어야만 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우리는 바로 칠 더하기 삼이 십이라고 인식한다.
5. 그는 ‘삼위일체에 관하여’에서 만에 하나 플라톤이 말하는 전생과 같은 것이 존재한다 할지라도 이것이 기하학을 배우는 일을 설명하지는 못한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전생에 우리 모두가 기하학자였다고 상상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6. ‘지성적인 실재’라고 부른 바를 아우구스티누스는 다른 곳에서 ‘비물질적이고 영원한 근거’라고 부른다.
이는 변화하지 않으며 따라서 인간의 정신보다 우위에 놓인다. 하지만 이는 어떤 방식으로 정신과 연결되어 있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이를 물질적인 것들을 판단하는 기준으로 채택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예를 들면 어떤 특수한 바퀴가 완벽한 원은 아니라고 판단한다든지 어떤 땅의 넓이를 잴 때 피타고라스의 정리를 적용하는 등의 방식으로 지성적인 실재를 기준으로 채택한다. 하지만 이를 기준으로 적용하는 경우가 산수나 기하학뿐만은 아니다. 아름다움에 대한 지적 기준도 존재한다.
7. 이데아는 창조주의 정신 말고는 다른 어떤 곳에 존재한다고도 여겨질 수 없다.
창조가 지성을 지닌 존재의 활동이라면 창조는 영원한 근거에 따라 이루어졌음에 틀림없다. 하지만 이데아에 따라 세계를 창조하면서 신이 자신 외부의 그 무엇에라도 눈을 돌렸다고 생각한다면 이는 신성모독에 해당한다. 따라서 유일하고, 영원하고, 불변하는 이데아는 마찬가지고 유일하고, 영원하고, 불변하는 신의 정신 안에 존재한다. ‘이데아는 원형에 해당하는 형상이며, 사물들의 불변하는 본질로서 창조된 것이 아니라 신의 지성 안에 영원불변하는 모습으로 존재한다.’
8. 인간이 관념을 얻는 방법은 ‘플라톤이 생각하였던’ 상기나 추상화가 아니라 신의 조명이다.
‘신이 지적인 빛을 비춤으로써 영혼은 육체의 눈이 아니라 더할 나위 없는 탁월성을 지닌 지성을 통하여 신의 시각이 궁극적 지복의 근거임을 파악한다.’
9. 육체의 활동에 비추어 지적 작용을 표현하려는 경향은 인간 언어의 자연스럽고 보편적인 특징이다.
일상의 표현에서 우리는 흔히 개념을 붙잡는다고 또는 어떤 명제가 참인 듯이 들린다거나 수상쩍은 냄새가 난다고 말한다. 하지만 우리의 모든 육체적 감각들 중 지성의 작용과 가장 자주 비교되는 것은 바로 시각이다. 논증이나 설득을 거치지 않고 어떤 명제에 바로 동의할 때 우리는 그 명제가 참임을 보고 바로 깨달았다고 말하며 동일한 은유를 사용하여 이를 직관적 지식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10. 조명은 우리가 색을 볼 때 빛이 우리 시각의 매개물이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가 무언가를 이해할 때도 어떤 매개물이 존재한다는 점을 암시한다.
또한 조명은 해를 비롯한 그보다 작은 발광체들이 우리가 보는 빛의 근원이 되듯이 이 매개물에도 어떤 근원이 있다는 점을 암시한다. 그리고 조명은 빛에 의해서 밝혀질 뿐만 아니라 어둠에 의해서 감추어지기도 하는, 시각의 대상이 존재한다는 점도 암시한다.
11. 조명에 대한 아우구스티누스의 설명에 살을 붙여 은유에 포함된 대상을 일관된 체계로 구성하기란 쉽지 않다.
가장 명백한 요소는 물론 신이 지적인 조명의 근원이라는 사실이며, 이는 해가 우리가 볼 수 있는 모든 빛의 근원임과 마찬가지이다. 이런 신의 조명이 어떻게 우리 인간이 플라톤적인 원형에 대응되는 관념을 소유하는지를 설명하는 듯이 보인다. 하지만 이데아는 빛에 의해서 밝혀져야 하는 그늘진 실재가 아니라 존재하는 것 중 가장 환하게 빛나는 실재로 여겨진다.
12. 아우구스티누스의 표현에 따르면 신의 조명은 지적인 시각의 대상이 아니라 우리가 소유한 이성의 눈을 비춘다.
이런 은유가 상징하듯이 지적인 탐구는 차의 전조등을 거꾸로 돌려 앞 유리를 비추게 하면서 밤에 차를 운전하는 것과 같은, 전혀 희망이 없는 일로 보인다. 조명에 사용되는 언어 또한 신앙과 이성 사이의 구별, 후에 기독교 철학자들에게 무척 중요한 주제로 부각된 구별에 혼란을 일으킨다. 우리가 본성적인 이성의 도움을 받지 않고 현세에서 신에 관하여 알 수 있는 바와 계시와 초자연적인 은총에 응답하여 신에 관하여 오직 믿을 수 있는 바를 구별하는 것은 하나의 관행이 되었다.
13.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조명은 자연적이라기보다는 초자연적으로 보이는 창조와 구별되는 무언가로 의도되었음이 명백하다.
다른 한편으로는 조명은 우리의 정신이 삼위일체와 같은 신비스러운 일뿐만 아니라 일상의 경험에서 가장 기본적인 진리를 파악하는 데도 반드시 필요한 듯이 보인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신앙에 관하여 무척 많은 말을 하였지만 이 단어를 후에 사용된 전문적 의미로, 즉 신이 계시한 말에 기초한 종교적 신조에 대한 믿음이라는 의미로 제한하여 사용하지 않는다.
14. 아우구스티누스 자신도 자주 지적하듯이 우리는 어떤 것에 대하여 전혀 생각하지 않으면서도 그 어떤 순간에라도 그것에 대한 믿음을 지닐 수 없으며 이런 것들은 무척이나 많다.
사고는, 바꾸어 말하면 생각은 우리의 정신적 삶에서 분명한 시간에 일어나며 이 시간을 측정할 수 있는 사건이다. 반면 믿음은 생각과는 다소 다른 무언가이며 하나의 장면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성향에 가깝다.
15. 아우구스티누스는 신앙에 관하여 말하면서 신앙의 인식적 지위를 상세히 설명하기보다는 무상의 덕으로서 신앙이 지닌 본성, 즉 바울로가 신이 우리에게 불어넣었다고 말한 세 요소인 믿음, 희망, 사랑 중 하나로서 차지하는 본성을 강조하는 태도를 취한다.
그는 신앙의 역할을 가장 감동적으로 표현한 한 대목에서 다시 한 번 빛의 은유를 사용하는데 여기서는 영원한 진리에 대한 우리의 인식을 설명할 때와는 상반된 방식을 보인다. 그는 이성과 지성이 자연스럽게 자리 잡은 인간 정신은 뿌리 깊은 악이 낳은 어두운 결과로 약해진다. 인간 정신은 불변하는 빛을 품고 스스로 기꺼이 받아들여 향유하기는 어려울 정도로 약하다. 이런 축복을 누리려면 매일 치료를 받아 새로워져야 한다. 인간 정신은 신앙을 통해서 정화되어야 한다.
16. 신앙이 없이는 어느 누구도 삼위일체의 신비나 사후에 인간을 기다리는 초자연적인 운명에 대하여 배울 수 없다.
보나벤투라가 보기에 철학자는 아무리 큰 재능을 타고났다 할지라도 완전히 무지한 사람보다도 처지가 더욱 나쁘다. 철학자는 우리가 알아야 할 가장 중요한 것과 관련해서 명확한 오류에 빠져 있다. ‘철학이라는 학문은 다른 학문에 이르는 통로이다. 그러므로 철학에서 멈추려는 사람은 어둠에 빠지게 된다.’
17. 신앙이라는 은총에 의해서 계몽된 기독교 철학자만이 철학의 논증을 제대로 사용하여 진리를 구하는 지성의 폭을 넓힐 수 있다.
보나벤투라 자신도 신의 현존에 대한 다양한 증명을 제시함으로써 바로 이런 일을 행한다. 그는 불완전한 존재는 완전한 존재를 함축하며, 의존적인 존재는 독립적인 존재를 함축하고, 변화하는 존재는 변화하지 않는 존재를 함축한다는 등의 주장을 편다. 그러면서 그는 마치 플라톤처럼 이런 증명들이 본성상 인간 정신 안에 심어져 있는 신의 현존에 대한 지식을 더욱 완전하게 인식하는 자극제가 되리라고 해석한다.
18. 보나벤투라가 보기에 우리가 타고나는 신의 관념은 특별한 경우에 속한다. 그는 우리의 관념들 일반이 본유적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을 받아들여 우리의 정신이 처음에는 텅 빈 백지와 같으며 가장 일반적인 지적 원리들조차도 오직 감각 경험을 한 이후에만 얻어진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독특하게도 신의 관념만은 본유적인데 그 까닭은 정신 자체가 신의 모사, 즉 신의 특성을 희미하게나마 볼 수 있는 거울이기 때문이다. 신에 관한 타고난 지식과 지적 원리들에 관한 획득된 지식 사이의 어딘가에 덕에 관한 우리의 지식이 놓여 있다. 이 지식은 본유적 관념도, 감각으로부터의 추상화도 아니며 옳고 그름을 구별하여 말하는 본성적 능력이다.
19. 변화하고 소멸할 수 있는 감각 경험의 대상으로부터 얻은 지식은 본성상 회의와 오류에 빠지기 쉽다.
따라서 확고한 확실성을 얻기 위해서는 변하지 않는 진리로부터의 도움이 필요한데 이 진리가 바로 신이다. 신의 정신 안에 있는 영원한 근거로서의 이데아를 현세에서 눈으로 볼 수 없다. 하지만 이데아는 우리의 사고에 보이지 않는 은밀한 영향을 미친다. 이것이 바로 세계의 덧없는 현상 배후에 놓인 확고한 본성을 파악하게 만드는 신의 조명이다.
20. 보나벤투라는 이전 철학자들의 오랜 전통에 따라 인간의 정신이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설명하면서 초자연적인 것에 호소한다.
그와 같은 시대에 활동하였던 아퀴나스는 이런 접근 방식을 거부한다. 아퀴나스도 지성의 작용을 설명하면서 빛의 은유를 사용한다. 능동 지성은 빛을 제공하는데 이 빛은 잠재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세계 안의 개별적 대상들을 현실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정신 안의 대상들로 바꾼다. 하지만 아퀴나스는 능동 지성이 각 개인이 지닌 본성적 능력일 뿐 정신 밖에서 작용하는 초자연적 실재는 결코 아니라고 주장한다.
21. 아퀴나스는 능동 지성이 인간 영혼 안에 존재하는 무언가라는 점을 무척 강조하여 말한다.
인간의 지성보다 우월한 지성, 즉 신의 지성이 존재한다는 점은 확실하다. 하지만 인간이 사고하는 데 필요한 것은 이 우월한 지성에서 유래한 인간의 능력이다. 요한이 말하듯이 신은 이 세상에 와서 모든 사람을 비추지만 오직 인간의 영혼에 특징적인 능력을 부여하는 보편적 원인으로 그렇게 할 뿐이다.
22. 아퀴나스가 경험론자가 아님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즉 그는 감각 경험이 그 자체만으로 지적 사고에 충분하다는 주장을 부정한다.
각 경험 외에도 능동 지성 작용이 필요하다. 하지만 만일 그가 경험론자가 아니라면 그는 또한 조명주의자도 아니다. 능동 지성도 그 자체만으로는 지적 인식에 이르기에 불충분하다. ‘우리가 물질적 사물에 관한 지식을 얻으려면 우리 안에 있는 지적인 빛 외에도 외부의 사물로부터 도출된, 생각할 수 있는 종들이 필요하다.’ 현세에서 인간 지성은 물질적 대상을 파악하는 능력이다. 감각이 없다면 어떤 대상도 우리에게 주어지지 않을 것이다.
23. 아퀴나스에게 능동 지성은 결코 초자연적인 무언가가 아니라 인간 본성의 일부이다.
가르침의 본성에 관하여 논의하면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각 개인 안에는 인식의 원리가, 즉 능동 지성이라는 빛이 존재한다. 우리는 처음부터 이를 통하여 모든 학문의 확실하고 보편적인 원리를 인식한다.’ 아퀴나스는 가르침에서, 능동 지성의 역할을 의술에서 우리 몸의 본성이 담당하는 역할에 비유한다. 즉 의사는 체온 조절, 원활한 소화, 유독 물질의 배출을 통하여 환자를 치료한다. 학생에게 무언가를 가르치면서 교사는 학생이 새로운 지식을 얻기 위하여 지성이라는 자연의 빛을 사용하도록 그를 돕는다. 이 유추는 상당히 효과적이다.
24. 능동 지성의 작용은 소화기관의 작용과 마찬가지로 결코 초자연적이지 않다.
이들 둘은 똑같이 창조주인 신이 만들어 내었다. 만일 신이 무언가를 만들어 내었다는 사실이 그것을 초자연적으로 만든다면 세계 전체가 초자연적이 되며 자연과 초자연 사이의 구별은 그 기준을 잃게 될 것이다.
25. 아퀴나스는 모든 피조물이 지닌 신과의 유사성과 진리를 인식할 능력 때문에 지성만이 지니는 신과의 특별한 유사성을 구별한다.
모든 사람들이 진리라고 동의하는, 사변적 추론과 실천적 추론의 몇몇 제일원리들이 있다. 우리의 정신이 신의 모사로 불리는 까닭은 바로 이런 원리들이 우리 정신 안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런 진리들은 우리가 타고난 것도 아니며 경험이나 귀납으로부터 얻는 것도 아니다. 우리가 타고난 바는 경험이 이런 진리들의 예를 제공할 때 이들을 인식하는 능력이다.
26. 능동 지성은 본질상 개념 형성의 능력이며 감각적 환상들에 작용한다.
능동 지성은 잠재적으로 생각 가능한 감각 경험의 자료들을 현실적으로 생각 가능한 종으로 전환한다. 개념 형성에는 무모순의 원리와 같은 원리들이 적용된다. 이런 의미에서 능동 지성은 이런 원리를 인식한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물론 감각적 정보다 전혀 입력되지 않으면 이런 원리의 인식은 현세에서 우리 지성의 적절한 임무인 물질적 대상의 본질을 인식하는데 전혀 기여하지 못한다.
27. 아퀴나스는 인간의 정신을 비추는 부수적이고 초자연적인 신의 조명이 있다고 굳건히 믿었다.
이는 이를 지닐 정도로 운이 좋은 사람들을 신앙으로 이끄는 은총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는 이를 타고난, 자연의 빛에 해당하는 능동 지성과 주의 깊게 구별한다. 무엇을 파악하고 판단하든 간에 우리는 기본적 진리에 비추어 파악하고 판단한다. 우리 지성의 그 어떤 빛이라도 기본적 진리의 결과인 한에서 우리는 그렇게 한다.
28. 아퀴나스는 자연적 이성으로는 신에 관한 단지 제한된 수의 진리에만, 즉 신이 현존하며, 전지전능하고, 자비롭다는 등의 진리에만 도달할 수 있다고 믿었다.
삼위일체나 성육신과 같은 교리는 오직 계시에 의해서만 알려지며 이성만으로는 증명될 수 없다. 신학적 의미에서 신앙이란 신의 말씀에 근거한 무언가를 믿는 것이다. 따라서 신앙은 철학을 통해서 성공적인 증명을 제시할 수 있는 신의 현존에 대한 믿음과는 다른 종류에 속한다. 독실한 신자는 많은 것을 신의 말씀으로 여긴다. 하지만 신이 현존한다는 사실을 신의 말씀으로 여길 수는 없다. 이런 의미에서 신이 현존한다는 믿음은 신앙의 일부가 아니라 신앙이 전제하는 바이다. 아퀴나스는 이를 신앙의 서문에 해당한다고 말한다.
29. 아퀴나스에 따르면 많은 사람들은 원리상 이성이 충분히 인식할 수 있는 진리들조차도, 예를 들면 신의 현존이나 영혼의 불멸성 등도 실제로는 권위에 의지하여 받아들여야만 한다.
왜냐하면 철학적 논증을 통하여 이들을 확립하는 데는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기대할 수 있는 것 이상의 지성과 여유 그리고 정력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자연신학의 체계를 설명하면서 아퀴나스는 배운 사람들의 믿음과 평범한 사람들의 믿음을 구별한다. 평범한 사람들은 신이 현존한다는 지식을 낳는, 철학자들 사이에서 통용되는 신의 현존에 대한 다섯 가지 증명 방식 등을 따르고 이해할 능력을 반드시 갖출 필요는 없다. 그들은 그저 신이 존재한다는 점을 믿는 것으로 충분하다. 이런 믿음은 이성을 통해서 주어진 것이므로 신앙은 아니다. 즉 신이 아니라 인간에 기초하여 권위를 지니는 믿음이다.
30. 아퀴나스는 신앙과 이성, 자연신학과 계시신학을 구별하였는데 이는 중세 인식론에서 일종의 전환점으로 평가된다.
인식론이란 지식과 믿음에 관하여 탐구하는 철학 분과로서 우리가 어떤 종류의 것들을 알 수 있으며, 어떻게 그것을 알 수 있는지 또한 우리가 어떤 종류의 것들을 믿어야만 하며, 왜 그것을 믿어야 하는지 등의 문제를 다룬다. 아퀴나스는 지식과 믿음을 뚜렷하게 구별함으로써 예를 들면 기독교도가 삼위일체의 신비를 파악하는 일은 지식이나 이해의 문제가 아니라 신앙의 문제임을 그 이전 다른 어떤 철학자보다도 더욱 강조하였다.
31. 아퀴나스는 그 어디서도 모든 학문적 지식의 전제 역할을 하는 자명한 원리들의 목록을 나열하지 않으며 또한 스피노자처럼 자신의 철학적 주장들을 자명한 공리들의 결론으로 제시하려 애쓰지도 않는다.
하지만 그는 모든 학문 분과에서의 성과가 일종의 연역적 체계를 이루는 정리들이 질서 있게 구성된 바인데, 이 체계의 공리는 상위 학문의 정리들이거나 아니면 그 자체로 자명한 원리들이라고 말한다. 어떤 정리는 하나 이상의 체계에서 증명되기도 한다. 예를 들면 천문학자도 물리학자도 모두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을 보일 수 있다.
32. 학문은 형식적 대상이 서로 다른 경우에 달라진다.
즉 천문학자와 기하학자는 같은 물리적 대상을, 예를 들면 해를 서로 다른 두 가지 형식적 서술에 따라, 즉 천체로 보는가 아니면 구형의 입체로 보는가에 따라 다르게 인식한다고 말할 수 있다. 서로 다른 학문에서 도출되는 결론은 서로 다른 증명사를 지니는 삼단논법으로부터 연역된다. 제일원리에서 특수한 정리에로 나아가는 추론의 고리는 하나 이상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어떤 정리로부터도 공리로 거슬러 올라가는 추론의 고리가 최소한 하나는 존재하여야만 한다. 그렇다면 이런 학문의 이상은 유클리드가 제시한 기하학의 형식에서 가장 완벽하게 실현된 듯하다.
33. 우리는 과학자가 자명한 원리들로부터 출발하여 경험과 무관한 연역을 진행하여 세계에 관한 결론을 이끌어 낸다고 이해하지 않는다.
과학의 절차는 오히려 이와는 정반대되는 방향으로 진행된다. 과학자는 현상으로부터 출발하여 그 원인을 추구한다. 원인을 발견한다는 것은 월식의 발생을 결론으로 삼는 삼단논법에서 증명사를 발견하는 것과 같다. 과학의 임무는 이 삼단논법을 계속 거슬러 올라가면서 추적하고 또 다른 삼단논법을 통하여 결국 제일원리에 도달함으로써 완수된다. 하지만 이렇게 도달한 제일원리는 과학적 탐구의 출발점이 아니라 결론의 형태를 띤다. 연역의 고리는 메개 수단이 아니라 모험의 결과이다.
34. 아퀴나스의 이론이 지니는 심각한 문제점은 과학에서 경험과 실험의 역할이 매우 불분명한 채로 남는다는 점이다.
사실 아퀴나스가 사용한 과학이라는 용어는 수학과 형이상학을 포함할 만큼 무척 폭이 넓다. 하지만 그가 든 예에 비추어 보면 그의 설명이 천문학과 의학 같은 분과에 대한 것이라는 점이 명백하다. 그는 과학이 보편적이고 필연적인 진리들을 다룬다고 말한다. 하지만 우리가 감각 경험을 통하여 접하는, 변화하는 세계가 어떻게 그런 진리를 제공할 수 있는가?
35. 근대 초 이후로 인식론은 회의주의에 대응하는 한 가지 형식으로 자주 여겨져 왔다.
즉 인식론은 우리가 감각이 제시하는 증거에 의존하고, 외부 세계의 존재를 받아들이고, 다른 사람의 정신도 존재한다고 믿는 근거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변을 제공하였다. 하지만 아퀴나스는 이런 방식의 인식론에는 거의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그는 우리의 감각이 일반적으로 신뢰할 만하다는 점을 받아들이며, 물질적 대상의 본성이 그것을 인식하는 인간 지성의 적절한 대상이라고 생각하며, 인간 및 초인간적인 정신이 존재한다는 점보다는 오히려 그것의 본성과 수에 관한 주장을 편다.
36. 스코투스는 지성이 천상과 지상의 모든 것, 즉 무한하든 유한하든 간에 존재의 전 범위를 포괄하여 대상으로 삼을 만큼 강력하다고 믿었다.
더욱이 아퀴나스는 물질적 개체들이 지적 인식보다는 감각적 인식에 속한다고 믿었던 반면 스코투스는 개체들 자체에 대한 직접적 인식까지도 기꺼이 지성의 속성으로 돌렸다. 하지만 스코투스는 이렇게 지성의 영역을 확장한 대신에 지성이 도달할 수 있는 확실성의 수준을 낮추어 버렸다.
37. 스코투스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혼에 관하여’에 대한 주석에서 주장한 바에 따르면 각각의 개체는 인간 지성이 현세에서 설령 죄를 지어 능력이 무뎌졌다 할지라도 파악할 수 있는 무언가이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결코 귀납을 통하여 보편에 대한 지식을 얻을 수 없을 것이며 또한 인간 개인에 대한 이성적 사랑을 할 수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개체에 대한 우리의 지식은 모호하고 불완전하다. 만일 두 개체가 감각적 속성상 서로 전혀 다르지 않다면 설령 이들이 서로 다른 개별적인 특성을 지니며 따라서 서로 다른 두 개체라 할지라도 지성은 이들을 서로 구별할 수 없을 것이다.
38. 스코투스가 생각하는 지식은 정신 안에 대상에 대한 표상이 존재함을 포함한다.
스코투스는 지식을 인식 주체 안에 종 또는 이데아가 존재하는가 그렇지 않은가라는 관점에서 기술한다. 하지만 아퀴나스에게 종이 일종의 개념, 즉 지금 논의 중인 지성의 능력인 반면 스코투스에게 종은 지식의 직접적인 대상이다. 지식에 대하여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대상 자체가 진정으로 존재해야 한다는 점은 요구되지 않는다. 하지만 대상을 나타내는 무언가가 존재해야 한다는 점은 요구된다. 종이 바로 그런 본성을, 즉 인식되는 대상이 그 안에 존재한다는 본성을 지니는데 대상은 종 안에 실제로 또는 사실상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종 안에 자신을 드러내는 방식으로 존재한다.
39. 아퀴나스는 지성의 대상 자체가 진정으로 현존한다고 생각하였다.
왜냐하면 그런 대상은 일종의 보편으로서 오직 그런 대상의 현존만이 정확하게 우리의 정신 안에 존재하는 바이기 때문이다. 반면 스코투스는 개체에 대한 지성적인 인식도 성립한다고 믿었기 때문에 감각적 인식을 모범으로 삼아 지성적인 인식을 생각한다. 내가 흰 벽을 볼 때 벽이 희다는 사실은 나의 시각과 나의 정신이 낳은 결과이다. 하지만 흰 벽 자체나 나의 눈이나 나의 정신에 현존할 수 없다. 현존하는 바는 단지 흰 벽의 어떤 표상일 뿐이다.
40. 스코투스는 직관적 인식과 추상적 인식을 구별하였다.
‘우리는 지성 안에 두 종류의 인식 또는 지적 작용이 있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그 중 하나는 모든 현존으로부터 추상화함으로써 지성 안에 존재하는 작용이며, 다른 하나는 어떤 사물이 현존을 드러내는 한에서만 그것에 관하여 성립할 수 있는 작용이다.’ 직관적 인식과 추상적 인식 사이의 구별은 감각과 지성 사이의 구별과 같지 않다. 스코투스가 현세에서 지성적 지식이 추상화에 의존한다고 굳게 믿었다 할지라도 추상적이라는 단어를 오해해서는 안 된다. 지성적인 직관적 지식과 감각적인 직관적 지식이 모두 성립할 수 있다.
41. 스코투스는 더 나아가 완전한 직관적 지식과 불완전한 직관적 지식을 구별한다.
완전한 직관적 지식은 현재 현존하는 대상에 관한 지식이며, 불완전한 직관적 지식은 과거나 미래에 현존했거나 현존할 대상에 관한 지식이다. 추상적 지식은 어떤 대상의 본질에 관한 지식인데 여기서 그 대상이 현존 하는가 그렇지 않은가라는 질문은 대답되지 않은 채 남아 있다. 스코투스에서 본질은 개체의 본질을 포함한다는 사실을 기억한다면 추상적 지식은 그저 추상적 진리에 대한 인식이 아니다.
42. 직관적 지식과 추상적 지식의 개념을 도입하면서 오컴은 파악과 판단을 구별한다.
우리는 모든 종류의 단순 명사와 명제들을 파악한다. 하지만 우리는 오직 복합적 사고에 대해서만 동의한다. 우리는 어떤 복합적 사고에 동의하지 않으면서도, 바꾸어 말하면 그것은 참이라고 판단하지 않으면서도 그것을 생각할 수 있다. 다른 한편으로 우리는 판단의 내용을 파악하지 않고는 판단을 내릴 수 없다. 지식은 파악과 판단을 모두 포함한다. 그리고 파악과 판단은 모두 현재 생각 중인 복합적 사고에 포함된 단순 명사들에 대한 지식을 포함한다.
43. 직관적 지식은 우리가 어떤 것이 현존하는지 그렇지 않은지를 바로 인식할 수 있는 그런 종류이 지식이다. 따라서 만일 그것이 현존한다면 지성은 그것이 현존한다고 곧 바로 판단하며 그것이 현존함을 분명히 깨닫는다. 그렇게 하지 못한다면 우리의 지식이 어떤 점에서 불완전하여 방해받기 때문인 듯하다.
직관적 현존은 현존뿐만이 아니라 대상의 속성과도 관련된다. 만일 소크라테스가 희다면 소크라테스와 희다는 데 대한 나의 직관적 지식은 소크라테스가 희다는 사실을 내가 분명하게 인식하도록 만든다. 직관적 지식은 우연적 진리에 대한 그 어떤 인식에서도 필수적이다. 직관적 지식에 의하지 않고는 어떤 우연적 진리도 인식할 수 없다.
44. 오컴은 순수하게 지성적인 형태의 직관적 지식도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단지 감각만으로는 지성의 판단을 불러일으킬 수 없다고 말한다. 더욱이 감각을 통해서는 지각할 수 없는, 우리 자신의 정신에 관한 우연적 진리도 수없이 많다. 그렇지만 우리는 이런 진리를 인식한다. 이는 지성적인 직관적 지식을 통해서 인식됨이 틀림없다.
45. 사물들의 자연적인 질서에서 보면 대상에 대한 직관적인 지식의 원인은 바로 대상 자체이다.
내가 하늘을 보고 별들을 쳐다볼 때 별들은 나의 감각과 지성 모두에 별들이 현존한다는 인식을 불러일으킨다. 하지만 별과 그것에 대한 나의 인식은 서로 다른 별개의 것이며, 신은 둘 중 어느 하나를 파괴하지 않고도 다른 하나를 파괴할 수 있다. 신이 이차적 원인으로 작용하여 행할 수 있는 모든 일은 또한 신이 자신의 권능을 통하여 직접 행할 수 있는 일이기도 하다. 따라서 일반적으로 별들에 의해서 일어나는 인식은 별들이 없는 상태에서 신에 의해서 일어날 수도 있다.
46. 오컴은 신은 실제로는 어떤 사물이 없는데 마치 그 사물이 있는 것처럼 우리에게 명확하게 나타나는, 그런 종류의 인식을 우리 안에 불러일으킬 수는 없다.
왜냐하면 이는 모순을 포함하기 때문이다. 명확한 인식은 우리가 동의하는 명제가 언급하는 그대로 대상들이 실제로 그렇게 존재함을 함축한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우리가 오직 참인 것만을 인식할 수 있다고 생각한 반면 오컴은 우리가 참을 인식할 수도 거짓을 인식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 듯하다. 하지만 오직 참인 것만이 명확하게 인식된다.
47. 신이 나로 하여금 무언가가 존재하지 않는데 그것이 존재한다고 판단하도록 만든다면 이때 나의 지식은 직관적이 아니라 추상적이라고 오컴은 말한다.
하지만 이는 내가 나의 지식 중 일부에 대하여 그것이 직관적인지 아니면 추상적인지 조차도 말할 수 없다는 점을 함축하는 듯하다. 만일 직관적 지식이 우리가 경험적 진리에 이르는 유일한 길인 동시에 직관적 지식이 거짓에 빠질 수도 있다면 우리는 어떻게 경험적 진리를 확신할 수 있는가? 여기에 오컴은 신이 직관적 지식과 동의 사이의 정상적인 연결이 성립되지 않게 하는 더 이상의 기적을 행할 수도 있으므로 내가 별을 볼 때 그 별이 존재한다는 그릇된 판단을 멈추어야 한다는 점을 덧붙인다.
48. 신의 지성에 속하는 창조되지 않은 빛을 반영하고 반사하는 것은 능동 지성 자체이다.
능동 지성이 감각 경험으로부터 개념을 형성하면서 자신의 원리들을 사용할 때 더 이상 신의 조명은 필요하지 않으며, 바로 이 점이 아퀴나스가 강조하려는 바이다. 진리를 인식하는 모든 과정에서 인간의 정신은 신의 작용을 필요로 한다. 하지만 본성적으로 인식되는 사물들의 경우에는 그 어떤 새로운 빛도 필요하지 않으며 오직 신의 운동과 지시만이 필요하다.
49. 만일 직관적 지식이 우리가 경험적 진리에 이르는 유일한 길인 동시에 직관적 지식이 거짓에 빠질 수도 있다면 우리는 어떻게 경험적 진리를 확신할 수 있는가?
내가 별의 현존과 관련해서 속임을 당하는 일은 분명히 오직 기적을 통해서만 일어날 수 있다. 여기에 오컴은 신이 직관적 지식과 동의 사이의 정상적인 연결이 성립되지 않게 하는 더 이상의 기적을 행할 수도 있으므로 내가 별을 볼 때 그 별이 존재한다는 그릇된 판단을 멈추어야 한다는 점을 덧붙인다. 하지만 직관적 지식 중 일부가 명확한지 그렇지 않은지, 더 나아가 지식 중 일부가 직관적인지 아니면 추상적인지를 말할 수 있는 그 어떤 방법도 없다는 사실은 계시를 통해서도 별로 위안이 되지 않는 듯하다.
50. 오컴의 견해가 즉 직관적 인식의 직접적인 대상은 그 어떤 외부의 대상이 아니라 감각적 자료와 같은 사적인 무언가라고 말함으로써 지식과 진리 사이의 연결점을 유지하려 했던 학자들과 전혀 다르다는 점은 지적할 만하다.
오컴은 만일 색에 대한 감각적 인식이 그 색이 존재하지 않는 상황에서도 신에 의해서 유지된다면 감각적, 지성적 인식 모두의 직접적 대상은 설령 색이 존재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색 자체가 되리라고 분명히 말한다.
5과
1. 신은 세계가 시작되기 전에는 무엇을 하였는가?
아우구스티누스는 장난삼아 ‘답하기 어려운 문제에 지나친 호기심을 보이는 사람들을 위해 지옥을 준비하였다.’고 대답하지만 곧 이 대답을 철회한다. 이는 매우 심각한 문제를 불러일으킨다. 만일 신이 처음에는 한가하게 있다가 그 후에 창조를 시작하였다면 이는 결코 변할 수 없는 존재가 변화하였다는 말이 아닌가? 이에 대하여 아우구스티누스가 전개한 대답은 천지가 창조되기 이전에는 시간 같은 것이 존재하지 않았으며 시간이 없으므로 변화도 없다는 것이다.
2. 신이 그 무엇이라도 창조하기 이전에 수없이 많은 시대가 흘렀다는 말은 단지 어리석은 것일 뿐이다.
신이 시대의 창조자이므로 창조 이전에는 어떤 시대도 존재하지 않았다. 당신은 시간 자체를 창조하셨으므로 당신이 시간을 창조하기 이전에는 어떤 시간도 흐를 수 없습니다. 당신이 천지를 창조하시기 전에는 시간 같은 것이 존재하지도 않았는데 시간이 없었을 때는 그때란 있을 수 없다.
3. 왜 세계가 더 빨리 창조되지 않았느냐고 물어서도 안 된다.
세계 창조 이전에는 더 빨리라는 개념 자체가 성립되지 않기 때문이다. 심지어 신에 대하여 그가 세계 창조 이전에도 존재했다고 말하는 것조차도 잘못일지 모른다. 신에게는 연속의 개념이 적용되지 않기 때문이다. 신에게는 어제 다음에 오늘이 오고 또 내일로 이어지지도 않는다.
4. 아우구스티누스에게는 오직 영원한 현재가 있을 뿐이다.
시간을 피조물로 다루면서 아우구스티누스가 시간을 우주를 구성하는 여러 요소들과 유사한 구체적 실재로 여겼다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그의 주장이 전개되면서 그가 시간을 근본적으로 실재하지 않는 것으로 여겼음이 드러난다.
5. 시간이란 무엇인가? 라고 아우구스티누스는 묻는다.
만일 어느 누구도 나에게 묻지 않으면 나는 시간이 무엇인지 안다. 만일 누군가가 나에게 물어 그에게 설명하려 한다면 나는 잘 모른다. 라고 대답을 한다.
6. 시간은 과거와 현재, 미래로 이루어진다.
과거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으며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다. 따라서 진정한 시간은 오직 현세뿐이다. 하지만 단지 현존할 뿐인 현재는 시간이 아니라 영원이다.
7. 과거도 미래도 현존하지 않는데 어떻게 이들이 길고 짧을 수 있는가?
시간을 어떻게 측정할 수 있는가? 우리가 과거의 어떤 시기가 길었다고 말하는 경우를 생각해 보자. 이는 그 시기가 지나간 지가 길었다는 말인가 아니면 현재로서 길게 이어졌다는 말인가? 오직 후자만이 의미를 지닌다. 하지만 현재란 순간에 지나지 않는데 어떻게 그 무엇이라도 현재로서 길게 이어질 수 있는가? 100년은 긴 시간이다. 하지만 어떻게 100년이 현재일 수 있는가? 한 세기 사이의 그 어떤 한 해에 대해서도 몇 년은 과거가 되며 몇 년은 미래가 된다. 어쩌면 우리는 한 세기의 마지막 해에 있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그 해조차 현재일 수는 없다. 그 해의 몇 달은 과거이며 몇 달은 미래가 되기 때문이다.
8. 한 시간 자체도 계속 달아나는 순간들로 이루어진다.
진정 현재라고 부를 수 있는 바는 눈에 보이지 않는 시간의 원자인데 한 순간 과거에서 미래로 날아가 버린다. 하지만 과거와 미래로 나누어질 수 없는, 현재라는 무언가는 지속되지 않는다.
9. 순간들을 아무리 모아도 한순간 이상이 되지 않는다.
시간상 그 어떤 시기의 어떤 단계도 결코 공존할 수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여러 단계들을 더하여 하나의 전체로 만들 수 있는가? 시간을 측정하려는 그 어떤 시도도 틀림없이 현재 이루어진다. 하지만 이미 지나가 버린 시간이나 아직 다가오지 않는 시간을 어떻게 측정할 수 있는가?
10. 아우구스티누스는 자신이 제기한 이런 복잡한 문제들에 답하면서 시간은 오직 정신 안에만 존재한다고 말한다.
그의 과거 소년 시절은 현재 그의 기억 안에 존재한다. 내일의 해돋이는 현재 그의 예측 안에 존재한다. 과거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지만 우리는 현재 이 순간에 우리의 기억 안에서 과거를 본다. 미래 또한 존재하지 않는다. 존재하는 바는 단지 현재 우리의 예상뿐이다.
11. 우리는 과거, 현재, 미래의 세 시간이 존재한다고 말하는 대신 과거 것들의 현재, 현재 것들의 현재 그리고 미래 것들의 현재가 있다고 말해야 한다.
시간의 길이는 진정으로 시간의 길이가 아니라 기억의 길이 또는 예상의 길이일 뿐이다. 내가 시간상의 시기를 측정할 때 실제로 측정하는 바는 바로 현재의 의식이다.
12. 나의 기억은 오직 한순간만을 차지하는가?
이 경우 나의 기억은 시간상 지속되지 않으며 측정될 수 없다. 나의 기억은 시간상 지속되는가? 이 경우 나의 기억 중 일부는 과거이며 일부는 미래임에 틀림없다. 따라서 어떤 경우든 측정이 불가능하다. 이런 문제를 뒤로 미룬다 할지라도 우리는 여전히 어떻게 현재의 기억이 과거의 사건을 측정하는 데 사용될 수 있는가라고 물을 수 있다. 우리는 과거의 길고 지루했던 사건을 잠시만 기억할 수도 있고 순간적이지만 충격적이었던 사건을 평생 기억하면서 살아가기도 한다.
13. 우리의 기억과 예상은 과거와 미래의 사건을 나타내는 표식이다.
하지만 그는 우리가 기억하거나 예상하는 바는 이런 표식과는 다른 무언가이며 현존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그의 역설을 다루는 방법은 시간에 관한 주관적 이론을 제시하기 보다는 오히려 문제를 꼬이게 만든 매듭을 푸는 것이다. 우리가 지닌 시간 개념은 두 개의 서로 다른 시간상의 연속으로 사용되는데 그 중 하나는 이전과 이후라는 개념을 통해서, 다른 하나는 과거와 미래라는 개념을 통해서 형성된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역설은 이 두 체계에서 연유한 실들을 한데 엮음으로써 발생하기 때문에 오직 실들을 풀 경우에만 해결될 수 있다.
14. 시간에 대한 아우구스티누스의 관심은 곧바로 기독교의 창조설을 해명하려는 관심으로 이어진다.
어떤 사람들은 신이 세계를 창조하였다는 점에 동의하면서도 이 세계가 오직 영원히 창조되는 중이라는 의미에서만 출발점을 지닌다고 생각함으로써 세계가 시간상의 어떤 지점에서 시작되었다는 생각을 거부하기도 한다. 그는 이런 사람들에게 약간의 공감을 표시하기도 한다. 이들은 예기치 못하게 갑자기 일어난 그 어떤 일도 신의 탓으로 돌리려 하지 않으며, 또한 무언가가 출발점을 지나지 않으므로 인과적으로 독립적인 경우를 충분히 생각할 수 있다.
15. 아우구스티누스의 견해에 따를 경우 세계가 영원히 존재해 왔다고 말하는 사람은 대체로 옳다.
만일 그가 의미하는 바가 단지 세계가 창조되지 않았을 때 시간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이라면 그의 생각은 옳다. 왜냐하면 시간과 창조는 함께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세계가 시작되기 이전에 시간이 존재하였다는 생각은 세계가 끝나는 곳 너머에도 공간이 존재한다는 생각과 마찬가지로 그르다.
16. 우리는 신이 이런저런 수많은 시대가 흐른 다음에 세계를 창조했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이것이 우리가 창조와 날짜를 헤아릴 수 없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우리는 현재에서 거슬러 올라가 창조의 날짜를 세어야하며 영원의 최초 순간부터 아래로 내려와 그 날짜를 셀 수는 없다. 성서는 실제로 세계가 창조된 지 6천년이 지나지 않았다고 말한다.
17. 아리스토텔레스의 제 5원소 이론에 대한 공격으로 시작된다.
제 5원소 이론이란 자신의 본성에 따라 위로 또는 아래로 운동하는 흙, 공기, 불, 물의 네 원소 외에도 다섯 번째 원소로 이른 바 에테르가 있으며 에테르의 본성에 어울리는 운동은 원운동이라는 주장이다. 이에 대하여 필로포노스는 우주에서 천상과 지상은 같은 원소로 구성되므로 본질상 같은 본성을 지닌다고 주장한다.
18. 아리스토텔레스는 모든 것이 자신과 정반대되는 요소로부터 존재로 생성되므로 천상의 세계는 영원하여야만 하며, 제 5원소의 원운동과 정반대되는 것은 없으므로 그 원소 또한 정반대되는 것을 지니지 않는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대하여 필로포노스는 복잡한 행성들의 운동은 단지 궤도를 따라 운행하는 천체들의 성향에 호소하는 것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다고 지적한다. 더욱 중요한 점은 그가 모든 것이 자신과 정반대되는 것으로부터 존재로 생성된다는 사실을 부정한다는 점이다.
19. 창조란 무로부터 무언가를 존재하도록 만드는 일이다.
하지만 이 말이 통나무를 재료로 삼아 배를 만드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비존재를 재료로 삼아 여러 피조물들을 창조함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이 말은 단지 창조의 재료가 되는 무언가가 전혀 없음을 의미한다.
20. 필로포노스는 세계가 영원하다는 주장은 기독교의 창조설뿐만 아니라 그 무엇도 유한한 수 이상의 시간적 시기를 가로질러 존재할 수 없다는 아리스토텔레스 자신의 생각과도 조화를 이룰 수 없다고 말한다.
만일 세계의 출발점이 없다면 세계는 무수히 많은 해 동안 지속되어야 하며, 더욱 심각하게도 무수히 많은 해의 수에 365를 곱한 것만큼 많은 날들 동안 지속되어야 한다.
21. 필로포노스 자신의 대답은 던져진 물체 자체 내부의 힘 때문에 운동이 계속된다는 것이다.
즉 물체를 던진 사람이 물체에 가한 비물질적이고 동적인 힘 때문인데 후에 물리학자들은 이를 운동력이라는 전문 용어로 부르게 된다. 이런 운동력 이론은 갈릴레오와 뉴턴이 운동하는 물체가 계속 운동하는 현상을 설명하는 데 그 어떤 운동의 원인도, 외부적이든 내부적이든 간에, 필요하지 않다는 놀라운 원리를 제시할 때까지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22. 필로포노스는 자신의 운동력 이론을 우주 전체에 적용하였다.
예를 들면, 천체는 영혼을 지니기 때문이 아니라 신이 천체를 창조할 때 적절한 운동력을 부여하였기 때문에 자신의 궤도에 따라 운행한다. 운동력 이론은 관성이 발견됨으로써 모습을 감추었지만 이 자체는 아리스토텔레스 이후에 일어난 커다란 진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를 통하여 필로포노스는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발견되는, 물리학과 심리학의 기묘한 혼합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23. 이븐 루슈드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운동이라는 용어가 포함하는 다양한 유형의 변화를 강조하였다.
즉 운동은 장소의 변화인 공간상의 운동, 크기의 변화인 성장을 비롯한 많은 종류의 질적인 변화를 포함한다. 그 어떤 경우의 운동도 결국에는 같은 종류의 범주에, 위치나 분량 또는 성질의 범주에 속하게 된다. 따라서 천상의 지성적 존재가 일으킨 작용이 낳는 수동적 결과와 무관하게 자연의 물체에서, 생물이든 무생물이든 간에, 일어나는 모든 변화는 어떤 내부적 행위자의 작용이다.
24. 알베르투스에 따르면 운동이란 행위자의 작용인 동시에 그 영향을 받는 쪽에서 보면 수동이다.
예를 들어, 정원사가 흙을 뒤엎는 경우 흙을 뒤엎는 일은 하나의 동일한 시간에 정원사의 작용이면서 흙에 무언가가 일어나는 사건이 된다. 그는 운동이 몇몇 범주들에 걸쳐 있는 유비추리적인 용어라는 이븐 루슈드의 생각에 동의한다 하지만 그는 이븐 루슈드가 완전한 현실성과 불완전한 현실성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구별을 충분히 파악하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25.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시간과 운동은 서로 밀접하게 연결된다.
시간은 운동의 측정이며, 시간은 운동의 지속성으로부터 자신의 지속성을 이끌어 낸다. 운동과 시간에 출발점이 있는지 그렇지 않은지는 13세기 기독교 철학자들 사이에서 신의 현존 가능성과도 연결되는 첨예한 논쟁의 주제였다.
26. 몇몇 신학자들은 신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였다.
다른 신학자들은 창세기의 가르침에도 불구하고 세계의 출발점은 순수한 철학적 추론만으로는 확립할 수 없는 무언가라고 생각하였다. 아퀴나스는 첫 번째 항목에서 세계가 영원히 존재해 왔음을 지지하는 열 가지 논증을 제시한다. 두 번째 항목에서는 세계에 출발점이 있음을 지지하는 여덟 가지 논증을 제시한다. 그는 이들 각각에 대하여 반대편에서 제기하는 반박을 소개한 후 세계는 분명히 출발점을 지니지만 이는 증명되거나 학문적으로 인식될 수 있는 무언가가 아니라 순전히 신앙에 속하는 문제라고 결론짓는다.
27. 존재하기 시작한 모든 것은 존재하기 이전에 존재할 가능성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존재로 생성될 수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만일 세계가 존재하기 시작한다면 그 이전에 존재할 가능성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 하지만 존재할 가능성을 지 닌 바는 질료로서, 이는 존재하게 될 잠재성과 존재하지 않을 잠재성을 모두 지닌다.
28. 만일 세계가 존재하기 시작한다면 세계가 시작되기 이전에 질료가 존재해야 한다.
그러나 질료는 형상이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하지만 세계의 질료에 형상을 더한 것이 바로 이 세계이다. 따라서 세계는 존재하기 전에 이미 존재했어야만 한다. 그런데 이는 불가능하다.
29. 아퀴나스는 세계가 존재하기 이전에 그것의 가능성은 질료를 이루는 수동적인 가능성이 아니라고 답한다.
존재 이전에 성립하는 가능성은 두 요소로, 즉 세계가 존재할 논리적 가능성과 전능한 신의 능동적인 힘으로 구성된다. 이와는 반대되는 측면에서 아퀴나스가 제시하는 논증 중 하나는 이미 오랜 역사를 지닌 것이다.
30. 만일 세계가 항상 계속 존재해 왔다면 오늘 이전에 무수히 많은 날들이 지나갔을 것이다. 하지만 무한한 어떤 것도 가로지르는 일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결코 오늘에 도달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는 명백히 거짓이다.
이에 대한 아퀴나스의 대답은 간략하지만 결정적이다. 가로지르는 일은 반드시 한 지점에서 시작되어 다른 지점에서 끝난다. 하지만 당신이 얼마나 이른 날을 출발점으로 잡든 간에 가로지르기는 오늘 이전에 오직 유한한 수의 날들이 지나갔음을 의미할 뿐이다.
31. 세계가 영원히 존재해 왔음에 찬성하고 반대하는 각각의 논증들에 답하는 외에도 아퀴나스는 왜 우리가 순전히 이성을 통해서만은 세계에 출발점이 있는지 그렇지 않은지를 결코 인식할 수 없는지에 대한 일반적인 이유를 제시한다.
우리는 보편 개념을 통하여 세계에 관하여 추론하는데 보편들은 구체적인 시간이나 공간과는 무관한 추상적인 개념이므로 이들은 출발점이나 종착점에 관해서는 우리에게 아무것도 알려 주지 않는다. 신에 관한 추론 또한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성은 우리에게 신에 관한 필연적 진리를 가르쳐 줄지 모른다. 하지만 신의 절대적 자유에서 생겨난, 헤아릴 수 없는 섭리에 관해서는 알려 주지 않는다.
32. 아퀴나스는 네 원소와 뜨거움과 차가움 같은 이들의 물리적 속성만으로는 지상의 매우 다양한 자연 현상을 설명하는 데 턱없이 부족하다고 주장한다.
이에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생성에 관하여를 인용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는 어떤 능동적인 원리가 작용한다고 가정하여야 하며 이 원리가 작용 하는가 그렇지 않은가가 지상의 물체들이 생성, 소멸되는 변화를 일으킨다. 그런데 천체가 이런 원리를 제공한다.
33. 지상에 자신과는 다른 종류의 것들을 존재하게 만드는 모든 것은 천체의 도구로서 작용한다.
이 때문에 사람과 해가 사람을 낳는다는 말이 등장한다. 아퀴나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이 모호한 경구를 자신이 어떻게 이해하는지를 상세히 설명한다.
34. 아퀴나스는 정액은 그것을 생산한 사람의 영혼으로부터 비롯된 능동적인 힘을 지닌다고 말한다.
이 능동적인 힘은 거품을 매개로 전달되는데 거품은 자신만의 특별한 열기를 지닌다. 하지만 이 열기는 남성의 영혼이 아니라 천체에서 비롯된다. 따라서 인간이 생성되는 맨 처음 단계에서는 인간과 천체의 힘이 동시에 함께 작용한다.
35. 아퀴나스는 지상에서 일어나는 여러 일들에는 천체가 긴밀하게 관련된다고 믿었지만 점성술사들의 주장은 그 어떤 것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는 천체가 인간의 행위에 영향을 미칠 수도 있음을 부정하지 않는다. 쉬운 예로 뜨거운 해는 내가 외투를 벗도록 만든다. 하지만 그는 결코 천체가 인간의 선택을 결정하여 점성술의 예언이 가능한 방식으로 인간에게 영향을 미치지는 않는다고 주장한다. 만일 인가의 지성과 의지가 순전히 육체적인 능력이라면 별들이 이들에 직접 작용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들은 정신적인 능력이므로 얼마든지 운명의 영향에서 벗어날 수 있다.
36. 점성술사가 전쟁의 결과를 성공적으로 예언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아퀴나스는 이는 대다수 사람들이 자신의 자유의지를 발휘하는 데 실패하고 그 대신 육체의 정념들에 굴복하기 때문이라고 답한다.
따라서 점성술사는 통계적으로 믿을 만한 예측을 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개인의 운명을 예언할 수는 없다. 그는 현명한 사람은 별들을 뛰어넘으리라는 점에는 점성술사 자신도 동의하리라고 말한다.
37. 아리스토텔레스는 질료가 무한히 분할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하지만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질료가 무한히 많은 수의 부분들로 이루어진다는 점이 아니라 질료를 얼마나 잘게 분할하였더라도 항상 다시 분할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그는 이런 무한은 오직 잠재적 존재일 뿐이라고 주장하였다.
38. 아리스토텔레스는 세계가 영원히 존재해 왔다고 믿었다.
이는 곧 무한히 많은 수의 시간 단위가 이미 지나갔음을 의미함에 틀림없다. 하지만 중세철학자들은 그의 원리를 연속체의 분할 가능성에 뿐만 아니라 창조된 세계의 지속성에까지도 적용하였다.
39. 무한한 것에는 그 무엇도 더할 수 없다.
무언가가 더해지면 원래의 것은 커지기 마련인데 무한보다 더 큰 것은 없기 때문에 이 점은 명백하게 드러난다. 그런데 만일 이 세계에 출발점이 없다면 세계는 무한히 지속되어 왔을 것이다. 따라서 세계의 지속에 그 무엇도 더 할 수 없다. 하지만 이것이 거짓이라는 점은 명백하다. 과거 해가 회전하였던 모든 경우들에 매일 다시 한 번의 회전이 더해진다. 어쩌면 당신은 세계가 과거의 측면에서는 무한하지만 지금 얻게 되는 현재의 관점에서는 현실적 유한이며, 우리가 더욱 큰 무언가를 발견할 수 있는 경우는 오직 현재의 유한한 측면과 관련해서라고 말하려 하지도 모른다.
40. 만일 세계가 영원하다면 해가 지금까지 무한히 많이 회전해 왔으며, 더욱이 해가 한 번 회전할 때마다 달은 열두 번씩이나 회전해 왔음은 의심의 여지없는 진리이다.
따라서 달은 해보다 더욱 자주 회전해 왔다. 그런데 해가 이미 무한히 많은 수의 회전을 해 왔으므로 바로 무한한 것의 측면에서도 무한을 넘어서는 무언가를 발견할 수 있다. 하지만 이는 결코 불가능한 일이다.
41. 아리스토텔레스가 상상하였던, 무한히 분할 가능한 연속체는 크기가 다른 무한이라는 문제를 일으키지 않았다.
왜냐하면 연속체의 부분들은 오직 잠재적으로만 서로 구별되는데, 잠재적 실재들은 현실적 실재와 같은 방식으로 셀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14세기에 접어들면서 몇몇 철학자들은 연속체가 눈에 보이지 않는 원자들로 구성되는데 이 원자들의 수는 무한하다고 주장하기 시작하였다.
42. 아리스토텔레스는 연속체가 크기가 없는 점들로 구성될 수는 없다고 주장하였다.
점은 부분이 없기 때문에 자신을 구별해 주는 경계를 지닐 수 없다. 따라서 두 점은 하나의 점이 되지 않고는 서로 접할 수 없다. 하지만 헨리를 두 점이 서로 접할 수 있으며 위치가 다르기 때문에 서로 합쳐질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이 이론은 이해하기 어려웠으며 브래드워딘은 이 이론이 유클리드 기하학을 무의미하게 만들어 버린다는 점을 다음과 같이 보일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43. 실재의 수를 줄이려는 자신의 전반적인 이론의 일부로 오컴은 점들이 절대적으로 존재하지는 않는다고 주장한다.
심지어 신조차도 점들이 다른 모든 실재와 무관하게 독립적으로 존재하도록 만들 수 없다. 따라서 헨리의 주장처럼 점들로 선이 구성되는 것이 전혀 아니며 단지 선 안의 극한 또는 한 지점에 지나지 않는다.
44. 점은 최근 학자들이 나열한 실체와 성질 그리고 다른 분량들과 구별되는 절대적인 무언가가 아니다.
왜냐하면 만일 그렇다면 점은 선과는 다른 무언가가 되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는 거짓이다. 점이 선의 한 부분인가 아닌가? 부분이 아니다. 이미 아리스토텔레스가 보이려고하 였듯이 선은 점들로 구성되지 않는다. 만일 점이 한 부분이 아니라면 이 둘은 결코 어느 쪽이 다른 쪽의 부분도 되지 않는, 서로 완전히 구별되는 두 가지 것이다.
45. 오컴은 현실적 무한이 불가능하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에 동의하면서 이 원리를 점이 분할 가능한 그 무엇과도 진정으로 구별되는 분할 불가능한 실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보이는 데 사용한다.
만일 점이 분할 불가능한 원자와 같은 것이라면 무한히 많은 수의 점들이 실제로 존재할 것이다. 어떤 한 조각 나무에서도 우리는 수많은 선을 발견하는데 이들 각각은 결국 점으로 이루어진다. 만일 점이 실재한다면 무한히 많은 수의 실재들이 실제로 존재하게 되는데 이는 불가능한 일이며 모든 철학에도 위배된다. 14세기 논리학자들과 자연철학자들은 공간적 연속체뿐만 아니라 시간과 운동의 연속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46. 칼빙턴은 자신이 제시한 논리적 난제 중 하나에서 거리를 가로지르는 것에 관한 문제를 제기한다.
예를 들면 소크라테스가 거리를 가로지를 때 우리는 그가 가로지르는 과정 중일 때는 어느 때는 그가 가로지른다고 말해야 하는가 아니면 그가 가로지르는 과정을 완전히 마친 후에 그렇게 말해야 하는가? 어떻게 말하든 문제가 발생하는 듯하다. 두 번째 선택지를 택한다면 소크라테스는 가로지르기를 멈춘 다음에만 가로지르는 셈이 된다.
47. 칼빙턴과 그의 동료들은 운동에 최초 순간과 최후 순간이 존재 하는가 그렇지 않은가 등의 문제를 다루기 위하여 이런 동사들을 해석하였다.
이 문제에 대한 일반적인 대답은 그런 순간들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오직 운동이 시작되기 이전에만 어떤 최후 순간이 있을 수 있고, 오직 운동을 멈춘 후에만 어떤 최초 순간이 있을 수 있다. 벌리는 최초 순간은 있지만 최후 순간은 없는것, 최초 순간은 없지만 최후 순간은 있는 것 등으로 분류하였다.
48. 스콜라철학자들은 물체가 뜨거워지는 현상을 논의하면서 전통적으로 다음 두 견해 중 하나를 택하였다.
하나의 견해에 따르면 어떤 물체가 점점 뜨거워지는 것은 열기의 요소가 더해지기 때문이다. 다른 견해에 따르면 온도의 변화는 열기와 냉기의 혼합으로 설명된다. 여기에 벌리는 제 3의 가능성을 도입한다. 즉 그는 열기의 정도라는 개념을 도입하여 이를 유일한 측정 기준으로 삼으면서 열기도 라고 부른다.
49. 벌리에 따르면 열기와 냉기는 서로 다른 두 성질이 아니라 오직 하나의 성질로 여겨져야 한다.
열기도의 한쪽 끝에는 가장 뜨거운 열기가, 반대쪽 끝에는 가장 차가운 냉기가 놓인다. 그렇다면 그는 우리가 현재 사용하는 온도의 개념을 처음 도입한 셈이 되는데 이는 이후 자연학 발전에 매우 중요한 기초로 작용하였다.
50. 아리스토텔레스는 운동을 무언가가 잠재적 상태에 있는 한에서 그것의 잠재성이 실현되는 과정으로 정의하였다.
아랍 출신의 주석가들은 이 정의를 범주의 체계과 관련지으려고 애썼다. 이븐 시나는 운동이 수동의 범주에 속한다고 보았다. 그에 따르면 자연의 모든 변화는 천상의 지성적 존재가 일으킨 작용인데 이 존재는 말하자면 아직 무엇으로도 규정되지 않는 자연 세계의 질료들에 형상을 부여하여 형상과 질료를 결합한다.
첫댓글 어라? 각각 인용구 50개가 아닐텐데
헉..
각각이 아닌데 왜 각각하셨어요ㅠ
각각이었을텐데요,,ㅋ 여지껏 각 장으로 해서ㅠ 4과 인가 5과인가 몇 장 안되요, 50개 진짜 안뽑힘.ㅠㅠㅠ
각각 아니에요 선생님이 올리신 과제 보면요 확인해 보세요 절대 각각이라는 말이 없습니다. 나머지는 각각이라고 되있는데 중세철학 3,4장부터는 각각이라는 말이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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