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미로 하는 농사
사계절이 있다는 것은 얼마나 큰 축복인가? 겨울은 추워서 싫고 여름은 더워서 싫고, 이렇게 생각하며 사는 인생은 언제나 힘들다. 철이 좀 들어선지 겨울은 추워서 좋고 여름은 더워서 좋다고 생각할 때가 자주 있다. 항상 그렇다고 말하면 위선자일 것이다. 그러나 도를 닦는 사람은 어찌하든 환경이나 상황이 자신을 흔들지 못하도록 눈뜨고 사는 연습을 해야 할 것이다. 직장 생활 힘들어 하는 딸에게 직장이 널 지배하게 하지 말고 네가 직장을 지배하라고 말해도 그게 쉬운 일이 아닌가 보다. 불교 신자도 아닌 딸에게 세상에 끄달리지 말고 주인공이 되어 세상을 이용하고(用境) 세상을 타고 가라(乘境)는 임제선사의 말이 어찌 쉽겠는가? 인생의 겨울도 좋다고 말할 수 있으면 그거야 말로 삶으로 실현되는 道일 것이다.
그래도 지난 겨울은 너무 추워 봄이 오는 것이 그렇게 반가울 수 없다. 봄엔 잎 보다 먼저 꽃이 피니 말 그대로 감탄사다. 매화, 산수유가 아름다운 것은 겨울을 녹여내어 온몸을 온통 꽃으로 드러내어 향기를 뿜어내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도 고난을 이겨내면 그럴 것이다.
봄이 오자마자 내 몸과 마음은 밭에 가 있다. 농사라 하긴 너무 부끄러워도 자기 먹거리는 자기가 해결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강화로 이사왔기에 내가 먹는 농산물은 모두 재배해 볼 생각이다. 작년엔 취미로 토끼,닭, 오리 등 가축 기르는 재미로 살았는데 그게 쉬운 일이 아니고 게다가 가능한한 육식을 하지 않으려고 올해는 가축을 기르지 않을 생각이다. 그래서 작년 겨울엔 공동으로 밭을 얻어 마늘과 양파 시금치를 심었고 봄에는 공동으로 고구마, 감자, 호박, 오이,가지, 수박,참외 등을 심을 것이다.
혼자 일하면 힘들기에 뜻을 같이 하는 이들과 함께 일하고 한잔 하며 담소하고 노래하려고 공동농장을 빌렸다. 사실 나는 농사 보다는 사귐과 놀이에 더 관심이 많다. 농사 잘 지어 팔 것이 아니고 그저 자기 먹을 것 재배하고 혹시 남으면 친지들에게 나누어 주려고 하는 것이니 수확량에는 관심이 없어 농사가 힘들 것도 없다. 심지어 우리는 벌레들도 먹고 싶은 만큼 먹고 남는 것을 우리가 먹으려 한다. 벌레들의 입이 다은 것을 함께 나누어 먹는 것도 우주와 한 식구가 되는 것이니 얼마나 엄청난 일인가. 나는 조직을 싫어하고 할 줄도 모르는데 십여년 전부터 어울림 농장과 도반소농공동체를 운영해온 오형 덕에 그냥 숟가락 하나 얹져 놓으면 되니 이런 복이 어디 있는가? 우리는 소유 개념도 없어 토지를 구매할 생각도 없이 모두 다 빌려 쓴다.
그리고 십여평 되는 개인 밭에는 심고 싶은 채소는 다 심는다. 농시지어 본 적이 없는 나는 이웃들에게 물어 아내와 함께 퇴비 사서 밭에 뿌리고 고랑를 낸 다음 각종 상추,쑥갖, 얼갈이,취나물, 곰취,고돌빽이, 열무 등 십여 종류의 씨를 파종했다. 모든게 처음 해보는 것이라 오형의 시범을 따라 하는데 서툴러도 직접 흙을 만지며 하니 어린시절 흙놀이 하던 기분을 그대로 만끽했다. 아내도 기분이 좋은지 싱글벙글이다.
우리 취미 농사의 절정은 볼음도에서의 쌀농사다. 볼음도는 강화에서도 배를 타고 한시간 반을 가야 한다. 거기서 천여평을 얻어, 유기농을 하는 다섯 농부와 농사도 짓고 갯벌에 나가 조개도 캐고 소라도 줍고 그물에 걸린 고기도 잡아 함께 놀고 먹으며 그곳 농민들과 삶을 나누려는 것이다.
전에도 몇 번 가서 그곳 농민들과 친해졌는데 세상에 그렇게 착한 사람들이 없다. 며칠 전에는 볍씨 소독 한다 해서 강화 사람 일곱명이 볼음도를 다녀왔다. 볼음도는 인구가 250명 쯤 되는데 소나 돼지도 기르지 않고 친환경 농사를 짓는데 우리와 함께 하는 농부들은 철저히 유기농을 한다.
아이들이 없어 작년에 갔을 때는 초등학생 한명, 중학생 한명이 전부였는데 초등학생 한명이 중학생이 되면서 초등학교는 폐교되고 중학생만 둘이다. 그 두 아이가 우리와 농사를 함께 하는 박씨의 자녀다. ‘우리 아이들은 몇억원 하는 과외 받고 다녀요’. 학교에 가보니 없는 것이 없고 심지어 골프 연습장도 있다. 그러나 친구가 없어 중3인 아들은 텅빈 학교에서 혼자 축구를 한다. 50 중반인 오씨가 다닐 때는 전교생이 250명이나 있었다는데 이젠 아기 울음소리가 끊어진지 오래란다. 박씨는 자기도 오십인데 볼음도에서 망내란다. 그런데 최근에 마을 사람들의 노력으로 삼십대 중반 부부가 이사왔다. 몇몇 마을 사람들이 농사지을 땅을 마련해 주었다고 한다.
볍씨 소독을 하는데 대학에서 영화를 전공했다는 그 젊은 부부와 함께 일을 했다. 요즘 세상에 보기 드문 부부라 대견스럽기도 하고 신기해서 이것 저것 묻는데 그냥 농촌에 살고 싶어 온 것이지 별 일 아니라는듯 싱겁게 대답한다. 약으로 소독하면 금방 할 일을 유기농을 한다고 십여명이 달라 붙어 쉬지 않고 몇시간을 일했다. 이렇게 몇시간씩 일해 본 적이 없어 허리가 뻐근하다. 놀듯이 재미로 하자는게 우리 생각인데 농민들은 정말 노동하듯이 일을 한다. 쉬지 않고 일하는 이유 중에 하나가 사용하는 농기계를 중단할 수 없어서 그런 것 같은데 처음이라 그냥 그들이 하는 대로 따라했지만 앞으로는 쉬면서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점심 저녁은 이장님 댁에서 정성껏 준비를 해주셨다. 나는 그냥 얻어 먹는 것이 마음에 걸려 뭘 좀 해야할 것 같다고 생각했는데 그건 이 사람들의 정성을 무시하는 거고 계산하며 주고받던 자본주의적 사고가 골수에 박혀 그런거라고 오형에게 핀잔까지 들었다. 조금이라도 피해를 주면 안되겠다는 것도 무슨 우월감에서 나온 것인지도 모른다. 아무튼 나는 후한 대접을 받은 것이 고맙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해 그리 마음편하지는 않았다.
잠자리는 오씨가 자기 집에서 자라고 낮부터 방에 불도 지피고 했는데 막상 가보니 보일러가 고장나 물이 나오지 않았다. 우리가 펜션으로 가겠다 하니 섭섭해서 어떻게든 보일러를 고치겠다고 애를 쓰며 우리를 만류했으나 결국 고치지 못해 우리는 펜션으로 갔다. 오씨는 마음이 어찌 착한지 어린 시절 시골 우리 할머니 같다. 언제든 우리가 오면 자기 일을 다 취소하고 자기 차로 조개잡는데도 안내하고 군인들이 들어가면 발포하겠다고 확성기로 방송하는 곳에 들어가서 소라도 줍는다. 실제로 소라를 잡다 군인이 찝차를 타고 우리에게 와서 심문하려 한 적도 있다.
농부 박씨는 바다에 그물을 쳐놓고 고기를 잡는데 우리가 가자 하니 비가 오는 밤인데도 우리를 데리고 바다로 갔다. 광부처럼 머리에 렌턴을 달고 목까지 올라오는 장화를 신고 트랙터를 개조한 차를 타고 갯벌을 삼십분 넘게 달려 바다 한가운데 있는 그물까지 왔다. 볼음도 갯벌은 세계삼대 갯벌에 해당된다는데 해변에서 바다쪽으로 7-8키로는 뻗어 있다. 그물이 거의 1키로는 쳐져 있었는데 우리는 한밤 중에 그 그물에 걸린 고기를 잡았다. 그물에 걸린 새우,바다가제, 망둥이, 눙어,황복, 이름 모를 고기들을 잡는데 그렇게 재미있을 수가 없다. 파도 소리와 바람소리만 들리고 세상은 온통 어둠 속인데 바다 한가운데서 갯벌을 뛰어 다니며 고기를 잡았다. 세상에 이런 재미있는 놀이를 해본 적이 있었는가?
세 상자나 고기를 잡은 후 세시간쯤 지나 밤 열시경에 펜션으로 돌아와 회를 뜨거나 끓여서 술을 먹고 얘기하고 노래하는데 밤이 가는 줄 몰랐다. 농부오씨는 젊은 시절 시를 사랑해 논두렁에서 풀을 베면서도 시를 읽었다 한다. 그래선지 오십 중반이 넘었는데도 청년처럼 낭만적이다. 별명이 찝적이라는데 특히 여자들에게 찝적이는게 취미란다. 말이 찝적이는 거지 사실은 소년 같은 장난끼다. 순수한 마음이 없으면 어찌 쉽게 여자들에게 다가 갈 수 있겠는가? 그의 주위에 사람이 많은 것은 철부지 같은 그의 순수함 때문이다. 순수함도 오해를 받으면 성추행인가? 우리는 어울리지 않게 느닷없이 성추행에 대한 얘기를 한동안 했다.
함께 간 일행 중에는 초등학교에서 30여년을 근무하다 퇴직한 교사 부부가 있었다. 부인은 꽃을 너무 좋아해 길증리 집 주위엔 온통 꽃밭이다. 나는 꽃 이름을 너무 몰라 그 집에 가서 한수 배우기로 했다. 남편 김씨는 암벽등반을 좋아해 안 가본 곳이 없고 노래를 좋아해 늘 기타를 가지고 다닌다. 오늘도 기타를 가져와 우리의 밤은 노래로 깊어갔다. 젊은 날 부르던 노래들은 슬픈 추억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서로 소식 한번 전하지 못하고, 아니 너무도 순진해서 무슨 이렇다할 사연 하나 없이 혼자서 그리워 했던 여인들이 떠오르기도 했다. 나이들수록 추억은 아름다운 것인가.
화가장씨는 강화 대안학교에서 미술 선생을 하는데 일년이면 자기 집에 친지들이 천여명은 다녀간단다. 말이든 노래든 거리낌이 없다. 사십대 여인인데 강화 온지 20년 넘게 시골에서 일하며 그림을 그리고 산단다. 일하는 것이 어찌 능숙한지 그녀는 말 그대로 일당백이다. 어찌 일을 많이 했는지 팔과 다리에 알통이 나와 나를 초라하게 할 정도다. 그녀와 갯벌로 고기 잡으러 가면서 나눈 대화들은 잊지못할 것이다.
손씨는 30년 넘게 일하다 퇴직한 다음날 강화로 이사오겠다고 집을 얻으러 왔다. 농사 지으며 시골 사람들과 어울려 한잔하고 노는 것이 그리워 달려왔다는 것이다. 나도 은퇴하자마자 강화로 왔지만 요즘은 건강이 좋기도 하고 오래 살아 은퇴야말로 제2의 인생을 시작하는 출발점이다. 나는 이제 아장아장 걷는 돌 지난 아이고 그는 갓태어난 젖먹이다. 이것이 얼마나 흥분되는지 모를 것이다.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어디든 가서 새 삶을 시작할 수 있는 것이 인생이다. 단순한 마음으로 얽힌 거미줄을 끊기만 하면 된다. 손씨의 흥분된 얼굴이 사랑스럽다.
올해 70이 된 이 여사는 강화나들길을 개척하신 분이다. 나들길을 몇 번 함께 걸었는데 어찌 그리 씩씩하신지. 벼농사도 고구마 농사도 우리와 함께 하며 솔선수범하신다. 볍씨 소독하는데도 마지막까지 10키로짜리 볍씨 100여개를 이쁘게도 쌓으셨다. 10키로짜리 볍씨면 천평의 벼를 심을 수 있는데 천평에서 나오는 쌀수확이 천이백키로가 된다니 농사는 대략 백이십배의 이문이 남는 셈이다. 놀랍고도 놀라운 일이다.
다음 날 아침 김씨가 밥과 국을 혼자서 다 준비해 놓고 우리를 깨운다. 세상엔 입만 있는 사람도 있고 이렇게 대단한 사람도 있다. 밥먹고 세시간 정도 볼음도를 한바퀴 돌았다. 볼음도 경치는 백문이 불여일견이라 그저 와보라고 권할뿐이다. 우리가 농사지을 논은 800년된 은행나무 앞에 있었다. 나무도 800년이 되면 그냥 예사롭게 볼 수가 없다. 나는 나무 신 앞에서 경건하게 두 손을 모았다.
두시 배를 타고 돌아오는데 배 안에 눕자 마자 잠이들어 외포리에 도착해서야 깼다. 이것이 우리들이 취미로 하는 농사 여행이다. 올해 몇차례 더 이곳에 올 것이다. 돈으로 계산하면 늘 적자 인생이지만 이런 일이 좋으니 누가 말릴 수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