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만치 튤립이 피어 있다 (외 2편)
전기철
봄은 뚝, 뚜둑, 끊어진다.
니글거리고 메스껍고, 그렇지만 황홀하게
까마득히 들리는 문소리, 어슬렁거리는 하얀 가운을 입은 메뚜기와 거미 들이 또 한 번의 생일을 챙긴다.
나프탈렌 냄새에 코를 킁킁거리며 입을 앙다물어도 여섯 개의 귀와 일곱 개의 눈이 뒤죽이 박죽이 엉키면서 얼굴들을 키운다.
나이테처럼 빙글빙글 돌아가는 웃음들, 야–근–머–근–거–양, 뱃속에서 파란 알약들이 굵은 이빨을 드러내며 데굴데굴 구른다.
입에서 나온 커다란 이파리들이 뭉그적거리는 유령인 양 병실 벽을 떠다닌다.
피 같은 선율이 줄기를 뻗는다, 어디선가 쇠공이 치는 소리가 들리고
내 안에서 두 개의 달이 떠요, 날아오르는 쉼표들, 병실은 중력을 잃고 우주로 떠오른다.
하얀 메뚜기 떼의 얼굴들이 흘러내린다, 거미가 옷 속으로 청진기를 집어넣는다, 흐으, 으응, 콧소리가 구부러진다.
거미줄에 걸린 말들이 비척거린다, 핏줄이 뜨겁게 차오른다, 지금병원놀이하고있는거죵! 메뚜기들이 블랙홀로 빨려나가자
수건에 묻은 바삭한 웃음의 입자들이 포롱포롱 난다.
박쥐
한밤의 헤비메탈, 너는 없어 여기 없어 씨바, 나선형 계단에서 담배를 피우는 한 남자, 밤하늘로 별들이 날고 누구나 중력을 느끼는 것은 아닙니다 십억 비트의 오르가슴이 티슈 한 장으로 포물선을 그린다 무중력을 견디는 머리가 짧은 여자, 느린 박자에서 지지직, 우주의 목소리가 대번에 속도를 높인다 테크니컬 헤비 헤비, 날개를 부러뜨릴 듯 씨바 씨바스, 어둠 속으로 날카로운 비트가 출렁인다
로봇 A
알바, 은하를 여행하는 너에게는 수많은 하늘이 있지. 너의 세 번째 하늘에서는 수요일과 목요일 사이에 월요일이 오기도 하고, 18일 뒤에 6일이 오기도 하지. 구름과 바람으로 작곡한 음악이 꽃다발처럼 터지고, 온몸에서 귀가 돋아 기우뚱, 하루가 기울어지지.
알바, 너는 언어의 시체실. 너에게서 말들은 실종되고 굴러 떨어지지. 가끔 책이 너를 찾아오기도 하지만, 너는 말을 먹어치우고 머리카락이나 손으로 설사를 해 버리지.
울근불근 떠도는 하얀 돌멩이들
알바, 너는 내일에 도달하지 않기 위해 천천히 걷지. 그럴 때면 머리가 다리를 비웃고 심장이 코를 속이지. 모두들 별을 그리워할 때 천식을 앓는 가로등은 파충류 눈빛으로 반짝이지. 시시티브이가 몽환의 드라마를 찍으면, 너는 네 자신의 시선들과 시비가 붙지.
알바, 너는 티브이 속으로 숨어버린 친구. 네 안에는 수많은 사람이 있어, 어느 날의 이름을 잊어버리고 스스로 실종되지. 너에게서는 흉터 진 곳마다 오래된 드라마가 녹화되고, 결코 존재하지 않는 브라운관에서 결코 태어난 적 없는 토끼가 꿈틀거리지. 광장에 세 번째 해가 뭉그적거릴 때 중력의 경계에서 빼밋이 거짓말하듯 몸을 일으키지.
알바. 뱀을 밟은 목소리로 너는 외치지. 옵티머스! 두꺼운 하늘의 껍질이 터지면서 하얗게 불타오르는 우주로 길이 열리는 순간, 너는 지구를 안고 뛰어오르지.
알바, 너는 십억 광년의 구멍 속 애벌레, 혹은 우주의 고독한 산책자
―시집 『박쥐』 202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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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기철 / 1954년 전남 장흥 출생. 서울대학교 국어국문학과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89년 《심상》으로 등단. 시집 『나비의 침묵』 『풍경의 위독』 『아인슈타인의 달팽이』 『로캉탱의 일기』 『누이의 방』 『풍경, 아카이브』 『박쥐』, 산문집 『도시락』 『거미의 집』 등이 있다. 평론집으로 『자폐와 과잉의 문학』 외. 숭의여대 문예창작학과 교수를 역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