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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criticism)이라는 말
-홍문표《동천문학연구총서》
*인터넷 강의가 진행중입니다.
1. 재판관과 의사
비평(criticism)이라는 말은 원래 라틴어의 criticus에서 온 말로 이는 ‘a judge’ 즉 재판, 심판, 또는 감정가, 심
사위원이라는 뜻이다. 그리스어로는 Krinein이라고 하는데 이는 ‘분할, 구분, 또는 결정하다. 식별하다, 권위 있
는 의견을 말하다.’라는 뜻이다.
따라서 문학의 본질에서부터 작품의 장단점, 작품의 가치, 작품의 방법 그리고 작가 등을 판단하고 해석하는 넓
은 의미에서의 독서행위라고 할 수 있다. 한편 近者에는 비평이란 용어에 대하여 그 어원을 위기(crisis) 또는 고
비라고 해석하여 어떤 문제성에 대한 제기와 이에 대한 해결방법을 제시하는 행위로 보기도 한다. 이는 작품뿐만
아니라 시대나 역사 또는 인생에 대한 위기를 인식하고 이에 대한 진단과 처방이라는 예언적 기능을 포함하고 있
다. 이렇게 본다면 비평은 재판관과 의사의 기능을 갖는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재판관은 정확한 판결이 생명이고 의사는 정확한 진단과 처방이 생명이다. 따라서 이러한 기능을 수행하
려면 이 방면에 전문적인 지식과 경험과 냉철한 판단력 등이 필수다.
문학 용어사전에서는, 비평이란 비평가의 개인적 취향에 의거 일련의 선택된 미학적 개념에 따라 예술작품에 관
해 의식적으로 평가(evaluation)하고 감상(appreciation)하는 일이라고 정의한다. 분석(analysis)하고 판단(jud
ge)하는 일로부터 확장되어 나온 모종의 복합적 단어라고도 한다.
문학에 관련된 일체의 논의 즉, 문학이란 무엇인가, 한 편의 문학작품의 뜻이 무엇인가, ‘작가’는 무슨 일을 하는
가, 한 작가 또는 작품의 가치는 어떠한가 등에 관한 논의를 넓은 의미에서 문학비평이라고 설명하고 있는데 이들
의 입장도 구별하고 평가한다는 비평의 어원적 개념을 크게 벗어나지 않고 있다.
그러나 비평은 반드시 전문가의 영역만은 아니다. 인간은 누구나 사물에 대한 인식능력이 있고, 가치를 발견하
고 창조하려는 본능이 있다. 따라서 어떤 문학작품이나 문학에 대한 관심과 태도의 표명은 모두 비평적 행위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하우프(G. Hough)는 비평을 독서행위라고 하였다. 다만 독서의 경우 단순한 독서에서 한 걸
음 나아가 의문을 제기하고, 분석하고, 정리하고, 비교하는 지적인 독서라고 하였다. 말하자면 비평이란 독서행위
이기는 하지만 좀 더 전문적인 독서라는 말이다. 그런데 작품을 읽는 이유는 무엇일까. 일반 서적들은 지식을 얻
기 위해 읽지만, 문학작품은 결코, 지식이나 기술을 얻기 위한 독서가 아니다. 또한 ‘비평(批評)’이란 한자어가 보
여 주듯이 판단하고 평가하는 것만은 아니다. 여기에 비평에 대한 다양한 정의가 가능하며, 더 확장된 비평의 개
념과 역할을 확인할 필요가 있다.
2. 평가와 감상
발레리는 ‘비평가는 작품을 재구성하면서 자기가 바라보는 것에 의해서 한, 판단에 도달하는 것’이라고 하여,
비평을 판단이라고 하였다. 물론 그가 말하는 판단의 비평은 정신적인 노력으로 작품을 평가하고 문체의 심리학
적 비평이 가능하다고 보는 것이지만 판단만이 비평에 대한 전부일 수는 없다. 판단의 작용을 중요시한 게 근대
비평이 실증주의, 합리주의 등에 의한 객관적 비평에 치중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비평은 ‘가치 평가만이 아니
고 작품의 이해와 鑑賞에서 시작되어야 한다.’라는 입장도 있다.
허드슨(W.H. Hudson)은 비평의 기능을 말하는 대목에서 문학비평에는 두 가지의 기능이 있다고 보았다. 곧 해
석과 판단이 그것이다. 실제에 있어서 이 두 가지의 기능은 오늘까지 혼합되어 쓰여왔다. 즉 ‘여러 비평가가 판단
을 내리는 것’을 비평의 참된 목적이라고 생각하는 동시에 그 목적에 도달하려는 방법으로서 해석을 아낌없이 허
비해왔다는 것이다,
포프(A.Pope)도 완전한 비평가는 모든 작품을 작가가 쓴 것과 같은 정신으로 읽어야 하며, 온갖 작품에 대하여
먼저 작가의 창작 의도를 생각하고, 그것을 수행하는 수단이 옳으며 적은 결점이 있어도 찬탄을 아낄 바 아니라고
하여 비평은 올바른 작품의 이해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제임스(H. James)도 비평하는 것은 감상하는 것, 이해하는 것, 지적 재산을 얻는 것, 비평대상과 비평과의 좋은
관계를 세우는 것이라고 말하고, 엘리엇은 문학비평의 기본적인 기능은 문학의 이해와 享受를 촉진하는 것이라
고 말했다.
3. 다양한 읽기
그러나 관점에 따라서는 시는 인생의 비평이라고 한 아놀드(M. Anold)나, ‘중요한 일은 어디까지나 무엇을 쓰느
냐이며 어떻게 쓰느냐는 다음의 문제’라고 한 사르트르(J. P. Sartre) 등은 비평을 통하여 현대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새로운 인간형을 탐구하고 윤리를 발견하려는 입장이다. 한편 비평은 작품의 이해는 물론이요, 그 작품
의 표현에 따르는 요소를 분석하고, 작품 자체의 조건에 의하여 연구하고 평가하려는 리차드나 웰렉 등 형식주의
입장도 있다.
또한, 루카치(G. Lukacs) 등으로 대표되는 사회주의 리얼리즘에서는 문학은 어느 역사적 특징 속에서 전형성과
총체성을 반영하여야 한다고 주장하고, 아우스(H. R. Jauss) 등을 중심으로 한 수용미학에선 독서에 의한 期待
地坪의 확장으로, 독자에 의하여 작품 속의 의미가 올바르게 수용되었을 때 그 작품은 비로소 생명체를 갖는다고
하였다. 한편 토도로프(T.Todorov) 등 구조주의에서는 작품을 구조 분석에 의해 평가하려고 하였다.
최근에는 비평이란 말을 담론(discourse)이란 개념으로 설명하기도 한다. 담론이란 시나 소설이나 비평이나 인
간의 모든 언술 행위를 지칭하는 것으로 이는 어떤 대상을 향한 언어를 의미한다. 그런데 시인이나 소설가는 사물
에 대하여, 또는 인간에 대하여 담론을 하지만 비평가는 작품뿐만 아니라 작품을 제작한 작가, 문학의 본질, 심지
어는 다른 사람의 담론에 대한, 담론한다. 이점에 대하여 바르트(R.Barthes)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모든 소설가와 시인은 상상적인 것이든, 언어 밖에 있건 언어 이전에 있건, 사물과 현상에 대해 말하는 것으로 여
겨진다. 세계가 있고, 작가는 말한다. 그것이 문학이다. 비평의 대상은 아주 다르다. 그것은 세계가 아니라 담론.
타자의 담론이다. 비평은 담론에 대한 담론이다. 그것은 일차언어, 혹은 논리학자들이 말하는 메타언어(meta lan
guage)이다.
비평이란 한마디로 담론에 대한 담론이라는 것이다. 이를 달리 말하면 이야기에 대한,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작가가 말한 일차적인 이야기를 비평가가 다시 이야기하는 이차적인 이야기라는 말이다.
결국, 이러한 여러 논의를 개괄하면 비평은 먼저 작품을 이해하고 해석하며 감상하고 평가하는 것이다, 비평은
작품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고 감상할 뿐만 아니라 분석하고 대조하여 작품의 가치를 평가하는 창조적 작업이다.
따라서 비평이라고 할 때 구체적으로는 작품. 작가. 독자 등에 대한 해석과 감상과 평가가 종합적으로 이뤄지는
창조적 작업이라고 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4. 비평의 실제
* 感性과 知性의 調和
1) 過剩된 感情
시는 감동적인 언어다. 이는 이성에 의한 사실의 전달이 아니라 감성에 의한 정서적 환기를 도모하는 언어예술
이기 때문이다. 시에 감동이 없고 정서적 환기가 없다면 그것은 과학이거나 산문과 다를 바 없는 언어다. 그래서
시인들이 감정적인 분위기를 살려고 감성에 자극되는 이미지나 리듬을 활용하게 된다.
고대 시가의 대부분이 규칙적인 운율을 사용한 시법이나 현대 시가 이미지를 통한 회화적 수법을 모색하는 일도
따지고 보면 시의 정서적 환기를 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시의 역사를 보면 지나치게 감정만을 내세우려
고 감탄적인 억양을 높이는 경우를 볼 수 있다.
바람아,
오-폭풍아 흑풍아
그 불꽃을
불어 날려라
쓸어 헤치라
몰아 무찔러라
오, 위대한 폭풍아
세계에 충만한 그 불꽃을
오, 그리고
한없고 끝없는
허무에 춤추어 비치라.
-오상순「허무 혼의 선언」에서
이 시를 보면 ‘오’라는 감탄사가 계속 반복되고 ‘아’와 ‘라’ 등의 어리로 역시 격앙된 분위기를 고조시키고 있다.
감격이나 정서적 환기란 시인 자신의 흥분된 어조로 강요되는 것이 아니라, 독자의 감성에 자극되는 감각적 언
어로 환기되는 것임을 명심해야 한다.
1920년대 많은 주정시가 실패하는 이유는 먼저 시인들 자신이 과잉된 감정의 어조를 가지고 독자들한테 호소하
려는 방식이었다는 사실과, 지나치게 어둡고 우울한 병적인 정서로 일관했다는 데 있다.
시를 쓰는 초보자가 경계해야 할 부분도 감정을 앞세워 지나치게 감탄사나 형용사, 부사 등의 수식어를 사용하
는 일이다. 시는 수식어로 꾸미는 것이 아니라, 이미지와 리듬으로 새롭게 창조하는 것이다.
여기서 이미지와 리듬에 의한 창조란 결코 감정을 무질서하게 방류하는 것이 아니라, 감정을 지적으로 절제한다
는 말이기도 하다. 시가 감정의 세계를 표현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정제된 하나의 형식으로 또는 하나의 독립
된 구조로 창조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지성의 통제가 요구된다는 말이기도 하다. 이 말은 감정과 지성의 균형적
인 조화라는 말이기도 하다.
2) 節制된 感情
서구 문학사에서 낭만주의가 세기말 사상과 결탁하여 침울하고 병적인 퇴폐주위(decadancism)로 후퇴하였을
때 主知主義가 발생했다. 우리 시사에서도 1920년대 주정시의 센티멘털리즘 [sentimentalism] 을 배격하고 193
0년대에는 이미지를 중시하는 모더니즘으로 전환한 사실을 본다면 현대시의 기법이 지나친 감정 표현에서 지성
적으로 통제된 감정이 요구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바다는 뿔뿔이
달아 날려고 했다.
푸른 도마뱀떼 같이
재재 발렀다
꼬리가 이루
잡히지 않았다.
흰 발톱에 찢긴
珊瑚보다 붉고 슬픈 생채기!
-정지용「바다」에서
이 시는 우선 시속에서 말하는 시적 화자의 주관적 감정이 전혀 개입되지 않았다. 앞서 오상순의 시를 보면 행마
다 시적 화자의 감탄과 주장이 깔려 있다. 그러나 이 시의 시적 화자는 마치 사물을 관찰하는 과학자처럼 냉정하
게 대상을 보고 객관적으로 진술하고 있다. 이를 주정시와 주지시, ‘청각시’와 ‘회화시’로 구분하기도 하는데 결국
은 화자의 감정 표현에 치중할 것인가, 화자의 감정보다는 시적 대상물을 신선한 이미지로 객관화할 것인가에 따
라서 구분된다.
여기서는 철저히 감정을 배제하고 지적인 시각에서 사물을 보고 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화자의 감정이나 화
자의 주관이 배제되었음에도 우리에게 신선한 충격을 주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다를 객관적으로 바라보면
서도 신선한 상상력을 통하여 바다를 ‘푸른 도마뱀’이라는 이미지로 형상화한 감각적 기법에 있다.
3) 感情과 知性의 等價
그러나 주지시나 회화시나 이미지가 감정을 배제한다고 해서 실제로 감정을 완전히 배제하는 건 아니다. 과거
주정시가 지나치게 감정만을 노출한 것에 대하여 이를 절제하자는 데 있을 뿐이다.
일찍이 엘리어트는 시란 감정과 지성의 等價物이라고 말한 바 있다. 시는 감정만의 것이 아닌, 적절히 지성으로
통제된 예술이란 뜻이다. 주지시라면 감정을 완전히 배제하고 오직 지적인 표현의 것만으로 생각한다. 그 수치
로 들어서 말한다면 과거 주정시가 감정 9할에 지성 1할이었다면 주지시는 감정 5할에 지성 5할로 균등하게 하자
는 것뿐이다.
김기림도 시는 언어의 건축이라고 하였다. 이는 시가 감정적 언어의 무절제한 서술이 아니라 시에 사용되는 언
어도 체계 있게 知的으로 조직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지성적인 통어력은 감정을 조절하고 상상을 조절하고 언어
를 조절하여 하나의 완결된 작품을 만들어 내게 한다는 말이다.
가장 깊은 뿌리에서
아슴히 높은 정수리까지의
내 외로움을
사람아
너에게 드릴밖에 없다.
동쪽 비롯함에서
서녘 끝 너메까지
한 솔기에 둘러 낀
하늘 가락지
돌고 돌아서
다시 오는
이 마음을
-김남조「雅歌」
이 시는 객관화된 주지시가 아니다. 오히려 자신의 감정을 표현한 주정시다. 그럼에도 화자의 감정은 애매한 구
름이나 바람이 아닌, 확실하게 절제되어 오히려 살아있는 작품이 되고 있다. 이 시는 화자의 외로움을 노래했다.
그러나 이 시에서 화자의 외로움은 분명한 공간성을 갖고 있다.
첫 연에서는 외로움의 높이가 가장 깊은 뿌리에서 아슴히 높은 정수리까지로 한정된다. 일반적으로 외로움이라
면 ‘한없는 외로움‘이니 ’참을 수 없는 외로움‘이니 하는 막연한 수식어를 사용하기가 일쑤다. 그러나 여기서는 외
로움의 깊이와 높이를 구체화시키고 있다.
또 셋째 연에서는 외로움의 넓이를 동족에서 서녘 끝까지로 정하고, 그것을 둥그런 하늘 가락지로 만든다. 외로
움의 높이와 넓이가 강렬하면서도 그것을 막연한 관념어로 처리하지 않고 ‘하늘 가락지’라는 감각적인 사물 이미
지로 구체화시키고 있음은 바로 지성의 통어력에서만 가능하다.
앞서 오상순의 시에서는 ‘오’와 ‘위대한’이란 수식어로 폭풍이 장식되어 있다. 그러나 김남조의 경우, 외로움이
‘뿌리’에서 ‘정수리까지’라는 구체적인 공간어로 감정을 지성화하고 있다. 그렇다면 감정을 지성화하고 감정을 구
체화하는 방법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상상력을 통한 이미지의 창조에서 가능하다. 따라서 감정의 구체적 표현
은 상상력을 통한 이미지의 창조에 관한 창작기술을 반드시 확인해야 한다.
-홍문표《동천문학연구총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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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홍문표님은 우병택의 스승이십니다.
제 평론보다 먼저 소개드리는 이유입니다.
긴 글을 올리셨네요
눈의 불평으로 제대로 읽지 못함이 안타깝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