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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춘천 여행
(춘천막국수·닭갈비축제 – 소양호 - 청평사)
춘천 막국수 · 닭갈비축제
춘천을 생각하면 누구나 떠올리는 음식이 있습니다. 막국수와 닭갈비입니다. 춘천의 전체 음식점 중 14%가 막국수와 닭갈비를 판다고 합니다. 이처럼 춘천의 대표 음식이 된 막국수와 닭갈비의 홍보를 위해 매년 막국수 닭갈비 축제가 열립니다. 그동안 8월 말에 개최돼 왔지만 폭우와 무더위 등 기상상황에 따른 방문객들의 불편과 위생 관리를 고려해 6월로 일정을 앞당겨 개최하고 있습니다. 올해는 6월 11일부터 16일까지 옛 미군부대였던 춘천역 앞 캠프페이지에서 개최됩니다. 막국수 주제관을 설치해 축제의 역사를 둘러보며 막국수 만들기 체험, 닭갈비 자르기 대회, 추억의 연탄닭갈비 등 다양한 체험행사도 진행됩니다. 평창의 메밀꽃축제는 9월에 시작되지만 이곳 행사장 주변에 조성된 메밀꽃밭에는 6월 초부터 순백의 꽃을 피운 메밀꽃들이 만개해 대장관을 이룹니다.
춘천에 와서 닭갈비를 못 먹어보면 춘천에 온 의미를 찾을 수 없다고 할 정도로 맛이 유명합니다. 닭갈비는 갈비 자체가 아니라 토막 낸 닭을 포를 뜨듯이 도톰하게 펴서 양념에 재웠다가 갖은 야채와 함께 철판에 볶아 먹는 요리입니다. 강원도 춘천의 향토음식으로서 춘천 닭갈비의 역사는 1960년대 말 선술집 막걸리 판에서 숯불에 굽는 술안주 대용으로 개발된 것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그것이 10년 전부터 번져나가 중심가를 파고든 것으로, 군 생활에서 휴가나 외출 나온 군인들이 즐겨 먹었고, 값이 싸고 배불리 먹을 수 있는지라 춘천 시내 대학생들도 좋아했습니다. 옛날에는 도시락에 비벼 먹었을 만큼 춘천에서 학창 시절이나 군대생활을 보낸 사람들에게 닭갈비는 구수하고 푸짐한 음식으로 기억됩니다.
춘천에서 닭갈비가 발달한 배경 중의 하나는 춘천 지역에 양축업이 성했고 도계장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닭갈비는 지금도 그 맛과 양에 비해 가격이 저렴한 편이지만 70년대 초에는 대단히 싸서 닭갈비 1대 값이 100원이었고, 별명이 '대학생갈비', '서민갈비'였습니다. 이젠, 지역향토음식이라기보다 전국적인 체인망을 갖추고 있는 대한민국 대표음식 중 하나로 자리매김했습니다. 닭고기는 백색육(White Meat)으로 결합 조직 중 지방과 염류가 타 육류에 비해 적게 포함되어 그 맛이 담백하며 닭고기의 섬유소는 부드럽고 씹기 편해 소화율이 높으며 그 향이 부드러워 다른 향신료나 식품과의 조화가 우수합니다. 닭고기에는 비타민 A의 함량이 비교적 높고 내장과 껍질에는 풍부한 단백질, 지방, 비타민이 함유되어 있습니다.
막국수란 이름의 유래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복잡한 조리과정과 재료 없이도 간단히 해 먹을 수 있다는 의미에서 생겨난 것으로 보입니다. 순 메밀가루를 반죽하여 국수틀에 뽑아낸 면을 금방 삶아내어 김치나 동치미 국물에 말아먹거나 야채와 양념으로 버무려서 식초, 겨자, 육수를 곁들여 먹으면 좋은 맛을 즐길 수 있습니다. 막국수는 메밀의 겉껍질만 벗겨 낸 거친 메밀가루로 굵게 뽑아 만든 거무스름한 빛깔의 국수로 메밀막국수라고도 합니다. 메밀가루를 뜨거운 물로 반죽하여 국수틀에 눌러 빼어 끓는 물에 삶아서 냉수에 3∼4번 헹구어 사리를 만듭니다. 김치는 큰 것이면 대강 썰고 오이는 반으로 갈라서 얄팍하고 어슷어슷하게 썰어 소금에 잠시 절였다가 꼭 짭니다. 사리를 대접에 담고 김치 국물을 부은 다음, 그 위에 썬 김치와 절인 오이를 얹고 깨소금과 고춧가루를 뿌립니다.
김치는 동치미, 나박김치, 배추김치 등을 쓰는데, 젓갈과 고춧가루가 많지 않은 맑은 김치가 좋습니다. 국물은 김치 국물과 차게 식힌 육수를 반씩 섞으면 더욱 좋지만 이 국수는 구수하고 담백한 맛이 일품입니다. 춘천 전통 막국수는 건강을 생각하는 웰빙시대의 요구조건에 딱 들어맞는 건강식이기에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춘천을 찾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꼭 한번 먹어봐야 할 맛입니다. 메밀은 단백질 함량이 높고 비타민 B1 · B2, 니코틴산 등을 함유하여 영양가가 높고 밥맛이 좋습니다. 메밀가루는 메밀묵이나 면을 만드는 원료가 되어 한국에서는 옛날부터 메밀묵과 냉면을 즐겨 먹었습니다. 섬유소 함량이 높고 루틴(rutin)이 들어 있어서 구충제나 혈압강하제로 쓰이는데, 이 루틴을 생산할 목적으로 재배하기도 합니다.
소양호·소양댐
‘대한민국 대표 낭만도시’ 춘천의 여러 명소 중 볼만하고 자랑할 만한 8곳을 3467명의 시민들에게 물어 결정한 것이 ‘춘천 8경’입니다. 춘천 8경은 삼악산, 구곡폭포, 소양2교, 소양강댐, 공지천, 김유정문학촌, 청평사, 구봉산전망대입니다. 1973년 10월에 준공된 소양강댐은 춘천, 홍천, 양구, 인제군에 접하고 있으며 29억 톤의 엄청난 담수량 때문에 ‘내륙의 바다’로 불립니다. 춘천의 대표적 관광 명소이며, 한국 건설업을 대표하는 10대 토목사업 중 하나로 선정되기도 했습니다. 근처에 물박물관이 있어 소양호·소양댐의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고 댐을 둘러싸고 있는 수려한 자연경관 때문에 관광객들의 발길이 귾이지 않고 있습니다.
북한강의 큰 지류인 소양강 하류를 막은 소양댐은 길이 530m, 높이 123m, 호수 면적 1,608㏊, 저수량 27억t, 수면 직선거리 60km, 굴곡 수면거리 120km로, 1973년 동양 최대의 사력댐인 소양강댐이 만들어지면서 생겼습니다. 면적과 저수량에서 한국 최대의 크기입니다. 드문드문 떠 있는 섬 사이로 가두리 양식장과 향어 · 송어 · 잉어 · 뱀장어 · 빙어 등 50여 종의 담수어가 사는 호수 주변의 계곡에서는 낚시를 즐길 수 있습니다. 소양댐에서 인제까지의 물길 150리는 그림과 같이 아름다워 관광객의 발길이 끊이질 않습니다. 주변의 자연경관이 수려하고 고려시대 사찰인 청평사, 그리고 바위로 유명한 오봉산이 있어 나들이 장소로 각광받고 있습니다. 소양댐 선착장에서는 청평사 행과 소양호 일주 유람선을 운항합니다.
오봉산 청평사(五峯山 淸平寺)
오봉산은 청평사 뒤편으로 솟은 산인데, 산세는 크지 않지만 다섯 개의 바위 봉우리가 연이어 솟아 있습니다. 옛 이름이 청평산이었던 이 산은 거북이상인데, 이곳 폭포수 아래에는 거북이를 빼닮은 바위가 있습니다. 언젠가는 이곳 발밑까지 물이 차오르리라는 예언이 있었는데, 이제 유람선을 타고 거북바위 턱밑까지 오게 된 것은 바로 전설이 현실로 나타난 것이라 하겠습니다. 맑은[淸] 물이 평평한[平]한 수면을 이룬 바다 같은 호수를 그 옛날에는 상상도 못했을 것입니다.
오봉산 남쪽 기슭 선동계곡에 자리한 청평사는 소양호 뱃길이 열리면서 널리 알려지기 시작했는데, 소양호와 어우러진 아름다운 풍광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찾습니다. 고려 광종 24년(973년)에 영현선사(永賢禪師)가 창건하여 백암선원(白岩禪院)이라 하였습니다. 그 뒤 폐사가 되었다가 1068년(문종 22) 이의(李顗)가 중건하고 보현원(普賢院)이라 하였으며, 1089년(선종 6) 이의의 아들인 이자현(李資玄)이 벼슬을 버리고 이곳에 은거하자 도적이 없어지고 호랑이와 이리가 자취를 감추었다고 합니다.
이에 산 이름을 청평(淸平)이라 하고 절 이름을 문수원(文殊院)이라 한 뒤, 견성암(見性庵) · 양신암(養神庵) · 칠성암(七星庵) · 등운암(騰雲庵) · 복희암(福禧庵) · 지장암(地藏庵) · 식암(息庵) · 선동암(仙洞庵) 등 8암자를 짓고 크게 중창하였습니다. 1327년(충숙왕 14) 원나라 황제 진종(晉宗)의 비가 불경과 재물을 시주하였고, 1367년(공민왕 16)에 나옹(懶翁)이 복희암에서 2년 동안 머물렀습니다. 현재의 절 이름은 1550년 보우(普雨)선사가 극락전과 그 밖의 요사채를 새로 지은 뒤 1555년(명종 10)부터 이자현의 호인 청평거사에서 이름을 따오면서부터입니다. 1711년(숙종 37)에 환성(喚惺)이 중수하였고, 1728년(영조 4)에 각선(禪覺)이 삼존불상을 조성하였습니다.
본당인 능인전은 1851년(철종 2)에 소실되었으며, 6·25전쟁 때 구광전(九光殿)과 사성전(四聖殿) 등 여러 당우가 소실되었습니다. 조선시대만 해도 스님이 백여 명에 이를 정도로 대단한 사세를 유지했는데, 6·25전쟁으로 회전문(보물 164호)만 남고 거의 폐허가 됐다가 복원되었습니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대웅전을 비롯해서 보물 제165호로 지정된 회전문과 극락보전, 적멸보궁 · 청평루 · 서향원 · 해탈문 · 불각(佛閣) 1동이 있으며 조금 떨어진 곳에 요사채가 있습니다. 사지(寺址)는 강원도기념물 제55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현재 남아 있는 불전 · 회랑 · 문 등의 초석을 통하여 전성기의 규모를 파악할 수 있습니다.
소양댐 선착장에서 배를 타고 15분이면 청평사 입구 마을에 닿습니다. 마을은 관광지가 돼 버려 번잡스럽지만 계곡으로 접어들면 신기할 정도로 한적한 깊은 계곡과 오솔길을 만납니다. 길은 느린 걸음으로 50분 정도 거리에 있는 청평사까지 이어집니다. 도중에 아홉 가지 소리를 낸다는 구성(九聲)폭포를 만납니다. 절 입구에는 고려 때 반란을 일으켰던 이자겸의 사촌동생 이자현이 이곳에 자리를 잡으면서 ‘문수원’이라는 고려정원(高麗庭苑)을 꾸며 놓았습니다. 입구의 계곡은 그 일부입니다. ‘자연스럽게’ 보이는 이 계곡은 사실은 돌을 심어 만든 인공 계곡입니다. 청평사 고려정원은 한국 전통 연못의 원형을 간직하고 있는 대표적인 조경 유적으로 평가받아 국가지정문화재 명승 제70호로 지정되는 등 문화재적 가치가 한층 높아지고 있습니다.
고려정원은 지금까지 밝혀진 정원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으로, 일본 교토[京都]의 사이호사[西芳寺] 고산수식(枯山水式) 정원보다 200여 년 앞선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1981년 지표 발굴 및 측량조사에서 원형 그대로 보존되어 있는 전형적인 고려시대의 연못인 영지(影池)와 거기서 400m쯤 떨어진 청평사 계곡 하류에서 정원 조성용 암석 및 석축을 발견하였습니다. 그곳에서 다시 2㎞ 떨어진 상류에서는 이 정원을 만든 이자현이 새긴 ‘청평식암(淸平息菴)’이라는 각자(刻字)가 발견되어 기록상에 나타나 있는 영지 중심의 대규모 고려 정원임이 확인되었습니다.
또, 구성폭포에서 식암에 이르는 2㎞, 9,000여 평의 방대한 지역에는 계곡을 따라 주변의 자연 경관을 최대한으로 살려 수로를 만들고, 계곡의 물을 자연스럽게 정원 안으로 끌어들여 영지에 연결시켰으며 주위에 정자와 암자 등을 세우는 등, 자연의 섭리에 순응하여 선(禪)을 익히는 정신수양의 도량으로 짜임새 있게 가꾸어졌음이 밝혀졌습니다. 영지는 청평사 뒤의 오봉산이 비치도록 되어 있으며, 연못 가운데 세 개의 큰 돌이 있고, 그 사이에 갈대를 심어 단순하면서도 아름답게 꾸몄습니다.
구성폭포 뒤에는 공주탑이라 부르는 3층석탑이 계곡 언덕에 숨어 있습니다. 옛날 당나라 태종에게 어여쁜 공주가 있었습니다. 대궐을 짓던 도목수 청년이 그 공주를 한번 보고난 뒤 짝사랑하다가 신분의 차이로 사랑을 이룰 수 없자 상사병에 걸렸고, 분노한 왕은 그를 죽입니다. 그가 광대였다고도 하는데, 죽어서도 공주를 잊지 못한 총각은 상사뱀으로 환생해 공주의 다리에 달라붙었습니다. 온갖 처방에도 뱀은 떨어지지 않았고 공주는 야위어가자, 부처님에게 빌어보기로 했습니다. 그러다 발길이 닿은 곳이 고려의 청평사였습니다. 밤이 늦어 동굴에서 노숙을 하고 이튿날 잠깐 불공을 드리고 오겠다는 공주의 말에, 어찌된 일인지 뱀은 10년 만에 떨어져 주었습니다. 하지만 기다리다 조바심이 난 상사뱀은 공주를 찾아 절 안으로 들어가려 했는데, 청평사 회전문 앞에서 벼락을 맞고 폭우에 떠밀려 죽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당 태종은 감사하는 마음으로 3층 석탑을 세웠습니다. 당시 공주가 은거했던 굴은 공주굴, 3층 석탑은 공주탑으로 불리며, 공주가 자주 목욕했다는 절 앞의 공주탕은 지금도 맑은 물이 철철 넘치고 있습니다. 이 천년고찰은 젊은 연인들이 많이 찾는 산사 혹은 방문객의 평균 연령이 전국에서 가장 낮은 절이라고 하는데, 산과 계곡이 어우러진 수려한 풍광 때문일 수도 있고, 소양강 선착장에서 배를 타고 들어오는 낭만적인 접근성 때문일 수도 있겠으나 아마도 청평사에 얽힌 사랑의 전설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아담하고 소박한 모습의 청평사 회전문을 처음 본 사람들은 문이 달린 것도 아니고, 빙글빙글 돌아가는 장치도 없이 그저 뻥 뚫린 통로 같은 모습을 보고 의아해 합니다.
청평사 회전문은 回轉門이 아니라 廻轉門으로, 회전(廻轉)은 윤회전생(輪廻轉生)의 줄임말입니다. 중생들에게 윤회의 전생을 깨치게 하려는 마음의 문이라는 의미입니다. 불교에서는 생명이 6가지 세계를 계속 윤회한다고 하는데, 그 사람의 말과 행동에 따라 다음 세계가 결정된다고 합니다. 그러니 지금의 현생을 잘 살아야 한다는 소리 없는 가르침입니다. 사찰에는 보통 3개의 문이 있는데, 절 입구에 일주문, 중간에 사천왕문 그리고 맨 뒷면에 해탈문이 있습니다. 청평사 회전문은 사천왕문에 해당하고, 회전문 앞쪽에 곧게 뻗은 잣나무 두 그루가 일주문 역할을 합니다. 해탈문은 불이문(不二門)이라고도 하는데, 불이는 부처와 중생이 다르지 않고, 생과 사, 만남과 이별 모두 그 근원은 하나라는 뜻입니다. 이 뜻을 알게 되면 해탈할 수 있다고 하여 해탈문인데, 청평사 계곡을 따라 올라가면 부도 2기가 있고 좀 더 오르면 해탈문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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