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청도군 화양읍은 과거 청도의 중심지였던 만큼, 유구한 역사와 함께 흥미로운 전설들이 많이 내려오는 곳입니다.
가장 대표적인 전설 3가지를 정리해 보겠습니다.
1. 청도읍성 밟기 전설: "세 바퀴를 돌면 극락에 간다"
화양읍의 상징인 청도읍성에는 부녀자들이 성벽을 밟으며 무병장수를 기원하는 풍습과 전설이 있습니다.
전설 내용: 읍성을 한 바퀴 돌면 건강해지고, 두 바퀴 돌면 오래 살며(장수),
세 바퀴를 돌면 죽어서 극락왕생한다는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유래: 과거 전쟁 시기에 부녀자들이 성을 지키기 위해 돌을 머리에 이고 나랐던 것에서 유래되었다고 하며,
지금도 매년 이를 재연하는 '청도읍성 밟기' 행사가 열립니다.
2. 적천사와 지눌대사의 호랑이 전설
화양읍 원동리에 위치한 적천사에는 고려 시대 보조국사 지눌과 관련된 신비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전설 내용: 지눌대사가 절을 중건하려 할 때, 그곳을 점령하고 있던 도적들이 비켜주지 않았습니다.
이에 대사가 남산에 올라가 가랑잎에 '범 호(虎)' 자를 써서 바람에 날리자, 그 가랑잎들이 수십 마리의 호랑이로 변해 도적들을 쫓아냈다고 합니다.
지명 유래: 이때 도적들이 놀라 달아난 고개를 다름재 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또한, 절 마당의 거대한 은행나무(천연기념물)는 지눌대사가 짚고 다니던 지팡이를 꽂은 것이 자라난 것이라는 전설도 유명합니다.
3. 고평리 '이서국' 별궁 전설
화양읍 고평리 일대는 아주 오래전 삼한시대의 부족국가였던 이서국(伊西國)의 근거지로 알려져 있습니다.
전설 내용: 마을 이름인 '고평(古坪)'이 원래 '고궁평(古宮坪)', 즉 '옛 궁궐이 있던 들판'에서 유래했다는 설입니다.
이서국의 별궁이 이곳에 있었으며,
신라와 맞서 싸울 정도로 강력했던 고대 국가의 기운이 서려 있다는 이야기가 구전으로 내려옵니다.
이서국과 신라의 전쟁은 우리 역사에서 손꼽히는 신비롭고 강렬한 기록 중 하나입니다.
특히 신라의 수도인 경주(금성)가 함락될 뻔한 절체절명의 위기 순간과 그를 구해낸 전설적인 군대 이야기가 핵심입니다.
1. 신라를 위협한 이서국의 금성 공격 (서기 297년) 삼국사 와 삼국유사 에 따르면,
신라 유례왕 14년(297년)에 이서국이 대대적으로 신라의 수도 금성(경주)을 공격했습니다.
강력한 군사력: 당시 신라는 국가적인 방어에 나섰으나 이서국의 기세를 꺾지 못해 고전했습니다.
이는 이서국이 단순한 소국을 넘어 신라와 대등하게 맞설 정도의 막강한 세력을 가졌음을 보여줍니다.
전쟁의 양상: 신라군이 패퇴 위기에 몰렸을 때, 갑자기 귀에 대나무 잎(죽엽)을 꽂은 기이한 군대가 나타나 신라군을 도와 이서국 군사를 물리쳤습니다.
2. '죽엽군(竹葉軍)' 전설과 미추왕릉
이 전쟁은 한국판 '신병(神兵)' 설화로 유명합니다.
홀연히 사라진 조력자: 이서국 군사를 격퇴한 후, 대나무 잎을 꽂은 군사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습니다.
미추왕의 음덕: 나중에 사람들이 보니 신라의 전대 왕인 미추왕(제13대)의 무덤 앞에 수만 개의 대나무 잎이 쌓여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사람들은 돌아가신 미추왕이 영혼의 군대를 보내 나라를 구했다고 믿게 되었고, 이후 미추왕릉을 죽현릉(竹現陵)이라 부르게 되었습니다.
3. 이서산성(주구산성)의 최후와 전설
금성 공격에 실패하고 퇴각한 이서국은 그들의 최후 거점인 이서산성에서 신라군과 마지막 결전을 벌입니다.
주구산성(走拘山城)의 유래:
이 성이 있는 산의 모양이 달리는 개를 닮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풍수지리적 계략:
전설에 따르면 신라군이 이 성을 함락시키지 못해 애를 먹고 있을 때,
달리는 개는 멈추게 해야 잡을 수 있다"
는 조언을 듣고 성 앞에 개떡(또는 떡 모양의 바위)을 차려 놓는 시늉을 하거나, 개의 형상을 제압하는 풍수적 술책을 써서 성을 함락시켰다는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멸망의 흔적: 이 성이 함락되면서 이서국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고, 왕은 인근의 '은왕봉'으로 피신했다는 비극적인 전설이 남아 있습니다.
4. 역사적 해석
이 설화는 단순히 신비로운 이야기에 그치지 않습니다.
김씨 세력의 부상: 죽엽군 설화는 신라 최초의 김씨 왕인 미추왕의 신성함을 강조함으로써, 당시 권력 구조가 석씨에서 김씨로 넘어가는 과정을 정당화하려는 정치적 의도가 반영된 것으로 해석되기도 합니다.
실질적인 정복: 이 전쟁을 계기로 신라는 청도 지역을 완전히 장악하고,
가야 방면으로 진출할 수 있는 중요한 교두보를 확보하게 되었습니다.
※ 화양석빙고 ※
화양읍 동천리에 위치한 청도 석빙고(보물 제323호)는 단순한 얼음 창고를 넘어,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석빙고로서 매우 중요한 역사적 가치를 지니고 있습니다.
석빙고와 관련된 흥미로운 사실과 구조적 특징을 정리해 드리겠습니다.
1. "국내 최고(最古)"의 타이틀
현존하는 전국의 석빙고는 총 6기(경주, 안동, 창녕, 청도, 현풍, 영산)인데,
그중 청도 석빙고가 1713년(숙종 39년)에 지어져 가장 먼저 만들어진 것입니다.
경주 석빙고보다도 약 25년이나 앞선 형님 격인 셈입니다.
2. 돌 하나하나에 새겨진 기록 (건성비)
석빙고 입구에는 작은 비석(석비)이 하나 서 있습니다.
여기에는 현대의 '공사 보고서'처럼 아주 상세한 기록이 남아 있어 학술적으로 가치가 높습니다.
동원 인원: 막일을 한 사람 5,451명, 돌을 나른 승려 607명.
소요 자재: 쌀 53섬, 쇠붙이 1,438근, 석회 384섬 등.
공사 기간: 2월 11일에 시작해 5월 5일에 마쳤다는 구체적인 날짜까지 적혀 있습니다.
3. 지붕이 없는 신비한 모습
보통 석빙고 하면 무덤처럼 흙이 덮인 봉분 형태를 떠올리지만,
청도 석빙고는 지붕의 흙과 기와가 유실되어 내부 뼈대가 훤히 보입니다.
덕분에 홍예(虹霓, 아치형 구조물) 4개가 나란히 서 있는 장관을 볼 수 있습니다.
오히려 지붕이 없어서 조상들이 돌을 어떻게 아치형으로 쌓아 올렸는지 그 과학적인 설계를 눈으로 직접 확인하기에 가장 좋은 장소입니다.
4. 숨어있는 과학적 설계
배수 시스템: 바닥이 입구 쪽은 높고 안쪽으로 갈수록 낮게 경사져 있습니다.
얼음이 녹아 생긴 물이 고이지 않고 바로 개울로 빠져나가게 해 얼음이 녹는 속도를 늦췄습니다.
반지하 구조: 지면에서 약 2m 아래로 파고 들어가 지열의 영향을 최소화했습니다.
석빙고가 전기도 없이 한여름까지 얼음을 보관할 수 있었던 비결은 대류 현상을 이용한 열 배출과 철저한 단열 구조에 있습니다.
그 핵심 원리 4가지를 알기 쉽게 정리해 드릴게요.
1. 더운 공기를 가두는 '에어 포켓(Air Pocket)'
석빙고의 천장은 매끄러운 평면이 아니라, 무지개 모양의 돌(홍예)을 일정한 간격으로 세워 움푹 들어간 공간들을 만들었습니다.
원리: 성질상 더운 공기는 위로 올라가고 찬 공기는 아래로 가라앉습니다.
석빙고 내부의 미세한 열기들이 위로 떠오르면, 이 움푹 파인 천장 홈에 갇히게 됩니다.
효과: 열기가 얼음이 있는 바닥 쪽으로 내려오지 못하게 분리하는 역할을 합니다.
2. 열기를 배출하는 '환기구(굴뚝)'
천장의 가장 높은 곳, 즉 에어 포켓이 있는 위치에는 외부와 연결된 구멍이 뚫려 있습니다.
원리: 에어 포켓에 모인 더운 공기는 이 환기구를 통해 자연스럽게 밖으로 빠져나갑니다.
구조: 환기구 위에는 덮개돌이 있어 직사광선이나 빗물이 들어오는 것을 막으면서 공기만 순환시킵니다.
3. 천연 단열재 '짚과 왕겨'
얼음을 단순히 쌓아두는 것이 아니라,
얼음 사이사이와 벽면 사이에 짚, 왕겨, 솔잎 등을 두껍게 채워 넣었습니다.
원리: 짚과 왕겨는 내부에 미세한 공기층을 품고 있어 현대의 스티로폼과 같은 뛰어난 단열 효과를 냅니다.
융해열 이용:
얼음이 아주 살짝 녹을 때 발생하는 '융해열'을 짚이 흡수하여 주변 온도가 급격히 올라가는 것을 방지합니다.
4. 습기와 열을 차단하는 '반지하와 배수로'
반지하 구조: 지표면의 뜨거운 열기를 피하기 위해 몸체의 절반 이상을 땅속에 묻고, 외부 지붕에는 잔디를 심어 태양 복사열을 차단했습니다.
배수로: 얼음이 녹아 생긴 물은 열을 머금고 있기 때문에 빨리 제거해야 합니다.
바닥을 경사지게 설계하여 물이 고이지 않고 즉시 밖으로 흘러나가게 했습니다.
화양읍의 청도 석빙고는 현재 천장의 흙이 덮여 있지 않아, 위에서 설명해 드린 아치형 홍예 구조와 에어 포켓을 육안으로 가장 잘 관찰할 수 있는 곳입니다.
※ 도주관(道州館) ※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212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조선 시대 청도군의 객사(客舍)로 사용되었던 건물입니다.
화양읍 서상리에 위치해 있어 청도읍성, 석빙고와 함께 도보로 둘러보기 아주 좋은 곳입니다.
1. '도주(道州)'라는 이름의 유래
'도주'는 고려 시대부터 불렸던 청도의 옛 이름입니다.
그래서 도주관은 '청도의 객사'라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이곳은 화양읍이 과거 청도 행정의 중심지였음을 상징하는 가장 대표적인 건물 중 하나입니다.
2. 객사(客舍)의 두 가지 역할
조선 시대의 객사는 단순히 잠을 자는 숙소 그 이상의 엄격한 의미를 지닌 공간 이었습니다.
전패(殿牌) 모시기:
중앙 대청(중앙의 가장 높은 건물)에는 임금을 상징하는 '전패'를 모셔두었습니다.
고을 수령은 매달 초하루와 보름, 그리고 명절마다 이곳을 찾아 임금이 계신 대궐을 향해 절을 올리는 망궐례(望闕禮)를 행했습니다.
사신의 숙소:
중앙 정부에서 내려온 관리나 외국 사신들이 머무는 국영 여관의 역할을 했습니다.
3. 건축적 특징:
위엄 있는 구조 도주관은 건물의 높낮이를 통해 격식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솟을지붕: 가운데 정청(임금의 위패를 모신 곳)의 지붕이 좌우 익사(숙소로 쓰인 양옆 건물)보다 한 단계 높게 솟아 있습니다.
이는 임금의 권위를 상징하는 구조입니다.
규모: 정면 6칸, 측면 3칸의 작지 않은 규모를 자랑하며, 조선 중기 이후의 단아하면서도 권위 있는 건축 양식을 잘 보여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