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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정치성향이 다른 분들에게 불쾌할 수 있으니 그 점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곳 태백은 바람이 몹시도 불고 추위도 다른 곳보다 더 합니다
아직 큰 눈은 내리지 않았습니다.
강추위때문에 눈이 내리지 않다가 봄이 가까이 오면
그제서야 이곳은 눈이 내린답니다
요즈음 우리나라 정국을 보면 여당 야당으로 나뉘어 대선을 놓고 갑론을박 합니다
한편은 민주주의 한편은 사회주의 지향입니다
사회주의도 여러가지이지만 한국에서 사회주의는 공산주의와 다를 바 없습니다
'요즘에 무슨 공산주의가 있겠어' 하겠지만
남북연합을 주장하며 북한의 주장을 대언하는 정책들을 보면
북한식 사회주의를 지향하고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누구나 잘 사는 나라, 전쟁없는 평화로운 나라를 만드는 것이 정치인들과
국민들의 소망이겠지만 국력이 없이는 한낱 말장난일 뿐이며 권력쟁취를 위한 쇼에 불과합니다.
우리나라가 공산주의 국가가 된다면 그 모델이 북한이나 중공이 아니었을까요?
한때 실시한 여론조사에
우리나라가 공산주의가 되어야 살 수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무려 78%였던 적이 있었다
우리나라가 이런 상황에서도 공산국가가 되지않은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현재 문정부가 해외에 다니면서 평화선언 종전선언을 선전하는것을 보면서 참 한심하다는 생각이 든다.
저런다고 북한체제가 종전을 받아들일까?
하루가 멀다하고 북한에서는 미사일 발사 실험을 하며 전쟁을 부추기는 있다.
북한 미사일이 서울에 오는 시간이 1분이내로 단축되었다.
6.25전의 상황과 무엇이 다른가?
J.Fla ( 제이플라 ) - 바보같은 STORY - YouTube
이승만과 박헌영을 비교하며
그들의 삶에서 역사의 교훈을 얻고자 한다.
이승만과 박헌영은 학창시절부터 남들과 달랐다.
두 분은 모두 두뇌가 뛰어났다.
두 분 다 영어를 잘 하여 그 당시 외국인들과 대화를 할 정도였다
두 분 다 기독교인으로 활동하였다
두 분다 감옥에 들어갔다 나왔다
차이점이라면
이승만은 감옥에서 병든 자들을 돌봐주었다
박헌영은 감옥에서 정신병자 행세를 하였다
이승만은 선교사들의 도움을 받아 미국으로 공부하러 갔다
박헌영은 일경들의 눈을 피해 모스크바로 공부하러 갔다
박헌영도 미국으로 갈 기회가 있었다
준비를 다 마쳤는데 갑자기 포기하게 되었다
여기에서 그들의 운명이 갈렸다
만일 박헌영이 미국에 가서 공부했다면 어찌 되었을까?
이승만은 미국에서 우드로우 윌슨 교수와 맥아더를 만나 그들의 도움을 받았다
박헌영은 상해에서 김단야와 친분을 쌓았으나 그에게서 많은 피해를 받았다
이승만은 미국과 상해를 오고가며 독립운동을 했고
박헌영은 소련과 중국을 오고가며 독립운동을 했다
해방후에 두 사람의 노선이 달라진다.
이승만은 미국을 본받아 부국강병을 주장하고
박헌영은 소련을 본받아 민중의 해방을 부르짖는다
이승만은 이 땅에 민주주의를 심으려 전심전력하였고
박헌영은 이 땅에 공산주의를 심으려 전심전력하였다
이승만은 전쟁시에 미국과 유엔군의 도움을 입어 나라를 구했다
박헌영은 전쟁시에 김일성과 함작하여 서울로 쳐들어 왔다
이승만은 전쟁을 공산주의 만행으로 보았고
박헌영은 미국 탓으로 돌렸다.
다음의 내용은 여러자료에서 편집한 내용이다
이승만의 출생과 청년의 삶
이승만은 고종 12년(1875년) 3월 26일 황해도 평산군에서 태어났다.
태조 이성계의 18대손이자 태종의 장남인 양녕대군의 16대손이다
몰락양반으로 남대문밖 우수현에 살았다 해서 그의 호가 우남이다
독립협회의 남궁억과 이상재 등이 군주제를 폐지하고 공화정을 수립하려한다는 사건으로
체포되자 이승만은 배재학당 학생들을 이끌고 경무처와 평리원에서 밤샘 농성을 벌여
그들을 석방시켰다. 이후 헌의6조의 실시를 약속한 고종에 의해 남궁억 등과 함께 중추원 의원에 임명되었으나
불과 한달만에 고종 퇴위 음모에 가담한 혐의로 체포되어 1899년 1월 한성감옥에 투옥되었다
24세가 되는 1899년 1월9일부터 1904년 8월7일까지 한성감옥에 갇혀있던 이승만의
5년7개월의 세월은 인생의 대전환점이 되었다.
손목엔 수갑, 발목엔 족쇄, 목에는 무거운 나무 칼을 쓴채, 조만간 처형될지도 모른다는 죽음의 공포 속에서
미결수 이승만은 모진 고문과 곤장을 맞으면서도 차입된 신약성서를 탐독했다.
“나는 감방에서 혼자 있는 시간이면 성경을 읽었다.
배재학교 다닐 때는 그 책이 아무 의미가 없었는데 어느 날 선교사가 하나님께 기도하면 응답해주신다던 말이 생각났다.
그래서 나는 평생 처음으로 감방에서
”오 하나님, 나의 영혼을 구해주시옵소서. 오 하나님, 우리나라를 구해주옵소서!“ 기도했다.
그랬더니 금방 감방이 환한 빛으로 가득 채워지는 것 같았고 나의 마음에 기쁨이 넘치는 평안이 깃들면서
내 삶의 변화가 왔다. 이승만은 형식적인 교인이 아니라 중생의 체험을 한 크리스쳔이 되었다
거듭난 기독교인이 된 이승만은 성경을 몰래 읽으면서 인간의 자유와 평등에 대한 신념을 더욱 굳게 가지게 되었으며,
옥중의 이상재, 유성준 이원긍등 양반출신 고관들과 간수장까지 무려 40여명이나 개종시켰다.
"서양에도 없는 일 한다"
이승만은 감옥에 같이 갇힌 죄수들에게 동정심이 일어났다.
어느날, 한성감옥서장 김영선에게 ‘옥중학당’ 개설을 탄원했다.
감동한 김영선은 학당운영을 허락했을 뿐만아니라
문필도구를 돕고 옥리들로부터 의연금을 거둬 지원해주었다.
1902년부터 각 칸에 있는 아이들 수십명을 모아 영어, 일어, 산수, 세계지리등을 가르치고,
어른 죄수반에서는 신학문과 성경을 가르쳤다.
선교사들은 “서양의 개명한 나라에도 없는 일을 한다”고 기뻐하면서 서적과 식품을 계속 도왔다.
지옥같은 감방에서 숨져가는 죄수들을 끌어안고 간호하였다
괴질이 옥중에 들어와 4,5일동안에 60여명이 목전에서 실려나갔다
심할때는 하루에 열일곱 목숨이 눈 앞에서 쓸어질 때에 그는 죽는 자와 호흡을 상통하며
그 수족과 몸을 만져주며, 또 시신과 함께 섞여 지내었으되 홀로 무사히 견뎌내었다
이승만은 옥중에서 희생적으로 콜레라 환자 구호운동을 통하여 자신의 신앙을 견고히 할 수 있었고,
동시에 많은 죄수들과 그 가족들에게 종교적 감화를 끼쳤다.
밖에 있는 선교사들은,
'이승만이 배재학당 다닐 때 워낙 총명하여
6개월 만에 영어를 다 떼고, 선교사들과 영어로 대화하고
6개월 후에 후배들에게 영어를 가르치고 했는데, 이런 이승만이 감옥에서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 하니'
무척 반가와했다.
'앞으로 조선 교회를 위해서, 조선 나라를 위해서 ' 이 젊은이를 살려야 겠다' 생각을 하고
고종 황제와 만난 자리에서 부탁을 하였다.
당시 고종황제의 신변이 위험했고, 명성황후(민비)가 일본 자객들에게 시해를 당했다.
이때, 고종황제는 주위 사람들을 아무도 믿을 수가 없었고, 그래서 선교사들이 밤낮으로 불침번을 썼을 때였다.
'폐하, 우리가 폐하를 이렇게 도와 드렸으니 우리 부탁도 좀 들어 주십시오.
이승만 청년이 아주 총명하고 아까운 인재인데, 역적으로 몰려서 사형 선고를 받고지금
사형을 기다리고 있으니 그 사람을 좀 살려 주시오!'
그래서 사형을 면하고 무기로 감형이 되었고, 또 다시 10년형으로 줄었다
러일전쟁이 터지고 러시아가 조선에서 물러갔다
일본이 이겼으니까 당연히 한일 합방으로 가는 형색이 되었다
'아~ 이러다가는 나라를 잃겠다. '러시아나 일본보다 더 센 나라가 어디냐?
그 나라에 부탁을 해서 우리나라의 국권을 지키도록 특사를 보내야겠다!'
그때 고종황제는 미국이 제일 강국이라는 말을 들었다.
'우리가 일본한테, 러시아 한테, 중국한테 먹히지 않도록 보호해 달라고 미국에 특사를 보내자!'
그런데 특사를 보내려면 영어를 잘 해야 되지요. 그래서 고종은 신하들한테 물었다.
'이 나라에서 영어를 누가 잘하냐?
''영어라면 이승만이다!'
그래서 한성감옥에 수감된지 5년 7개월만에 영어 잘하는 턱에 석방이 돼가지고 고종황제 앞에 섰다.
'그대의 모든 걸 사면해 줄테니, 미국에 특사로 가서, 미국 대통령에게 나의 친서를 전달하고
우리나라를 지켜 달라고 해라' 그래서 이승만이 고종황제의 특사로서 미국에 간 것이다.
그런데 을사조약으로 인해 외교 활동을 할 수도 없이 나라가 망해 버렸다.
망해 버린 나라에 돌아올 수도 없고, 차제에 미국에서 공부하자! 마음먹고 공부에 전념하였다.
이승만은 워싱턴 DC에 있는 존스홉킨스 대학에서 학사를 받고,
하버드 대학에서 석사를 받고 프린스턴에 가서 박사를 받았다.
5년 안에 이 과정을 다 마쳤다
이승만의 프린스턴 대학의 박사학위 지도 교수가 우드로 윌슨 교수였다.
'자네가 박사 학위 받았으니 미국 시민권 줄테니까 미국 대학에서 교수 생활에 해라!'
읠슨교수의 제안에
'내가 조국 독립을 위하여 살아갈 사람인데, 미국 시민권 받아 가지고 교수로 있으면
우리 해방 운동에 지장이 있다..'
하여 미국 시민권도 안 받고, 교수도 안 하고, 독립운동을 계속했다.
윌슨 교수가 나중에 미국 대통령이 되어 취임사때 이승만의 논문을 인용하기도 하였다.
해방후 이승만
1945년에 해방된 뒤에 이승만이 당연히 해방된 나라에 귀국을 해야 하는데
이승만이 고집이 세고, 자기 주관이 센데다가 '공산당은 망한다' 고 주장을 하니
한국에 있는 미군정이 이승만을 싫어하여 그가 귀국하는 것을 막았다.
1917년에 레닌혁명으로 소련이 공산화 되었는데 그때는 미국하고 소련이 친했다.
2차대전 때 동맹국으로 히틀러를 막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공산당을 그렇게 나쁘게 보지 않았는데
전세계 지식인들 중에 유일하게 , 그리고 가장 먼저
'공산당은 망한다. 공산당은 인류에 해를 끼치게 된다! 라고 말하였기 때문이다..
또 미국에서 공산당에 호의적인 미국을 비난하니
해방 이후에 한국을 통치하고 있던 미군정청에서 밉게 보고 이승만의 귀국을 저지했던 것이다.
이때 그의 귀국을 도운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맥아더 소령이었다
이승만이 프린스톤 에서 박사과정을 하는 동안에 '한국 조선 후원회'를 만들었다.
'프렌드 오브 코리아! 한국의 친구들'이라는 후원회를 만들었는데
그 후원회 회장이 하루는 자기 사위를 데려왔어요. 그러면서 말하기를
'내 딸이 얼마 전에 결혼을 했는데, 사위가 웨스트포인트 미국 육군사관학교를수석으로 졸업하고
장래가 유망할 것 같으니, 이박사가 좀 만나 보시오!'
그래서 만난 사람이 맥아더 소령이다.
이승만 박사가 맥아더 소령 하고 얘기를 해 보니 신앙도 국제정세 식견도 뛰어났다
'이 사람이 보통 사람이 아니다. 앞으로 미국을 이끌어나갈 지도자가 되겠다..'
그래 가지고 40년간 친구로서 맥아더와 친분을 쌓았다
미군정이 이승만이 조선에 오는 것을 방해하니까
이박사는 맥아더 장군에게 전화를 해서
'내가 해방된 조국에 돌아가야겠는데, 당신 부하들인 미군정이 나를 방해하니내가 귀국하도록 해 주시오!'
이말에 맥아더는 자기 전용 비행기로 귀국을 도왔다.
당시 해방정국은 상당히 소란했지요.
지금 좌파 우파, 진보 보수의 싸움 이것은 그때에 비하면 매우 평화적이다.
해방 이후에는 좌우대결에 수천 명이 서로 죽이고 죽고 암살하고 살벌하였다.
그당시 미군정청이 여론조사를 했다
'해방 이후의 코리아가 공산주의를 채택해야 되느냐, 민주주의를 채택해야 되느냐?'
이때 국민 78% 가 '공산주의 해야 된다' 라고 답했던 시절이다.
대한민국이 1948년 8월 15일에 이승만 대통령 체제로 정부가 수립되었는데
그때 태평양 미군사령관 맥아더를 초청을 했다.
대통령 취임식 때 맥아더 사령관이 경축사를 했어요.
'프레지던트 승만 리, 우리 미군은 당신 나라의 국민을 보호하고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서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당신 나라를 지켜 드리겠다.' 축사를 그렇게 한 것이다.
이승만의 성공적인 삶은 사람들에게 희망과 꿈을 줍니다.
우리는 흔한 말로 성공하려면 줄을 잘 서야 한다고 합니다
그야말로 이승만은 줄을 잘 선 사람이다
단신으로 간 미국에서의 생활이 왜 고난하지 않았겠습니까?
그 고난속에서 그는 조국을 생각하며 열심히 공부하여
대한민국을 구하게 됩니다.
해방후 국내에는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있었다.
그러나 세계정세에 대처할만한 인물은 없었다.
이때 그의 나이가 73세이다. 그 당시로서는 안방에서 곰방대물고 지내면서 시름시름 아파야 할 나이였다
이승만과 공산주의
그가 공산주의자와 처음 부닥치게 된 것은 1921년 상하이 임시정부에서였다.
당시 국무총리 이동휘는 공산주의자였다. 비록 그가 제기한 문제는 위임통치국 청원에 대한 것이었지만,
벌떼처럼 달려드는 공산주의자와 그 동조세력들에게 크게 시달렸다.
하와이로 건너간 이승만은 공산주의에 대해 빈부의 격차를 없애는 평등주의는 당(當)하나
①재산 분배
②자본가 폐지
③지식계급 폐지
④종교단체 혁파
⑤국가 소멸의 5가지는
부당(不當)하다는 글을 발표한 일이 있다 (이승만, ‘공산당의 당부당(當不當)’, <태평양잡지>, 1923년 3월호).
이는 공산주의에 대한 그의 인식을 표현한 글로, 이때만 해도 공산주의 자체를 혐오하는 수준까지는
아니었던 것 같다. 왜냐하면 1933년에는 소련에 도움을 구하러 간 일도 있기 때문이다.
해방 후의 반공주의
1945년 10월16일 귀국한 이승만은 남한의 좌우정당·사회단체 대표들이 모두 그의 지도를 받기 위해
모여든 것에 크게 고무되었다. 미 군정 또한 그의 지도력을 원했다.
이에 이승만은 10월21일 ‘공산당에 대한 나의 감상’이라는 방송 연설을 통해
“나는 공산당에 대하여 호감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그 주의에 대하여도 찬성하므로 우리나라의 경제대책을 세울 때 공산주의를 채용할 점이 많이 있다…”
라고 하여 공산주의를 포용하겠다고 선언했다(<매일신보>, 1945년 10월22일).
좌파는 환호했다. 아직 수락하지는 않았지만 이승만은 이 시점에서 그들이 세운 인민공화국의 주석이기도 했다.
연설 직후인 10월23일 각 정당·단체 대표 200여 명이 모여 이승만을 정점으로 한
독립촉성중앙협의회를 구성하기로 했는데, 여기에는 조선공산당 등 좌파 단체들도 모두 포함돼 있었다.
10월31일 이승만은 조선공산당 책임비서 박헌영을 돈암장에 불러들였고,
두 사람의 이날 회담은 원만하게 타결된 듯 보였다(<매일신보>, 1945년 11월2일).
그러나 회담에서 논의된 친일파 배제문제가 공전하자 박헌영이 반기를 들었다.
이에 이승만은 11월21일 ‘공산당에 대한 나의 관념’이라는 방송 연설을 통해
“악독한 왜적의 압박 하에서 지하공작으로 절(折)불굴하고 배일항전하던 공산당원들을
나는 공산당원으로 보지 않고 애국자로 인정한다”면서, 자신은 근로대중에게 복리를 주는
경제정책을 펴자는 공산주의자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찬성하지만, 경제정책은 어찌 되든지
공산정부만 세우자고 선동하는 공산주의자에 대해서는
“나랏일에 손해를 끼치는 이들이니 이 분자가 참으로 염려된다”고 말했다(<서울신문>, 1945년 11월23일).
좌익을 둘로 나누어 한쪽은 인정하지만 다른 한쪽은 인정할 수 없다는 연설이었다.
그러나 좌파의 정당·단체들은 그 최고사령탑인 박헌영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었다.
어느 정도 유연성을 보이던 기타 좌익단체들이 독립촉성중앙협의회로부터 모두 탈퇴하자,
이승만은 12월17일 ‘공산당에 대한 나의 입장’이라는 방송 연설을 통해
“공산분자들이 러시아(露國)를 저희 조국이라 부른다니 과연 이것이 사실이라면 우리의 요구하는 바는
이 사람들이 한국에서 떠나 저희 조국에 들어가 저희 나라를 충성스럽게 섬기라고 하고 싶다”며
공산당과 완전 결별을 선언한다(<서울신문>, 1945년 12월21일).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 이승만은 “무기 휴회된 공위가 재개될 기색도 보이지 않으며 통일정부를 고대하나
여의케 되지 않으니 우리는 남방만이라도 임시정부 혹은 위원회 같은 것을 조직하여…”(<서울신문>, 1946년 6월4일)라고 저 유명한 ‘남선단정’ 발언을 감행하게 된다. 비난 여론이 들끓었다.
그러나 그의 발언은 단순히 정권욕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이대로 두면 한반도 전체가 공산화되니
남한만이라도 건져야 하지 않느냐는 절박한 심정에서 나온 것이었다는 해석이 점차 유력해지고 있다.
이를 뒷받침해주는 것이 당시 이승만이 사용한 ‘임시정부 혹은 위원회’라는 용어다.
여기서 ‘위원회’는 다분히 그 해 2월 성립된 북한의 임시인민위원회를 의식한 단어로,
소련이 사실은 단독정권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냐고 이승만은 의심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 같은 의혹은 1993년 공개된 소련문서에 의해 사실로 입증되었다.
즉, 스탈린은 이미 1945년 9월20일 극동군 총사령관 및 제25군에게
“북조선에 반일적 민주주의 정당·단체들의 광범위한 동맹에 기초하여 부르주아 민주정권을 수립하는 데 협조하라”는
지령을 보냈고, 이에 따라 소련은 북조선5도행정위원회→북조선5도행정국→임시인민위원회를 통해
이미 북한의 단독정권을 구축해 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공산주의와 협력이나 타협이 불가능하다는 이승만의 지론은 1921년 이동휘 등과 마찰,
1933년 소련 방문 때 당한 모욕, 1943년과 1945년 좌우 연립을 둘러싼 갈등과
미 국무부의 진보적 관리들로부터 받은 수모 등 자신의 개인적 체험에 바탕을 둔 것이기도 했다.
또 그는 2차대전 후 연립정권을 구성했지만 좌우 연립은 명목이었을 뿐 결국 공산정권이 되고 만
폴란드의 사례에서 공산주의와 타협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재확인했는데,
이 점은 ‘공산당에 대한 나의 입장’이라는 그의 라디오 담화문 속에 잘 드러나 있다(<서울신문>, 1945년 12월21일).
통일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었다는 점에서 많은 비판을 받았지만 반공주의적 시각에서는
역시 보는 눈이 남달랐다고도 할 수 있다.
그의 반공주의의 완결편은 일제의 치안유지법을 거의 그대로 옮긴 국가보안법 제정이었다.
이 법에 의해 반공은 대한민국의 국시(國是)가 되었던 것이다.
[CCM] '사랑은 언제나 오래 참고' 오카리나 이중주 - YouTube
박헌영의 삶
여기 이승만과 함께 시대를 같이 한, 한 사람이 있다
‘조선의 레닌’으로 불렸던 사회주의 이론가 박헌영(朴憲永)이다
1900년 5월 28일 출생한 박헌영은 신라 문신 박제상의 56대손이다
그도 이승만과 같이 몰락한 양반의 후손이었다.
충청도 시골에서 올라와 경성고보에 입학한 소년 박헌영은 영어에 남다른 의욕을 가졌다.
그는 조선기독교청년회 야간 학교 영어과에도 입학하여 밤낮을 가리지 않고 공부했다.
박헌영은 1915년 경성고등보통학교(현 경기고등학교)에 입학하여 재학 중에는
승동교회에 출석하고, 조선중앙기독교청년회(YMCA)에서 활동하며 영어도 배우고
미국인 선교사와도 교류를 하면서 학창시절을 보냈다.
反 기독교 활동
학생 시기 YMCA에 입회하기도 하였지만, 자신의 사상을 완성한 후엔 무신론적이고 反기독교 성향을 갖게 되었다.
1920년대에 조선 내부에서 기독교를 비판하는 사회주의계와 기독교계 간에 논쟁이 치열했을 때 기독교를 비판하는
논설을 자주 싣고 반기독교 설문조사를 하기도 하였다. 다음은 그런 논설 중에 하나다.
종교는 과학과 생산기술이 낙후한 조건에서 형성되었다고 한다.
기독교는 봉건 사회에서는 제후의 이익을,
자본주의 사회에 와서는 자본가 계급의 이익을 옹호하는 도구로 기능했다.
야만 미개의 나라에 파견되어 이교도들에게 복음을 전파한다는 선교사는
몸에 촌철의 무기도 갖지 않은 정예병사로서, 제국주의 영토 확장의 첨병 구실을 한다.-《역사상으로 본 기독교의 내면》중
그는 3·1운동에 가담했고, 그 해에 경성고보를 졸업하게 되자 일제의 감시를 벗어나고자
무작정 동경으로 건너가게 됩니다. 동경에서 그는 친구 겸 동지가 된 김단야를 만난다.
이 무렵 조선 사회주의 운동가들은 박헌영⋅김단야⋅임원근 세 사람을 ‘상하이 트로이카’라고 불렀다.
임원근⋅김단야 등과 함께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 상하이지부에 입당한 박헌영은
곧 고려공산청년동맹 책임비서를 맡았다.그는 당시 고려공산당 상해 지도자였던 안병찬에게 학자금 지원을 받아 상해 상과대학에 입학하여 공부하면서 사회주의 사상을 익혔다.
1921년 봄, 그는 22세에 정식으로 고려공산당에 입당하면서, 상해로 망명한 주세죽과 결혼하였다.
주세죽은 1901년 함흥에서 태어났고 천부적인 피아노 실력과 미모를 겸비한 매력적인 여성이엇다
그당시 고명숙, 허정숙 등과 함께 막스 걸, 레닌 레이디를 지향했던 이른바 붉은 연애의 주인공이었다.
상해는 독랍운동의 본거지였고 훗날 경성고보 동창인 심훈을 만난 것도 그 시절 상해에서였다.
심훈이 1930년 <조선일보>에 연재하다가 검열로 중단된 소설 <동방의 애인>은
박헌영과 주세죽을 모델로 하여 씌어진 것이라고 했다.
또한 심훈이 쓴 시 <박군의 얼굴>에서 박군은 박헌영이 모델이었다.
그들은 사회주의 혁명으로 일본의 자본주의를 격퇴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일본이 사회주의 국가가 되면 자동적으로 조선은 독립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민주주의보다 먼저 들어온 소렴의 공산주의는 이들에게 유일한 희망이었다
박헌영은 국내 활동을 위해 주세죽과 함께 비밀 입국을 시도하다가
안동현의 한 음식점에서 일경에 체포되어 첫 번째 수감 생활에 들어간다.
1년 6개월 만에 출옥한 그는 경성으로 가서 고려 공산청년회 책임비서로 선임된다.
1924년 1월 만기 출소한 그는 동아일보·조선일보에서 기자생활을 하며 조선공산당을 창당하여
책임비서직을 맡아 본격적인 조직 활동을 전개했다. 하지만 그의 사회주의 행보를 탐탁치 않게 봤던
일제에 의해 기자직에서 해직되었고, 또 다시 일본 경찰에 체포되고 만다.
이때 체포된 박헌영은 이제 감옥으로 가면 도저히 빠져 나오지 못 할 것 같아 미치광이 행세를 하였다.
감방에서 자살 소동을 벌여 간수들과 몸싸움 끝에 온몸에 멍이 들기도 하고
심지어 자기가 싸놓은 똥을 벽에 바르거나, 먹기도 했다고 한다.
인분이 원래 독이 있어서 몸이 엄청나게 붓고 입에서 냄새가 심했다고도 한다.
결국 1927년 11월 22일에 정신병자로 병보석을 얻어 석방되었다.
야내 주세죽을 못 알아 보기도 할 정도였다.
정신과 의사는 회복이 되기 어려울 것이라는 진단을 내렸다.
이 모습을 본 박헌영의 경성고보 동창인 영화인 겸 소설가 심훈은 박헌영을 박군이라고 지칭하며
"박군의 얼굴"이라는 시를 쓰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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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헌영은 출감후 정신병원에 다니고 고향 등에서 요양에 전념했다.
박헌영부부는 해산을 앞두고 함경도로 거주지를 옮겼다.
처가가 함경남도 함흥에 있어 일본 경찰의 의심은 사지 않았다.
박헌영은 1928년 8월 만삭의 주세죽과 함께 몰래 배를 타고 소련 블라디보스토크에 안착했다.
주세죽은 소련정부의 도움을 받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딸 비비안나를 낳았다.
부부는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고 1928년 11월 모스크바에 도착했다.
박헌영은 망명혁명가로 인정을 받아 1928년 2월 소련공산당에 입당하고
그해 9월 김단야가 1년 전 졸업한 국제레닌학교에 입학했다.
주세죽도 김단야의 부인인 고명자가 다닌 동방노력자 공산대학에 1929년 입학했다
1931년 부부는 학교를 졸업하였다
1932년 1월 모스크바를 떠나 1932년 1월 상해에 도착했다
상하이에 조선공산당을 재건하라는 코민테른(국제공산당)의 지령에 따라
딸 비비안나를 모스크바의 육아원에 맡겨두고 상하이로 갔던 것이다.
박헌형은 김단야와 함께 상하이에서 공산당 조직을 재건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박헌영이 1933년 7월 상하이 일본영사관경찰에 또 다시 체포된다.
일제는 이 무렵 김단야를 체포 대상으로 노리고 있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먼저 박헌영이 체포된 것이다.
박헌영은 주세죽을 찾아 나섰는데, 어느 한 집에 주세죽과 김단야가 같이 있음을 알고 놀라 기웃거리다
마침 김단야를 잡으려 나온 일경에 체포되었다. 박헌영은 집에 있는 김단야에게 도망할 기회를 주기 위해
허위진술을 하며 일경들을 이리저리 끌고다녔다. 이틈에 주세죽과 김단야는 일경의 포위망을 빠져나갈 수 있었다.
박헌영은 국내로 압송되고, 김단야와 주세죽은 간신히 탈출해 모스크바로 도피한다.
김단야와 주세죽은 모스크바로 가는 동안 불륜의 관계를 이어간다.
이미 박헌영은 김단야와 주세죽의 관계를 눈치채고 있었고, 그의 딸도 자기의 딸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가지고 있었다.
주세죽에게 박헌영은 목숨보다 더 소중한 사랑하는 남편이자 혁명동지였고,
김단야에게 박헌영은 혈육보다 더 가까운 친구이자 생사를 같이 하기로 한 평생 동지였다.
그런 박헌영이 감옥에서 고문으로 생사의 고비를 넘나들고 있는 동안 마침내 모스크바에서 결혼하기에 이르게 된다.
김단야는 아내 고명자의 남편이었다. 불륜과 배신을 저지르고 부부가 된 이들은 행복했을까?
6년의 형기를 마치고 출옥한 박헌영은 이들의 불륜과 배신을 당 차원에서 문책해야 한다는 당원들에게
이 문제에 관해 함구해 줄 것을 요청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조선공산당원 김춘성이 ‘김단야는 일본의 밀정’이라는 내용의 ‘비밀 상신서’를 온갖 위조 자료와 함께
코민테른 집행위원회 비서부에 은밀히 보고했다.
1937년 11월 김단야는 소련 비밀경찰에 체포되어 소련 최고재판소 군사법정에서 1급 스파이라는 죄명으로
사형을 선고받고 1938년 38세의 한창 나이에 처형된다.
짧은 생애를 붉은 혁명이라는 환상을 쫓아 불꽃처럼 뜨겁게 살다가 그 붉은 불꽃에 의해 불타버린 실로 어이없는 일생이었다.
김단야와 함께 체포된 주세죽은 ‘1급 범죄자의 아내’로서 모스크바에 있는 딸 비비안나와도 헤어진 채
카자흐스탄으로 추방되었다. 카자흐스탄에서 그녀는 집단농장원, 봉제공장 직공 등으로 전전하며 생계를 유지했다.
1953년 주세죽은 이 세상에 단 하나뿐인 혈육 비비안나가 보고 싶어 카자흐스탄 크질오르다에서 수천리길인
모스크바로 달려가던 중 폐렴에 걸려 모스크바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의식을 잃고 사경을 해매는 상태가 되고 말았다.
러시아 민속무용가로 성장한 딸 비비안나는 순회공연을 떠나 모스크바에 없었다.
그녀는 모스크바에서 사위가 혼자 지켜보는 가운데 1953년 54세의 나이로 쓸쓸히 숨을 거두었다.
출감한 박헌영은 제2차 경성 콤의 검거망을 벗어나려고 전라남도 광주로 피신했다.
그는 종연 방직공장 청소부로 일하다가 이름 없는 벽돌공장 노동자로 직업을 바꿨다.
1944년 그는 경성에 있는 소련 영사관과 비밀리에 접촉하여 전남 일원의 콤 조직 재건에 착수하다가
8·15해방을 맞이하게 되었다. 남조선노동당 최고 지도자로 재기한 그는 점령사령관 하지, 군정장관 아놀드,
그리고 미국에서 돌아온 이승만 등과 회담을 벌이며 단정 수립을 저지하려고 필사의 노력을 벌였다.
그는 김일성을 만나기도 하고 소련 영사와도 회담하며 분단을 막으려고 끝까지 고군분투했다.
그는 남북한을 세 차례나 오가며 지도자들을 만났다. 그러다가 그는 미 군정 경무국에 의해
폭동 음모 혐의로 금 120돈의 현상금이 걸려 수배되었다. 그는 북한으로 넘어갔다.
박헌영의 투쟁의 대상이 일제에서 미국으로 바뀌게 되었다
그가 북한으로 피신하게 된 경위는 다음과 같은 사건때문이었다.
어느 분의 증언이다
그때 남한의 공산당 지도자가 박헌영 인데 아주 천재이다.
조직과 선동에 아주 뛰어난 사람이다. 이 사람이 충남 예산 사람인데,
조선 노동당을 조직해가지고 당원 100만명을 모았다.
게다가 국민들의 78% 가 '신생 대한민국은 공산주의로 나가야 된다' 하니까
투표를 하면 이승만이 대통령에 당선될 수가 없는 거지요.
박헌영이 대통령 되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해방 이듬해 1946년 4월에 박헌영이 죽을 꾀를 쓴 거예요.
왜냐? 1백만 당원을 운영하고 집권하는 운동을 하려니까 자금이 모자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위조지폐를 만들었다. 일제 시대에 조선 돈을 찍던 인쇄소를 사들여서,
지하실에 돈찍는 설비를 해 놓고서는낮에 일꾼들이 '공산당 해방일보'라는 신문을 찍어내고
저녁에 인쇄소 직원들 다 퇴근 시키고, 공산당 지도부 12명이 밤새 돈을 찍었습니다.
그때 돈 100원 짜리 지폐를 엄청나게 찍어 가지고, 밤새 찍으면 한 트럭이 나왔습니다.
이걸 전국에 돌려서 공산당 당비로 썼는데, 너무 많이 찍었어요.
위조지폐가 막 돌아다녀서 인플레가 되고 경제가 어려워지니까조사를 시켰더니,
위조지폐 찍는 장소가 뚝섬에 있는 '조선정판사' 임이 밝혀졌습니다.
그래서 미군정청이 돈 찍는 현장을 발각하고, 돈 찍는 판을 압수하고그 12명을 조사를 해 보니까
뒤에 박헌영이 있다는 것을 밝혀내고, 박헌영 체포령을 내렸습니다.
그래서 박헌영이 북한으로 도망을 가서, 당시 김일성 밑에 가서 부수상 및 외무부 장관을 했지요.
김일성이 수상이었죠. 그냥 이름만 있지 실권은 다 김일성 한테 있는 것이지요.
1950년 4월 김일성과 박헌영은 모스크바를 방문하여 비밀 회담에서 북한의 선제 남침에 대한
스탈린의 동의를 얻어내는 데 성공했다.
또한 김일성과 박헌영은 베이징에 도착하여 마오쩌둥과 면담하고 남침 계획에 대한 동의를 얻어낸다.
이어 5월 29일에는 강건 조선인민군 총참모장과 바실리에프 소련 군사고문단장 사이에
‘선제타격작전계획’이 완성되고 6월 16일 스티코프를 통해 스탈린의 최종 동의를 받게 된다.
마침내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김일성은 자신의 권력 야심에 동족상잔의 전쟁을 일으키는 만행을 저지르고 만다.
소련제 탱크와 무기를 앞세워 갑자기 쳐들어온 북한 인민군 앞에 국군은 힘없이 무너졌다.
하지만 갑자기 서울을 점령한 인민군은 잠시 머뭇거리게 된다.
김일성은 너무 쉽게 무너진 남한에 뭔가 의문을 품게 되었고, 또한 “개전이 되면 20만 남로당원의 호응에
남한은 3일 만에 무너질 것"이라는 박헌영의 주장 때문에 서울을 점령한 북한군은 3일이라는
귀중한 시간을 진격을 멈추고 그걸 기다리는 데에 써 버렸다. 남한에게는 기적과 같은 시간이었다.
하지만 박헌영의 호언장담과 달리 남쪽에선 인민군을 돕는 어떠한 움직임도 없었다.
즉 박헌영이 자랑하던 남로당원 조직의 실체는 그야말로 허상이었다.왜냐하면 이미 남로당들은
대구 10.1 사건, 여순사건, 제주 4.3 항쟁 등을 거치면서 미군정과 이승만 정권의 검거 열풍으로
좌익계 대중조직과 남로당 조직은 모조리 괴멸되었고, 대부분의 간부들은 월북 또는 전향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여기에다 이승만 정권이 좌익계 활동 경력이 있으면 이미 전향한 사람들까지 모조리 잡아가서
대량 학살해버렸기에 남쪽에는 그야말로 사회주의 및 좌파 진영의 씨가 말라버렸다.
이것이 이른바 보도연맹 학살사건인데 좌익계 간부 출신은 물론 단지 좌익 쪽 집회에 몇 번 나갔을 뿐인
단순참여자와 아무 관련이 없는 민간인들까지 마녀 사냥 식으로 학살해 버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박헌영이 주장한 무장 봉기는 커녕 파업 비슷한 것도 없었다.
김일성은 전세가 뒤집힌 다음에
"남조선 노동자들이 파업으로 물자 수송을 3일만 막아줬어도 전쟁 이겼다"면서 박헌영에게 불같이 화를 냈다고 한다.
실제 전쟁 초기 낙동강 방어선까지 몰렸을 때 국군은 궤멸 상태였고, 미군은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았으니
만약 부산, 대구 등지에서 민중봉기 혹은 노동자 파업으로 군수품 수송이 지체가 됐다면 정말 어떻게 될지 몰랐을 것이다.
결국 김일성의 인민군은 서울 점령 후 3일간의 어이없는 지체 덕분에 UN군과 국군에게 대응할 기회를 주어버렸다.
전쟁이 소강상태로 접어들었던 1952년. 당시 김일성은 6.25 남침의 실패에 대한 책임 추궁에 대한 두려움으로
소련과 중국으로 도망하려고도 했다. 그에게는 뭔가 변화가 필요했다.
그가 생각한 변화는 실패한 전쟁의 책임을 반대당에게 뒤집어씌우는 것이었다. 1952년 8월 3일 남로당계의 거물 리승엽을 비롯한 13명을 '북한 정권 전복 음모와 반국가적 간첩테러,
선전·선동행위에 대한 사건'의 연루자로 즉, '미제의 스파이' 라는 명목으로 체포했다.그해 10월 박헌영도 체포당하면서 '반란'에 대한 후원자로 몰리면서 가택 연금 되었다.
이후 박헌영은 한국전쟁 휴전 직전인 1953년 3월 '미제의 스파이', '반당 종파분자' 등의 죄목으로 몰려 체포되었다.체포된 박헌영은 자신에게 뒤집어씌워진 혐의를 모두 부인했지만, 당에서 제명당하고 부총리 겸 외무상의 직위에서도
해임당하고 만다. 이후 평안북도 철산군(鐵山郡)의 정치수용소에 감금되어 고문을 당했다.당시 김일성은 박헌영이 연안파 세력과 손을 잡을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있었으며,
남로당계의 거두 박헌영은 김일성에게 상당한 위협이었다.마침내 김일성은 자신의 측근 방학세를 불러
“그 리론가 어떻게 됐어? 증거는 찾았어?”라고 물었고
나중에는 "증거고 뭐고 필요없다! 오늘 밤 이내로 즉시 목을 따버려!"라면서
그의 수하 방학세와 김영철을 시켜 박헌영을 처형시켜 버렸다.
박헌영은 1955년 12월 15일 ‘미국의 첩자 및 정부 전복 음모’ 등의 죄목으로 사형을 언도받고 처형되었다.
남한을 공산화하려고 벌인 전쟁이 박헌영이 몰락한 것은 원인이 되었다
요즈음 북한에게 굴종적으로 다가가며 그들을 도와주려는 정치인들을 보면 한심하다.
그렇게 지상낙원이라며 위대한 영도자 김일성의 자식들이 통치했던 나라인데 왜 도와주어야 하는지.
그렇게 도와주고 협력해도 고맙다는 말대신 폭력을 행사하는 저들에게 왜 말도 못하고 있는지.
그런나라에 왜 길까지 놔주고 공항까지 지어주자고 하는지.
박헌영이 했던 일들을 똑같이 반복하고 있는 지금의 진보라 자처하는 권력자들.
민중을 해방시킨다는 말에 자아되취되어 자기들의 행동이 정의라고 합리화시키고 있다.
자신도, 자신의 가족도 불행하게 만드는 사람들이.
권력을 잡고서는 온갖 부정부패에 빠져 자신의 죄를 숨기는 사람들이
남을 해방시키기 위해 개혁을 해야 한다니 기가 찬다.
5.18로 각종 혜택을 누리며 이 땅에서 박헌영의 길을 가는 자들이,
기독교인이면서 반기독적인 마르크스와 모택동의 길을 걷는 자들이,
아무쪼록 이승만의 애국심을 보고
돌아서서, 이 나라를 이롭게 하는 자들이 되기를...
아울러 박헌영이 늘 주장한 민족해방이
북한땅에서 빨리 이루어지기를...
끝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정치적인 성향이 다를 수도 있으니 양해해주시기 바랍니다.
J.Fla - Hand In Hand ( 손에 손잡고 ) - YouTube
첫댓글
이승만,박헌영,두사람의 일대기를 처음으로 디테일하게 알아보았습니다,
가물 가물하던 역사~다시생각 해보며ㅡ
이글을 올리신 도토리님 땡큐~
옛것를 알아야 할텐데 요즘 교육이 문제여?
전교조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