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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닥친 폭풍(35-38)
예수님께서는 행하시는 기적들은 눈으로 보는 비유의 역할을 합니다. 기적들은 모두 하나님 나라가 사탄의 나라를 이기고 이 땅에서 역사함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그런 기적들을 보고도 모든 사람들이 다 예수님을 메시아로 이해하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싶다고 말한 것도 아닙니다. 눈으로 보는 사람들의 반응도 각양각색이었습니다.
35그 날 저물 때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저편으로 건너가자 하시니 36그들이 무리를 떠나 예수를 배에 계신 그대로 모시고 가매 다른 배들도 함께 하더니 37큰 광풍이 일어나며 물결이 배에 부딪쳐 들어와 배에 가득하게 되었더라 38예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시더니 제자들이 깨우며 이르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죽게 된 것을 돌보지 아니하시나이까 하니(35-38)
예수님께서는 날이 저물 때까지 배 위에서 청중들에게 하나님 나라를 비유로 가르치셨습니다. 저녁이 되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배에 몸을 실고 갈릴리 동쪽으로 가자고 명령하셨습니다. 예수님께 열광한 무리들이 그대로 물러 설리 없습니다. 그들도 배를 타고 예수님을 뒤따라 왔습니다.
(1) 생생한 제자훈련을 계획하시는 예수님(35-36)
직전 단락에서 예수님께서는 비유를 통해서 제자들을 가르치셨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미스터리’를 비유를 통해서 설명했습니다. ‘그날 저물 때에’란 표현은 문맥 속에서 예수님께서 비유를 통해서 제자들을 가르치셨던 날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표현은 예수님의 제자훈련이 지속적으로 진행되고 있다는 느낌을 줍니다. 예수님의 가르치심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비유를 통해 가르치셨던 주님은 이제 시작할 여행을 통해서 가르치려고 계획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무리나 궁중을 대상으로 사역하기도 하지만, 때로는 제자들에게만 가르침을 제한하는 것을 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배에 모시고 출발하는 것을 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배에 모시고 출발하자 무리들이 탄 것으로 보이는 다른 배가 예수님 일행을 따라 옵니다. 생생한 제자훈련을 위한 예수님의 계획이 시작됩니다.
예수님께서는 거짓 찬사를 받으나 부당한 고난을 받으나 요지부동으로 오직 하나님 아버지만 신뢰하셨습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중심을 잡지 못하고 흔들렸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큰 인기를 얻을 때는 그들도 덩달아서 출세한 것 마냥 좋아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시련의 파도가 밀려올 때면 처음부터 믿음이 없었던 사람들처럼 행동했습니다. 사단은 그렇게 돌밭에 떨어진 씨 같은 제자들을 노렸습니다.
(2) 광풍과 제자들의 구조 요청(37-38)
예수님께서는 무리를 떠나서 갈릴리 호수의 다른 곳으로 건너거자고 제안하십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바다를 건너가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와의 동행하는 것은 모든 것이 순탄할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갈릴리 바다 건너편으로 가는 도중에 갑자기 폭풍을 만났습니다. 그 바람은 배를 집어삼킬 만한 광풍이었습니다. 큰 파도가 배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주님과 함께하는 배에 ‘큰 광풍’이 일어나 물결이 배에 부딪치게 되었습니다. 제자들에게도 강한 바람, 사나운 파도, 요동하는 배, 차가운 물이 들어 왔습니다. ‘큰 광풍’이라는 표현은 이 풍랑이 일반적인 풍랑이기보다는 매우 것은 바람을 동반한 돌풍이었음을 시사 합니다. 실제로 갈릴리 호수는 갑작스럽고 사나운 돌풍으로 유명했습니다.
고대 근동에서 바다나 바람은 혼돈의 세계, 즉 사탄의 세력을 의미했습니다. 바다는 사탄이 사는 장소라고 믿기도 했습니다. 그 바다의 이름을 성경에서는 ‘리워야단’이나 ‘라합’이라고도 불렀습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홍해를 가르신 사건도 이 악한 세력을 이긴 사건이라고 해석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해석한다면, 사탄이 예수님과 그 제자들이 탄 배를 습격한 것입니다. 앞에서는 마음에도 없으면서도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요 거룩한 자라도 거짓으로 칭송하여 예수님의 길을 방해하더니(마가복음 3:11), 이번에는 자연의 혼돈 세력으로 위협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노린 것은 예수님만이 아니라 그 제자들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많은 비유를 통해 제자들을 가르치신 후에 갈릴리 호수의 다른 곳으로 떠나고자 말씀하셨는데, 마침 돌풍이 불었다고 하는 것은 이 돌풍이 우연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에 의해서 의도적으로 고안된 것 같은 분위기를 느끼게 합니다. 마치 구약에서 요나 선지자를 위해서 하나님께서 각각 바람과 큰 물고기와 박 넝쿨을 준비하신 것과 비슷합니다. 갈릴리 호수는 큰 호수가 아닙니다. 통상 한 두 시간 정도면 여행할 수 있을 정도입니다.
주님과의 동행이 우리에게 순탄하지만 않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도리어 세상이 그렇게도 미워하는 예수님과 같이 다니니 안 당해도 되는 부당한 고난까지 당할 수 있고, 희생까지 치르게 될 것입니다.
영적인 상황을 알 수 없었던 제자들은 불안과 공포에 사로잡혔습니다. ‘왜 주님이 계신 배인데 큰 광풍이 일어날 수 있을까?’라고 생각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더 황당한 것은 물결이 일어나 배가 침몰할 것 같을 때에도 주님은 주무시고 계셨다는 것입니다. 제자들로서는 절규하며 주님을 깨우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기막힌 노릇이었습니다. 주무시는 예수님을 원망하여 깨웠습니다. 그들에게는 예수님께서 자신들에게 무관심하고 아무런 대책도 없으신 것처럼 보였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을 알고 계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광풍이 이는 바다로 나가게 했겠습니까? 제자들에게 무엇인가를 가르치고 숨은 의도가 있었습니다. 이처럼 때로는 뜻하지 않는 일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인생의 삶에 원하지 않는 광풍으로 인해 감당하기 어려운 일들로 벼랑 끝에 서있는 느낌을 든 사람과 홍해와 같은 일들로 절망하고 있는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혹시 이러한 상황에 처해 있다고 할지라도 한 가지 잊지 말아야할 사실이 있습니다. 지금 당신이 처한 상황은 하나님께서 그곳까지 인도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숨어 있는 깊은 뜻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아서 반응해야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 인도하신 장소라고 한다면 지금보다 더 어렵다고 할지라도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제자훈련 하신 예수님(39-41)
어려운 환경에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 방황하는 제자들을 보여줍니다. 이러한 모습을 우리들에게 교훈하신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무능력해서 가만히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제자들의 원망과 불평에도 예수님께서 원하셨던 사역을 이루어 가십니다.
39예수께서 깨어 바람을 꾸짖으시며 바다더러 이르시되 잠잠하라 고요하라 하시니 바람이 그치고 아주 잔잔하여지더라 40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 하시니 41그들이 심히 두려워하여 서로 말하되 그가 누구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 하였더라(39-41)
위험 속에 빠진 제자들은 예수님께 강력하게 요구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요구를 거절하지 않으셨습니다. 곧 그들의 문제를 해결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일어나셔서 바다와 바람을 꾸짖으시고 이내 바람도 그치고 바다가 잠잠해졌습니다.
(1) 제자들을 꾸짖는 예수님(39-40)
제자들은 자신의 처지를 돌보지 않고 주무시는 주님을 향해 불평을 쏟아내는 제자들 때문에 주님은 잠에서 깨어나십니다. 잠에서 깨어나 행하신 예수님의 행위를 마가는 특징적으로 묘사해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먼저 바람을 꾸짖으셨습니다. 여기서 ‘꾸짖으셨다’라는 표현은 피조 세계의 주인이며 창조주이신 예수님의 권위를 암시합니다. 물론 마가복음은 요한복음 1장처럼 로고스이신 예수님께서는 첫 번째 창조에 직접적으로 관여하셨다고 노골적으로 말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피조 세계에 관여하고 다스리신다는 말만 직접적으로 하지 않을 뿐 실제로는 예수님께서는 피조 세계를 다스리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꾸짖자 바람이 그칩니다. 또한 바다를 향해서 잠잠하고 고요하라고 명령하십니다. 예수님의 명령에 바다마저 오용해졌습니다. 피조물은 주인의 명령에 즉시 반응하는 종과 같이 묘사됩니다. 이 두 표현은 1:25에 나오는 축사의 말과 비슷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마치 악한 세력을 상대하듯 바람과 바다를 꾸짖고 조용해지라고 명령하십니다. 실제로 대자연의 세계가 악한 세력으로 묘사되는 것은 제2성전기 유대교에서 종종 발견됩니다(제2에녹서 40:9;43:1-3; 제4에스라 6:41-42; 희년서 2:2 등).
지금 예수님께서 행하는 모든 행위들은 41절에서 제기될 ‘저가 누구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해답으로 기능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의 세계관 속에서 바다와 파도를 다스릴 수 있는 유일한 분은 창조주 하나님이심에 틀림없습니다(시편 89:8-9). 그런데 지금 제자들은 예수님의 모습 속에서 하나님에게서만 기대할 수 있는 모습을 보았기에 놀랐을 것입니다.
마가를 비롯한 복음서 저자들은 예수님의 모습 속에서 자신들의 백성을 향해서 돌아올 것이라고 예언하셨던 하나님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이러한 저자의 구체적인 상황 묘사는 ‘예수님은 도대체 누구신가?’라는 정체성에 대한 질문에 상징이며 회화적이지만 매우 노골적인 방식으로 대답하고 있습니다.
40절에서 이제 예수님의 관심은 제자들을 향합니다. 요동하던 제자들을 향해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40)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믿음 없는 제자들을 책망하셨습니다. 제자들은 광풍을 만나자 그들의 근본적인 믿음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들이 무서워하고 두려워한 것은 직전에 예수님께서 하나님 나라에 대해 가르쳐주셨는데도 여전히 믿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앞 단락에서 자신의 인격과 사역 안에 이미 임한 하나님의 나라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여전히 그 가르침에 합당한 반응을 보이는 데 실패하고 있습니다. 제자들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이겨내야 했지만, 작은 믿음마저 광풍 앞에서 포기하고 말아야 합니다. 바람과 파도를 다스리시는 예수님의 능력을 본 제자들은 놀라워하며, 예수님에 대한 경외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천지만물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강한 바람과 거친 파도 속에서도 편안히 주무셨으며, 또 광풍이 불 때 말씀으로 잔잔하게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감당하실 수 없는 상황은 없습니다. 혹시 감당키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께 나가서 하나님의 힘을 공급받길 바랍니다. 흥미롭게도 사도행전에서 바울은 로마로 가는 길에 광풍을 만났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들을 위로하는 위로자 역할을 담당합니다.
(2) 제자들의 반응(41)
광풍 속에서도 예수님께서 누구신지를 아는 것이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는 관건이 됩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꾸짖음에 바람과 바다마저 순종하는 것을 보고 놀랐습니다.
구약에서 바다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을 드러내는 표현이었습니다(욥기 38:8-11; 시편 65:5-8; 89:8-9 등). 이러한 구역 본문의 빛에서 이 본문이 갖는 함의는 혁명적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틀림없이 메시아지만 메시아를 넘어서는 정체성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는 선지자들을 통해서 약속하신 것처럼 자신의 백성에게 돌아올 것이라 말씀하셨던 하나님 자신이십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광풍의 시험을 허락하심으로써 제자들이 예수님 자신에 대해 다시 한 번 질문하게 하십니다. 그들이 두려워하는 대상은 광풍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이신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당신에게 허락된 문제들을 통해 무엇을 두려워하고 계십니까? 두려움의 대상은 환경이나 사람들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당신에게 허락하신 문제는 자신뿐 아니라 진정한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에 대한 지식과 관계를 돌아보게 합니다.
홍해처럼 가로막힌 장애물 앞에서 두려워하고 있는 당신에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홍해를 가르시며 마른 땅같이 걷게 하신 것처럼 당신도 걷게 하여 주실 것입니다. 당신에게 중요한 것은 믿음이 중요합니다. 어려운 상황을 당신의 경험을 통해 해결하려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해결이 되지 않을 때는 어떻게 하십니까? 원망하고 불평합니다. 그렇게 하지 마시고 하나님께 나오시길 바랍니다. 어려움을 만날 때 어려워하거나 두려워한다면 오늘 우리에게도 주님은 믿음이 없는 자라고 책망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선장으로 모시고 믿음의 항해를 떠납니다. 선장에 인도하심을 받으면 우리는 평화롭게 운항할 것입니다. 당신이 아무리 어렵더라도 들으시고 도와주시는 분입니다. 도움을 구할 때 예수님께서 당신을 도와주십니다. 어떤 상황 속에서도 보호해 주시는 예수님을 믿고 흔들리지 마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