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산대첩비는 이성계(李成桂),이두란(李豆蘭) 두 장군이 고려 우왕 6년(1380)에 지리산 근방 황산에서 왜적 아기발도(阿只拔都)군을 물리친 사실을 기념하기 위해 선조 10년(1577)에 세운 승전비(勝戰碑)로, 전라북도 남원시 운봉읍 화수리에 있었는데 왜정때 파괴되어 지금은 그 파비(破碑)와 새로 세운 비가 있다. 원래의 비는 김귀영(金貴榮)이 비문을 짓고 송인(宋寅)이 글씨를 쓰고 남응운(南應雲)이 각자(刻字)하였다.
황산대첩비(荒山大捷碑)에 발함 - 정약용/다산시문집14권
황산대첩비는, 곧 우리 강헌대왕(康獻大王. 태조 이성계의 시호)이 잠저(潛邸) 시절에 왜구(倭寇)를 정벌하러 나가 남원(南原)의 황산(荒山) 골짜기에서 왜장(倭將) 아기발도를 죽이고, 드디어 큰 승첩을 거두었으므로, 비(碑)를 세워 그 공적을 기록한 글이다.
옛날 내가 황산을 지나다가 이 비문(碑文)을 읽어 보고 또 아기발도와 치열하게 싸웠다는 곳을 보았는데, 대체로 깊고 큰 골짜기로서 숲이 우거진 험악한 지역이었다. 왜인(倭人)은 본디 보전(步戰)에 익숙하였고 우리는 보전에 약하였는데, 더구나 그런 산골짜기에서는 말을 달릴 수가 없는데도 승첩을 거두었으니, 그 승첩을 거둔 것은 신통한 무용(武勇)에서 온 것이지 단순한 인력(人力)으로 된 것은 아니다. 세상에서 ‘왜인들이 계곡에 피를 많이 흘려서 계곡의 돌빛이 지금까지도 빨갛게 물들었다.’고 전해오고 있으나, 자세히 살펴보니 이는 본래부터 붉은 돌이지 피로 물들어서 그렇게 된 것은 아니었다. 나는 일찍이,
“남도(南道)의 관방(關防)은 운봉(雲峯)이 으뜸이고 추풍령(秋風嶺)이 다음이다. 운봉을 잃으면 적(賊)이 호남(湖南)을 차지할 것이고, 추풍령을 잃으면 적이 호서(湖西)를 차지할 것이며, 호남과 호서를 다 잃으면 경기(京畿)가 쭈그러들 것이니, 이는 반드시 굳게 지켜야 할 관문(關門)인 것이다.”
고 논한 적이 있다. 그 당시 아기발도가 운봉을 넘어오지 않았더라면 성조(聖祖. 이 태조)께서 어찌 그와 같은 노고를 하였겠는가. 조령(鳥嶺)은 천연적인 요새지이니, 그대로 두는 것이 더욱 견고할 터인데, 무엇 때문에 성(城)을 만들었단 말인가?
황산대첩비를 읽고 나서 [讀荒山大捷碑] - 정약용/다산시문집2권
시냇가 팥배나무 가지에다 말을 매고 / 溪邊繫馬杜棠枝
단장 짚고 올라가 황산비를 읽으니 / 杖策上讀荒山碑
삼엄하고 강한 필치 호랑이가 숨죽이고 / 鐵畫巉巖伏虎豹
번쩍번쩍 현란한 빛 도깨비가 도망가네 / 璘霦煜霅遁魈魑
빛나는 위력 무섭기 어제와도 같은데 / 赫赫神威凜如昨
그 당시에 몸소 만난 자들이야 어쨌겠나 / 何況當年身値之
사마귀도 존경할 만 개구리도 대견하다 / 螳螂可敬蛙可式
아기발도 그 또한 기특한 남아로세 / 阿只拔都奇男兒
사람 나이 열다섯은 어리기 짝이 없어 / 人年十五眇小耳
파피리 불어대고 죽마 탈 시절인데 / 蔥笛堪吹竹堪騎
감히 규염 자부하고 길리가 되어서는 / 敢與虯髥作頡利
만리 바다 넘어 대장기를 휘둘렀네 / 越海萬里專旌麾
붉은 활로 백보에서 항아리 끈 떨구었고 / 彤弓百步落甖苴
나무 등지고 활 쏘아 안위를 다투었네 / 負樹發箭爭安危
요망한 별 떨어지자 뭇 혜성이 넘어져 / 妖星旣隕衆彗倒
시냇돌에 천년토록 검붉은 피 배어 있네 / 澗石千年殷血滋
정공은 무모하고 화상은 버릇없으니 / 鄭公無謀和尙媟
천심 인심 마땅히 뉘에게로 돌아갈꼬 / 天意人心當屬誰
이 한 일로 밤중 골짝 배 이미 자리 옮겨 / 此擧夜壑舟已徙
위화도 회군할 때 기다릴 것 없었다네 / 不待威化回軍時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