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중세 베트남에서의 돈오와 남종선(南宗禪) 2
글/ Cuong Tu Nyuyen/ 조오지 메이슨 대학 교수(버어지니아 주)
2003년 10월 16-17일에 세종 문화회관에서 백련 문화불교재단과 불교신문사 등 3개 단체 주최로 열린 성철스님 열반 10주기 추모 국제 학술회의 에서 쿵 교수가 발표한 글이다. 쿵 교수의 허락을 받아 본지 독자를 위해 2회에 걸쳐 소개한다.
慧의 거울
혜능은 定과 慧 사이에는 절대적으로 어떤 차이도 없다고 하는 <단경>에서의 그의 가르침으로 잘 알려져 있다.28) 삼매(sam?dhi)와 혜(praj??/j??na)를 동일시하는 것은 혜능의 특별한 철학적 창안이 아니라는 것에 주목하라. 실제로 그것은 애초부터 대승불교의 근본적 이념이다. 이제까지 학자들이 놓치고 있는 주요한 차이는 혜능이 상호 의존하는 양자의 위치를 바꾸어 놓았다는데 있는 듯 보인다. 이것을 자세히 설명해 보자. 비록 인도의 대승불교사상가들이 體(본질)와 用(작용)이라는 두개의 중국적인 해석적 개념을 사용하지 않았지만 인도적 관점에서 볼 때 혜가 정의 작용이라고 말하는 것은 정확하지 않다. 왜냐하면 불성 자체의 체는 혜이기 때문이다. 반면 정은 佛智의 "작용"이다. 인도 대승불교에서 무수한 종류의 선정이 있지만 그것들은 특정한 형태의 불지의 작용에 지나지 않는다.
트란 타이 통은 혜와 정의 동일성에 대한 혜능의 견해와 실제로 모순되지 않는다. 그리고 그가 혜 자체의 본성보다 이러한 작용적 맥락에서 "혜의 거울"을 논의한 것은 특별한 의도를 가졌기 때문이다. 이하에서 혜의 거울이라는 짧은 논문에 대해 참구해 보자.
혜는 정의 힘을 통해 일어난다. 마음이 집중되었을 때 혜의 거울은 현현하게 된다. 만일 마음이 산란하면 혜의 거울은 [작용하기를] 그친다. 그것은 밝게 비추기 전에 먼저 깨끗이 닦아야할 필요가 있는 청동거울과 같은 것이다. 만일 거울이 닦여져 있지 않다면 면지와 때가 있을 것이다. 그것이 먼지에 덮여있다면 어떻게 비추일 수 있는가?
그래서 혜는 정을 통해 현현하고 정은 혜로부터 나온다. 정혜는 상호 의존해 있다. 하나가 없다면 다른 하나도 불가능할 것이다. 만일 좌선하면서도 그의 마음이 집중되어 있지 않다면 혜의 거울은 결코 생겨나지 않을 것이다. 비록 일체 중생이 혜를 갖추고 있다고 해도 그들이 이미 혜를 갖추고 있고 더 이상 좌선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면서 좌선을 수습하지 않는다면, 비록 혜가 있다고 해도 그 거울과 같은 본질은 없는 것이다.
정을 획득하려고 노력할 때 하지만 마음이 집중되어 있지 않으면서 혜를 추구하는 것은 마치 바람과 파랑이 가라앉지 않았을 때 [강 속에서] 달의 영상을 찾는 것과 같다. 그러나 만일 마음이 집중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혜를 찾으면서 여전히 잘못된 견해를 품고 있다면 이것은 마치 바람과 파랑이 고요해지고 달의 영상이 명확해졌을 때 달을 잡으려고 하면서 물을 잡는 것과 같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하겠는가? 따라서 한 선사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것은 적정하지만 항시 비추이고, 비추이지만 항시 적정한 것이다." 또 "적정한 앎은 평등함이고, 알면서 적정한 것은 산란한 마음이다. 적정한 앎과 알면서 적정한 것, 이것은 약과 같은 것이다. 평등과 산란한 마음, 이것은 병과 같은 것이다. 우리의 신체가 병으로 고통받기에 우리는 치료를 필요로 한다. 몸이 나았다면 더 이상 치료도 필요없는 것이다. 정과 혜는 이를 깨달을 때에만 얻어진다."29)
트란 타이 통은 좌선과 정, 혜 사이의 관계에 대한 그의 작용적 이해를 보강하기 위해 "혜의 거울"30)이란 개념을 도입했다. 그는 선정이 혜를 일으킨다고 보지 않았다. 그는 단지 혜의 작용적 측면에 대해서만 말하고 있을 뿐이다. 모든 인간은 혜를 갖고 있지만 혜는 자발적으로 작용할 수 없고 또한 우연적으로 작용하는 것도 아니다. 정은 혜의 작용을 일으키는 방편이고 좌선은 정을 얻기 위한 수단이다. 트란 타이 통은 비록 중생이 본질적으로 혜를 갖추고 있다고 해도 만일 마음을 집중시키기 위해 좌선을 수행하지 않는다면, 혜의 작용은 일어나지 않을 것임을 깨닫고 있었다. 이 경우에 비록 혜를 갖추고 있다고 해도 작용하지 않는 혜일 뿐이다. 그럼에도 그는 마음이 집중되어 있을 때 혜는 거기에 있고 우리는 정과 다른 혜를 잘못 구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충분히 알고 있었다. 트란 타이 통이 의식적으로 혜능의 이해영역 안에 머물러 있고자 애썼다고 내가 믿는 이유도 바로 이러한 관련 때문이다. 따라서 혜, 정, 좌선 사이의 관계는 작용적인 관계이지 존재론적 관계는 아니다. 정은 혜를 일으키지 않고 다만 혜의 작용적 측면을 일으킬 뿐이다.
요약하면 트란 타이 통의 삼학은 혜능과 신수의 견해를 결합한 것이다. 그는 남종선과 북종선 사이에 어떤 갈등도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혜능의 정의는 본질적/존재론적 측면을 철저하게 다룬 것인 반면 신수의 해석은 3학의 현상적/작용적 측면을 강조한 것으로 본 듯이다:
트란 타이 통의 존재론적 모델 혜능의 상없는 모델
계: 진지함 (마음의 근거) 오류가 없음
정: 동요없음 (마음의 근거) 동요되지 않음
혜: 지를 일깨움 (마음의 근거) 무지하지 않음
트란 타이 통의 작용적 모델 신수의 모델
계: 수계 악을 범하지 않음
정: 좌선 자신의 마음의 청정
혜: 혜의 거울과 같은 본성을 현현 일체 선의 실천
트란 타이 통과 念佛
선과 염불의 결합은 송대에 유행했다. 트란 타이 통의 가르침에서 정토교의 염불을 일종의 명상으로 채택한 것은 당연히 송대 불교의 영향이었다. 나중에 알게 되겠지만 그에게 있어 염불은 삼매를 얻기 위한 두개의 중요한 수행법 가운데 하나이다. 다른 하나는 좌선이다. Khoa HuLuc에서 염불은 좌선 이전에 논의되고 있다. 이 사실만으로도 그가 염불수행을 매우 중요시했음을 알 수 있다.
혜능은 비록 그것에 많은 관심을 기울이지는 않았고 문자 그대로 서방정토에 태어난다는 믿음에 비판적이었지만 정토의 가르침에 절대적으로 반대한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심의 철학의 입장에서 혜능은 정토의 가르침이 높은 차원과 낮은 차원의 두 차원에서 인식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높은 차원에서 정토의 획득은 자신을 청정케 하는 수행 이상이 아니다.31) 왜냐하면 정토란 가까이 있는 것, 즉 우리의 마음 속에 있는 것, 또는 보다 정확히 말해 우리 자신의 마음이기 때문이다. 다만 낮은 차원에서 정토는 멀리 떨어져 있고 외부에 존재하는 것으로 보여 진다. 혜능은 말한다:
(정토는) 멀리 있지 않다. 붓다께서 멀다고 하신 것은 단지 낮은 근기의 사람을 위해서이다. 가까이 있다고 말하는 것은 뛰어난 성취를 한 자를 위해서이다.32)
혜능은 정토의 가르침을 부정한 것이 아니라 다만 그것을 자신의 철학의 견지에서 설했다. 트란 타이 통 역시 인간을 鈍根과 利根으로 분류하는 이론에 맞서 아미타불의 명호를 부르는 정토의 가르침을 설명하고 있다. 실제로 그는 인간을 상중하의 3종 유형으로 분류한다. 그렇지만 선정수행자로서 그는 아미타불의 명호를 외우라는 가르침을 기도수행이라기 보다는 선정 수행으로 보았다.
앞서 지적한대로 옌투 산에서 주했던 동안 그는 여러 대승경전의 가르침에 보다 많은 주의를 기울였다. 그들 중에서 <大方等大集經>33)이라고 불리는 대승경전모음집이 있다. 염불에 대한 그의 이론은 이 경전에 있는 가르침에 의해 영향 받았다. 이에 따르면 염불은 신구의의 3종 행위를 청정케 하는 수단이다. 요약하면 염불은 명상수행인 것이다. 트란 타이 통은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身口意의 3업을 제거하기 위해 바른 생각을 일으키려고 하는 오늘날 불교의 수행자들 또한 염불수행에 의지해야 한다. 어떤 의미에서 염불수행의 실천이 3업을 소멸하는가? 염불을 수행할 때 수행자는 몸을 곧게 세우고 경건하게 앉아서 악업을 짓지 않는다. 이것이 신업을 소멸하는 것이다. 입으로 진언을 외우고 나쁜 말을 하지 않는 것, 이것이 구업을 소멸하는 것이다. 마음으로 노력하고 악한 생각을 일으키지 않는 것, 이것이 의업을 소멸하는 것이다.34)
트란 타이 통에 따르면 세 가지 유형의 인간은 비록 그들이 능력면에서 서로 다르긴 하지만 동일한 결과를 얻는다. 그는 上과 中의 근기를 가진 중생의 견지에서 염불 수행을 다음과 같이 기술한다:
상근기의 사람들은 마음이 부처임을 깨닫는다. 이들에게는 더 이상의 수행이 필요 없다. [그들은 또한 분별적] 사념과 사념의 대상이 동일하며 [분별할] 근거가 없음을 안다. 사고와 사고대상은 원래 청정하다. 따라서 적정한 진여가 佛身이며, 불신은 자기 자신의 몸이고 어떤 분열도 없다. 모든 형상은 不二한 것으로 [그 참된 본질은] 적정하고 영원하다. 그것은 영원하지만 거기에는 어떤 분별적 인식도 없다. 그것은 살아있는 붓다이다. 中根機의 사람은 심리적으로 염불에 의존하여 결코 한시도 잊지 않고 부지런히 [부처님께] 그들의 마음을 집중한다. 그 다음에 그들의 마음은 완전히 선하게 된다. 선한 생각이 일어나고 악한 생각이 즉시 소멸된다. 악한 생각이 소멸되고 단지 선한 생각만이 남아있게 된다. 생각에 대해 명상하기 위해 생각을 이용할 때에 모든 생각은 소멸된다. 무념이 되었을 때 수행자는 진정한 법을 얻게 된다. 죽음의 순간에 그는 常樂我淨으로서의 열반의 고요함인 佛道를 획득한다.35)
그러나 트란 타이 통은 상근기의 사람의 관점에서 염불수행이 "말보다는 쉽지 않다"는 사실에 우리의 주의를 환기시킨다. 그는 또한 "오늘날" 사람들이 "無修而修"의 방법을 흉내내어 의지할 어떤 것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마침내 타락된다고 지적한다. 그는 "末法"이라는 개념을 알고 있던 듯이 보인다. 왜냐하면 그에 따르면 인간으로 태어남은 신구의 3업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하근기의 입장에서는 3업을 청정케 하기 위해서는 염불수행보다 더 나은 수단이 없다. 왜냐하면: 하근기의 사람들은 입으로 부지런히 붓다의 명호를 암송하는 한편 마음으로는 부처의 품성을 보고자하고 몸으로는 부처님나라에 환생하기를 빈다. 밤낮으로 그들은 게으름피지 않고 수행한다. 죽은 후에 선한 생각으로 인해 그들은 부처님나라에 태어나 제불에게 참된 법에 관한 설법을 듣게 될 것이다. 그들은 마침내 깨달음을 얻어 佛地를 성취할 것이다.36)
혜능은 상근기와 하근기를 위한 가르침을 구별했지만, 그들이 얻는 결과에 관해서는 뚜렷이 언급하지는 않은 듯하다. 그렇지만 트란 타이 통에게 있어서는 이들 세 방법은 비록 심원함의 정도는 각기 다르지만 획득된 결과는 동일하다. 그러나 염불수행은 낮은 차원에서 출발해야 한다. "그것은 마치 3층탑을 짓는 것과 같다. 맨 아래층부터 시작하지 않기는 불가능하다"37)고 그는 말한다.
염불과 無念
부처님을 명상함에 대한 트란 타이 통의 가르침은 부분적으로 중국 선불교에서의 無念의 가르침에 대한 그의 이해의 결과이다. 이것은 아마 가장 독특한 염불의 해석일 것이다. 그는 염불의 진정한 의미는 "무념"의 가르침을 통해 이해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신수와 마찬지로 혜능에 있어서도 무념은 끊임없는 사념의 고리를 끊는 것을 의미한다. 한순간의 사념에 대한 집착은 끝없이 이어지는 사념들에 대한 집착을 낳고 그 결과 시간과 형상 또는 여러 의식상태들에 대한 집착을 낳는다. 환언하면 무념은 자성을 보는 것이다.38)
트란 타이 통은 이것을 조금 수정한다. 그는 생을 (마음에서 일어나는) 사념들의 끊임없는 연쇄로 본다. 만일 그것이 선한 생각이라면 그것에 대해 좋은 업보가 있고, 악한 생각이라면 그에 상응하는 나쁜 업보가 있다. 그것은 마치 그 앞에 나타나는 것은 반영하는 거울과 같은 것이다. 이런 끝없는 사념의 연쇄를 끊는 것은 윤회의 사슬을 끊는 것이다. 그는 永嘉를 인용해서 "무념인 사람은 재생하지 않는다"39)고 말한다.
그는 "무념"을 염불의 가르침에 적극적으로 적용한다. 순간순간의 모든 사념은 부처님에 대한 생각(염불)으로 바뀌어야 한다. 그래서 그것은 부처님에 대한 念이 아니라 念 자체가 부처님인 念이다. 염불수행은 따라서 자신의 전존재를 부처님으로 변화시킴을 의미한다. 환언하자면 "念"과 "無念"(즉, 염불)의 차이는 다음과 같이 설명될 수 있다. "念"은 삿된 실체적 자아관에 기초한 유한한 실재를 구성하는 과정을 의미한다. 따라서 그것은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우리를 윤회의 세계에 묶어둔다. 그런 구성작용(念)을 끊을 때에만, 즉 "무념"으로 되었을 때에만 수행자는 진정으로 자아가 존재한다는 그릇된 관점과 자기중심적 태도를 극복한 존재상태를 얻을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무념"은 부처의 존재양식이다.
"무념"과 "염불"을 동일시하는 것은 그가 "무념"의 가르침의 소극적 측면(자기중심적 사념의 단절)과 적극적 측면(자기중심적 사념을 부처님에 대한 생각(불념)으로 바꿈)을 모두 알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참회
트란 타이 통의 불교에서 참회는 가장 핵심적 수행이다. 실제로 참회는 그보다 이전의 동아시아 불교의 수행에서 빠트릴 수 없는 한 부분이었고 그것은 현금의 동아시아 불교와 선 등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혜능도 참회를 다루면서 이를 "無相懺悔"라고 불렀다. 혜능의 선에서 참회는 다섯 가지 "無相懺悔"의 일부이다. 이 계는 일군의 사람들을 불교에 입문시키기 위해 그들에게 준 것이다. 참회는 트란 타이 통에 있어서와는 달리 혜능의 선수행에서 두드러진 위치를 차지하지는 못한다. 혜능은 그의 "無相懺悔"에 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좋은 벗들이여, 懺悔란 무엇인가? "용서를 구하는 것"(讖)은 너의 일생동안 어떤 [나쁜] 짓도 하지 않는 것이다. "후회"(悔)는 네가 지금까지 저질러 왔던 악행과 잘못을 알고 그것들을 결코 뇌리에서 떠나지 않게 하는 것이다. 제불 앞에서 말로 고백하는 것은 소용없다. 나의 가르침에서는 영원히 어떠한 [나쁜] 짓에도 끼지 않는 것을 참회라고 한다.40)
하지만 트란 타이 통의 Khoa HuLuc에서는 참회수행이 여러 곳에서 강조되고 있고, 두 개의 "서문"과 하권 전체의 중심주제이다. 참회의 철학적 배경을 설명하고 있는 <여섯 시기의 참회의례문에 대한 서문>의 해당부분을 읽어보자.
물과 뭍에서 운송 수단은 배와 수레이다. 몸과 마음의 더러움을 씻는 수단은 참회이다. 만일 네가 참회에 의지하지 않고 몸과 마음을 정화시키려 한다면 배와 수레를 타지 않고 여행하려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따라서 너는 참회의 공덕이 얼마나 큰지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대방등대집경>은 설한다: "백년동안 더럽혀진 옷이 하루아침에 세탁되어 깨끗하게 되듯이 수십만 번 동안 윤회하면서 축적된 불선한 업도 부처님의 힘에 근거한 올바른 명상을 통해 어느 날 한 시에 소멸할 수 있는 것이다."
더구나 중생들에게 단지 하나의 방편만을 보여줌으로서 깨달음의 본성이 원래 청정하고 빛나며 먼지 한점 없는 허공처럼 청정하며 염오된 영역이 존재하게 되는 것은 바로 환영적인 고통이 생겨나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하기는 힘들다. 그래서 커다란 혜와 결단으로 우리의 세존께서는 방편을 열어 길에 따라 행선지를 보이시고 병에 따라 약을 처방하신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중생들의 허망한 번뇌가 顚倒로부터 일어난다고 하는 것을 안다.. 그래서 그는 중생들로 하여금 그들 본래의 상태를 다시 얻기 위해서는 몸과 마음을 정화시켜주는 참회에 의지해서 끊임없이 노력하도록 당부하신 것이다.
바람이 잠잠해지면 파도는 차츰 누그러들고 더러운 것이 제거되면 거울은 맑아질 것이다. 왜 그런가? 이전 순간의 악행이란 달을 가리고 잇던 구름과 같고, 다음 순간에 생겨나는 선행이란 어둠을 몰아내는 횃불과 같기 때문이다. 아! 그렇다면 참회의 공덕은 참으로 크지 않겠는가?
나는 天의 종성의 책임을 맡고 가장 고귀한 지위를 누리고 있다. 범부들의 생업은 어렵고 국사는 복잡하다. 외부로부터는 사치가 유혹하고 내부에서는 욕망의 벌레가 갉아먹고 있다. 나의 입은 맛에 싫증이 나고 나의 몸은 금은보화에 짓눌려 있다. 눈과 귀는 색과 소리에 시달리고 있고, 나는 커다란 탑과 누각 속에 갇혀 있다. 게다가 세상은 덧 없고 인간의 규범은 타락해 간다. 법을 배우는 자들은 어리석고 그들의 선근은 미약하다. 낮에 그들의 감관은 대상에 따라 반응하고 업의 그물 속에 싸여 있다. 밤에 그들은 잠에 덮여있고 게으름에 속박되어 있다. 그들이 밤낮으로 접하는 모든 조건들은 재해를 낳고 재앙을 불러들이는 잘못된 것들이다.
나는 줄곧 이것들에 대해 깊이 생각했고 침식을 잊을 정도로 슬픔과 동정으로 고통받고 있다. 내가 궁정의 일에서 벗어났을 때 나는 불전과 철학적 논서들 그리고 의례에 관한 논문들을 두루 섭렵하고 백성을 가르치기 위해 자신과 타인을 이롭게 하는 것에 관한 가르침을 골랐다. 나는 탐구하고 명상하고 생각했다. 모든 업은 여섯 감각기관에 의해 만들어진다. 이것이 왜 석가모니 붓다께서 깨달음을 얻으시기 전에 설산에 들어가 6년 동안 여섯 감각기관을 청정케 하기 위해 고행을 하신 이유이다. 낮의 6 기간에 대응하는 여섯 감각기관과 더불어 각 기간은 하나의 근[에 의해 지어진 죄를] 참회하는데 바쳐진다. ...41)
트란 타이 통의 참회 개념의 철학적 배경은 여래장 문헌의 가르침이다. 그의 저술 중의 하나가 <금강삼매경>42)에 대한 주석이다. 이 경은 몇몇 여래장의 가르침을 담고 있다. 그가 여래장계열의 다른 문헌들도 공부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금강삼매경>은 그의 체계에서 참회관의 형성에 결정적인 것이 되었던 여래장 문헌의 몇 가지 가르침을 담고 있다.
그는 <금강삼매경>에서 번뇌를 제거하는 즉 죄를 정화하는 방편을 포함해 그의 선을 표현할 수 있는 보다 적극적인 언어뿐만 아니라 그가 필요로 했던 절충적 가르침의 모델을 발견했다. 이것이 바로 참회로서, 이것은 아마 어떤 다른 여래장계 문헌도 언급하지 않은 가장 실천적이고 쉽게 적용될 수 있는 수단일 것이다.
모든 중생이 예외없이 완전한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고 믿는 트란 타이 통은 <금강삼매경>에 산재되어 나타나는 一乘(ekay?na)의 가르침을 발견했다. 일승이란 성문승과 연각승이라는 다른 두 수레를 포함하는 대승(菩薩乘)이다,43) 이 가르침은 佛地라는 궁극적 목표를 얻고자 하는 사람들이 쉽게 다가갈 수 있는 것이다.44) 중생의 죄많음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말법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지고 있지만 동시에 모든 중생이 완전한 깨달음을 얻을 동등한 기회를 갖고 있음을 굳게 믿는 트란 타이 통은 <금강삼매경>에서 몇 가지 답을 발견한다. 이 경의 제2장에 있는 한 단락은 "해탈보살"과 붓다의 대화인데 여기서 보살은 말법시대를 우려하여 그것에 의해 일체 중생이 해탈을 얻을 수 있는 결정적 一味의 진리를 설해주도록 붓다에게 청한다.45) 그러자 붓다는 마음이 본래 공하다는 교설을 설하셨다. 붓다의 설법은 다음과 같다:
마음이 공하다고 깨달을 때 마음은 그의 망분별작용을 그친다. 망분별로부터 벗어난 사람은 불생의 원리를 알게 된다. 불생의 마음을 깨닫는 것은 망분별하지 않는 원리를 깨닫느냐에 달려있다 (若得空心 心不幻化 無幻無化 卽得無生 無生之心 在於無化)46)
해탈보살은 마음이 원래 공하고 적정하다면 그것은 色과 속성들을 초월해 있을 것인데, 어떤 수행에 의해 중생은 이러한 마음의 본성을 깨달을 수 있는가 하고 계속해서 질문한다.47) 부처님은 나아가서 마음의 공하고 적정한 성격을 깨닫는 길은 마음의 모든 망분별 작용을 비우는 것이라고 가르친다.48) 이것은 또한 相없는 수행이라고 불려진다. 아마 트란 타이 통에게 있어 이것은 수행의 정의이지 단지 이 경의 마지막 단락에서 주어진 규정은 아니다. 이 규정은 참회수행이다. 경의 끝부분에 붓다와 아난다의 대화가 나오는데 여기서 붓다는 "만일 본래의 마음을 잃는다면 참회해야 한다"49)고 아난다에게 가르치신다.
혜능이 참회를 단지 일군의 신자집단들을 불교에 입문시킬 경우에 그들에게 수여된 5종의 "상없는 계"의 하나일 뿐으로 보았던 것에 비해 트란 타이 통은 참회가 불교의 수행도에 있어 결정적인 정신적 무상명령으로 보았다. 이것은 특히 인간의 심리-물리적 기질과 여래장계 문헌에서 자성청정심이나 覺의 성질이라고 불리는 인간의 진정한 본성에 대한 그것의 관계에 기인한다. 만일 본질적으로 각의 성질을 지닌 마음이 본성상 순수하고 빛을 발하는 성질이 있다면 왜 인간은 자발적으로 이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가? 트란 타이 통은 자성청정심을 덮고 있는 번뇌가 되는 여섯 감각기관에 의해 만들어진 악업 --그 자신의 용어를 빌리면 '罪' -- 때문이라고 한다. 참회는 이러한 이 번뇌들을 청정케 하는 수단인 것이다.
하지만 트란 타이 통은 번뇌란 환영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는 여래장의 교설을 잘 이해하고 있었다. 가장 진정한 의미의 참회는 혜능이 신랄하게 비난했던 "相"에 여전히 집착하는 그런 부류의 수행이 아니다. 단지 각의 마음만이 궁극적으로 실재하며 번뇌는 실재하지 않기 때문에 참회는 끊임없이 6근 (또는 의식)을 청정케 하고 그것들을 각의 마음 또는 <금강삼매경>에 나오고 트란 타이 통 자신도 사용했던 용어인 無垢識(amala-vij??na)으로 전환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이맥락에서 "죄"는자성청정심을보지못하는것또는 "본심을잃는것"을뜻한다. 트란타이통에게있어본심 (또는불심)을잃을때사람은 6근이나 6식에의한존재인저차원의존재로떨어진다. 그것들은차별하고우리로하여금비실재하는외적대상에집착하도록하는수단이다. 이것이 <금강삼매경>이마음의망분별작용이라고부르는것으로우리가비워야할것이다. 보다긍정적인표현을써서이경은이과정을 "유정식을 순수의식(아말라식)으로 변화시키는 것"이라 부른다.
흥미롭게도 이런 종류의 교설은 북종선의 조사인 신수의 <觀心論>에서도 발견된다. 이 논에 따르면 제악의 근원은 바로 3毒(탐, 진, 치)과 여섯 감각기관이다.50) <관심론>에 따르면 행자는 하루의 6시기 동안에 법을 수행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는 모든 시간 내내 6근의 활동을 붓다의 활동으로 변화시켜야 하는 것을 의미한다. 나는 트란 타이 통이 <大乘方廣摠持經>도 연구했을 수 있다고 믿는다. 몇 가지 불교자료에 따르면 Vinitaruci가 Chiao-chou에서 이 경을 번역했고 그는 베트남 불교전통에 의해 베트남 최초의 선불교의 창시자로 간주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51) 따라서 이 경전은 베트남 불교도들에게 많은 주목을 받았음에 틀림없다. 그리고 이 경의 마지막 부분에서도 6근을 청정케 하는 수단을 가르쳤다.52)
요약하면 트란 타이 통의 참회 개념은 위에서 지적한 가르침이 근거한다. 그에 따르면 (1) 사람의 각의 본성은 순수하고 완전하며 먼지 한 점 없는 허공처럼 빛난다. (2) 자성청정심을 덮고 있는 우연적 번뇌 때문에 번뇌의 세계와 주객의 분열 및 붓다와 중생 사이에 실제로는 없는 차별이 나타나게 되었다. (3) 모든 악업은 6근에 의해 만들어졌다. 붓다는 깨달음을 얻기 전에 6근을 청정케 하기 위해 설산으로 가서 6년 동안 고행했다.53) (4) 붓다는 참회를 죄를 정화시키는 방편으로서 가르친다.
상기의 가르침에 근거해서 트란 타이 통은 6시기의 참회의례서를 지었다. 각각의 참회는 각각의 특정한 근을 정화시키는 것이다. 하지만 참회는 중생들의 근기에 맞게 그들을 가르치기 위해 붓다에 의해 고안된 여러 구제수단 중의 하나일 뿐이다.54) 원래 진여상태에서 法性은 모든 망분별로부터 벗어나 있다. 인간이 타고난 본성은 본래 번뇌를 여윈 것이다. 만일 이를 깨닫는다면 참회란 단지 모습 없는 佛身의 성격에 존경을 표하는 방식의 하나일 뿐이다.55)
결론
禪이 깨달음에의 최상도이며 혜능이 선불교의 정통인 남종선의 제6대 조사임을 확신하였던56) 트란 타이 통은 혜능의 프로그램의 기초 위에서 수행과 깨달음에 대한 그의 견해를 해석하려고 노력했다. 트란 타이 통이 혜능을 그의 정신적 스승으로서 전적으로 받아들이기로 하고 그 자신의 체계를 혜능의 <육조단경>을 배경으로 하여 세웠던 것은 이해하기 어렵지 않는 사실이다. 게다가 돈오론의 선언서인 혜능의 <육조단경>은 삼학이라는 포괄적 틀 안에서 불교교의를 설명하려는 매우 드문 중국 선문헌이다.
마지막으로 나는 지금 까지 살펴본 것을 토대로 한편으로 트란 타이 통이 혜능의 돈오불성을 받아들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불교수행도의 다른 요소에 기초한 점수의 필요성을 느꼈다고 하는 것을 결론적 소견으로 제시한다. 요약하면 그가 많은 동아시아 선불교도들이 공유했던 頓悟漸修라고 하는 선의 가르침을 옹호했다고 말하는 것은 부정확한 것은 아니다.
주—
28) Yampolsky, The Platform Sutra, p. 135.
29) Khoa HuLuc 21b8-22b6.
30) 불교에서 혜의 은유적 표현으로서 거울을 사용한 것에 관해 Paul Demieville, "Le mirroir spirituel". Choix d'tudes bouddhiques 1929-1970 (Leiden: E.J.Brill 1973), 131-156 참조; Alex Wayman, "The Mirror as
a Pan-Buddhist Metaphor-Simile", History of Religion 13 (1974), 251-269.
31) Yampolsky, The Platform Sutra, p. 159.
32) 앞의책
33) 대정 13. 397.
34) Khoa HuLuc 19a2-6.
35) 앞의 책 19a6-19b5.
36) 앞의 책 19b5-8.
37) 앞의 책 20B3-4.
38) Khoa HuLuc 18b7-19a1. D.T. Suzuki, The Zen Doctrine of No Mind (New York, 1973), 28-29 참조.
39) 永嘉 證道歌 395a. 트란 타이 통은 이 말을 Suzuki나 Charles Luk 과는 다른 방식으로 이해하고 있다고 보인다. 스즈키는 다음과 같이 번역한다: "어떤 사람이 무념을 얻었고 어떤 사람이 재생하지 않는다고 일컬
어지는가?" (Manual of Chan Buddhism, 107 참조). Luk의 번역은 아래와 같다: "사념와 재생으로부터 벗어난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Chan and Zen Teachings, London 1962, p. 117 참조). 트란 타이 통은 이 문
장의 뜻을 다음과 같이 새기고 있다: "망념짓기에서 벗어난 자유로운 사람은 재생을 벗어난다." Suzuki와 Luk은 자구대로 번역한 반면 트란 타이 통은 명백히 <금강삼매경>에 의지해서 해석한다.
40) Yampolsky, The Platform Sutra, p. 144-145.
41) Khoa HuLuc 29a1-31a1.
42) 앞에서 지적했듯이 그의 저술은 산실되었지만 그 서문은 Khoa HuLuc 27a1-29a7에 발견된다. 오늘날 우리는 <금강삼매경>이 645년에서 665년 사이에 한국에서 찬술된 僞經임을 알고 있다 (John R. McRae, The
Northern School, 118; Robert Buswell, The Formation of Chan Ideologie 참조). 물론 이것은 이 경에 대한 트란 타이 통의 관점은 아니다.
43) <금강삼매경> 대정 9: 367b4-17. 이것은 <승만경> 등의 여래장계 문헌에서 발견되는 가르침이다, (Takasaki, Ratnagotravibhaga, 38 참조)
44) <금강삼매경> 366b17-18.
45) <금강삼매경> 366b6-10. 비록붓다의가르침이다양하지만그것들은모두해탈이라는동일한맛을갖고있다는관념은이미팔리경전에나온다. 예를들어 Anguttara Nikaya에서붓다는설하신다. "Paharada여
대양이 단지 짠 맛이라는 하나의 맛을 가지듯이 법과 율도 해탈의 맛이라는 단지 하나의 맛을 가진다." (Seyyatha pi Paharada mahasamuddo ekaraso lonaraso, evam eva kho Paharada ayam dhammavinayo
ekaraso vimuttiraso). The Anguttara Nikaya, ed. E. hardy (PTS, London 1899), p. 203.
46) <금강삼매경> 366b17-18.
47) <금강삼매경> 366b18-19.
48) <금강삼매경> 366b20-22.
49) <금강삼매경> 374b19-25.
50) <관심론> 대정 85: 1270a10-23.
51) 대정 9: 379a15-383b10을 볼 것. 毘尼多流支(Vinitaruci)의 전기에 대해서는 DNTU 38b6-39b9를 참조. 오늘날 우리는 이 전통적 관점을 더 이상 믿지 않을 많은 근거를 갖고 있지만, 이 몇 세기 동안 베트남 불교
도들은 여전히 그렇게 믿었다.
52) 붓다는 문수에게 말한다: 이전에 7년 동안 나는 하루의 6시기를 신구의업에 의해 축적된 중죄를 참회하면서 보냈다. 그 이후 나는 청정함을 얻었다. (대정 9: 382c29-383a2).
53) Khoa HuLuc 30b7-8.
54) 앞의 책 30A1-3.
55) 앞의책
56) 이 점에서 트란 타이 통은 송대의 선사들과 다르지 않다.
2004년 1월호.
|
|
